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문화혁명/80년대 2009. 11. 25. 00:01

중국의 80년대가 가지는 현재적인 의미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을 목표로 작가, 예술가, 학자, 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80년대의 인물들이 모였다. 2006년 5월 출간된 《80년대 중국과의 대화》는 그 해에만 수차례 재판을 찍을 정도로 호응을 얻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주간지 《신주간》新週刊 의해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출간 이후 각종 매체에서 앞 다퉈 관련 인터뷰와 비평을 소개했으며, 80년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토론회가 조직되고 책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80년대 주요인물에 대한 인터뷰가 기획되거나 비슷한 주제의 텍스트가 쏟아져 나와 일시에 "80년대 회고 붐"이 일어날 정도였다.


80년대 중국과의 대화
10점


베이징을 기점으로 한 이러한 80년대 회고 붐은 그에 앞서 중국을 휩쓸었던 1930년대 상하이 회고 붐과 여러 면에서 대별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경제 중심으로서의 상하이와 정치문화 중심지인 베이징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평가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옛 상하이에 대한 회고는 경제적인 측면, 즉 물질문명을 둘러싼 중국의 근대화가 어떤 기원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90년대적 관심의 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그것의 반대급부로 과도한 소비주의를 낳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성의 계기로 80년대라는 시좌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태초의 혼돈을 깨고 덩샤오핑이라는 만물의 어머니가 세상을 재구성하던 시기, 아직 대지와 바다는 구분되지 않았고 모든 것의 경계가 흐렸지만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충만했던 시기가 이른바 중국의 80년대였다. 대중문화와 물질만능주의의 만연, 전문화 현상으로 인한 사회 영역 간의 고립과 소외에 직면한 90년대 이후의 중국을 바라보면서 이들은 다양한 가능성이 충돌하며 이상과 열정을 채워가던 신화적 공간으로 "80년대"를 재호명한다. 매체에 의해 부풀려진 면이 없지 않지만, 90년대와는 다른 가능성의 탐색 기제로 80년대를 돌아보고 평가하는 것이 지금의 중국에서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다.


80년대 중국은 두 가지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0년 동란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후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태도로 세계를 대면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함께 가치관과 사유방식에서도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들은 신체에 각인된 문혁의 이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음영을 털어내고 새로운 사유방식과 문화를 재건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다. 우리로 치면 386세대라고 할 수 있을 이들이 80년대라는 시기를 어떻게 보내왔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어떠한 변화를 시도하였는지를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자젠잉은 80년대를 "당대 중국의 낭만시대"로 규정한다. 90년대 이후가 경제적 이익이 유일한 목표인 시대라면 80년대는 이상과 정신적 열정이 들끓던 시대였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시각은 그녀가 책의 뒷표지에서 제시한 80년대와 90년대를 특징짓는 키워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80년대 : 격정(激情), 빈곤(貧乏), 열성(熱誠), 반항(反叛), 낭만(浪漫), 이상주의(理想主義), 지식(知識), 단절(斷層), 촌스러움(), 멍청함(), 허풍(), 경박함(膚淺), 광기(瘋狂), 역사(歷史), 문화(文化), 순진(), 단순(簡單), 사막(沙漠), 계몽(), 진리(), 팽창(膨脹), 사상(思想), 권력(權力), 상식(常識), 사명감(使命感), 집체(集體), 사회주의(社會主義), 엘리트(精英), 광장(廣場), 인문(人文), 배고픔(饑渴), 화끈함(火辣辣), 우정(友情), 논쟁(爭論), 지식청년(), 뒤늦은 청춘(遲到的)



* 90년대 : 현실(現實), 이익(利益), 돈(金錢), 시장(市場), 평화로운 변화(和平演變), 정보(信息), 새로운 공간(新空間), 솔직(明白), 처세(世故), 유행(), 개인(個人), 권력(權力), 체제(體制), 성형수술(整容), 조정(調整), 총명(精明), 불안(焦慮), 상업(商業), 소란스러움(喧囂), 대중(大衆), 분노한 청년(), 자본주의(資本主義), 신체(身體), 서재(書齋), 학술(學術), 경제(經濟), 주변(邊緣), 상실(失落), 접속(接軌), 국제(國際), 다원(多元), 가능성(可能性)



이런 식의 배치가 노리는 것은 80년대와 90년대를 각각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양분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각 시기에 주로 사용되었던 단어들을 통해 간명하지만 효과적으로 변화된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이분법이 "우리가 청춘기를 보냈던 80년대에 비해 90년대는 너무 변했어!"라는 주관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지금 현재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주류가 되어 있는 80년대의 총아들이 자신의 위치를 특권화한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들은 사상적 속박에 구속되어 있던 문혁 시기와 선을 긋는 한편 물질적 소비주의 시대로 특징되는 90년대와도 차별되는 초월적 공간에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책의 발간 이후 비교적 광범한 사회적 반응을 불러왔던 이유 중 하나로 지금 중국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특정 계층이 이 책을 통해 개인적 기억을 되살리고 자신들의 역사를 긍정하려 했다는 비판이 거론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매체를 움직이는 것 또한 이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바로 그 세대이니 말이다.



