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獨立閱讀/讀, 서재 2010. 7. 24. 00:30

1. 달제(獺祭)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풀면 “수달의 제사”라는 뜻인데,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달제 혹은 달제어(獺祭魚; 수달이 물고기를 제사지내다)의 뜻은 대충 다음과 같이 풀 수 있다.


# 수달은 포획한 물고기를 물가에 벌려놓곤 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상을 차려서 제사를 지내는 것 같다고 해서 나온 말.

# 글을 지을 때 참고서적을 이리저리 벌려 놓는 것, 전고를 많이 사용하거나 예전에 있었던 관련사항을 나열하여 문장을 짓는 것을 비유.

# 수달이 물고기를 잡으면 잔인하게 죽인 뒤 한 입씩 맛만 보고는 던져 놓아 먹다 남긴 물고기가 사방에 쌓인다고 한다. 이 경우는 ‘제(祭)’의 본의를 ‘잔인하게 죽이다(殘殺)’로 푼 것. (이 경우에도 먹다 남긴 물고기가 쌓이는 것처럼 짧은 글에 다양한 뜻을 쌓아넣는 전고(典故)를 활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수달의 성질이 정말로 어떠한지 보다는 수달을 핑계삼아 짧은 시 한 구절을 지을 때도 세상 모든 책을 펼쳐놓고 뒤적여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고 보면 되겠다. "달제"라는 말을 연상시킬 정도로 함축적인 표현과 전고의 활용에 능숙했던 대표적인 작가는 당대 시인 이상은(李商隱)이다. (자기도 그 많은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어서 그랬겠지만 :-) 그는 시를 지을 때 책상 여기저기에 책을 벌려 놓고 시구를 다듬곤 했다고 한다. 마치 수달이 제사를 지내듯 말이다.[각주:1]


2. 이사 때마다 먼지쌓인 책들이 골치다. 라고 마나님이 말씀하셨다. 저놈의 책 땜에 이사비용도 늘고 시간도 지체되고 정리하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라고 말이다. 동의한다. 한데 나는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고, 잘 정리되어 꽂혀 있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데 마나님은 읽지 않는 책은 살 필요가 없고 읽은 책은 치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뒤적거리며 찾아야 할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고. 정작 나의 작은 도서관에서 필요한 책을 잘만 이용하면서 말이다.

지난 번 이사 때 책을 많이 버렸다. 사실은 복사물이나 다시 보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최대한 주저하며(그리고 마나님이 버리려고 내놓은 것 중 눈치껏 다시 주워담아가며) 선별해서 버렸는데도 꽤 빠져나갔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면 좋을 책도 제법 내다버렸다. 미리 계획하고 솎아 냈다면 헌책방에 기증(?)하거나 블로그에 공지를 올려 필요한 분들에게 선물하여도 좋았을 텐데, 이미 이사라는 "일"의 일부가 된 뒤, 닥쳐서 급하게 하다보니 재활용 공간에 내다 버리기에 바빴다. 헌책이든 새책이든 상품으로 사고 선물로 받은 것이 쓰레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3. 이번에 또다시 큰 이사를 하며 책을 또 줄여야 했다. 시골집 방 한칸에 책을 옮겨놓기로 했는데, 일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필요없는(!) 책을 솎아내야 했다. 무심결에 마님께 이렇게 말했다.

이북 리더 사 주면 당장 책을 절반으로 줄이겠다!
사실 그냥 해본 말이었다. 그걸 나에게 사줄 리도 없고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그걸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되돌아온 답은...

얼만데?

응.. 그냥 흑백으로 이북만 볼 수 있는 건 한 30만원이면 돼.

당장 사줄테니 책이나 줄이셔!
내가 기대한 최대치의 대답은, 내가 그 물건을 사도 괜찮다는 윤허 정도였다. 평소 행동으로 봐서 전혀 믿어지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속는 셈치고 열심히 책을 솎아냈다.


