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카테고리 없음 2015. 8. 18. 02:03
공순이: 변화하는 중국의 도시로 찾아든 시골 소녀들
Factory Girls: From Village to City in a Changing China

테드 영상- Leslie T. Chang: The voices of China's workers(http://on.ted.com/LTChang)
레슬리 장 웹페이지: http://leslietchang.com/book3.html
리뷰(레슬리 장 웹페이지): http://leslietchang.com/book2.html

1부 도시

1. 도시로 나가다


다른 공장에 다니는 소녀를 만나면 당신은 우선 신상털기부터 들어간다. ‘몇 년차야?’ 마치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에 대해 말하듯 서로 캐묻는다. ‘월급은 얼만데?’, ‘기숙사랑 식대 포함되고?’, ‘잔업수당은?’ 그런 다음엔 아마 어느 지방 출신인지 정도는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상대의 이름은 묻지 않는다.
공장에서 진짜 친구를 사귀기란 쉽지 않다. 소녀들은 12명이 한 방에서 잔다. 그리고 그 좁은 기숙사 방 안에서 당신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떤 소녀들은 가짜 신분증으로 공장에 들어와서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일부는 고향 사람들하고만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소문은 공장에서 시골로 순식간에 날아가, 당신이 고향에 가 보면 자기가 얼마를 벌었고, 저금을 얼마 했으며, 남자랑 데이트는 했는지 따위를 온 동네 아줌마, 할마시들이 죄다 꿰고 있을 것이다.
친구를 사귀게 되면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준다. 친구가 일을 그만둬 머물 곳이 없으면 당신의 좁은 침대 한켠을 나눠준다. 걸리면 10위안(1800원 가량)의 벌금을 물어야 하더라도 말이다. 만약 그녀가 굉장히 먼 곳에서 일한다면, 간만에 찾아온 휴일에 새벽같이 일어나 몇 시간이 걸려도 버스를 타고 만나러 간다. 그러면 친구는 당신과 하루를 보내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낼 것이다. 이번엔 벌금이 100위안이다. 당신이 싫어하는 공장에서 계속 일하거나 좋아하는 공장을 그만둘 수도 있는데, 그건 친구의 부탁 때문이다. 친구 간에는 매주 편지를 쓴다. 비록 외지에서 오래 떠돈 소녀들은 그게 유치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런 무리들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낸다.
친구 사이는 종종 틀어진다. 삶이 너무 빨리 바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누군가와 연락이 끊기는 것이다.
한 달 중 최고의 날은 월급날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최악의 날이기도 하다. 고생고생 그렇게 긴 시간을 일한 후 별별 이유로 그 많은 돈을 떼어가는 걸 보면 격분하게 된다. 어느 아침에 몇 분 지각한 거, 아파서 반차 쓴 거, 혹은 근무복을 동복에서 하복으로 바꿀 때 드는 추가비용 따위 말이다. 월급날에는 모두가 우체국에 모여들어 집에 돈을 부친다. 집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녀들은 돈 부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외지에서 오래 묵은 소녀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어떤 소녀들은 자기를 위한 예금통장을 개설했다. 특히 남자친구가 있는 소녀들이 더 그랬다. 어떤 소녀가 가장 저금을 잘 하고, 얼마나 저금했는지 모두가 안다. 물론 누가 가장 헤픈지도 모두가 안다. 립스틱이며 은색 휴대폰, 하트 모양 목걸이, 그 많은 하이힐을 보면 모를 수가 없다.
소녀들은 노상 그만두겠다는 말을 달고 산다. 직공들은 6개월 근속을 요구받는데, 반년을 채워도 항상 퇴직 허가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직공의 첫 두 달 치 월급을 공장이 위탁한다. 즉 허가 없이 그만두면 그 돈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서 같은 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외부인은 알지 못할 공장 생활의 실상이다. 공장에 들어가는 건 쉽지만, 나가는 것은 어렵다.
좋은 일자리를 찾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일자리를 그만두는 것이다. 면접은 업무시간에 이뤄지고, 새로 채용되면 당장 일을 시작해줄 것을 요구받는다. 일을 그만두는 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밥 먹고 잠잘 곳이 필요하다는 압박은 일자리를 빨리 찾을 동기가 된다. 소녀들은 종종 떼로 공장을 그만둔다. 여럿이 함께하면 용기가 생기니까. 그리고 새로운 공장에도 모두 함께 들어가자고 맹세한다. 보통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누군가와 연락이 끊기는 것이다.