모든 사람의 기억이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환기되고 다른 많은 기억들은 억압된다. 따라서 이 책에 쏟아진 많은 비평은 "누구의 80년대인가?", "11인의 대담자는 어떤 기준에 의해 선정된 것이며, 그들이 80년대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모아지고 있다. 그에 뒤따르는 비판은 "평민의식"이나 "하층민에 대한 관심"이 결핍되어 있는 "엘리트주의적인 담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담자의 구성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긴 하지만)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고 저자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일군의 문화계 인사로 제한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은 문혁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대입학력고사를 통해 대학교육을 받았고 미국 유학을 통해 친분을 쌓았으며 지금 현재 문화계 각 분야에서 성공한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80년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려는 기획이 아니라는 저자의 잇단 해명에도 불구하고 특정 영역에 국한된 엘리트들의 목소리만 담은 것이라는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과연 이 책의 대담자들이 중국의 80년대에 대한 기억을 대표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왜 베스트셀러 작가인 왕숴王朔 아닌 아청이, 장이머우가 아닌 톈좡좡이, 자장커의 조력자에 불과한 린쉬둥이 대담자로 선택되었는지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80년대의 영광을 정말 제대로 추억할 수 있는 문화계의 성공한 엘리트라면 장이머우가 제격 아닌가? 거침없는 문체로 대중을 사로잡은 왕숴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이런 면에서 질문을 "누가 기억하는가?"에서 "무엇을 기억하는가?"로 옮길 필요가 있다. 평민, 혹은 대중이라는 신분이 정치적 올바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담자의 사회적 신분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반성적 거리를 가지고 자기 세대를 구성하는 인자들을 분석하며 물려받은 유산을 활용하는지를 세심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은 객관적이고 형해화된 형태로 깔끔하게 정리된 담론에서는 파악하기 힘든 그 시절 중국인들의 개인적이고 평범한 일화를 통해 중국의 감춰진 속살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대담은 원경에서 자신들이 포함된 풍경조차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구성한 것도, 클로즈업으로 다가가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경험을 구술하는 것도 아니다. 20년이라는 시간 간격은 카메라 렌즈에 비유하자면 시야를 횡적으로 확장시키는 광각렌즈도 아니고 주변 풍경을 싹둑 잘라내고 대상만을 강조하는 망원렌즈도 아닌 50mm 표준렌즈의 시각을 가져다준다. 그러면서도 그 렌즈를 활용하는 각각의 개성에 따라 보다 멀찍이 떨어져 폭넓은 풍경을 보여주거나 지극히 세부적인 문제에 들이대기도 한다. 바로 지금 시점이 80년대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보다 포괄적인 시야가 확보되겠지만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판별하기는 힘들게 된다. 보다 이른 시기에 이런 시도가 기획되었다면 특정사건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이 가능했겠지만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를 드러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저자 또한 "왜 지금이 80년대를 회고하기에 적절한 시기인가"를 설명하며 현재와 80년대의 거리를 영화의 미디엄 쇼트로 비유한 바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대담자가 저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 우리에게 딱히 단점으로 작용할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80년대 전체에 대한 거대서사를 그리려는 시도가 아니라, 상이한 활동영역과 기질을 지닌 개인의 제한된 목소리와 기억을 들려주고자 한 것이다. 공식화된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적이고 은밀한 기억들은 그러한 친밀한 관계 속에서 보다 자연스럽게 발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이러한 글을 통해 그들이 술자리에서 편하게 나누는 대화를 엿듣거나 밤새 논쟁하던 그 시절을 추체험할 수 있다. 문혁을 막 벗어난 후, 혁명의 열정을 그대로 가지고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내려는 의욕과 에너지가 분출되던 시기가 80년대였다. 90년대는 그러한 열정의 질적 변화를 특징으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80년대가 축적한 지식과 경험이 성숙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국의 80년대가 우리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킬지언정 지금의 한국적인 상황에 딱 들어맞는 뭔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경로의 하나로 80년대식 뜨거운 피를 구성하는 기본인자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둘 필요는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80년대"는 1978년의 개혁개방에서 1989년 톈안먼 사건까지의 역사적 시간을 지칭한다. 그러나 대륙에서 출간된 원저에서는 중국 정부에 의해 금칙어가 된 "톈안먼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어 대부분 "89년" 혹은 "80년대 말" 등의 에두른 말로 마감하곤 했다. 그 외에도 주로 공산당이나 마오쩌둥을 직접 거론하여 비판한 내용은 대륙판에서 삭제되었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미묘한 단어들은 다른 용어로 대체되어 있었다.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홍콩판(홍콩 옥스포드 출판사, 2006)을 참고하여 대륙판에서 삭제된 본문내용을 최대한 되살렸다. 재미있는 것은 삭제에 대한 감각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인데, 이런 비판도 가능할까 싶은 문장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가 하면 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단어나 문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서너 페이지씩 통째로 잘려나가곤 했다. 이러한 대륙판 원문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삭제된 부분을 표시하는 방식을 강구하였으나 편집과정에서 반영되지 못해 아쉽다. 또한 삭제된 분량이 너무 많아 대륙판에서는 출간을 포기한 "류펀더우" 장은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어 번역본에 실리지 못했다. 적절한 시기에 출판사 홈페이지를 통해 해당 장의 번역을 공개하도록 하겠다.


이 책의 번역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말투와 목소리를 표정 없는 글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개념과 논리의 좌표만 잘 잡으면 일관된 논지로 흘러가는 이론 저작과는 달리 곳곳에서 동문서답, 옆길로 새기, 토속어와 그 시기의 유행어, 속어, 관용어 등이 튀어 나와 번번이 애를 먹었다. 능력이 닿는 한 원문이 전하는 분위기와 그들의 개성이 한국어로 잘 표현될 수 있도록 고심했다. 번역어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를 감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말로 풀기도 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쓰는가, 어떤 맥락에 쓰는가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게 대화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어와 한국어의 무게 차이도 고려했는데, 잘못 가늠한 무게에 대해서는 많은 조언을 부탁드린다.) 각주는 최소화했으며 앞뒤 문장의 조응에 의해 맥락이 드러날 수 있도록 처리했다. 여러 장벽에 막혀 번역을 끌었지만 그것의 결과로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실제 '현장분위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바랄 나위 없을 것 같다. 그래야 예정된 일정이 한참 지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준 주승일 차장과 그린비 편집부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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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11. 18. 00:14
지난 토요일에 꼬맹이 데리고 청계천에 다녀왔습니다.

종료 전날이어서인지(22일까지 연장되었다는군요)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분들이 구경하고 계시더군요. 사람들 손에는 제각각 온갖 종류의 사진기를 들고 있었고, 삼각대를 장착하고 제대로 담고 있는 분도 많더군요. 굳이 많이 찍을 필요는 없겠다 싶더군요. 어차피 50미리 단렌즈만 장착하고 갔으니..

게다가 꼬맹이가 계속 안아 달라고 하고, 또 걷게 했더니 어떤 아가씨 가방에 눈이 찔리기까지 해서 안아줄 수밖에 없었어요. 그분을 탓할 수도 없는 게..  앞만 보고 걷다 보면 앉은키 크기의 꼬맹이가 보일 리가 없죠.

꽤 규모가 있나 보던데 전체를 다 보진 못했어요.
뽀로로와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까지도 못간 것 같아요.
우리 꼬맹이는 신랑신부 결혼하는 등이 제일 이쁘다던데, 마침 그건 못 찍었네요.


"잠깐 멈추시오"

원래 이쪽이 입구였나 보던데.. 건너편에서 들어와 이쪽 계단으로 나가다가. 흠칫 놀라서 쳐다보았죠.
일본의 독특함이 살아있어 좋더군요. 중국 등을 제대로 담지 못해 아쉬워요~
하지만 보다 노출이 적절하고 색감이 풍부한 온갖 등불사진들이 웹에 널려 있더군요. 아쉬워할 필요가 없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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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11. 3. 00:01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르신의 야시카 일렉트로35GS를 꺼내 필름나라에서 밧데리를 사서 끼워넣고 사진을 찍어봤다.
벌써 한참 전인데, 첫번째 필름은 빼는 법을 몰라 통채로 날려 먹었다.

