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우리는 “땟놈”이라는 말에서 잘 씻지도 않는 지저분한 중국인을 연상하곤 한다. 물론 “땟놈”의 “때”는 몸에 낀 때와는 상관없는 말이지만,[각주:1] 요즘도 상하이 등 대도시의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중국인들이 외모에 많이 신경쓰지 않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사천 사람들은 태어날 때 한 번, 죽을 때 한 번 목욕한다(蜀人生時一浴, 死時一浴)”라는 속담이 전해졌겠는가.

그런데 중국 전체로 볼 때 내륙 지방에 해당하는 북부와 서부는 목욕을 즐기지 않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지만, 습하고 물이 많은 동남부 지역의 사람들은 제법 목욕을 즐겨 독특한 목욕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13세기 항주에 목욕탕이 3천 개나 있었으며 한꺼번에 100명이 목욕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뻥이 좀 세긴 하지만, 어쨌든 그 시절 중국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대중목욕탕이 존재했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목욕탕은 언제쯤 시작된 것일까?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이나마 당시 목욕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재미난 그림이 있다.

(아시겠지만 제 블로그의 모든 이미지는 누르면 제법 커집니다..)
"화재가 발생한 목욕탕", <점석재화보>, 1886년

이 그림신문은 소주의 한 목욕탕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을 다룬 것이다. 주인의 부주의로 발생한 화재인지 옆집 꼬맹이가 불장난한 게 옮겨 붙은 것인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아무튼 한밤중에 느긋이 목욕을 즐기던 손님들이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우르르 뛰쳐나오는 모습이 생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목욕탕 자체에 대한 기사가 아니어서 이 당시 목욕탕 내부가 어떠했는지 이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출입구와 욕실 입구를 조망하는 위치에서 제시되어 당시에도 출입구 바로 왼쪽에 있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 후 탈의실을 통과하여 욕실로 들어가는 구조인 것은 알 수 있다.

문자로 제시된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하자면 우선 이 목욕탕의 상호는 “홍복원(鴻福園)”이다. 오른쪽 상단의 문 위에는 “낙지(樂池)”라는 팻말이 붙은 것으로 봐서 이 목욕탕에는 “지탕(池湯; 즉 공동욕조)”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탈의실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내부에 위치한 욕실로 들어간다. (지탕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중앙에 있는 “난방(暖房)”이라고 쓰여진 공간은 정확하진 않지만, 도구를 챙겨서 뛰어나오는 사환들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봐서 보일러실을 겸한 사환들의 작업장인 것으로 보인다. 수면실이나 찜질방의 기능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관련자료가 보충되어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어쨌든 그림으로 봐서 화재의 근원지가 난방 쪽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림 오른쪽 하단부에 위치한 탈의실이다. 화재를 피하려는 사람들과 옷이 널브러져 있지만, 탈의실에는 오늘날 캐비넛의 기능을 하는 상자가 있고 그 앞에 길쭉한 의자가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옷을 챙겨가지 못했는지 왼쪽에서 두 번째 상자에는 신발에 천까지 잘 씌워져 있다. 평소 같았으면 의복은 가지런히 개어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발을 상자 위에 올려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목욕을 끝낸 후 의관을 정제하면서 이 의자에 앉아 차라도 한잔 하거나 담배를 한 모금 빨았을 수도 있겠다.

다행히 왼쪽 중앙에 보이는 바깥문으로 “태평양룡(太平洋龍)”이라는 깃발을 든 소방수들이 몰려오는 것으로 봐서 이 화재는 곧 진압이 되었을 것이다.


근대 시기 상하이의 목욕탕은 공동욕조가 설치되어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지탕(池湯)”과 개인 욕조가 설치된 일인용 욕실인 “분탕(盆湯)”의 두 종류로 나뉜다. 지탕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기 때문에 병균에 감염될 우려가 많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은 분탕(盆湯)을 선호하였다. 분탕盆湯에는 양분(洋盆), 관분(官盆), 객분(客盆)의 세 종류가 있고, 어떤 곳에는 거대한 “양분(洋盆)”에 샤워기(蓮篷管)가 설치되어 있어 샤워도 할 수 있었다. 여름에는 선풍기, 겨울에는 화로가 갖춰졌고 인테리어도 훌륭하였다. 한 사람씩 들어가게 되는 특설호화탕(特設雅室)은 양분방(洋盆房間), 여러 사람이 같이 사용하는 것은 통간(統間)이라고 각각 불렀다. 관분, 객분 또한 각각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다.


위 그림이 다소 대중적인 “지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면, 아래 그림은 호화로운 “분탕(盆湯)”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입을 옷이 없네 그려?", <점석재화보>, 1887년

기원분탕(沂園盆湯)이라는 이름의 목욕탕이 구강(九江)에 신장개업 했는데, 깨끗하고 호화로운 시설을 갖추어 모두들 앞다퉈 목욕을 하러 갔다. 그 중 화려한 옷을 입은 두 청년이 옷을 벗어 두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무뢰배 몇 명이 와서 옷을 훔쳐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점잖은 체면에 옷도 입지 않고 뛰쳐나가 멱살을 잡을 수도 없고, 옷을 가져가는 걸 보면서도 한 마디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사대부 자제의 모습을 연상해 보시라.