오랫동안 뤼칭민(Lu Qingmin; 吕清敏)은 혼자였다. 버스로 한 시간 걸리는 공업도시 선전(深圳)의 공장에서 언니가 일하고 있고, 고향친구들도 중국 연안도시의 여러 공장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민이(친구들이 부르는 호칭)는 그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일하는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누구에게도 자기공장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야말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일한 공장의 이름은 캐린 전자(Carrin Electronics; 佳荣电子制品厂)였다. 이 홍콩 기업은 알람시계, 계산기, 세계 각 도시의 시간이 표시되는 전자 달력을 만들었다. 2003년 3월 민이가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이 공장은 훌륭해 보였다. 건물외장은 타일로 덮여 있었고 시멘트 마당 너머 입구는 철제 아코디언 도어로 굳게 닫혀 있었다. 고용된 뒤에야 그녀는 공장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12명의 직공이 이층침대가 따닥따닥 붙어 있는 화장실 바로 옆방에서 복작대며 잤다. 방은 더러웠고 나쁜 냄새로 가득했다. 구내식당의 음식 또한 열악했다. 급식은 밥에 고기 혹은 야채 반찬 하나, 국이 전부였는데, 국은 맹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조립 라인에서의 하루는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식사 시간으로 허용된 두 차례 휴식을 제하고 하루 13시간 근무였다. 직공들은 몇 주씩이나 연속으로 매일 일하곤 했다. 간혹 토요일 오후 잔업이 없으면 그날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이었다. 월급은 400위안(7만원 가량)인데 잔업수당을 포함하면 2배 가까이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월급이 제때 나오는 달이 별로 없다. 이 공장은 천 단위 인원을 고용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여성으로, 고향에서 갓 나온 10대가 아니면 이미 서른을 넘긴 기혼여성이다. 공장에 없는 연령대를 체크하면 그 공장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20대의 젊은 여성은 공장 세계의 엘리트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조립 라인에 매일 앉아 있는 장면을 상상한 순간 민이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고작 16세였다.
공장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녀는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6개월은 버티기로 맹세했다. 고생을 좀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당시로선 딱히 다른 옵션이 없기도 했다. 합법적인 취업연령은 18세였다. 16, 17세도 짧은 시간 제한된 업종에서 일할 수는 있었다. 일반적으로 노동법을 아무렇게나 위반하는 고용주—민이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시커먼 공장들"—만이 그녀처럼 어린 아이를 채용했다.
일을 시작한 첫 주에 민이는 17세가 되었다. 그녀는 반차를 내고 홀로 거리를 거닐었다. 사탕 몇 개 사서 혼자서 먹으면서. 그녀는 사람들이 뭐하며 노는지 몰랐다. 도시에 오기 전에는 공장이 뭐하는 데인지도 모호한 상태였다. 막연히 활발한 사교모임 같은 게 아닐까 상상했다. "저는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게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훗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 사람이 함께니까 바빠도 수다도 떨면서 재미있게 일한다고 생각했어요. 상당히 자유로울 거라 착각한 거죠. 근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요."
업무 중 잡담은 금지사항이며, 위반시 벌금 5위안이 부과된다. 화장실 사용은 10분으로 제한되며 근무일지에 서명해야 한다. 민이는 품질 관리 라인에서 일했다. 전자제품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이동해 오면 버튼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플라스틱 부품이 잘 결합되었는지, 배터리 접속은 정상인지 체크한다. 그녀는 모범 직공은 아니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재잘댔고 조립라인의 다른 여공들과 노래를 불렀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새장 속의 새처럼 갑갑해 그녀는 틈만 나면 화장실로 달려갔다. 단지 창밖으로 고향 생각나는 푸른 산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둥관(东莞)은 푸른 숲이 무성한 아열대에 위치한 공업도시이다. 어떨 땐 민이 말고는 아무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그녀 때문에 공장에 규정이 하나 추가되었다. 직공은 네 시간에 한 번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으며, 위반시 벌금은 5위안이다.
6개월 민이는 사장을 찾아갔다. 그는 20대의 남성이다. 그녀는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거절했다.
"넌 작업성과가 좋지 않아," 사장은 말했다. "너, 눈이 삐었냐?"
"내 눈이 삐었다 해도," 민이는 받아쳤다. "난 당신같이 더러운 인간 밑에선 일 못해요."
다음날 그녀는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고 그 일로 100위안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 다음날, 그녀는 사장에게 가서 다시 퇴직을 요구했다. 사장의 대답은 의외였다. 설 명절까지만, 그러니까 6개월만 더 있어주면 공장이 지불하지 않은 두 달 치 체불 임금을 주고 그만두게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사장은 그녀가 공장에 남을 수밖에 없게 꾀를 낸 것이다. 둥관 같은 공업 도시는 설이 지나면 직공들이 몰려들고, 그때가 되면 일자리 경쟁이 가장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푸닥거리를 거친 뒤부터 사장은 전보다 부드럽게 그녀를 대했다. 그는 계속 일하는 걸 고려해 보라고 몇 번이나 권했으며, 심지어는 현장 사무원으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비록 승진해봐야 월급이 오르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민이는 복지부동이었다. “당신네 공장은 내 청춘을 모조리 바칠 가치가 없어요.” 그녀가 사장에게 한 말이다. 그녀는 근처 상업학원의 컴퓨터 반에 등록했다. 야근이 없는 날 저녁식사를 건너뛰고 가서 컴퓨터로 키보드 타이핑이나 문서 만드는 법 등을 몇 시간 배웠다. 대부분의 여공들은 자기들이 배운 게 너무 부족해서 수업 몇 개 들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이는 달랐다. “배우면 안 배우는 것보다야 낫죠.” 그녀는 생각이 똑 부러졌다.
그녀는 집에 전화해서 일을 그만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골에서 땅 몇 떼기 부쳐 먹으며 아직 학교에 다니는 어린 세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그녀의 부모는 반대했다. “너는 항상 이리 튀고 저리 튈 생각만 하는구나.” 아버지는 말씀을 이으셨다. 여자아이는 너무 경박해서는 안 돼. 한 곳에 지긋이 있으면서 돈이나 좀 모아라.
민이는 그게 최상의 조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걱정 마세요. 알아서 잘 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이제 공장에서 두 명의 진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량룽(梁容)과 황자오어(黄娇娥)인데, 둘 다 민이보다 한 살 많다. 그들은 민이가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 밤에는 옷을 대신 빨아줬다. 빨래는 끝이 안 나는 일이다. 직공들에게 갈아입을 옷이 몇 벌 없기 때문이다. 근무가 끝난 푹푹 찌는 컴컴한 밤에 여공들은 줄지어 기숙사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나르느라 분주했다.
친구를 사귀고 나면 공장 생활이 즐거워진다. 어쩌다 야근이 없는 저녁에 세 아가씨는 저녁도 거르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그런 다음 공장으로 돌아와 심야 영화를 봤다. 겨울이 되자 난방이 되지 않는 기숙사의 추위 때문에 직공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민이는 친구들을 마당으로 끌고 가 배드민턴을 쳤다. 그들은 몸을 충분히 덥힌 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2004년은 설이 1월 말이었다. 연휴가 4일 밖에 되지 않아 직공들이 고향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민이는 기숙사에 처박혀 이틀 동안 집에 네 번 전화했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다시 사장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가게 해 주었다. 이 소식을 전하자 량룽과 황자오어는 울었다. 이 낯선 도시에서 그들은 민이가 떠나는 걸 아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들은 가지 말라고 매달렸다. 다른 공장 상황도 나을 게 없고, 가든 남든 결국엔 똑같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민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면 그들을 보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민이는 옷 몇 벌 넣은 가방과 공장이 지불하지 않은 두 달 치 월급을 챙겨 그날 바로 떠났다. 그녀는 수건과 이불은 챙겨가지 않았다. 돈 들여서 산 물건들이라 해도 다시는 꼴도 보기 싫었던 것이다.
조립라인에서 10달 일하면서 민이는 고향에 3천 위안(55만원 가량)을 부쳤고, 두 명의 진짜 친구를 사귀었다.
그녀가 두려움을 느꼈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머리 속에 가득한 생각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뤼칭민이 태어난 곳은 거의 모두가 같은 성씨인 집성촌이었다. 90호가 거주하는 마을의 넓지 않은 경작지에는 벼, 유채, 면화가 재배되었다. 민이네 가족은 세 마지기를 일궜지만, 수확한 대부분을 먹어 치웠다.
그녀의 미래는 그녀가 아이였을 때 이미 정해져 있었던 듯하다. 그 중심에는 집안에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시골 살림의 철칙 같은 게 끼어 있었다. 민이의 엄마는 어렵사리 아들을 보기 전에 네 딸을 낳았다.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 초기에 대부분의 시골에서는 규제가 느슨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이 다섯은 경제적으로 너무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80년대 개혁개방으로 생활비도 올랐다. 둘째 딸인 민이는 이 짐의 상당부분을 나눠 져야 했다.
그녀는 학교를 싫어했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그녀는 말썽을 일으켜 꾸중들은 기억 밖에 없다. 이웃집 나무에 올라 자두를 훔쳐 먹었는데, 들킨 날엔 얻어맞았다. 한번은 엄마가 집안일을 시켰는데 듣지 않았다. “집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나보고 하라는데?” 엄마는 몽둥이를 들고 수백 미터를 따라와 그녀를 두들겨 팼다.
그녀는 잘 놀았다. 헤엄치는 법도 배우고 트럭 운전도 배웠다. 롤러스케이트 타기를 유난히 좋아했고, 까진 상처를 엄마 몰래 숨겼다. “나는 넘어질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넘어져 봤어요.” 민이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넘어질 걸 생각하면 안 돼요.” 그녀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아이이다. 어느 해 여름, 아버지는 트럭을 빌려와 그녀와 함께 시골을 돌며 직접 키운 수박을 팔았다. 그들은 낮에는 차를 몰고 밤에는 트럭에서 잠을 잤다. 그것은 민이의 정겨운 기억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농민공들은 자신의 출신지를 빈곤하고 낙후한 곳으로 연상하며, 심지어는 마을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꺼려한다. 그러나 민이는 도시에 올라온 뒤 한참 뒤에도 자기 고향이 아름다운 무엇인 양 이야기하곤 했다.
1990년대 말, 민이네 부모 둘 다 아이들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러 나갔다. 아버지는 연안 도시의 신발 공장에서 일했는데 건강이 안 좋아 돌아와야 했다. 나중에 엄마도 일 년간 일하러 나갔다. 민이는 근교의 중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주말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밥이며 빨래를 했다.
마을의 거의 모든 젊은 사람들은 일하러 나갔다. 민이가 아직 중학생일 때 언니인 구이민(桂敏)이 둥관의 공장에 일하러 갔다. 얼마 후 민이는 고교 입학 학력고사에 떨어졌고, 부모는 그녀도 일하러 나가게 하는 걸 고려했다. 구이민은 집에 전화해서 민이가 진학하도록 부모를 설득했다. 구이민의 공장 월급으로 학비를 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모는 그 말에 동의했고, 민이는 2년제 직업고등학교에 등록했다. 이로써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학력이 높은 사람이 되었다. 자기 학업을 희생해서 가족을 도운 구이민보다 높았다.
구이민은 2003년 설 연휴에 귀향하여 다시 돌아갈 때 민이를 데리고 갔다. 학교가 한 학기 남았지만, 민이는 학비를 아끼고 곧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를 원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는 게 설레었다. 여태 기차를 타 본 적도, 공장을 본 적도 없었다. "저는 일찍 나가서 뭔가를 배우고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민이는 말했다.
둥관에서 구이민은 싸구려 여관방을 하나 잡아주고, LCD를 만드는 일본 공장에 일자리를 구해 주었다. 민이는 거기서 한 달을 일한 후 나왔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외로웠다. 그녀는 여관방으로 돌아와 다른 공장의 일자리를 구했지만 출근하지 않았다. 언니는 여관비를 계속 내주겠다고 했지만 민이는 자신이 언니에게 짐이 된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민이는 한 전자공장의 조립라인 품질관리 업무 구인 전단지에 꽂혔다. 민이는 광고(상당수는 농민공의 돈을 노린 가짜 광고이다)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고,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이에게 공장에 오는 법을 알려줬다. 버스를 세 시간이나 타고 둥관의 남동쪽 끝에 도착했다. 그곳이 민이가 혼자서 힘든 1년을 보낸 곳, 캐린 전자였다.
공장에 들어서는 순간 민이는 거기가 바로 직전에 그만둔 일본 공장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돌아가기엔 늦었고, 언니에게 다시 도와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일처리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그쪽이 더 좋았다.