바로 옆에 사진처럼 카메라 하단부에 있는 필름되감기 버튼을 누르는 걸 깜빡했기 때문이었다. 매뉴얼을 다시 확인해 보고서야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다.

한글매뉴얼은 다음 카페에서 찾을 수 있다 : 야시카 일렉트로 35

두번째 필름에서는 딱 두 장 건졌다. 모조리 노출부족이었다.

의욕상실로 필름만 장전해 두고 거의 찍지 않은 채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 필름 한 통 이리저리 찍고 돌아다닌 게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나.

야시카도 "가난한 자의 라이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는데, 안 믿기로 했다. 쏘련 카메라를 포함해 이 당시 저런 형식의 카메라는 죄다 저런 별명을 흉내내고 있더라.

어쨌든 SLR하고는 달라서 초점도 이중상합치식이고(이건 그런대로 금방 적응이 되는데), 또 이 카메라의 경우 셔터속도 조절기능이 없다. 필름감도 맞추고 조리개를 조절하면 셔터속도는 카메라가 알아서 하게 되는 모양이다. DSLR에서도 조리개 우선모드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것과는 감이 다르다. 그니까, 노출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특히 실내에서 찍은 사진은 카메라가 지시하는 대로(??) 빨간불, 노란불 다 안 들어오도록 했는데도 모조리 아래와 같다.(사실 이것도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하는 것들이다.. ㅡㅡ;;)

그나마 자연광이 조금 있는 곳으로 가면 나은 편인데,
자동보정으로 살짝만 만져줘도 오른쪽 곰돌이처럼 된다.
아마도 신경써서 보정하면 색감이나 빛을 꽤 살릴 수 있을 듯하다.
(이번 사진들은 비교를 위한 것이므로 이 곰돌이 외에는 보정이 되어 있지 않다.
단, 필름스캔할 때 코스트코에서 어떻게 만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햇빛이 비치는 곳으로 가면 확실히 그런대로 노출이 맞는 것 같다.

필름을 장전시켜 놓은 채 너무 오래 두는 것도 좋지 않을 듯해서, 들고 나가 막 찍어 보았다.
그런데 왠걸, 밝은 곳에서 찍은 사진들은 왠만했다. 바로 아래와 같이..
제일 위쪽 첫번째 사진에 희뿌연 부분이 형광등 때문이라면,
여기 오른쪽 사진의 희뿌연 부분은 직사광선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용산에서 걸어가면서 초점도 제대로 안 맞추고 막 찍었다. 이 사진기는 그야말로 야외 엠티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르신이 야전군인이셨으니 적절하게 활용하지 않았을까?) 노출시스템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잘 파악이 안 되는데, 야시카 카페에 올라온 사진들은 야경이나 실내사진들도 잘 나오는 걸 보면 카메라 자체의 문제는 아닐 것 같다. 내가 제대로 못 다뤄서 실내 사진이 죄다 그렇게 된 게 분명한데. 어쨌든 나같은 초보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고, 다만 셔트속도를 조절할 수 없다는 게 상당히 제약이 된다. 반대로 빛이 좋은 야외에서 막 찍을 때는 상당히 편할 수도 있겠다. 거의 신경쓸 게 없다.



하드는 결국 복구불가 판정을 받았다.
한국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물리적 충격(불안정한 전압? 혹은 살짝 위험했던 아답터 때문?)에 의해 고장난 하드는 30만원 이상을 줘야 했는데, 미리 백업받지 못한 꼭 필요한 몇 가지 자료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업체에 맡겼지만 복구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새 하드로 교체받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 여러 가지로 되는 일이 없다.
계획하고 있던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막히고 있다.
내 일처리하는 방식은 분명 문제가 많고,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조금씩 곪아 터져나오는 것일 테다.
올해 운수가 아주 안 좋다고, 연초에 돌팔이 점쟁이가 말한 게 맞아 떨어지고 있는 걸까?
더 이상 쪽팔릴 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하루하루를 운영하는 방식을 전면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줬던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암튼 서울의 하늘은 더럽게 파랗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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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09. 10. 31. 00:38
동아시아 출판인회의를 조직하여 "동아시아 100권의 책"을 선정한다는 말을 일전에 들었는데 29일에 선정 및 발표되었다.
동아시아 격변기 세계관 바꾼 ‘현대의 고전’ 한겨레
“거대한 독서공동체 복원 첫걸음” 한겨레
한·중·일 이어줄 ‘100권의 책’ 중앙일보
책에서 동아시아 문화 유전자 찾는다 중앙일보

내가 번역한 책도 후보에 올라와 있어 출간을 약간 미루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최종선정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후보 명단에 올라와 있던 책들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출판사별로 나눠먹기식이어서 성격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선정된 책들을 보니 나라별로 기준은 다르지만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런 색깔에 의하면 중국쪽에서 선정한 목록에 내 번역서가 포함되지 않는 게 너무 당연하게 보일 정도이다.

목록만 보면 한국과 일본은 선정기준이 거의 유사하고 출판인회의에서 내세운 취지에 잘 맞는 것 같다. 두 나라가 약간의 시간을 두고 비슷한 역사를 거쳤고 그것을 해결해 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이 "학술서"에 보다 치중한 반면 한국은 진보적 시각이 두드러진 책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조선일보에서 아니나다를까 선정 기준이 뭐냐고 하나마나한 말을 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고([편집자 레터] '한국 대표하는 책' 기준은), 한국일보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저술한 학술서와 고급 교양서"임에 반해 한국은 "정치ㆍ사회적으로 진보적 관점에서 저술된 책"이 눈에 띄어 "공공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해외에 소개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동아시아 독서 공동체, 끊겼던 맥 다시 잇는다) 한국쪽 선정도서에 대한 견해는 비슷한데, 일본쪽 선정도서에 대해서는 한국일보와 한겨레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어차피 한국사람들에겐 생소한 분야라 신문에서 그렇다면 그런 줄 알 테니까.)

이에 반해 중국쪽은 명확하게 중국 "학술"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야말로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뭐, 그다지 정치적으로 위험하지 않은, 그런 거. 처음 추천후보에 각종 사전류가 대거 포함된 것을 생각해 보면 많이 나아진 거긴 하다. 사전이 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하긴 할 테지만, 무려 "동아시아 100권의 책"으로 서로 돌려보자는 취지에는? 그걸 어찌 번역해? 후후.
암튼 정리된 최종선정 목록에는 인민공화국 건립 이후의 역사에 관련된 책이 하나도 없는 셈이다.

중국쪽 매체에서는 거의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한국어로 엉성하게 번역된 책 제목이 아니라 좀 더 정확한 목록을 살펴보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검색되어 나오는 건 중앙일보 등이 올초에 제공한 기사의 중문판이 대부분이었다. 혹시 중국 쪽은 발만 슬쩍 담근 형국??


