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문화혁명/80년대 2009. 11. 25. 00:01

중국의 80년대가 가지는 현재적인 의미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을 목표로 작가, 예술가, 학자, 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80년대의 인물들이 모였다. 2006년 5월 출간된 《80년대 중국과의 대화》는 그 해에만 수차례 재판을 찍을 정도로 호응을 얻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주간지 《신주간》新週刊 의해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출간 이후 각종 매체에서 앞 다퉈 관련 인터뷰와 비평을 소개했으며, 80년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토론회가 조직되고 책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80년대 주요인물에 대한 인터뷰가 기획되거나 비슷한 주제의 텍스트가 쏟아져 나와 일시에 "80년대 회고 붐"이 일어날 정도였다.


80년대 중국과의 대화
10점


베이징을 기점으로 한 이러한 80년대 회고 붐은 그에 앞서 중국을 휩쓸었던 1930년대 상하이 회고 붐과 여러 면에서 대별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경제 중심으로서의 상하이와 정치문화 중심지인 베이징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평가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옛 상하이에 대한 회고는 경제적인 측면, 즉 물질문명을 둘러싼 중국의 근대화가 어떤 기원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90년대적 관심의 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그것의 반대급부로 과도한 소비주의를 낳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성의 계기로 80년대라는 시좌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태초의 혼돈을 깨고 덩샤오핑이라는 만물의 어머니가 세상을 재구성하던 시기, 아직 대지와 바다는 구분되지 않았고 모든 것의 경계가 흐렸지만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충만했던 시기가 이른바 중국의 80년대였다. 대중문화와 물질만능주의의 만연, 전문화 현상으로 인한 사회 영역 간의 고립과 소외에 직면한 90년대 이후의 중국을 바라보면서 이들은 다양한 가능성이 충돌하며 이상과 열정을 채워가던 신화적 공간으로 "80년대"를 재호명한다. 매체에 의해 부풀려진 면이 없지 않지만, 90년대와는 다른 가능성의 탐색 기제로 80년대를 돌아보고 평가하는 것이 지금의 중국에서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다.


80년대 중국은 두 가지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0년 동란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후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태도로 세계를 대면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함께 가치관과 사유방식에서도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들은 신체에 각인된 문혁의 이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음영을 털어내고 새로운 사유방식과 문화를 재건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다. 우리로 치면 386세대라고 할 수 있을 이들이 80년대라는 시기를 어떻게 보내왔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어떠한 변화를 시도하였는지를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자젠잉은 80년대를 "당대 중국의 낭만시대"로 규정한다. 90년대 이후가 경제적 이익이 유일한 목표인 시대라면 80년대는 이상과 정신적 열정이 들끓던 시대였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시각은 그녀가 책의 뒷표지에서 제시한 80년대와 90년대를 특징짓는 키워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80년대 : 격정(激情), 빈곤(貧乏), 열성(熱誠), 반항(反叛), 낭만(浪漫), 이상주의(理想主義), 지식(知識), 단절(斷層), 촌스러움(), 멍청함(), 허풍(), 경박함(膚淺), 광기(瘋狂), 역사(歷史), 문화(文化), 순진(), 단순(簡單), 사막(沙漠), 계몽(), 진리(), 팽창(膨脹), 사상(思想), 권력(權力), 상식(常識), 사명감(使命感), 집체(集體), 사회주의(社會主義), 엘리트(精英), 광장(廣場), 인문(人文), 배고픔(饑渴), 화끈함(火辣辣), 우정(友情), 논쟁(爭論), 지식청년(), 뒤늦은 청춘(遲到的)



* 90년대 : 현실(現實), 이익(利益), 돈(金錢), 시장(市場), 평화로운 변화(和平演變), 정보(信息), 새로운 공간(新空間), 솔직(明白), 처세(世故), 유행(), 개인(個人), 권력(權力), 체제(體制), 성형수술(整容), 조정(調整), 총명(精明), 불안(焦慮), 상업(商業), 소란스러움(喧囂), 대중(大衆), 분노한 청년(), 자본주의(資本主義), 신체(身體), 서재(書齋), 학술(學術), 경제(經濟), 주변(邊緣), 상실(失落), 접속(接軌), 국제(國際), 다원(多元), 가능성(可能性)



이런 식의 배치가 노리는 것은 80년대와 90년대를 각각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양분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각 시기에 주로 사용되었던 단어들을 통해 간명하지만 효과적으로 변화된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이분법이 "우리가 청춘기를 보냈던 80년대에 비해 90년대는 너무 변했어!"라는 주관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지금 현재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주류가 되어 있는 80년대의 총아들이 자신의 위치를 특권화한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들은 사상적 속박에 구속되어 있던 문혁 시기와 선을 긋는 한편 물질적 소비주의 시대로 특징되는 90년대와도 차별되는 초월적 공간에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책의 발간 이후 비교적 광범한 사회적 반응을 불러왔던 이유 중 하나로 지금 중국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특정 계층이 이 책을 통해 개인적 기억을 되살리고 자신들의 역사를 긍정하려 했다는 비판이 거론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매체를 움직이는 것 또한 이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바로 그 세대이니 말이다.



