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조리돌림 2007. 11. 27. 02:28

늦은 저녁을 먹는데, 뉴스에 온통 무인 달탐사 우주선 창어1호가 보내온 달 사진 이야기 뿐이다.
이제와서 다 아는 달 표면 찍어서 뭣에 쓸 건지 모르겠지만, 속셈은 대충 알겠다.
미국하고 맞짱 뜨고, 나아가 세계 최고가 되고 싶은 거겠지..

“창어 1호의 성공은 힘차게 일어서는 중국의 국력은 물론 높아지고 있는 세계 속의 중국 지위를 상징한다”(원자오바오 총리)



달에 탐사선을 보낼 정도로 드높아진 중국의 위상을 자축하고 있을 때,
다른 채널에서는 "남편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거부하여, 산모와 태아가 죽은 사건"에 대한 심층 보도가 있었다.
지난 21일(수)에 벌어진 모양인데, 오늘 알게 된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대충 이렇다.

며칠째 기침을 하던 마누라(李丽云; 22세)를 데리고 감기 치료를 하러 병원을 찾은 초씨(肖志军; 34세)는
갑자기 의사들이 산부인과로 입원시키고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고 수술동의서류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자
"우리는 감기치료를 위해 왔다, 감기만 낫게 해주면 마누라가 애는 알아서 놓을 거다"는 말만 반복하며 서명을 거부했다.

昨天,肖志军将责任推至医院:“我就是不签字,他们也可以做手术啊!” 记者 周民 摄

("우린 애 낳으러 온 게 아니라 감기 치료하러 온 거라니깐요. 아직 애 놓을 때도 안 됐는데..")


임신 41주인 산모 이씨는 사실 중증폐렴으로 심폐기능이 이미 상당히 약해져 있어
산모와 태아 모두 극히 위험한 상태였기 때문에 즉시 제왕절개술을 해야 했다.
그때 즉시 시술했다면 산모와 태아 모두를 살릴 확률이 60~70%는 되었다고 한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그때 발생했다.
초씨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명을 거부한 것이다.
산모는 이미 수술실로 옮길 수도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병실에서 수술을 진행할 수 있게 서둘러 제반준비를 갖췄다.
의사, 간호사, 옆병실 환자, 보호자, 심지어 병원원장까지 나와 번갈아가며 권유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 사이 산모가 위기를 맞아 심폐소생술로 겨우 살리긴 했지만, 태아는 이미 심장이 멎어버린 상태였다.

다시 한번 위기가 닥쳐 심폐소생술을 한 후 의사들이,
"지금 수술을 하면 어른은 살릴 수 있다"고 또 다시 권해봤지만 되돌아오는 건,
"그녀는 감기 때문에 왔다, 감기만 나으면 애는 마누라가 알아서 놓을 거다"라는 말 뿐이었다.

세 번의 수술기회를 모두 놓친 후, 병원에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산모 리리윈(李丽云)씨는 사망했다.
이날(11월21일) 3시에서 7시 20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아내가 죽고 난 뒤 그는 갑자기 "당신들 왜 내가 서명하지 못하게 막은 거야?"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일단 뉴스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환자나 보호자(가족)의 서명 없이 의사가 수술을 할 수는 없는가? 즉 병원의 책임이냐, 남편 초씨의 책임이냐?
2. 남편 초씨가 정말 합법적인 남편이 맞는가?
3. 남편 초씨가 정신적으로 문제를 겪고 있는 건 아닌가?
4.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서 비합리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닌가?

이 중 2번 3번은 병원 측에서 경찰을 불러 사건 당일 확인한 바 있다.
합법적인 남편이 맞으며(그러나 신부측 부모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결혼 후 찾아갔지만 쫓겨났다)
간단한 정신측정을 통해 보건대 정신이상은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이 때문에 더욱 서명 없는 수술을 병원 측에서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용 문제의 경우, 남편 초씨가 어떤 태도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이었을 거라고 모두들 심정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건, 같은 병원에 있던 환자, 보호자 등이 모금을 해서
서명만 하면 1만 위안(125만원 정도; 제왕절개에 드는 비용은 5천 위안)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계속 거부한 점이다.
병원 관계자들도 돈 걱정 하지 말고 수술을 하자고 권유했는데도 말이다.


(병원 영안실에서 아내에게 절하는 초씨. 뱃속의 아기가 아직 살아 있다며 시체를 냉동시키지 못하게 했으며,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 달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이 사건에 병원의 책임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호자의 서명 없이 의사가 수술할 수 없다"라는 조항이 있기 위해 필요한 어떤 전제가
아직 중국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모든 수술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 모든 걸 의사가 책임져야 한다면 시술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때문에 수술의 필요성과 생존확률을 보호자에게 알리고, 환자와 보호자가 "선택"을 하게 하는 게 옳다.
그런데 보호자에게 그런 상황에 어떤 선택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면?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자신의 환경에 대한 걱정은 차지하고라도..)

병원이란 곳은 가만 두면 낫는 병을 괜히 건드려 돈만 잡아먹는 곳이란 생각을 촌사람 초씨는 했을 수도 있다.
그는 정말 아내의 "감기" 때문에 온 건데,
의사들이 추운 겨울에 아내의 옷을 벗겨 추워서 감기가 더 심해지게 만들고, 쓸데없이 배를 눌러대 죽게 만든 것이다.
촌에서는 의사가 서명이고 뭐고 없이 치료를 해주니,
서명 안 하고 버티면 병원에서 알아서 치료해주고 그에 따른 책임은 자기가 지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간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환자가 지금 어떠한 상황인지
(동네 병원에서 급히 대병원으로 옮기고, 대병원에서도 즉각적인 긴급조치들을 취한 정황증거만으로도 알 수 있을)
다른 모든 걸 팽개치고 해야하는 선택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가난, 무지, 판단능력의 부재가 가져다 준 비극이라고 정리하기엔 ...
그냥 너무 어처구니 없다는 느낌 뿐이다.