이 중 한국어로 이미 번역된 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국
1. 시론, 주광잠(주광첸), 동문선
4. 중국철학약사, 풍우란(펑유란) ; (간명한)중국철학사 / 펑유란 지음 ; 정인재 옮김 형설, 2007
7. 한어사고, 왕리 ; 중국어 어법 발전사 / 王力 著 ; 박덕준 ... [등]역 사람과책, 1997
10. 미의 역정, 이택후(리쩌허우), 동문선

18. 담예록, 전종서(첸중수) ; 하나마나한 번역으로 <중국어문학> 학회지에 완역(미출간).
19. 향토중국, 비효통(페이샤오퉁) ; 중국사회의 기본구조 = Rural China / 費孝通 원저 ; 이경규 역 一潮閣, 1995
20. 현대중국사상의 흥기, 왕후이 (출간예정)

대만
3. 중국예술의 정신, 서복관(쉬푸관) ; 중국예술정신 / 徐復觀 著 ; 權德周 ... [等譯] 東文選, 1990 /중국예술정신 / 徐復觀 著 ; 李鍵煥 譯 百選文化社, 2000
11. 만력 15년, 레이 황


각 신문들의 소개를 보면, 책 제목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사람 이름에서는 오류가 많다. 특히 중국식 병음은 많이 알려져 거의 오류가 없지만(중앙일보 표기는 엉망이다), 대만식 영문표기는 대부분의 신문에서 뒤죽박죽이다. 웨이드식 표기라는 걸 모르면 장광즈(張光直)를 창쾅츠(Chang, Kwang-chih)라고 읽을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심종문(선충원)을 셴콩웬(Shen Congwen)이라고 읽는 건 뭘까? 아마도 홍콩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이번 선정에 한중일 각 26권, 대만이 15권, 홍콩 7권이다. 그러나 대만, 홍콩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책은 한두 권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범중화권으로 묶일 수 있을 성질의 것들이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저자의 책을 번역한 것, 대륙에서 출간하지 않고 홍콩이나 대만에서 출간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규모 면에서 한중일이 똑같은 분량으로 했을 때 나오는 불균형을 이런 식으로 메꾼 것으로 보인다만, 대만이나 홍콩 자신의 역사에서 나온 문제의식을 정련한 책들이 아쉽긴 하다. (이 목록만 보면 이들은 이미 "하나의 중국"이다.)

신문에 소개된 것처럼 차후에 번역이나 후속활동이 계속되겠지만, 이제껏 한중일 삼국이 서로 관심 가는 책들을 번역해서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물론 중국에서의 한국책 번역 비율은 낮다만, 사업 이후에 갑자기 한국책을 많이 번역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사업 자체로 문화공동체 운운하는 건 좀 과장일 듯하다. "같이" 뭘 할 건지에 대한 고민이 든 책은 없고 자국의 특성을 강조하는 책들로 다들 뽑았지 않은가. 게다가 중국 쪽은 동아시아에서 어떤 "공동체"로 묶이는 걸 그닥 바라지도 않지 않나?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10. 30. 00:14
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10. 18. 17:54

한국에 와 있는 동안은 아이와 놀이터 가는 게 중요한 임무이자 낙이다.
힘이 쏙 빠지도록 놀아도 더 놀고 싶어하는 아이 때문에 조금 지칠 때도 있지만. 그런 실랑이도 재미다.

나는 도시의 놀이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몰랐는데, 요즘 초등학생들 참 재미나게 논다.
우르르 몰려와서는 뭔가를 읽고는 다른쪽으로 또 우르르 몰려다니길래,
궁금증이 생겨 나도 슬쩍 끼어 보았다.


나도 번호 순서대로 하나씩 쫓아가 보고 싶었지만 아이를 내버려두고 그럴 순 없어서.. ㅠㅠ
게다가 이런 놀이가 여러 번 반복된 듯, 순서 배열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위 사진들 중에서도 순서가 있는데 굳이 순서대로 사진을 배치하지는 않았다.
암튼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노는 모습들이 참으로 재미나서,
나도 제발 좀 끼워달라고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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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10. 17. 17:36

어릴 적 해마다 가을이면 가장 기다려지는 게 홍시였다.
우리 동네는 감나무가 많았는데 우리 집만 해도 다섯 그루나 있었다. 제법 높게 올라간 놈은 대나무로 가지를 꺽어서 따거나 나무에 올라가 직접 따먹고 나트막한 나무는 그냥 손을 뻗으면 되었다. 이 나트막한 놈은 죽었다가 살아난 고목인데, 감은 몇 개 열리지 않았지만 맛이 기가 막혔다. 그냥 단맛만 있는 젊은 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는 풍부한 맛. 가을이면, 학교 갔다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잘 익은 감을 골라 따 먹는 것이었다. 내일 먹으면 딱 적당할 놈을 동생이 못 참고 먼저 먹었다면 난리가 나곤 했다. ^^

요즘은 감나무가 거의 사라졌다. 홍시가 그냥 떨어져 길바닥을 더럽힐 정도로 동네에 꼬맹이가 없더니 모두들 베어 버린 것이다. 우리집 감나무도 혹은 베어지거나, 혹은 태풍에 쓰러져 지금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대신 동네에 단감을 재배하는 가구가 많아졌다. 농업경쟁력을 독려한 농협의 부추김으로 몇년 전, 그러니까 10여년 전 한 차례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그 즈음해서 뒷산을 깎아 울 아부지도 감나무를 심었다. 멀쩡한 산이 과수원 모양새가 되었는데, 햇볕도 잘 안 들고 토질도 별로여서 왜 그랬는지 그때도 지금도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인삼이나 심으시쥐. ㅡㅡ;;) 원래부터 과수에 좋은 땅도 아니었고 관리도 잘 안 되어 감나무는 망쳤고, 그러더니 거기다 또 복숭아를 심으셨다. 복숭아라고 잘 될 리가 있을까만은.

그래도 아부지가 만들고 정도 쏟고 했던 곳이라 산소도 그쪽으로 꾸미긴 했다.

추석이라 고향에 갔다가, 음식준비하는 사이 밤을 따러 뒷산에 올랐다. 밤을 따러 간다는 건 조금은 핑계였다. 왠지 집에 오면 뒷산에도 올라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밤은 다 떨어져 있었고 나무에 달려 있는 놈들도 벌레가 가득했다. 칡넝쿨과 수풀을 헤치며 몇 나무 살펴보다가 포기하고 바닥에 떨어진 놈 중에 그나마 쓸만한 놈들을 골라본다. 그런대로 먹을만한 놈만 골라도 제법 깔 수 있었다. 의외로 말이다.