모든 사람의 기억이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환기되고 다른 많은 기억들은 억압된다. 따라서 이 책에 쏟아진 많은 비평은 "누구의 80년대인가?", "11인의 대담자는 어떤 기준에 의해 선정된 것이며, 그들이 80년대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모아지고 있다. 그에 뒤따르는 비판은 "평민의식"이나 "하층민에 대한 관심"이 결핍되어 있는 "엘리트주의적인 담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담자의 구성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긴 하지만)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고 저자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일군의 문화계 인사로 제한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은 문혁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대입학력고사를 통해 대학교육을 받았고 미국 유학을 통해 친분을 쌓았으며 지금 현재 문화계 각 분야에서 성공한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80년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려는 기획이 아니라는 저자의 잇단 해명에도 불구하고 특정 영역에 국한된 엘리트들의 목소리만 담은 것이라는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과연 이 책의 대담자들이 중국의 80년대에 대한 기억을 대표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왜 베스트셀러 작가인 왕숴王朔 아닌 아청이, 장이머우가 아닌 톈좡좡이, 자장커의 조력자에 불과한 린쉬둥이 대담자로 선택되었는지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80년대의 영광을 정말 제대로 추억할 수 있는 문화계의 성공한 엘리트라면 장이머우가 제격 아닌가? 거침없는 문체로 대중을 사로잡은 왕숴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이런 면에서 질문을 "누가 기억하는가?"에서 "무엇을 기억하는가?"로 옮길 필요가 있다. 평민, 혹은 대중이라는 신분이 정치적 올바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담자의 사회적 신분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반성적 거리를 가지고 자기 세대를 구성하는 인자들을 분석하며 물려받은 유산을 활용하는지를 세심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은 객관적이고 형해화된 형태로 깔끔하게 정리된 담론에서는 파악하기 힘든 그 시절 중국인들의 개인적이고 평범한 일화를 통해 중국의 감춰진 속살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대담은 원경에서 자신들이 포함된 풍경조차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구성한 것도, 클로즈업으로 다가가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경험을 구술하는 것도 아니다. 20년이라는 시간 간격은 카메라 렌즈에 비유하자면 시야를 횡적으로 확장시키는 광각렌즈도 아니고 주변 풍경을 싹둑 잘라내고 대상만을 강조하는 망원렌즈도 아닌 50mm 표준렌즈의 시각을 가져다준다. 그러면서도 그 렌즈를 활용하는 각각의 개성에 따라 보다 멀찍이 떨어져 폭넓은 풍경을 보여주거나 지극히 세부적인 문제에 들이대기도 한다. 바로 지금 시점이 80년대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보다 포괄적인 시야가 확보되겠지만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판별하기는 힘들게 된다. 보다 이른 시기에 이런 시도가 기획되었다면 특정사건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이 가능했겠지만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를 드러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저자 또한 "왜 지금이 80년대를 회고하기에 적절한 시기인가"를 설명하며 현재와 80년대의 거리를 영화의 미디엄 쇼트로 비유한 바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대담자가 저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 우리에게 딱히 단점으로 작용할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80년대 전체에 대한 거대서사를 그리려는 시도가 아니라, 상이한 활동영역과 기질을 지닌 개인의 제한된 목소리와 기억을 들려주고자 한 것이다. 공식화된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적이고 은밀한 기억들은 그러한 친밀한 관계 속에서 보다 자연스럽게 발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이러한 글을 통해 그들이 술자리에서 편하게 나누는 대화를 엿듣거나 밤새 논쟁하던 그 시절을 추체험할 수 있다. 문혁을 막 벗어난 후, 혁명의 열정을 그대로 가지고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내려는 의욕과 에너지가 분출되던 시기가 80년대였다. 90년대는 그러한 열정의 질적 변화를 특징으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80년대가 축적한 지식과 경험이 성숙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국의 80년대가 우리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킬지언정 지금의 한국적인 상황에 딱 들어맞는 뭔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경로의 하나로 80년대식 뜨거운 피를 구성하는 기본인자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둘 필요는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80년대"는 1978년의 개혁개방에서 1989년 톈안먼 사건까지의 역사적 시간을 지칭한다. 그러나 대륙에서 출간된 원저에서는 중국 정부에 의해 금칙어가 된 "톈안먼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어 대부분 "89년" 혹은 "80년대 말" 등의 에두른 말로 마감하곤 했다. 그 외에도 주로 공산당이나 마오쩌둥을 직접 거론하여 비판한 내용은 대륙판에서 삭제되었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미묘한 단어들은 다른 용어로 대체되어 있었다.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홍콩판(홍콩 옥스포드 출판사, 2006)을 참고하여 대륙판에서 삭제된 본문내용을 최대한 되살렸다. 재미있는 것은 삭제에 대한 감각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인데, 이런 비판도 가능할까 싶은 문장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가 하면 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단어나 문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서너 페이지씩 통째로 잘려나가곤 했다. 이러한 대륙판 원문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삭제된 부분을 표시하는 방식을 강구하였으나 편집과정에서 반영되지 못해 아쉽다. 또한 삭제된 분량이 너무 많아 대륙판에서는 출간을 포기한 "류펀더우" 장은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어 번역본에 실리지 못했다. 적절한 시기에 출판사 홈페이지를 통해 해당 장의 번역을 공개하도록 하겠다.