사실 이 소식을 정리하면서 나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처구니 없다는 느낌은,
사건 자체에서 먼저 받았고,
그 사건을 전하는 TV 프로그램의 애매한 태도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인터뷰에 응한 담당의사는 가끔 실실 웃으면서 사건당시를 회고했고,
사건을 종합적으로 보도하는 프로그램인 것 같은데, 담당 아나운서의 말투도 상당히 거슬렸다.
남편 초씨는 법적으로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이 사건을 통해 중국 사회가 반성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등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냥 "이해할 수 없음"이란 멘트로 마무리를 했다.
죽은 사람도, 남편도, 의사들도, 그걸 바라보는 관중들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이러한 사건의 배후에 있는 가난과 무지를 없애지 않고
외면적인 번영만 추구하는 세계 최고의 중국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달 표면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지 사진찍는 그 비용으로
지금 자기 땅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관찰하는 데 써야하지 않을까?


이게 먼 나라 이웃 나라 가난한 나라 중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다른 욕망, 다른 상황, 다른 고려 때문에 언제나 우리는
어떤 선택의 상황에서 판단능력이 사라져
가장 중요한 뭔가를 놓치곤 하지 않는가.


 

덧붙이며: 최근 멜라민 사태 때도 여지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번에는 예정보다 앞당겨 유인위성을 쏘아 멜라민 진화라는 의도를 대부분 알아차렸다. 때문에 위성 타고 우주 가기 전에 "많은 아이들이 우주(하늘)로 떠났다"며 그 돈으로 먹거리 걱정없게 하라는 비판여론이 드높았다. 1년 전에는 우연히 대비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고, 1년 후에는 의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위대한 중국이 좋을까, 행복한 중국이 좋을까? 미국과 제대로 맞장뜨려면 사람들 하나하나가 좀 더 어둠에서 깨어나야(계몽) 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올림픽보다는 멜라민 사태가 중국인을 더 깨어나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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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讀, 서재 2007. 11. 18. 04:03

(전면수거된 <화성>2005년 봄호 중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의 표지)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

 <쾌활>로 중국 최고의 문학상인 제3회 라오서 문학상(老舍文学奖)을 수상하였던 그 해에, 옌롄커는 중편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爲人民服務)」(2005)를 문예지 《화성(花城)》 2005년 봄호에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발표 즉시 마오쩌둥 석고상을 부수고 <마오쩌둥 선집>을 찢는 등의 장면이 문제가 되어 당국으로부터 금서 처분과 함께 전량 회수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러나 해외로의 번역 저작권 판매는 금지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해외에 활발히 소개되었으며, 중국에서도 포털사이트 등에서 쉽게 원문을 구해 읽을 수 있다. (물론 전량회수되었다는 문예지 <화성>은 대학도서관에 버젓이 꽂혀 있다. 연구용으로는 허용되는 것인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소설은 문화대혁명 시기, 인민해방군 사단장의 젊은 후처와 그 집에 배속된 말단 사병의 불륜을 그린다. 작가는 쾌락의 끝을 향해 치닫는 남녀의 사랑 행위와 문혁의 집단적 광기를 대비시킴으로써 혁명 서사에 억눌렸던 인간의 감성을 부활시킨다.

 

대만의 저명한 문학평론가 왕더웨이는 이 소설이 등장한 것은 “혁명으로 호소하는 사회가 저물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정의했다.


어긋난 유토피아


《아주주간(亞洲週刊)》 세계 10대 중국어도서에 선정된 <딩씨 마을의 꿈(丁庄梦)>(2006)은 중국 최초의 에이즈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실존하는 에이즈 마을의 환경개선을 위해 쓴 작품이며, 저자와 출판사가 공동 기부금을 출연하기로 협의되었지만, 출판사의 계약위반으로 법정투쟁까지 벌였고 결국 기부금 전체를 저자가 부담했다.

 

이 소설은 현실과 환상이 착종된 서사 스타일로 한 소년의 기억을 통해 중국내륙의 한 에이즈 마을을 조명하고 있다. 이 오랜 마을의 농민들의 빈궁함, 우매함, 낙후, 탐욕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되며, 피를 팔아 가난을 극복하려는 생각이 마을 전체의 에이즈 병동화라는 결과를 불러온다. 이 작품에서 오히려 죽음은 향유하기조차 힘든 사치이다. 의지할 곳 없는 고난과 절망이 죽음보다 더욱 두려운 존재이며, 죽음은 그저 절망의 끝이 아니라 연속일 뿐이었다.

 

옌 롄커는 다루고 있는 소재가 어떤 것이든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생활을 주목하기보다는 그때 그 시절의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지적되어 왔다. 현장성의 결핍이라는 측면에서 봤을때 <딩씨 마을의 꿈>은 지금 여기의 세계에 옌롄커가 주목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소설이다.

