내 이름은 빨강

문화혁명/80년대 2007. 6. 9. 02:33

77학번, 78학번. 문혁 종결후 재실시된 대입학력고사(高考) 첫 세대.
그들은 젊은 날 혁명의 물길에 휩쓸여, 그리고 이어서 지식청년으로 농촌에서, 공장에서 노동을 직접 경험하느라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이다.

한창 기본기를 닦아야 할 나이에 세상을 배운 세대,
그래서 배움에 대한 열기는 뜨거웠던 세대.
그런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야 할까,
80년대를 거친 후 각계에서 현재 중국을 움직이는 주역이 된 것 또한 이들 세대이다.

눈여겨 보고 있던 이 세대에 대한 특집이 <남방 인물주간> 최근호에 소개되었다.
꼼꼼히 번역하려 보니 시간도 많이 들고 이것저것 찾아봐야겠다.

다음 글부터는 시간과 정력을 아껴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만 정리하는 식으로 소개해볼까 한다.

 

대입고사(高考) 재실시 30년, 상식을 회복한 이후


인물주간(人物週刊) 2007년6월1일 제13기 總第86期


1977년 8월 6일, 베이징. 전국과학교육공작 회의가 진행되는 사흘 내내 덩샤오핑은 듣고만 있었다. 

  이 회의에 참가한 33인의 과학자와 학자 중 가장 젊은 52세의 무한대학 부교수 자취안싱(査全性)은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몇 해 동안 수업 한 번 못해본 것이다. 용기를 내어 주석을 향해 7년간 계속되어 온 “추천입학” 모집방식의 4대 폐단을 지적한 뒤 대입고사(高考)의 재실시를 건의했다. 말이 떨어지자 수학자 우원쥔(吳文俊), 광학자 왕다헝(王大珩), 화학자 왕여우(王猷) 등이 찬성하는 뜻을 표하며 대입고사 재실시의 중요성에 대해 한층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하였다.


  심사숙고하며 듣기만 하던 덩샤오핑은 그 즉시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대입고사는 반드시 재실시하도록 하자!” 두 달 후 10년 동안 닫아 둔 대입고사의 문의 활짝 열려 전국 570만의 학생이 고사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이 해의 대입고사가 가지는 의미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중국 전체로 봤을 때도 이 대입고사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이를 기점으로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무질서한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이성이 통하는 사회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때 문에 상식을 회복한 지 30년, 이 30년 동안 국가의 운명과 대학생들의 운명은 서로 연결되기도 했고, 서로 중첩되기도 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대학생의 운명을 해독함으로써 국가 전체가 밟아온 궤적을 이해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0 여 년 동안 대입고사는 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자젠잉(査建英), 거자오광(葛兆光), 양잉밍(楊迎明), 팡톄(方鐵) 형제 등 이 대입고사를 통해 77학번, 78학번이 된 하향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청(知靑)들이 있는가 하면, 급변하는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한 80년대 후반학번 IT계의 엘리트 다이즈캉(戴志康) 같은 사람도 있다. 특수한 시대가 77, 78학번 대학생들에게 역사적인 고난을 가져다주었지만 후배들이 누리기 어려운 혜택 또한 누릴 수 있게 해줬다. 그들 중 상당수가 논밭을 갈다가 오늘날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지위에 올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터져나가는 인재시장에서 대부분의 졸업생이 2000원(30만원 이하)이라는 최저 봉급을 받기 위해 치열히 경쟁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 입 제도는 부단히 개혁되고 대학은 모집인원을 확장하며 학비도 올랐다. 그러나 최근 입시제도에 기대보다는 비난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매체에서는 계속하여 대학생들에게 취업 시기를 조정할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계획경제시대와 다리 직장을 분배받지 못하게 된 대학생들은 완전히 다른 심정을 내보인다. 일부는 분노하고, 원망하며, 상실감에 빠져 지내고, 다른 일부는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하며 자기가 택한 길을 향해 나아간다.


  오 늘날의 학생들도 “지식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가? 실용주의, 기능주의가 가득 찬 오늘날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수한 개인의 운명이 쌓여 국가의 운명이 되고, 국가의 운명이 또다시 개인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피해갈 수는 없다.

 

이글루스에서 옮김 by luna | 2007/06/09 02:33 | 八十年代 |

'문화혁명 > 80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收租院 관련  (0) 2008.02.12
중국에서 불고 있는 80년대 회고熱  (0) 2007.04.06
<80년대: 인터뷰> 저자 인터뷰 발췌  (0) 2007.04.06
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80년대 2007. 4. 6. 01:32

최근 중국에서는 80년대를 돌아보는 기획 및 서적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물론 대부분은 하나가 뜨니까 덩달아 시시콜콜한 온갖 내용들만 대충 정리해서 찍어낸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80년대"라는 키워드가 90년대 이후의 삶과는 다르면서 그것을 여전히 규정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문혁"이 신체에 각인한 기억을 어떤 식으로 정리하고 넘어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겠죠. 그것을 80년대는 "낭만"적인 방식으로 분출했다면, 90년대 이후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보자로 넘어가 버린..

지 금 사회 각계각층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이들이 바로 문혁 시기 청소년(홍위병 포함)이었고, 문혁 끝난 직후에 대학을 뒤늦게 진학한 세대들이죠. 제가 눈여겨 보고 있는 세대입니다. 대입제도 부활 직후 학번인 78학번. 유명한 사람만 대도, 장예모, 천카이거, 왕휘, 진평원 등 부지기수입니다.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구요. 사실 대부분은 정치적 역량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의외로 알짜배기가 많다는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제 결론은 중고등학교 때 공부 안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다가, 머리 굳어도 철들어서 공부 열심히 하면 된다 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구요~ ^^;;)

이 들을 기준으로 한 반세대 정도 위 사람들, 가장 왕성하게 자기 사유의 자양분을 얻을 청춘기(홍위병이 되긴 늦은 나이)를 문혁 때 보냈고, 문혁 종결 후 복권되어 눈치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사유구조도 흥미롭고요, 이들이 죽기 전에 제대로 정리해 둬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 보다 반세대 정도 아래 사람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죠. 문혁 시작 즈음에 태어나 문혁이 끝날 때쯤 학교를 다닌 이들입니다. 지금 학계, 정치계,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한창 배울 때 혁명하느라 바빴고, 시골이나 공장에서 노동하면서 10대 후반, 20대 초반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절대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들이 아니죠. 그 사상성이 노력과 결합하여 제대로 실력을 갖춘 사람도 분명 있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대부분은 "정치적 수완"으로 먹고 사는 사람인 듯합니다. 생명력이 질기긴 하겠지만 곧 도태될 가능성도 많죠. 최근 중국에서 40대 간부가 많아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즉 윗세대에 비해 훨씬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으로 무장되어 있으니까요. 학계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집니다. 80년대에 고교, 대학교에서 정상적으로 교육받은 세대들이 지금 서서히 주목받고 있고, 곧 실력으로 전체 분위기를 장악할 거구요. 90년대 이후 세대처럼 질문하지 않고 받아적기만 하는 '학생'들과도 다른 면이 있는 듯합니다.