이 책의 번역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말투와 목소리를 표정 없는 글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개념과 논리의 좌표만 잘 잡으면 일관된 논지로 흘러가는 이론 저작과는 달리 곳곳에서 동문서답, 옆길로 새기, 토속어와 그 시기의 유행어, 속어, 관용어 등이 튀어 나와 번번이 애를 먹었다. 능력이 닿는 한 원문이 전하는 분위기와 그들의 개성이 한국어로 잘 표현될 수 있도록 고심했다. 번역어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를 감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말로 풀기도 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쓰는가, 어떤 맥락에 쓰는가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게 대화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어와 한국어의 무게 차이도 고려했는데, 잘못 가늠한 무게에 대해서는 많은 조언을 부탁드린다.) 각주는 최소화했으며 앞뒤 문장의 조응에 의해 맥락이 드러날 수 있도록 처리했다. 여러 장벽에 막혀 번역을 끌었지만 그것의 결과로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실제 '현장분위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바랄 나위 없을 것 같다. 그래야 예정된 일정이 한참 지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준 주승일 차장과 그린비 편집부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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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80년대 2009. 7. 9. 14:58
외국어는 언제나 스트레스이다.
나의 뭉개지는 발음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이런 것도 모른다고 물어보면 무식하단 소릴 듣지나 않을까?
이렇게 말하는 게 문법에 맞는 표현일까?
등등.. 목록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예전에 누군가의 인터뷰에서 독일인가 프랑스에서 현지어를 모르는 장모님이 현지 할머니와 한참 수다를 떠는 걸 보고 신기해서, 어머님 무슨 말씀하셨어요? 물어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고 대답했다는 게 생각이 난다.(정확한 출처는 찾아보지 않았다..) 한국어로 말하고 독일어로 대답해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 반대로 한국어로만 대화를 나눠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지금 국회나 파란기와지붕 아래 있는 사람들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이 통할까? 무슨 외계어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냥 그들과 오래 지내다보면 말이 통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소통은 수사가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일 테다.


아래는 천카이거에 의해 영화화된 바 있는 소설 <아이들의 왕>의 작가 아청의 인터뷰 중 일부이다.

양쯔: 오랫동안 미국에 계셨는데, 영어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나요?

아청: 영어가 스트레스였던 적은 없습니다. 중국에서도 저는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잖습니까. 그런 동네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문제가 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습니다. 장족(티벳) 지역에서든 타이족(태족:傣族) 지역에서든 마찬가지죠.
    중고등학교에서 저는 영어를 배웠습니다. 당시에는 출신성분이 안 좋으면 영어반, 출신성분이 좋으면 러시아어번에 들어갔습니다. 커리큘럼이야 똑같이 <류샤오치의 모포> 같은 거였죠.
    의사소통은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그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렇지만 신체언어, 눈빛, 직감만으로도 바로 이해되는 경우도 많아요. 바로 그 분위기 안에 같이 있기 때문이죠. 영국에 가면 정통영어를 하겠지만, 미국에서는 각종 유형의 영어가 사용됩니다. 라틴아메리카식 영어, 흑인식 영어 이탈리아식 영어, 중국식 영어 등등, 언젠가 차를 고치다가 아르메니아식 영어를 들었던 적도 있어요.

양쯔: 영어로 책을 읽는 것은 어떤가요?

아청: 영문서적을 읽는 게 많이 힘들지는 않습니다. 제 독서량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니까요.

-- 양쯔杨子, <예술 인터뷰(艺术访谈录)> 중에서

비슷한 구절을 아청의 다른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청: ... 제가 가진 특수한 경험은 열 몇 살에 삽대를 떠났는데, 그 지역 말을 거의 못 알아듣거나 전혀 못 알아듣곤 했습니다. 내몽고, 윈난 모두 제대로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래서 미국에 갔을 때 영어를 못 알아들어도 별로 스트레스를 안 받았어요. 십여 년을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못 알아듣는 환경에서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자젠잉: 항상 소수민족들과 함께 있었습니까? 그럼 어떻게 말을 하나요?

 

아청: 간단한 말만 하다가 조금씩 복잡한 말을 배우기 시작했죠. 욕부터 먼저 배우고, 정식 표현도 조금씩 배워갔죠. 그들도 중국어 표준말을 하긴 하는데, 그렇게 힘들게 중국어를 하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배우는 게 낫겠더라구요.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야 얼마 되나요 머. 미국에 가서도 비슷했죠.