칡이 너무 무성하여 숲을 하나로, 자기 영역으로 만들고 있었다. 지난번 동생과 칡넝쿨을 없애보려다 결국은 포기했다. 한나절에 끝낼 수 있는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더 심해져 있다. 칡넝쿨 사이에 말벌집도 보았는데, 올해는 밤나무 근처에서 그보다 더 큰 벌집을 발견했다. 굉장히 크고, 좀 이뻤다. 둥그런 황금색 집 중간에 구멍이 한 개만 뚤려 있었다. 벌집은 드나드는 구멍이 여럿 되는 줄 알았는데...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아 벌집을 찍지 못한 게 아쉬워 추석 당일에 차례를 끝내놓고 다시 뒷산을 올랐다.
하루사이, 벌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별로 넓지도 않은 산인데, 그 부근을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포기하고 가려는데 앞쪽 비탈에서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랗게 또아리를 튼, 머리도 내밀지 않은, 그렇지만 언제든지 달려들 듯 살기를 보이는.

독이 있는 산뱀은 사람을 봐도 도망을 가지 않는다.
그곳은 자기 집이었다.
영역을 침범당한 뱀의 살기는 독성이 아주 셌다.
그걸 본 순간부터 나는 꼼짝도 않고 그 놈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 또한 미동도 않은 채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까? 벌 대신 뱀? 혹시 찰칵 하는 소리에 위협을 느껴 달려들지는 않을까? 사진 찍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천천히 발을 옮겨 그 자리를 피해야 했다.

흙과 낙엽 사이에 그것과 똑같은 색으로 또아리를 튼 뱀의 영상은 며칠이고 내 머리 속에 남아, 올라오는 버스에서도 잠들기 전에도 눈에 아른거렸다.

약간 억울하기도 했다.
내 산에서 내가 쫓겨 나야 한다니.
불과 몇 년 사이. 집 바로 뒤에 있는, 한때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 울창한 정글이 되어 버렸다.
한때 가장 치열한 전투지역이었다가 이제는 생태의 보고가 된 문득 DMZ가 떠올랐다. ご,.ご;;
사실 60년까지 갈 것도 없이 2,3년만 그냥 내버려 둬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리는 게 산인가 보다.

뱀이 보낸 경고를 엄마와 식구들에게 전해줬다.
약간만 경로를 벗어나도 겨울잠 자기 전 독기가 바싹 오른 뱀을 밟을 수도 있다.
멧돼지는 언제고 내려와 더덕을 캐먹고 간다.
과수들은 벌레들이 점령했고, 칡넝쿨에 엉켜 햇볕을 더 못보게 되었다.

벌집을 떼내고, 뱀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들고, 벌레 먹지 않게 농약을 때때로 뿌리고, 칡은 뿌리채 뽑아내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다시 사람이 제어하고 이용 가능한 곳이 된다. 등산로나 과수원 바깥에서는 적응 못할 정도로 모두들 도시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울창한 숲이 되어버린 동네 다른 산들처럼 그냥 뱀과 멧돼지와 늑대에게 산을 돌려줄 수밖에..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
지금이라면 뱀이나 벌이나 멧돼지들도 자기 땅이라고 우기진 못할 테니. 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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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는 2008년 금융위기에 끝났다!

중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인 왕후이의 신작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别求新声)』가 출간된 이후 <신경보(新京报)>(2009년09월05일자)에 서 기획한 인터뷰를 소개한다.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는 『독서』잡지의 주간을 맡은 10여 년 간의 인터뷰를 모은 것으로 근대성 비판, 전지구화, 사상사 및 중국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해들을 수 있다. 『뉴레프트리뷰』와의 문답(신비판정신), 페리 앤더슨(신좌익, 자유주의, 사회주의), 가라타니 고진(동아시아 공동체의 가능성), 코모리 요이치(탈정치화된 일본정치와 수사학), 레오 어우판 리(문화연구와 지역연구), 미조구치 유조(중국 없는 중국학이란 무엇인가), 벤저민 앨먼(“누구”의 사상사인가) 등 다양한 학자들과의 이 대담을 모은 이 책은 곧 한국어로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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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이,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别求新声)』, 북경대출판사, 2009년 3월


『탈정치화의 정치: 단기 20세기의 종결과 90년대』에서 밝혔듯이, 그는 "90년대"라는 말과 "1990년대"를 조금 다르게 쓰고 있다. "1990년대"가 단순한 시간개념이라면, "90년대"는 시장경제의 형성과 그로 인해 일어난 복잡한 변화를 그 특징으로 하는 가치개념을 함축한 용어이다. 그는 '"90년대"가 1989-1991년의 세계적인 거대한 변화를 거치면서 탄생했다."고 판단한다. 밖으로는 공산권의 몰락, 안으로는 천안문사건 등을 염두에 두고 이전 시기와는 다른 맥락에서 90년대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90년대”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시장 시대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새로운 특징이 국가와 사회의 면모를 바꿔 놓았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이 낯선 시대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7~2008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90년대”가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는 한 시대의 끝일 뿐 아니라 한 사조의 종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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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이와의 인터뷰
_ 왕후이는 학술계에서 풍향계의 역할을 맡아온 인물이다. 특히 1996년 『독서』잡지의 주간을 맡은 이후 매번 논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그의 학술 : 학술의 변화는 우연적이면서 필연적인 것이었다

Q: 당신의 글은 제공되는 정보량이 굉장히 많고 제시되는 문제 또한 아주 복잡합니다. 일전의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도 그렇고 새로 출간하신 인터뷰집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글을 읽고 쓰시는지요?
A: 연구하는 방식이야 다들 비슷비슷하겠죠. 먼저 기본적인 자료와 관련 연구성과를 읽은 후 문제의식이 심화됨에 따라 발견되는 새로운 자료들을 읽어 갑니다.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는 집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죠. 언급되는 문제나 관련된 분야가 다양하여 끝없이 수정해야 했습니다. (특별한 점은 없고) 그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계속하여 독서와 사유를 계속하도록 자신을 독려하고 여러 대화상대를 찾으려 합니다.