 

“의 심할 것 없이 이 소설은 내가 허난성 출신이란 것과 떼어놓을 수 없다. 이 소설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마땅히 사회와 인류에게 가장 최소한의 양심과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이즈가 허난성에 퍼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곳 사람들의 고난과 죽음을 대하는 그들의 감정의 변화과정, 내적세계, 그리고 그들의 생존방식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전 소설과 비교해 보자면, <일광유년>이나 <쾌활>은 상상에서 현실로 진입한 작품이다. 상상은 현실과 역사의 교량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딩씨 마을의 꿈>은 현실에서 역사로 진입한 작품이다. 현실은 상상으로 나아가는 교량이며,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는 근거이다.”


그는 세 부류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기에 적당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마음이 약한 사람이 읽으면 너무 괴로워질 것이다. 둘째 최신문화의 유행을 쫓는 사람들, 예를 들어 장이머우의 <영웅>이나 천카이거의 <무극> 같은 블록버스트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 소설은 어떠한 즐거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셋째, 오로지 자신에게만 주목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읽을 필요가 없다. <딩씨 마을의 꿈>이 독자에게 전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지불해야 할 사랑이다.”



p.s. 최근 옌롄커는 새로운 장편소설 하나를 탈고했다고 한다. 아직 정식발표되지 않아 어떤 내용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편 <연월일> 이후의 옌롄커는 확실히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서도 곧 한두편 번역될 예정인 것으로..(특히 위 두편은 곧!!?)

....
웅진의 중국당대문학 걸작선의 첫번째 작품으로 2008년 4월 30일 출간되었다.
띠지의 홍보문구는 다음과 같다.

"<색,계>보다 위험하고 <화양연화>보다 매혹적이다!"

표지는 상당히 매혹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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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讀, 서재 2007. 11. 18. 04:02

쾌활한 리얼리즘


< 쾌활(受活)>(2004)은 옌롄커 소설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기묘한 상상력, 은유, 아이러니를 버물려 놓은 중국식 마술적 사실주의의 완성이며, “중국문학의 사유를 바꾼 개척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에 부가된 작가의 주석에 따르면 제목 “수활(受活)”은 “향락, 향유, 쾌활, 즐거움” 등을 뜻하는 북방 방언이다. 파러우 산맥(耙耬山脈)에 위치한 쾌활촌민의 지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 바로 이 “쾌활(受活)”이다. 작품은 중국내륙의 외딴 곳에 있는 쾌활촌(受活庄) 이라는 허구의 공간을 배경으로 그려진다. 대대로 이 마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맹인, 벙어리, 절름발이 등 197명의 장애인만으로 구성되어 있어 정상인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취급을 받는 그런 곳이다. 깊은 산맥 속에 위치해 있어 중국근현대사의 그 수많은 전쟁과 운동도 이 마을의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방해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의 붉은 깃발이 중국 대륙 전체를 뒤덮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은 마오즈(茅枝) 할멈과 류잉췌(柳鹰雀) 현장이라는 두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홍군(紅軍)이었던 마오즈는 전쟁에서의 부상으로 낙오되어 쾌활촌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혁명의 물결이 쾌활촌에 미쳤을 때 홍군이었던 마오즈의 피는 다시 끓어오른다. 토호 타도, 농지 분배, 대약진, 인민공사, 문혁과 같은 일련의 혁명개조운동에 촌민들을 이끌고 앞장선다. 그러나 전국을 뒤덮던 3년간의 자연재해를 거치면서 쾌활촌의 자급자족 경제가 상급부처의 징세와 이재민의 약탈로 파괴되는 것을 목도한 후 차츰 혁명의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그 후 인민공사에서 “퇴사(退社)”하여 원래의 “방임, 자유, 자급, 자족”의 생활로 회복하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또 다른 중심인물 류잉췌(柳鹰雀) 현장은 현의 경제상황을 진작시키기 위해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운다. 소련의 해체소식을 접한 후 레닌의 유체를 사와 레닌기념당을 만들어 입장료로 많은 수입을 올린다는 황당무계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그러나 레닌의 유체를 구입할 막대한 자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중, 마오즈와 협상을 생각해 낸다. 쾌활촌이 “퇴사”하여 자유로운 상태로 돌아가게 해 주는 대신 장애인들로 구성된 기예단을 만들어 전국순회공연을 하면서 레닌 구입비용을 모은다는 것이다. 쾌활촌민은 육체적 수난으로 인해 “퇴사”를 결심했지만, 그것을 위해 인격적인 수난의 수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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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讀, 서재 2007. 11. 18. 03:58

혁명과 사랑


<물처럼 단단하게(坚硬如水)>(2001)는 성적 욕망이 가장 억압되었던 “문혁” 시기를 배경으로 혁명의 물길 속에서 사랑에 탐닉하였던 조반(造反) 남녀를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미친 듯이 조반하고, 우파의 집안을 뒤집어 놓았으며 폭력을 행사하고 비판을 주도하는 혁명을 단행하는 한편, 무덤이든 땅굴이든 인적 드문 곳을 찾아들어가 미친 듯이 사랑의 탐욕에 빠져들기도 한다. 특 히 주목할 만한 설정은 “혁명 가곡”의 반주가 울리는 순간 그들의 욕망 또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해진다는 점이다. 그들은 상대의 혁명적 열정을 사랑했다. 샤홍메이(夏紅梅)에게 가오아이쥔(高愛軍)은 혁명의 훌륭한 교과서였고, 가오아이쥔은 혁명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맹세한다.

 

“홍메이, 당신이 믿던 안 믿던, 당신을 위해, 나는 죽을 각오로 혁명을 완수하겠소!”

