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문화혁명/Shambhala 2008. 11. 22. 02:51
RFI의 관련소식을 정리해 둔다.

중공 통전부(统战部) 티베트 사무관인 비화(毕华)가 최근 짤렸다. 로이터 통신은 베이징 정계 소식통의 말을 인용하여, 비화가 현재 "당에 남아서 대기하는(留党察看)" 단계에 있다, 그러나 비화 본인은 자기가 어떠한 잘못도 범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다람살라에서 열리고 있는 전세계 티베트인 대회(티베트 망명 지도자 대회)가 닷새째로 접어들고 있다. 노르웨이에 있는 티벳의 목소리 홈페이지에 따르면, 20일 중국 경내의 108인의 티베트 학자들이 티베트의 저명 여작가 웨이써(唯色)의 블로그에 익명으로 티베트 대회에 건의하는 다섯 항목을 발표했다.

1. 중국정부는 달라이라마의 악마화를 즉각 중지할 것.
2. 당국의 "달라이 집단" 선전활동 비판 반대.
3. 3.14사건(독립시위)의 민중을 즉시 석방할 것, 사건의 진상을 공개하고 매체의 취재를 허락할 것.
4. 티베트에서의 언론의 자유를 실시할 것 요구
5. 티베트인들이 계속하여 달라이라마가 제시한 "평화와 비폭력"의 방식으로 중앙정부와 담판할 것.


108인의 티베트 학자들은 마지막으로 달라이라마가 최대한 빨리 라싸로 돌아올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발표시간: 21/11/2008 14:23

출처: http://www.rfi.fr/actucn/articles/107/article_10588.asp



<세대차이: 젊은 티베트인은 독립을, 나이든 세대는 자치를 요구>라는 제목의 다른 글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티베트 학자들의 요구안은 후자에 가까운 것이다.



dwnews의 후속기사가 있어 보충해 둔다.

http://www.dwnews.com/gb/MainNews/Forums/BackStage/2008_11_21_18_14_43_82.html


中共统战部西藏局长被撤职,毕华坚持没有犯错

DWNEWS.COM-- 2008年11月22日6:14:43(京港台时间) --多维新闻网


중공중앙통전부(中共中央统战部) 티베트 공작국(西藏工作局) 국장 비화(毕华)가 당국에 의해 직위해제되었는데 그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53세의 비화는 톈진 출신으로 중국 티베트학 연구센터(中国藏学研究中心) 부총간사, 중국 티베트 문화 보호 및 발전협회(中国西藏文化保护与发展协会) 상무이사 등의 직위를 역임했다.


비화가 일하고 있던 통전부(统战部) 티베트공작국은 통전부7국이라고도 불린다. 최근 티베트 망명정부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의 특사의 베이징과의 접촉 또한 중공통전부 관할이었다.


로이터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비화의 해직 원인은 아마도 티베트에 대한 그녀의 입장이 너무 연약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으나, 밝혀진 것은 아직 없다.


현재 인도의 다람살라에서는 티베트 망명 지도자 대회가 닷새째(21일 현재) 열리고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달라이라마의 "중도노선"은 포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중국의 입장은 여전히 강경하다. 중공통전부 상무부장 주웨이췬(朱维群)은, 달라이라마가 요구하는 "고도의 자치"는 사실상 "티베트 독립을 외치지 않는 티베트 독립"이며 중국 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음을 표명한 바 있다. 주웨이친은 최근 BBC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정부는 이미 달라이라마에게 인과 의를 다하였다"고 말했다.

---------------------------------------

22일 뉴스에 따르면 달라이라마의 중도노선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http://www.dwnews.com/gb/MainNews/Forums/BackStage/2008_11_22_9_32_3_9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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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달라이라마가 출현할 수도...  (0) 2008.11.18
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丹靑 2008. 11. 21. 13:59
이 "양치기"은 천단칭이 중앙미술학원 78학번 졸업생 전시회에 출품한 7점의 <티베트 연작>의 하나로 초기 천단칭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문혁 이후 소련식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유럽 전통으로의 회귀를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 이후 중국 유화의 주제는 "생활"과 "향토"로 확장되었다.

<티베트 연작>은 모두 라싸에서 그린 것인데, 이 중 <양치기>는 출품을 위해 북경에서 후반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천단칭이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이 작품만은 계속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作品名称:西藏组画·牧羊人 尺寸:80×52cm 年代:1980 质地:木板 油画

그림 출처에서 제공하는 경매가는 2007년 12월 기록으로 35,840,000위안으로 되어 있다. 현재환율 220이 비정상이라 하더라도, 78억원에 상당하는 금액이다. 최소한 당시 환율로도 50억 이상이다.
http://www.zyyworld.cn/world/ren/pic_ja_show.asp?id=34

어느 쪽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신문에 따르면 <국학연구원>이 1200만원에 팔린 후, 이 <양치기>도 3200만원에 나갔다고 한다. 천단칭 개인 기록으로는 최고라고 하는데, 중국미술품 중 최고가가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다.
중국 미술은 약간 부풀려져 있다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http://www.24ms.cn/html/news/msxw/20080817/803.html

3200万!陈丹青《牧羊人》再破拍卖纪录

时间:2008-08-17 15:15:34  来源:  点击:15  作者: 【


欢迎你来到09中国美术高考网,本站域名09ms.com,meishu,ms请牢记:
日前在保利公司艺术品秋季拍卖会上,陈丹青的油画《国学研究院》拍出1200万的高价,但是这一个人作品拍卖纪录仅仅保持了不到24小时。前天晚上,在匡 时拍卖公司的油画专场上,他的代表作“西藏组画”中的一张《牧羊人》拍出3200万的价格,再创他个人作品拍卖的世界纪录。

来自http://www.24ms.cn/

陈丹青“西藏组画”之《牧羊人》上拍卖场前就很被看好。

来自http://www.81art.cn/


    陈丹青在1980年前后创作的七张一组的“西藏组画”系列在上世纪80年代曾在美术界产生轰动,被认为是打破庸俗现实主义绘画的创新之作。在2003年油 画市场刚开始发力的时候,这张《牧羊人》曾在中国嘉德拍卖会上以187万元成交。而四年以后,这张《牧羊人》再次出现在亮马河饭店的匡时拍卖场上就引起广 泛关注。在前晚的拍卖会上,这张画以700万起拍,经过几轮叫价以后,价格就升到千万以上。最后一买家出价3200万竞得。该名买家在落槌以后立即退场, 显然是只对此画感兴趣。

来自http://www1.09ms.com/

    日前陈丹青的油画《国学研究院》拍出1200万就引起广泛关注,而昨天《牧羊人》能拍出3200万的高价,让匡时的油画部经理尤永也感到“超出自己的预期”。“但是一想也是实至名归……这是一张美术史级的作品。”尤永说。 来自http://www1.09ms.com/

    之前两年的现当代艺术品拍卖中,吴冠中、张晓刚、刘小东、岳敏军等先后创造出“标王”一样的价格纪录,而今年秋拍陈丹青的作品则成为新的热点。据悉,今天华辰拍卖公司还将拍卖一套陈丹青1977年创作的水粉作品《周恩来青年时代在天津》。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閱, 읽기 2008. 11. 20. 22:31


레비 스트로스가 이달 28일에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고 한다.(관련소식: 한겨레 보러가기)
로쟈님의 서재에서 소식을 접한 김에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던 정리를 한번 해 볼까 한다.

