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明室 2010. 12. 14. 15:40

눈 대신 비 내리는 겨울낮 미술관 안 카페를 밝히는 서늘한 가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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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3일 새벽 1시에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 선생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향년 78세.

타계 즈음에 가족이 중국에 다녀갈 때라 뉴스를 챙길 정신은 없었다. 찾아 보니 중국쪽은 관련 기사가 있고, 몇몇 학자가 그의 학술생애를 정리하는 글을 발표했다. 바이두 백과의 인물소개도 벌써 업데이트되어 있다.
나는 가끔 들르던 사이트에서 쑨꺼의 "送别沟口雄三先生"라는 글을 보고 알게 되었다. "송별"??....이라구?!

검색해 보니 한국쪽 뉴스는 전혀 없다. 놀랍기만 하다. 유일하게 발견되는 네이버 블로그도 중국쪽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국내에도 미조구치 선생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고, 타계 소식도 알고는 있는 모양인데. 가신 분께 적절한 예의 정도는 갖춰야 했지 않나 아쉽다. 계간지들은 겨울호를 준비하나?

물론 내가 선생과 막역한 사이일 리 만무할 뿐더러, 그의 책 중에 제대로 읽은 것도 없다.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도 석사 시절 몇 번 시도해 보다가 어렵기도 하고 다급히 읽어야 할 일도 없고 해서 그만두곤 했다. 어찌보면 저 정도 책은 필독서로 한 번 읽어줬어야 했는데, 기본으로 읽어야 할 책 중에 안 읽은 책이 저것 뿐이었겠나 하며 위안한다. ㅠㅠ (즉 나는 전혀 그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쪽글 몇 개에서 살짝 감화를 받았을 뿐이다..)

쑨꺼는 듣기로는 미조구치 선생과 꽤 친분이 있는 사이였던 것 같다. 일중 지식인 네트워크도 같이 하고.. 이번에 글을 읽어보니 그의 문집 번역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글은 중국인 독자를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겠지만, 미조구치의 학술생애 중 주로 중국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부분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후반기의 활동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이 아쉽긴 하다. 그러나 담담하게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있고, 쓸데없이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꼭 필요한 이야기를 잘 지적하고 있다.


쑨꺼의 글은 <중국사회과학보> 8월31일자에 발표되었으나, 여기서는 일부만 게시되어 있다. 인터넷에 전문이 소개된 곳이 많이 있고 그 중 내가 확인한 곳은 첨부된 문서에 밝혀져 있다. 해외에서 한글로 이용할 수 있는 자료가 제한적이라서 중간 부분에 사상사 관련, <중국 전근대 사상의 굴절과 전개> 부분의 번역은 정확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읽기 편하게 문장만 다듬었으니 참고만 하시기 바란다. 혹시 잘못 옮겨진 부분이 있다면 알려 주시고..

5페이지 정도 되는 글은 웹보다 출력해서 보시는 것이 편한 것 같아 문서를 첨부한다.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10. 7. 2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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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讀, 서재 2010. 7. 24. 00:30

1. 달제(獺祭)라는 말이 있다. 문자 그대로 풀면 “수달의 제사”라는 뜻인데,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달제 혹은 달제어(獺祭魚; 수달이 물고기를 제사지내다)의 뜻은 대충 다음과 같이 풀 수 있다.


# 수달은 포획한 물고기를 물가에 벌려놓곤 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상을 차려서 제사를 지내는 것 같다고 해서 나온 말.

# 글을 지을 때 참고서적을 이리저리 벌려 놓는 것, 전고를 많이 사용하거나 예전에 있었던 관련사항을 나열하여 문장을 짓는 것을 비유.

# 수달이 물고기를 잡으면 잔인하게 죽인 뒤 한 입씩 맛만 보고는 던져 놓아 먹다 남긴 물고기가 사방에 쌓인다고 한다. 이 경우는 ‘제(祭)’의 본의를 ‘잔인하게 죽이다(殘殺)’로 푼 것. (이 경우에도 먹다 남긴 물고기가 쌓이는 것처럼 짧은 글에 다양한 뜻을 쌓아넣는 전고(典故)를 활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수달의 성질이 정말로 어떠한지 보다는 수달을 핑계삼아 짧은 시 한 구절을 지을 때도 세상 모든 책을 펼쳐놓고 뒤적여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고 보면 되겠다. "달제"라는 말을 연상시킬 정도로 함축적인 표현과 전고의 활용에 능숙했던 대표적인 작가는 당대 시인 이상은(李商隱)이다. (자기도 그 많은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어서 그랬겠지만 :-) 그는 시를 지을 때 책상 여기저기에 책을 벌려 놓고 시구를 다듬곤 했다고 한다. 마치 수달이 제사를 지내듯 말이다.[각주:1]


2. 이사 때마다 먼지쌓인 책들이 골치다. 라고 마나님이 말씀하셨다. 저놈의 책 땜에 이사비용도 늘고 시간도 지체되고 정리하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라고 말이다. 동의한다. 한데 나는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고, 잘 정리되어 꽂혀 있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데 마나님은 읽지 않는 책은 살 필요가 없고 읽은 책은 치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뒤적거리며 찾아야 할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고. 정작 나의 작은 도서관에서 필요한 책을 잘만 이용하면서 말이다.