농민공들은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이동을 "出去", 즉 "나가다"라는 간단한 말로 표현한다. '고향에서는 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갔다.' 농민공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도시는 그들에게 편한 삶을 제공하지 않았다.


Posted by lunarog
카테고리 없음 2015. 5. 4. 02:02
汪晖, “一带一路”走出历史终结论阴影

경제 중심이 구미에서 아시아로 전환됨에 따라 대륙과 해양의 관계에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일대일로” 전략은 실크로드 경제권역, 21세기 해상 실크로드, 중-인도 및 중-파키스탄 회랑(中印中巴两走廊), 유라시아 대륙 가교(欧亚大陆桥) 등 많은 범주를 포함하고 있어 대륙간 연결의 중요성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 만약 미일 해상동맹이 냉전 구도의 확장이라면, “일대일로”는 역사 경로에 대한 회귀이다.

자본주의의 길을 반복한다면, “일대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일대일로”에 필요한 건 평등과 함께 다양성

“일대일로”는 탄탄대로의 프로젝트가 아닐 것이다. 단지 경제학자들이 거론하는 자금, 자원, 시장, 노동력 측면에서 뿐 아니라 정치, 문화 및 기타 제반 분야에서 기인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세계경제 중심의 아시아로의 이동은 장차 일련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언어 등의 측면에서 문제를 가져올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핵심은 경제가 정치, 문화, 풍속, 종교 등과 유리된 것에 있고, 경제의 사회관계에 대한 파괴에 있다. 따라서 “일대일로”는 자본주의 경제모델을 개혁하는 장기적인 과정일 것이며, 또한 필연적으로 역사문명과 미래의 사회주의가 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겪을 것이다.

역사문명을 거론하는 것은 이 새로운 프로젝트의 결정적인 네 개념, 즉 길, 띠, 회랑, 다리가 아시아의 트랜스 사회 시스템 혹은 역사문명의 연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대 실크로드가 물질적 교류 통로였을 뿐 아니라 정신적 교류의 연결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대일로”는 광활한 육지와 해양을 뛰어 넘어 다른 민족, 종교, 언어, 풍속과 전통을 연결할 것이다. 만약 문화간의 교류가 없다면 이 거대한 청사진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불가피하게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닐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임의의 자본주의적 경제논리가 이 광활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주재하는 국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필연적으로 기존의 각종 발전주의 모델, 특히 신자유주의적 발전주의 모델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며, 문화다양성 및 생태다양성의 파괴로 인하여 실패와 보복을 맞이할 것이다.

“일대일로”는 단일국가 프로젝트가 아니다. 영토 및 그 확장을 목표로 한 제국 재건 프로젝트도 아니다. 그것은 “상호연결과 상호소통”을 중심개념으로 하고, 여러 겹의 복합적인 참여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동태적인 과정이다. 이 미증유의 세계적 실험 상황에서는 깊이와 장기적 안목을 결여한 어떠한 경제 계획, 금융 확장 및 군사적 모험도 정반대의 결과만 불러올 것이다. 현재 “일대일로”를 언급하는 대다수는 두 가지 핵심 문제만 거론한다. 즉, 국내의 잉여 생산력과 금융 확장이 그것이다. 이 두 문제는 모두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문제이다. 만약 자본주의의 옛 길을 되풀이한다면 “일대일로”는 성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크나큰 위험과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다. 중국 대륙의 연안 경제의 발전과 유라시아 대륙의 관계의 변화는 전지구적인 역사적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대륙과 해양의 관계도 역전까지는 아닐지라도 크게 변화할 것이다.

“길, 띠, 회랑, 다리”와 주변의 비주변화, 중심의 비중심화


역사상 모든 창조적인 연결은 지역 관계의 변화를 불러왔다. 예를 들어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은 송대에 이르러 운하를 중심으로 한 경제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한 일본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운하의 건설은 세계 역사적 대사건이다. 그것은 아시아 내륙무역과 연해무역을 연결하여 중국역사상 황하 중심시대를 이은 운하 중심시대를 형성시켰다. 사실 운하가 연결한 것은 상품과 무역에 그치지 않는다. 중동, 동남아 및 남아시아의 문명, 종교, 문화가 중국 내지로 깊숙이 들어와 중국문화의 복사력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미국의 중국학자 래티모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장성의 역할은 단지 군사적 방어시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그것은 농경문명과 유목문명을 연결하는 회랑이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여 그는 장성을 중심으로 한 내륙 아시아 담론을 제기하였다. 그 글에서 장성은 두 문명의 “상호 변경(邊境)”임과 동시에 중국과 아시아 역사의 “중심지대”로 다루어졌다. 운하, 장성 및 우리가 지금 논의 중인 “길, 띠, 회랑, 다리”는 “상호연결과 상호소통”의 개념을 통해 지나치게 안정적인 중심-주변의 관계를 초월할 길을 찾을 이론적 잠재력을 담고 있다.

이러한 예가 말해주는 것은 역사적 현실에 중심과 주변의 물질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관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이자 상호전환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길, 띠, 회랑, 다리”의 개념이 추동하는 것은 새롭게 역사를 바라보고, 현실을 바라보며, 지역관계와 문화적 관계를 바라볼 새로운 방법과 시야, 즉 주변의 비주변화, 중심의 비중심화, 기원의 비기원화이다. “상호연결과 상호소통”을 중심으로 우리는 서로가 중심이자 서로가 주변인 새로운 시각을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새롭게 세계를 이해하고 각종 중심주의적 사상적 방법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현실적인 풍경이 아니라 이상적인 청사진이며, 일종의 새로운 역사관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른바 서로가 중심이자 서로가 주변인, 기원의 비기원화라는 말은 자기중심적인 위계적 역사관을 초월하는 것이지, 그 옛날 식민주의자와 제국주의자들처럼 자기를 중심으로 한 채 나머지 지역을 그 중심에 종속된 주변 혹은 반주변(亚边缘)으로 줄세운 위계적 시스템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길, 띠, 회랑, 다리”는 “상호연결과 상호소통”을 핵심으로 하며, 다른 지역들로 하여금 서로 의존하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인정하게 함과 동시에 서로가 중심인 체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봤을 때, 다른 지역을 자국 상품의 땡처리(倾销) 장소 혹은 자원 생산지 정도로 낮춰 보는 것은 다민족 문화 사이의 상호 주체적 지위를 존중할 줄 모르는 태도이다. 그것은 “길, 띠, 회랑, 다리” 개념에 부가된 가치와 의미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대일로”는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이다.