첫 번째 그림의 경우 불이 나서 어수선한 점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지탕과 분탕은 기본적인 외양에서도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도 탈의실이 중심무대이고,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이 왼쪽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탈의실의 풍경은 사뭇 다른데, 덩그러니 상자 하나에 서로가 연결된 긴 의자가 아니라, 차탁이 놓여 있어 앉아서 차도 마시고 발가락 손질(扦脚)이나 발안마 같은 서비스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널찍한 내부와 휘황찬란한 가스등만 봐도 이 목욕탕이 얼마나 호화스러운지 잘 알 수 있다.

목욕탕 안에는 이발사, 때밀이, 발가락 손질(扦脚; 修脚)을 하는 사환(堂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로 진강(鎭江), 양주(揚州), 단양(丹陽) 출신이 많아, 출신에 따라 양주방(揚州幇), 단양방(丹陽幇), 구용방(句容幇)으로 나뉘는데, 인원수는 양주방이 가장 많았고, 단양방, 구용방이 그 뒤를 이었다. 목욕을 끝낸 후 목욕비 외에 이들 사환들에게 팁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의 두 그림에서와 같은 정식 목욕탕은 아니지만, 매년 여름에는 끓인 물 파는 가게(老虎灶), 다관(茶館) 같은 곳에서도 “청수분탕(淸水盆湯)”이란 이름을 내걸고 목욕업을 겸하였다. 여름 한철 장사인지라 시설도 간단했다. 입구에는 기름종이에 “淸水盆湯”이란 글씨를 쓴 등롱을 내걸고, 나무 욕조 두세 개에 물 받아놓고, 천으로 칸막이를 하면 끝이다. 일종의 노천목욕탕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주로 일반 노동자나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 하층민이 이용하였다. 장사가 꽤 잘 되었는지 매년 여름이면 열에 아홉 가게는 이런 임시 목욕탕을 열었다고 한다.

위에 제시된 그림에는 남자 손님만 등장하는데, 이 당시 여자 목욕탕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자 목욕탕의 경우 1920년대 말 즈음에야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자목욕탕은 상하이 절강로(浙江路)에 위치한 “용천가정여자목욕탕”(龍泉家庭女子浴室)이 대표적이다.

이 목욕탕은 위층은 여탕, 아래층은 남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설이나 배치는 남자 목욕탕과 동일하되 때밀이, 발가락 손질 등의 서비스는 모두 여자 사환들이 하였다. 기녀들이 주요 고객인지라 상하이의 일반 부녀자들은 그 앞으로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당시 제법 큰 여관에는 서양식 욕조가 있었기 때문에 대갓집 마님이나 모던 걸(摩登女郞)들은 대부분 여관을 세내어 목욕을 했지 목욕탕을 찾지는 않았다. 때문에 여자 목욕탕의 경우 장사가 썩 잘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잇속 밝은 상해 상인들이 왜 여기저기에 여자 목욕탕을 열지 않았겠는가.


보너스! 여자 목욕탕이 없다 보니 아래와 같은 일도 가끔 생겼나 보다. ^^
"저도 때를 씻고 싶다구요", <점석재화보>, 1885년

이 그림은 남경의 한 목욕탕에서 벌어진 사건을 담고 있다. 몇몇 젊은이들이 목욕탕에 와서 한참을 떠들고 놀다가 막상 욕탕에 들어가려는 순간 일행 중 하나가 옷을 벗지 않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여인이었던 것!! 당장 매니저를 부르고 난리를 쳐서 밝혀낸 바, 그녀는 남장을 하고 남자목욕탕에 들어온 기녀였다고... 무엇이 궁금했길래? :)


참고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 19세기 말 상해에서 발행된 그림 신문. 인용한 그림은 모두 상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소개한 내용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목욕탕의 시설이나 분위기는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上海風俗古迹考>, 424쪽.
<上海鱗瓜>, 36-8쪽.

  1. “땟놈”은 중국인을 “대국(大國)” 사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지만, 중국인들이 “맞아, 그럼”이란 뜻의 “對(뛔이->떼이)”를 말끝마다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7. 27. 10:58
상하이 푸동.

진마오 빌딩 88층(421m), 월드파이낸셜 센터 101층(492m).
건설 중인 상하이센터는 127층(632m)...


아~ 글쎄. 기다려 보라니깐~!!

한편 강 건너 와이탄은 여전히 100년 전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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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丹靑 2009. 6. 27. 18:02
상하이 하면 떠오르는 색깔은 어떤 걸까?


흐리고 습한 상하이의 날씨는 상하이를 무채색의 도시로 떠올리게 한다. 이 도시는 색깔이란 게 없고 그라데이션만 살아 있다. 명암만 살아 있는 도시, 가장 밝은 곳과 가장 어두운 곳이 공존하는 도시, 그렇지만 그 각각이 다른 색깔을 띤다고 하기보다는 같은 색의 농도와 계조가 다를 뿐인 그런 도시. 내가 떠올리는 상하이의 이미지이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 중남미의 원색찬란함, 티벳의 고요하지만 강렬한 색감은 상하이에서 떠올리기 힘든 무엇, 에너지 자체가 다르게 표출된다.