지난 번 이사 때 책을 많이 버렸다. 사실은 복사물이나 다시 보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최대한 주저하며(그리고 마나님이 버리려고 내놓은 것 중 눈치껏 다시 주워담아가며) 선별해서 버렸는데도 꽤 빠져나갔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면 좋을 책도 제법 내다버렸다. 미리 계획하고 솎아 냈다면 헌책방에 기증(?)하거나 블로그에 공지를 올려 필요한 분들에게 선물하여도 좋았을 텐데, 이미 이사라는 "일"의 일부가 된 뒤, 닥쳐서 급하게 하다보니 재활용 공간에 내다 버리기에 바빴다. 헌책이든 새책이든 상품으로 사고 선물로 받은 것이 쓰레기가 되는 순간이었다.


3. 이번에 또다시 큰 이사를 하며 책을 또 줄여야 했다. 시골집 방 한칸에 책을 옮겨놓기로 했는데, 일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필요없는(!) 책을 솎아내야 했다. 무심결에 마님께 이렇게 말했다.

이북 리더 사 주면 당장 책을 절반으로 줄이겠다!
사실 그냥 해본 말이었다. 그걸 나에게 사줄 리도 없고 (그래서이기도 하지만) 그녀에게 그걸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데 되돌아온 답은...

얼만데?

응.. 그냥 흑백으로 이북만 볼 수 있는 건 한 30만원이면 돼.

당장 사줄테니 책이나 줄이셔!
내가 기대한 최대치의 대답은, 내가 그 물건을 사도 괜찮다는 윤허 정도였다. 평소 행동으로 봐서 전혀 믿어지지 않는 대답이었지만, 속는 셈치고 열심히 책을 솎아냈다.


예전 석사논문 쓸 때 어렵게 구한 자료들도 대표적인 것 몇 개만 남겨두고 쑥쑥 골라냈다. 대학원 들어온 후 첫 아르바이트 월급으로 샀던 당시 시가 30만원 정도의 <한어대사전>은 지난 번 이사 때 버렸다. 씨디롬 나온지 한참 되었고, 요즘은 Lingoes에서 전문을 검색할 수 있다.(위에 달제 뜻풀이도 lingoes 한어대사전 뜻풀이를 '편집'한 거다.) 노신전집은 대학원 후배에게 보내줬다. 그것도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노신전집 이야기가 나와서 줄 수 있었다. 지난번 이사 때 아끼고 주저했던 책들, 석박사 논문들, 학회 발표문들, 기타 정리되지 않은 복사물 등을 죄다 내다놓았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랄까, 이상하고 신기했던 건 아무도 책을 골라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소설이나 산문집 중에 꽤 읽을 만한 것도 있었고 교재들도 좀 있고, 아무튼 가져갈 만한 책이다 싶은 것, 예전에는 한두 권씩 집어가곤 했던 부류의 책을 이번에는 아무도 집어가지 않았다. 대신 날이 어두워지자 순식간에 통째로 사라졌다. 그 다음날 비슷한 양을 다시 내다 놓았는데, 이번에는 미리 대기한 듯 잠깐 사이에 종이 한장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폐지 값이 비싸져서 그렇게 한두 번 내놓은 양이 6-7만원 어치는 넘어갔나 보다. 이사짐 아저씨가 그럴 거면 자기들 주지 그랬냐면서 들려준 이야기였다.

아무튼, 열심히 책을 줄이고 마님께 다시 당부를 받으려고 물어봤다. "당장"이 언제야? 이사 끝나면 당장 사는 거지? 돌아온 대답은 구질구질하게 밝히지 않아도 모두들 짐작할 수 있을 듯. 처음부터 믿기지 않는 말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 책은 사라졌고 이북 리더도 사라졌다. 덧없는 인생이다.


4. 한국어 전자책 컨텐츠는 아직 그다지 많지 않다. 나는 독서용 책과 참고용 책을 조금 분리하는 편인데, 독서용 책은 여전히 인쇄된 서적이 좋다고 생각한다. 한꺼번에 다 읽지 않더라도 "물건"을 들고 한장 한장 넘겨가며 재미난 구절에 줄도 그어가며 종이의 감촉을 느끼며 아껴읽는 것이 좋고 편하다. 그런데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온갖 잡다한 지식들을 확인하기 위해 그때그때 뒤적여봐야 하는 책은 이북이 좋을 것 같다. 한 구절을 위해 책 한 권의 부피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낭비니까. 책상 여기저기에 이 책 저 책 펼쳐놓는 것보다 컴퓨터 화면에 창을 여러 개 띄워놓고 뒤적거리는 게 시간도 절약되고 공간에 구애받지도 않고 검색에도 편하다. 이른바 e-달제 스타일? ^^;; 적어도 도구가 되는 공구서는 이북이 훨씬 편했다.(사전을 그냥 치운 것이 아니다.)


