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일전에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읽으며 체크해 둔 몇 부분의 번역을 만져본 것이다. 작품에 대한 자세한 소개나 비평을 원한다면 다른 글을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먼저 책을 읽어봐야 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이 오역을 잡아내기 위한 의도로만 쓰여진 것은 또 아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몇
권의 역서를 통해 보건대, 역자 김태성의 번역은 훌륭하다. 그만큼 일정한 수준의 번역으로 좋은 작품을 소개해주는 사람이 중국어권 번역자 중에서도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소설 번역은 한두 문장의 오역이 있더라도 작품이 전하는 어떤 느낌이나 풍을 잘 살리는 한국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풍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다를 것인데, 내가 역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보고, 시험삼아 한번 번역해 본
것이다.
일단,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제목 번역부터 역자의 입장을 볼 수 있다.
service의 번역어인 "복무(服務)"는 보다 공적인 "봉사"라는 의미와 함께 손님접대와 같은 의미인 "서비스"에도 자주 쓰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군 복무와 같이 제한된 문맥에서만 자주 쓰이고 거의 서비스로 대체된 듯하다. 이 소설에서는 일단 인민대중에게 봉사하라는 모택동의
공적인 표어를 사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다른 "써비스"를 제공해 달라는 말로 치환시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지극히 공적인 표어가 은밀하고
사적인 밀어로 환치되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다른 소개글에서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인민에게 봉사하라"라는 뜻이 표어로서는 가장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봉사"보다는 "복무"를 선택함으로써
역자는 투박하지만 문혁 시기의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투박"이 문제인데, 투박한 문체를 지나치게 세련되게 번역해서도 안 되겠지만, 중국어를 한국어로
옮긴 글의 일반적인 문제가 투박하다는 점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원문 문장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스타일의 투박함이 아닌 번역의 투박함이 생기는
것이다. 혹자는 직역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루쉰의 "딱딱한 번역"이나 "타국화 번역"의 문제로 투박함을 변명하기도 한다. 근데 내가 보기에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게 다 중문과 출신들이 중국소설만 열심히 읽고 한국소설을 많이 읽지 않은 결과이다. 즉 한국어를 능청스럽게 다루지
못한다. 한국어를 장악하지도 못했으면서 한국어를 되돌아보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는 타국화 번역을 지향한다고 떠든다면 말이 될까? (이런 식의
비판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기비판이다..ㅡㅡ;;)
그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옌롄커가 아주 세련된 도시풍의 중국어를 구사하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의도적인 투박함이 아니라) 그와 상관없이 한국어 번역에서는 원문에 너무 매여 늘어지거나 투박하게 만들어진 문장이 있고, 그게
소설 읽는 맛을 조금 떨어뜨리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내가 대안으로 제시한 번역문도 정확하거나 세련된 것은 아닐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거나
그거나 별 차이 없네 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전문을 검토한 게 아니라 읽으면서 체크한 몇 부분만 옮겨본 것이니, 감안하고 읽기를
바란다.
보라색 글씨는 번역 원문, 초록 글씨 나의 수정, 그외는
설명이다.
(첫 시작, 1장 13쪽)
삶의 수많은 진실들은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소설의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기로 하자. 어떤
진실한 삶의 모습은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실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면 이는 소설
속의 사건이기도 하고 삶 속의 사건이기도 하다. 혹자는 삶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소설 속의 사건을
재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삶의 수많은 진실은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해 보자. 왜냐하면 어떤
진실한 삶은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서만 그 진실을 확실한 진실에 이르게 할 수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 진실을 확실한 진실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소설
속의 사건임과 동시에 삶 속의 사건이다.
혹은 삶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소설 속의 한 사건을 재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원문의 문단구분을 따른다.)
13-4쪽.
사단장 집에서 취사를 전문으로 맡고
있는 고참 공무분대장 우다왕이 채소 바구니를 들고 사단장 집 주방 입구에 서 있을 때, 그 사건은 또르르 굴러와 마치 수소 폭탄이 터지듯이
요란하게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원래 식당의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붉고 큰 글씨가 새겨진 나무팻말이
이번에는 타일로 마감한 주방 부뚜막 위에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이 어색한 이유는 2장의 시작과 함께 바로 받고 있는 말과의 호응 때문이다. 2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바로 지금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문구가 새겨진 그
나무팻말이 또다시 식탁을 이탈해 있었다." 그리고 스토리 시간상 이 "또다시" 이후 전개되는 사건이 이
소설의 중심이다.
사단장의 사택에서 취사를 전담하고 있는
고참 공무분대장 우다왕이 채소를 한 바구니 들고 사택 주방 입구에 섰을 때, 그 사건은 수소폭탄이 터지듯 쾅 하며 그의 앞에 펼쳐졌다. 원래
식탁 위에 진열되어 있던, 커다란 붉은 글씨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란 문구가 새겨진 나무팻말이 또
한번 주방의 타일 부뚜막 위에 나타난
것이다.
101쪽.
류롄의 유혹을 거부한 우다왕은 사단장 사택에서 쫓겨나고 전역하게 생겼다. 다급해진 우다왕은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어떤 "기회"? "인민을 위해 복무할" 기회? 자신의 공적인 욕망을 위해 그녀의 사적인 욕망에 서비스할 기회?