 

자젠잉: 당신의 경우 어떤 면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었겠군요. 다른 사람에게 그건 중심에서 주변으로 내몰리는 경험이었습니다. 80년대 출국한 대부분이 받았던 느낌이 그랬습니다.


-- 자젠잉查建英, <80년대 중국과의 대화>(八十年代:访谈录) 중에서



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80년대 2008. 2. 12. 15:14

번역을 하다 모르는 작품이 있어 검색하다 흔적을 조금 남겨 놓는다.
(정리는 차후로 미뤄야겠다)
원래 내가 찾으려 한 것은 영화나 연극 작품인데, 아마도 조형물이 먼저였던 것 같다.


收租院:
사천성의 지주 류문채의 장원에 소작을 걷는 과정을 표현한 대형 진흙 조각상 정원.
문혁 시기 전국에서 유명한 계급투쟁의 교육기지로 사용되었다.
1965년 6월에서 10월에 창작.
65-66년에 베이징에서 복제품이 전시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기도 했다고.
현재도 여전히 관람이 가능하며, 원래의 교육적 기능보다는 지난 역사의 한 표본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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收租院

四川大邑县地主刘文彩的庄园——收租院,曾经是全国闻名的阶级斗争教育基地。

收租院

中 国现代大型泥塑群像。创作于1965年6~10月,陈列于四川省大邑县刘文彩庄园。作者是当时四川美术学院雕塑系教师赵树桐、王官乙,学生李绍瑞、龙绪 理、廖德虎、张绍熙、范德高及校外雕塑工作者李奇生、张富纶、任义伯、唐顺安和民间艺人姜全贵。四川美术学院雕塑系教师伍明万、龙德辉带领一年级学生隆太 成、黄守江、李美述、马赫土格(彝族)、洛加泽仁(藏族)参加了后期的创作。

收租院根据当年地主收租情况,在现场构思创作,共塑7组 群像:交租、验租、风谷、过斗、算账、逼租、反抗。它们以情节连续形式展示出地主剥削农民的主要手段——收租的全过程,共塑造114个真人大小的人物。雕 塑家将西洋雕塑技巧与中国民间传统泥塑的技巧融而为一,生动、深刻地塑造出如此众多不同身份、年龄和个性的形象,可谓中国现代雕塑史上空前的创举。群像与 收租环境浑然一体,收租情节与人物心理刻画惊心动魄,集中地再现出封建地主阶级对农民的残酷剥削压迫,迫使他们走向反抗道路的历史事实。在这组作品中,写 实风格和泥土材料的运用颇为恰当,中、西雕塑技巧的融合也达到了和谐统一的效果。

收租院于1965~1966年间在北京复制展出,曾引起很大反响。其后曾在阿尔巴尼亚、越南展览,1988年则以玻璃钢镀铜新材料的复制品在日本巡回展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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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收租院,最具影响的有三个版本:原版在四川省大邑县安仁镇刘氏庄园,黏土雕塑,四川美院师生和当地民间艺人集体创作,1965年完成;1965年底在在北 京展出其复制品,几个原创者和中央工艺美院一些师生共同完成;1974年,部分原创者和四川美院的师生在四川美院用玻璃钢镀铜重塑了这件作品;其他形式复 制品不计其数。1999年,第48届威尼斯双年展蔡国强以观念、行为作品《威尼斯的收租院》获得大奖,引起艺术界争议。一般提到收租院,均指“刘氏庄园 版”。

收租院的诞生和经历都颇具传奇色彩。1964年,为了“艺术地再现恶霸地主的心狠手辣和劳苦大众的疾苦、愤怒”,有关部门召集 民间艺人创作泥塑作品,但力有不逮,遂向四川美院求援。于是四川美院师生和当地民间艺人精诚协作,完成了大型群雕收租院。此后收租院在经历了持久的风光和 并不短暂的沉寂,近来重又受人关注。

收租院以地主庄园收租场所实地环境,分为送租、验租、风谷、过斗、算帐、逼租、怒火等连续的情 节,塑造了114个与真人大小相近的人物,塑像布局全长约 96米。形象刻画十分精细写实,加上环境为实景,力求营造真实感。塑像采用民间泥塑的传统方法,即用稻草与棉絮和泥在木扎骨架上塑成,眼睛是黑色玻璃球镶 上去的。

事实上,收租院已经被符号化了,它本身的情况不重要,固有色已让位于打在它身上的灯光。它被贴上了种种标签,它在一大堆标签 中间迷失了自己。红色狂潮的 20世纪60年代,人们从四面八方赶来,坐长途火车来,坐敞篷货车来,步行几十公里来,到川西的一个小镇上,亲眼看一看“超现实主义的”收租院,验证并强 化一份阶级仇恨,并惊叹于作品本身的艺术水准。作为阶级斗争工具的收租院,为作为艺术品的收租院增添了万丈光芒,被认为是“社会主义的现实主义艺术原则与 社会主义政治需要相结合的完美典范”。