다행히 나에게 도구가 되는 참고용 책들은 중국어 원전이 많고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근대 이전의 책들이 많다.


영어권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중국은 신간의 이북 종류가 우리나라보다 다양한 것 같다. 솔직히 왠만한 건 다 있다고 보면 된다.  2000년 이전 출간도서의 경우, 아직 규제가 심하지 않아서인지 자체제작한 도서 pdf 파일이 많이 돌아다닌다. 불법dvd와 마찬가지로 이런 해적판 pdf서적들도 앞으로 외부의 압력이 적지 않을 것이고, 결국 많은 규제를 받을 것이다. 근대 이전 자료들은 원작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파일이 웹에 공짜로 돌아다니면 영인한 출판사 쪽에는 손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저작권을 엄밀히 적용하면 문제가 될 사이트가 수두룩하겠지만, 자료 하나 복사하러 북경으로 홍콩으로 다닐 필요 없이 내가 필요한 문서를 열람할 수 있다는 점은 고맙게 생각한다. 한때 영화하는 사람들이 중국에 오면 눈이 뒤집어져 몇 십만원 어치의 디비디를 사 들고 간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국내에서 정상적인 경로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엄청난 "자료"가 눈앞에 있는데,..


어찌 되었건 내가 책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셈이다. 한국의 이북은 앞으로 몇 년 두고 봐야겠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중국어/한문 원전의 참고용 공구서의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디지털로 가공되어 있다는 점. 어차피 달제형 인간들은 이북 베이스로 옮겨갈 수 밖에 없을 거라는 것. 고정된 장소에서만 작업한다면 듀얼모니터로 가는 것이 좋겠지만,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다양한 문서포맷을 지원하는 아이리버 스토리.
그러나 그래도 역시 아이패드.

한번 충전하면 무진장 오래 쓸 수 있고 눈에도 편하고 가격도 적당한 아이리버 스토리가 좋을 듯하지만,
그래도 역시 아이패드.

하지만!
내가 선택한 건 Kindle DXG


  1. 宋吳炯《五總志》:“唐李商隱為文,多檢閱書史,鱗次堆集左右,時謂為獺祭魚。” [본문으로]
Posted by lunarog
저는 손님들이 오면 이곳에 잠깐 올라갔다 오곤 합니다. 상해에서 야경을 보기에 여기보다 편한 곳은 없으니까요. 푸동의 전망대도 멋지긴 하지만 비싸고 항상 사람들이 많죠. 잠깐 다니러 오신 분들이 "아~ 여기가 상해구나!"라는 느낌을 받고 싶다면 이곳에서 강바람 쐬면서 맥주 한잔 하는 게 제일 적당하죠. 이미 많은 분들에게 알려져 있어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른쪽에  강변과 도로 사이에 삐쭉 튀어나와 있는 기상대 안쪽이 연안동로입니다. 이곳을 기점으로 왼쪽 끝(소주하)에 있는 영국대사관까지 번지가 매겨집니다. 그래서 뉴하이츠가 있는 건물이 "와이탄3호"라고 불리는 거죠. 연안동로는 예전에 "양징방"이란 이름의 운하였고, 중국과 영국 조계의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조계가 생기기 전까지 중국과 서양상인의 교역이 가장 활발해서 "양징방 영어"(피진 잉글리쉬)라는 용어가 생겨난 곳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 고가도로가 있었는데 이제 철거했네요. 교통 유입량도 좀 줄이고 조계 경관도 살리고..

엑스포를 대비하며 와이탄 확장공사를 했는데요, 공사기간 동안은 먼지도 많고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적절한 방향으로 된 것 같아요. 예전 12차선 도로를 4차선만 남기고 모두 지하로 옮겨 버렸죠. 덕분에 지상 공간이 많이 넓어졌네요. 와이탄이 넓어지고 앉아서 쉬엄쉬엄 노닥거릴 공간도 많아졌어요. 언제나 사람이 많지만 남경로 쪽만 피하면 산책할 만합니다.

이곳이 전망이 좋은 이유는 활처럼 휘어 있는 황포강/와이탄의 오른쪽 끝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 건너 푸동이 한눈에 들어오고, 또 왼쪽편에 있는 와이탄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요.

광동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와이탄5호도 전망이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5호에 있는 M on  the bund는 밤에 가면 식사를 해야 입장이 가능한 것 같더군요. 가볍게 술 한잔 하겠다고 하면 위층에 있는 글래머 바로 올려보냅니다. 낮에는 테라스 쪽으로 가서 커피 한잔 먹겠다고 해도 들여보내 줍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밤에는 와이탄 3호의 뉴 하이츠에서 맥주 한잔, 오후에는 와이탄5호의 엠 온더 번드에서 커피 한잔을 추천합니다. 물론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식사를 하셔도 좋을 듯하네요. 뉴하이츠에도 왼쪽 테라스는 식사손님용인 것 같더군요.