즉, 중국에서는 이들 사상가들, 혹은 인문사회과학 도서들이 얼마나, 어떤 게 번역되었을까?
(서점을 훓어보다가,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검색하다가 이런 건 대충이라도 정리를 해 둬야지 마음만 먹었다가 계속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보일때마다 조금씩 해 두도록 하겠다..)

인구가 많다는 건 이 경우에 상당한 장점이 된다. 역자도 많을 뿐 아니라 그걸 사볼 독자도 많다.
아무리 안 팔릴 분야의 책이라고 해도 '기본으로' 나가는 양이 우리와 다를 수밖에 없다.
대륙만이 아니라 홍콩과 대만까지 포함시킨다면 웬만한 책들은 다 번역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주로 홍콩과 대만에서 주요 서적들이 먼저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대륙에서는 그대로 찍어내던가, "참고"해서 새로 출간하곤 한다.)  물론 관심사와 유행이 한국과 다른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한국에는 전부 다 번역된 사상가의 책이 중국에서는 아예 번역되지 않았거나 막 번역되기 시작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각 분야의 기본이 되는 서적들은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플라톤 전집, 베버 전집 등등..

번역의 질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곤란하겠다. 맑스 자본론 같이 20세기 초에 번역이 시작된 데다 오랫동안 정권의 지지를 받는 책이야 당연히 우리나라의 번역보다 훨씬 좋을 수밖에 없다. 어쨌든 기본적으로 영어에서 옮긴 글은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중국도 석박사과정을 동원시켜 총서를 찍어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아주 난잡한 수준인 번역도 적지 않다. 또 학술번역만을 전문으로 하는 역자가 많지는 않다. 즉 워낙 수가 많아 각자 한두 권씩만 번역해도 되는 셈인데, 수고야 적게 덜겠지만 그만큼 전문화된 역자는 적을 수밖에 없겠다. 예전에는 있었다. 문학 전문번역가 푸레이(傅雷), 미학 전문번역가 주광첸(朱光潛)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도 일부 분야에 따라서는 전문 번역가가 있을 수도 있으나 내가 관심있게 보고 있는 쪽으로는 거의 찾지 못했다.

레비스트로스의 번역은 우리나라보다 상황이 훨씬 좋은 편이다. 간간히 한두권이 번역되어 나오다가 2006년 인민대학출판사에서 1권 <구조인류학>을 시작으로 문집으로 정리되고 있다. 서점에서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의 중국어 번역본을 본 기억이 어렴풋하나 인터넷으로 검색되지는 않는다. 기억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그새 절판되었을 수도 있겠다.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사진) : 출처(한겨레신문)



아래는 <레비스트로스 문집>으로 인민대학출판사에서 출간된 선집이다.


1. 구조인류학(1-2) : 1권은 1989년 文化艺术出版社 초판. 2권은 1999년 上海译文出版社 초판
   
结构人类学(1-2)——列维-斯特劳斯文集1

2. 야생의 사고 : 초판연도(1987년. 商务印书馆). .
  
野性的思维列维-斯特劳斯文集2


3. 신화학1: 날 것과 익힌 것
  
神话学:生食和熟食

4. 신화학2: 꿀에서 재까지
   
神话学:从蜂蜜到烟灰










12. 보다 듣다 읽다 : 초판연도(2003년 三联书店).
   
看·听·读——列维-斯特劳斯文集12



14. Totemism;     图腾制度——世纪人文系列丛书 (2005) : 초판연도(2003?)

15. <슬픈열대>는 <우울한 열대>(2005년, 삼련서점/초판은 2000년)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
바이두에서 "레비스트로스 100세"라는 제목이 검색되어 훓어보니,,
http://www.thebeijingnews.com/culture/spzk/2008/08-02/037@103634.htm

민간고사를 연구하는 "바이"(白)라는 아가씨가 레비스트로스에게 자기 연구주제를 소개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100살 먹은 할배가 손수 답장을 보내줬다는 이야기이다.(8월2일자 신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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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Shambhala 2008. 11. 18. 05:22
둬웨이 기사 중 "앞으로 세 명의 달라이라마가 출현할 수도 있다"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http://www.dwnews.com/gb/MainNews/Forums/BackStage/2008_11_17_11_3_7_801.html

 

多维月刊预告:将会出现三个达赖喇嘛

DWNEWS.COM-- 2008年11月17日23:3:7(京港台时间) --多维新闻网



기사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차기 달라이라마의 환생에 대한 희망이 점점 희박해지는 가운데 망명 티벳 지식인들은 15대 달라이라마가 최소한 세 명이 될 수도 있다고 예측한다. 중국정부에서 하나, 티벳 망명정부에서 하나 선출하고 또 서양사회에서도 하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 혹자는 여성 중에서도 나올 수도 있다고 전망.

또한 최근 망명정부에서는 정교 분리에 대한 의론이 분분한 상태이다. 선거에 의해 정치 지도자를 선출할 것을 주장하는 망명 티벳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티벳 문제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언제고 달라이라마 이외의 지도자가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달라이라마 노선을 지지하는 주류 목소리 외에 티벳 독립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강력해져 대결국면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최근 망명 티벳인 중 달라이라마가 사실은 친공산당파라고 비판하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따라서 전 티벳청년회 주석이 "과거에는 달라이라마의 문제의 해결이 티벳 문제의 해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다."라고 공개적으로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망명 티벳 지식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태이다. 14대 달라이라마 시대 이후에도 지식인이 우세를 점한다면 달라이라마의 생각을 고수할 수 있겠지만, 만약 급진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한다면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12월1일 출간예정인 《多维月刊》에 망명 티벳인들에 관한 기사 몇 편이 실릴 예정이다.



위 글은 월간의 해당컬럼 내용을 예고하는 기사를 축약번역한 것이다.

