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시각문화, 역사적 기억, 중국의 경험

-- 레오 오판 리(Leo Ou-fan Lee; 李歐梵)과의 대화


羅崗


1. 앞을 내다보며, 뒤를 향해 나간다


        뤄강: 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기억으로 선생님께서 2002년 홍콩대학 여름학교를 개설하실 때 선택하신 주제가 “공공비평과 시각문화”로, 주로 최근 서양에서 시작된 “시각문화연구”가 중국어권 세계(중국 대륙, 홍콩, 대만 및 기타 중국어 지역)를 이해하는 방식에 어떠한 시사점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셨습니다. 올해 홍콩과기대학에서 강의하실 때는 더 직접적으로 청말민초의 인쇄문화와 중국(사실은 인쇄문화 위주였습니다만)의 “시각문화”를 논의하셨습니다. 이로써 선생님께서 최근 “시각문화”에 대해 줄곧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관심의 배후에 어떤 특별한 흥미나 이유 같은 게 있으신지요?

 

        이구범: 두 가지 방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홍콩에 머물던 그 시기에 저는 李湛?(Benjamin Lee) 등과 함께 많은 연구계획을 논의했는데, 결국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여 강연했습니다. 이러한 연구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넓은 의미의 문화연구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담민은 일련의 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자기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전에 시카고 대학 문화간 연구센터에서 시작된 것이었죠. 나는 그의 프로젝트를 따랐고, 이 때문에 내가 원래 연구하던 중국 현대문학의 영역을 벗어나게 된 것이죠. 일종의 특별한 “문화연구”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한데, 그들의 기본적인 한 방향은 “공공영역”의 문제에서 연장된 것입니다. 공공영역, 미디어, 정보의 흐름, 문화의 흐름 등에서 지금 하고 있는 자본주의 문화의 전지구적 흐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이 일련의 연구에 나는 대부분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변두리에 서 있다가 가끔 그들과 함께 몇 가지 관련 연구를 해왔죠.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제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현대문학 연구와 문화연구의 관계를 예로 들어 봅시다. 그것은 제가 문학사자료를 어떻게 다시 읽을 것인가의 문제에 영향을 주었고, 이 때문에 저는 “인쇄문화”, 즉 신문잡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죠. 이 노선은 이담심 등의 연구노선을 뒤따른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제 개인적인 흥미입니다. 미국에서 30년 동안 강의를 했고 내년이면 퇴임하는데, 제 전공은 주로 중국현대문학이었고 중국 학자와의 교류 또한 현대문학 위주였습니다. 당시의 연구가 이 정도 수준에 이르게되자 온통 소설이나 텍스트 연구뿐이라는 점에 불만을 느끼게 되었죠. 그래서 정말로 “우연히” 상하이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하이를 연구하며 <상하이 모던>이라는 책을 쓸 당시에는 원래 신감각파를 연구할 생각이었는데, 신감각파와 텍스트만 연구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만족스럽지가 않더군요. 훗날 상하이에 가서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잠깐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줄곧 계속되어, 결국 현대문학의 작가와 작품의 연구에서 상하이의 도시문화 연구로 연구영역이 바뀌게 된 셈이죠. 도시문화와 문학 텍스트의 관계는 사실 많은 사람들의 연구가 있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연히 벤야민인데, 이 연구전통은 그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제가 이러한 각도에서 출발하여 현대문학연구를 파고든 것은 십 수년 전의 중국에서는 아직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중국현대문학연구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여전히 리얼리즘과 향토문학이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고의로 그에 반하는 논의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리얼리즘”을 논할 때 나는 “데카당스”를 논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향촌”을 이야기할 때 나는 “도시”를 이야기했던 거죠. 그 후 “도시문화” 연구 안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해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쇄문화”와 어떻게 접속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많은 인쇄문화 안에서, 특히 신문잡지 속에서, 내 마음 속에 있던 당시 상하이의 근대성에 대한 그림을 다시 드러내거나 다시 그려내려 한 것이죠.