에어컨 빵빵한 실내보다 조금 습하긴 해도 테라스 쪽이 더 시원해요. 장대비가 아니면 비가 조금 뿌릴 때도 나와서 먹는 게 더 좋더군요. 어차피 상해에서 축축한 여름밤의 공기를 피할 곳은 없으니까요..

http://www.threeonthebund.com/#

*엑스포 기간이라서 그런지 요즘 11시 30분까지 조명이 켜져 있더군요. 보통은 11시까지.
11시 30분이 되면 와이탄 쪽 건물들이 하나씩 불이 꺼지고, 건너편 푸동의 고층건물들도 조명을 꺼버립니다. 상해도 "불야성"은 아닌가 보네요..
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10. 7. 10. 08:41

오랫만에 시골에 갔더니 텃밭처럼 꾸민 화단에 꽃이 피어 있네요. 낡고 볼품 없는 시골집이지만 마당이 넓어서 좋아요.

 

 

 

 

오토바이를 타고 강쪽으로 나갔더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네요.

 



낙동강 달성보 일부 공사중단 - 한겨레, 2010.06.27.

임금체불, 4대강 낙단보 공사 중단  - 미디어오늘

제가 사진을 찍을 때는 강 건너편 포크레인은 움직이고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 이야기로는 덤프 트럭 기사 등에게 임금을 제때 주지 않아서 파업 중이라고 하더군요.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아서 살 만하다고...


뒤돌아서 동네 쪽으로 봐도 가관입니다. 동네와 둑 사이에 있던 논도 강바닥에서 긁어낸 준설토로 뒤덮혔네요. 사람 키보다 높게 쌓여 있어요.

오토바이 기름이 얼마 없는 걸 확인도 안 하고 타고 나와서 중간에 멈춰버렸어요. 엥꼬가 난 거죠.

동네 안쪽 토지에 쌓인 준설토를 보려면 사진 오른쪽의 산길에서 내려오면서 사진을 찍었어야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데요, 굉장히 기가 막히게 훌륭한 시각적 충격을 선사합니다. 아쉽게도 멈춰버린 오토바이 때문에 구석구석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어요.


 

 

 


엥꼬 난 오토바이를 끌고서 터덜터덜 동네 안쪽으로 들어옵니다. 이쪽 토지도 저기 보이는 비닐하우스를 경계로 모두 준설토로 뒤덮힐 예정이랍니다.

원래 강보다 동네 쪽이 더 낮았는데 고맙게도 높혀준다는 말이죠. 불행히도 우리 하우스는 그런 혜택에서 빗겨났습니다.



아무튼 이로써 이 동네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아래 윗 논으로 나뉘어진 비닐하우스를 포함해 동네 안쪽까지 준설토 적치장으로 포함시키려고 도장 받으러 다닌다길래 절대로 찍어주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경계에 포함된 땅들이 벌써 먹혀든 후였죠. 동네 사람들 생각은 대충 이랬던 것 같습니다.


1. 도장 안 찍어줘도 소용없다. 결국은 자기들 하고싶은 대로 할 것이다.

2. 농사 지어봐야 한해 소득이 얼마 되지도 않는데 보상금 받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정부나 힘센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한번도 이들의 의견을 묻지 않았으니 의견이란 게 있을 수도 없죠. 대부분 쉽게 동의를 해 줬고 어머님도 내심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찰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에요. 예정날짜보다 빨리 준설토를 때려 붓는 바람에 감자를 심자마자 포기해야 됐던 친구어머님은 굉장히 억울해 하셨죠.

원래 날짜대로라면 감자 정도는 캐먹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심은 공이 무색하게 모래로 뒤덮어 버렸으니 말이죠.

 

사진은 우에 논의 비닐하우스입니다. 그 속에는 오이가 크고 있죠.

아래 논 비닐하우스와의 사이에 있는 소작을 붙혀먹는 땅에는 마늘이 심어져 있습니다. 어머님 생신에 다 같이 내려가 마늘을 뽑고 왔습니다.

비가 왔으니 지금쯤이면 모내기도 끝났겠군요.


이리저리 강바닥을 헤집어 놓은 터라 가장 걱정되는 건 홍수 피해가 될 것 같아요.

강바닥 긁어낸 4대강 준설토, 본격 장마에 위험 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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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카테고리 없음 2010. 5. 25. 08:01

두 가지 식물성 기호품이 양대 제국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영국은 중국의 차를 수입하면서 풍요로운 오후와 건강한 제국의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아편은 무기력한 향락의 밤을 중국에 선사하였고 중국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영국의 차를 바다에 던진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의 독립을 가져왔지만, 영국의 아편을 바다에 던진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해 반식민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중국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상해라는 '자그마한' 도시가 있다.


