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카테고리 없음 2010. 5. 25. 08:01

두 가지 식물성 기호품이 양대 제국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영국은 중국의 차를 수입하면서 풍요로운 오후와 건강한 제국의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아편은 무기력한 향락의 밤을 중국에 선사하였고 중국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영국의 차를 바다에 던진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의 독립을 가져왔지만, 영국의 아편을 바다에 던진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해 반식민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중국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상해라는 '자그마한' 도시가 있다.


두 장의 지도


남북이 뒤집혀 그려진 이 지도는 왼쪽 하단에 위치한 상해 현성(縣城)을 중심으로 각 현의 관할영역과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육지는 실제 크기에 비해 축소되어 있으며, 그물처럼 이어진 운하는 실제보다 훨씬 큰 것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 왼쪽으로 흘러내려오는 황포강(黃浦江)이 우리 한강 정도의 넓이라면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운하는 대부분의 경우 실개천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단순한 지형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지도에서 주요도로가 맡고 있는 역할을 이 당시 수로가 맡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평야를 이렇게 잘게 분할해야 할 만큼 땅에 대한 이용도가 낮고 육로를 통한 교역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반면 운하를 중심으로 한 수로는 강남지역 교통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림 1> 19세기 초 상해 현성을 중심으로 운하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의 교통에 물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왼쪽(동쪽)은 황포강이고, 현성의 하단(북쪽)에 비교적 큰 운하가 소주하(蘇州河; 지도에는 옛 지명인 오송강(吳淞江)으로 표기되어 있다)이다. 북경에 있는 황제의 시선으로 그려졌기에 남북이 전치되어 있다.

개항 이전의 상해는 '그저 작은 어촌'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개펄과 진흙으로 뒤덮인 작은 어촌이 개항과 함께 서구적 근대도시로 탈바꿈한 것으로 말이다. 영국의 조계지가 건설된 것이 상해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편전쟁의 결과 영국이 5개 항구의 개방을 요구했을 때 상해가 선택된 것은 '그저 작은 어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네 도시가 한 성의 성도(광주廣州)이거나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원래부터 대내외 무역의 거점으로 인정받던 곳(하문厦門, 복주福州, 영파寧波)인 반면, 황해에서 장강을 따라 들어와 그 지류인 황포강으로 진입하고도 18km를 더 가야 하는 상해는 얼핏 보기에 대외무역을 위한 지리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상해는 이미 청대 초기에 해운과 하운, 남과 북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상당히 발달한 상업 항구로 성장해 있었다. 운하와 장강을 통해 내륙의 물산을 밖으로 실어 나르거나 외부의 화물을 내륙 깊숙이 보급시키는 연결고리 역할을 맡고 있었고, 아울러 심해를 항해하는 데 적합한 광주와 복건 등 남해를 운항하는 배들과 수심이 얕은 황해를 항해하는 바닥이 얕은 사선(沙船)이 서로 화물을 교환하는 곳이 상해이기도 했다. 또한 개펄의 증가로 인한 실제 운행구간의 축소, 고가의 운송료 등 운하를 통한 강남내륙의 세금수송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어 해상을 통한 새로운 항로가 검토될 때 시야에 들어온 것 또한 상해였다. 그 중요성은 일찍이 1756년 동인도 회사의 피구(Pigou) 씨가 "무역에 안성맞춤인 도시"로 묘사한 바 있고(이사벨라 비숍,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 52쪽),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애머스트 호가 중국해안을 정찰한 후 상해에 대해 "이렇게 거대한 상업항구가 줄곧 홀시되어 왔다는 점은 실로 이상하기 그지없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동인도회사 직원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가 중국사정에 밝은 선교사 구츨라프(Charles Gutzlaff) 등을 대동하여 6개월간 실시한 이 정찰에서는 군사적 정보수집과 함께 중국의 주요 무역거점들이 상세히 검토되었다.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연해를 따라 조선, 오키나와를 거쳐 다시 마카오로 돌아간 이 정찰의 항로를 살펴보면 훗날 남경조약에서 영국이 왜 장강 이남의 다섯 항구를 개항지로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중 구츨라프가 남긴 상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상해의 지리적 중요성은 광주에 뒤지지 않는다. 이곳은 상업이 무척이나 활발하다. 만약 유럽 상인들에게 상해에서의 무역을 허락한다면 이곳의 지위는 매우 격상할 것이다. 상해에서 소비되는 외국상품은 엄청나게 많다. 이렇게 거대한 상업항구가 줄곧 홀시되어 왔다는 점은 실로 이상하기 그지없다. 중국법률에서 금하고 있어 이곳에서 무역하려는 시도는 저지되었다. 이런 것들이 어려운 점이긴 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1832,1833,Part.Ⅱ,1834.(http://military.china.com/zh_cn/history2/06/11027560/20050401/12212129_2.html)에서 재인용; <“阿美士德號” 1832年上海之行記事>, 《上海硏究論叢》 제2집(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1989년), 269-287쪽 참고.


전자는 그저 여행기에 그친 반면 후자는 훗날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남경조약(1843년)으로 개항된 다섯 항구 중 상해가 선택된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



<그림 2> 상해 현성 내부의 운하까지 상세히 묘사된 반면, 영국 조계지와 와이탄에 해당하는 지역은 터무니없이 작게 그려져 있다.