  제 연구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노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즘 문화연구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러한 연구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왜 그러냐 하면, 작금의 문화연구가 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영상”이나 “시각”(視像)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뒤떨어지건 말건 괘념하지 않는데, 중요한 것은 나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키냐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만약 한 가지 노선을 더 말하자면, 이 외에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세계문학 연구를 들 수 있습니다. 이번 학기의 강의주제는 청말의 인쇄와 시각문화입니다만, 지난 학기는 순전히 세계문학과 현대문학의 고전만 가지고 강의했습니다. 카프카,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토마스 만, 여기에 쿤데라가 더해졌고, 다시 노신, 백선용, 장애령 등을 같이 논의하는 방식이었죠. 모두 중국과 외국문학의 고전이었어요. 왜 지금 고전을 이야기해야 하느냐 하면, 내 생각에 홍콩문화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경전인데, 홍콩문화는 모든 게 상품화되어버린 것 같아요. 심지어 상품화 속에서 고전을 재발굴해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때문에 포스트모던한 상업사회에서 고전을 재발굴하는 것은 우리 연배 사람들이 고전을 읽던 때보다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제 연구는 이 세 가지 노선이 결합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뤄강: 인쇄문화 연구는 작금의 문화연구 조류에서 볼 때 좀 뒤떨어진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인쇄문화에서 영상문화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공통성이 시종 관철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벤야민이 말한 “기계적 관조(技術性觀視; 원문 찾아보기)”입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은 어떤 기술 수단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전통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풍경을 감상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주로 텔레비전, 영화, 사진, 엽서 등을 통해 풍경을 바라보는데, 이러한 “매체”는 모두 “기술적”인 것들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바라보기 행위를 “기계적 관조(技術性觀視)”라고 말한 것이지요. 이 개념은 시각문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지적해 주는데, 선생님의 만청 시기 연구를 예로 들면 먼저 석인(石印) 기술이 있어야 <점석재화보>가 있을 수 있고 吳友如가 그려낸 그러한 이미지들이 있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구범: 홍콩대학의 교수 아크바 아바스(Ackbar Abbas)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직선적인 발전방식으로 문화현상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먼저 인쇄문화가 있고 난 뒤 영상문화가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죠. 현재는 한 곳에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인쇄문화가 있지만 영상문화도 있고 시각문화도 있는 등등, 게다가 각 방면 모두에 기술적인 요소가 들어 있죠. 그는 벤야민에 가장 심취했고, 저 또한 그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벤야민은 인쇄문화가 가장 왕성하던 시대를 살았지만, 가장 먼저 영화와 사진이라는 시각문화의 잠재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속에 당신이 말한 “기술” 문제가 들어 있죠. 물론 기술 문제에 대한 논의는 독일에서 뿌리깊은 전통의 하나로 철학가들마다 이야기하는 “테크네tehcne”가 바로 그것이죠. 그러나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면 다른 문제가 되어버리는데 우리가 요즘 말하는 “기술”과는 별로 같지 않기 때문이죠. 때문에 벤야민과 유사한 입장에서 보자면, 요즘 중국과 같은 환경에서는 사실 많은 문화적 요소가 동시진행될 뿐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됩니다. 심지어 영상을 볼 때조차 시각적 형상에서 인쇄문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술성분(?)이나 읽기의 관습 같은 것이 그것이죠. 바꿔 말해, 인쇄문화의 텍스트 구조와 독서 관습이 시각문화에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홍콩영화는 이 방면에서의 특징이 아주 명확합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물이 중국문화에서 가지는 의미와 로스앤젤레스(헐리우드?) 위주의 미국문화에서 가지는 의미는 그다지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근데 오래된 것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나는 “새로운” 것 속에서 “오래된” 것을 발견하고 싶은데, 아마도 “구식” 연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식”이기 때문에 나는 현재 갈수록 뒤로 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갈수록 앞으로 나가고, 갈수록 현재를 향해 나가는데 말입니다.

