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우리는 “땟놈”이라는 말에서 잘 씻지도 않는 지저분한 중국인을 연상하곤 한다. 물론 “땟놈”의 “때”는 몸에 낀 때와는 상관없는 말이지만,[각주:1] 요즘도 상하이 등 대도시의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중국인들이 외모에 많이 신경쓰지 않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사천 사람들은 태어날 때 한 번, 죽을 때 한 번 목욕한다(蜀人生時一浴, 死時一浴)”라는 속담이 전해졌겠는가.

그런데 중국 전체로 볼 때 내륙 지방에 해당하는 북부와 서부는 목욕을 즐기지 않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지만, 습하고 물이 많은 동남부 지역의 사람들은 제법 목욕을 즐겨 독특한 목욕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13세기 항주에 목욕탕이 3천 개나 있었으며 한꺼번에 100명이 목욕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뻥이 좀 세긴 하지만, 어쨌든 그 시절 중국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대중목욕탕이 존재했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목욕탕은 언제쯤 시작된 것일까?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이나마 당시 목욕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재미난 그림이 있다.

(아시겠지만 제 블로그의 모든 이미지는 누르면 제법 커집니다..)
"화재가 발생한 목욕탕", <점석재화보>, 1886년

이 그림신문은 소주의 한 목욕탕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을 다룬 것이다. 주인의 부주의로 발생한 화재인지 옆집 꼬맹이가 불장난한 게 옮겨 붙은 것인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아무튼 한밤중에 느긋이 목욕을 즐기던 손님들이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우르르 뛰쳐나오는 모습이 생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목욕탕 자체에 대한 기사가 아니어서 이 당시 목욕탕 내부가 어떠했는지 이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출입구와 욕실 입구를 조망하는 위치에서 제시되어 당시에도 출입구 바로 왼쪽에 있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 후 탈의실을 통과하여 욕실로 들어가는 구조인 것은 알 수 있다.

문자로 제시된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하자면 우선 이 목욕탕의 상호는 “홍복원(鴻福園)”이다. 오른쪽 상단의 문 위에는 “낙지(樂池)”라는 팻말이 붙은 것으로 봐서 이 목욕탕에는 “지탕(池湯; 즉 공동욕조)”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탈의실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내부에 위치한 욕실로 들어간다. (지탕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중앙에 있는 “난방(暖房)”이라고 쓰여진 공간은 정확하진 않지만, 도구를 챙겨서 뛰어나오는 사환들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봐서 보일러실을 겸한 사환들의 작업장인 것으로 보인다. 수면실이나 찜질방의 기능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관련자료가 보충되어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어쨌든 그림으로 봐서 화재의 근원지가 난방 쪽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림 오른쪽 하단부에 위치한 탈의실이다. 화재를 피하려는 사람들과 옷이 널브러져 있지만, 탈의실에는 오늘날 캐비넛의 기능을 하는 상자가 있고 그 앞에 길쭉한 의자가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옷을 챙겨가지 못했는지 왼쪽에서 두 번째 상자에는 신발에 천까지 잘 씌워져 있다. 평소 같았으면 의복은 가지런히 개어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발을 상자 위에 올려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목욕을 끝낸 후 의관을 정제하면서 이 의자에 앉아 차라도 한잔 하거나 담배를 한 모금 빨았을 수도 있겠다.

다행히 왼쪽 중앙에 보이는 바깥문으로 “태평양룡(太平洋龍)”이라는 깃발을 든 소방수들이 몰려오는 것으로 봐서 이 화재는 곧 진압이 되었을 것이다.


근대 시기 상하이의 목욕탕은 공동욕조가 설치되어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지탕(池湯)”과 개인 욕조가 설치된 일인용 욕실인 “분탕(盆湯)”의 두 종류로 나뉜다. 지탕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기 때문에 병균에 감염될 우려가 많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은 분탕(盆湯)을 선호하였다. 분탕盆湯에는 양분(洋盆), 관분(官盆), 객분(客盆)의 세 종류가 있고, 어떤 곳에는 거대한 “양분(洋盆)”에 샤워기(蓮篷管)가 설치되어 있어 샤워도 할 수 있었다. 여름에는 선풍기, 겨울에는 화로가 갖춰졌고 인테리어도 훌륭하였다. 한 사람씩 들어가게 되는 특설호화탕(特設雅室)은 양분방(洋盆房間), 여러 사람이 같이 사용하는 것은 통간(統間)이라고 각각 불렀다. 관분, 객분 또한 각각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다.