Pudong, 90x120cm.

반군이 쓴 글에서 읽은 프랑스에 주로 거주한다는 어느 미국인 화가가 그린 상하이를 떠올려 본다. 상하이를 마치 지중해를 그리듯 원색으로 표현했다, 왜 그렇게 그렸나는 물음에, 자기는 상하이에서 젊고 생동하는 에너지를 보았다고 대답했다고. 그 에네르기를 표현하는 방법이 강렬한 색감이겠다. 그가 보는 상하이가 그럴 수는 있다. 그의 상하이는 그런 모습, 그런 색깔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왜 상하이를 그런 색깔로 표현했냐고 묻게 되고,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상하이와 그 색깔은 어긋나 있음을 뜻한다. 그가 해석한 상하이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우리가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상하이와는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지고 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의 이름은 제프리 헤싱(jeffrey hessing)이다. http://www.jeffrey-hessing.com/이라는 개인 홈페이지도 가지고 있고, 거기서 중국에서 그린 그림과 상해를 그린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어떤 색깔로 상하이를 표현했는지 살펴보려고 홈페이지를 열어본다.

The Bridge, 100x80cm.
푸장반점 꼭대기에서 소주하와 와이바이두 다리 너머를 바라본 풍경이다.

The River, 97x130cm

The Bund, 90x120cm

Shanghai Sunset, 100x120cm

The king and queen, 100x80cm.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제프리 헤싱.

그림을 보지 않고 떠올렸을 때만큼 강렬한 색감은 아니다. 나는 더 강렬한, 눈이 부신 원색을 기대했다. 그 강렬함은 어쩌면 색의 대비에서 올 듯한데, 헤싱이 쓰는 색은 원색이긴 하되 강한 대비가 없다. 그림에 대해서도, 색감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게 없지만. 그는 그저 자기가 선호하는 색깔을 상하이에 덧씌운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가 그린 뉴욕, 이스라엘 등도 비슷한 색감이다. 다만 상하이는 그런 도시와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색의 대비가 덜하고 건물과 건물을 구분하는 선을 제외하면 색들이 서로 섞인다는 느낌마저 든다. 곱지만 포스가 없다.

색의 대비, 즉 서로 다른 색깔들이 부딪히고 충돌하는 사이에 내뿜는 긴장을 나는 상하이에서 느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다름이 아니라 조금 더와 덜의 경계에 놓여 있다. 제프리 헤싱의 그림이 상하이의 에너지를 잘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존재의 다른 색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그걸 상하이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까?

상하이의 진정한 얼굴은 밤에 드러난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밤이 없는 도시, "불야성"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야(夜)상해! 1865년에 가스등이, 1882년에는 전기가 상하이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세련된 <상하이 모던>을 노래한 리어우판의 상대편에 루한차오의 <네온불빛 너머>가 있다. 밤이 되면 온갖 색의 네온사인과 광고판이 휘황찬란하지만 번화가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어떤 어둠이 펼쳐지는지를 루한차오는 보여주며, 그곳이 단순한 암흑이 아닌 다양한 계조를 가진 인간군상이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내가 떠올리는 상해 사진은 모두 20세기 초의 흑백사진들이다.
상하이는 아무래도 흑백으로 찍어야겠다. 혹은 색을 날려버리고 계조만 살아있게.

상하이를 어떤 색깔로 떠올리시나요?



보너스: 제프리 헤싱이 그린 만리장성과 운하 풍경.
Water Village, 65x81cm.

The Great Wall, 65x54cm.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6. 20. 02:08
상해의 북쪽, 장강 하구에 위치한 횡사도(헝사다오)에 다녀왔습니다.
장강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삼각주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 섬이 있는데 가장 바다 쪽에 가까운, 그리고 가장 작은 섬이 횡사도입니다. 날씨는 쨍하였고, 가끔 흐려서 자전거를 타기에 적당했습니다만, 반바지 아래와 팔뚝은 발갛게 익어 버리더군요..

바쁜 게 조금 지나가면 횡사도 관련 포스팅을 할까 생각 중입니다.
사람도 적고 차도 적어서 자전거 타기엔 아주 그만이더군요.
공기도 좋고 길도 곧습니다. 먼지 많고 위험한 상해에 비할 바가 아니죠..


앞에 펼쳐진 건 바다가 아니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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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6. 16. 02:30

누군가 농담삼아 상해의 시조(市鳥)는 학이라고 했다.
정말이지 상해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게 크레인이다.
"도시가 삶을 더 아름답게 한다"
엑스포 전까지 모든 공사를 끝낼 것이고. 최소한 엑스포 기간에는 크레인 보기가 힘들 수도 있겠다.
그때 가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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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지도를 보면 내가 사는 곳에서 황포강이 장강과 만나는 오송구가 멀지 않다.
가끔 밤이면 뱃고동 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고 해서 언제고 한번 다녀와야지 하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집밖에 나갈 일도 별로 없고 해서 동호회 가입 후 엠티를 갔다가,
족구 몇 판 하고 다리가 맛이 가 버렸다.
다리에 활력이나 더할 겸 자전거를 타고 오송구 쪽으로 향해 본다.
지도로 예상한 지점까지는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강이 아주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강을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가면 모두 막혀 있거나 해운업체로 통하는 길이라 강쪽으로 갈 수 있다고 해도 출입을 막고 있었던 것.