류롄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주문을 외며 우다왕에게 옷을 벗을 것을 요구한다. 우다왕은 그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때 류롄은 이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마디를
뱉어낸다." 국역본에서 그 한마디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정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군. 잘했어.
아주 잘했어."
그러나 이러고 보니 발가벗은 것을 칭찬하고 그것으로 끝난 느낌이다. 문맥상 관계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원문은 다음과 같다:
她说,为人民服务,你为呀,你为呀,你为呀。(잡지에서는 "你为呀"라는 말을 한 번만 한다. 분량 때문에?
^^)
그냥 옷만 벗고 끝난 게 아니라, 옷을 벗으며 눈길을 교환하는 동안 둘 사이의 공기는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다면 뒤따르는 마지막 말(5장을 끝내는 말)은 칭찬으로 끝날 게 아니라 생략된 그 이후의 장면을 예비하는 느낌이어야 할 것이다.
즉,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해 봐, 어떻게 서비스할 건데? 해 보라구! 하면서 발가벗은 이후의 행위를 재촉/암시하는 말로 번역되는 게
좋겠다. 내가 제안하는 문구는.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해봐, 해
보라구!"
좀 약한가? 그럼 조금 더 세게 나가보자.
둘의 관계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었고 류롄의 몸은 점점
깨어났다.
114.
"그럴 필요 없어. 어서 나를 안아서
침대에 눕혀줘. 손은 멈추지 마. 입술도 멈추지 말고. 내 거기를 만져줘. 내 거기를
빨아줘.내 거기를 만지고 빨아달란
말이야. 지금 난 사단장의 마누라가 아니야. 나는 우다왕의 아내란 말이야. 난 이미 날 송두리째 샤오우한테
맡켰어. 죽이든 살리든 샤오우 맘대로 하란 말이야."
역자가 조금 지나치게 야하게 번역했다. (원문은 : 想亲我哪儿、摸我哪儿了,你就亲我哪儿摸我哪儿吧). 구문
자체는 "어디든 ~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렇게 해"이다. 어디(哪儿)를 거기(那儿)로 하는 바람에 '세계의 근원', 거기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조금 재미없게 풀어서 해석하면, 내 몸 어디든 키스하고 싶거나 애무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키스하거나 애무하라는
말이겠다.
"필요없어. 그보다 어서 날 안아서 침대에
눕혀 줘. 손은 멈추지 말고 입술도 멈추지 마. 어디든 상관없어.
빨거나 만지고 싶으면 내 몸 어디라도 빨고 만져줘. 이제 난 너희 사단장
마누라가 아니라, 너 우다왕의 아내야. 난 이미 니 꺼니까 죽이든 살리든 니 맘대로
해."
115.
"하늘과 땅처럼 영원하고 열광적인 그날의 키스와 애무로
인해 두 사람의 분명했던 관계는 복잡하고 애매하지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진 그
격정적인 키스와 애무는 그렇게 분명했던 그들의 관계를 모호하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성어의 번역이 조금씩 어색하다. 여기서 쓰인 성어는 천장지구(天长地久)이다. 42쪽의
"주사를 가까이 하면 빨개진다는 식"이란 번역도 마찬가지다.
近墨者黑 近朱者赤(근묵자흑 근주자적)에서 가져온 거지만, 너무 빨간 색을 살리기 보다는 다른 식으로 푸는 게 어땠을까
싶다.
116.
고개를 든 그는 그녀의 창백한 모습을
발견했다. 온몸이 누렇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 같았다.
뜻밖에도 그녀가 혼절한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혼절했다는 것을 알았다.
격정에 사로잡혀 혼절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와의 불타는 섹스가 갑자기 광풍과 폭우가 몰아치듯 그녀에게 경험하기 힘든 숨막힘과 활력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누렇게 뜬 몸을 바라봤다. 죽은 사람인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까무러쳤던
것이다.
그도 그녀가 까무러쳤다는 걸 안다.
격정 때문에 의식을 잃은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듯 격렬한 섹스가 지금껏 맛보지 못한 숨막힘과 활력을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번역에 참고한 원문출처는 다음과 같다.
잡지 <화청(花城)>, 2005년 제1기, 총 제152기.
옌롄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홍콩문예출판사, 2005년 4월
제1판)
개인적으로 흥미있는 독서법은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하진의 <기다림>과 함께 읽는
방식이다.
<기다림>의 우만나도 류롄과 마찬가지로 간호사이다. 만약 우만나가 쿵린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웨이 정치위원과 결혼했다면, 그 이후 펼쳐질 삶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서의 류롄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기다림>의 쿵린과 우만나 이야기의 다른 버전으로 <인민을~>를 읽으라는 것이 아니다. 문혁이라는 시기와 육군병원 혹은
부대라는 공간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소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한쪽은 모든 욕망을 최대한 억누르고 담담히 2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다. 그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은 세상 전체를 파괴할 듯 욕망의 끝까지 치닫는다. 문혁시기를 살아간 대부분의 일반적인 중국인의
삶은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욕망의 극단적인 표출방식이 문혁 시기와 그 시대를 거쳐온 사람들의 어떤
경향성을 잘 보여주는 것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