암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제가 눈여겨 보고 있는 책은 <80년대: 인터뷰집>이라는 책입니다.

八十年代访谈录

        * 원제: <八十年代访谈录>

作者:       查建英
出版时间: 2006年5月
出版社:    生活·读书·新知三联书店


아래는 제가 정리한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

  2006년 5월 출간된 후 의외의 호응을 얻어 현재 4판을 찍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주간지 <新週刊>이 선정한 2006년 “올해의 책”에 꼽히기도 했다.

  80 년대 중국은 두 가지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0년의 동란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후, 개혁개방의 물결이 휩쓸어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대하게 되었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그와 함께 가치관과 사유방식에 있어 거대한 변화를 맞이했다는 점이 다른 하나이다.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들은 신체에 각인된 문혁의 이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 음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방식과 문화를 재건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다. 우리로 치면 386세대라고 할 수 있을 이들이 80년대라는 시기를 어떻게 보내왔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어떠한 변화의 시도를 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자젠잉은 80년대를 “당대중국의 낭만시대”라고 정의한다. 90년대 이후가 경제적 이익이 유일한 목표인 시대라면 80년대는 이상과 정신적 격정이 들끓던 시대였다. 책의 뒷표지에는 80년대와 90년대를 각각 특징짓는 키워드를 실어놓고 있다.

* 80년대: 격 정(激情), 빈곤(贫乏), 열정(热誠), 반항(反叛), 낭만(浪漫), 이상주의(理想主義), 지식(知识), 단절(断层), 촌스러움(土), 멍청함(傻), 허풍(牛), 경박함(肤浅), 발광(疯狂), 역사(历史), 문화(文化), 순진(天真), 단순(简单), 사막(沙漠), 계몽(启蒙), 진리(真理), 팽창(膨胀), 사상(思想), 권력(权力), 상식(常识), 사명감(使命感), 집체(集体), 사회주의(社会主义), 엘리트(精英), 인문(人文), 배고픔(饥渴), 화끈(火辣辣), 우정(友情), 논쟁(争论), 지식청년(知青), 뒤늦은 청춘(迟到的青春)

* 90년대:
현 실(现实), 이익(利益), 돈(金钱), 시장(市场), 정보(信息), 새로운 공간(新空间), 솔직(明白), 처세(世故), 유행(时尚), 개인(個人), 권력(权力), 체제(體制), 성형수술(整容), 조정(调整), 총명(精明), 불안(焦虑), 상업(商业), 소란스러움(喧嚣), 대중(大众), 성난 청년(愤青), 자본주의(资本主义), 신체(身体), 서재(书斋), 학술(学术), 경제(经济), 주변(边缘), 상실(失落), 접속(接轨), 국제(国际), 다원(多元), 가능성(可能性)

  이 책에 대한 가장 많은 비판은 “평민의식”이나 “하층민에 대한 관심”이 결핍되어 있는 “엘리트주의적인 담론”이라는 것이다. 이는 문학, 영화, 음악 등 문화계에서 어느 정도 명망을 얻은 인물들이 대상이 된 인터뷰이들의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과연 중국의 80년대에 대한 기억을 대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80년대 전체에 대한 거대서사를 기획할 의도는 없었으며, 상이한 활동영역과 기질을 지닌 사람들 개인의 제한된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했다고 항변한다. 또한 인터뷰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각 영역의 주류 엘리트인 것은 아니며 대부분 삐딱선을 타고 있는 다른 종류의 엘리트임을 주의 깊게 살펴봐 줄 것을 주문한다.

  < 저 낮은 중국>(퍼슨웹, 2004)이 하층민의 구체적인 삶을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것이라면, 이 책은 비록 비주류이긴 하지만 중국의 문화적 엘리트가 그들의 이상이 좌절되기 전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각기 다른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

중국은 참 좋은 나라입니다.
이미 책으로 출간된 책임에도, 전문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지요.
중국어가 가능하신 분은 아래 사이트에 가면 전체 인터뷰를 볼 수 있습니다.

http://lz.book.sohu.com/serialize.php?id=4838

또 다른 사이트는, 인터뷰와 함께 다른 사람들의 글도 볼 수 있어요.

http://www.chinese-thought.org/zttg/0486_bashiniandai/index.htm

이글루스에서 by luna | 2007/04/06 01:32 | 八十年代 |
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80년대 2007. 4. 6. 01:30

이 글은  <80년대: 인터뷰>의 저자 자젠잉(査建英)와 <新週刊>의 인터뷰 중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

 

<신주간> : 지난 세기 80년대에 청춘기를 보낸 후 오늘 <80년대: 인터뷰집>라는 인터뷰집을 내놓았는데, 당신에게 80년대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젠잉: 한 마디로 대답하기 곤란하군요. 예를 들어 책 뒷표지에 80년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를 달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책을 편찬하면서 인터뷰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오던 말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열정(热忱), 빈곤(贫乏), 반항(反叛), 낭만(浪漫), 이상(理想), 지식(知识), 단절(断层), 촌스러움(土), 멍청함(傻), 허풍(牛), 경박함(肤浅) 같은 것들이죠. 이 단어들 모두를 한곳에 모아보면 80년대의 기질과 분위기가 느껴질 겁니다. 한 단어로 80년대 전체를 개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집단(集體)” 같은 말을 예로 들자면, 당시에는 확실히 무리를 이루는 문화가 아주 중요해서 당파를 결성하기라도 하는 듯 하곤 했죠. 그러나 무리 안에서도 같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동시에 개성의 해방과 자유로운 창작 또한 추구했죠. 이는 작은 집단으로 큰 집단에 반항하면서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마도 80년대를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일 것입니다. 요즘은 개인의 목소리가 더욱 개인화되었지만, 더욱 고립되고 산만해졌다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왜 “당대중국의 낭만시대”라고 80년대를 묘사했냐하면 말이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미친 듯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허무와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첫사랑이나 꿈속의 연인을 대하듯이 지식을 추구하고 창작을 위해 몸부림쳤으며, 읽고, 탐색하고 사색하는 것을 살아가는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고 행복해했다는 점은 아주 낭만적이면서도 시적 감성이 풍부한 삶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물론 당시는 중국이 정치중심에서 경제중심으로 옮겨가는 과도기로 문화가 막 수면 위로 떠오르던 때였고, 모두들 국가의 밥을 먹었고 체제 내에서 살았으며,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어 경제적인 압력이나 유혹이 크지 않았고 정치도 비교적 개방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전심전력으로 문예와 철학을 토론할 수 있었던 거죠. 이런 특수한 시기가 다시 반복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
신주간: 당신과 친구들이 1980년대를 이야기하도록 촉발한 것은 무엇인가요? 그저 그 시절을 회고하겠다는 간단한 이유만은 아니겠죠?