지금은 전지구적인 정치 위기의 시대이다. 오늘날의 현실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주변지역 뿐 아니라 중심지역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국 정치의 새로운 형태를 탐색하는 것은 개별적이거나 국부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 전체 국면에 대한 의의가 있다.

이제 새로운 방향에 대해 설명해야겠다. 쉽진 않지만 몇 가지 점은 분명하다. 첫째, 이는 전지구화의 과정에서 출로를 검토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유리된 채 새로운 길을 이야기할 수 없다. 둘째, 동아시아 지역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함에 불기피하게 전지구적 노동 분업과 전지구적 관계에서의 발전과 변동, 특히 정치, 군사 중심과 경제, 금융 중심의 분리 추세 및 그 결과를 논의해야 한다. 셋째, 그것은 냉전 구도를 초월하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미래의 길이며, 근대 이래 형성된 패권 시스템을 깨뜨리고 그 새로운 형식을 해방하는 길이며, 오랜 역사 문명 및 그것의 근대적 발자취를 배경으로, 당대의 각종 선진적 경험을 종합하는 창조성을 계승하는 길이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 그것은 불가피하게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이다.

“불가피”하다고 말한 것은 이상적이면서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각도에서 보자. 현실의 자본주의 경제는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수시로 강력한 경제력을 대동하여 각종 사회관계와 문화 전통을 훼손하고 파괴할 수 있다. 교육, 의료, 주거 및 혼인, 가정, 사랑에 이르기까지 시장경제의 힘에 침투당하거나 영향받지 않는 것이 없다. 국내이건 국제관계에서건 불평등한 노사관계, 도농관계, 지역관계는 종종 경제발전의 정상 상태이거나 “동력”이기까지 하다. 만약 역량 있는, 사회주의 색채를 지닌 운동이 경제생활을 사회 네트워크 내부로 다시 귀속시키지 못하고 임의의 시장 관계가 모든 사회 관계를 주재한다면 “일대일로”는 과거의 자본주의의 낡은 경로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며, “주변 지역”을 지배, 통제, 파괴하는 새로운 과정이 될 것이다. “일대일로”는 자연적인 과정일 수가 없으며 상이한 힘들이 각축하는 과정이다. 결론적으로, “역사종결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억압되어 있는 미래적인 요소를 펼쳐낼 수 있는지의 여부는 우리의 실천에, 우리가 실천해 가는 동력과 방향에 달려 있다.

(2015.05.04. 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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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5. 5. 4. 01:58

왕후이와의 대화 : “일대일로”는 어떻게 “세계역사 경로의 새로운 수정”이 되는가

作者:林岛

보아오(博鳌) 아시아 포럼의 개막을 맞아, 중국이 제기한 “일대일로” 프로젝트가 다시금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개혁개방 30여년 동안 방대한 저가 노동력의 우위를 이용하여 중국은 전세계 경제성장을 추동하는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생산능력에 걸맞지 않게 국내적으로는 심각한 빈부격차와 소비 부족 및 그로 인해 초래된 여러 산업분야의 지나친 잉여 생산력으로 시달리고 있다. 생산된 그 많은 상품을 어디에 팔 것이며, 그 많은 잉여자본은 어디에서 출로를 찾을 것인지가 현재 중국 지도부가 해결해야 할 가장 긴박한 문제가 되었다. 그에 발맞춰 대국의 총리인 리커창이 외국 정상과의 만남에서 종종 세일즈맨 역할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잉여 생산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중국경제는 높은 성장추세를 유지하기 어려울 게 분명하고, 국내적으로 취업과 사회 안정 측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중국이 “일대일로” 전략을 제기한 전반적인 배경이다.

“일대일로”와 AIIB는 국내의 심각한 잉여 생산력을 해결하려는 긴박한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 미국 패권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경제 질서를 구축하는 결정적인 한 걸음이기도 하다. 나아가 일부 연구자들은 중국판 마셜 계획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마셜 계획을 통해 대량의 잉여 생산력을 유럽으로 수출하였으며, 그 결과 유럽은 4년 만에 2차 대전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고 미국경제는 바닥에서 탈출하여 10여 년의 번영이 도래했다. 중국이 제기한 일대일로 전략은 의심할 바 없이 구미 국가들이 잉여 생산력을 해결한 경험을 참고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구미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잉여 생산력 문제를 해결한 것은 2차 대전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제도의 탄생 직후 곧바로 경제 위기와 생산 과잉 문제와 맞닥뜨렸으며, 잉여 상품과 자본의 출로를 찾는 과정에서 19세기 식민주의의 파도가 전세계를 휩쓸었다. 상품과 자본의 수출은 필연적으로 무력 확장을 대동했다. 군함과 강력한 대포가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면 경제 수출도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패권의 확장을 수반하고, 경제적 충돌은 필연적으로 정치 및 군사적 충돌을 수반하였다. 새로운 경제 중심이 출현하고 성장할 때마다 기존의 패권 체계에 대한 도전이 뒤따랐으며, 그 와중에 전쟁, 폭력 및 피비린내는 끊이지 않았다. 영국의 산업혁명시대 진입 이래 기나긴 전지구적 충돌과 전쟁은 모두 이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정부는 중국이 “예로부터” 평화를 사랑한 나라임을 공언했다. 그렇다면 “일대일로” 전략과 자본 수출은 “장기 19세기”의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와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중국의 굴기는 대체 전원시 풍의 평화의 찬가인가, 아니면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여정의 시작인가? 이 문제는 우리가 반드시 직시하고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

일부 학자들은 19세기 식민주의와 같아 보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측면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중국도 새로운 시장과 투자공간을 찾아야 하고, 중국의 상품 또한 세계시장에 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국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옛 식민지주의와 제국주의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형식의 국제 협력을 꾀한다.”(郑永年) 그러나 쉽게 드러나는 문제는, 중국이 이처럼 방대한 상품과 자본을 국외로 수출하면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의 자본과 정치세력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 나라에 생겨날 수도 있을 정치적 위험을 어떻게 방비할 것인가? 또 다른 문제는, 중국 모델의 성공과 세계 공장 지위의 확립은 중국의 풍부한 저가 노동력 착취에 기반한 것인데, 그 결과 첨예한 노사분쟁이 중국 사회의 불안정 요소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자본의 대규모 해외 수출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노사 충돌을 국외로 수출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 국내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년 전 잠비아 광부에게 중국인 관리자가 피살된 사건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들 국가의 정부가 중국의 노동자 항쟁의 억제를 도와(?) 중국 자본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하도록 보장할 것인가?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의 굴기와 중국 경제의 세계적 범위로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미국의 세계 패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중국과 미국이 대표하는 패권 체계 사이의 충돌과 모순은 분명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충돌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국내에서 “持剑经商”(검, 즉 무력을 동반한 상업행위)을 부르짖는 민족주의 사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사조는 방대한 자본과 상품 수출 상황에서 해방군이 중국의 해외 이익을 위해 적극적인 보호조치를 취해야 하며, 나아가 미국을 핵심으로 한 세계 패권체계를 깨뜨리고 새롭게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계와 질서를 재건해야 한다는 점에서 제기되었다. 비록 너무 솔직해서 국내 주류에게 수용되기 힘든 측면이 있지만 많은 주류 학자들의 속마음임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정융녠은 “중국 정부가 아직 충분히 공격적(aggressive)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본이 (국외로) 나간 후 더 많은 권익의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국이 멕시코에 투자한 고속철도, 미얀마에서의 여러 투자 등이 모두 문제에 부닥쳤지만, 현재 딱히 해결할 수단이 없다.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해외이익을 보호할 것인지에 대해 중국정부의 조처는 상당히 뒤떨어지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더욱 “aggressive”하게 중국의 해외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만약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중국의 굴기는 영미의 패권 장악 방식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 된다. 단지 새롭게 중국을 중심으로 한 패권체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패권체계를 대체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최종적으로 성공할 것인지의 여부는 중미 양국의 군사력 대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20세기 제국주의의 재난을 다시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왕후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약 단지 국내의 잉여 생산력 해결과 중국 자본의 금융적 확장의 실현에만 주목한다면 자본주의의 옛 방식을 반복할 뿐이다. “일대일로”는 성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거대한 위험과 반발을 촉발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약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이 광활하고 복잡한 네트워크를 주재하는 국면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 프로젝트는 필연적으로 보복당하고 실패할 것이다.

