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flaneur, p.m. 4:30 2009. 9. 18. 00:53
추석이 다가오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선 명절만 되면 또래 아이들끼리 모여 폭죽을 터뜨리며 밤을 보냈다.
폭죽이나 장난감을 살 돈이 생기는 건 명절 정도여서, 세뱃돈을 받자마자 너나할것 없이 폭죽을 사 와서는 밤새 터뜨리며 동네를 쏘다녔던 것. 불을 붙이면 조그마한 폭죽이 하늘로 씨욱 하는 소리를 내며 올라가 뻥. 하고 터진다.
가끔 불발이라도 나면 아쉬워 어쩔 줄을 모른다.
하여튼 명절 밤에는 집에 있을 여가도, 이유도 없었다.
그 즐거웠던 기억이 명절이 다가오면 생각이 나고 가끔 설레고 그런다.
(폭죽이나 대보름 쥐불놀이는 어느 해, 아마도 80년대 중반, 화재예방을 내세운 면사무소 직원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내 힘으로 쥐불놀이 도구를 만들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마침하여 금지령이 떨어진 것. 이후 민속놀이 어쩌구 하면서 장려해도 요즘 아무도 쥐불놀이 안 한다. 동네에 애들도 없고.)


중국도 설에는 전통적으로 폭죽을 터뜨려 왔다.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들 대부분이 배우는 중국문화개황 어쩌고 하는 책에 섣달 그믐(除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찾아보긴 귀찮고 기억이 대충 맞다면) 년(年)이라는 괴물을 내쫓기 위해 "년"이 가장 싫어하는 붉은색을 내걸고 폭죽을 터뜨린다 뭐 이런 이야기.

아무튼 설날, 추석 등 명절에 꼭 등장하는 게 폭죽. 그 중 돈 잘 벌게 해달라고 재신(财神)에게 복을 비는 1월 5일이 피크. 거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연기가 자욱하고, 귀가 멍할 정도로 도시 곳곳에서 폭죽이 터진다. 이럴 때면 정말 어디 피할 곳도 없고, 그냥 즐기는 수밖에 없다. 희한한 놈들이네~ 뭐하려고 저런 짓을?

정확한 가격은 알지 못하지만 별로 싸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확실한 건 세뱃돈으로 꼬맹이들이 살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에서는 그해 수입이 괜찮았던 주민이 돈을 기부하여 설에 폭죽을 터뜨리게 하기도 했다. 아파트 앞에 몇 박스나 쌓인 폭죽을 보면서, 아마도 그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나 혼자만 울상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화재를 유발하거니와 봉건적인 풍속이기도 해서 한동안 폭죽은 금지되었지만, 아마도 90년대 들어와서 그러한 제한이 없어졌고(게다가 요즘은 전통풍습을 오히려 장려하니까..), 돈도 좀 있고 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폭죽을 터뜨려 댄다. 화재의 위험이 아주 없지는 않은데, 올초인가에 CCTV 신사옥이 폭죽 때문에 완공 전에 화재가 나기도 했다. 물론 잘 나가는 거 자랑하려고 폭죽에 폭약을 지나치게 많이 넣었겠지만.


즐거운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명절의 폭죽이라면 그래도 참을 만하다.

그런데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폭죽은 정말 골치 아프다.
대표적인 게 결혼식과 신장개업.
지들이 언제 결혼하고 개업하는지 내가 알게 뭔가. 정말 갑자기 터뜨린다. 꼭 알리고 싶을까?



삼각대 없이 급하게 찍은 거라 좀 많이 흔들렸는데. 한국사람들이 폭죽이라고 생각하는 불꽃놀이용 폭죽은 가끔만 동원된다. 주로 밤에만. 중국에서 더 많이, 빠지지 않고 터뜨리는 것은 삐엔파오(鞭炮)라고 불리는 연발식 폭죽이다.

따따따따...

그렇다. 괴물이 싫어한 것은 불꽃이 아니라 폭죽의 소리인 것이다. 따따따따 하는 소리에 놀라 그믐날 밤 괴물이 도망을 간다. 사람이라고 괜찮을까? 개시할 때 뻥, 빵!(한 통을 터뜨리면 밑에서 불이 붙으면서 한번, 추진체가 10여 미터 위로 치솟아 꼭대기에서 다시 한 번 터진다.) 터뜨리는 폭죽까지 하면,

뻥, 빵..
따따따따.... (길게는 5분)
뻥, 빵..
뻥, 빵..(연속하여 폭죽이 소진될 때까지. 처음 들으면 총소리 같다.)

이 과정이 짧게는 5분, 길게는 10분 넘게 이어진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장개업할 때 음악 빵빵하게 털어놓고 모델들이 마이크로 홍보하는 시끄러운 풍경을 연출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들이고 싶은.

그런데,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 7시부터 이렇게 10분 넘게 폭죽을 터뜨려 댄다면?

8시2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7시에 일어나면 하루가 힘들고, 그렇다고 누워있게 놔두지도 않는다. 내가 왠만해선 욕은 하지 않는데, 정말 눈 뜨자마자 욕지기가 절로 나온다. 미리 다양한 욕을 못 배워둔 게 원망스러울 정도다. 아~ 쒸! (춈 크게!!)

밤 9시에도 터뜨리더니, 어제는 인적 드문 10시 30분에도 남아있는 폭죽을 소진시키는 모냥이다.


이게 다~ 내가 한창 뭔가 들어서고 있는 동네에 왔기 때문이다.
예전에 살던 곳은 주택가라 이런 식의 소음은 별로 없었는데, 이제는 문만 열고 나가면 식당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요즘 자주 가는 카페테리아 옆에 딤섬 위주의 대만식 식당과 새로운 슈퍼마켓이 생겼는데, 아마도 그 때문에 요 며칠 시끄러웠던 듯.

암튼, 그곳이 생긴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한번 가볼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폭죽 때문에 니네들은 나한테 찍혔다.


보너스. 불꽃 찍던 카메라를 약간 돌려 담아본 내 책상. 왠지 너저분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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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