자젠잉: 누구나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옛 시절을 회고합니다만, 이 책의 의도가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80년대의 그 많은 가십거리에 대한 잡담이면 충분하겠죠. 최근 중국인들이 요즘 왜 이렇게 이익을 추구하는지 질문이 던져지곤 합니다. 종교적 전통이 너무 약하고 문화는 너무 세속적이어서 정신적으로 아무런 경외를 품지 못해서일까요? 제 생각에 중국인의 종교는 역사 안에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역사에 특히 경외감을 품어 역사가 거의 종교의 역할을 하곤 했죠. 예를 들어 유교 문화의 윤리도덕에는 강한 선악관이 들어 있는데, 우리의 전통이 이미 몰라볼 정도로 손상되었다고는 하나 많은 중국인들의 잠재의식에는 여전히 인과응보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업보가 유전되는가 하면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입니다.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과거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격려하거나 참고하기도 하는 것이죠. 중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중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역사의 기억과 역사의 서사는 아주 중요한 것이죠. 순식간에 20년이 지났으니 마땅히 80년대를 회고할 단계가 된 셈이죠. 그 시절에 대한 많은 정보는 정부에서 제공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아래에서 특정 사건에 대한 몇 가지 세부적인 담론이 형성되고 있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깊이 있는 반성을 제공하는 담론은 결핍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전체적으로 반성한다면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결론을 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시작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신주간> : 1980년대는 정말로 그렇게 아름다웠습니까? 그 시절을 되돌아볼 때, 당신이 인터뷰한 사람들의 기억상의 착오로 그 시절의 조악하고 비루한 것들은 희미해지고 아름다운 측면만 남게 된 것이 아닐까요?

자젠잉: 어느 시대나 아름답고 추한 양측면이 공존하는 법이죠. 80년대의 문제에 대해 제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사실 상당히 격렬한 비판을 전개했습니다. 담론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정말 솔직하게 다 말하진 못했지만 말입니다. 모두들 확실히 80년대식의 성실함과 격정, 우정을 그리워했죠, 그러나 이런 좋은 건 당연히 그리워할 만하지 않은가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시절의 사상과 창작의 가볍고 조악함에 대해 검토했습니다.
이글루스에서 by luna | 2007/04/06 01:30 | 八十年代 |


자젠잉, “80년대를 회고할 시기가 되었다”-- 《新週刊》과의 인터뷰

출처: http://www.sachina.edu.cn/Htmldata/news/2006/06/1658.html


이글루스에서 # by luna | 2007/04/06 01:30 | 八十年代 |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講, 구경 2007. 3. 23. 00:07

최근에는 이사를 했습니다. 처음 구했던 집이, 가족들도 와있을 예정으로 잡았던 꽤 큰 방인지라, 돈도 아깝고 공간도 아까워서요. 결국 우여곡절 끝에 복단대가 위치한 상해 북쪽 지역으로 왔지요.

일 단 유학생이 많은 곳이라 실제생활은 더 편해졌어요. 상해에 오는 직장인들은 예전 국제공항이었던 홍교공항 근교(롱바이, 구베이)에 몰려 있고, 유학생들은 복단대에 집중되어 있죠. 원래 그들과는 다른 곳에서 다른 경험을 하려고, 한국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에서 한 6개월을 산 셈인데, 결국은 포기하게 되었네요..

장소가 바뀌니 생활도 조금 달라졌는데.
우선 여기선 밥을 많이 사먹게 되네요. 맛은 별로지만 싸고 근처에 여러곳이 있으니까요. 예전엔 혼자 먹을데가 없어 해먹었거던요.
다른 하나는, 청강을 두개정도 하고 있어요. 가끔 도서관에 가서 자료만 찾곤 했는데, 간만에 수업을 들어보니 좋더군요.
이쪽에서 유학하는 후배들이 한국보다 교육환경이 더 나은 것 같다고 말하던 게 거짓은 아니었구요.
적어도 듣고 있는 두 수업의 수준도 상당하더군요.

저 는 주유쟁(朱維錚), 갈조광(葛兆光) 두 교수의 수업을 들어요. 어쩌다 보니 사상사 관련으로만 둘을 듣게 되었네요. 개설된 수업 중 마땅한 게 없기도 했지만, 이 두 교수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고, 여기 와서 학회에서도 몇번 인상깊게 보기도 했거던요.

갈 조광은 우리나라에 <도교와 중국문화>, <선과 중국문화>가 번역되어 있는데, 요즘 중국사상사 쪽으로 꽤 꽁푸를 쌓은 것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청화대에 있다가 최근 복단대로 스카웃되었고, (이 사람을 위해) "문사연구소"를 새로 만들기까지 했을 정도니까요.
지난 시간 내용이 근년에 발굴된 고고학적 성과들을 사상사가 어떻게 포섭할 것인지, 그로 인해 사상사가 얼마나 더 풍부해질 수 있는지 등에 관한 것이었는데 꽤 흥미로웠어요. 제가 최근 발굴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가 여럿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죠.

갈조광은 현재 중국 최고'급'의 학자임은 분명하지만, 비판에는 조심스럽고 종합하는 능력이 강한 것 같습디다. 따라서 그의 사상사 책의 해당부분을 읽고 강의를 같이 들으면 꽤나 유익한 정보와 질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주유쟁 선생은 일흔이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력적이고, 목소리도 크고, 대놓고 학계와 교수, 공산당, 중국사회 전반을 비판합니다. 그것도 아주 큰 목소리로, 학회에서도, 학생들 앞에서도 말이죠.

"중국의 인문정신"이라는 수업내용과는 별도로 그를 통해 많은 정보도 얻고, 계발도 많이 받는거 같아요.

이 분은 20대후반~30대에 문혁을 거쳤기 때문에, 소위 홍위병들에게 엄청난 학대를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몇 살 어렸으면 문혁의 주역이 되었겠지만, 암튼 인생의 황금기이고 학자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직전에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 "십년"을 어떤 방식으로던 되돌아보고 질문하면서 살고 있는거 같아요.