왕후이는 “일대일로”에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부여했다. 그의 판단에 의하면 “일대일로”는 절대 단일국가적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영토 및 그 확장을 목표로 한 제국 재건 프로젝트가 아니라 미일 해상동맹과 같은 냉전 식의 낡은 방식과 경쟁할 수 있는 새로운 노선이자, 냉전 구도를 넘어서고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미래적 방향, 즉 “세계 역사 경로에 대한 새로운 수정”이다. 따라서 그것은 “불가피하게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이다.

왕후이 교수의 “일대일로”에 대한 기대는 다분히 이상적 색채를 지니고 있어 생각처럼 실현되지는 않을 것 같다. 현실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왕후이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핵심은 경제가 정치, 문화, 풍속, 종교 등과 유리된 것에 있고, 경제의 사회관계에 대한 파괴에 있는데 중국은 이러한 진행과정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최근 30여 년 간, 우리는 시장과 자본이 중국 사회에 스며들어 와해시키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의식주에서 교육, 의료, 주거 및 혼인, 사랑, 가족애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시장에서의 이익을 최우선 목표로 한 상품으로 전락하였다. 노동자는 이전의 사회보장 일체를 상실하여 “보이지 않는” 그 잔혹한 손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점에 있어 중국은 결코 미국보다 나을 게 없다.

국제관계는 단지 국내관계의 확장일 뿐이다. “일대일로”가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중국사회 내부에서 “경제의 사회관계에 대한 파괴”를 탈피할 수 있는지, 시장과 자본의 사회에 대한 침투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역전시킬 충분한 힘이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없다면, “일대일로”는 신자유주의 및 근대 이래 전지구적 패권을 극복하는 해방의 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더 많은 저개발 국가에 한층 더 침투시키고, 고유의 사회관계와 사회보호를 더 한층 파괴시켜 새로운 자본주의 패권을 만드는 길이 된다. 이는 “세계 역사 경로에 대한 새로운 수정”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기존 경로의 확장에 불과하다. 미국을 핵으로 한 세계 자본주의 체계가 닿지 못한, 혹은 완전히 주도적이지는 않은 지역으로의 확장 말이다.

다시 말해, “일대일로” 자체가 역사적 진보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 국내 “사회”가 “시장”의 운동에 저항하여 승리를 거둔다는 전제하에서만 “일대일로”는 기존의 역사 경로에 대한 극복이 될 수 있으며, 21세기적 사회주의 특색을 지닌 공동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후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귀결된다. 중국이 “역사종말론”의 범주 바깥에서 시장사회와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여,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공간을 열고 새로운 힘과 가능성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마르크스의 명언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다.

(2015.05.04. 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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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閱讀/閱, 읽기 2012. 11. 25. 12:46

연세대 대학원신문 198호에 실린 글이다. 제목은 그쪽에서 알아서 "중국의 현실을 숯으로 지핀 뜨거운 생명력"으로 뽑아줬다. 원래 부탁받은 내용이 작가에 대한 "간단한 소개"였기에 노벨상 관련 논란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웹으로 보면 폰트가 뒤섞여 있어 보기 힘들다. 참고삼아 아래 옮겨 놓는다.



모옌(莫言) : 작가와 작품세계에 대한 간단한 소개

노벨문학상을 점치는 경매 사이트에서 막판까지 유력한 수상자로 거론되었던 동아시아의 두 후보는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감수성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비해 모옌은 생긴 것부터 옆집 아저씨처럼 푸근해 보인다. 그의 이름을 바깥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영화 <붉은 수수밭>의 장면인양 거나하게 한상 차려 놓고 웃통 벗어젖힌 채 같이 고량주나 비우면 어울릴 것 같은 생김새다. 그런 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안주로 오를 법한 이야기를 글로 옮기면 그의 소설이 된다. 좋게 말하면 정제된 서면어가 담지 못하는 풍부함이 살아 있지만, 다른 한편 그 시공간을 공유하지 못한 외부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감성(번역의 문제와 직결된다), 불알친구들 술자리에 낀 새색시의 불편함, 했던 말 하고 또 하는 너스레, 과장된 허풍, 투박함 등이 혼재되어 있다. 대부분 옛날 어디에서 누가 말이지, 라며 시작되는데, 그 시간적 배경은 주로 문화대혁명을 전후한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이고 공간적 배경은 자신의 고향을 문학적으로 확장한 가오미(高密) 현 둥베이(東北) 향이다.

 ‘높이’ 자란 붉은 수수만 ‘빽빽한’ 고향

모옌은 1955년 중국 산둥성 가오미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관모예(管謨業)이다. 가족이 아주 많았으며, “굶주림과 고독은 내 창작의 원천”이라고 할 만큼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물론 이 가난은 당시 중국이 처한 정치적・경제적 고난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50년대 후반의 연이은 3년 재해와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의 시행착오로 인해 빈곤은 모든 인민이 공유한 경험이 되었으며, 문화대혁명의 십년은 그 빈곤을 여러 방면에서 영속화시켰다. 굶주림으로 대표되는 결핍의 경험은 모옌 작품의 밑거름이 되어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굶주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고작 50여 년 전이었던 유아기를 태고의 원시적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모든 근육이 입과 위장에 집중되어 있고 생활보다는 생존이 문제가 되는 공간이다. 시커먼 석탄을 게걸스럽게 먹으며 원시 삼림과 직접 만나기도 하고, 소든 사람이든 불알을 까고 생육을 계획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중편 「소(牛)」, 장편 『개구리(蛙)』). 굶주림이 해결되고 먹을 게 넘쳐나는 시기가 되어서도 왕성한 식욕은 끝을 몰라 어린 아이를 잡아먹고 다른 한편 여전히 굶주린 사람들은 살기 위해 아이를 낳아 도시에 상품으로 판매한다(<술의 나라(酒國)>).

고향에서의 생활과 가난한 어린 시절은 「백구 그네(白狗秋千架)」(1984), 「투명한 홍당무(透明的红萝卜)」(1985)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유년기의 개인적인 경험이 깊게 투영된 이들 초기작에는 “기아와 음식물”, “아동고난사”, “꿈과 환상”, “동물과 식물” 등 이후의 창작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이 원초적인 형태로 선보이고 있으며, ‘가오미’가 단순히 고향이란 의미를 넘어 창작의 밑그림과 같은 문학적 공간으로 설정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최근작 <개구리>에 이르기까지 모옌의 거의 모든 소설은 ‘가오미’에서 진행되거나 그것을 기초로 한 가상공간에서 펼쳐진다. 그것은 윌리엄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 혹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마콘도에 비견되는 장소로 지적되어 왔다. “제 소설의 가오미 둥베이향은 이미 문학적인 개념입니다. 실제 지명을 기초로 하였지만 허구의 공간으로 확장된 것이죠. 그것은 윌리엄 포크너가 창조해낸 허구의 고향과 유사한 어떤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술적 리얼리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던 12살 때 모옌은 소학교 5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서 소를 치거나 임시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1976년 입대한다. 농민, 노동자, 군인으로 이어지는 성장기는 전형적인 작가의 탄생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정상적인 교육이 정지되고 읽을 수 있는 책이 제한되어 있던 그 시기의 중국은 다른 형태의 굶주림인 고독을 모옌에게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프랑코 모레티가 빼기를 했는데 더하기를 한 결과라고 소개한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300년 동안 출판이 통제되고 소설 수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던 다양한 문학적 전통, 현실에 대한 신화적 상상력과 함께 정치적 식민지였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모더니티의 산물이 마술적 리얼리즘이다.

