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때늦은 감이 있지만 애초의 약속대로 톈안먼 사건에 관한 세 번째 포스팅을 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지나간 사건이며
점점 잊혀지고 있지만 바로 그 잊혀짐에 관한 글이 바로 페리 링크의 “육사: 기억과 윤리”June Fourth: Memory
and Ethics(China Perspectives, 2009.2.)이
다. 이 글에서 페리 링크는 기억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와 그 기억에서 어떻게 사건이 재구성되는지에 대해 고찰하려 한다. 그는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각각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혹은 기억에 실패하고, 혹은 다른 기억으로 대체하려 시도하는지를 자신의
경험에서 시작하여 살펴보고 있다. 그와 관련된 질문들은 모두 도덕적인 함의를 띠고 있기 때문에 “기억과 윤리”를 제목으로 택한
것이다. 분량상의 제한으로 전체를 번역할 수는 없었으며, 내용을 풀어서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이 글을 소개한다.
페리 링크 (Perry Link). 프리스턴 대학 교수.
_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건 당시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이후 『톈안먼 페이퍼』(The Tiananmen Papers: The Chinese Leadership's Decision to Use Force Against Their Own People, 2002)를 앤드류 나단과 함께 편집했다.
_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건 당시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이후 『톈안먼 페이퍼』(The Tiananmen Papers: The Chinese Leadership's Decision to Use Force Against Their Own People, 2002)를 앤드류 나단과 함께 편집했다.
페 리 링크는 자신의 경험에서 기억의 어떤 요소를 환기시키고 있다. 89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그는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었다. 학살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새벽의 길거리를 둘러보며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 피범벅이 되어 실려 가는 청년들, "피는 피로 갚겠다"는 팻말, 군용 지프를 둘러싼 성난 군중들, 불 태워진 군용차, 곳곳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와 자신이 경험한 학살에 대해 외치는 목소리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싶었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제공하려는 마음에 여러 중국 친구들을 탐문하기도 하였다. 6월 9일 베이징을 떠났으며,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6월 4일에 대한 많은 질문들에 맞서 처음 몇 번은 저장된 기억의 이미지들을 어떤 식으로 조합해야 할지 몰라 몇 개의 날기억들을 던지는 데 그쳤다. 그 날기억들의 뒤섞임과 충돌은 그 사건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면서 "어디에 가서" 기억을 찾아야 하는지 분명해졌다. 그런데 사건이 매끄러운 이야기의 외양을 갖춘 순간은 그 사건의 단순화 과정이기도 했다. 점점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청중의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더 따지게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자 원래의 기억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았다. 반복되는 질문을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가 찾고 있던 것은 원래의 기억이 아니라 '앞서 어떻게 이 이야기를 잘 풀어냈는지'에 대한 기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동일한 문제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게도 상존한다. 직접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사건을 우리 눈앞에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제한된 몇 개의 단어를 끌어 모아 그것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시작부터 단순화를 피할 수 없으며 진술이 반복되는 사이 상투적인 틀이 만들어진다. 자기 경험에서 이끌어낸 기억에 대한 반성에서 페리 링크는 톈안먼 사건의 기억이 어떻게 조직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변경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해자
먼 저 누가 가해자일까? 실제학살을 집행한 것은 인민해방군 27군과 38군이었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학살의 최대주범은 계엄을 선포하고 발포를 허락한 덩샤오핑과 사실상 분위기를 무력진압 쪽으로 몰고 간 리펑 및 톈안먼 광장에 모여든 일반시민 모두를 "반혁명폭도"로 규정한 공산당 간부 모두를 가해자로 볼 수 있다.(오히려 학살의 집행자였던 군인들 대부분은 베이징 외곽의 비밀농장에 감금당한 채 20년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 육사"의 가해자들이 그날의 학살을 모두가 잊어주길 바랄까? 일반적인 관측과는 달리 가해자들은 중국의 인민들과 공산당의 반대세력들이 학살을 똑똑히 기억해 주기를 원한다. 위협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 만약 모두가 잊어버린다면 진압이 보낸 경고 시그널은 무위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경찰봉, 최루탄, 물대포만으로 해결되었을 6월 4일의 톈안먼 광장에 탱크와 기관총을 사용한 중요한 이유이다. 통치당국은 이 사건이 단순히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사회 불만이 폭발한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권에 대한 도전을 종식시키고, 정치적인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인 자유만 윤허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기억시키고자 한 공산당의 의도는 지금까지 유효하게 먹혀들고 있다. 가해자들은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며, 언제 사람들이 잊어주기를 바라는가?