혹시나 하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 봐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 지도로 확대해 보니, 우리 집에서 북쪽으로 그냥 쭈욱 가서는 강으로 통하는 길은 없다.(컨테이너 화물트럭은 물론 갈 수 있겠지만..) 중간에 빠지는 큰 길을 가 보거나, 시작부터 돌아서 가는 길로 다음에 다시 가볼 수밖에 없겠다.

하여튼 이렇게 헤매느라고 편도 30분 길을 두 시간 가까이 허비.

막힌 길에서 친구를 배웅하고 다시 들어가는 아주머니에게 항구쪽으로 가는 길이 있는지 물어봤다. 어디어디로 가라는데, 아마도 자기들이야 그쪽으로 다니는지 몰라도 나는 갈 수 없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그래도 기계와 건축자재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강으로 흘러드는 운하 옆까지 드디어 왔다만. 이미 어두워져서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차피 운하를 보려는 게 아니라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보는 게 목적이었는데.. 지게차와 컨테이너만 가득 쌓여 있다.


돌아오는 길은 컴컴하고 먼지가 많이 날리지만, 다리에 과부하를 좀 주겠다는 원래의 목적이야 이룬 셈이다.

광고판을 지나치다 지붕 처마 같은 느낌이 들어 찍어봤는데, 네모에 삼각형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몰라 한참을 요리조리 돌려 봤다만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다.(사실 어떤 게 좋은 건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고 해야겠지?) 뭐든 제대로 하려면 힘들다.

"眼疾手快"라는 (광고업체의) 광고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눈도 빠르고 손도 빨라야 한다"는 정도의 뜻이다. 그 앞에 쓰여진 말은 "좋은 위치를 잡으려면...(好位置就要...)"이다.
눈도 느리고 손도 느리니, 빛도 잡히지 않고 형체도 포착하기 힘들다.

별 모양은 없지만 튼튼하게 아무 불평 없이 3년을 잘 버텨준 자전거다. 가끔 기름칠도 하고, 상으로 장바구니와 자물쇠도 바꿔 줬다. 3년 타고도 삐거덕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자전거, 중국에서 보기 힘들 거다!!

이것도 운동이라고 밥맛이 좋아졌다. ^^;;

2009. 06.03.
나중에 다시 확인해 본 결과, 원래 지도에서 봤던 것처럼 길을 타고 올라가면 오송 항구가 나왔다.
황포강으로 들어가는 조그만 운하를 건너는 고가도로를 자전거로는 못 간다고 착각했던 것.
다시 가 보니 인도와 자전거 도로가 고가도로 옆으로 나 있었다.
오송항구에서는 창사도, 충밍도 등 장강하구의 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고, 그냥 황포강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통근배도 있었다. 와이탄과 푸동을 오가는 배와 마찬가지였다..

Posted by lunarog
서류 뗄 일이 있어 학과 사무실에 갔다가 입구에 붙은 포스트를 봤다.
니엔하우저 할배가 다음주에 강연을 온다고 하고, 또 이것저것 강연 포스트가 붙어 있는 사이
교내 재즈 공연 포스트도 하나 붙어 있었다. 아래처럼 생겼다.

Joey Lu(陆宣辰)라는 신인이 보컬/피아노를 맡은 삼중주 공연이었다.
제3회 "캠퍼스 재즈 시리즈 음악회"라는 문구를 보니 벌써 두번은 했나 본데, 이런 공연이 학교에서 열리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다. 맨날 가극 같은 것만 하는 줄 알았더니..

이걸 발견한 시간이 3시 9분,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야 하고 은행에서 일도 봐야 하는데,
잠깐 망설이다가 후딱 일을 보고 다시 오는 걸로 방향을 정했다.
허허벌판에 두 개의 탑을 세워놓은 광화루로 들어서는데, 이 공간이 지금까지 삭막했던 이유가 소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메라를 챙기오지 않았다.
사진찍기란 게 묘해서, 사진기를 들고 여행을 다니면 풍경은 머리 속에 남지 않고 사진만 남는다. 사진을 찍을 때는 음악이 뭉개져서 음악으로 들리지 않고(그래도 상관없고) 오직 네모난 프레임 속에 소리가 아닌 빛을 담으려고만 한다. 음악이 아니라 연주하는 분위기만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숙련된 사진가들은 어떠한지 내 모르나, 사진이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인 게 분명한 것 같다. 시간을 멈추게 하고, 제한된 틀 속에 한 순간의 빛을 구겨넣는 작업. 강조이지 확장은 아닌 것이다. 경험은 그 틀 바깥으로 무한히 열려 있어서 오히려 무의미한 것이기도 한데, 우리가 느끼지 못하더라도 알고 있는 것 이상을 경험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진 속에 응축시켜야 할 경험도 있고, 사진기를 버려두고 내 느낌 이상을 받아들여야 할 경험도 분명히 있겠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앉아 있었다. 집을 나설 때 사진기를 놓고 온 것이 분해서였겠다.