 

# "다차원", "멀티"란 뜻의 둬웨이 신문사(多维媒体公司; Chinese Media Net, Inc.)는 뉴욕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중국계 미디어 그룹으로 전세계 중국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문/중문 신문 및 뉴스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아쉽게도, 혹은 너무 당연하게도 중국에서는 웹페이지가 열리지 않는다.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08. 11. 16. 00:29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10점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책꽃이 원래 자리로 돌려놓다가 에필로그 부분을 확인해 본다.

홍콩판은 국역본과 결말이 조금 다르다.


내가 처음 읽은 것은 인터넷에서 검색한 판본인데 그건 잡지판을 그대로 배포한 것이었다.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국역본을 읽어보니 상당 부분이 새로운 내용이었다. 뒤늦게 부랴부랴 도서관에서 <화청>2005년호를 찾아 복사하고 콩푸쯔 헌책방에 홍콩판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주문 넣었다. (그러고 보니 금서로 지정되어 전량 회수되었다던 잡지<화청>의 해당호는 버젓이 서가에 꽂혀 있었고, 대륙에서는 출간되지 못한 소설의 홍콩판, 대만판은 인터넷 헌책방에서 적절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5금" 조치는 어쩌면 중국 내부에서는 신경쓰는 사람도 없고 작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외국에서 더 흥분해서 이용하는 홍보문구일 가능성이 크다. 정부쪽에서도 일단 원칙적으로 금지는 하되, 이미 파급력이 별로 없는 소설 나부랭이가 그러덩가 말덩가.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그보다 훨씬 낮은 수위도 검열되고 여기저기서 이슈가 되었겠지만 말이다.)


궁금했던 몇 군데만 찾아보고 일일이 검토하지는 않았는데, 어제 번역 정리하느라 다시 꺼낸 김에 좀 살펴보다가 국역본 결말과 다른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국역본에는 역자가 어느 판본을 참고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짐작하기에 대만판을 참고했는데 그게 다른 결말이었을 수도 있고, 저자의 요청이었을 수도 있으며, 국내 출간할 때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출판사와 상의하에 삭제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후자였다면 문제가 좀 있을 수 있다. 판단은 어차피 독자가 하는 것이니까. 잡지판은 스토리 전개상 불필요한 부분이 대부분 실리지 않았고(잡지 게재만으로 문제가 되었다. 즉, 사상적인 검열 때문에 부분삭제하였던 건 아닌 셈이다.) 에필로그 부분은 아예 빠져 있다. 참고삼아 홍콩판의 결말을 추가로 번역해 둔다..


 

...

우다왕은 편지를 받아들고 한참을 주저하다가 열어보았다. 편지 제일 위쪽에는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가 쓰여 있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 종이에 써 줘. 돈이 필요하거들랑 액수와 받을 수 있는 주소를 적고.


눈 꽃이 휘날리는 그 대문 앞에 서서 우다왕은 문 안쪽을 바라보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어찌 할 수 없는 창백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외투 안에서 붉은 비단으로 싼 팻말을 꺼내 들었다. 두께가 반치쯤 되고 너비는 세 치, 길이는 한 자 두 치쯤 되는 것이 마치 특별히 제조된 선물용 담배상자 같았다. 그는 그 팻말을 초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류롄 누님에게 좀 전해주게."


국역본은 여기서 끝난다. 어찌보면 군더더기 없이 여운을 남기는 결말이다. 홍콩판 결말은 바로 이어서 몇 문단이 계속된다.


 

  그런 다음 그는 몸을 돌려 천천히 흩날리는 눈 속으로 사라져 갔다.

  사흘 후, 이미 중년을 넘어선 류롄이 사령관과 그녀의 아들에게 말했다. 양저우에 있는 친정에 좀 다녀올께. 부모님도 안 계시지만, 가서 형제자매들이나 좀 보고 올까 해. 그러나 그렇게 떠난 뒤 류롄은 전화 한 통 없었다. 사령관은 양저우에 전화를 해보고서야 류롄이 양저우에 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류롄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일주일, 보름, 한 달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마치 눈꽃처럼 군구(軍區) 대원(大院)의 1호 사택에서 사라져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계화가 바람에 흩날리듯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한 향기만이 그녀가 존재했던 흔적을 세상에 남겨 놓고 있을 뿐.

2004년 8월 17일


번역에 참고한 원문출처는 다음과 같다.

잡지 <화청(花城)>, 2005년 제1기, 총 제152기.

옌롄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홍콩문예출판사, 2005년 4월 제1판)


http://lunatic.textcube.com2009-03-26T10:21:410.31010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08. 11. 14. 21:52
이글은 일전에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읽으며 체크해 둔 몇 부분의 번역을 만져본 것이다. 작품에 대한 자세한 소개나 비평을 원한다면 다른 글을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먼저 책을 읽어봐야 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이 오역을 잡아내기 위한 의도로만 쓰여진 것은 또 아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몇 권의 역서를 통해 보건대, 역자 김태성의 번역은 훌륭하다. 그만큼 일정한 수준의 번역으로 좋은 작품을 소개해주는 사람이 중국어권 번역자 중에서도 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소설 번역은 한두 문장의 오역이 있더라도 작품이 전하는 어떤 느낌이나 풍을 잘 살리는 한국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풍에 대한 입장은 사람마다 다를 것인데, 내가 역자였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보고, 시험삼아 한번 번역해 본 것이다.


일단,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제목 번역부터 역자의 입장을 볼 수 있다. service의 번역어인 "복무(服務)"는 보다 공적인 "봉사"라는 의미와 함께 손님접대와 같은 의미인 "서비스"에도 자주 쓰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군 복무와 같이 제한된 문맥에서만 자주 쓰이고 거의 서비스로 대체된 듯하다. 이 소설에서는 일단 인민대중에게 봉사하라는 모택동의 공적인 표어를 사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다른 "써비스"를 제공해 달라는 말로 치환시킨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지극히 공적인 표어가 은밀하고 사적인 밀어로 환치되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다른 소개글에서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인민에게 봉사하라"라는 뜻이 표어로서는 가장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봉사"보다는 "복무"를 선택함으로써 역자는 투박하지만 문혁 시기의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투박"이 문제인데, 투박한 문체를 지나치게 세련되게 번역해서도 안 되겠지만, 중국어를 한국어로 옮긴 글의 일반적인 문제가 투박하다는 점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원문 문장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스타일의 투박함이 아닌 번역의 투박함이 생기는 것이다. 혹자는 직역주의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루쉰의 "딱딱한 번역"이나 "타국화 번역"의 문제로 투박함을 변명하기도 한다. 근데 내가 보기에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게 다 중문과 출신들이 중국소설만 열심히 읽고 한국소설을 많이 읽지 않은 결과이다. 즉 한국어를 능청스럽게 다루지 못한다. 한국어를 장악하지도 못했으면서 한국어를 되돌아보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하는 타국화 번역을 지향한다고 떠든다면 말이 될까? (이런 식의 비판은 너무나 당연하게 자기비판이다..ㅡㅡ;;)