Q: 문학평론으로 학문을 시작하셨습니다. 박사논문인 <절망에 대한 반항>은 루쉰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쳐 지금까지도 전범적인 작품으로 읽힙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 정치 경제 비판과 역사연구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번에 출간하신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의 인터뷰 또한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요, 원래의 학술적 배경과는 상당히 멀어진 것 같습니다.
A: 그렇습니다. 박사과정을 졸업한 뒤 루쉰 연구는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루쉰으로 박사논문을 쓰면서 그 시대의 사상과 사회적 변천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캉유웨이, 옌푸, 량치차오, 장타이옌 등은 모두 루쉰을 연구할 때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요, 지나고 보니 이제는 이들이 제 연구대상이 되어 있더군요. 중국 사상 뿐 아니라 루쉰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서구와 러시아의 사상가, 문학가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일의 니체와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대표적이죠. 제가 중국사회과학원 박사과정에 있을 때, 철학, 종교, 문학, 역사, 사회학 등 전공이 제각각인 박사반 20명 정도가 한 건물에서 살았어요. 그 중 절반 정도는 경제학과 관련된 전공이었죠. 동학들끼리 틈만 나면 서로 토론하고 배우면서 지냈어요. 당대 중국에 대한 저의 관심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격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사조 : 중국을 사유하려면 이론적 정합성도 필요하지만 실천적인 논쟁도 필요하다

Q: 선생님의 연구 중 상당 부분이 20세기 중국사상사에 대한 것입니다. 각종 이론들 간의 긴장관계를 파고들며 20세기에 대한 사유를 진행하고 계신데요, 그간 어떠한 소득이 있으셨는지요?
A:  시대마다 그 시대의 사회 사조가 있습니다. 단, 이론과 실천이 맺고 있는 관계는 해당 시대 자체에 가장 풍부하고 깊이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사” 시기의 백화문 토론이나 동서문명 논쟁, 사회주의 논쟁 등에서 30년대의 중국사회사 논쟁 및 뒤따라 전개된 역사연구와 이론 논쟁 등 거의 모든 이론과 논쟁이 사회적 실천의 와중에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한 반향이 새로운 이론적 토론으로 발전해 갔구요. 이런 식의 흐름이 칠팔 십년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Q: 80년대 이후 어떠한 변화가 있었나요?
A: 80년대 중반부터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론적인 논쟁이 갈수록 약화되었죠.  80년대 중후반 이후에 사회주의 역사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면서 사회범주 내부의 이론 논쟁과 정치 사회의 변화가 맺고 있던 관계가 변경되었던 듯 합니다. 이론적 논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80년대 중반 이후 대규모로 이루어진 서양이론의 번역과 그로 인해 수입된 관련 사조는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시기의 이론 논쟁과 비교해 볼 때 이론성이 상당히 약화되었고 사상이 변화하는 방식도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Q: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A: 20세기의 이론 논쟁은 특정한 정치 과정 속에서 전개되어 왔는데, 많은 부분에서 전환이 일어난 오늘날은 사상 논쟁이 정당과 국가의 테두리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상 논쟁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사회형태의 전환 과정에서 이미 발생한 정치적 전환을 홀시할 수 없습니다. 90년대의 사상 논쟁은 이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그런 논쟁과는 완전히 양상을 달리합니다. 그렇다고 이데올로기의 강도가 약해진 것도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데올로기가 “허구적 의식”이라는 걸 누구나 안다면 진정한 이데올로기가 아닐 테니까요.

사조의 종결 : 두 차례의 위기가 사조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Q: 당신 또한 90년대 이후 이데올로기 논쟁에 개입했습니다. 1997년  <오늘날 중국의 사상 동향과 근대성 문제>가 발표된 후 많은 토론과 논쟁을 일으킨 바 있는데요, 지금 되돌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A: 그 글에서 저는 계몽주의, 민족주의, 신유가, 포스트모더니즘 등 중국 사상계의 모든 유파를 분석했습니다. 주된 논지는 외면상 굉장히 다르고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각각의 사상이 공유하고 있는 전제, 특히 그들이 근대화 이데올로기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관련 때문에 당대 중국사상이 당대 문제를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합니다. 당대 중국은 이미 전지구화의 과정 내부에 들어와 있습니다. 따라서 시각을 새롭게 조정해야만 현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논문이 전지구화와 근대성 이데올로기에 대해 견지한 비판적 태도는 당대 문제를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 주었습니다. 반발은 예상했지만 그토록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Q: <오늘날 중국의 사상 동향과 근대성 문제>는 많은 논란과 비판을 받았는데, 1997년 동남아 금융위기와 관련이 있습니까?
A: 90년대 중반, 전지구화가 중국 지식계의 화두로 막 떠오를 때 금융위기가 닥쳤습니다. 당시 저는 황핑(黄平)과 함께 『독서』잡지를 편찬하면서 관련된 논의를 발굴하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국내 학술계에서는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듯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외국과 홍콩의 몇몇 학자들에게 글을 부탁하여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최소한 당시에는 중국 지식계에서 제대로 된 분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 글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면 아마도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금 융위기가 지나자 마자 1999년 코소보 사태가 일어나고, 2001년 “9•11”사건과 그에 뒤따른 아프간 전쟁 및 이라크 전쟁이 발발합니다. 2008년의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90년대의 사조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2008년이 90년대 사조가 끝난 해라고 생각합니다.

Q: 십여 년간 지속된 그 논쟁에서 매체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A: 기본적으로 매체는 주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문에서 벌어진 사상 논쟁은 특정 논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그들의 틀 안으로 구겨 넣어 논의를 진행하곤 하는데, 이 또한 신문에서 벌어진 “사상”논쟁이 “사건”과 어긋나는 원인의 하나입니다.

사상 논쟁 : 논쟁이 공공정책의 재조정을 촉진시키다

Q: 그 사상 논쟁이 십여 년 간 지속되면서 지식계에 어떠한 공헌을 하였습니까?
A: 90년대 중국 지식계에 논쟁이 지속되면서 일련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정말로 제대로 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비판적인 지식인들입니다. 제가 “비판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주류의 위치에서가 아닌 “다른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전지구화에서 제국주의 전쟁까지, 삼농위기(농촌, 농업, 농민), 의료체제 개혁의 위기에서 생태위기 및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이 일련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중심적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지식인들이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까요? 과거 십여 년의 사상 논쟁을 돌아볼 때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어떤 논쟁이 아쉽다고 생각됩니까?
A: 두 가지 정도를 들어 보겠습니다. 국영기업 개혁 문제는 2005년 전후에 화두로 떠오른 문제인데, 그 즈음에 큰 틀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일찍이 90년대 중반에 추이즈위안이 러시아의 자발적 사유화를 예로 들어 사유화 과정이 러시아에서 이미 조성되었고 중국에도 곧 닥칠 문제임을 분석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식계에서 주로 떠받들던 방식이 러시아 모델(얼마 후 체코나 폴란드 같은 동구 모델로 변했습니다만)이 어서 그런 식의 분석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태위기의 중시와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당시 제가 존경하던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독서』에서 그런 글을 발표할 필요가 없다.그런 건 선진국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 년도 지나기 전에 생태위기의 심각성은 누구나 동의하는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Q: 지식계의 일방향적인 여론이 개혁의 복잡성을 가중시켰다고 보십니까?
A: 과거 십여 년간 삼농문제, 의료체제, 생태위기, 국영기업 개혁 등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은 공공여론의 화제를 변화시켰습니다. 시간단위를 조금 확장시켜서 살펴 보면 이러한 논쟁은 공공정책의 재조정을 촉진시켰습니다. 공공 여론과 정책의 재조정 사이에서 나타난 이런 상호적 관계는 중국 사회에 잠재하고 있는 민주적 가능성과 함께 어떤 불안정한 메커니즘이 존속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2년 전 제가 『독서』잡지를 떠날 때, 삼련서점의 전임 고위간부가 그러더군요. 『독서』가 유발한 논쟁이 너무 많아, 그건 좋은 일이 아냐! 라고 말입니다. 그건 아마도 대부분의 간부들이 품고 있는 생각일 겁니다. 논쟁을 걱정하죠. 그런데 만약 논쟁이 없었다면 공공정책의 제정은 일부 이익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을 겁니다.