잠시 쉬어간다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이나 듣고 가자!
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 핸드폰 카메라라도 들고 몇 장 찍기는 했다.. ㅡㅡ;;


학교 건물 1층에서 해서 그런지 앰프 소리도 별로 키우지 않고 차분하게,
마치 한밤중에 혹시 깨어있을 누군가에게 방해 될까봐 최대한
볼륨을 낮추고 듣는 음악인 듯,
그렇지만 그래서인지 듣고 있는 동안 마음이 가라앉는 연주였던 것 같다.
물론 이런 분위기를 만든 건 듣고 있는 학생들의 관람태도도 한몫 했지.
우리나라 대학생들이었다면 연주자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분위기를 제대로 잡았을 건데,
거의 클래식 공연 관람하듯이 경청하기만 하고 있었던 것.
앵콜도 할듯 말듯 머뭇대다 좀 어설프게, 이걸 해줘~ 말어~ 라는 기분이 들게 외치고 말야.. ^^;;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연주자들 또한 대단히 잘해야겠다는 욕심 없이 힘빼고 하는 공연이라 오히려 더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JZclub 같은 데서 귀가 멍할 정도로, 옆사람의 목소리는 안 들리고 숨결만 느껴지게 빵빵하고 강렬한 음악을 조용한 교정에서, 그것도 오후에,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실제로 30년대 상해의 재즈 전통을 이은, 화평반점의 할배 극단 말고(^^), JZclub에서 요일별로 하는 공연은 실력도 상당하고 관객들 분위기도 좋다. 요즘엔 못 가 봤다...)

보컬에 대한 자료를 좀 검색해 보니, 아직 별로 쓸만한 자료는 없고 오늘 학교에서 했던 공연 소식만 올라온다. 거기서 사진 몇 장을 갈무리해 둔다. 사실 베이스가 꽤 멋있게 생겼던데(나는 히스패닉 계열인 줄 알았다.), 이쪽 사진으로는 별로다.


#관련 사진은 복단대bbs, 혹은 http://www.douban.com/event/10569429/

Posted by lunarog
요즘 이곳저곳 옮겨다니면서 모임을 하고 있어, 혹시나 하고 상해의 괜찮은 커피숍을 검색해본다.
모임의 구성원이 사는 곳이 제각각인데, 고정된 한곳에서 만나기는 심심하고 해서 까페 순례를 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작업도 검토하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하여, 바이두 해 본 결과,

"올해 최고의 커피숍: 편안한 카페 환경, 맛있는 커피, 음료, 간식을 제공하는 커피숍 뽑기"라는 제목이 검색된다.(귀찮아서 제목에서 뺏다만, 그대로 번역하자면 <"간식"(甜品)이 가장 훌륭한 카페>가 원래 제목이다. 케익, 머핀, 쿠키 같은 걸 통칭하는 말로 간식 말고 뭐 있나? 잘 모르겠네용~  ㅡ_ㅡ;;)

참고삼아 저장해 두고, 하나씩 돌아볼 생각이다.
나중에 찾아보기 쉽게 하기 위해 각각의 제목에 지도를 링크해 두었다.


年度最佳甜品咖啡馆 : 让人舒适的 Café环境,有最美味的咖啡、饮品、甜品提供,进行综合评分。

小洋房咖啡馆,还有免费的无线网络可以使用,下午茶套餐美味实惠。进贤路 222 号,近陕西南路( 6258 1620 )

花园内的咖啡馆,生姜汁是特色,很多饮品里都加有生姜,适合冬日饮用。复兴西路 299 弄 1 号,近华山路( 6433 9437 )

这里能吃到法国乳蛋饼和德国烘焙糕点。周六周日这里更是附近老外家庭早午餐的首选地。武康路 376 号,近湖南路( 6466 0361 )

咖啡和蛋糕都很出彩,去这家店还能尝到“西茜公主最爱的西点”。绍兴路 25 弄 2 号,陕西南路瑞金二路间( 6445 2131 )

 

在相对僻静的安福路,这家餐厅多少沾染了话剧艺术中心的文艺气质,舒适而简单的装修风格令人过目不忘,咖啡、甜品、简餐都可圈可点。安福路 201 号近乌鲁木齐中路( 5404 0998 )

 

그 결과는 지금 현재 다음과 같다.(이미 끝난 모양이다. 20일에 본 결과와 지금의 결과가 동일하다.)

이 다섯 곳 모두 나로선 처음 듣는 이름인데, 투표결과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편견이겠지만 커피맛이나 까페 분위기에 대한 독특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다수가 자기가 가 봤거나 많이 들어본 곳을 투표했을 가능성이 많다. 나도 커피맛은 잘 모르지만, 상해 젊은이들이 커피맛을 그렇게 따질 것 같지도 않다.. 1위로 꼽힌 곳은 상해의 "신천지" 등에 체인이 있는 곳이다. 나머지도 서양인 취향을 고려한다고 만든 상해식 카페가 아닐까 싶다. 그 중 coffee tree와 citizen cafe를 은근히 기대해 보는데.. 더도 말고 "학림"처럼 커피향과 함께 그 집에 배어있는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그런 곳 없을까..?



