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明室 2009. 7. 26. 02:32
1.

뭔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집중력을 높이기 위한 준비운동은 사람들마다 다를 듯하다. 가벼운 산책이나 요가, 물구나무서기 같은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물을 끓이고 커피를 갈고 커피를 내리며 그 향을 음미하면서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을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 요즘은 자주 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효과만점인 예비동작은 만화를 보는 것이다. :)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재미난 만화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집중력은 최고로 높아져 있다. (물론 그 집중력을 그 다음권을 보는 것에 써버리는 부작용에 주의해야 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항상 새롭다. 새로운 이야기를 보는 것은 항상 즐겁다.

2.

오랫만에 만화를 봤다. 배가본드 20권.
연재만화들은 너무 느리게 나온다. 그래서 딱 한권에서 멈출 수가 있다.

3. 그림이 칼이라면 사진은 총이다.

아마도 칼에 대한 만화를 봤기 때문일 건데, 비 오는 날 우산 속에서 떠오른 이 말이 적절한 비유가 되게 하려면 어떤 설명을 덧붙여야 할지 생각하면서 걸어왔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떠올린 건 그림과 사진, 칼과 총 각각을 그다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좋은 기계에 대한 욕망과 꾸준한 숙련 사이에서의 갈등,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바라는 것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도구 자체보다는 수련을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게 칼과 그림이라면, 좋은 도구를 구하고 그것의 특성과 조작법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쪽은 사진과 총이 아닐까?
물론 사진과 총도 도구의 숙련도 이상이 요구된다. 그러나 쏠 대상을 정하고 정확하게 도구의 단추를 누르는 것이 사실은 전부다. 대상의 숨통을 끊어놓을 건지 잠깐 놀래키고 말 건지는 어떤 도구에 어떤 총알을 장전하여 어떻게 쏘는지에 달려있다.
반면 좋은 칼을 가지는 것 이상으로 어떤 검법을 배웠는가, 공력은 어느 정도인가를 더 따지는 쪽은 그림이다. 천하의 의천검, 도룡도를 지녔더래도 쓸 줄 모르면 무용지물이다. 옥교룡의 손에 들린 청명검이 이무백의 나뭇가지를 이길 수는 없다.
의천, 도룡의 전신인 양과의 중철검 수련을 떠올려도 좋다. 무겁고 둔탁한 중철검을 다루려면 가볍고 날카로운 평범한 검의 수련 없이는 힘들었을 것이다. 검 없이 검술을 펼치는 경지 또한 중철검에 의해 단련된 공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4.
그림, 사진, 칼, 총. 이 중 내게 사용이 허락된 것은 사진 뿐이다.

5.
자동초점 기능이 없는 구닥다리 기계식 필름카메라를 써보면서, 카메라 다루는 것에도 수련 비슷한 게 필요하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도 필요했을 텐데 내가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 도구의 힘이 지배적인 카메라를 조금 더 잘 다루려면, 머리가 아닌 몸에 익숙하게 해야 되지 않을까? 숙련을 위해 자동기능이 없는 놈으로 한동안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 (그 결과로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사진을 찍을 걸 기대하는 게 아니라, 이제 막 사진에 재미붙여가는 사람의 태도에 관한 다짐 같은 것? 그렇다고 또 그다지 대단한 결심 같은 건 아닌 그런??! ^^)

몇 가지 떠오르는 무언(武諺).
# 삼일 배운 것을 삼년간 연습한다 : 우리 시대의 정보는 그 어느 때보다 차고 넘친다. 알고 있는 것의 숙련도, 혹은 깊이는 그 어느 때보다 떨어진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숙련일 듯.
#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삼일의 공이 후퇴한다 : 매일 일정한 시간의 수련을 강조한 무가의 명언이다.

이런 무언에 비춰보면 약삭빠른 양과보다는 우직하게 될때까지 연습하는 곽정을 닮을 필요가 있다.
(물론 나는 곽정은 싫고 양과를 더 좋아한다만.. ㅡㅡ;;)

개념보다는 수련.
예술가보다는 장인.
지식보다는 숙련도.


** 정리되지 않은 단상이다. 비공개 상태에서 나조차 잊어버릴 듯하여 조금씩 뜯어고치기로 한다. 생각 자체는 독특할 것이 없다. 강상중의 <고민하는 힘>, 제3장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읽다가 숙련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올라 조금 더 정리해 둔다. 원래 글은 비오는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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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