위 그림이 다소 대중적인 “지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면, 아래 그림은 호화로운 “분탕(盆湯)”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입을 옷이 없네 그려?", <점석재화보>, 1887년

기원분탕(沂園盆湯)이라는 이름의 목욕탕이 구강(九江)에 신장개업 했는데, 깨끗하고 호화로운 시설을 갖추어 모두들 앞다퉈 목욕을 하러 갔다. 그 중 화려한 옷을 입은 두 청년이 옷을 벗어 두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무뢰배 몇 명이 와서 옷을 훔쳐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점잖은 체면에 옷도 입지 않고 뛰쳐나가 멱살을 잡을 수도 없고, 옷을 가져가는 걸 보면서도 한 마디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사대부 자제의 모습을 연상해 보시라.

첫 번째 그림의 경우 불이 나서 어수선한 점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지탕과 분탕은 기본적인 외양에서도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도 탈의실이 중심무대이고,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이 왼쪽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탈의실의 풍경은 사뭇 다른데, 덩그러니 상자 하나에 서로가 연결된 긴 의자가 아니라, 차탁이 놓여 있어 앉아서 차도 마시고 발가락 손질(扦脚)이나 발안마 같은 서비스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널찍한 내부와 휘황찬란한 가스등만 봐도 이 목욕탕이 얼마나 호화스러운지 잘 알 수 있다.

목욕탕 안에는 이발사, 때밀이, 발가락 손질(扦脚; 修脚)을 하는 사환(堂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로 진강(鎭江), 양주(揚州), 단양(丹陽) 출신이 많아, 출신에 따라 양주방(揚州幇), 단양방(丹陽幇), 구용방(句容幇)으로 나뉘는데, 인원수는 양주방이 가장 많았고, 단양방, 구용방이 그 뒤를 이었다. 목욕을 끝낸 후 목욕비 외에 이들 사환들에게 팁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의 두 그림에서와 같은 정식 목욕탕은 아니지만, 매년 여름에는 끓인 물 파는 가게(老虎灶), 다관(茶館) 같은 곳에서도 “청수분탕(淸水盆湯)”이란 이름을 내걸고 목욕업을 겸하였다. 여름 한철 장사인지라 시설도 간단했다. 입구에는 기름종이에 “淸水盆湯”이란 글씨를 쓴 등롱을 내걸고, 나무 욕조 두세 개에 물 받아놓고, 천으로 칸막이를 하면 끝이다. 일종의 노천목욕탕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주로 일반 노동자나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 하층민이 이용하였다. 장사가 꽤 잘 되었는지 매년 여름이면 열에 아홉 가게는 이런 임시 목욕탕을 열었다고 한다.

위에 제시된 그림에는 남자 손님만 등장하는데, 이 당시 여자 목욕탕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자 목욕탕의 경우 1920년대 말 즈음에야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자목욕탕은 상하이 절강로(浙江路)에 위치한 “용천가정여자목욕탕”(龍泉家庭女子浴室)이 대표적이다.

이 목욕탕은 위층은 여탕, 아래층은 남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설이나 배치는 남자 목욕탕과 동일하되 때밀이, 발가락 손질 등의 서비스는 모두 여자 사환들이 하였다. 기녀들이 주요 고객인지라 상하이의 일반 부녀자들은 그 앞으로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당시 제법 큰 여관에는 서양식 욕조가 있었기 때문에 대갓집 마님이나 모던 걸(摩登女郞)들은 대부분 여관을 세내어 목욕을 했지 목욕탕을 찾지는 않았다. 때문에 여자 목욕탕의 경우 장사가 썩 잘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잇속 밝은 상해 상인들이 왜 여기저기에 여자 목욕탕을 열지 않았겠는가.