두 장의 지도


남북이 뒤집혀 그려진 이 지도는 왼쪽 하단에 위치한 상해 현성(縣城)을 중심으로 각 현의 관할영역과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육지는 실제 크기에 비해 축소되어 있으며, 그물처럼 이어진 운하는 실제보다 훨씬 큰 것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 왼쪽으로 흘러내려오는 황포강(黃浦江)이 우리 한강 정도의 넓이라면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운하는 대부분의 경우 실개천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단순한 지형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지도에서 주요도로가 맡고 있는 역할을 이 당시 수로가 맡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평야를 이렇게 잘게 분할해야 할 만큼 땅에 대한 이용도가 낮고 육로를 통한 교역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반면 운하를 중심으로 한 수로는 강남지역 교통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림 1> 19세기 초 상해 현성을 중심으로 운하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의 교통에 물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왼쪽(동쪽)은 황포강이고, 현성의 하단(북쪽)에 비교적 큰 운하가 소주하(蘇州河; 지도에는 옛 지명인 오송강(吳淞江)으로 표기되어 있다)이다. 북경에 있는 황제의 시선으로 그려졌기에 남북이 전치되어 있다.

개항 이전의 상해는 '그저 작은 어촌'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개펄과 진흙으로 뒤덮인 작은 어촌이 개항과 함께 서구적 근대도시로 탈바꿈한 것으로 말이다. 영국의 조계지가 건설된 것이 상해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편전쟁의 결과 영국이 5개 항구의 개방을 요구했을 때 상해가 선택된 것은 '그저 작은 어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네 도시가 한 성의 성도(광주廣州)이거나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원래부터 대내외 무역의 거점으로 인정받던 곳(하문厦門, 복주福州, 영파寧波)인 반면, 황해에서 장강을 따라 들어와 그 지류인 황포강으로 진입하고도 18km를 더 가야 하는 상해는 얼핏 보기에 대외무역을 위한 지리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상해는 이미 청대 초기에 해운과 하운, 남과 북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상당히 발달한 상업 항구로 성장해 있었다. 운하와 장강을 통해 내륙의 물산을 밖으로 실어 나르거나 외부의 화물을 내륙 깊숙이 보급시키는 연결고리 역할을 맡고 있었고, 아울러 심해를 항해하는 데 적합한 광주와 복건 등 남해를 운항하는 배들과 수심이 얕은 황해를 항해하는 바닥이 얕은 사선(沙船)이 서로 화물을 교환하는 곳이 상해이기도 했다. 또한 개펄의 증가로 인한 실제 운행구간의 축소, 고가의 운송료 등 운하를 통한 강남내륙의 세금수송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어 해상을 통한 새로운 항로가 검토될 때 시야에 들어온 것 또한 상해였다. 그 중요성은 일찍이 1756년 동인도 회사의 피구(Pigou) 씨가 "무역에 안성맞춤인 도시"로 묘사한 바 있고(이사벨라 비숍,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 52쪽),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애머스트 호가 중국해안을 정찰한 후 상해에 대해 "이렇게 거대한 상업항구가 줄곧 홀시되어 왔다는 점은 실로 이상하기 그지없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동인도회사 직원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가 중국사정에 밝은 선교사 구츨라프(Charles Gutzlaff) 등을 대동하여 6개월간 실시한 이 정찰에서는 군사적 정보수집과 함께 중국의 주요 무역거점들이 상세히 검토되었다.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연해를 따라 조선, 오키나와를 거쳐 다시 마카오로 돌아간 이 정찰의 항로를 살펴보면 훗날 남경조약에서 영국이 왜 장강 이남의 다섯 항구를 개항지로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중 구츨라프가 남긴 상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상해의 지리적 중요성은 광주에 뒤지지 않는다. 이곳은 상업이 무척이나 활발하다. 만약 유럽 상인들에게 상해에서의 무역을 허락한다면 이곳의 지위는 매우 격상할 것이다. 상해에서 소비되는 외국상품은 엄청나게 많다. 이렇게 거대한 상업항구가 줄곧 홀시되어 왔다는 점은 실로 이상하기 그지없다. 중국법률에서 금하고 있어 이곳에서 무역하려는 시도는 저지되었다. 이런 것들이 어려운 점이긴 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1832,1833,Part.Ⅱ,1834.(http://military.china.com/zh_cn/history2/06/11027560/20050401/12212129_2.html)에서 재인용; <“阿美士德號” 1832年上海之行記事>, 《上海硏究論叢》 제2집(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1989년), 269-287쪽 참고.


전자는 그저 여행기에 그친 반면 후자는 훗날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남경조약(1843년)으로 개항된 다섯 항구 중 상해가 선택된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



<그림 2> 상해 현성 내부의 운하까지 상세히 묘사된 반면, 영국 조계지와 와이탄에 해당하는 지역은 터무니없이 작게 그려져 있다.