더하여, 검색하다가 찾은 상해 커피숍에 대한 글(上海咖啡馆的15个瞬间) 중에 인상적인 말을 옮겨 본다.

"상해의 커피숍은 분위기는 있는데 커피가 맛이 없다. 홍콩은 커피가 맛있지만 커피숍 분위기가 별로다. 타이베이는 커피도 맛있고 커피숍 분위기도 뛰어나다."

어쨌든 상해의 커피숍에서는 대부분 죽치고 앉아 이야기하고 사람 구경, 풍경 구경하면서 앞에 놓인 커피가 천천히 식어가도록 내비둔다.

잘 차려입고 와서 데이트하거나 사람들 만나는 공간으로 까페가 활용되지 뭔가 일상적인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겠다. 사실 한국에서도 동네 까페에 갈라쳐도 느슨한 차림으로는 커피 마시며 책보기가 좀 거시기하다.. ^^;;


접어둔 글에 소개된 까페와 바는 그다지. 엄선된 것 같지는 않다. 잡지 같은 데서 좀 전문가 스러운 사람이 추천하는 괜찮은 카페 관련 글은 없는 걸까? ..

암튼, 위에 소개된 곳 중에 내가 그래도 마음에 드는 곳은 한위안 서점이다. 론리 플래닛에도 소개되어 있는 곳인데, 상해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북카페에 속한다. 지하철 역 근처가 아니라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 보면 독특하면서도 조용하고 편안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주인이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책도 여기서 구할 수 있다. 한위안에 대한 포스팅은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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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이탄에 새로 설치될 광장

 

 앞에서도 말했듯이 와이탄은 상해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1945년 영국에 의한 개항 이전에도 물론 상해라는 지명이 존재했지만, 중국 전체에서 그 존재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광주(광저우)가 있고, 복건의 하문(샤먼)이 있고, 바로 옆에 절강의 영파(닝뽀)처럼 바다에서 바로 들어올 수 있는 항구가 있는데 상해가 왜 필요했겠는가? 영국이 전략적 필요에 의해 이곳을 요구했고, 영국의 조계지가 만들어졌고, 그러다가 중국 근대화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고, 그래서 현재의 상하이도 있는 것이다. 그 상징적인 곳이 바로 와이탄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30년대의 상하이

 

지금 우리가 와이탄이라고 말하는 곳의 상당부분은 영국조계지의 동쪽 경계인 황포강변을 말한다. 항상 강물이 넘쳐 질퍽거리던 곳에 둑을 만들고(그래서 bund이다.) 그 안쪽에 건물을 세웠다. 와이탄은 항구의 역할과 함께 서양인들이 한적한 저녁에 산책을 즐기는 공간으로도 활용이 되었다.(와이탄 산보객(外灘客; bunders)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항구의 역할은 거의 사라졌고(와이탄 남쪽의 "16포"는 여전히 항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예전 닝뽀에서 배를 타고 왔을 때 여기에서 내렸다.), 산책의 공간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다만 거주자의 산책이 아니라 관광객과 호객꾼의 산책만 남아 있다.

 

그래서 관광객과 호객꾼들에게 보다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주요 목적은 2010년 엑스포 대비용이다.) 그에 앞서 10차선이던 와이탄 앞 지상도로(중산동일로)를 4차선만 남기고 지하로 옮기는 공사를 진행한다. 넓어진 지상 공간을 활용하여 주요 거점 4곳에 광장을 설치하게 된다.

 

와이탄 광장공사 전체 평면도. 광장이 추가되었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원래의 황포강 연안 산책로도 구간에 따라 상당히 많이 넓혀지며, 비스듬히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비탈길도 확장했다.


 

1. 왼쪽에서부터 보면, 와이바이두 다리를 건너 소주하를 넘어 오면 황포공원(黄浦公园)이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출입구가 따로 있고 입장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서쪽 입구에 있던 대문과 담장을 헐고 그 앞을 터 황포공원과 광장을 연결시키게 된다. 황포공원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와이탄의 기점 역할을 다시 제대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황포공원(원래 명칭은 "공가화원(public garden)", 혹은 와이탄공원)은 예전의 잘못된 소문이지만 많은 중국인들이 민족적 수치로 생각하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팻말로 유명하던 곳이었다. 상해의 제국주의적 기운을 누르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민족적 자존심을 좀 세우려는 것인지, 지금은 창처럼 뾰족하게 인민영웅기념탑이 설치되어 있다(소주하와 황포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원의 중심부가 탑이다). 이제는 이소룡의 분노한 발치기로 그 팻말을 뽀개지 않아도(정무문), 개와 중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확장된 남경로 입구의 "천이광장". 인민해방군 창건자의 한 사람인 "천이"는 해방 후 상해 초대 시장을 역임했다.