보너스! 여자 목욕탕이 없다 보니 아래와 같은 일도 가끔 생겼나 보다. ^^
"저도 때를 씻고 싶다구요", <점석재화보>, 1885년

이 그림은 남경의 한 목욕탕에서 벌어진 사건을 담고 있다. 몇몇 젊은이들이 목욕탕에 와서 한참을 떠들고 놀다가 막상 욕탕에 들어가려는 순간 일행 중 하나가 옷을 벗지 않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여인이었던 것!! 당장 매니저를 부르고 난리를 쳐서 밝혀낸 바, 그녀는 남장을 하고 남자목욕탕에 들어온 기녀였다고... 무엇이 궁금했길래? :)


참고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 19세기 말 상해에서 발행된 그림 신문. 인용한 그림은 모두 상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소개한 내용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목욕탕의 시설이나 분위기는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上海風俗古迹考>, 424쪽.
<上海鱗瓜>, 36-8쪽.

  1. “땟놈”은 중국인을 “대국(大國)” 사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지만, 중국인들이 “맞아, 그럼”이란 뜻의 “對(뛔이->떼이)”를 말끝마다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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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야 알게 된 "1933"(정식명칭: 1933老场坊, 1933 creative hub)을 다녀왔다. 위치가 예전 친구들이 놀러와서 하루 묵었던 구룡반점 호텔 바로 옆이었다. 미리 알고 있었다면 친구들에게 재미난 구경거리 하나를 추가시킬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근대적 주거양식에 관한 책을 쓴 분도 같이 왔으니, 이 기하학적 내부구조에 아주 재미있어하지 않았을까? 밤에 술이 모자라 이쪽 입구를 어슬렁거리기도 했는데, 곧 방향을 틀어 대로변 편의점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뒤쪽으로 보이는 높은 건물이 구룡반점 호텔이다.

도살장, 육류가공공장, 제약회사 등 몇번이나 용도가 바뀐 뒤 2002년부터 그 건물을 사용하고 있던 제약회사(上海长城生化制药厂)가 문을 닫아 2006년까지 버려져 있었지만, 2005년 상하이시에 의해 우수 역사건축으로 지정된 후 재개발되어 2008년부터 개방되었다고 한다. 디자인이나 전시 위주의 공간으로 임대되는 것 같은데, 아직 비어 있는 곳이 많았다. 이른바 상하이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크리에이트브 센터 중 하나인데. 당분간은 상하이를 대표하는 공간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와이탄과 둬룬루 문화거리/노신공원의 중간 지점으로 양쪽에서 걸어서 30분 내외란 점을 고려할 때 홍커우 지역 도보여행 코스의 하나로 넣어도 좋을 것 같다. .
왼쪽에는 상하이 공부국(Shanghai Municipal Council)의 약어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글씨 문양은 지금도1933의 간판 비슷하게 사용된다.
3층으로 올라가는 어두운 계단 끄트머리에서 발견했다.


아르데코 양식의 이 5층 건물은
입구의 네모반듯함이 미로같은 내부의 뒤틀림을 감추고 있다.


원래 "1933"은 상하이 공부국 도살장(上海工部局宰牲场)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이와 비슷한 규모의 도살장이 당시 전세계적으로도 3곳에 불과했는데, 다른 두 개는 미국과 영국에 있었다고 한다. 조계 공부국이 영국인에 의해 관리되던 것이었기 때문이겠지만, 이 도살장도 영국인 건축사에 의해 영국식 도살장에 근거하여 지어졌으며, 자재까지 영국에서 수입하였다고 한다. 건축사의 이름은 스테이블포드(C.H. Stableford) 혹은 발푸스(巴尔弗斯)로 소개되는데, 공식홈페이지에서 소개하는 스테이블포드가 당시 상해에 살고 있었다면 발푸스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쪽 문헌에서는 발푸스라는 이름의 유래나 영문표기가 병기되지 않아 확인해볼 수가 없었다.

미로처럼 얽힌 저 길은 동물을 위한 길일까, 사람을 위한 길일까?

