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flaneur, p.m. 4:30 2009. 10. 17. 17:36

어릴 적 해마다 가을이면 가장 기다려지는 게 홍시였다.
우리 동네는 감나무가 많았는데 우리 집만 해도 다섯 그루나 있었다. 제법 높게 올라간 놈은 대나무로 가지를 꺽어서 따거나 나무에 올라가 직접 따먹고 나트막한 나무는 그냥 손을 뻗으면 되었다. 이 나트막한 놈은 죽었다가 살아난 고목인데, 감은 몇 개 열리지 않았지만 맛이 기가 막혔다. 그냥 단맛만 있는 젊은 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는 풍부한 맛. 가을이면, 학교 갔다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잘 익은 감을 골라 따 먹는 것이었다. 내일 먹으면 딱 적당할 놈을 동생이 못 참고 먼저 먹었다면 난리가 나곤 했다. ^^

요즘은 감나무가 거의 사라졌다. 홍시가 그냥 떨어져 길바닥을 더럽힐 정도로 동네에 꼬맹이가 없더니 모두들 베어 버린 것이다. 우리집 감나무도 혹은 베어지거나, 혹은 태풍에 쓰러져 지금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대신 동네에 단감을 재배하는 가구가 많아졌다. 농업경쟁력을 독려한 농협의 부추김으로 몇년 전, 그러니까 10여년 전 한 차례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그 즈음해서 뒷산을 깎아 울 아부지도 감나무를 심었다. 멀쩡한 산이 과수원 모양새가 되었는데, 햇볕도 잘 안 들고 토질도 별로여서 왜 그랬는지 그때도 지금도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인삼이나 심으시쥐. ㅡㅡ;;) 원래부터 과수에 좋은 땅도 아니었고 관리도 잘 안 되어 감나무는 망쳤고, 그러더니 거기다 또 복숭아를 심으셨다. 복숭아라고 잘 될 리가 있을까만은.

그래도 아부지가 만들고 정도 쏟고 했던 곳이라 산소도 그쪽으로 꾸미긴 했다.

추석이라 고향에 갔다가, 음식준비하는 사이 밤을 따러 뒷산에 올랐다. 밤을 따러 간다는 건 조금은 핑계였다. 왠지 집에 오면 뒷산에도 올라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밤은 다 떨어져 있었고 나무에 달려 있는 놈들도 벌레가 가득했다. 칡넝쿨과 수풀을 헤치며 몇 나무 살펴보다가 포기하고 바닥에 떨어진 놈 중에 그나마 쓸만한 놈들을 골라본다. 그런대로 먹을만한 놈만 골라도 제법 깔 수 있었다. 의외로 말이다.

칡이 너무 무성하여 숲을 하나로, 자기 영역으로 만들고 있었다. 지난번 동생과 칡넝쿨을 없애보려다 결국은 포기했다. 한나절에 끝낼 수 있는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더 심해져 있다. 칡넝쿨 사이에 말벌집도 보았는데, 올해는 밤나무 근처에서 그보다 더 큰 벌집을 발견했다. 굉장히 크고, 좀 이뻤다. 둥그런 황금색 집 중간에 구멍이 한 개만 뚤려 있었다. 벌집은 드나드는 구멍이 여럿 되는 줄 알았는데...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아 벌집을 찍지 못한 게 아쉬워 추석 당일에 차례를 끝내놓고 다시 뒷산을 올랐다.
하루사이, 벌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별로 넓지도 않은 산인데, 그 부근을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포기하고 가려는데 앞쪽 비탈에서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랗게 또아리를 튼, 머리도 내밀지 않은, 그렇지만 언제든지 달려들 듯 살기를 보이는.

독이 있는 산뱀은 사람을 봐도 도망을 가지 않는다.
그곳은 자기 집이었다.
영역을 침범당한 뱀의 살기는 독성이 아주 셌다.
그걸 본 순간부터 나는 꼼짝도 않고 그 놈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 또한 미동도 않은 채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까? 벌 대신 뱀? 혹시 찰칵 하는 소리에 위협을 느껴 달려들지는 않을까? 사진 찍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천천히 발을 옮겨 그 자리를 피해야 했다.

흙과 낙엽 사이에 그것과 똑같은 색으로 또아리를 튼 뱀의 영상은 며칠이고 내 머리 속에 남아, 올라오는 버스에서도 잠들기 전에도 눈에 아른거렸다.

약간 억울하기도 했다.
내 산에서 내가 쫓겨 나야 한다니.
불과 몇 년 사이. 집 바로 뒤에 있는, 한때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이 울창한 정글이 되어 버렸다.
한때 가장 치열한 전투지역이었다가 이제는 생태의 보고가 된 문득 DMZ가 떠올랐다. ご,.ご;;
사실 60년까지 갈 것도 없이 2,3년만 그냥 내버려 둬도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리는 게 산인가 보다.

뱀이 보낸 경고를 엄마와 식구들에게 전해줬다.
약간만 경로를 벗어나도 겨울잠 자기 전 독기가 바싹 오른 뱀을 밟을 수도 있다.
멧돼지는 언제고 내려와 더덕을 캐먹고 간다.
과수들은 벌레들이 점령했고, 칡넝쿨에 엉켜 햇볕을 더 못보게 되었다.

벌집을 떼내고, 뱀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들고, 벌레 먹지 않게 농약을 때때로 뿌리고, 칡은 뿌리채 뽑아내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다시 사람이 제어하고 이용 가능한 곳이 된다. 등산로나 과수원 바깥에서는 적응 못할 정도로 모두들 도시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울창한 숲이 되어버린 동네 다른 산들처럼 그냥 뱀과 멧돼지와 늑대에게 산을 돌려줄 수밖에..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
지금이라면 뱀이나 벌이나 멧돼지들도 자기 땅이라고 우기진 못할 테니. 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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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