다시 지도로 돌아가서 상해 현성을 살펴보면 둥글게 생긴 성곽과 그를 둘러싼 해자/운하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 내부로 관공서와 문묘(文廟), 성황묘(城隍廟) 등 주요 지점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을 연결하는 것은 역시나 운하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방위의 성문 중 3곳은 수문을 포함하고 있어 현성의 출입에도 운하는 상당히 유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동쪽(그림 왼쪽)의 강변을 따라 형성된 부두는 상해를 지탱하는 무역의 거점이며, 그 사이에 세관(江海關)이 자리잡고 있다. 명대에 성곽이 세워진 것(1553년)도 왜구와 해적으로부터 이곳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성의 동쪽으로 부두에까지 이르는 길들은 각종 잡화들이 권역별, 도로별로 판매되고 있었다(두시가豆市街, 화시가花市街, 채의강彩 衣巷 같은 거리이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개항 이전에는 가장 번성했을 상해 현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육상교통로의 부재이다. 운하 곳곳에 상세히 묘사된 교량의 존재로 알 수 있듯이 도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남 지역의 다른 물고을(水鄕)들과 마찬가지로 육상교통이 상해를 살아가는 데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현성의 북쪽(그림 하단/붉은색으로 표시)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터이다. 이곳은 농경지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풍수가 훌륭하다 하여 곳곳에 묘지만 가득하던 곳이다. 그래서 서양 "귀신"(洋鬼子)들이 들어와 이곳을 차지할 때 끼리끼리 논다고 비아냥대던 곳, 바로 훗날의 영국 조계지이다. 현성과 거의 비슷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게 그려진 이곳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그 변화가 상해 전체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아래와 같이!



<그림 3> 1855년에 제작된 영국 조계지와 와이탄을 모습을 담은 평면도. 앞에서 제시한 상해현성의 지도와 비교해 볼 때 원래의 유선형 공간을 구획하는 바둑판 모양의 직선도로가 인상적이다. 물길이 아닌 육상도로가 부각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변화는 개항 후 10여 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인구 또한 1844년 50명의 외국인 거주자가 1855년 20,243명으로 늘었다.


1855년에 제작된 이 지도(그림3)는 개항 후 고작 10여 년 만에 그 보잘것없던 '작은' 개펄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갈 것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불구불 그물처럼 이어진 운하를 대신하는 것은 정방형으로 곧게 뻗은 직선도로이다. 비록 수로에 의해 조계지 전체의 권역은 구부러져 있을망정 그 내부는 바둑판처럼 잘 정돈시켜 구획하고 있다. 제작자와 사용자에게 기여하는 중요도에 따라 탄력적으로 크기를 달리하던 지형은 이제 정확한 방향표시와 함께 실측에 의한 실제크기와 모양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이 두 지도의 대비를 통해 자연적으로 생성된 물길에 몸을 맡기는 중국 문화와 객관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개척하는 서구 문화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 사태를 단순화시키는 발상일까? 지도에서 두 문화의 세계관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치다면 아래 인용문은 어떠한가?

 

굽은 길은 당나귀의 길이며, 곧은 길은 사람의 길이다.

굽은 길은 흐뭇한 기쁨, 안일함, 느슨함, 느긋함, 동물성의 결과다.

곧은 길은 반작용, 작용, 활동이며 자제력의 결과다. 그 길은 건강하고 고귀하다.

도시는 삶과 집약된 노동의 중심이다.

느슨하고 느긋한 민족과 사회, 무기력한 도시는,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과 사회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지고, 정복되며, 흡수된다.

그렇게 해서 도시는 죽고 주도권은 이양된다. (르 코르뷔지에, <도시계획>, 24-5쪽.)


"당나귀의 길, 사람의 길"의 은유는 즉각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운하를 통한 뱃길은 느슨하고 안일한 "당나귀의 길"이며,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에 의해 상해가 순식간에 정복되고 흡수되다시피 한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당나귀와 사람의 대비는 실제로는 자연과 기계의 대비로 볼 수 있다. 인간이성의 순수형식의 구현인 기계를 위한 길은 출발지점과 목적지를 최단시간에 연결하는 직선으로 대표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사이공간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똑바로 걷는다. 그는 가는 곳을 알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한 다음, 그곳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당나귀는 갈짓자를 그리며 걸어가고, 조금 빈둥거리며, 믿음이 가지 않는 멍한 두뇌로 큰 장애물들을 비켜가고, 비탈길을 피해, 그늘을 찾기 위해 갈짓자를 그리며 간다."(르 코르뷔지에, <도시계획>, 19쪽.)

아무튼 상해는 토지에 대한 이용보다는 수운을 중심으로 한 연결고리의 역할에 충실했던 시기에서, 땅이 부동산이 되고 잘 구획된 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선진적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운하를 메워 도로를 만드는 시기로 변화해간다.(양징방을 메워 만든 연안서로(옌안시루) 등) 여전히 강과 바다를 통한 교역은 상해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건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해라는 땅덩어리 자체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의 하나로 자임했을 영국에 의해 만들어진 조계와 그 도로가 어떤 방식으로 상해라는 공간 전체를 변화시킬지 위의 지도는 예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과 마차가 달리는 길인 "마로(馬路)"가 도로의 일반명사가 되고, 그 마로는 경마장으로 곧장 통하고 있으며, 그 사이공간은 보행자가 아닌 마차가 우선시된다. 와이탄을 넘어 한 블록만 들어가도 "영국" 조계지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중국인 혹은 중국과 관계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곳은 그 땅에서 일상생활을 펼치는 중국인들이 아닌 서구인의 것이었으며 서구인의 이익에 부합되는 활동만이 허용된 곳이었다.

 

* 이 글은 <중국 근대의 풍경>(그린비, 2008), "제3장 상해, 근대 중국을 향한 길"의 도입부를 재편집한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지도와 옛날 이미지 자료를 이용하여 상해의 옛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