당시의 식품위생 관념에 근거하여 지어진 이곳은 한때 매일 양 500마리, 돼지 300마리, 소 300마리, 송아지 100마리가 도살되었으며, 130여 톤의 최고급 육류를 생산하여 상해 시민들에게 공급하던 곳이었다. 운하 건너편에 두 개의 굴뚝이 인상적인 건물은 가축 폐기물 처리와 소각에 사용되었다. 이 곳도 지금은 1933의 부속건물로 운영되는 듯하다. 공간분할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주건물을 둘러보는데만도 시간이 꽤 걸려 들어가볼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건너편 건물에도 들어가볼 생각이다.. 1933 바로 옆에는 냉동고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구룡반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운하 좌측의 높은 굴뚝 건물은 도살된 가축 폐기물을 처리하던 곳이었다.



입구

육중한 돌기둥을 통과하면 카운터가 기다리고 있다. 카메라 소지시 신분증을 맡기고 등록을 해야 한다. 촬영의 목적을 밝히고 상업적인 용도로 사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뒤 등록증을 받는다. 여러 명이 가면 한 명만 등록하면 되지만 같이 다녀야 한다. (중간중간 등록증을 확인하기도 한다.) 사람이 많은 시간이나 카메라가 없을 경우, 혹은 다른 목적으로 온 경우에는 그냥 입장도 가능한 것 같다.



1층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철골 콘크리트 구조가 사람을 압도한다. 건물 구조만 봤을 때는 상당히 재미 있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도살을 예감한 동물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왠지 위축되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군데군데 개장을 준비하고 있는 상점들로 어수선하며,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게 독특한 의자들을 갖춰 뒀다.



미궁


계단 위로 올라갈수록 복잡하게 얽힌 층계와 주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체구조는 동서남북 네 변을 직사각형 건물이 담장처럼 둘러져 있고, 그 가운데에 24변형의 주건물이 둥그스럼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이로 높이가 제각각인 통로가 얽혀져 있다.

옛 이미지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잡지에서 해당 사진만 도려냈다.



처음 드는 생각은 이게 과연 도살장 건물이 맞나? 가축의 도살을 위해 왜 이런 구조가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당시의 근대적 위생관념과 "동물 복리주의"에 근거하여 설계되었다는 말이 쉽게 와닿지는 않는 것이다.


도축 과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http://hi.online.sh.cn/content/2009-04/16/content_2925977.htm

 

1. 가축을 실어온 뒤 하루이틀 정도 방치한다. 긴장한 동물들이 느낄 공포감을 완화시켜 체내 독소의 배출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2. 가축들을 비스듬히 난 통로를 통해 2층과 3층으로 보낸다. 지금 보니 통로는 소 한 마리가 지나가기 적당한 넓이이다. 함정식으로 설계된 도축장에 가축이 들어가면 전기철봉으로 기절시켜 도축을 시작한다. (자세한 도축과정은 생략한다. ㅡㅡ;; 통로 한쪽에 액체(?)가 빠져나갈 수 있게 도랑이 설치되어 있다거나, 한쪽 옥상에 늘어선 물탱크를 보면 도축에서 육류가공까지 이곳에서 모두 이뤄지기 용이한 구조였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내부1

입구쪽 내부건물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빛이 곱다. 문을 열고 바깥풍경을 내다볼 수도 있다. 사진으로 담기엔 좋지만, 창문 바깥의 원형격자는 발을 잘못 딛기라도 하면 5층 아래로 떨어질 수 있을 정도로 크니 조심해야 한다. (무심결에 창을 열었다가 깜짝 놀랐다.)



내부2


주건물의 상층부는 자연광이 건물 전체를 비출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또한 판옵티콘처럼 이곳에서 건물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구조이다. 지금은 전시공간 같은 것으로 활용되는 듯하다.




주변

주위에는 상하이의 전통적인 가정집들이 늘어서 있다. 영국조계의 북쪽에 위치한 이 홍커우에는 중국인들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역이 밀집해 있어 일본 조계라고도 불렸던 지역이다. 석고문, 혹은 이농주택 형식의 상하이의 전통 주거지역을 고층빌딩이 에워싸고 있다. 아마도 신천지(신톈디)처럼 바뀌지 않는 한 이곳도 조만간 사라져 갈 지도 ...


아직은 비어 있는 공간이 많고 어수선하다. 그래서인지 매끈하게 탈바꿈하려해도 어찌할 수 없는 황량함이 살아 있다.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빨리 가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살장의 피냄새와 그로테스크함은 세련된 고급 브랜드와 너무 잘 어울려버릴 테니 말이다.