그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옌롄커가 아주 세련된 도시풍의 중국어를 구사하는 작가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의도적인 투박함이 아니라) 그와 상관없이 한국어 번역에서는 원문에 너무 매여 늘어지거나 투박하게 만들어진 문장이 있고, 그게 소설 읽는 맛을 조금 떨어뜨리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내가 대안으로 제시한 번역문도 정확하거나 세련된 것은 아닐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거나 그거나 별 차이 없네 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전문을 검토한 게 아니라 읽으면서 체크한 몇 부분만 옮겨본 것이니, 감안하고 읽기를 바란다.


보라색 글씨는 번역 원문, 초록 글씨 나의 수정, 그외는 설명이다.


(첫 시작, 1장 13쪽)


  삶의 수많은 진실들은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소설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기로 하자. 어떤 진실한 삶의 모습은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서만 비로소 확실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면 이는 소설 속의 사건이기도 하고 삶 속의 사건이기도 하다. 혹자는 삶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소설 속의 사건을 재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삶의 수많은 진실은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표현해 보자. 왜냐하면 어떤 진실한 삶은 허구라는 교량을 통해서만 그 진실을 확실한 진실에 이르게 할 수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 진실을 확실한 진실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소설 속의 사건임과 동시에 삶 속의 사건이다.

  혹은 삶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라는 소설 속의 한 사건을 재연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원문의 문단구분을 따른다.)



13-4쪽.


  사단장 집에서 취사를 전문으로 맡고 있는 고참 공무분대장 우다왕이 채소 바구니를 들고 사단장 집 주방 입구에 서 있을 때, 그 사건은 또르르 굴러와 마치 수소 폭탄이 터지듯이 요란하게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원래 식당의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붉고 큰 글씨가 새겨진 나무팻말이 이번에는 타일로 마감한 주방 부뚜막 위에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이 어색한 이유는 2장의 시작과 함께 바로 받고 있는 말과의 호응 때문이다. 2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바로 지금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문구가 새겨진 그 나무팻말이 또다시 식탁을 이탈해 있었다." 그리고 스토리 시간상 이 "또다시" 이후 전개되는 사건이 이 소설의 중심이다.


  사단장의 사택에서 취사를 전담하고 있는 고참 공무분대장 우다왕이 채소를 한 바구니 들고 사택 주방 입구에 섰을 때, 그 사건은 수소폭탄이 터지듯 쾅 하며 그의 앞에 펼쳐졌다. 원래 식탁 위에 진열되어 있던, 커다란 붉은 글씨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란 문구가 새겨진 나무팻말이 또 한번 주방의 타일 부뚜막 위에 나타난 것이다.



101쪽.

류롄의 유혹을 거부한 우다왕은 사단장 사택에서 쫓겨나고 전역하게 생겼다. 다급해진 우다왕은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어떤 "기회"? "인민을 위해 복무할" 기회? 자신의 공적인 욕망을 위해 그녀의 사적인 욕망에 서비스할 기회? 류롄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주문을 외며 우다왕에게 옷을 벗을 것을 요구한다. 우다왕은 그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때 류롄은 이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마디를 뱉어낸다." 국역본에서 그 한마디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정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군. 잘했어. 아주 잘했어."


그러나 이러고 보니 발가벗은 것을 칭찬하고 그것으로 끝난 느낌이다. 문맥상 관계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원문은 다음과 같다:

她说,为人民服务,你为呀,你为呀,你为呀。(잡지에서는 "你为呀"라는 말을 한 번만 한다. 분량 때문에? ^^)

그냥 옷만 벗고 끝난 게 아니라, 옷을 벗으며 눈길을 교환하는 동안 둘 사이의 공기는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다면 뒤따르는 마지막 말(5장을 끝내는 말)은 칭찬으로 끝날 게 아니라 생략된 그 이후의 장면을 예비하는 느낌이어야 할 것이다. 즉,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해 봐, 어떻게 서비스할 건데? 해 보라구! 하면서 발가벗은 이후의 행위를 재촉/암시하는 말로 번역되는 게 좋겠다. 내가 제안하는 문구는.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지. 해봐, 해 보라구!"



좀 약한가? 그럼 조금 더 세게 나가보자.

둘의 관계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었고 류롄의 몸은 점점 깨어났다.


114.


"그럴 필요 없어. 어서 나를 안아서 침대에 눕혀줘. 손은 멈추지 마. 입술도 멈추지 말고. 내 거기를 만져줘. 내 거기를 빨아줘.내 거기를 만지고 빨아달란 말이야. 지금 난 사단장의 마누라가 아니야. 나는 우다왕의 아내란 말이야. 난 이미 날 송두리째 샤오우한테 맡켰어. 죽이든 살리든 샤오우 맘대로 하란 말이야."


역자가 조금 지나치게 야하게 번역했다. (원문은 : 想亲我哪儿、摸我哪儿了,你就亲我哪儿摸我哪儿吧). 구문 자체는 "어디든 ~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렇게 해"이다. 어디(哪儿)를 거기(那儿)로 하는 바람에 '세계의 근원', 거기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조금 재미없게 풀어서 해석하면, 내 몸 어디든 키스하고 싶거나 애무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키스하거나 애무하라는 말이겠다.


"필요없어. 그보다 어서 날 안아서 침대에 눕혀 줘. 손은 멈추지 말고 입술도 멈추지 마. 어디든 상관없어. 빨거나 만지고 싶으면 내 몸 어디라도 빨고 만져줘. 이제 난 너희 사단장 마누라가 아니라, 너 우다왕의 아내야. 난 이미 니 꺼니까 죽이든 살리든 니 맘대로 해."



115.

"하늘과 땅처럼 영원하고 열광적인 그날의 키스와 애무로 인해 두 사람의 분명했던 관계는 복잡하고 애매지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진 그 격정적인 키스와 애무는 그렇게 분명했던 그들의 관계를 모호하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성어의 번역이 조금씩 어색하다. 여기서 쓰인 성어는 천장지구(天长地久)이다. 42쪽의 "주사를 가까이 하면 빨개진다는 식"이란 번역도 마찬가지다. 近墨者黑 近朱者赤(근묵자흑 근주자적)에서 가져온 거지만, 너무 빨간 색을 살리기 보다는 다른 식으로 푸는 게 어땠을까 싶다.