 

이 소설의 내부구조는 지상과 지하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지상”은 혁명, 정치, 권력, 광명, 미래 등 거대한 붉은 글자들로 가득 찬 양(陽)의 세계이다. 이 부분은 문혁 시기 문학에 자주 사용되던 혁명과 사랑의 서사와 대응하도록 의도적으로 구성한 패러디로도 볼 수 있다. 반면 “지하”는 묘지, 터널, 정욕 등 음(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혁명가곡에 의해 촉발되는 충동적인 욕망만이 이 두 세계를 연결시켜 준다.

 

한 편 이 두 세계는 작품 내부에서 두 가지 상이한 담론체계를 구성한다. 독립적이면서 서로 뒤엉켜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는 두 세계와 마찬가지로 정치 담론과 개인 담론은 서로 병치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독특한 담론적 풍경을 보여준다.

 

문화대혁명 초기 마오쩌둥에 의해 행해졌던 중요한 언설들이 가오아이쥔의 입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지만 그건 어딘지 비틀어져 있다.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개인 담론에 의한 정치 담론의 전복을 통해 더욱 반어적으로 다가온다. 가오아이쥔과 샤홍메이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도 혁명의 언어는 달콤한 사랑의 밀어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거기서 정치 담론과 개인 담론은 완전히 뒤섞인 상태로 나타난다. 옌 롄커는 정치권력의 담론을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지상 세계의 견고한 자태를 묘사하는 동시에 지하 세계의 개인 담론을 통해 정치 담론을 해체하고 그것의 허위와 황당함을 까발리며, 그 부드러운 본질을 보여준다. 유희적인 문체 속에서 정치담론과 개인담론, 견고함과 부드러움 사이의 묘한 전환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 러나 상흔문학(傷痕文學)이나 반사문학(反思文學)이 정치담론의 개인담론에 대한 폭력을 강조하면서 둘 사이의 이원대립적 관계를 구성한 것과는 달리, 옌롄커는 그것이 양자 간의 묵계에 의해 서로 교환되는 것임에 더욱 주목하였다. 정치담론이 원초적 충동에 근거한 개인담론의 체계 속으로 들어오면서 둘은 서로 의존하기도, 충돌하기도 하며, 양자는 배척관계인 동시에 공모관계인 것이 드러난다.

 성 과 사랑에 관한 서사는 문혁 시기까지 다루기 애매한 주제였다. 그나마 사랑은 있었지만 성과 욕망에 관한 묘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성이 버려지고 그 자리를 동지끼리의 정치적 신념과 혁명 신앙이 대신한 것이다. 이는 20세기 초기의 소설에 대한 다음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남 자들은 혁명으로 인해 사랑을 얻고, 여자들은 사랑 때문에 혁명을 추종하는 줄거리가 사랑을 묘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리하여 원래 생동적이고 미묘하여 규범 짓기 어려운 사랑의 체험은 협애한 혁명적 주제로 수렴되었고, 색정적이고 애욕적인 부분은 말끔히 씻겨나가 버렸다.”

 

“성적 욕망은 사회제도에 대한 잠재적 전복이다. 정욕이 싹트는 것은 이질적인 사회구성의 시작이다.”

 

성적 생산과 권력 생산을 미묘하게 중첩시켜 상징질서를 재조합하고 프롤레타리아 정치구조를 재검토했다는 면에서 <물처럼 단단하게>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말: 이 책은 현재 2008년 출간을 예정으로 번역 중이라고 한다. 내 실력으로는 내용만 대충 파악할 정도다. 매끄러운 한글로 조만간 만날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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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讀, 서재 2007. 11. 18. 03:56

중국에 대한 가혹한 은유와 냉엄한 반어


형이하학적인 현실과 “고난”을 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사색의 도구로 삼아 자신의 스타일로 체화한 것은 <일광유년(日光流年)>(1998)부터이다. 허난성의 파러우 산맥(耙耬山脈)의 한 궁벽한 곳에 위치한 삼성촌(三姓村)의 주민들은 후도절증(喉堵絶證)이라는 특이질환으로 인해 대대로 40세를 넘기지 못한다. 39세의 촌장 사마람(司马蓝)은 식수가 발병원이라고 판단하고는 백리 바깥에 있는 강물을 끌어오려 한다. 이에 그의 연인 남사십(蓝四十)을 필두로 여자들은 몸을 팔고, 남자들은 화상환자들에게 자신의 건강한 피부를 팔아 모은 자금으로 도랑을 파지만, 흘러들어온 건 시커멓게 오염된 폐수였다. 질병 없이 40세 이상을 살겠다는 촌민들은 꿈은 부서졌다. 도랑을 파기 위해 감수했던 모든 고난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람들은 물에 뛰어들고 목매어 자살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사마람은 40세 생일에 병 없이 죽는다. 그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깊은 절망으로 죽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깥세상의 폐수를 마주하는 순간 유일하게 남아 있던 희망마저 사라진 것이다.