다행히 문혁 말기에 당에서 만든 "장태염 주석組"에 배당되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죠. 공부라곤 해본적도 없는 18명의 농공병들에게 맞아가면서, 시간맞춰서 반우파비판도 받아가면서, 사전 찾는 법부터 가르치고 그들이 작업한 말도 안되는 주석을 수정하는 일을 한 거죠. 이 멍청이 주석그룹이 지금은 학계의 거물들이 되어 있구요. (제가 처음 신청한 지도교수도 그 중 한명일 가능성이 다분하더군요. 실력보다는 능력과 수단이 뛰어난.. 너무 다행스러운 건 그 사람이 너무 바빠서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는 거죠. 혹은 저도 거물들과 놀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것일까요? ^^;; )

자세한 건 나중에 시간이 되면 주유쟁 선생 인터뷰를 번역해서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그 개인에게는 불행이었고, 저로서는 아주 행운이기도 합니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비판이라기보다는 "비아냥"의 형식이긴 하지만, 책이나 다른 자료로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니까요.. 중국학생들도 키득키득 거리면서 듣구요. 중국에서 누가 대놓고 공개석상에서 그 정도 강도의 비판을 할 수 있겠어요. 이 할배 나이가 10년만 젊었어도 무슨 수를 썼을 거에요.

암튼 제가 신청한 연구비와는 관계없는 이 두 수업을 재미있게 듣고 있어요.

별로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죠?
대충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이글루스에서 by luna | 2007/03/23 00:07 | 조리돌림 |
Posted by lunarog
중국의 대표적인 인문잡지 <독서> 2007년 2월호에 실린 <삼협호인>관련 좌담회의 초벌번역.
내가 읽기 위한 번역인지라, 정확성보다는 전체적인 흐름만 잡았다.
전문을 번역한 후, 필요하다면 추가로 수정하도록 하겠다.


<삼협호인> : 고향, 변화 그리고 자장커의 리얼리즘

<三峽好人> : 故里、变迁与贾樟柯的现实主义


<讀書> 2007년 2월호


좌담참가자 :

시추안(西川), 어우양장허(歐陽江河), 왕후이(汪暉),

리퉈(李陀), 추이웨이핑(崔衛平), 자장커(賈樟柯)


 

왕후이: <독서>잡지의 좌담회를 열 수 있게 도와주신 펀양(汾陽)중학 측에 먼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소무>를 보면서부터 펀양을 인상 깊게 봤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펀양에 오게 되었는데, 방금 거리를 가로질러 이 학교 문으로 들어서며 이렇게 크고 보존이 잘 된 건물이 1902년에 지어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학교를 들어설 때 우리는 마치 근대적 변화가 시작되던 역사시기로 진입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펀양에서 <삼협호인>을 보면서 친구들은 모두 흥분했습니다. 각양각색의 블록버스터들이 거의 모든 영화적 공간을 점거하고 있기에 자장커의 영화는 충분히 귀중한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영화가 없다면 당대 중국영화에 대한 담론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띨 것입니다. 지금부터 마이크를 회의에 참가한 친구들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5세대 이후 새로운 감독의 등장

 

리퉈: 이 영화는 제가 줄곧 기다려온 작품입니다. 최소한 저 한 사람만 하더라도 거의 십여 년을 기대해 온 영화이죠. <삼협호인>이 출현한 것의 의의는 그것이 좋은 영화이거나, 자장커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탔다는 점에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영화의 의의는 반드시 중국 당대영화의 전체 판도 내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이 영화는 중국 당대영화사상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며, 새로운 영화적 발전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80년대에 평론을 시작했으니 저도 영화평론을 한지 꽤 되었죠. 90년대 이후로는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영화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까지 계속하여 중국영화의 발전상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80년대의 중국영화가 하나의 절정을 이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영화비평, 영화사 연구를 하는 몇몇 친구들은 80년대 당시에 이미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80년대의 “신영화운동”(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썼는데 지금은 이미 잊혀졌다)이 과연 지속될 수 있는가? 과연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가? 이미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 의혹은 그 친구들에게 가시와 같아서 찌를수록 더욱 깊이 파묻혀 버릴 뿐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오늘 저는 조금도 예의를 갖추지 않고, 그리고 공개석상에서는 처음으로 5세대 감독들에 대한 실망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특히 장이머우와 천카이거에 대해 말이죠. 왜 5세대를 강조했던 거죠? “5세대”는 80년대 “새로운 영화”의 중심이었습니다. 중국영화의 희망이었고, 중국영화의 미래로 여겨져 왔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5세대 영화인들의 이미지가 날로 더러워지는 걸 보고도,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이번에 바닥을 치고 나면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거야 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돌아온 건 매번 반복되는 실망뿐이었죠. 실제로 모두가 목도한 것은 천카이거, 장이머우로 상징되는 “5세대 영화”가 한없이 몰락하는 과정이었죠.

 

지금 제가 사용한 “몰락”이라는 단어는 신중히 고려한 것입니다. 저 자신이 보기에도 과하긴 합니다만 몰락은 몰락인 거죠, 확실한 한 세대의 몰락 말입니다. 5세대 영화와 중국 신영화운동의 몰락은 중국영화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며, 세계영화에 있어서도 큰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중국 신영화운동이 80년대에 일어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영화적 사건으로, 각국의 영화사가, 비평가, 관중들의 뜨거운 관심과 높은 평가를 받아왔죠. 이러한 새로운 영화적 물결이 왜 그렇게 빨리(겨우 몇 년의 전성기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몰락해 버렸는가? 그에 대해 많은 다양한 이유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왜 이렇게 5세대 영화의 몰락을 강조하는 걸까요? 그건 우리가 자장커와 그의 <삼협호인>을 평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한 예술운동의 몰락에 대해 비평하고 분석하는 것 또한 중요하긴 하지만, 더 세게 비판하고 더 가혹하게 욕해도 영화 자체의 발전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새로운 작품, 새로운 영화적 실천으로 우리 영화에 아직도 출로가 있음을, 여전히 새로운 탐색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삼협호인>의 출현은 우리의 기대를 만족시켜 줄 뿐 아니라 우리의 기대 이상이기도 합니다. 5세대는 몰락할 수 있어도 중국영화는 몰락할 수 없죠. 자장커의 출현과 진보에서 우리는 또 다시 희망를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소무>를 볼 때가 생각나는군요. 약간은 신비스러운 색채마저 풍기게 몇십 명이 길거리에 모여 이리저리 돌고 돌아 한 비밀스러운 장소에 가서 봤는데(어우양장허가 끼어듦: “거긴 서예가 청라이더의 작업실이었어요. 제가 사람을 모으고 장소를 물색하여, 그때 <소무>가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상연되었죠.), 정말로 무슨 비밀회합을 하듯이 했죠. 몇 되지도 않는 관중 중에 장이머우도 끼어 있어,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놀라워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러나 장이머우는 영화가 끝난 후 아무 말도 않고 가 버렸죠. 저에게 <소무>는 정말로 새로운 경험이었고 일종의 예감마저 느껴졌어요. 이건 새로운 물건이다, 그 속에 어떤 새로운 영화적 발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라고 느꼈던 거죠. 그러나 이 가능성이 어떤 물건으로 성장할 지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살펴보며 기다려야 했죠.