공화국 건국 이후 1980년까지 30여 년간의 중국은 어찌 보면 '마술적 시각으로 변형된 리얼리즘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경이로운' 중남미의 경험을 압축한 측면이 있다. 모든 소설이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특정한 형식과 내용의 글만 허용되었다. 문예계에서 인민을 위한 모범이 되는 극이나 글을 대표하는 이른바 "양판"이란 것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그래서 생명이 없는 틀이었다. 문혁 10년을 거치면서 거의 모든 학교가 문을 닫고 거의 모든 책이 금서가 되어 불살라졌다. 모옌, 위화, 옌롄커 등 당대 중국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작가가 이 시기의 굶주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쓸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게걸스러움을 회고한다. 학교가 열리고 기존의 서적들이 재출간되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이론과 작품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옌 또한 이 시기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서사기법을 시도한 선봉문학의 대표로 떠오른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서구문화의 맹목적 추구로 끝나지는 않았다. "중국의 마르케스"라는 호칭에 걸맞게 특히 마술적 리얼리즘의 영향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들이 자신의 고유한 현실과 신화 속에서 새로운 문학을 창조한 것을 거울삼아, 그는 중국의 민간전통에서 세계문학과 대결할 수 있는 생명력을 찾아내려 했다. “예외적인 것, 기이한 것, 경이로운 것, 한마디로 말해 모험이 여전히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비동시대성의 세계는 라틴 아메리카만이 아니지 않은가. <수호전>의 영웅호걸의 후예가 살고 있는 곳, <요재지이(聊齋志異)>가 못다 수집한 풍부한 지괴 이야기, 소설이라는 제국에 병합되지 않은 민간의 구술전통이 그의 고향 가오미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서구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 선봉(아방가르드)과 심근(뿌리찾기)을 결합하려는 노력은 <풍유비둔(豊乳肥臀)>(1995)을 거쳐 <탄샹싱(檀香刑; 박달나무 형벌)>(2000)에서 만개한다. 이 작품은 ‘의화단 사건’이라는 역사적 전환기를 배경으로 하여, 서양 연합군의 침입으로 서서히 멸망해 가는 청나라와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제압당하고 마는 민중들의 혁명, 그리고 그에 이은 잔인한 형벌 등 중국의 민간 사회상이 밀도 있게 묘사되고 있다. 소설이 발표되자 많은 비평가들은 모옌과 중국당대문학의 세계화를 연관시키기 시작했다. <탄샹싱>은 전통적인 서사방식, 민간의 가창문학, 의식의 흐름, 희극, 마술적 리얼리즘, 민간의 역사, 중서문화의 충돌이 어우러져 있는 21세기 중국의 중요한 소설로서, 전지구적 배경 하에서 중국의 뿌리를 지켜나가고, 중국의 전통을 구성하고, 깊은 문화적 전통을 확립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는 관점에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숯과 다이아몬드

노벨상 수상 후 모옌은 <인생은 고달파(生死疲勞)>(2006)를 독자들에게 추천한 바 있다. 아마도 <인생은 고달파>를 거치며 비로소 마르케스의 영향에서 벗어났다는 확신을 스스로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고전 장편소설의 서사방식인 장회체(章回體)와 불교의 윤회적 세계관을 차용한 이 작품은 모옌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시도로 평가된다. 지주가 나귀, 소, 돼지, 개와 같은 동물로 환생하여 동물의 시각에서 보여주는 세상은 독특한 사고방식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전개를 가능하게 해 주었으며, 장회체의 차용은 폭포처럼 쏟아내던 그의 언어에 새로운 리듬을 부여해주는 장치가 되었다.

문학적인 성취의 측면에서 유보적일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추천하는 작품은 <개구리>(2009)이다. 작가 스스로 <백 년의 고독> 이전 상태로 회귀하여 썼다고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모옌의 초창기 중단편을 연상시키는 간결한 문체가 돋보인다. 또한 현재진행형인 중국의 계획생육을 중심으로 환상에 기대지 않은 허구와 상징을 활용함으로써, 생명을 주관하는 신화 속 여와와 한갓 도구에 불과했던 여인의 비애, 그러한 과거에 대한 참회와 새로운 현실의 욕망이 혼재된 모순된 인간상이 고모라는 인물로 잘 형상화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현실문제에 보다 접근하고, 자기표절을 피하고자 애썼다는 모옌은 자신을 넘어 이미 다음 걸음을 딛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모옌은 “말하지 말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1981년 이후 30여 년간 엄청난 분량의 작품을 쏟아내고 있다. 스스로도 말한 바 있듯이 그는 문장 하나까지 지나치게 공을 들이기보다는 격정적으로 창작욕을 분출하는 스타일의 작가이다. 모옌은 자신이 거쳐 온 삶과 중국의 현실을 정련하여 다이아몬드로 바꾸는 작가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석탄이면 어떤가? 아니 석탄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영원히 빛나거나 단단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몸을 달구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노벨상 수상으로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모옌 자신은 담담히 말한다. 바라건대 어서 빨리 "알 낳는 암탉"은 잊어버리고 그가 "낳은 달걀"을 맛보시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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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12. 11. 15. 18:00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저자
모옌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9-12-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중국 인민의 생명력 넘치는 삶의 풍경 속으로 초대하다!중국어권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이 중편집에 들어있는 <소>는 모옌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상징들이 잘 드러나 있는 초기작이다. 자전적인 내용을 담았으며, 꽤 괜찮은 작품으로 보인다.

맛깔나는 우리말로 옮겼지만, 읽으면서 헷갈리거나 내용전개상 반대되는 문맥으로 옮긴 듯한 것만 찾아서 고쳐봤다.


132쪽.

둥베이(东北) 저지대 웅덩이에서

东北洼里


"둥베이"라고만 하면 만주 지역과 혼동될 여지가 있다. 여기서는 산둥성 가오미 동베이향, 즉 모옌 소설의 주배경이다. 혼동하지 않게 설명을 더해 주는 게 좋을 듯.



173쪽.

그럼 우리 뿔로 요놈의 자식을 떠받아 죽여버리세. 우리는 두 눈 멀뚤멀뚱 뜨고 요놈의 자식이 우리 소중한 불알을 공짜로 먹어치우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 큰 루시가 말했다. 형제들, 자네들은 무슨 느낌이 없었나? 저 놈이 우리 불알을 먹어치울 때, 나는 내 불알 껍질이 칼로 쪼개냈을 때처럼 아팠네. 난 정말 답답해 죽겠네. 그놈들이 우리 불알을 떼어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 왜 그때는 불알 껍질에 고통을 느낄 수 없었을까? 솽지와 작은 루시가 말했다. 우리 역시 아픔을 느꼈다네.

那咱就把这小杂种顶死算了,咱们不能白白地让这小杂种把咱们的蛋子吃了。大鲁西道:兄弟们,你们有没有感觉?当他吃我们的蛋子时,我的蛋子像被刀子割着似地痛。我真纳闷,明明地看到他们把我们的蛋子给摘走了,怎么还能感到蛋子痛呢?