当众多的文艺作品被打为“大毒草”的时候,与八个样板戏一起,根红苗正的收租院,以微不足道的 力量去丰富人们贫乏的精神生活。也正是这一畸形的角色保全了它,收租院得以在破坏一切的十年浩劫中非但安然无恙,而且保持着比较高的社会关注程度,甚至屡 有国外机构和个人邀请出国办展览。

当国人把关注的重心从阶级斗争转入经济建设之后,与“文革”中其他大红大紫的人、事、物一样,收租 院慢慢淡出人们的视野。只是偶尔还会有一些人,在特定的场景之中,还会想起往事,那些往事或许正好与收租院有关。在人们的视野之外,收租院褪了光芒,遭人 诟病。“京剧亮相式的造型和连环画式的情节毫无突破可言。”

当一次文化事件发生,许多的人和机构纷纷浮出水面,声称对收租院拥有著作 权,大家才恍然记起,还有这样一个堪称宝贝的东西我们已很久没有关注它了。于是,作为一个文化热点,具备了流行的要素,它的名字被一些相关的无关的人叨 扰,它发现自己也可以重新让人关注。它记录了一段特定历史时期的一段特殊往事,与一个地主有关,而地主庄园都把名字改为刘氏庄园了,收租院只能让人增长知 识,已不能增长年轻人对一个已消亡阶级的仇恨。

因为收租院泥塑作品在叙事上采用了虚构和夸张,所以有人认为“它为我们提供了一个范 例:它展现了在一个与世隔绝的社会中艺术家如何能够真诚严肃地去为谎言而工作,并且在这种背景下达到一种极致的状态。”这种虚构和夸张与造型上的写实,形 成了一种奇特的合力,让它“控诉万恶的旧社会”收到了出乎意料的效果。

现在,收租院泥塑作品依然每天接受来自全国各地世界各地游人的参观,但它的教化功能已经萎缩,只是做为一段历史的标本,供人回忆、遐想和缅怀。

链接:

大邑刘氏庄园博物馆,AAAA级景区,原名大邑地主庄园陈列馆。有南北相望的两大建筑群,占地约7万余平方米,建筑面积达2万余平方米,建筑时期为清末至民国,这是中外闻名的,我国现存完整且规模浩大的刘文彩地主庄园——“老公馆”和“新公馆”。

刘 氏庄园为中国近现代社会的重要史迹和代表性建筑之一。该馆建立四十多年来,积累了丰富的藏品,内涵丰富。现有文物,藏品2万余件,规模宠大,保存完好的庄 园建筑群,及庄园遗存的大量实物和文献资料,加上独具特色的庄园陈列,构成了一个有机整体,为认识和研究中国半封建、半殖民地社会经济、文化建筑及中国四 川军阀史、民俗学的重要场所和实物现场,是旧中国农村的一个缩影,是中国社会发展史的一个断面。雕塑《收租院》闻名遐迩。

地址:成都市大邑县安仁镇,距成都52公里

交通:城北客运中心、青羊宫、金沙车站等处每日均有数十班车前往大邑,到大邑后转车去安仁。成都的新南门汽车站有直达景区的班车。

门票:45元/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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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출간된 연환화 사진 일부이다.


店名: 佳亭藏书店
品名: 《收租院》
编号: PA00337437
规格: 010504
分类: 绘画单行本-现代-四川-文革-32开
简介 四川人民出版社1973年1版1印,雕塑作品连环画,印量:120,000,公藏库存。封面一处蚀洞,前衬页书脊处两处撕口,较小,书脊租字上是一蛀洞,内页干净如新。
备注: /
品相: 9.5品
起拍价格: ¥49.00 元/册
最低加价: ¥10.00 元
保留天数: 3 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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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스에서 by luna | 2008/02/12 15:14 | 八十年代 |
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80년대 2007. 6. 9. 02:33

77학번, 78학번. 문혁 종결후 재실시된 대입학력고사(高考) 첫 세대.
그들은 젊은 날 혁명의 물길에 휩쓸여, 그리고 이어서 지식청년으로 농촌에서, 공장에서 노동을 직접 경험하느라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이다.

한창 기본기를 닦아야 할 나이에 세상을 배운 세대,
그래서 배움에 대한 열기는 뜨거웠던 세대.
그런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야 할까,
80년대를 거친 후 각계에서 현재 중국을 움직이는 주역이 된 것 또한 이들 세대이다.

눈여겨 보고 있던 이 세대에 대한 특집이 <남방 인물주간> 최근호에 소개되었다.
꼼꼼히 번역하려 보니 시간도 많이 들고 이것저것 찾아봐야겠다.

다음 글부터는 시간과 정력을 아껴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만 정리하는 식으로 소개해볼까 한다.

 

대입고사(高考) 재실시 30년, 상식을 회복한 이후


인물주간(人物週刊) 2007년6월1일 제13기 總第86期


1977년 8월 6일, 베이징. 전국과학교육공작 회의가 진행되는 사흘 내내 덩샤오핑은 듣고만 있었다. 