 

오늘 저는 끝내 기다린 보람을 느꼈습니다. <삼협호인>으로 인해 자장커는 <소무>에서 보여준 시도와 탐색을 결국 완성된 결과물로, 다시 한번 성장된, 완숙한 실천으로 보여준 셈입니다. 우리는 이제 <소무>에서 <삼협호인>까지 자장커의 영화 창작이 이미 영화사적 의의를 획득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일어난 새로운 영화의 물결이 몰락한 이 때 우리는 새로운 세대의 감독의 등장을, 새로운 희망을, 새로운 공간을 보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강조해서 말하고 싶은 의미입니다.

 

  자장커 영화의 출현을 이야기하기 위한 또 다른 전제는 최근 몇 년 신속히 밀어닥치고 있는 중국 상업 영화입니다. 중국이 이미 전지구적 시장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상업영화와 블록버스터를 찍어 영화 한편으로 높은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시장경제의 흐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거죠. 한 국가의 영화가 완전히 상업영화 일색이어야 하는가? 상업 영화 이외의 다른 영화들은 생존할 수 있는가? 일군의 감독들이 사적인 이익이나 막대한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상업영화제작을 하지 않고, 진지한 예술영화를 제작할 충분한 공간이 있는가? 저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렵긴 하지만, 그건 우리 중국 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많은 국가에서도 상당히 곤란을 겪고 있는 문제죠.

 

1997년 프라하에서 두 달간 머물면서 체코 영화를 좀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온통 미국영화 뿐이었죠. 한참 후에야 좌석 몇십 개에 불과한 지하영화관을 어렵사리 찾아 10여 편의 체코 영화를 볼 기회를 가졌어요. 아주 인상적이었죠. 헐리우드의 바깥에서 체코의 영화감독들은 그렇게 대단한 영화를 찍어왔다니 대단하지 않나요. 그에 비해 80년대에 등장한 중국의 영화감독들은 일부 소수를 제외한 전체가 헐리우드에 투항한 셈이니 서글플 따름이죠. 물론 그렇다고 중국에선 아무도 비상업 영화를 찍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당연히 있었죠.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몇몇 젊은 감독들이 나타나 은밀하게 작업을 해왔죠. 비록 아직은 모호하긴 하지만 이들 청년감독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있어 어떤 공통적인 경향을 형성했습니다. 

 

바로 영화로 현실을 주시하고 현실에 개입한다는 점이죠. 자장커야말로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 인물이죠. <삼협호인>의 성공이 가진 무시할 수 없는 또다른 의의는 이처럼 잠복되어 있던 영화적 경향, 청년 영화인 무리들이 단번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사회의 주목과 시험을 받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5세대 감독보다 더욱 엄격한 태도로 끊임없이 그들에게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당신들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가? 계속 지금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 현실에 대한 주시와 개입은 대체 당신들의 지향점인가? 아니면 일종의 임시적인 책략에 불과한 것인가?


<소무>의 활력으로 되돌아오다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07. 2. 11. 14:22


뻬드로 빠라모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그날 밤 그녀의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일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그 기억이 과거에 들었을 부드러운 음악이나 단순한 죽음 같은 그런 기억이 아닌 까닭은 무엇일까?

독 립 이후 무정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멕시코는 1876년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집권으로 정치적 불안의 해소와 경제적 근대화의 기반을 조성하게 된다.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민중의 편이었고 개혁가였으나 그 역시 (독립 후 몇 십년 간 출몰했던 제왕적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후에 독재자가 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으로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이러한 독재의 이면에 놓인 인권탄압, 경제적 불평등 등으로 인해 결국 1910년-17년에 걸친 멕시코혁명의 불씨를 제공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를 그리고 있는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는 두 가지 층위에서 반 중앙집권적인 혁명 소설이 라고 할 수 있다. 소재적 층위에서는 디아스 정권의 독재에 항거한 멕시코 혁명을 다루고 있으며, 구조적으로는 단일한 목소리와 연대기적 시간구성을 가진 전통 서사에 대한 반성을 체현하고 있다. 영웅적 주인공이나, 전지적이고 초월적으로 이야기를 관장하는 서술자 없이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서로 뒤엉켜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뻬드로 빠라모>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재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의 의미로 동일화되지 않는 불협화음 속에서, 이질적인 목소리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다성적 공간을 형성한다. 그 곳이 꼬말라이다.

꼬말라는 마술적 공간이 아니다. 억압과 착취에 온몸으로 반발한 영웅이 초월적 존재로 변신하였음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의 마술’도 존재하지 않고(<지상의 왕국>), 현실에서 벌어질 법하지 않은 일이 태연하게 일어나는 마콘도의 마술(<백년의 고독>) 또한 꼬말라에서는 찾을 수 없다. 꼬말라의 다성적인 공간은 과거의 목소리가 여전히 공명하고 있고, 죽은 자의 기억이 여전히 살아 있을 뿐이다.

< 뻬드로 빠라모>는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지상의 왕국>에서 보여주는 마술, 혹은 전복 의지와는 차별성을 보여준다. 프랑스인의 착취에 반발하다 화형에 처해진 마깡달이 부활해서 새가 되었다는 믿음은 해방을 갈구하는 흑인노예들의 바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바램은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현실이 된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식민체제가 불안정해지면서 흑인 노예들은 자유를 요구하며 폭동을 감행한다. 마술적 믿음이 현실이 되었다는 까르뻰띠에르의 설정은 마술적 믿음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이며, 마술적 믿음이 결코 비이성적인 것이나 황당한 주술만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혁명은 앙리 크리스토프의 집권으로, 다시 물라토의 공화주의 체제 등으로 지배자만 바꾸었을 뿐 민중들의 노예상태는 변함없이 악화되었다. 이 모든 사태에 절망한 "띠 노엘"은 마술적 변신을 통해 도피하거나 이 세상을 초월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 ‘지상의 왕국’에서의 혁명을 꿈꾼다. 이러한 각성이 하나의 인식의 전환인 것은 분명하나 <지상의 왕국>이 보여주는 마술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지배담론의 논리를 그대로 간직한 채 그 대립항으로서 발발한 혁명이 어떤 결과로 귀결되는지는 앞선 역사에서도 반복적으로 보여지고 있지 않은가.