Q: 전지구화, 시장화에 대한 90년대 지식인의 낙관적 견해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여러 방면에 관련된 문제이겠지만, 두 가지 점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첫째, 그렇게 맹목적인 낙관이 중국이 마주하고 있는 도전과 위기를 감춰 줍니다. 둘째, 모든 문제, 특히 초창기 30년에 벌어졌던 일들을 “과거”로 귀결시킵니다. 이는 중국이 20세기에 펼쳤던 실험을 전혀 사고할 수 없게 만들며, 또한 중국이 개혁개방의 와중에서 얻게 된 성취를 해석할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20 세기의 역사에서 벌어진 각종 비극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사유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의 역사과정을 간단히 부정해 버린다면 기본적인 역사적 평가에 혼란만 가중될 것입니다. 지식계의 논쟁 중 식민주의에 대한 변호, 제국주의 전쟁을 부추기는 듯한 논조가 생겨난 것도 거의 모두 이런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금융위기 : 위기가 제공한 새로운 사고와 선택

Q: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A: 전세계 사람들이 금융위기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쪽 방면으로는 제 친구들이 저보다 더 깊이 있고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하고 있을 겁니다. 금융위기는 금융의 위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주로 시장 구제, 성장, 수출, 외화 보유고, 증시, 부동산 문제 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번 위기가 다른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정치적 사유와 방향성을 선택하게 할 수 있을까요?
위기를 수치와 시장 문제로 단순화시키고 위기의 구조적 특징을 간과한다면 그것은 시장의 논리를 철저하게 합리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너지 문제, 생태 위기, 토지 문제, 노동권의 침해, 교육의 불평등,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에 의해 야기된 민족 모순 및 글로벌 경제 관계의 변화 등등, 이 모든 문제는 경제 위기가 단순히 경제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합니다. 위기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일부 경제전문가들의 대책성 해법에 국한되지 않고 금융위기를 둘러싼 더 다양한 논의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위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문제 : 중국의 성취와 어려움을 동태적으로 이해하자

Q: 당신은 논쟁 중에 맹목적으로 외국의 경험을 복제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세계가 연계된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 왔습니다. 간단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A: 중국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힘과 역사적 전통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변화를 관찰하려면 이렇게 상이한 사회적 힘과 역사적 전통이 주고받는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국가가 개별적인 이권들을 초월하여 효과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이른바 중성화된 국가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요? 그것은 사회주의 역사, 조금도 중성화되지 않은 역사에서 탄생한 겁니다. 그러한 역사적 토대 없이 생겨난 국가와 독립적 국민경제 체제는 개혁의 전제가 없습니다. 금융위기를 맞아 중국은 많은 도전과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정은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편입니다. 제때에 대처를 잘 했고 또 위기 전에 이미 몇몇 부분에서 조정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삼농문제, 의료체제 문제, 금융체제 부분의 개혁은 모두 위기가 폭발하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조정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논쟁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혹은 상이한 힘, 상이한 역사적 전통이 힘을 겨룬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성취와 실패는 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태적인 관계에서 중국의 성취와 어려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Q: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는 당나라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대에 걸쳐 있는데요, 이 또한 역사에서 중국문제를 해결할 자원을 찾으려는 노력인 건가요?
A: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는 서양에 의한 동양의 재구성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지식 영역에서 서양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사이드도 지적한 것처럼, 만약 비서방세계가 새로운 지식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항상 식민주의 지식의 틀 안에서 세계와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밖에 없고 진보도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역사연구, 문화연구 및 다른 지식 영역에서도 기존의 틀 안에서 중국의 역사와 사회를 정리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연구와 대화를 통해 중국과 관련된 지식이 세계와 중국을 관찰하는 살아 있는 방법,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는 낡은 지식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른바 중국과 관련된 지식이 고립적인 것은 아니며, 중국/세계의 틀에 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국은 지금껏 역사의 변동 과정에서 상이한 장력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작업은 아주 제한적인 것이겠지만 탐색하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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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상해에는 고층건물은 수없이 많지만 지하로 깊이 파고 들어간 건물은 별로 없습니다.
모래땅이거나 퇴적층이라서 조금만 파 들어가면 물이 나옵니다. (게다가 상해라는 땅 자체가 바다보다 낮습니다.) 지하로 내려갈 공사비로 몇 층 더 올리는 게 유리한 셈이죠. 따라서 옛날부터 옥탑방(亭子間)은 있어도 반지하는 없었나 봅니다. 물론 초고층 빌딩이나 대형상가를 지을 때는 기본적으로 지하로 좀 파고들긴 할 겁니다. 안 그랬다간 얼마전 막 옮겨심은 나무가 쓰러지듯 그대로 반듯하게 넘어간 어느 아파트 꼴 나겠죠?



비오기 직전이어서인지 파란 하늘에 구름이 이쁘게 낀 선선한 날에 자전거를 타고 조금 돌았습니다.

지난번 다녀온 서산(佘山)에서 조금 더 나가 천마산(天馬山)이란 곳까지 갔습니다. 알고보니 상해 근교에 "운간구봉(云间九峰)"이란 이름으로 아홉 개의 산이 있나 봅니다. 상해쪽은 구름이 참으로 낮게 내려오나 봅니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아홉 봉우리라니요! 제일 높다는 천마산이 고작 해발 99.8미터입니다. 실제로 지면에서 보면 어릴 적 소 먹이러 다니던 우리 동네 뒷산보다 낮습니다. 역시나 자전거 때문에 산 위로 올라가 보지는 못했네요. 천마산 위로 기울어진 탑이 보입니다. 이것도 이 근교에서는 나름 유명한 사탑이라고 합니다.