  이 회의에 참가한 33인의 과학자와 학자 중 가장 젊은 52세의 무한대학 부교수 자취안싱(査全性)은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몇 해 동안 수업 한 번 못해본 것이다. 용기를 내어 주석을 향해 7년간 계속되어 온 “추천입학” 모집방식의 4대 폐단을 지적한 뒤 대입고사(高考)의 재실시를 건의했다. 말이 떨어지자 수학자 우원쥔(吳文俊), 광학자 왕다헝(王大珩), 화학자 왕여우(王猷) 등이 찬성하는 뜻을 표하며 대입고사 재실시의 중요성에 대해 한층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하였다.


  심사숙고하며 듣기만 하던 덩샤오핑은 그 즉시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대입고사는 반드시 재실시하도록 하자!” 두 달 후 10년 동안 닫아 둔 대입고사의 문의 활짝 열려 전국 570만의 학생이 고사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이 해의 대입고사가 가지는 의미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중국 전체로 봤을 때도 이 대입고사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이를 기점으로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무질서한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이성이 통하는 사회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때 문에 상식을 회복한 지 30년, 이 30년 동안 국가의 운명과 대학생들의 운명은 서로 연결되기도 했고, 서로 중첩되기도 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대학생의 운명을 해독함으로써 국가 전체가 밟아온 궤적을 이해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0 여 년 동안 대입고사는 개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자젠잉(査建英), 거자오광(葛兆光), 양잉밍(楊迎明), 팡톄(方鐵) 형제 등 이 대입고사를 통해 77학번, 78학번이 된 하향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지청(知靑)들이 있는가 하면, 급변하는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창조한 80년대 후반학번 IT계의 엘리트 다이즈캉(戴志康) 같은 사람도 있다. 특수한 시대가 77, 78학번 대학생들에게 역사적인 고난을 가져다주었지만 후배들이 누리기 어려운 혜택 또한 누릴 수 있게 해줬다. 그들 중 상당수가 논밭을 갈다가 오늘날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지위에 올랐으니 말이다. 그러나 요즘처럼 터져나가는 인재시장에서 대부분의 졸업생이 2000원(30만원 이하)이라는 최저 봉급을 받기 위해 치열히 경쟁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 입 제도는 부단히 개혁되고 대학은 모집인원을 확장하며 학비도 올랐다. 그러나 최근 입시제도에 기대보다는 비난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매체에서는 계속하여 대학생들에게 취업 시기를 조정할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계획경제시대와 다리 직장을 분배받지 못하게 된 대학생들은 완전히 다른 심정을 내보인다. 일부는 분노하고, 원망하며, 상실감에 빠져 지내고, 다른 일부는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된 것을 기뻐하며 자기가 택한 길을 향해 나아간다.


  오 늘날의 학생들도 “지식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가? 실용주의, 기능주의가 가득 찬 오늘날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수한 개인의 운명이 쌓여 국가의 운명이 되고, 국가의 운명이 또다시 개인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피해갈 수는 없다.

 

이글루스에서 옮김 by luna | 2007/06/09 02:33 | 八十年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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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80년대 2007. 4. 6. 01:32

최근 중국에서는 80년대를 돌아보는 기획 및 서적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물론 대부분은 하나가 뜨니까 덩달아 시시콜콜한 온갖 내용들만 대충 정리해서 찍어낸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80년대"라는 키워드가 90년대 이후의 삶과는 다르면서 그것을 여전히 규정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문혁"이 신체에 각인한 기억을 어떤 식으로 정리하고 넘어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겠죠. 그것을 80년대는 "낭만"적인 방식으로 분출했다면, 90년대 이후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보자로 넘어가 버린..

지 금 사회 각계각층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이들이 바로 문혁 시기 청소년(홍위병 포함)이었고, 문혁 끝난 직후에 대학을 뒤늦게 진학한 세대들이죠. 제가 눈여겨 보고 있는 세대입니다. 대입제도 부활 직후 학번인 78학번. 유명한 사람만 대도, 장예모, 천카이거, 왕휘, 진평원 등 부지기수입니다.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구요. 사실 대부분은 정치적 역량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의외로 알짜배기가 많다는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제 결론은 중고등학교 때 공부 안 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다가, 머리 굳어도 철들어서 공부 열심히 하면 된다 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구요~ ^^;;)

이 들을 기준으로 한 반세대 정도 위 사람들, 가장 왕성하게 자기 사유의 자양분을 얻을 청춘기(홍위병이 되긴 늦은 나이)를 문혁 때 보냈고, 문혁 종결 후 복권되어 눈치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의 사유구조도 흥미롭고요, 이들이 죽기 전에 제대로 정리해 둬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 보다 반세대 정도 아래 사람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죠. 문혁 시작 즈음에 태어나 문혁이 끝날 때쯤 학교를 다닌 이들입니다. 지금 학계, 정치계, 경제계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한창 배울 때 혁명하느라 바빴고, 시골이나 공장에서 노동하면서 10대 후반, 20대 초반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절대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들이 아니죠. 그 사상성이 노력과 결합하여 제대로 실력을 갖춘 사람도 분명 있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대부분은 "정치적 수완"으로 먹고 사는 사람인 듯합니다. 생명력이 질기긴 하겠지만 곧 도태될 가능성도 많죠. 최근 중국에서 40대 간부가 많아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즉 윗세대에 비해 훨씬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으로 무장되어 있으니까요. 학계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집니다. 80년대에 고교, 대학교에서 정상적으로 교육받은 세대들이 지금 서서히 주목받고 있고, 곧 실력으로 전체 분위기를 장악할 거구요. 90년대 이후 세대처럼 질문하지 않고 받아적기만 하는 '학생'들과도 다른 면이 있는 듯합니다.