이제 꼬말라라는 공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자. 후안 쁘레시아도가 어머니의 유언으로 찾아가게 된 곳이 꼬말라이다. 내리막길 끝에 있는 꼬말라는 아버지를 찾아 들어가는 공간이자 출구 없는 절망의 공간이다. "저 아래 보이는 마을"로 내려간 순간 후안 쁘레시아도는 끊임없이 死者와 만나게 되고 결국 자신도 죽음을 맞이한다.
후안 쁘레시아도가 처음부터 죽은 상태였는지 꼬말라로 들어와서 죽은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작가의 말대로 “꼬말라에 도착할 때는 살아 있었으나, 거기서 죽는 것”으로 보자.

  한밤중에 나를 깨운 것은 열기, 그리고 땀이었다. 온통 흙으로 감싸인, 아니 흙으로 빚은 그 여자의 몸은 마치 진흙탕에 용해된 것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땀에 허우적거리며 부족한 공기를 들이마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나는 거의 질식된 상태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이 든 그 여자의 입에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가까스로 토해 내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공기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나에게 달라붙은 열기는 떨쳐낼 수 없었다.
  공기가 없었다...


신 화 속 이브의 형상을 한 여자와의 결합, 그 열기 속으로, 꼬말라의 대지 속으로 서서히 녹아 들어가면서 후안 쁘레시아도는 갑자기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죽음의 순간을 묘사한 이 장면을 경계로 이야기의 중심은 후안 쁘레시아도에서 뻬드로 빠라모로 옮겨가고 서사 방식도 미묘하게 변한다.

전반부에서는 ‘대화’가 없다. 내가 묻고 상대가 대답하며,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지만(즉 일반적인 대화상황은 있지만)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 비대칭적 관계에 놓여 있다. 아버지를 찾아, 끊임없이 반복되는 오류의 역사를 찾아가 보지만 이해할 수가 없다. 공유되는 코드를 형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각자 자기 목소리만을 낼뿐이기 때문에 수많은 대화가 등장하지만 독백일 수밖에 없다.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과거가 계속 현재화하고 있는, 즉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 재상영되는 꼬말라에서는 직선적인 시간관이 끼여들 자리가 없다. 현재가 끊임없이 과거로 소멸해가는 한 점으로 축소되고, 과거는 ‘기억’이라는 방식으로, 미래는 ‘기대’라는 방식으로 현재화될 수밖에 없는 수직적인 시간이 아니라 모든 과거가 수평축의 표면에 그대로 살아서 웅성대는 탈시간화된 공간이다. 과거는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혜성의 꼬리처럼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변형된 모습만을 남기고 떠나기엔 아직 하지 않은 너무 많은 말들이 남아 있다.

과거의 음이 여운을 남기며 사그라들어 끊임없이 현재의 음에 통합되는 조화로운 세계가 아니라, 그 각각이 동일한 강도로 울려 퍼지는 불협화음의 세계.

그 들은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아직도 내고 있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독자와 같은 기대지평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후안 쁘레시아도는 상징적인 죽음을 겪게 된다. 후안 쁘레시아도는 꼬말라의 주민이 되었고 독자는 여전히 꼬말라의 외부, 텍스트의 바깥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제 독자는 양자택일해야 한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현실의 질서를 심판하고 재질서화하는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꼬말라는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되며 혁명, 멕시코 농촌의 삶, 사랑 등의 의미로 구성할 수 있다. 바로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그들과 친구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란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이 방식의 한계를 직시한다면, 꼬말라의 웅성거림을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 어떤 질서(그것이 어떠한 '질서'이건 간에)에서 오는 편안함을 즐기기보다는 혼돈을 혼돈 자체로 느끼도록 하자.  우리는 과거와 만나는 방식 자체를 변경해야 한다.

꼬말라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국가가 강요하는 하나의 목소리, 제도화된 역사라는 공식 언어의 테두리 내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과거와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꼬말라를 찾은 이상 단순히 듣는 척, 이해한 척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몸이 변화해야 한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말한 것과는 다른 맥락이 될 수는 있겠지만) “영원히 살기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야 우리는 단순히 그들 옆에 누워서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으면서 걸을 수” 있게 된다.

'獨立閱讀 > 讀,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옌롄커(阎连科) 프로필 -1  (0) 2007.11.18
중국소설가 리얼(李洱) 인터뷰  (0) 2007.10.27
류진운 - 글쓰기와 운동  (0) 2007.09.16
Posted by lunarog

시각문화, 역사적 기억, 중국의 경험

-- 레오 오판 리(Leo Ou-fan Lee; 李歐梵)과의 대화


羅崗


1. 앞을 내다보며, 뒤를 향해 나간다


        뤄강: 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기억으로 선생님께서 2002년 홍콩대학 여름학교를 개설하실 때 선택하신 주제가 “공공비평과 시각문화”로, 주로 최근 서양에서 시작된 “시각문화연구”가 중국어권 세계(중국 대륙, 홍콩, 대만 및 기타 중국어 지역)를 이해하는 방식에 어떠한 시사점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셨습니다. 올해 홍콩과기대학에서 강의하실 때는 더 직접적으로 청말민초의 인쇄문화와 중국(사실은 인쇄문화 위주였습니다만)의 “시각문화”를 논의하셨습니다. 이로써 선생님께서 최근 “시각문화”에 대해 줄곧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관심의 배후에 어떤 특별한 흥미나 이유 같은 게 있으신지요?

 

        이구범: 두 가지 방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홍콩에 머물던 그 시기에 저는 李湛?(Benjamin Lee) 등과 함께 많은 연구계획을 논의했는데, 결국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여 강연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넓은 의미의 문화연구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담민은 일련의 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자기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전에 시카고 대학 문화간 연구센터에서 시작된 것이었죠. 나는 그의 프로젝트를 따랐고, 이 때문에 내가 원래 연구하던 중국 현대문학의 영역을 벗어나게 된 것이죠. 일종의 특별한 “문화연구”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한데, 그들의 기본적인 한 방향은 “공공영역”의 문제에서 연장된 것입니다. 공공영역, 미디어, 정보의 흐름, 문화의 흐름 등에서 지금 하고 있는 자본주의 문화의 전지구적 흐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 일련의 연구에 나는 대부분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변두리에 서 있다가 가끔 그들과 함께 몇 가지 관련 연구를 해왔죠.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제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현대문학 연구와 문화연구의 관계를 예로 들어 봅시다. 그것은 제가 문학사자료를 어떻게 다시 읽을 것인가의 문제에 영향을 주었고, 이 때문에 저는 “인쇄문화”, 즉 신문잡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죠. 이 노선은 이담심 등의 연구노선을 뒤따른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제 개인적인 흥미입니다. 미국에서 30년 동안 강의를 했고 내년이면 퇴임하는데, 제 전공은 주로 중국현대문학이었고 중국 학자와의 교류 또한 현대문학 위주였습니다. 당시의 연구가 이 정도 수준에 이르게되자 온통 소설이나 텍스트 연구뿐이라는 점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죠. 그래서 정말로 “우연히” 상하이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하이를 연구하며 <상하이 모던>이라는 책을 쓸 당시에는 원래 신감각파를 연구할 생각이었는데, 신감각파와 텍스트만 연구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만족스럽지가 않더군요. 훗날 상하이에 가서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잠깐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줄곧 계속되어, 결국 현대문학의 작가와 작품의 연구에서 상하이의 도시문화 연구로 연구영역이 바뀌게 된 셈이죠. 도시문화와 문학 텍스트의 관계는 사실 많은 사람들의 연구가 있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벤야민인데, 이 연구전통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제가 이러한 각도에서 출발하여 현대문학연구를 파고든 것은 십 수년 전의 중국에서는 아직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여전히 리얼리즘과 향토문학이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고의로 그에 반하는 논의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리얼리즘”을 논할 때 나는 “데카당스”를 논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향촌”을 이야기할 때 나는 “도시”를 이야기했던 거죠. 그 후 “도시문화” 연구 안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해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쇄문화”와 어떻게 접속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많은 인쇄문화 안에서, 특히 신문잡지 속에서, 내 마음 속에 있던 당시 상하이의 근대성에 대한 그림을 다시 드러내거나 다시 그려내려 한 것이죠.