신중국의 농촌을 그린 이 소설은 옌롄커가 3년간 세 차례에 걸쳐 수정을 가하며 완성한 노작이다. “나는 이 작품을 살아 있는 인류, 세계와 토지에게 바친다. 이 작품은 또한 장차 내가 인류, 세계와 토지를 떠나게 될 때 남길 유언이기도 하다.” “고난”을 해결하려 할 때 더욱 큰 “고난”에 포위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 그는 가난과 기아, 물질과 욕망이 착종된 농촌의 모순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신선한 언어와 대담한 의식, 시적인 상상으로 농촌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문단 내외의 주목을 받았으며, 중국의 농촌에 대한 전범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립된 유토피아가 만난 바깥세상의 폐수는 개혁개방 이후 전지구화의 오염에 물든 중국의 은유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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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이라는 신화


 

제2회 루쉰 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연월일(年月日)」은 천고에 다시없는 가뭄으로 모두 “바깥세상으로 떠나버린” 후 72세의 할아버지(先爺)만 남은 파러우 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일하게 남은 옥수수 싹을 키우기 위해 할아버지는 대자연에 완강하게 대항하고 있다. 소설은 지극히 고통스러운 할아버지의 생존상황을 묘사한다. 그는 집도 양식도 없이 쥐를 잡아먹거나, 물을 구하기 위해서는 잡아먹힐 위험을 감수하면서 먼저 웅덩이를 차지하고 있는 늑대와 대치해야 한다. 오직 눈먼 개 한 마리만이 그를 지키고 있다. 그는 개와 교류하고, 바람과 이야기하며, 자기 자신과 이야기한다. 쥐는 그의 양식을 훔쳐 먹고, 바람은 옥수수 싹을 쓰러뜨리며, 태양은 대지를 철판처럼 단단히 태워버린다. 옥수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할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옥수수 뿌리에 묻는다. 옥수수의 삶 또한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온갖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할아버지의 살과 골수에 뿌리를 내려 인체의 양분으로 살아남아 결국 열매를 맺게 된다.

 

이야기는 생동적이되 결코 현실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반적인 농촌소설과는 달리 「연월일」은 구체적인 시공간도, 닭소리도,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세계에는 할아버지와 개, 쥐, 늑대, 태양, 바람, 그리고 적막함과 황량함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추상적일수록 보편성을 얻어 소설에 등장하는 일련의 예술적 이미지들은 깊은 의미를 지닌 상징적 기호로 화한다.

 

“연월일”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를 뜻하는 말이며, 유사 이래 인류가 겪어왔으며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대자연에 대한 항쟁을 상징화한 것이다. 「연월일」의 세계는 중국 농민의 생존환경에 대한 상징이며, 중국사회의 역사적 상징이기도 하다.


耙耧天歌——涨潮丛书




阎连科:与土地有关(节选)


“如果我写不好,不能怪任何人,只能怪自己对自己的束缚。
我首先要冲破自身的束缚,这一关冲不破,不要怪任何人。
解决了这一点,我觉得作品会比原来好一些。解决不了这一
点,不管社会怎么变化,我也写不出什么好作品。不在于意
识形态如何,在于你的内心勇气有多大”

郭玉洁/文

逃离土地:“文学改变了我的命运”

《生活》:你最早开始写作是在什么时候?我记得你说过,写东西可以把你带入不同的生活?

阎 连科:我出生在河南嵩县,是洛阳地区非常贫穷的一个县,改革开放二十多年来,一直稳居河南省人均收入倒数第一,偶尔掉到第二、第三,从来没有到第四。这样 的地方,饥饿是最重要的问题。再加上家里长期有病人,我大姐从12岁开始老是犯腰疼,又找不到原因,现在知道就是股骨头坏死,但当时谁也不知道,为她看病 花了好多钱。

我 老家现在变成了小镇,以前是公社(乡)所在地。每天中午,你会看见公社干部敲着饭盒,提着开水壶往食堂去了,每个月还能领几十块钱工资。当时我对他们羡慕 不已,心想能过上这样的生活,就是人生最大的理想了。但这样的生活首先要有个工作,解决了户口,说白了,就是逃离土地。

说 到写作,我一再说到,真是要感谢张抗抗。她有个小说叫《分水岭》,我是在1975、1976年看到这篇小说,内容提要上有一百多字,说张抗抗是下乡到北大 荒的知青,写出这个小说,出版以后,她就留在哈尔滨工作了。当时我觉得,写小说就可以去城里工作,哦,原来就这么简单,所以我就这么偷偷摸摸地写起来了。

《生活》:一开始写作就写长篇吗?是从长篇的结构出发去构思的吗?

阎连科:那时候哪知道什么长篇、中篇和短篇的区别啊,完全没有构思可谈,就写了二十多万字,然后就丢在家里当兵走了。

我后来一直说,还是文学改变了我的命运。

跟 你说心里话。当兵走,才第一次坐火车,在部队,第一次看见电视机,第一次听说中国有女排。在新兵连出黑板报,写点顺口溜的诗歌啊,写点所谓的散文诗啊,反 正压点韵就叫散文诗了。指导员一看,黑板报出得很好,就问我,你爱写什么样的东西?我说爱写小说。他说拿给我看看。我就给哥哥写信,哥哥说,这些稿子母亲 烧柴火的时候烧了,不过没烧完,还剩一些,就寄了过来。
我的命运好就好在,1979年打仗了,那个指导员非常爱才,他告诉我说,武汉军区有个创作学习班,在河南信阳,你去吧。万一我们的部队要去打仗,你就回来,但是他又说,你要实在回不来,也别那么赶,回来以后把连队的猪喂好就行了。我对这个人非常感激。

在 那个创作学习班上,我才知道什么叫长篇、中篇、短篇,知道有杂志叫《人民文学》,《解放军文艺》。真正的开始应该是这里。1979年,我在武汉军区的《战 斗报》发了一篇小说,叫《天麻的故事》。故事很荒唐,就是一个战士非常想入党,给指导员送了几斤天麻,指导员把天麻悄悄放在战士床头,又给他放了一封信。