116.


  고개를 든 그는 그녀의 창백한 모습을 발견했다. 온몸이 누렇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 같았다.

  뜻밖에도 그녀가 혼절한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혼절했다는 것을 알았다. 격정에 사로잡혀 혼절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와의 불타는 섹스가 갑자기 광풍과 폭우가 몰아치듯 그녀에게 경험하기 힘든 숨막힘과 활력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누렇게 뜬 몸을 바라봤다. 죽은 사람인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까무러쳤던 것이다.

  그도 그녀가 까무러쳤다는 걸 안다. 격정 때문에 의식을 잃은 것이다. 폭풍이 몰아치듯 격렬한 섹스가 지금껏 맛보지 못한 숨막힘과 활력을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번역에 참고한 원문출처는 다음과 같다.

잡지 <화청(花城)>, 2005년 제1기, 총 제152기.

옌롄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홍콩문예출판사, 2005년 4월 제1판)




개인적으로 흥미있는 독서법은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하진의 <기다림>과 함께 읽는 방식이다.


<기다림>의 우만나도 류롄과 마찬가지로 간호사이다. 만약 우만나가 쿵린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웨이 정치위원과 결혼했다면, 그 이후 펼쳐질 삶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서의 류롄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기다림>의 쿵린과 우만나 이야기의 다른 버전으로 <인민을~>를 읽으라는 것이 아니다. 문혁이라는 시기와 육군병원 혹은 부대라는 공간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소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한쪽은 모든 욕망을 최대한 억누르고 담담히 20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다. 그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은 세상 전체를 파괴할 듯 욕망의 끝까지 치닫는다. 문혁시기를 살아간 대부분의 일반적인 중국인의 삶은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욕망의 극단적인 표출방식이 문혁 시기와 그 시대를 거쳐온 사람들의 어떤 경향성을 잘 보여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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示衆/조리돌림 2008. 10. 26. 06:55
얼마 전에 상해에서 개최된 세계식품과학기술대회((World Congress of Food Science and Technology)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우유의 하나인 "이리"가 수상했다.

이미 멜라민 파동으로 중국 뿐 아니라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터라, 정부와 관련업계로서는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던 듯하다. 이번 멜라민 파동이 전 중국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단순히 브랜드만 보고 멜라민이 들어있는 우유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지역에 따라 낙농업자가 다르고, 관리방식이 다르고, 그 해결방식도 다른 것 같다.(멜라민 여부도 지역별 메이커를 봐야 한다. 북경만 중국은 아니니까.) "싼루"를 비롯한 대표적인 멜라민 우유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우유를 안 먹을 수도 없고 싸잡아 비난하기도 말보다는 쉽지 않다. 상해는 몇 년 전부터 엄격한 관리를 해 안전하다는 정부쪽 성명을 그냥 믿기로 했다. 일단은 생우유만, 어제부터.. ㅡㅡ;;

암튼 이리 우유의 식품올림픽 수상 소식에 대한 네티즌들의 답글이 재미난다.
그 중 최고는 물론 "SF"라는 답글이다.
아래에 기사와 답글을 내 맘대로 취사선택하여 한국어로 옮겨 본다.



http://club.business.sohu.com/main.php?c=133&b=enjoy&a=1079201


최근 전세계 유업 성장률 50% 초과는 중국의 공헌이다. 이 숫자는 또한 중국유업계에서 신제품 생산에 있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을 보여준다. 10월 20일 이리(伊利) "소화 잘 되는 우유"(营养舒化奶; 유당불내증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저유당 우유의 일종)가 제14회 세계식품과학기술대회에서 "과학기술 창신상"을 획득했다. 이 상의 수상은 중국 식품업이 이미 양적, 질적인 면에서 세계 일류 수준에 진입했음을 반영한다.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14회 세계식품과학기술대회는 국제적인 권위를 인정받은 행사로 "식품계의 올림픽"이라 불린다.(한국은 2001년 11회 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대회에는 오대주의 백여 개 국가에서 수만 종의 제품이 선을 보였다. 이리 유업의 "소화 잘 되는 우유"는 고품질, 첨단 기술 제품임을 인정받아 최종적으로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기업은 세계에 어깨를 나란히 할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탁월한 품질만이 세계의 신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제품을 찾는 사람들 또한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중국식품과학기술학회 이사장인 판베이레이(潘蓓蕾)의 이러한 평가는 이번 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뤄질 수 있었던 이유이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제14회 세계식품과학기술대회는 중국에서 개최된 가장 큰 규모의 국제적 식품 관련 회의였으며, 이후 세계 식품업계의 발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대회에 참가한 한 중국인 업자는 기자의 인터뷰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번 대회의 중국 개최는 중국 식품업계가 국제적인 명품 브랜드와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리 제품의 수상은 세계로 하여금 중국 제품의 우수한 품질을 인정하게 했을 뿐 아니라, 중국 식품관련 기업들이 더욱 열심히 더 좋은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도록 해 준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줄곧 브랜드보다는 품질을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번 수상도 그렇고, 올림픽 협찬의 성공도 잘 보여주는 것처럼 이리의 품질 우선 정책은 정확하고 실천가능한 것입니다." 이리 그룹의 회장 장젠추(张剑秋)는 이렇게 표명하였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유원료의 관리와 기술적 창신은 이리가 존중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 발전 방향입니다. 우유원료 합작사의 건설을 통해 우리는 중국유업계를 위해 좋은 발전모델을 제공했습니다. "민주적 관리, 자주적인 경영, 이익의 공유, 위험의 공동부담"이란 방식으로 축산업자와 기업 간의 소통 통로를 열었으며, 낙농가의 이익을 보장하는 동시에 원료 관리의 모든 세부사항이 기업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5년에서 10년 사이에 이리는 매년 계속적인 투자를 통해 낙농의 현대화된 설비를 업그레이드하여 가장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우유를 공급할 것을 확신합니다."



답글 1 :   sf

답글 2 : 드디어 소가 왜 하늘로 날아갔는지 알게 됐군. 오늘 또다시 그놈의 품질이 화성인의 품질을 뛰어넘엇다고 허풍을 치는 꼴이라니..
(멜라민 사태 때 여론무마용으로 유인우주선 발사한 것 풍자)

답글 3 : 이리는 쓰레기야.
글 하나로 네티즌들을 바보로 만들려고? 자기들 품질관리나 더 엄격하게 하셔!
"유제품업계 제일"의 모자를 쓰고 "멜라민 함량이 가장 적은 우유"라는 연극은 하지 말고.
친구들, 씻고 잠이나 자라고들~~

답글 4 : 자기 애한테는 멜라민 안 먹이나?