 

2. 남경로(南京路) 입구에 있던 천이광장(陈毅广场)은 지금보다 규모를 더욱 확장하게 된다. 원래 남경로 입구는 예전 영국조계 시절부터 각종 기념행사의 주요한 공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도로를 잘 살펴보면, 고속주행 자동차는 지하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지상에는 버스 등 공공교통 수단 및 이 곳을 방문하는 차량 위주로 운행되며, 4차선 좌우에 여유차선을 만들어 임시주차, 버스 정류장 등으로 이용할 계획이다.(위 그림처럼 아무런 경계가 없다면 차선 없는 일반도로가 되어버릴 위험성이 80% 이상이라고 본다. ^^) 또한 건물 쪽 인도의 폭도 지금보다 넓게 확장하여 와이탄의 이름난 건축물들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할 예정이라고 한다.

 

 

 

3. 복주로(福州路) 입구에는 중간 정도 높이로 경축광장(节庆广场)이 들어선다. 이곳에서는 와이탄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적절한 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고, 각종 기념일, 경축 관련 행사(节庆活动)를 진행하는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지금은 이 지점에 임시로 지어진 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4. 연안로(延安路) 입구에는 기상대(信号台)를 중심으로 하는 광장이 들어서 와이탄의 역사적 변천을 보여준다. 연안 고가도로를 철거한 이유도 이 광장을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연안로는 영국조계지의 남쪽 경계로, 원래 "양징방"이라는 운하였다. 중서의 경계였기 때문에 "양징방"이 조계를 대신하는 말이 되기도 했다. 상업적인 용도의 피진(pidgin; business의 중국적 발음) 영어를 "양징방 영어"라고 했던 것도 한때 이곳이 중서 교역의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양징방이 오물로 더러워지고 보다 넓은 도로가 요구되면서 메워져 현재의 연안동로가 되었다.(상해의 주요도로 중 이렇게 운하였던 곳이 많다.)

 

경계의 역할을 했던 것이 기상대이다. 1884년에 처음 만들어진 후 몇 번의 재공사를 거친 뒤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와이탄이 부두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진입하는 선박들에게 적절한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는데, 현재는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연안고가도로를 철거하기 전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상대 위쪽 전망대를 이용하려 했는데, 레스토랑 쪽에서 레스토랑 최소 소비액을 요구하거나 전망대 관람료를 따로 받아 시정조치를 받기도 했다. 고가가 사라진 후 저 위치, 저 높이에서 와이탄의 전망을 제공하는 곳이 기상대 뿐인 셈이라 한몫 제대로 잡을 수도 있겠다 싶었을 거다. 그것도 연안고가 철거 직전에나 가능했지, 공사가 진행중인 지금은 죽을 맛일 거다. 도대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지 않은가.(들어갈 수나 있는지, 영업은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저 난리법석인 곳이 위의 조감도처럼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와이탄의 옛 사진을 보면 상당히 정겹기도 하고 소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한쪽에 벤치를 놓고 산책 중간에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가 하면, 시대에 따라서는 전차, 자동차와 배, 사람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는 그런 곳이기도 했다. 어쨋든 그 시절과는 다른 기능이 지금은 요구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너무 미끈하고 인공적인 냄새가 풍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사에 전체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지하도로를 건설할 때, 그리고 지하로 자동차가 달릴 때의 진동 같은 게 이 지역의 건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에 대해 조금 더 면밀한 조사가 진행되어 안전하다는 판단 하에 했다면, 지상은 조금 더 여유로운 공간이 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물론 아무리 넓혀 놓아도 이곳은 항상 사람들로 득실거릴 테지만 말이다.

 

 

출처:  http://sh.eastday.com/qtmt/20080528/u1a433541.html

1. 이미지는 모두 위 링크에서 가져왔으며, 기사는 광장에 관련된 몇 부분만 참고하였다.

2. 위 링크에 들어가면 보다 큰 사이즈의 그림을 다운받을 수 있다.

Posted by lunarog

지난 2005년 10월 17일에 서거한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파금의 3주기를 맞아 몇 가지 행사가 진행된다.


먼저 10월 15일에는 그의 대표작 <가(家)>에 대한 대형 토론회가 열렸다. 작품 탄생 75주년을 함께 기념하는 자리이다. 이와 함께 자오즈강(赵志刚) 주연으로 상하이 월극단(上海越剧团)에서 월극(越剧)《가》를 재연하였다.


작품 토론회는 따로 부르지 않아 굳이 찾아가지 않았다. 파금 전공자이자 월극 <가>의 문학고문이기도 한 지도교수 덕분에 공짜표도 있고 해서 저녁에 시간을 내서 월극을 보러 가게 되었다. 상해에서는 연극을 한편도 못 봤으니 시험삼아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월극은 "월(越)" 지방, 즉 절강 지역의 전통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극에 비해 움직임이 적고 여성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당연히 절강 쪽 방언으로 대사와 노래를 했기 때문에 자막에 의지해 내용을 파악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작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리얼리즘을 표방한 <가>는 아주 재미가 없다. 지루해서 몇 번을 잡았다가 끝까지 읽지 못한 작품이다. 사실 한국의 중문과는 작품 읽는 걸 그다지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사실 다양한 작품을 읽힐 만한 환경도 되어 있지 않다.. ㅡㅡ;;) 학교 다니면서도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었다. 문학사에 나오는 내용만 잘 외우고 있으면 되니까.(못 읽은 게 별로 부끄럽지도 않다. 다만 중국 애들하고 이야기할 때 그렇다고 고백하기는 좀 거시기하다만..) 따라서 자막조차 대체로 이해를 못했다면 절강방언으로 하는 이 연극의 내용을 전혀 모를 뻔 했다.