벌써 여러 차례의 전시회가 열렸으며, 앞으로도 각종 행사와 전시가 이곳에서 열릴 예정이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우측에 1933사진전이란 이름의 작은 공간이 있다. 1933을 주제로 찍은 사진들을 모아 전시를 하고 있는데, 눈에 띄는 사진은 별로 없지만 사람들이 어떤 구도로 이 공간을 바라보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을 목적으로 이 공간을 찾는다면 "나올 때" 그 작은 전시공간을 살펴보는 게 좋을 듯.


1933의 역사 :

1933년11월: 사징루10호 건축 완성.
1934년1월: 사징루10호 사용 시작. 상하이 공부국 도살장(
上海工部局宰牲场).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군이 점령하여 시립제일 도살장(
市立第一宰牲场)으로 사용.
1946년: 당시 원동 최대 규모의 도살장으로 시 전체 2/3의 육류를 공급.
1951년-1953년: 상하이 시영 도살장(
上海市营宰牲场)
1953년-1958년: 중국식품수출공사 상하이 도살장(
中国食品出口公司上海宰牲厂)
1958-1969년:
국영 상하이 냉동육 가공공장(国营上海冻肉加工厂)

1970년: 상하이 창청 생화학 제약공장(上海长城生化制药厂)
2002년 사용중지 후 2006년까지 방치.
2006년: 우수 역사건축으로 지정된 뒤 1933 크리에이티브 센터로 개조.

건축명칭: (원) 상하이 공부국 도살장.
건축위치: 훙커우 사징루 10호, 29호.(
虹口区沙泾路 10 号,29号)
건축시기: 1933년
건축사 :
스테이블포드(C.H. Stableford ; 巴尔弗斯)
보호등급: 4급 보호건축(잠정)
건축면적: 약 3.17만 평방미터.
건축층수: 5층 / 철골 콘크리트 구조.

오픈시간: 08:30-22:00
전화번호: 021-6501-1933
홈페이지:
http://www.1933-shanghai.com
약도: 지하철4호선 하이룬루에서 내려, 하이룬루-사징루로 걸어가면 된다.





Posted by lunarog
2009년 4월 17일.

전날 군공로 부두에서 공안에게 걸려 약식심문을 받았던 게 너무 분하기도 했고, 정말로 황포강변을 따라 거의 대부분이 통제구역인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상해 임시정부 90주년 기념 입항식이었다. 슬쩍 소식을 듣긴 했지만 해군이 입항식하는데 내가 가볼 짬냥이 되겠나 하고 신청해볼 생각조차 않았던 것. 복단대 유학생카페에 들어가 보니, "통제구역"이라서 미리 명단을 넘겨야 한다, 그래서 미리 신청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신청을 해놓지는 않았지만(새벽에 학부생 학생회장 깨워서 물어볼 수도 없잖은가!) 마침 날도 맑고 해서 무작정 나가봤다.

뜻밖에 이곳은 민항이 아니라 군항이었다. 지도에서 "양자(扬子)부두"라는 명칭을 찾지 못한 이유도 아마 그래서일 것 같다. 와이탄 북부의 홍구 지역, 즉 황포강과 소주하가 만나는 지점의 북쪽이다. 전략적으로 아주 훌륭한 입지이다. 예전에는 그보다 조금 남쪽에 청의 군대가 진주하고 있었다. 훗날 영국군도 전략적으로 그곳을 선택하고 조계로 만든 곳이다. 조계가 역사적 유물이 되면서 그쪽에 군항을 만들수는 없으니까 그보다 조금 위에 만든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상황에서는 푸동이 마주보이고 와이탄도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이 실제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할 것 같다.

입구에서 해군들이 나를 막아섰지만, 한국 여성분이 신청하지 않아도 한국사람이면 된다면서 여권만 확인하고 들여보내 주었다. 10시 시작인데, 9시 50분에 들어갔다. 늦지 않았을까?

늦지 않았고 마침 배가 들어오는 중이었나 보다. 선착장 바깥에는 상해한국학교 초등학생들만 잔뜩 있고, 대학생은 하나도 없다. 학부생들 시험기간이었거나, 아니면 호텔에서 하는 임정기념식에나 가지 이런 땡볕에 야외는 싫었을 수도..? 하여튼 한국군함은 들어왔고 안쪽에서 꽹과리 치는 소리도 들리는데, 들어갈 수는 없다고 한다. 이름하여 "관계자"만 들여보냈다.