답글 5 :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놈들! 여러분, 저놈들 우유는 절대 사지 맙시다. 우리 소비자들의 힘을 보여주자구요. 멜라민 집어넣을 땐 대체 뭔 생각을 했던 걸까?

답글 6 : 가증스러운 것들! 멜라민을 못 넣게 되었으니 이제 뭘 또 넣으려고?

답글 7 : 잘 들어! 중국 우유에 멜라민만 안 넣으면 그게 바로 "창신"이야!

답글 8 : 노벨 풍자상 후보로 추천하자구..


답글 9 : 批准~~钦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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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이탄에 새로 설치될 광장

 

 앞에서도 말했듯이 와이탄은 상해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1945년 영국에 의한 개항 이전에도 물론 상해라는 지명이 존재했지만, 중국 전체에서 그 존재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광주(광저우)가 있고, 복건의 하문(샤먼)이 있고, 바로 옆에 절강의 영파(닝뽀)처럼 바다에서 바로 들어올 수 있는 항구가 있는데 상해가 왜 필요했겠는가? 영국이 전략적 필요에 의해 이곳을 요구했고, 영국의 조계지가 만들어졌고, 그러다가 중국 근대화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고, 그래서 현재의 상하이도 있는 것이다. 그 상징적인 곳이 바로 와이탄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30년대의 상하이

 

지금 우리가 와이탄이라고 말하는 곳의 상당부분은 영국조계지의 동쪽 경계인 황포강변을 말한다. 항상 강물이 넘쳐 질퍽거리던 곳에 둑을 만들고(그래서 bund이다.) 그 안쪽에 건물을 세웠다. 와이탄은 항구의 역할과 함께 서양인들이 한적한 저녁에 산책을 즐기는 공간으로도 활용이 되었다.(와이탄 산보객(外灘客; bunders)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항구의 역할은 거의 사라졌고(와이탄 남쪽의 "16포"는 여전히 항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예전 닝뽀에서 배를 타고 왔을 때 여기에서 내렸다.), 산책의 공간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다만 거주자의 산책이 아니라 관광객과 호객꾼의 산책만 남아 있다.

 

그래서 관광객과 호객꾼들에게 보다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주요 목적은 2010년 엑스포 대비용이다.) 그에 앞서 10차선이던 와이탄 앞 지상도로(중산동일로)를 4차선만 남기고 지하로 옮기는 공사를 진행한다. 넓어진 지상 공간을 활용하여 주요 거점 4곳에 광장을 설치하게 된다.

 

와이탄 광장공사 전체 평면도. 광장이 추가되었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원래의 황포강 연안 산책로도 구간에 따라 상당히 많이 넓혀지며, 비스듬히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비탈길도 확장했다.


 

1. 왼쪽에서부터 보면, 와이바이두 다리를 건너 소주하를 넘어 오면 황포공원(黄浦公园)이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출입구가 따로 있고 입장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서쪽 입구에 있던 대문과 담장을 헐고 그 앞을 터 황포공원과 광장을 연결시키게 된다. 황포공원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와이탄의 기점 역할을 다시 제대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황포공원(원래 명칭은 "공가화원(public garden)", 혹은 와이탄공원)은 예전의 잘못된 소문이지만 많은 중국인들이 민족적 수치로 생각하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팻말로 유명하던 곳이었다. 상해의 제국주의적 기운을 누르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민족적 자존심을 좀 세우려는 것인지, 지금은 창처럼 뾰족하게 인민영웅기념탑이 설치되어 있다(소주하와 황포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원의 중심부가 탑이다). 이제는 이소룡의 분노한 발치기로 그 팻말을 뽀개지 않아도(정무문), 개와 중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확장된 남경로 입구의 "천이광장". 인민해방군 창건자의 한 사람인 "천이"는 해방 후 상해 초대 시장을 역임했다.

 

2. 남경로(南京路) 입구에 있던 천이광장(陈毅广场)은 지금보다 규모를 더욱 확장하게 된다. 원래 남경로 입구는 예전 영국조계 시절부터 각종 기념행사의 주요한 공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도로를 잘 살펴보면, 고속주행 자동차는 지하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지상에는 버스 등 공공교통 수단 및 이 곳을 방문하는 차량 위주로 운행되며, 4차선 좌우에 여유차선을 만들어 임시주차, 버스 정류장 등으로 이용할 계획이다.(위 그림처럼 아무런 경계가 없다면 차선 없는 일반도로가 되어버릴 위험성이 80% 이상이라고 본다. ^^) 또한 건물 쪽 인도의 폭도 지금보다 넓게 확장하여 와이탄의 이름난 건축물들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할 예정이라고 한다.

 

 

 

3. 복주로(福州路) 입구에는 중간 정도 높이로 경축광장(节庆广场)이 들어선다. 이곳에서는 와이탄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적절한 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고, 각종 기념일, 경축 관련 행사(节庆活动)를 진행하는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지금은 이 지점에 임시로 지어진 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4. 연안로(延安路) 입구에는 기상대(信号台)를 중심으로 하는 광장이 들어서 와이탄의 역사적 변천을 보여준다. 연안 고가도로를 철거한 이유도 이 광장을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연안로는 영국조계지의 남쪽 경계로, 원래 "양징방"이라는 운하였다. 중서의 경계였기 때문에 "양징방"이 조계를 대신하는 말이 되기도 했다. 상업적인 용도의 피진(pidgin; business의 중국적 발음) 영어를 "양징방 영어"라고 했던 것도 한때 이곳이 중서 교역의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양징방이 오물로 더러워지고 보다 넓은 도로가 요구되면서 메워져 현재의 연안동로가 되었다.(상해의 주요도로 중 이렇게 운하였던 곳이 많다.)

