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獨立閱讀/講, 구경 2008. 9. 26. 22:48

중국에서 느낀 한 가지는 강연이나 학회 등이 참으로 많고 다양하며, 세계 각지의 유명 학자들이 초청되어 온다는 점이다. 내가 관심 갖는 분야인 중국문학, 역사, 중국학 쪽의 미국, 유럽, 일본, 홍콩 등지의 학계의 거물들이 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들로서는 자기가 연구하는 나라에서 부르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학회 핑계로 돈까지 받아가며 와서는 예전에 써놓은 글 하나 발표하고 나머지 시간은 사람들 만나 인맥을 쌓거나, 중국에만 있는 자료를 수집하거나, 하다못해 관광이라도 한다면 나쁠 게 전혀 없지 않은가.

굳이 중국학이 아니라도 꽤 초청되어 온다.

어제(9월25일)는 복단대 사회과학 고등연구원(复旦大学社会科学高等研究院) "중국과 세계: 사회과학고급논단"(“中国与世界:社会科学高级论坛”)의 발족을 기념하여 마샬 살린스(Marshall Sahlins)가 "포스트모더니즘, 신자유주의, 문화와 인성"(后现代主义、新自由主义、人性与文化)이란 제목으로 초청 강연을 하였다.

여든에 가까운 이 할아버지는 느릿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준비해온 강연원고를 읽었고, 순차통역(?)으로 중국어로 원고내용을 읽었으며 미리 준비된 번역문이 양쪽 화면에 떴다.

http://www.fudan.edu.cn/fudannews/news_content.php?channel=1&id=19337

서두가 너무 길었고 내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강연의 내용이 아니라 강연 전에 생긴 조그마한 소란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강연이 자주 있고 그 중 세계적인 거물들도 자주 오는데, 대부분은 전공불문하고 많이들 몰려오기 때문에 왠만하면 1시간 전에는 가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다.(한 사람이 몇 개씩 자리를 잡아놓곤 한다.) 어영부영하다가 30분 전에 도착하게 되면 어김없이 땅바닥에 앉아서 혹은 뒤쪽에 서서 들어야 한다. 이날도 밥먹고 어기적거리다가 조금 늦게 도착했고 역시나 자리는 없었다. 주최측에서 더 대형 강의실을 준비했어야 했겠지만 그래도 자리가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뒤쪽 출입구에 서 있는데, 여직원이 비좁은 틈을 뚫고 들어갔다 나오고, 다시 (청소, 수리, 혹은 기타 잡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푸른 옷을 입은 남자직원이 또 나를 비집고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왼쪽 통로 끝부분에 어떤 남학생이 간이의자에 앉아 있고 남자직원은 비키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강의실 뒤쪽에 위치한 방송실 겸 중앙통제실에 있는 의자를 그 남학생이 가져가서 앉았던 것이다.
내 상식에서는 허락받지 않고 의자를 들고 갔다면, 그것도 자기 혼자 앉기 위해서 그랬다면 여직원이 와서 달라고 해도 얼굴을 붉히며 미안하다, 여분이 있는 줄 알았다 하고 비켜줬을 것 같은데, 남자직원이 좀 강하게 요구하고서야 마지못해 의자를 내줬다.

조금 더 황당한 일은 그 다음 일어났다.

그 남자직원이 의자를 가지고 나가면서 한 마디를 던진다.  "너희 복단대 학생들 수준이 이게 뭐니?"(你们复旦人的文化水平怎么这么差?!)

그 말을 들은 그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당장 발끈한다.

"무슨 말이냐? 복단대 학생들이 뭐 어쨌다고? 니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느냐?"

그 중 한 남학생은 남자직원이 들고 있는 의자를 잡고 놔주질 않았고 그 옆의 여학생이 몇 마디를 더 보탰다.
즉, 니가 여기서 일하는 것도, 그 의자가 여기 있는 것도 복단대 학생들 때문이 아니느냐는 식이었다.
오래 끌지는 않았고, 그 남자직원이 나간 후 뒤쪽에서 "그래, 의자를 원래대로 가져다 놨으면 됐다, 그만해라"는 따위의 윗선으로 보이는 사람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잠깐만에 끝났고 그 주위에 있던 몇몇만 목격한 소동이지만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 있는 모든 학생들에게 의자를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방송실에는 또 의자가 원래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 직원들의 요구는 내 생각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자기 혼자 편해 보겠다고 의자 가져다가 앉아 있는 이기적인 학생을 비난하는 한 마디, "복단대 학생(复旦人)"의 수준에 자기 동일시하여 주위 학생들이 나서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이 소리다.
앞뒤 따지지 않고 발끈해야할 만큼 "복단대 학생"이라는 기호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덧붙여, 화가 나서 무심코 던진 말이기도 하지만, 직원의 비난은 복단대 정도씩이나 다니는 놈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 라는 그 개인에게 향한 비난으로 읽혀야 한다.)

복단대라는 이름에 대한 자기동일시, 직원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엘리트 의식 따위가 겹쳐 (아무리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너 따위가 복단대란 이름 전체를 무시할 수는 없다 라는 식의 공기가 너무 당연하게 깔려 있었고, 그러한 분위기 자체에 대해 어떤 반성, 혹은 질문을 던지는 눈빛을 보이는 학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물론 이 소동의 주인공들은 기껏해야 10명 안쪽이다.)

그들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잘 느낄 수 있었으나, 살짝 우울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재미난 주제가 될 수도 있겠다. 이런 소속감이 국가 등 더 큰 단위에서 발현된다면?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 가지 사건들과 연관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

 

이글루스에서 by luna | 2008/09/26 22:48 | 조리돌림 | 트랙백 |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