다시 지도로 돌아가서 상해 현성을 살펴보면 둥글게 생긴 성곽과 그를 둘러싼 해자/운하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 내부로 관공서와 문묘(文廟), 성황묘(城隍廟) 등 주요 지점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을 연결하는 것은 역시나 운하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방위의 성문 중 3곳은 수문을 포함하고 있어 현성의 출입에도 운하는 상당히 유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동쪽(그림 왼쪽)의 강변을 따라 형성된 부두는 상해를 지탱하는 무역의 거점이며, 그 사이에 세관(江海關)이 자리잡고 있다. 명대에 성곽이 세워진 것(1553년)도 왜구와 해적으로부터 이곳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성의 동쪽으로 부두에까지 이르는 길들은 각종 잡화들이 권역별, 도로별로 판매되고 있었다(두시가豆市街, 화시가花市街, 채의강彩 衣巷 같은 거리이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개항 이전에는 가장 번성했을 상해 현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육상교통로의 부재이다. 운하 곳곳에 상세히 묘사된 교량의 존재로 알 수 있듯이 도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남 지역의 다른 물고을(水鄕)들과 마찬가지로 육상교통이 상해를 살아가는 데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현성의 북쪽(그림 하단/붉은색으로 표시)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터이다. 이곳은 농경지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풍수가 훌륭하다 하여 곳곳에 묘지만 가득하던 곳이다. 그래서 서양 "귀신"(洋鬼子)들이 들어와 이곳을 차지할 때 끼리끼리 논다고 비아냥대던 곳, 바로 훗날의 영국 조계지이다. 현성과 거의 비슷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게 그려진 이곳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그 변화가 상해 전체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아래와 같이!



<그림 3> 1855년에 제작된 영국 조계지와 와이탄을 모습을 담은 평면도. 앞에서 제시한 상해현성의 지도와 비교해 볼 때 원래의 유선형 공간을 구획하는 바둑판 모양의 직선도로가 인상적이다. 물길이 아닌 육상도로가 부각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변화는 개항 후 10여 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인구 또한 1844년 50명의 외국인 거주자가 1855년 20,243명으로 늘었다.


1855년에 제작된 이 지도(그림3)는 개항 후 고작 10여 년 만에 그 보잘것없던 '작은' 개펄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갈 것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불구불 그물처럼 이어진 운하를 대신하는 것은 정방형으로 곧게 뻗은 직선도로이다. 비록 수로에 의해 조계지 전체의 권역은 구부러져 있을망정 그 내부는 바둑판처럼 잘 정돈시켜 구획하고 있다. 제작자와 사용자에게 기여하는 중요도에 따라 탄력적으로 크기를 달리하던 지형은 이제 정확한 방향표시와 함께 실측에 의한 실제크기와 모양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이 두 지도의 대비를 통해 자연적으로 생성된 물길에 몸을 맡기는 중국 문화와 객관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개척하는 서구 문화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 사태를 단순화시키는 발상일까? 지도에서 두 문화의 세계관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치다면 아래 인용문은 어떠한가?

 

굽은 길은 당나귀의 길이며, 곧은 길은 사람의 길이다.

굽은 길은 흐뭇한 기쁨, 안일함, 느슨함, 느긋함, 동물성의 결과다.

곧은 길은 반작용, 작용, 활동이며 자제력의 결과다. 그 길은 건강하고 고귀하다.

도시는 삶과 집약된 노동의 중심이다.

느슨하고 느긋한 민족과 사회, 무기력한 도시는,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과 사회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지고, 정복되며, 흡수된다.

그렇게 해서 도시는 죽고 주도권은 이양된다. (르 코르뷔지에, <도시계획>, 24-5쪽.)


"당나귀의 길, 사람의 길"의 은유는 즉각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운하를 통한 뱃길은 느슨하고 안일한 "당나귀의 길"이며,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에 의해 상해가 순식간에 정복되고 흡수되다시피 한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당나귀와 사람의 대비는 실제로는 자연과 기계의 대비로 볼 수 있다. 인간이성의 순수형식의 구현인 기계를 위한 길은 출발지점과 목적지를 최단시간에 연결하는 직선으로 대표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사이공간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똑바로 걷는다. 그는 가는 곳을 알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한 다음, 그곳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당나귀는 갈짓자를 그리며 걸어가고, 조금 빈둥거리며, 믿음이 가지 않는 멍한 두뇌로 큰 장애물들을 비켜가고, 비탈길을 피해, 그늘을 찾기 위해 갈짓자를 그리며 간다."(르 코르뷔지에, <도시계획>, 19쪽.)

아무튼 상해는 토지에 대한 이용보다는 수운을 중심으로 한 연결고리의 역할에 충실했던 시기에서, 땅이 부동산이 되고 잘 구획된 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선진적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운하를 메워 도로를 만드는 시기로 변화해간다.(양징방을 메워 만든 연안서로(옌안시루) 등) 여전히 강과 바다를 통한 교역은 상해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건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해라는 땅덩어리 자체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의 하나로 자임했을 영국에 의해 만들어진 조계와 그 도로가 어떤 방식으로 상해라는 공간 전체를 변화시킬지 위의 지도는 예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과 마차가 달리는 길인 "마로(馬路)"가 도로의 일반명사가 되고, 그 마로는 경마장으로 곧장 통하고 있으며, 그 사이공간은 보행자가 아닌 마차가 우선시된다. 와이탄을 넘어 한 블록만 들어가도 "영국" 조계지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중국인 혹은 중국과 관계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곳은 그 땅에서 일상생활을 펼치는 중국인들이 아닌 서구인의 것이었으며 서구인의 이익에 부합되는 활동만이 허용된 곳이었다.