예전 석사논문 쓸 때 어렵게 구한 자료들도 대표적인 것 몇 개만 남겨두고 쑥쑥 골라냈다. 대학원 들어온 후 첫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샀던 당시 시가 30만원 정도의 <한어대사전>은 지난 번 이사 때 버렸다. 씨디롬 나온지 한참 되었고, 요즘은 Lingoes에서 전문을 검색할 수 있다.(위에 달제 뜻풀이도 lingoes 한어대사전 뜻풀이를 '편집'한 거다.) 노신전집은 대학원 후배에게 보내줬다. 그것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노신전집 이야기가 나와서 줄 수 있었다. 지난번 이사 때 아끼고 주저했던 책들, 석박사 논문들, 학회 발표문들, 기타 정리되지 않은 복사물 등을 죄다 내다놓았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랄까, 이상하고 신기했던 건 아무도 책을 골라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설이나 산문집 중에 꽤 읽을 만한 것도 있었고 교재들도 좀 있고, 아무튼 가져갈 만한 책이다 싶은 것, 예전에는 한두 권씩 집어가곤 했던 부류의 책을 이번에는 아무도 집어가지 않았다. 대신 날이 어두워지자 순식간에 통째로 사라졌다. 그 다음날 비슷한 양을 다시 내다 놓았는데, 이번에는 미리 대기한 듯 잠깐 사이에 종이 한장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폐지 값이 비싸져서 그렇게 한두 번 내놓은 양이 6-7만원 어치는 넘어갔나 보다. 이사짐 아저씨가 그럴 거면 자기들 주지 그랬냐면서 들려준 이야기였다.

아무튼, 열심히 책을 줄이고 마님께 다시 당부를 받으려고 물어봤다. "당장"이 언제야? 이사 끝나면 당장 사는 거지? 돌아온 대답은 구질구질하게 밝히지 않아도 모두들 짐작할 수 있을 듯. 처음부터 믿기지 않는 말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 책은 사라졌고 이북 리더도 사라졌다. 덧없는 인생이다.


4. 한국어 전자책 컨텐츠는 아직 그다지 많지 않다. 나는 독서용 책과 참고용 책을 조금 분리하는 편인데, 독서용 책은 여전히 인쇄된 서적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꺼번에 다 읽지 않더라도 "물건"을 들고 한장 한장 넘겨가며 재미난 구절에 줄도 그어가며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아껴읽는 것이 좋고 편하다. 그런데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온갖 잡다한 지식들을 확인하기 위해 그때그때 뒤적여봐야 하는 책은 이북이 좋을 것 같다. 한 구절을 위해 책 한 권의 부피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낭비니까. 책상 여기저기에 이 책 저 책 펼쳐놓는 것보다 컴퓨터 화면에 창을 여러 개 띄워놓고 뒤적거리는 게 시간도 절약되고 공간에 구애받지도 않고 검색에도 편하다. 이른바 e-달제 스타일? ^^;; 적어도 도구가 되는 공구서는 이북이 훨씬 편했다.(사전을 그냥 치운 것이 아니다.)


다행히 나에게 도구가 되는 참고용 책들은 중국어 원전이 많고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근대 이전의 책들이 많다.


영어권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중국은 신간의 이북 종류가 우리나라보다 다양한 것 같다. 솔직히 왠만한 건 다 있다고 보면 된다.  2000년 이전 출간도서의 경우, 아직 규제가 심하지 않아서인지 자체제작한 도서 pdf 파일이 많이 돌아다닌다. 불법dvd와 마찬가지로 이런 해적판 pdf서적들도 앞으로 외부의 압력이 적지 않을 것이고, 결국 많은 규제를 받을 것이다. 근대 이전 자료들은 원작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파일이 웹에 공짜로 돌아다니면 영인한 출판사 쪽에는 손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저작권을 엄밀히 적용하면 문제가 될 사이트가 수두룩하겠지만, 자료 하나 복사하러 북경으로 홍콩으로 다닐 필요 없이 내가 필요한 문서를 열람할 수 있다는 점은 고맙게 생각한다. 한때 영화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오면 눈이 뒤집어져 몇 십만원 어치의 디비디를 사 들고 간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국내에서 정상적인 경로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엄청난 "자료"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되었건 내가 책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셈이다. 한국의 이북은 앞으로 몇 년 두고 봐야겠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중국어/한문 원전의 참고용 공구서의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디지털로 가공되어 있다는 점. 어차피 달제형 인간들은 이북 베이스로 옮겨갈 수 밖에 없을 거라는 것. 고정된 장소에서만 작업한다면 듀얼모니터로 가는 것이 좋겠지만,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다양한 문서포맷을 지원하는 아이리버 스토리.
그러나 그래도 역시 아이패드.

한번 충전하면 무진장 오래 쓸 수 있고 눈에도 편하고 가격도 적당한 아이리버 스토리가 좋을 듯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이패드.

하지만!
내가 선택한 건 Kindle DXG


  1. 宋吳炯《五總志》:“唐李商隱為文,多檢閱書史,鱗次堆集左右,時謂為獺祭魚。” [본문으로]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