我觉得那个小说能发表,主要是我抄了好多屠格涅夫的《白色草原》的风景描写。编辑一眼就看了出来,他说你这小说写得很好,人物也塑造得活灵活现,但是,你受屠格涅夫的影响太大了。

这 篇小说发表以后,在连里特别轰动。怎么突然之间来了一个新兵,在报纸上就发了大半版,那时候部队特别重视新闻,大家都吓坏了,就把我调过去搞新闻。但我搞 新闻真搞不来,又没参加过新闻学习班,就发一个小散文、小诗歌,只要你的名字在报纸上出现一次,就算发了一篇新闻。最后变成一个规定,名字在省级报纸上出 现五次,年底就记个三等功;如果在国家级报纸上出现一次,就记一个三等功,如果名字在国家级报纸上出现五次,马上就能提干了。但这怎么可能呢?怎么可能在 《解放军日报》、《人民日报》上发表文章呢?那个难度是极其大的。

所以我那时候就等着节日,劳动节、七一、八一,写个节日的诗歌呀、散文呀。那时候为了记三等功努力再努力,目的非常明确,就是为了提干,逃离土地,改变命运。

但不凑巧,1979年以后,战场上立过功的人都提干了。干部太多,上面就下文件说,全军停止直接从战士中提干,所有提干都必须经过院校培训。就是考大学了嘛,但还有一个规定,所有考生年龄不得超过21周岁,我当时22岁,那就是什么也不能了。

就 这样的情形维持了三年,考学也不行,提干也提不。就想退伍回家算了,我当兵三年,立了三个三等功,党也入了,就一心想回家当党支部书记。但走的时候,火车 还有半小时就开了,团长开着越野车从月台上飞驰而来,下了车就大叫,阎连科在哪里?在哪里?他一路小跑,一个车厢一个车厢地喊,找到我以后说,那年武汉军 区业余战士演出队在全军汇演的时候拿了一个第一名,其中独幕话剧是我写的。总政给武汉军区二十多个特殊的提干指标,也就是不需要考学,也不需要打仗立功。 其中写作方面,军里点名要我。

可是当时我退伍的手续都办完了,退伍的钱也花完了,粮票也寄回去了,连被子都没了。团长说,这样吧,你回家去,一个礼拜后回来提干,如果你不回来,这个指标就给别人了。

我 回家后和家里人商量。大家心情都很矛盾。回去吧,前线打仗还没完呢,不回去吧,这可是一生的事情。再说,家里也的确需要劳动力。那时候我哥哥在县邮电局工 作,晚上12点,他沿着河,打着手电,徒步三十里回来了,告诉父母说,让连科回部队提干去吧,在家里一点用都没有。说完坐了一坐,又徒步三十里回去了。

哥哥的一句话就这么决定了我的前途。第二天,家里把喂的一头猪卖掉,还110块的退伍费。我回到部队,年底提干。

这就是文学改变了命运。特别具体,特别现实。

(全文即将刊登于《生活》杂志2006年5月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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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讀, 서재 2007. 11. 18. 03:40

군대와 향토

옌롄커의 창작경향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처녀작 이후 한참 뒤인 1986년에 중편 「작은 마을의 작은 강(小村小河)」을 발표하면서 그는 서서히 문단과 평론계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다. 이 시기, 즉 1981년~1989년까지의 초창기에는 작품 편수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줄거리의 구성과 서사기교의 측면에서도 별다른 특징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다 해방군예술대학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문학창작을 교육받은 1989년부터는 수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서 비약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많은 문학상을 받기 시작했으며, 많은 독자, 평론가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야오거우 사람들의 꿈(瑶沟人的梦)」, 「야오거우의 낮(瑶沟的日头)」, 「하일락(夏日落)」, 「천궁도(天宫图)」, 「토지를 찾아서(寻找土地)」 등 여전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많은 작품이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그의 창작경향에 있어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온 시기는 1995년이다. 군인작가, 신향토소설가로 정의될 정도로 옌롄커는 초기에 다량의 군사소설, 향토소설을 썼으며, 그 중 대부분은 중국적 이데올로기 내부에 함몰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경향의 소설들이었다. 작가 자신도 이 시기의 소설에 대해 “80% 이상이 쓰레기”이며, “이후 다시 읽을 용기가 없다”고 할 정도로 평범한 창작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작품은 「연월일(年月日)」과 <일광유년(日光流年)>부터이다.” 이때부터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장편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으며, 문단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된다. 중국 당대문학의 중요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연월일(年月日)」, <물처럼 단단하게(坚硬如水)>, <쾌활(受活)> 등 대표작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다.


20여 년간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옌롄커의 작품세계는 두 공간으로 압축된다. 고향의 파러우 산맥(耙耧山脉)을 주요무대로 하는 “농촌”이 아니면 농민출신 군인 위주의 “군대”를 중심으로 그의 작품은 펼쳐진다. 그러나 군대를 소재로 한 옌롄커의 소설은 전쟁을 묘사하지도, 피아의 모순을 첨예하게 대립시키지도 않았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는 영웅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군사소설과 다르다. 옌롄커의 군사소설은 사실 군인과 군대의 신성함과 신비스러움을 해체해 버린다. 그가 형상화하는 것은 “농민”으로서의 군인, “사람”으로서의 군인이다. 전체적으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군인은 외형, 성격, 정신, 사상 등 모든 면에서 농민의 형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군인복장은 사실 농민의 특수한 복식이고, 군대는 사실 읍내 시장에 장보러 갔다가 잠시 머무는 객잔이다.”(<생사정황(生死晶黄)>) 이들이 입대한 목적은 도시에 남고, 간부가 되고, 입당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촌장이 되거나 관리가 되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이 천착하는 유일한 세계는 “파러우” 산맥(耙耬山脈)이라는 지명이 연상시키는 쟁기, 농경의 이미지가 잘 보여주듯이 농촌이라고 할 수 있다.