双脊和小鲁西说:我们也感觉到痛。

=======================================


그럼 우리 요놈을 떠받아 죽여버리세. 요놈의 자식이 소중한 우리 불알을 날로 먹게 할 순 없잖은가. 큰 루시가 말했다. 형제들, 자네들도 느꼈는가? 저놈이 우리 불알을 먹을 때 내 불알이 칼로 잘라내는 것처럼 아팠다네. 난 정말 궁금한 게 그놈들이 우리 불알을 떼어가는 것을 뻔히 봤는데, 어째서 계속 불알이 아프다고 느낄 수 있었던 거지? 솽지와 작은 루시가 말했다. 우리도 아픔을 느꼈다네.



185쪽.

"싯누런 기름투성이 오르알 노른자가 내 밥그릇에 굴러들었을 때, 두씨 마나님은 딸 두우화에게 코를 찡긋하고 눈짓을 보냈을나, 두우화는 그저 못 본 척 무시해버렸다. 두우화가 못 본 척 무시해버릴수록, 나로서는 호의적인 눈빛을 보여줄 필요가 더욱 없었다. 나는 추호도 사양하는 기색 없이 싯누런 오리알 노른자를 한입에 삼켜버려, ..."

====================================


두우화도 못 본 척 무시해 버리는데, 내가 눈치 좋은 척 할 필요가 없었다.



196쪽.

"뤄한아, 우리네 걸음걸이가 별로 느린 셈은 아니다만, 이런 식으로 마냥 걷다가는 한밤중 열두시나 되어야 가축진료소에 도착하겠어."

나는 말했다. "이보다 어떻게 더 느릴 수가 있겠어요? 내가 인민공사에 영화 구경하러 갈 때는 겨우 이십 분이면 뛰어갔다니까요."

“罗汉,咱爷们儿走的还不算慢,按这个走法,半夜十二点时,也许就到兽医站了。”

 我说:“还要怎么慢?我去公社看电影,20分钟就能跑到。”


==================================

"뤄한아, 우리 걸음이 그런대로 느린 건 아니다. 이대로만 가면 밤 12시엔 가축진료소에 도착하겠어."

나는 말했다. "이보다 어떻게 더 느릴 수가 있겠어요? 내가 인민공사에 영화 보러 갈 땐 20분만에 뛰어 갔는데요."



197쪽.

우리 할아버지가 인민공사 서기 노릇을 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할아버지 -> 아버지. (그 아래 대화도 마찬가지)


204쪽.

홰나무에는'목매달아 죽은 귀신'이란 별명을 가진 벌레가 자라는데,

杨树上生了那种名叫“吊死鬼”的虫,


吊死鬼는 '자벌레'.


=================================

사시나무에는 '목매달아 죽은 귀신'이라 불리는 자벌레가 사는데,



Posted by lunarog

번역은 원작과 경쟁이 안 된다. 원작이 신이라면 번역은 제사장에 불과하다. 창조가 허용되지 않는 제사장에게 진리는 자기 것이 아니다. 신에게 오류가 있더라도 그건 창조과정의 일부일 뿐이다.[각주:1] 만약 제사장이 오류를 범하면 돌이 날아온다. 제사장의 역할은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는 군중을 위해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누군가 "신은 절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 라고 의문을 품고 돌을 던지는 순간 제사장은 피투성이로 제단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대체되어 왔고, 대체되어야 한다. 어찌보면 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중 누군가를 계속해서 제사장으로 내세워 "신의 목소리"라 생각되는 것들에 귀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창조자가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신이 되어도 된다. 신인 척하는 것도 제사장에게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신과 경쟁하려는 순간 제사장은 가차없이 버려진다.





  1. 신의 오류를 지적하는 불경을 누가 저지르겠는가? 그것이 오류로 보이는 내 눈을 탓하고 참회한다. 그 속의 깊은 의미는 뒤늦은 깨달음으로 돌아온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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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12. 11. 12. 05:09

이 단편집은 번역이 맛깔나서 한국책으로 읽는 맛이 있다. 강추.

그렇지만 중국 실정과 안 맞는/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번역도 좀 있다. 독서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읽으면서 이상한 부분만 메모 삼아 몇 가지 정리해 둔다.


21~25쪽.

구직탄원서 : 각주에 报销单据에 대한 설명을 "공공업무에 사용한 비용을 사후 해당기관에 청구하는 증빙서류"라고 맞게 달아 두었다. 그런데 "문맥에 맞게" 구직탄원서로 번역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문맥에 맞지 않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공장장, 시장 찾아 가서 구직을 탄원하는 건 (안 될 거야 없지만) 좀 생뚱맞다. 공장에서 짤리지 않았다면 병원 비용을 직장에서 납부하게 되어 있다. 갑자기 짤렸는데, 짤리자마자 병원 신세를 져서 "여러 해 저축해 둔 돈을 거의 전부 탕진"해 버렸으니 안 되는 줄 알면서 비용을 받아내려고 애쓰는 장면이다. 그 비용을 청구하기 위한 증명서가 报销单据이다. 따라서 각주의 설명을 살려 "비용청구서" / "(의료비) 공제서류" 정도로 옮겨주는 게 맞겠다.


27쪽:

적삼; 중국산 견직물 적삼 : 너무 사전적으로 옮겼다. 중국에서 중국산 견직물 적삼을 입는 게 너무 당연해서 그렇게 부르지 않을 거다. 게다가 배경이 현대인데 적삼이라고 하니 너무 고전적이다.. 纺绸衬衫. 비단 셔츠?


49쪽:

"강제 퇴직까지 겪으신 몸인데, 여기서 더 재미없는 일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손님 꼬시기가 낯부끄러워 자기 도제에게 상담하는 장면이다. 不好意思를 옮긴 "재미없는"은 "창피할", "욕볼", "낯뜨거울" 등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강제 퇴직당한 양반이 뭘 그래 체면 따지고 그러십니까?"


49쪽:

"사부님, 제 말씀이 듣기 거북하시면 아직 배가 덜 고프셔서 그런 겁니다. 언젠가 굶주릴 때가 되면, 체면과 배고픔을 비교했을 때 뱃속부터 채우는 게 더 중요하다는 현실을 깨달으실 겁니다."


"사부, 제가 싫은 소리 몇 마디 할께요. 사부는 아직 견딜만 하신가 봅니다. 언제고 배를 곯아 보면 얼굴이랑 배 중에 배가 더 중요하단 걸 아실 겁니다."


83쪽:

'중화'표 고급 시가 두 대 : '중화' 담배 두 보루.


条는 가늘고 긴 물건을 세는 양사이다. 그래서 그냥 시가라고 옮긴 듯하다. (아마 담배를 안 태우시는 분인 듯). 보루가 条이다. 한 개피는 根. 최근엔 달라졌지만 '중화'는 고급담배의 대명사였다. 예전에 한국담배 2000원 겨우 할까말까할 때 한 갑에 40원(당시 환율로 4000원) 했다. 돈 많은 놈들은 그냥 피기도 했겠지만 주로 선물로 많이 돌렸다. 요즘에야 한 보루 5600위안(택스 포함 100만원 ^^) 하는 담배까지 생겼으니 상전벽해.


나라면 "도제"는 "부사수"로 옮겼을 것 같다.

"사부"는 사부님부터 아저씨까지 걸쳐 있는데, 도제가 부르는 호칭이니까 사부가 맞긴 하겠다.

"유머러스"는 제목으로는 나쁘지 않아도, 문장에서는 느낌이 좀 안 산다. 흔히 "웃기는 양반이네" 라고 말할 때의 어감이라고 할까?

살리기가 쉽지 않다..



사부님은 갈수록 유머러스해진다

저자
모옌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9-12-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중국 인민의 생명력 넘치는 삶의 풍경 속으로 초대하다!중국어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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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閱, 읽기 2012. 11. 11. 05:30

새로운 애플 제품이 발표되면 밤새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 이제는 뉴스꺼리도 아니다.