같이 간 중국 친구가 산을 깎아 만든 구덩이 이야기를 합니다. 원래는 산이었는데 채석을 한 끝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고 말하더군요. 별다른 명칭은 없고 그냥 "천마산심갱(天马山深坑)"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지도에도 없고 위성사진도 이쪽 일대는 그다지 정밀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미리 알고 가기 힘듭니다.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적어서, 천마산 일대에서 물어봐도 모르는 사람이 많더군요. 살짝 동네로 더 들어가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대략의 방향은 가리켜 줍니다.

어쨌든 물어물어 횡산(横山)이라는 나트막한 동산 부근에서 어떤 촌로에게 위치를 알게 됩니다.
저는 산을 깎았다고 해서 백록담이나 천지처럼 산의 외형은 남아 있고 그 속에 거대한 분화구가 있는 모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촌로가 가리킨 곳에는 그냥 나트막한 콘크리트 담장이 하나 보일 뿐 허허벌판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그 담장을 뛰어올라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다음과 같은 풍경이 펼쳐지더군요.





깊이는 대략 100미터, 길이가 240미터, 폭이 160미터라고 합니다. 보통은 20미터 정도 깊이의 물이 차 있구요. 요즘은 자전거 탈 때 사진기를 안 들고 다니는데, 정말 후회가 되더군요. 뭐, 들고 갔어도 광각이 없어 제대로 담지 못했겠지만요. 중국친구가 찍은 사진도 직접 눈으로 볼 때의 웅장함을 충분히 담지 못했어요. 담장 위에서 내려다보면 머리가 아찔해졌습니다. 약간 압도된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채석할 때 사용된 듯한 계단이 비스듬이 보이고, 다른 쪽 모서리에선 까마득히 어떤 사람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건데 물이 꽤 많이 차 있습니다. 인터넷에도 적당한 사진이 없군요.
(아마도 우기에 잠깐 물이 불어난 것은 아닌 듯. 비 좀 온다고 불고 줄고 할 규모가 아님. 사진에서 드러난 주변환경을 따져보건데 훨씬 옛날 사진이고, 이 "호수"를 다른 식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이 있는 최근에 물을 퍼낸 게 아닐까 사료됨) 

아래 사진은 예전 사진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조감도일 것 같기도 하네요. 잘 모르겠어요. 주변에 못 보던 건물이 가득한데,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구덩이 주위의 건물은 거의 철거된 듯합니다. 아무튼 구덩이를 위에서 조감하면 대충 이런 모양이 나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조금 뒤져 보니 원래 채석장이었던 이 곳은 몇 십년째 버려져 쓰레기장 비슷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렇게 깊게 파내려 갔는데 사방이 암반이라 빠져나갈 곳이 없으니 당연히 물이 고였을 거고, 온갖 폐수로 썩어갔겠죠. 상해 시내에서 아무리 파내려 가도 돌맹이나 암반층은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상해라고 불리는 땅의 대부분은 원래 바다였으니까요. 나트막한 산이 있던 이 곳은 그래도 대륙의 일부였나 봅니다. 이 곳에 어떤 채석장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명칭도 없습니다. 다만 산 하나가 사라지고 그 곳의 골재는 어느 건물의 일부가 되었겠죠.

아무튼 원래 산이었던 곳을 파서 평평하게 한 것에 그친 게 아니라, 원래의 산보다 더 깊게 파내려 간 대륙의 기상에 놀랄 따름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놀랄 게 남아 있습니다.

원래 유명한 지역도 아니었고 볼 것도 별로 없었으니 십여 년째 잊혀져 있다가 얼마 전 우연히 누군가의 눈에 띄었나 봅니다. 우리가 들어간 입구 쪽에 관리 사무소 비슷한 게 있어서 보니, 이 곳에 2010 말 준공 예정으로 지상2층, 지하17층, 수면 아래로 2층 규모의 5성급 호텔이 들어선다는 포스터가 눈에 뜨입니다.

지상2층에는 대충 프론터, 식당, 회의실 등의 역할만 하고, 400여 개의 객실을 수면 위 17층에, 수면 아래 1층(18층)은 물밑을 보면서 쉴 수 있는 식당과 커피숍 등이, 가장 낮은 19층에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总统套房)까지 갖춘다고 합니다. 인공폭포도 빠질 수 없지요. 넓게 펼쳐진 호수(?)에서는 수상 스포츠도 즐길 수 있게 하구요. 아무튼 물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하겠습니다.

(전후맥락에 약간 찜찜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런 걸 생략하고 보면) 발상 자체는 상당히 기발합니다. 완공되면 아마도 굉장히 독특한 호텔로 소개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주위에 오락시설과 쇼핑몰이 들어서, 천마산 서비스 단지(天马山现代服务业集聚区)의 한 중심을 이룬다고 하네요. 상해가 크고 넓어질수록 그 주변의 한적한 시골들이 모두 관광지로 변해갈 것 같습니다. 아마도 상해에서 소주까지 비는 곳 없이 가득 차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호텔이 완공되면 해발 -6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혹은 깊은) 호텔이 된다고 합니다. 이로써 중국은 세계 최고를 하나 더하게 되겠군요.

참고링크:
http://www.ehomeday.com/news/2007-10/2007101684817.htm
http://www.xcar.com.cn/bbs/viewthread.php?tid=5734337
http://blog.sina.com.cn/s/blog_4cd02152010097eq.html

혹시나 해서 위치확인 삼아 구글어쓰를 함 돌려봅니다. (예전에 구글어쓰 초창기에 시험삼아 써보고 처음 돌려보네요. ^^)
위치를 알고 봐야 정확하게 짚을 수 있지만 나오긴 하는군요. 검색창에 "天马山深坑"(유사검색어: 天马深坑, 天马山采石坑, 天马采石坑, 横山坑)을 치면 바로 뜨지만, "구덩이"가 아니라 호수처럼 나옵니다. 위에 검색해 둔 옛날 사진보다 물이 더 많았나 봅니다. 저는 4.2 버전을 사용했는데, 아마 최근 버전에서는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화면을 살짝 눕혀도 구덩이가 깊이로 표시되지 않고 호수처럼 표시됩니다. 광활한 평야 저 멀리 야트막한 천마산이 보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동한 경로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대략 54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제법 크게 보입니다.)

혹시나 해서 버스노선을 써 둡니다.

坐车路线如下:万体沪淞线直达松江乐都路车站,然后站内转松天线横山下。逛完大坑后再坐松天线去天马山,山上可露营。天马山沪佘昆线约1个半小时后可返回。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9. 21. 02:14

카메라는 어딜 가서도 예쁜 빛을 찾고, 그림이 될 구도를 잘라내는 것 같습니다.
그냥 연습하는 거다. 라고 생각하지만,
빈민가, 철거촌, 뒷골목에서 무엇을 발견해 내고, 어떤 걸 담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곳을 돌아다니며, 우리는 너무 쉽게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거라 착각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은 그림, 그 너머에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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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