가난과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그를 소설가로 만들었지만, 고향에 대한 애착은 그의 소설 곳곳에 고향 허난성에서의 삶의 흔적들을 남겨놓고 있다. 고향은 그에게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이다. “나는 할 이야기가 없을 수도, 쓸 거리가 없을 수도 없다. 내가 매년 나를 낳고 길러준 그 마을로 돌아가 걷고, 보고, 어머니, 누나, 형, 이웃의 말을 듣기만 하면 온갖 신기하고 진실한 이야기와 줄거리가 내 머리 속을 뛰어다닌다. 소설을 쓰고,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써왔던 건 내가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선택한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이런 모습으로 써낸 것이 아니라 생활이 원래 그런 모습인 것이다. 생활이 나에게 반드시 이렇게 쓰도록 했다. 나의 소설 구상은 어떻게 하면 생활의 내재적 논리를 위배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가 전부이다. 생활의 ‘내재적 논리’를 포착하되 모두들 표면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생활의 논리여야 한다는 것, 이것이 글쓰기의 관건이고 구상의 관건이다.” 그 또한 모옌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벗어나기 위해 소설가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고향을 벗어나서는 소설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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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讀, 서재 2007. 11. 18. 03:39

옌롄커(阎连科)


옌롄커는 현재 중국에서 평단의 반응과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장악한 중국 당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제1회, 제2회 루쉰 문학상, 제3회 라오서(老舍) 문학상(2005년)을 포함한 국내외 문학상을 20여 차례 이상 수상하였으며, 상당수 작품이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등 10여 종의 외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11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수필, 산문, 8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2007년 9월 12책 분량의 <옌롄커문집(阎连科文集)>을 인민일보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1985년 하남대학 정법과를 졸업했으며, 1991년 해방군예술대학(解放军艺术学院) 문학과(文学系)를 졸업했다. 2004년 군인신분에서 벗어났으며, 현재 중국작가협회 전국위원회 위원, 북경시 청년연합회(青联) 위원, 일급작가, 북경시 작가협회 전업작가로 있다.

 

옌롄커는 1958년 허난성(河南) 쑹현(嵩县)의 작은 마을 톈후진(田湖镇)에서 태어났다. 그 옛날 중원으로 불리며 중국 고대문명의 발원지로 이름을 날렸지만, 대륙의 문명이 몰락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중국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지역이 되어버린 곳이다. 생년월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빈곤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입대할 때 서류작성을 위해 회계관이 임의로 작성한 출생일이 1958년 8월 24일이다. 어머니는 생년월일이 아니라 수확을 못할 정도로 고구마가 풍작이었고 찌는 듯이 무더운 해에 태어났다고만 들려줬던 것이다. 대략적인 추측에 의해 뒤늦게 부여받은 날짜이긴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유희와 장엄이 함께하는 무엇이었다. 옌롄커는 자신의 감수성은 확실히 쑤통, 위화 등 60년대 작가와는 다르며, 50년대 작가의 그것임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중국에서 50년대 작가와 60년대 작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문학사적 개념이다. 유년기를 어떤 방식으로 거쳤는가가 한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이들을 가르는 차이는 문화대혁명(1966-76년)이란 역사적 사건이다. 대약진 운동, 반우파투쟁, 문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급투쟁의 역사가 그들의 신체에 각인한 것이 무엇이든, 그 또한 50년대 작가인 모옌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을 회상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년기의 배고픔이었다. 혁명이 아니라 생존 자체가 그와 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토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한다.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소설 창작으로 한 작가의 환경 자체가 달라진 것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1975년 동북 지역의 궁벽한 농장에 하향되어 있던 여류작가 장캉캉(张抗抗)은 소설 <경계선(分界線)>의 후반작업을 위해 대도시인 하얼빈으로 옮겨오게 되며, 소설이 출판된 후에도 하얼빈에 남아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즉, 소설가가 되면 농촌을 떠나 도시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고등학생이던 1975년부터 습작을 시작하여 「산고을의 혈화(山鄕血花)」라는 계급투쟁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물론 언제 불쏘시개가 되었는지도 모를 소년의 백일몽이었다.

 

실제로 토지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다른 농촌청년들과 마찬가지로 1978년 입대를 하면서이다. 입대 후 부대에 있는 문학창작 학습반에 들어가면서 정식으로 문학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1979년 우한의 《전투보》에 처녀작 「천마 이야기(天麻的故事)」를 발표한다. 이 소설은 한 병사가 공산당 입당을 위해 간부의 방에 몰래 천마(天麻) 한 근을 뇌물로 가져다 두는데, 간부가 이를 물리치며 병사에게 편지로 혁명적인 교훈을 전하는 내용이다. 소설이 발표되자 전 사단이 들썩였으며, 옌롄커는 원고료 8원의 반을 잘라 부대원들에게 사탕과 담배를 대접하며 자기 문학의 시작을 자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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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讀, 서재 2007. 10. 27. 03:11

리얼(李洱)


중국에서 신생대 작가(新生代作家)로 일컬어지는 리얼은 현대 중국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개성화된 담론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탐색과정을 보여주는 작가로 문단에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는 소설의 기교를 중시하는 선봉적인 의미의 작가임과 동시에 항상 스스로를 발견의 과정에 두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생활과 세계에 대해 의혹과 경계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나는 경험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혼자만의 경험과 거리를 확보하여 우리 담론생활의 진상을 고찰하고 싶다. 형식과 이야기의 금기 깨기에서 나의 창작은 시작된다.”