재미 없을 것이란 선입견과는 달리 그런대로 볼 만 했다. 소설과는 달리 많은 생략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줄거리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노래와 분위기로 대체했기 때문인 것 같다. 장면전환도 느리고 동작도 느린데도 빠르게 진행된다고 느꼈던 것도 아마 "생략" 때문인 것 같다.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 생략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물론.  주인공을 맡은 자오즈강은 "월극의 왕자"(越剧王子)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호응을 받는 인물이다만, 월극의 묘미를 모르는 나로선 그가 얼마나 좋은 연기와 노래를 펼치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내 개인적인 의견은 여성 동무들의 노래가 훌륭했고 남성 동무들은 좀 그랬다. 특히 악역인 천이타이(陈姨太) 역을 맡은 중년 배우의 노래가 잘 모르는 내 귀에는 가장 훌륭하게 들렸다.(누군지 찾아보려고 했는데 도통 검색이 안 된다.. 만약 2004년 초연 때와 같은 배우라면 후페이디(胡佩娣)였을 것이다. 전임 서안 월극단 단장이었고, 현재 상해 월극원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중간중간 끊임없이 박수를 치는데, 남들따라 박수 치는 것은 곧바로 포기했다. 노래나 연기가 훌륭할 때 박수가 나오는게 아니라 내용이나 대사가 훌륭하거나 자기 마음에 들면 박수를 날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박수는 "정의"의 편이다!!!) 악역 천이타이의 노래가 끝나고 내가 박수를 치려고 하는데, 바로 상대방의 대사가 이어지기도 했고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월극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내가 누구 노래가 좋니 마니 하는 건 좀 그런가?)


문혁 이후 혁명 가극을 많이 보지 못했고 그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10여년 전에 항주에서 봤던 전통 월극과 비교해 볼 때 요즘 새로 나오고 있는 소위 "신편 현대월극(新编现代越剧)"은 혁명 가극 냄새도 좀 풍기는 것 같다. 나로선 지나치게 과장된 연기로 보이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노인네들만 가득찰 줄 알았는데(물론 대부분은 나이 많으신 분들이다.) 의외로 젊은 층도 많았고, 극이 시작하기 직전에 중학생들도 한 무더기 들어왔다. 혹시 동원된 애들 아닌가 싶었는데, 나중에 끝나고 환호를 지르며 "~선생님(老师)"라고 부르는 걸 보니 희극학교 학생들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인터넷 뒤져보니까 의외로 젊은 월극 마니아들이 꽤 있다.


남녀 주연배우. 자오즈강(赵志刚)과 산양핑(单仰萍). 이 외에 쑨즈쥔(孙智君), 쉬제(许杰) 등 출연.


극의 완성도에 비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던 건 너무나도 후진 음향 시스템이었다.

의자가 불편해도, 할배들이 떠들고 큰 소리로 기침해도, 공기가 나빠도 참겠는데(담배냄새가 간간히 났던 것 같은데, 설마 정말로 누군가 담배를 피웠던 건 아니겠지? 우리나라 예전 극장에서처럼??), 그 스피커는 정말 도저히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저음에서는 그런대로 들을 만했지만, 극의 절정부나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음악과 목소리가 커지는 순간 찢어지는 소리에 귀를 막아야 했다. AM 라디오를 듣는 것 같은 잡음과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그대로 들렸다. 예를 들어 눈을 뿌릴 때 하늘에서 고요하게 눈이 내리는 게 아니라 윙윙 소리를 내면서 눈이 날린다. 양푸대극원(杨浦大剧院)의 후진 시설을 탓할 수 밖에 없겠다.


깜빡하고 사진기를 챙기지 않아 직접 사진을 찍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공연 중간에 함부로 후레쉬를 터뜨리는 중국 아해들의 매너 없음을 마음껏 욕해줬다. 극도 극이지만 공연이 끝난 후 사람들의 행동이나 표정 같은 것도 사진으로 담아뒀으면 재미있겠다 싶었는데 말이다..


맛뵈기로 동영상 파일을 보실 분들은 아래 사이트로....

 

http://so.ku6.com/v/q%E8%B6%8A%E5%89%A7%E5%AE%B6

 

 

     越剧《家》01

          越剧》0115:21

播客:SNCWC88
播放:240
标签:越剧《家》赵志刚主演
发布:11月前

      越剧《家》03

          越剧》0315:21

播客:SNCWC88
播放:114
标签:越剧《家》影视剧 赵志刚 许杰单仰萍主演
发布:11月前

 

상하이 월극원(上海越剧院) 홈페이지에 가면 월별 일정, 공연 장소와 시간 등이 나와 있다. 배우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도 제공한다.

http://www.yueju.net/article/index.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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