 

* 이 글은 <중국 근대의 풍경>(그린비, 2008), "제3장 상해, 근대 중국을 향한 길"의 도입부를 재편집한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지도와 옛날 이미지 자료를 이용하여 상해의 옛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Posted by lunarog
카테고리 없음 2010. 5. 23. 07:56

오랫만에 시내 쪽에 나가보니, 상해가 아주 깨끗해졌다. 항상 공사 때문에 먼지나고 비좁던 곳이 완전히 바뀌어져 이른바 "걷고 싶은 거리"가 되어 있다. (실제로 한참을 걸었다. 평소였으면 택시 탈 거리를 걸어, 1시간 반이 걸렸다.. ㅡㅡ;;) 지하철도 제법 도시 전체를 커버할 정도의 노선이 생겨 앞으로 완전히 개통되면 꽤 편리해질 것 같다. 엑스포의 장점이다. 학교 근처에만 있다 보면 지금 상해에서 엑스포를 하고 있는지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전시할 게 있는 사람과 온갖 지식을 갈구하며 박람하고 싶은 사람들은 엑스포를 재미나게 즐길 듯하다.

집 근처에서도 엑스포를 실감할 수 있는 변화가 있다. 단지를 꾸미는 청소부들, 경비원들이 죄다 완장을 차고 있다. 이른바 규율반장?

같이 사는 동료는 완장에 대해 굉장히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다. 식당을 가든 어디를 가든 완장이 돌아다닌다고. 아무런 권한도 없으면서, 그 "완장" 하나로 그는 자기 맘에 안 드는 아무개를 불신검문할 수 있게 된다. 완장을 차는 순간 그도 권력을 발휘하고 싶어지고 다른 사람들도 그 권력에 굴복한다. 혹자는 자본주의의 첨병인 엑스포를 상해에서 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인 부담 때문이라고 과도한 해석을 하기도 한다. 모든 외국인에게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자본주의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는 걸 보여주고 시포요.. 이런 의도라면 외국인에게보다는 북경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면피를 하고 싶어서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 빨간 완장이 굉장히 눈에 거슬리는데, 우리에게(그리고 중국인에게)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경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걸 명심하라는 의도가 전혀 없지 않겠다. 오늘도 청소부 아저씨는 완장을 차고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계신다. 사진을 찍기가 거시기하다. (오늘 아침엔 왠일로 완장을 안 찼다 싶어 자세히 보니, 다른 아줌마가 빗자루로 쓸고 계신다..)

학교에 가면 완장 뿐 아니라 또다른 희한한 풍경이 펼쳐진다.

파릇파릇한 대학생들이 모두 비슷한 녹색 계통의 체육복을 입고 돌아다닌다. 요새 교련복이 바뀌었나, 아니면 복단대 공식 체육복인가? 자세히(는 못 보고 지나가는 애 슬쩍) 보니, 엑스포 마크가 선명하다. 이른바 엑스포 자원봉사자 유니폼 되시겠다. 자랑스러운 거다, 상해에서 엑스포를 한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겠다, 엑스포에 자원봉사를 한다는 것이. 내가 대학생이었어도 엑스포에 자원봉사를 하며 경력도 좀 쌓고 그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하다. 대전 엑스포를 내가 사는 도시에서 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자원봉사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올 것까진 없지 않겠니? 바쁘다, 자원봉사도 하고 수업도 들어야 하고. 하이바오는 왜 안 돌아다닐까? ^^

Posted by lunarog
카테고리 없음 2010. 5. 22. 01:48

저녁을 먹다가 문득 앞으로의 인연 중에 스님과의 만남이 없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맥락도 없이 그냥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친하게 지내는 스님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설법을 들으려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고민도 털어놓고, 그쪽 고민도 들어주는(스님이라고 왜 고민이 없겠는가!!) 뭐 이런 관계..

그런데, 스님과 동등한 자격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스님들은 왜 속인들에게 하대하고 속인들이 자신을 상좌에 올려주길 바라는 걸까? 얼마 전 불교 공부하는 형이 이제 막 비구니가 된 후배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예전처럼 서스럼없이 대했더니 흠칫 놀라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비구니의 입장에선 아마도 출가 후 속인에게 그런 대접은 처음으로 받아봤을 터. 새로운 관계(즉 받들어 모셔지는/공손하게 대접받는 관계)가 형성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가 뒷통수를 얻어맞은 건데, 잠시 후에는 오히려 그걸 더 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형이야 출가만 안 했다 뿐이지 불교 공부를 계속하고 있고, 스님/불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하니 내부인(혹은 좀 더 솔직히 말해 윗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기도 하다.

와이프와의 인연 등으로 나도 만난다면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인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땟을까? 그 스님이 나에게 비슷한 걸 강요한다면?
나는 불교에 호감이 있고 친숙하게 생각하지만 신도도 아니고 불경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나는 예수보다는 붓다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스님을 존경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지도 않고 내게 필요한 더 많은 지혜, 혹은 가르침을 주지도 않는 스님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까? 그냥 평등하게 이야기하면 안 돼?