  제 연구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노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 문화연구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러한 연구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왜 그러냐 하면, 작금의 문화연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영상”이나 “시각”(視像)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뒤떨어지건 말건 괘념하지 않는데, 중요한 것은 나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키냐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만약 한 가지 노선을 더 말하자면, 이 외에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세계문학 연구를 들 수 있습니다. 이번 학기의 강의주제는 청말의 인쇄와 시각문화입니다만, 지난 학기는 순전히 세계문학과 현대문학의 고전만 가지고 강의했습니다. 카프카,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토마스 만, 여기에 쿤데라가 더해졌고, 다시 노신, 백선용, 장애령 등을 같이 논의하는 방식이었죠. 모두 중국과 외국문학의 고전이었어요. 왜 지금 고전을 이야기해야 하느냐 하면, 내 생각에 홍콩문화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경전인데, 홍콩문화는 모든 게 상품화되어버린 것 같아요. 심지어 상품화 속에서 고전을 재발굴해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때문에 포스트모던한 상업사회에서 고전을 재발굴하는 것은 우리 연배 사람들이 고전을 읽던 때보다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제 연구는 이 세 가지 노선이 결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뤄강: 인쇄문화 연구는 작금의 문화연구 조류에서 볼 때 좀 뒤떨어진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인쇄문화에서 영상문화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공통성이 시종 관철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벤야민이 말한 “기계적 관조(技術性觀視; 원문 찾아보기)”입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은 어떤 기술 수단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전통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풍경을 감상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주로 텔레비전, 영화, 사진, 엽서 등을 통해 풍경을 바라보는데, 이러한 “매체”는 모두 “기술적”인 것들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바라보기 행위를 “기계적 관조(技術性觀視)”라고 말한 것이지요. 이 개념은 시각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지적해 주는데, 선생님의 만청 시기 연구를 예로 들면 먼저 석인(石印) 기술이 있어야 <점석재화보>가 있을 수 있고 吳友如가 그려낸 그러한 이미지들이 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구범: 홍콩대학의 교수 아크바 아바스(Ackbar Abbas)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직선적인 발전방식으로 문화현상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먼저 인쇄문화가 있고 난 뒤 영상문화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죠. 현재는 한 곳에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인쇄문화가 있지만 영상문화도 있고 시각문화도 있는 등등, 게다가 각 방면 모두에 기술적인 요소가 들어 있죠. 그는 벤야민에 가장 심취했고, 저 또한 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벤야민은 인쇄문화가 가장 왕성하던 시대를 살았지만, 가장 먼저 영화와 사진이라는 시각문화의 잠재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속에 당신이 말한 “기술” 문제가 들어 있죠. 물론 기술 문제에 대한 논의는 독일에서 뿌리깊은 전통의 하나로 철학가들마다 이야기하는 “테크네tehcne”가 바로 그것이죠. 그러나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면 다른 문제가 되어버리는데 우리가 요즘 말하는 “기술”과는 별로 같지 않기 때문이죠. 때문에 벤야민과 유사한 입장에서 보자면, 요즘 중국과 같은 환경에서는 사실 많은 문화적 요소가 동시진행될 뿐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됩니다. 심지어 영상을 볼 때조차 시각적 형상에서 인쇄문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술성분(?)이나 읽기의 관습 같은 것이 그것이죠. 바꿔 말해, 인쇄문화의 텍스트 구조와 독서 관습이 시각문화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홍콩영화는 이 방면에서의 특징이 아주 명확합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물이 중국문화에서 가지는 의미와 로스앤젤레스(헐리우드?) 위주의 미국문화에서 가지는 의미는 그다지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근데 오래된 것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나는 “새로운” 것 속에서 “오래된” 것을 발견하고 싶은데, 아마도 “구식” 연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식”이기 때문에 나는 현재 갈수록 뒤로 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갈수록 앞으로 나가고, 갈수록 현재를 향해 나가는데 말입니다.

 

        뤄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세번째 노선도 아주 재미있는 화제인 것 같습니다. 왜 지금같은 소비사회에서 고전의 의의를 다시 제기할 필요가 있는가의 문제이죠. 사실 이 문제 또한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시각문화와 관련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각문화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시각예술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죠. 시각예술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세계명화나 무슨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고전 예술작품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시각문화와 시각예술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가 시각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지를 바라보는 장소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이미지를 바라보는 장소가 모두 공식적이고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미술관에 가서 유화를 보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등..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광고를 보고 집에서 DVD를 보는 등등.. 시각문화는 사람들의 주의력을 구조가 완정하고 공식적인 관람장소에서 유리시켰습니다. 영화관과 갤러리는 일상생활 중 시각경험의 중심으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바라보기의 과정에서, 광고 같은 경우, 각양각색의 고전적 이미지를 보게 되곤 하는데, 광고에서 이러한 고전적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은 상품을 선전하려는 목적에서이죠. 가장 친숙한 예가 여기저기서 남용되고 있는 <모나리자>일 것입니다. 물론 <모나리자>보다 더욱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뭉크의 <절규>와 같은 작품도 광고 이미지로 활용되고 있죠.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어떻게 소비사회에서 고전의 의의를 재발견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고전과 마주칠 기회는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만, 마주치는 시기와 장소는 원래와 너무 다릅니다.

