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flaneur, p.m. 4:30 2009. 9. 15. 01:34
점점. 새로운 곳의 생활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짐 정리와 기본적인 배치가 끝났기 때문에 잠자리도 그런대로 편하고 무엇보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복단대 근처와는 달리 전화로 배달시킬 수 있는 식당을 기대할 수는 없다.
대신 단지 입구에 식사 시간에만 문을 여는 중국식 카페테리아가 있다.

맘에 드는 요리(라기보다는 반찬) 몇 개를 골라서 밥과 함께 먹는다. 포장해서 가져갈 수도 있다. 먹고나면 치우지 않고 일어서서 그냥 나오면 된다.
콩나물, 무, 호박, 버섯이 들어간 요리는 거의 항상 먹고, 나머지도 야채로 채운다. 버섯과 닭으로 우린 국물도 가끔. 야채 요리라고 해도 기름으로 볶거나 고기가 조금은 들어가기 때문에 채식을 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냥 이곳의 육류와 생선 요리가 별로 구미에 당기지 않을 뿐.

하루에 최소 두끼를 여기서 먹지만 아직은 질리지 않는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다만 비슷한 방식의 학교식당에선 10원 안쪽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이곳은 20원 내외이다. 한국돈으로 한 4000원 정도 하는 셈인데, 그건 내가 반찬을 최소 4개나 고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야채 위주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먹어줘야 다음 끼니까지 배가 고프지 않다.
간단한 식사로는 꽤 비싼 편인데 이미 상해에서 이 정도가 일반적으로 비싼 느낌은 아닌 것이다. 그보다 저렴한 식사는 덧밥류(5~7원; 1000원 내외), 신강 라면(5원) 정도일 테다. 상해의 일반 사무원들 비즈니스 점심세트가 약 35원인데, 그 말을 들을 때의 환율로는 대략 7000원 정도였다. 경우에 따라 다를테니 일반화하기는 힘들다만, 중국의 소득수준이나 소비수준이 예전같지 않고 한해한해 달라질 것임은 분명하다.

약간 곁다리로 센 느낌인데, 즉 내가 중국에서 한끼 4000원 정도의 밥을 먹는 것에 대한 변명이다.
아직 예전 환율의 느낌이 남아 있어 20원짜리 밥을 먹으면 내 감각으로는 2000원 정도 썼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2400원이 4000원으로 변한 감각은 한국인의 것이지, 중국인들 중 아무도 그걸 느끼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최근 1~2년 사이 계속 똑같은 20원이었으니까..
약간 억울하지만 이미 4000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수긍하지만,
여전히 먹는 것만큼은.. 이라고 쓰고 보니 고작 20원짜리 밥을 먹으면서 궁색하고나.

그러나 나는 몸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들어주는 편이라, 가끔 제대로 된 음식들을 찾아먹는다.
그게 피가 살짝 배어나오는 스테이크든, 곰국이든, 냉장고에서 꺼낸 당근을 우걱우걱 씹는 것이든..(쓰다 보니 이것도 제대로 된 음식은 아닐 수도.. ㅡㅡ;;)

아무튼 가장 중요한 먹거리가 해결되니 생활이 잡히더라는 말씀.
시작시간은 상관없고 마감시간만 확실히 기억하면 되는데, 9시30분(아침), 2시(점심), 8시30분(저녁) 전까지 이 식당으로 가야 먹을 수 있다. 거의 군대처럼 식사시간이 일정해져 다른 생활도 그에 따라 구획되더라는.


한적한 전원생활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촌놈임에도 이몸은 이미 도시의 시스템을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려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으므로.
그래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멀쩡한 도로를 넓히고, 혹시라도 비어있는 교통요지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을 욕할 수만은 없다. 나는 학교에서 멀어지더라도 지하철에서 가까운 곳으로 골랐고, 중국식 허름한 주택이 아닌 오피스텔 개념의 원룸에 들어왔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여러 익숙한 것들에서 조금 멀어져 하나에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저 바깥은 계속 공사가 진행중이고 계속 조금씩 편해질 것이다.
아주 짧은 미래에 전통의 흔적을 중국, 아니 상해가 새겨 넣지는 못할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전통"의 기호는 이미 많이들 관심을 가지고 곳곳에 새겨 넣고 있다.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들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약간은 과장되고 장식적인 모습의.
그게 아니라 길을 걷다가 보도블록에서, 다리 난간에서, 운하 옆 좁은 산책로에서, 간단히 요기할 작은 식당에서 우연히 아주 작은 마음씀을 보고 정겨움을 느낄, 그래서 그 곳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할 그런 걸 여기서 기대하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을 집앞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하게 된다.


오랫만에 자전거를 타고 서쪽으로 달렸다.
한국인이 보기에 작은 언덕에도 못 미칠 테지만, 상해 근처에서 가장 높은(아니 유일한) 산인 서산(佘山)까지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군부대와 골프장과 별장촌이 예전부터 있었던 듯 작은 길 사이사이로 계속 보였다. 한쪽에는 환러구(한자 치기 귀찮아 아래 사진 참조)라는 이름의 최신 놀이기구를 갖춘 유원지도 들어서 있다. 서산의 꼭대기에는 성당과 천문대가 있다. 찾아보지는 않았는데, 기억에 성당과 천문대는 프랑스 천주교 계열에서 만들었나 그랬을 것이다. 와이탄의 기상대가 와이탄으로 출입하는 선박에게 풍향이나 간단한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출장소였다면 프랑스 조계와 이곳의 천문대는 본점 역할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나중에 찾아보고 보충.)

큰 길에서 벗어나 비포장 도로나 작은 길을 헤매다 보니  그래도 시간이 꽤 걸렸다.
나중에 자전거를 두고 버스로 다시 와서 서산 꼭대기까지 올라가봐야겠다.
한번은 가 두는 게 좋을 듯. 산책삼아 올라가기도 적당하고.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타면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는데.
좀 유난뜬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악세서리만 달고 다니는 그런 시선을 느끼는데.
헬멧은 그래도 꼭 써야겠다. (사고는 언제나 한 순간이고, 올해는 유난히 내 에너지를 감소시키는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대신 걸어다니는 중국인이 드문 한적한 자전거 코스를 개발해야겠다.

'示衆 > flaneur, p.m. 4:3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의없는 것들, 폭죽  (10) 2009.09.18
리셋  (14) 2009.09.08
이사했습니다.  (18) 2009.08.30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