밥 먹으면서 할 일도 없고 해서 곰곰 생각해 보다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스님은 우리보다 높은 신분이 아니라 신분 바깥이다. 바깥이기 때문에 하층민도 존대하고 귀족들도 존대하는 것이지만, 시대에 따라서는 바깥이기 때문에 최하층민이 되기도 한다. 우리같은 속인이야 자신이 어느 계급인지 정확히 인지하지는 못해도 나보다 위에 누가 있고 아래에도 누가 있다는 정도는 어렴풋이 느낀다. 그래서 관계맺기에 앞서 교통정리를 하곤 한다. 나이 묻고, 경제수준 가늠해 보고, 교양수준도 좀 떠 보는 등등.. 속세와 인연을 끊고 신분 바깥으로 나갔다면, 그런 관계망을 벗어나서 직접 ''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니가 내 후배였던 선배였던, 할아비였던 아무 상관이 없잖아.

아직은 스님과 만날 일도 없고, 만나서 딱히 할 이야기도 없으니, 미리 고민할 필요는 없겠다.



스님 하면 강원도 어느 산골 절에서 마주친 노스님의 눈빛과 호통이 떠오른다. 떠올리기 싫지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동아리 선배가 총무로 있는 절에 한 열흘 머물 때가 있었다. 대학원 입학 직전이었다. 그 전부터 잘 알거나 친했던 선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선배라고 불렀지 스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낮에는 경운기로 나무를 운반해 주(다가 사고를 내)기도 하고, 저녁에는 같이 운동도 하고, 밤에는 몰래 수정과를 꺼내 먹었다. 깊은 산골에 오래동안 묵혀 둔 깊은 맛의 그 수정과를 잊을 수 없다. 스님과 친해지고 싶은 아주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수정과 먹으려면 보살님과 친해져야 하나?) ^^
어느 저녁에 운동을 좀 심하게 한 날이 있다. 정해진 투로를 같이 연습하고, 권법 몇 개로 몸을 푼 뒤 봉을 휘둘렀다. 대학원 준비 때문에 약간 늘어난 담배를 끊어보겠다고 절에 들어올 때 담배를 가져가지 않았다. 슈퍼도 없고, 사흘째는 미칠 것 같아서 낮에 사역하던 군바리가 피는 담배 좀 뺏어보려는 마음까지 먹었다. 아무리 눈이 뒤집혀도 차마 그짓은 못하겠어서 겨우 참았는데, 어쨌던 몸이 한결 가벼웠다. 겨울이었고, 밤이었고, 강원도 산골짝이었다. 민간인 출입통제 구역이기도 했다.


운동을 끝내고 나니 9시를 넘겨 다른 스님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선배 스님은 샤워시설이 있는 욕실 바로 옆방에 노스님이 주무시고 계시고 늦어서 온수가 별로 없으니 세수만 하고 자라고 했다. 내가 꼴찌로 들어갔는데 땀이 제법 나서 샤워를 하고 싶었다. (한겨울에도 냉수로 샤워하던 때라..) 조용히 물을 끼얹으면 스님도 깨지 않을 거야. 대야에 물을 받고 바가지로 조심조심 샤워를 시작했다. 이제부터 기억은 슬로모션이다. 쪽문이 열리고 그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물론 빨갛게 온몸을 드러내고서 말이다. 하얀 노스님이 엉기적거리며 나오며 신발을 신으려다 한참만에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셨다. 살짝 당황, 헛기침 한번 하시곤 다시 엉기적거리면서 뒤돌아 쪽방문을 열고 들어가셨다.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던 나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려고 물을 끼얹고 있는데, 쪽문이 다시 열리며 (이번엔 얼굴만 내밀고는) 온 산이 떠나라 호통을 치셨다. 가만 누워서 생각하니 화가 나고 당혹스러웠나 보다. 나는 옷도 못 입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야단을 맞았다. 좀 추웠다. 머리에서 비누거품이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칫. 다른 스님들 다 깨겠네. 무슨 스님이 이렇담.
나는 왜 야단을 맞는지 이유를 몰랐다. 젊고 탱탱한 육체에 음심이라도 생기셨나? 혹은 부러웠나?
내 잘못은 자기가 용변 보려는 자리에 내가 발가벗고 있었던 것 밖에 없잖아?

애초에 내 샤워가 숙면을 방해한 것도 아닐테다. 그랬다면 그렇게 한참만에 나를 발견했을 리도 없다. 방에 들어가서 가만 생각해 보니, 정말 참을 수없을 만큼 오줌이 마려웠던 걸까?

노발대발 호통을 쳤다는 것만 기억나고 무슨 말로 욕을 했는지는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도 당혹스러웠던지라..

책에 보면 스님이 호통을 치면 머리가 탁 깨지면서 깨달음이 찾아온다.
현실에서 스님이 내지르는 호통에는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다..

수양의 흔적보다는 그저 자기감정 주체 못해 달아오른 늙은이였을 뿐.

좀 더 쿨하게 하면 어때서. 이를테면;
그냥 못 본 척 변기에 걸터앉아 볼일 보면서, "안 춥냐?" 한 마디 날려주덩가.

떠날 때까지 스님도 별로 없는 그 절에서 다시는 그 노스님과 마주치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사리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테지만.. 그 절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