 

경계의 역할을 했던 것이 기상대이다. 1884년에 처음 만들어진 후 몇 번의 재공사를 거친 뒤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와이탄이 부두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진입하는 선박들에게 적절한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는데, 현재는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연안고가도로를 철거하기 전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상대 위쪽 전망대를 이용하려 했는데, 레스토랑 쪽에서 레스토랑 최소 소비액을 요구하거나 전망대 관람료를 따로 받아 시정조치를 받기도 했다. 고가가 사라진 후 저 위치, 저 높이에서 와이탄의 전망을 제공하는 곳이 기상대 뿐인 셈이라 한몫 제대로 잡을 수도 있겠다 싶었을 거다. 그것도 연안고가 철거 직전에나 가능했지, 공사가 진행중인 지금은 죽을 맛일 거다. 도대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지 않은가.(들어갈 수나 있는지, 영업은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저 난리법석인 곳이 위의 조감도처럼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와이탄의 옛 사진을 보면 상당히 정겹기도 하고 소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한쪽에 벤치를 놓고 산책 중간에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가 하면, 시대에 따라서는 전차, 자동차와 배, 사람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는 그런 곳이기도 했다. 어쨋든 그 시절과는 다른 기능이 지금은 요구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너무 미끈하고 인공적인 냄새가 풍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사에 전체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지하도로를 건설할 때, 그리고 지하로 자동차가 달릴 때의 진동 같은 게 이 지역의 건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에 대해 조금 더 면밀한 조사가 진행되어 안전하다는 판단 하에 했다면, 지상은 조금 더 여유로운 공간이 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물론 아무리 넓혀 놓아도 이곳은 항상 사람들로 득실거릴 테지만 말이다.

 

 

출처:  http://sh.eastday.com/qtmt/20080528/u1a433541.html

1. 이미지는 모두 위 링크에서 가져왔으며, 기사는 광장에 관련된 몇 부분만 참고하였다.

2. 위 링크에 들어가면 보다 큰 사이즈의 그림을 다운받을 수 있다.

Posted by lunarog

지난 2005년 10월 17일에 서거한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파금의 3주기를 맞아 몇 가지 행사가 진행된다.


먼저 10월 15일에는 그의 대표작 <가(家)>에 대한 대형 토론회가 열렸다. 작품 탄생 75주년을 함께 기념하는 자리이다. 이와 함께 자오즈강(赵志刚) 주연으로 상하이 월극단(上海越剧团)에서 월극(越剧)《가》를 재연하였다.


작품 토론회는 따로 부르지 않아 굳이 찾아가지 않았다. 파금 전공자이자 월극 <가>의 문학고문이기도 한 지도교수 덕분에 공짜표도 있고 해서 저녁에 시간을 내서 월극을 보러 가게 되었다. 상해에서는 연극을 한편도 못 봤으니 시험삼아 봐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월극은 "월(越)" 지방, 즉 절강 지역의 전통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극에 비해 움직임이 적고 여성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당연히 절강 쪽 방언으로 대사와 노래를 했기 때문에 자막에 의지해 내용을 파악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중국 현대문학의 대표작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리얼리즘을 표방한 <가>는 아주 재미가 없다. 지루해서 몇 번을 잡았다가 끝까지 읽지 못한 작품이다. 사실 한국의 중문과는 작품 읽는 걸 그다지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사실 다양한 작품을 읽힐 만한 환경도 되어 있지 않다.. ㅡㅡ;;) 학교 다니면서도 억지로 읽을 필요는 없었다. 문학사에 나오는 내용만 잘 외우고 있으면 되니까.(못 읽은 게 별로 부끄럽지도 않다. 다만 중국 애들하고 이야기할 때 그렇다고 고백하기는 좀 거시기하다만..) 따라서 자막조차 대체로 이해를 못했다면 절강방언으로 하는 이 연극의 내용을 전혀 모를 뻔 했다.


재미 없을 것이란 선입견과는 달리 그런대로 볼 만 했다. 소설과는 달리 많은 생략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줄거리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노래와 분위기로 대체했기 때문인 것 같다. 장면전환도 느리고 동작도 느린데도 빠르게 진행된다고 느꼈던 것도 아마 "생략" 때문인 것 같다.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 생략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물론.  주인공을 맡은 자오즈강은 "월극의 왕자"(越剧王子)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호응을 받는 인물이다만, 월극의 묘미를 모르는 나로선 그가 얼마나 좋은 연기와 노래를 펼치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내 개인적인 의견은 여성 동무들의 노래가 훌륭했고 남성 동무들은 좀 그랬다. 특히 악역인 천이타이(陈姨太) 역을 맡은 중년 배우의 노래가 잘 모르는 내 귀에는 가장 훌륭하게 들렸다.(누군지 찾아보려고 했는데 도통 검색이 안 된다.. 만약 2004년 초연 때와 같은 배우라면 후페이디(胡佩娣)였을 것이다. 전임 서안 월극단 단장이었고, 현재 상해 월극원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중간중간 끊임없이 박수를 치는데, 남들따라 박수 치는 것은 곧바로 포기했다. 노래나 연기가 훌륭할 때 박수가 나오는게 아니라 내용이나 대사가 훌륭하거나 자기 마음에 들면 박수를 날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박수는 "정의"의 편이다!!!) 악역 천이타이의 노래가 끝나고 내가 박수를 치려고 하는데, 바로 상대방의 대사가 이어지기도 했고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월극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르는 내가 누구 노래가 좋니 마니 하는 건 좀 그런가?)


문혁 이후 혁명 가극을 많이 보지 못했고 그 역사적인 관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10여년 전에 항주에서 봤던 전통 월극과 비교해 볼 때 요즘 새로 나오고 있는 소위 "신편 현대월극(新编现代越剧)"은 혁명 가극 냄새도 좀 풍기는 것 같다. 나로선 지나치게 과장된 연기로 보이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노인네들만 가득찰 줄 알았는데(물론 대부분은 나이 많으신 분들이다.) 의외로 젊은 층도 많았고, 극이 시작하기 직전에 중학생들도 한 무더기 들어왔다. 혹시 동원된 애들 아닌가 싶었는데, 나중에 끝나고 환호를 지르며 "~선생님(老师)"라고 부르는 걸 보니 희극학교 학생들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인터넷 뒤져보니까 의외로 젊은 월극 마니아들이 꽤 있다.


남녀 주연배우. 자오즈강(赵志刚)과 산양핑(单仰萍). 이 외에 쑨즈쥔(孙智君), 쉬제(许杰) 등 출연.


극의 완성도에 비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던 건 너무나도 후진 음향 시스템이었다.

의자가 불편해도, 할배들이 떠들고 큰 소리로 기침해도, 공기가 나빠도 참겠는데(담배냄새가 간간히 났던 것 같은데, 설마 정말로 누군가 담배를 피웠던 건 아니겠지? 우리나라 예전 극장에서처럼??), 그 스피커는 정말 도저히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저음에서는 그런대로 들을 만했지만, 극의 절정부나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음악과 목소리가 커지는 순간 찢어지는 소리에 귀를 막아야 했다. AM 라디오를 듣는 것 같은 잡음과 기계 돌아가는 소리도 그대로 들렸다. 예를 들어 눈을 뿌릴 때 하늘에서 고요하게 눈이 내리는 게 아니라 윙윙 소리를 내면서 눈이 날린다. 양푸대극원(杨浦大剧院)의 후진 시설을 탓할 수 밖에 없겠다.


