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아주 오래전 테레비에서 본 만화가 생각난다. 아니 항상 품고 있다가 가끔씩 꺼내보는 사진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만, 제목도, 누가 썼는지도 모른다. 난 그냥 테레비에서 보고 이야기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왕국에 왕이 아끼는 항아리가 깨졌다. 왕은 왕국 제일의 도예가 할아버지에게 그 항아리를 전혀 깨진 흔적 없이 붙일 것을 명한다. 할아버지는 그 항아리 조각들을 가져가서는 붙일 생각도 하지 않고 들여다 보고만 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고, 그는 왕에게 깨진 흔적 없이 완벽한 항아리를 바친다.

도제가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항아리를 붙였냐고 물어보자, 할아버지는 보자기를 풀어 왕의 깨어진 항아리 조각들을 보여준다.

그는 항아리를 붙인 게 아니라 깨어진 조각들을 보고 그와 똑같은 새로운 항아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단순하게 읽자면 이 깨어진 항아리를 "전통"으로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사라지고 조각난 좋은 전통을 아쉬워하며, 그것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미 조각으로 남은 그 전통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며, 원래의 전통이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추억 속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전통의 복원 또한 사람의 손에 의해 재창조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잊혀진다.


도처에 깨어진 조각들이 있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원래의 형체를 깨뜨려 하나하나 조립해 봐야만 깨닫는 진리도 있으니까.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것일수록 원래의 형체는 알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는 그것의 깨어진 부분들이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이 그 남겨진 부분에 연연하며 어떻게든 매끈하게 붙이려고 애쓴다.


가장 창조적이고 위대한 작업은 이렇다. 국보급 고려청자가 눈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루만지고 감상하는 골동품 애호가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을 아낄수록 단번에 깨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 깨어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핀다. 커다란 조각의 무늬와 빛깔 뿐 아니라 먼지처럼 작은 알갱이를 어루만지며 그것의 재질과 구워질 때의 온도까지 가늠해 본다. 그리고 새로운 항아리를 굽는다.


그 결과는 원래의 항아리를 복원하는 비슷하게 닮은 항아리일 수도 있고,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똑같거나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생각도 우스운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이다. 그 파편들은 새로운 작품에 생생하게 인용되고 있지만 이미 그의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국보급 문화유산도 깨뜨릴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전통이 된다.




몽타주, 모자이크, 사고의 세부 조각들..  옛 사람들의 파편에서 헤매다 지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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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