30년이 지나면 어떤 느낌으로 이런 풍경을 기억할까?

아래는 문혁 이후 해금된 책에 대한 위화의 추억이다.

발자크가 거의 "아이패드"와 동급이다.



독서에 관한 네번째 이야기는 1977년에 시작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독초로 간주되던 금서들이 다시 출판되기 시작하면서 톨스토이와 발자크, 디킨스 등의 문학작품이 처음으로 우리 작은 마을의 서점에 도착했다. 그때의 뜨거웠던 반응은 오늘날 연예계 스타들이 가난한 시골 마을에 나타난 것과 맞먹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달려가 아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을 전했고, 목을 빼고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처음으로 우리 마을에 도착하는 책의 수량이 한정되어 있다보니 서점에 서는 사람들에게 차례로 줄을 서서 서표를 받아가라는 내용의 공지문을 내다붙였다. 서표는 한 사람에게 한 장씩만 배분되었다. 서표 한 장으로 책 두권을 살 수 있었다.


그때 사람들이 책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섰던 장관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날이 밝기 전에 서점 문밖에는 이미 2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일부는 서표를 받기 위해 전날 밤에 서점 앞에 의자를 가져다놓고 밤새 앉아서 기다리기도 했다. (...) 새벽에 서점 문 앞에 도착한 사람들은 금새 자신들이 너무 늦게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원래 줄 맨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서점 앞에 도착해 보니 거의 3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서표는 50장밖에 없습니다. 50번째 뒤에 서 계신 분들은 집으로 돌아가주세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저자
위화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9-0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말하다!소설가 위화가 그려...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모택동선집 4권을 제외하면 읽을 책이 없던 시기, 문혁 이후 해금되어 두근거리는 마음에 책을 기다리던 시기, 30년이 지난 후 폐지 가격으로 고전들이 팔리는 시기가 위화의 추억으로 대비되고 있다.


문혁 이후 굶주렸던 사람처럼 책과 정보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던 것과 유사한 풍경은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진다. 책 뿐 아니라 이택후 같은 사상가의 강연에 팝 콘서트처럼 사람이 몰리던 시기였다. 새롭게 재개된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한밤중에 유일하게 불이 들어오던 화장실 비상구 전등 아래서 밤새 책을 읽었다. 우리나라도 규모는 다르지만 비슷한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80년대 해적판으로 출간된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의 판매량을 이제 다시는 못 따라갈 것이다.


읽을 게 너무 많아진 것이다.

요즘은 책에도 유통기한이 있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상하기나 한 것처럼 버려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시기에 책 한 권의 가격은 요즘 아이패드보다 비쌌다. 시기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1권 가격이 하급관원 한달 봉급 정도였다. 게다가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다섯 수레" 정도는 읽어줘야! 라고 했을 때 "다섯 수레"는 제법 많은 어감이다. 그러나 장자 시기 죽간으로 된 책 다섯 수레를 텍스트로 변환하면 몇 킬로바이트도 되지 않는 양일 거다. 선장본 종이책으로 다섯 수레 실어도 몇백 메가 될까?(12권짜리[구판 기준] 한어대사전이 텍스트 파일로 62메가 밖에 안 된다. 첫 알바비로 30만원의 거금을 들여 구입한 내 한어대사전은, 석사기간 내내 유용하게 썼지만, 이사할 때마다 골치거리로 전락하여 재활용 쓰레기로 버려졌다.)


기본적으로 소화해야 하는 정보의 양이 다르긴 하다. 그런데 정보를 취하는 방식도 상당히 달라진 듯하다. 굳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지 않더라도 정보가 유통되는 방식이 이미 트위터화되어 있다. 계속 새로운 정보들이 보충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 받아들인 정보를 가지고 상상하거나 이야기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오히려 자기만의 이야기를 상상하기보다는 매일 끊임없이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 맨날 고만고만한 뉴스들 속에서 살만 디룩디룩 찌는 거다. 읽기에도 다이어트가 필요하고 근육훈련도 다시 해야겠다. 이런 점에서 사사키 아타루의 도입부는 훌륭하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자
사사키 아타루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2-05-1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읽고 쓰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트위터, 페이스북에 많은 글을 쓰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 거기서 유포되는 새로운 정보들을 시간 날때마다 들여다보고 있다. 어떨 때는 보다가 눈이 아득해지기도 한다. 이 숲속에는 너무 신기하고 재미난 것들이 많아(사실은 뭔가 더 재미난 게 있지 않을까 라는 이뤄지지 않는 기대 때문에..) 집에 돌아올 시간을 놓치는 것이다.


대출된 책이 내 순번까지 오기를 기다리며, 주문해 뒀다가 며칠만에 받아든 책을 펼칠 때의 두근거림을 억지로라도 만들 필요가 있겠다. 당일배송되어 목차만 훓어보고 책장에 뒹구는 책들, 테블릿 속에 가득 저장해 놓은 책들에는 읽어야겠다는 의무감과 저걸 언제 다 보나 하는 한숨이 뒤섞여 있다. 책장에 뒹굴던 위화의 책을 잠깐 펼쳤다가 오랫만에 읽기의 즐거움을 느꼈다. 블로그에 쓰기의 즐거움도 다시?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12. 11. 11. 03:12

지나는 길에 잠깐씩 여유가 있을 때마다 찍어봤다.

주로 인스타그램 필터(X-pro2)를 적용하거나 힙스타매틱 앱으로 찍은 것들이다.

인스타그램 필터들이 느낌도 좋고 꽤 재미난 것 같다..


강릉대




강릉대 연못



동네 산책


갈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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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조리돌림 2012. 5. 28. 01:03

"지금 대학이 중세시대처럼 학문만 하는 상아탑도 아니고요
산업혁명 이후 대학의 기능이 분명히 바뀌었고, 그리고
전문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건데
취업이 대학의 성과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난데
어떻게 취업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흐) 저는 그게 더 이해가 안 가거든요.
대학 가서 학문만 하고 대학졸업하고 백수가 돼야겠다
이러면서 대학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지금 시기에..
그러면 대학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 뉴스타파 16회, 39:17-39:50 구간. 교과부 관계자 인터뷰.


42. 일과 권태. -- 보수를 위해 일자리를 찾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문명화된 나라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동일하다. 그들 모두에게 일은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로 인해 이들은 일을 선택함에 있어 섬세하지 못하다. 그 일이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족한 것이다. 하지만 일의 즐거움 없이 일하기보다는 차라리 몰락하기를 바라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 까다롭고, 만족시키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일 자체가 모든 이득 중에 가장 큰 이득이 아니라면 많은 금전적 이득은 아무 소용이 되지 못한다. 모든 예술가와 사색가가 이런 드문 종류의 인간에 속한다. 그러나 그 외에 자신들의 삶을 사냥이나 여행, 혹은 연애와 모험에 바치는 한가로운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 모두는 그 일이 즐거움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일과 어려움을 원한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지극히 어렵고 힘든 일일지라도. 그 밖의 경우에는 단호하게 나태를 택한다. 심지어 가난, 불명예, 건강과 생명의 위험이 그 나태와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그들은 권태보다도 기쁨 없는 일을 더 두려워한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일의 성공을 위해 권태를 필요로 한다. 사상가와 창조적인 정신을 지닌 모든 사람들에게 권태는 순조로운 항해와 즐거운 바람에 선행하는 유쾌하지 못한 영혼의 "무풍 상태"이다. 그는 이것을 견뎌내면서 그 결과를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범속한 천성을 지닌 사람들이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수단을 다해 권태를 몰아내려 하는 것은 기쁨 없이 일하는 것만큼이나 천박한 짓이다.


-- <즐거운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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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