깜빡하고 사진기를 챙기지 않아 직접 사진을 찍지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공연 중간에 함부로 후레쉬를 터뜨리는 중국 아해들의 매너 없음을 마음껏 욕해줬다. 극도 극이지만 공연이 끝난 후 사람들의 행동이나 표정 같은 것도 사진으로 담아뒀으면 재미있겠다 싶었는데 말이다..


맛뵈기로 동영상 파일을 보실 분들은 아래 사이트로....

 

http://so.ku6.com/v/q%E8%B6%8A%E5%89%A7%E5%AE%B6

 

 

     越剧《家》01

          越剧》0115:21

播客:SNCWC88
播放:240
标签:越剧《家》赵志刚主演
发布:11月前

      越剧《家》03

          越剧》0315:21

播客:SNCWC88
播放:114
标签:越剧《家》影视剧 赵志刚 许杰单仰萍主演
发布:11月前

 

상하이 월극원(上海越剧院) 홈페이지에 가면 월별 일정, 공연 장소와 시간 등이 나와 있다. 배우들에 대한 간략한 정보도 제공한다.

http://www.yueju.net/article/index.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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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늦은 저녁을 먹으며 <샤오추이 토크쇼(小崔说事)>를 본다. 일요일 9시 30분에 본방이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에서는 주로 지나간 문화적 사건이나 인물들이 주로 등장한다. 이른바 "옛 것으로 오늘날을 감상한다(以旧鉴今)",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바라본다"(忆往昔,看今朝)를 기본취지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추이용위안(崔永元)이 전체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지나간 옛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나 70-80년대를 회고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가끔 재미난 주제가 있긴 하지만 샤오추이가 지껄이는 시시껄렁한 농담도 별로고 해서 일부러 챙겨 보지는 않는다. 그런 말투가 일견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재미나게 한다는 점은 인정하더라도..

2005년 새로 편성된 연극 <체 게바라>. 이른바 "여성판"(全女版). 색계의 탕웨이가 주연이다.

 

하여튼 오늘 이 프로그램의 주제는 체 게바라였다.

아무리 체 게바라가 중국을 좋아했고, 모택동을 숭배했다고는 하지만,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 게바라 화전(切·格瓦拉畵傳)>의 편자인 스용강(师永刚)과  연극 <체 게바라>의 감독, 주연, 음악감독이 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나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숭배자들이 자기가 그를 숭배하는 이유를 이상화하는 그런 논의들 말이다. 한 가지 건진 것은 있다. 바로 쿠바에서 7년 간 머물면서 체 게바라를 직접 만난 팡빙안(庞炳庵; 전임 신화사 부사장)의 회고였다. 평소 체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는 못했지만, 직접 체를 만난 중국 기자(통역)의 체험담은 꽤 신선했다. 누군가 정리한 책이나 자료를 수집하여 이야기를 푸는 사람과는 다른 뭔가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직접 봤다는데 어쩌겠나.


1962년 쿠바, 팡빙안은 검은색 옷을 입고 차에 앉아 있다. 쿠바 군인들 인터뷰 장면.

 

그는 중국 신화사의 기자 쿵마이(孔迈)와 함께 상인으로 변장하여 쿠바에 갔다고 한다. 그 후 1959년 4월18일 처음 체를 인터뷰한 후 1965년 3월까지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그를 만났다. 아마도 체의 중국과 모택동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첫 인터뷰를 위해 체를 찾았을 때 일정상 다음날 오라는 말에 되돌아갔는데, 중간에 어떤 차가 따라와 길을 막아서더니 '체가 시간이 나서 인터뷰가 가능하다'고 전했다. 그런데 바로 그가 체 게바라였다고 한다. 체의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그의 중국에 대한 존중이 보여지는 장면이다.

 

이 팡빙안이라는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흔히 체를 이상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에 반대한다. "체는 결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그는 강하게 주장한다. 체는 현실에서 벗어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그런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에 근거한 문제의식에 따라 혁명의 강령을 정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그는 구사회의 파괴자에 그친 게 아니라 신사회의 건설자이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던 체의 형상을 한 돌맹이(사진을 구할 수가 없다. 돌맹이 안쪽에 형상이 새겨져 있다. TV로는 꽤 그럴듯해 보였다. 여러 면에서 체는 예수와 동격이다..)를 쿠바에 기증했을 때 그에게 체 게바라를 정의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내가 듣고 기억한 만큼만 정리함.)

 

"우리 몸에는 백혈구와 적혈구가 있습니다. 외부의 어떤 병균이 우리 몸에 들어왔을 때 백혈구는 자기를 희생하여 병균을 제거합니다. 백혈구는 죽지만 사람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죠. 체 게바라는 백혈구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희생하여 힘없는 민중을 구했습니다. 인류에게 희망이 있는 것은 체 게바라 같은 사람이 끊임없이 출현하기 때문이겠죠."

 

그는 또한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체의 습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사진 기자가 사진기를 들이대면 체는 장난스레 두 손으로 렌즈를 가려버린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기를 발견하고는 "에이, 너도 왔냐?" 라는 식으로 찡긋 한다고 한다. 그렇게 방심한 사이에 재빨리 찍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친숙한, 온갖 티셔츠며 벽이며 문신이며에 등장하는 사진에 대해서도 이 할배 한 마디 덧붙인다. '그 사진 찍을 때 제가 바로 옆에 있었거덜랑요. 근데 저는 필기를 해야 돼서 사진은 못 찍었죠.'

 

 

"그때 폭발사고가 나서 70여명이 죽고 2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70여 명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죠. 카스트로가 추도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체에게 귓속말을 하자 심각한 표정으로 단상에서 내려왔습니다. 나무계단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쌀쌀해지니까 체가 잠버의 자크를 위로 끝까지 올리더군요. 그때 제 옆에서 찰칵 찰칵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사진에 온 세상에 퍼져 있더군요."

 

 

솔직히 나는 체 게바라의 평전을 읽지 않았다. 영화도 보지 못했다.

그냥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너무 유행이 되어 있었던지라, 그 어설픈 유행을 뒤늦게 어설프게 쫓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 게다가, 자신이 그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교수가 그의 사진을 홈페이지에 걸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부터 더 관심을 가지기 싫어졌다. 뭔가. 좀 어설프다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10월 9일이 체가 총살당한 날이라고 한다. 진짜 체에 가닿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늦었지만 기회가 되면 체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싶다. 일단은 링크 하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44138&PAGE_CD=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