 

        이구범: 그래서 제가 홍콩에 막 도착했을 때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이 홍콩의 광고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홍콩의 광고는 고전을 살짝 바꾼 것이 종종 있는데, 어떤 때는 깜빡 속아넘어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이태리 핸드백 광고에 영문으로 mandarina duck이라고 되어 있는 걸 저는 “원앙호접파”인 줄 알았습니다. 당시 내 머리 속에 동서의 고전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기서 어떤 문제를 끄집어낼 수 있는데, 금방 말씀하신 시각문화가 홍콩 같은 곳에서, 그리고 장래 상해도 마찬가지가 될텐데, 중서문화가 서로 뒤섞이게 될 것이란 점이죠. 고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번역은 “고전”의 유통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서양의 고전이 중국어로 번역된 후 모양을 바꿔 중국의 것으로 변하고 말죠. 저는 요즘 셜록 홈즈(福爾摩斯: Sherlock Holmes)가 어떠한 변화를 거쳐 중국의 호돈(?桑: Nathaniel Hawthorne)이 되었는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호돈이 포스트모던 사회인 오늘날 건너왔다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문학에서 “탐정”은 벤야민이 묘사한 그러한 이미지에서 현재 어떤 이미지로 변화되었을까요?

  고전의 유통과 번역은 상당히 중요한 개념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지점”이라는 개념입니다. 요즘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던한 문화연구에서 이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바로 예전의 일대일의 관계를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말입니다.(不是?)요즘 많은 책에서 “박물관”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박물관은 궁전인 동시에 묘지라서 고전을 추앙하는 동시에 매장시켜 버린다고 말이죠. 때문에 많은 전시(畵展)가 박물관 바깥에서 이뤄졌던 것이죠.

 

        뤄강: 박물관의 배치가 일종의 계급제도를 보여주며, 심지어 권력관계이기도 하다는 비평적 견해도 있습니다. 서구와 비서구, 정통과 이단 등과 같이 많은 개념이 배치의 뒷편에 침투되어 있죠. 관람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박물관에서 의도적으로 배치한 미리 정해진 질서대로 관람하고 동일시될 것을 요구받습니다.

 

(5절 중 제1절만 번역, 읽기 위한 초벌번역/ 추후 인용원문 대조, 교정 필요)

'獨立閱讀 > 觀, 바라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토크쇼의 체 게바라  (2) 2008.10.13
<삼협호인 Still Life> 좌담회 (1)  (0) 2007.03.05
프라도의 <섬> 읽기  (2) 2004.04.23
Posted by lunarog
섬 - 10점
미겔란쏘 프라도 지음, 이재형 옮김/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넌 나랑 똑같은 걸 보고 겪은 거야. 단지 그걸 나랑은 다른 식으로 해석했을 뿐이지."
-- S.S. 반 디네.

"여긴 정말 이상한 곳이에요. 방파제는 엄청나게 큰데 배는 두어척 밖에 없고, 낙서들은 여러나라 말로 갈겨 쓰여져 있는가 하면, 여자 혼자 잡화점을 꾸려 가고, 그 여자 아들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으니...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고, 꼭대기엔 폐쇄된 등대만 우뚝 서 있는 아주 작은 섬에 이 모든 것이 다 모여 있다니.."

이 만화책은, 외딴 섬에 흘러들어간 한 남자와 그보다 먼저 와 있던 한 여자,
그리고 섬에서 여관, 술집, 식당을 겸해서 하고 있는 아줌마와 아들.
..정도가 등장인물의 전부다.

외딴 섬이니 뭔가 사건이 발생할 것 같다.
살인사건처럼 섬뜩한 일이 일어난 뒤 주인공에게 탐정 역을 맡겨도 되겠고, 아줌마와 여인을 둘러싼 삼각관계, 혹은 강간 정도는 나올 법도 하다, 아주 당연히..

물론 살인도 나오고 강간도 나오고 삼각관계도 펼쳐지지만 결코 사건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만화는 탐정만화도, 로맨스도 아니다.
각 에피소드는 파편화되어 있고, 그것들이 모여서 어떤 전체를 구성할 의지도 그다지 노출시키지 않는다.

하나의 끈을 잡고, 그것을 줄거리라 생각하고 끝까지 가더라도, 결국 독자는 자신이 타고온 줄기 전체를 재배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줄거리란 어떤 관계를 형성시키는 것이다.
원래 따로 떨어져 있던 명사들을 조사로 연결시키기.
한 곳에 고정된 덩어리들을 동사로 운동시키기.

<섬>에서 등장하는 각 요소(인물, 배경, 그림 등..)들은 모두 그 자체로 하나의 섬들이다.

연결이 되더라도 배와 섬의 연결일 뿐이고,
운동이 발생한다 해도 대륙이 되지는 못한다.

짧은 순간, 나름의 방식으로 상대에 대한 호의를 베풀고 어떤 인연의 끈을 잡아보려 노력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하나의 섬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주 긴 방파제를 가진 이 섬의 모양은,
바다 저멀리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상대에게 내민 손은 가끔, 혹은 항상,
상대의 가슴을 찌르는 바늘이 되곤한다.

책상 한곳에 꽂아두고 한번씩 그림도 들춰보고,
이리저리 내 맘대로 줄거리도 만들어보면 나름 괜찮을 것 같다.
그림은 하나하나 공을 들였고, 줄거리는 지겹지 않을 정도로 모호하다.
그러나 혹, 그러다 영원히 고립된 섬이 되어 버리지나 않을란가?

"우리는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어떤 섬에 배를 댔는데, 이 황량한 바위섬에는 도마뱀과 갈매기, 수줍음을 타는 노파와 말이 적고 거칠어 보이는 남자, 상스럽고 단정치 못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었다. 이 섬에서는 외딴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폐쇄된 등대를 제외하면 그들의 집이 유일한 건물이었다. 그 집은 더럽고 다 쓰러져가는 데다 썩어서 악취에 가까운 기름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아주 싼 값에 방과 음식을 주겠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차라리 배에서 저녁을 먹고 자는 쪽을 택했다.

바로 그날 밤, 산드라가 꼭 샴페인을 마시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다섯 잔을 마시고 나서 취하기 직전의 경이로운 영감의 상태에 사로잡힌 그녀는 등대에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마르띤은 거절했다. 그러나 나는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심연으로 이어지는 광채가 그녀의 눈에서 반사되는 걸 보는 순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 아르망 실라스, <욕망의 빛>, 1988.

"실라스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의 두 번째 에로틱 소설인 <욕망의 빛>은 자전적 체험을 다루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관심거리-불건전한 호기심-이다. 독자들은 언급할 만한 그 어떤 다른 가치도 이 책에서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A. 카사스, <욕망의 빛>에 대한 비평, 1992.



2004.04.23. 알라딘 서재.

http://lunatic.textcube.com2009-05-14T13:07:050.31010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