80년대 말 창작을 시작한 후, 지도교수가 죽었다(导师死了), 오후의 시학(午后的诗学), 현장(现场), 거울을 깨고 나오다(破镜而出), 망각(遗忘)(“대가문학상(大家文学奖)” 수상작), 밤의 도서관(夜游图书馆), 수다스러운 벙어리(饶舌的哑巴)30여 편의 중단편과 5권의 소설집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장편으로는 <노래가락(花腔)>(2002),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石榴树上结樱桃)>(2004)가 있으며, 현재 허난성 문학원 전업작가 및 문예지 <망원(莽原)>의 부주편으로 있다. 아직 그는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지만, 중국의 지적인 독자층과 문단의 평가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 : 허난성 출신인데 상하이에서 대학을 다니고 처녀작을 썼다. 당시 상황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 : 소설을 쓰고 싶어 중문과를 지원했고, 화둥사범대학의 문학동아리에 가입하여 아방가르드적인 분위기에서 습작을 했다. 선봉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처녀작 복음을 졸업 직전에 발표했다. 비교적 만족스러운 작품은 지식인의 생활을 묘사한 중편 지도교수가 죽었다이다. 작품을 발표한 수확(收获)은 초고를 돌려주는 좋은 전통이 있었다. 몇 구절을 수정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게 이후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400원이라는 거액의 원고료로 냉장고를 샀다.

 

* : 지도교수가 죽었다, 오후의 시학, 현장등 초기작은 주로 지식인의 생활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지식인의 처지에서 무엇을 발견하려 한 것인가?

* : “초기가 아니라 줄곧 지식인의 생활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지식인이 역사와 현실에서 겪는 곤경과 개인의 존재 의의를 소설의 형식으로 탐색하고자 한 것이다. 다른 이야기를 써도 바로 되돌아와 버린다. 게다가 기껏 써냈다고 해도 그 배후에 지식인의 시각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복잡함을 몇 마디로 압축하기는 힘들다. 죽을 때까지 써야 할 것이다.


* : 대표작 노래가락(2002)을 시작으로 크게 달라진 점이 사회의 공공영역에 대한 깊은 관심인 것 같다. 이전까지는 개인적인 영역에 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생긴 것인가?

* : 이전에도 개인적인 영역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변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점점 문제의 복잡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때문에 경험의 복잡성을 표현하는 데 보다 주의했다. 역사 또한 현실이며, 다른 주제를 주면 다른 제품을 생산하는 역사서술의 작업장 분위기도 알게 되었다. 개인의 소멸, 민족주의의 복잡성 따위에 대해서도 의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노래가락을 쓰게 된 것이다.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또한 변화하였다. 여기서는 중국고전소설의 표현수법을 현대소설의 서사에 시도해 봤으며, 농촌에 관한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 : 2004년에 발표한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는 농촌의 정치에 관한 소설이다. 지식인 소재에서 농촌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이며, 다른 향촌소설과의 차이는 어디에 두고 있는가?

* : 향토 중국에 관한 소설을 쓰는 건 계속 꿈꿔오던 것이었다. 다른 향촌소설과 차이가 있다면, 나는 기이한 사건을 서술하거나, 일상적 사건을 배경으로 현재의 모든 난제를 묘사하고 싶지 않았으며, 현대화의 과정에서 발생한 향토 중국의 변화를 표현하고 싶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작가들의 관심은 고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곤란함에 더 주목하고자 하였다.

 
* : 동시대의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들의 장점, 혹은 단점은 어디에 있는가?

* : 사실상 글쓰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이후 모두들 대면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전지구화의 상황에서 중국적 현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그 복잡성을 표현할 것인가? 또한 그 표현은 독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소설가의 도덕적 대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글쓰기가 개인적인 것임을 강조한다면 90년대 초반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좀 큰 문제인 듯 보이지만 사실 모두와 관계된 것이고 모두에게 도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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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讀, 서재 2007. 9. 16. 22:55
류전윈은 글쓰기를 운동에 비유하기를 즐긴다.

 

운동에는 승리를 추구하는 운동과 실패를 알아가는 운동이 있다.
구기종목은 대부분 승리를 위한 운동이다.
그러나 높이뛰기는 실패를 알아가는 운동이다. 막대기가 떨어지면 경기가 끝난다.
글쓰기는 류전윈에게 있어 실패를 알아가는 운동인 것이다.


 

“만약 어떤 작품을 쓰고 나서 스스로 그게 굉장히 좋다고 생각된다면 그 작가는 그걸로 끝장이다.
작가가 어떤 걸 진심으로 써냈다면 항상 너무 부끄러워져 남에게 보이기 민망해지기 마련이다.
쓰기 전에는 자신이 있어 이 작품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쓰고 나면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래서 또 다른 걸 써 보지만 여전히 아니다.
자기가 표현하려는 게 하늘에 있는 것 같아 하늘에 가서 찾아보지만 아니고, 골짜기도 여전히 아니다.
어렵사리 발견했다 싶은데 자세히 보면 또 아니다.
글쓰기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어렴풋이 알아가는 과정이며, 계속하여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닭털 같은 나날>의 작가 류진운의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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