암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제가 눈여겨 보고 있는 책은 <80년대: 인터뷰집>이라는 책입니다.

八十年代访谈录

        * 원제: <八十年代访谈录>

作者:       查建英
出版时间: 2006年5月
出版社:    生活·读书·新知三联书店


아래는 제가 정리한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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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5월 출간된 후 의외의 호응을 얻어 현재 4판을 찍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주간지 <新週刊>이 선정한 2006년 “올해의 책”에 꼽히기도 했다.

  80 년대 중국은 두 가지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0년의 동란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후, 개혁개방의 물결이 휩쓸어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대하게 되었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그와 함께 가치관과 사유방식에 있어 거대한 변화를 맞이했다는 점이 다른 하나이다.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들은 신체에 각인된 문혁의 이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그 음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유방식과 문화를 재건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다. 우리로 치면 386세대라고 할 수 있을 이들이 80년대라는 시기를 어떻게 보내왔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어떠한 변화의 시도를 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자젠잉은 80년대를 “당대중국의 낭만시대”라고 정의한다. 90년대 이후가 경제적 이익이 유일한 목표인 시대라면 80년대는 이상과 정신적 격정이 들끓던 시대였다. 책의 뒷표지에는 80년대와 90년대를 각각 특징짓는 키워드를 실어놓고 있다.

* 80년대: 격 정(激情), 빈곤(贫乏), 열정(热誠), 반항(反叛), 낭만(浪漫), 이상주의(理想主義), 지식(知识), 단절(断层), 촌스러움(土), 멍청함(傻), 허풍(牛), 경박함(肤浅), 발광(疯狂), 역사(历史), 문화(文化), 순진(天真), 단순(简单), 사막(沙漠), 계몽(启蒙), 진리(真理), 팽창(膨胀), 사상(思想), 권력(权力), 상식(常识), 사명감(使命感), 집체(集体), 사회주의(社会主义), 엘리트(精英), 인문(人文), 배고픔(饥渴), 화끈(火辣辣), 우정(友情), 논쟁(争论), 지식청년(知青), 뒤늦은 청춘(迟到的青春)

* 90년대:
현 실(现实), 이익(利益), 돈(金钱), 시장(市场), 정보(信息), 새로운 공간(新空间), 솔직(明白), 처세(世故), 유행(时尚), 개인(個人), 권력(权力), 체제(體制), 성형수술(整容), 조정(调整), 총명(精明), 불안(焦虑), 상업(商业), 소란스러움(喧嚣), 대중(大众), 성난 청년(愤青), 자본주의(资本主义), 신체(身体), 서재(书斋), 학술(学术), 경제(经济), 주변(边缘), 상실(失落), 접속(接轨), 국제(国际), 다원(多元), 가능성(可能性)

  이 책에 대한 가장 많은 비판은 “평민의식”이나 “하층민에 대한 관심”이 결핍되어 있는 “엘리트주의적인 담론”이라는 것이다. 이는 문학, 영화, 음악 등 문화계에서 어느 정도 명망을 얻은 인물들이 대상이 된 인터뷰이들의 면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과연 중국의 80년대에 대한 기억을 대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80년대 전체에 대한 거대서사를 기획할 의도는 없었으며, 상이한 활동영역과 기질을 지닌 사람들 개인의 제한된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했다고 항변한다. 또한 인터뷰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각 영역의 주류 엘리트인 것은 아니며 대부분 삐딱선을 타고 있는 다른 종류의 엘리트임을 주의 깊게 살펴봐 줄 것을 주문한다.

  < 저 낮은 중국>(퍼슨웹, 2004)이 하층민의 구체적인 삶을 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것이라면, 이 책은 비록 비주류이긴 하지만 중국의 문화적 엘리트가 그들의 이상이 좌절되기 전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각기 다른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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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참 좋은 나라입니다.
이미 책으로 출간된 책임에도, 전문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지요.
중국어가 가능하신 분은 아래 사이트에 가면 전체 인터뷰를 볼 수 있습니다.

http://lz.book.sohu.com/serialize.php?id=4838

또 다른 사이트는, 인터뷰와 함께 다른 사람들의 글도 볼 수 있어요.

http://www.chinese-thought.org/zttg/0486_bashiniandai/index.htm

이글루스에서 by luna | 2007/04/06 01:32 | 八十年代 |
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80년대 2007. 4. 6. 01:30

