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중국 전체로 볼 때 내륙 지방에 해당하는 북부와 서부는 목욕을 즐기지 않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지만, 습하고 물이 많은 동남부 지역의 사람들은 제법 목욕을 즐겨 독특한 목욕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13세기 항주에 목욕탕이 3천 개나 있었으며 한꺼번에 100명이 목욕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뻥이 좀 세긴 하지만, 어쨌든 그 시절 중국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대중목욕탕이 존재했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목욕탕은 언제쯤 시작된 것일까?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이나마 당시 목욕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재미난 그림이 있다.
이 그림신문은 소주의 한 목욕탕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을 다룬 것이다. 주인의 부주의로 발생한 화재인지 옆집 꼬맹이가 불장난한 게 옮겨 붙은 것인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아무튼 한밤중에 느긋이 목욕을 즐기던 손님들이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우르르 뛰쳐나오는 모습이 생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목욕탕 자체에 대한 기사가 아니어서 이 당시 목욕탕 내부가 어떠했는지 이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출입구와 욕실 입구를 조망하는 위치에서 제시되어 당시에도 출입구 바로 왼쪽에 있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 후 탈의실을 통과하여 욕실로 들어가는 구조인 것은 알 수 있다.
문자로 제시된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하자면 우선 이 목욕탕의 상호는 “홍복원(鴻福園)”이다. 오른쪽 상단의 문 위에는 “낙지(樂池)”라는 팻말이 붙은 것으로 봐서 이 목욕탕에는 “지탕(池湯; 즉 공동욕조)”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탈의실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내부에 위치한 욕실로 들어간다. (지탕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중앙에 있는 “난방(暖房)”이라고 쓰여진 공간은 정확하진 않지만, 도구를 챙겨서 뛰어나오는 사환들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봐서 보일러실을 겸한 사환들의 작업장인 것으로 보인다. 수면실이나 찜질방의 기능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관련자료가 보충되어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어쨌든 그림으로 봐서 화재의 근원지가 난방 쪽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림 오른쪽 하단부에 위치한 탈의실이다. 화재를 피하려는 사람들과 옷이 널브러져 있지만, 탈의실에는 오늘날 캐비넛의 기능을 하는 상자가 있고 그 앞에 길쭉한 의자가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옷을 챙겨가지 못했는지 왼쪽에서 두 번째 상자에는 신발에 천까지 잘 씌워져 있다. 평소 같았으면 의복은 가지런히 개어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발을 상자 위에 올려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목욕을 끝낸 후 의관을 정제하면서 이 의자에 앉아 차라도 한잔 하거나 담배를 한 모금 빨았을 수도 있겠다.
다행히 왼쪽 중앙에 보이는 바깥문으로 “태평양룡(太平洋龍)”이라는 깃발을 든 소방수들이 몰려오는 것으로 봐서 이 화재는 곧 진압이 되었을 것이다.
위 그림이 다소 대중적인 “지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면, 아래 그림은 호화로운 “분탕(盆湯)”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기원분탕(沂園盆湯)이라는 이름의 목욕탕이 구강(九江)에 신장개업 했는데, 깨끗하고 호화로운 시설을 갖추어 모두들 앞다퉈 목욕을 하러 갔다. 그 중 화려한 옷을 입은 두 청년이 옷을 벗어 두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무뢰배 몇 명이 와서 옷을 훔쳐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점잖은 체면에 옷도 입지 않고 뛰쳐나가 멱살을 잡을 수도 없고, 옷을 가져가는 걸 보면서도 한 마디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사대부 자제의 모습을 연상해 보시라.
첫 번째 그림의 경우 불이 나서 어수선한 점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지탕과 분탕은 기본적인 외양에서도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도 탈의실이 중심무대이고,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이 왼쪽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탈의실의 풍경은 사뭇 다른데, 덩그러니 상자 하나에 서로가 연결된 긴 의자가 아니라, 차탁이 놓여 있어 앉아서 차도 마시고 발가락 손질(扦脚)이나 발안마 같은 서비스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널찍한 내부와 휘황찬란한 가스등만 봐도 이 목욕탕이 얼마나 호화스러운지 잘 알 수 있다.
목욕탕 안에는 이발사, 때밀이, 발가락 손질(扦脚; 修脚)을 하는 사환(堂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로 진강(鎭江), 양주(揚州), 단양(丹陽) 출신이 많아, 출신에 따라 양주방(揚州幇), 단양방(丹陽幇), 구용방(句容幇)으로 나뉘는데, 인원수는 양주방이 가장 많았고, 단양방, 구용방이 그 뒤를 이었다. 목욕을 끝낸 후 목욕비 외에 이들 사환들에게 팁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의 두 그림에서와 같은 정식 목욕탕은 아니지만, 매년 여름에는 끓인 물 파는 가게(老虎灶), 다관(茶館) 같은 곳에서도 “청수분탕(淸水盆湯)”이란 이름을 내걸고 목욕업을 겸하였다. 여름 한철 장사인지라 시설도 간단했다. 입구에는 기름종이에 “淸水盆湯”이란 글씨를 쓴 등롱을 내걸고, 나무 욕조 두세 개에 물 받아놓고, 천으로 칸막이를 하면 끝이다. 일종의 노천목욕탕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주로 일반 노동자나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 하층민이 이용하였다. 장사가 꽤 잘 되었는지 매년 여름이면 열에 아홉 가게는 이런 임시 목욕탕을 열었다고 한다.
위에 제시된 그림에는 남자 손님만 등장하는데, 이 당시 여자 목욕탕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자 목욕탕의 경우 1920년대 말 즈음에야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자목욕탕은 상하이 절강로(浙江路)에 위치한 “용천가정여자목욕탕”(龍泉家庭女子浴室)이 대표적이다.
이 목욕탕은 위층은 여탕, 아래층은 남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설이나 배치는 남자 목욕탕과 동일하되 때밀이, 발가락 손질 등의 서비스는 모두 여자 사환들이 하였다. 기녀들이 주요 고객인지라 상하이의 일반 부녀자들은 그 앞으로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당시 제법 큰 여관에는 서양식 욕조가 있었기 때문에 대갓집 마님이나 모던 걸(摩登女郞)들은 대부분 여관을 세내어 목욕을 했지 목욕탕을 찾지는 않았다. 때문에 여자 목욕탕의 경우 장사가 썩 잘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잇속 밝은 상해 상인들이 왜 여기저기에 여자 목욕탕을 열지 않았겠는가.
보너스! 여자 목욕탕이 없다 보니 아래와 같은 일도 가끔 생겼나 보다. ^^
이 그림은 남경의 한 목욕탕에서 벌어진 사건을 담고 있다. 몇몇 젊은이들이 목욕탕에 와서 한참을 떠들고 놀다가 막상 욕탕에 들어가려는 순간 일행 중 하나가 옷을 벗지 않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여인이었던 것!! 당장 매니저를 부르고 난리를 쳐서 밝혀낸 바, 그녀는 남장을 하고 남자목욕탕에 들어온 기녀였다고... 무엇이 궁금했길래? :)
참고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 19세기 말 상해에서 발행된 그림 신문. 인용한 그림은 모두 상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소개한 내용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목욕탕의 시설이나 분위기는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上海風俗古迹考>, 424쪽.
<上海鱗瓜>, 36-8쪽.
- “땟놈”은 중국인을 “대국(大國)” 사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지만, 중국인들이 “맞아, 그럼”이란 뜻의 “對(뛔이->떼이)”를 말끝마다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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