 

        뤄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세번째 노선도 아주 재미있는 화제인 것 같습니다. 왜 지금같은 소비사회에서 고전의 의의를 다시 제기할 필요가 있는가의 문제이죠. 사실 이 문제 또한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시각문화와 관련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각문화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시각예술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죠. 시각예술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세계명화나 무슨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고전 예술작품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시각문화와 시각예술의 중요한 차이 중 하나가 시각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지를 바라보는 장소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이미지를 바라보는 장소가 모두 공식적이고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미술관에 가서 유화를 보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등..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광고를 보고 집에서 DVD를 보는 등등.. 시각문화는 사람들의 주의력을 구조가 완정하고 공식적인 관람장소에서 유리시켰습니다. 영화관과 갤러리는 일상생활 중 시각경험의 중심으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바라보기의 과정에서, 광고 같은 경우, 각양각색의 고전적 이미지를 보게 되곤 하는데, 광고에서 이러한 고전적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은 상품을 선전하려는 목적에서이죠. 가장 친숙한 예가 여기저기서 남용되고 있는 <모나리자>일 것입니다. 물론 <모나리자>보다 더욱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뭉크의 <절규>와 같은 작품도 광고 이미지로 활용되고 있죠.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어떻게 소비사회에서 고전의 의의를 재발견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고전과 마주칠 기회는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입니다만, 마주치는 시기와 장소는 원래와 너무 다릅니다.

 

        이구범: 그래서 제가 홍콩에 막 도착했을 때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이 홍콩의 광고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홍콩의 광고는 고전을 살짝 바꾼 것이 종종 있는데, 어떤 때는 깜빡 속아넘어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이태리 핸드백 광고에 영문으로 mandarina duck이라고 되어 있는 걸 저는 “원앙호접파”인 줄 알았습니다. 당시 내 머리 속에 동서의 고전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여기서 어떤 문제를 끄집어낼 수 있는데, 금방 말씀하신 시각문화가 홍콩 같은 곳에서, 그리고 장래 상해도 마찬가지가 될텐데, 중서문화가 서로 뒤섞이게 될 것이란 점이죠. 고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번역은 “고전”의 유통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서양의 고전이 중국어로 번역된 후 모양을 바꿔 중국의 것으로 변하고 말죠. 저는 요즘 셜록 홈즈(福爾摩斯: Sherlock Holmes)가 어떠한 변화를 거쳐 중국의 호돈(?桑: Nathaniel Hawthorne)이 되었는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호돈이 포스트모던 사회인 오늘날 건너왔다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문학에서 “탐정”은 벤야민이 묘사한 그러한 이미지에서 현재 어떤 이미지로 변화되었을까요?

  고전의 유통과 번역은 상당히 중요한 개념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지점”이라는 개념입니다. 요즘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던한 문화연구에서 이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바로 예전의 일대일의 관계를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말입니다.(不是?)요즘 많은 책에서 “박물관”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박물관은 궁전인 동시에 묘지라서 고전을 추앙하는 동시에 매장시켜 버린다고 말이죠. 때문에 많은 전시(畵展)가 박물관 바깥에서 이뤄졌던 것이죠.

 

        뤄강: 박물관의 배치가 일종의 계급제도를 보여주며, 심지어 권력관계이기도 하다는 비평적 견해도 있습니다. 서구와 비서구, 정통과 이단 등과 같이 많은 개념이 배치의 뒷편에 침투되어 있죠. 관람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박물관에서 의도적으로 배치한 미리 정해진 질서대로 관람하고 동일시될 것을 요구받습니다.

 

(5절 중 제1절만 번역, 읽기 위한 초벌번역/ 추후 인용원문 대조, 교정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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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