Catherine Bauknight <Tiananmen>
피해자
물 론 “육사”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말을 할 수도, 기억을 전할 수도 없는 사망자들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다. 이 두려움은 살육에 대한 충격뿐 아니라 그 이후 중국정부에 의해 공인된 관방의 견해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누구도 그 속에 내포된 잔혹한 암시를 오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월 4일 새벽에 벌어진 사건의 범인은 발포한 군인이 아니라 반혁명분자와 적대적 외국 세력의 지원을 받은 ‘폭도’들이다. 친애하는 시민, 당신이 만약 이 패거리의 일원이었다면 끽소리도 하지 말고 있어라. 고통스럽더라도 소리를 지르지 마라. 안 그러면 더한 고통이 따를 것이다. 우리가 네 아들을 죽였다면 그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사과를 해야 할 일이다.”
20년이 지나며 두려움은 옅어져 갔지만, 길을 걷다 신호등을 지키듯이 금기와 자기검열은 내면화되어 공고하게 지켜지고 있다.
방관자
사 실 피해자와 방관자의 선을 가르는 것은 쉽지 않다.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여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어야만 희생자인 것은 아니다. 페리 링크는 그 둘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 피해자는 직접적으로 고통을 받는 데 반해 방관자는 목격한 사건에 감정이입을 한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상처가 ‘자료’로 진열되거나 다른 정치적 투쟁의 근거로 이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침묵하기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영웅이나 희생당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이 영웅처럼 떨치고 일어날 것을 방관자들이 요구할 수도 없다.
“육사”의 주도자의 한 사람인 팡리즈가 베이징의 미국대사관의 창 없는 작은 방에서 숨어 살 때 쓴 <공산당의 망각술>이라는 글이 있다. 그 기본적인 착상은 중국공산당이 지금껏 자유로운 사고를 한 여러 세대의 중국인을 계속 진압해 왔다는 점이다. 매번 진압은 아주 쉽게 이뤄졌는데, 후세대 사람들이 앞세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톈안먼 광장의 학생들은 10년 전 “민주의 벽” 활동가들과 그들의 운명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민주의 벽의 주도자들은 1957년의 우파들이 어떠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이렇게 반복되는 망각은 중국인의 대뇌구조에 문제가 있어서도, 중국문화의 특징도 아닌 통치 당국이 펼쳐온 계획적인 통제수단에 의한 결과였다고 팡리즈는 강조하고 있다.
그 글을 읽으면서 페리 링크는 옳은 말이지만 당시처럼 전세계가 지켜봤고 관심을 받고 있는 이 사건에 “망각”이 왜 문제인지 의아해했다. 89년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벌어진 사건은 수많은 베이징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목격했으며, 전세계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톈안먼 사건은 역사상 그 어느 학살보다 많은 방관자를 보유한 사건일 것이다. 그런데 팡리즈가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20년이 지나자 세상사람 대부분에게 사건은 잊혀졌다. 그보다 더 안 좋은 것은 그 체제의 폭력적인 본질에 대한 기억이 점점 옅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육사”나 “톈안먼 사건”은 여전히 매체나 출판물의 금기어이다. 관련 홈페이지는 봉쇄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사건에 대해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더라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만약 자신이 통치권력의 목표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어떤 처분이 가해질지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 윤리리적인 부분에 대한 분석은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기억과 망각에 관한 내용에 집중하여 소개하였다. 20년 전 중국에서 일어난 일은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분명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또한 두려움에 기반하여 자기검열을 내면화할 것을 강요하는 정권과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기억을 안고 다음 걸음을 내디딜 것인가.
* 자 신의 경험에서 시작한 페리 링크의 글은 울림이 크고 분석은 정확하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의 안쪽과 바깥에 있는 두 노교수 첸리췬과 페리 링크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톈안먼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등식화하는 것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첸리췬은 일관되게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둘러싼 민주화 운동에 주목한다. 톈안먼 사건의 기본 동력이 공산당을 탄생시킨 바로 그 힘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여 진압이라는 방식을 택한 공산당을 내파시키는 것이 첸리췬의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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