이 글은  <80년대: 인터뷰>의 저자 자젠잉(査建英)와 <新週刊>의 인터뷰 중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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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간> : 지난 세기 80년대에 청춘기를 보낸 후 오늘 <80년대: 인터뷰집>라는 인터뷰집을 내놓았는데, 당신에게 80년대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젠잉: 한 마디로 대답하기 곤란하군요. 예를 들어 책 뒷표지에 80년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를 달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책을 편찬하면서 인터뷰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오던 말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열정(热忱), 빈곤(贫乏), 반항(反叛), 낭만(浪漫), 이상(理想), 지식(知识), 단절(断层), 촌스러움(土), 멍청함(傻), 허풍(牛), 경박함(肤浅) 같은 것들이죠. 이 단어들 모두를 한곳에 모아보면 80년대의 기질과 분위기가 느껴질 겁니다. 한 단어로 80년대 전체를 개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집단(集體)” 같은 말을 예로 들자면, 당시에는 확실히 무리를 이루는 문화가 아주 중요해서 당파를 결성하기라도 하는 듯 하곤 했죠. 그러나 무리 안에서도 같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동시에 개성의 해방과 자유로운 창작 또한 추구했죠. 이는 작은 집단으로 큰 집단에 반항하면서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마도 80년대를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일 것입니다. 요즘은 개인의 목소리가 더욱 개인화되었지만, 더욱 고립되고 산만해졌다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왜 “당대중국의 낭만시대”라고 80년대를 묘사했냐하면 말이죠,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미친 듯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허무와 이상을 이야기하면서, 첫사랑이나 꿈속의 연인을 대하듯이 지식을 추구하고 창작을 위해 몸부림쳤으며, 읽고, 탐색하고 사색하는 것을 살아가는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기고 행복해했다는 점은 아주 낭만적이면서도 시적 감성이 풍부한 삶이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물론 당시는 중국이 정치중심에서 경제중심으로 옮겨가는 과도기로 문화가 막 수면 위로 떠오르던 때였고, 모두들 국가의 밥을 먹었고 체제 내에서 살았으며,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어 경제적인 압력이나 유혹이 크지 않았고 정치도 비교적 개방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전심전력으로 문예와 철학을 토론할 수 있었던 거죠. 이런 특수한 시기가 다시 반복되기는 어려울 겁니다.

..
신주간: 당신과 친구들이 1980년대를 이야기하도록 촉발한 것은 무엇인가요? 그저 그 시절을 회고하겠다는 간단한 이유만은 아니겠죠?

자젠잉: 누구나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옛 시절을 회고합니다만, 이 책의 의도가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80년대의 그 많은 가십거리에 대한 잡담이면 충분하겠죠. 최근 중국인들이 요즘 왜 이렇게 이익을 추구하는지 질문이 던져지곤 합니다. 종교적 전통이 너무 약하고 문화는 너무 세속적이어서 정신적으로 아무런 경외를 품지 못해서일까요? 제 생각에 중국인의 종교는 역사 안에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역사에 특히 경외감을 품어 역사가 거의 종교의 역할을 하곤 했죠. 예를 들어 유교 문화의 윤리도덕에는 강한 선악관이 들어 있는데, 우리의 전통이 이미 몰라볼 정도로 손상되었다고는 하나 많은 중국인들의 잠재의식에는 여전히 인과응보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업보가 유전되는가 하면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입니다.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과거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격려하거나 참고하기도 하는 것이죠. 중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중시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역사의 기억과 역사의 서사는 아주 중요한 것이죠. 순식간에 20년이 지났으니 마땅히 80년대를 회고할 단계가 된 셈이죠. 그 시절에 대한 많은 정보는 정부에서 제공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아래에서 특정 사건에 대한 몇 가지 세부적인 담론이 형성되고 있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깊이 있는 반성을 제공하는 담론은 결핍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전체적으로 반성한다면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결론을 내리자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시작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신주간> : 1980년대는 정말로 그렇게 아름다웠습니까? 그 시절을 되돌아볼 때, 당신이 인터뷰한 사람들의 기억상의 착오로 그 시절의 조악하고 비루한 것들은 희미해지고 아름다운 측면만 남게 된 것이 아닐까요?

자젠잉: 어느 시대나 아름답고 추한 양측면이 공존하는 법이죠. 80년대의 문제에 대해 제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사실 상당히 격렬한 비판을 전개했습니다. 담론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정말 솔직하게 다 말하진 못했지만 말입니다. 모두들 확실히 80년대식의 성실함과 격정, 우정을 그리워했죠, 그러나 이런 좋은 건 당연히 그리워할 만하지 않은가요?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시절의 사상과 창작의 가볍고 조악함에 대해 검토했습니다.
이글루스에서 by luna | 2007/04/06 01:30 | 八十年代 |


자젠잉, “80년대를 회고할 시기가 되었다”-- 《新週刊》과의 인터뷰

출처: http://www.sachina.edu.cn/Htmldata/news/2006/06/1658.html


이글루스에서 # by luna | 2007/04/06 01:30 | 八十年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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