체험학습 나온 것으로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반 별로 기다리고 있다. 상해한국학교 5~6학년 학생들이라고 한다. 배가 들어온 뒤 중국해군과 한국해군 사이에 간단한 환영식(혹은 점검) 같은 게 먼저 있었던 것 같다. 기자나 중국해군들이 다 빠져나온 뒤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배가 다 들어온 뒤 해군 아저씨들이 기념행사 준비에 여력없다. 저 표지를 보고 들어온 배가 강감찬호인 줄 알았다. 말로만 듣던 강감찬호를 처음 본 것이다(라고 써 놓고 보니, 군함이라곤 본적이 없다. 예전 교관후배 따라 해사 들어갔을 때도 모형만 봤던가 그랬다..)


정말 오랫만에 국민의례라는 것을 해봤다. 물론 나는 사진기를 핑계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모습과 배, 강, 푸동, 와이탄을 찍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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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촬영 시간.

어쨌든 지금 상해의 상징은 동방명주이다. 동방명주를 배경으로 나오게 잡아봤다. 태극기와 동방명주의 부조화가 색다른 느낌을 줬지만, 썩 마음에 들게 사진이 나오지는 않았다.


기념행사가 끝난 뒤 (아마도 식당이 좁아서 그런 것 같은데) 반 별로 흩어져서 군함 곳곳을 구경했다. 먼저 식당으로 가는 반에 끼지 못해 쫄쫄 굶으면서 꽤 넓고 깊은 군함을 몇 군데 둘러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함정 양쪽에 설치된 망원경인데, 해군들 안 보는 사이에 슬쩍 자리를 잡고 이리저리 맞춰 보니 뜨아, 이건 뭐 육안으로는 점처럼 보이는 와이탄의 관광객이 바로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다. 푸동 쪽으로 돌려보면 강변 야외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기야 망망대해를 항해하려면 당연히 이 정도 배율의 망원경은 있어야겠지.. 아무리 레이더가 발달하더라도 말이다.


원래는 군함만 둘러보고 그냥 나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배가 너무 고파져 우리반 친구들과 함께 해군식당으로 향했다. 얼마만에 먹어보는 짬밥인가. 식당은 꽤 깨끗하고 스카이까지 달려 있어 한국 테레비도 볼 수 있었다. 메뉴는 비빔밥, 빈 자리가 없어 헤매는데 어떤 꼬마 친구가 가방을 치워주며 앉으라고 했다. 한두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들마저 먼저 가 버리고 나니 혼자서 밥을 먹게 되었다. 느리게 먹는 자의 비애이다. (이등병 때는 3분만에 쑤셔넣기도 했다. 내 인생 최악의 시절이었다..)

빈 자리에서 혼자 먹고 있으니 다른 해군 병사들이 하나둘 앉기 시작했다. 어색어색.. 어색함을 깨려고, 후배가 교관으로 있을 때 해사 가보니 교정이 정말 예쁘더라..부터 시작해서 한두마디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 밥을 먹을 때는 허기만 채우려 했는데, 비비다 보니 너무 많아 곤혹스러웠다. 그런데 먹다보니 이게 또 꽤.. 먹을 만한 수준 정도가 아니라, 맛.있.었.다!
그래서 자리를 뜨기 전, 해군장교에게 "육군 짬밥은 정말 먹기가 곤란한데, 역시 해군은 밥도 다르다. 정말 맛있었다!"라는 예의성 멘트를 날려줬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내 처지를 한탄하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내가 짬밥이 다 맛있겠는가?! 중국에서 내가 이렇게 험하게 살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나중에 이곳저곳 알아보니 해군 짬밥은 정말 맛있다고 한다. 역쉬 영국귀족의 전통을 이은 군대는 뭐가 달라도 다른 것! 암튼 해군식당에서 먹은 비빔밥은 정말 뜻밖의 감동이었다. *^^*
 
나서기 전 이 군항에서 찍을 수 있는 와이탄의 모습과 푸동의 전경을 몇 컷 찍고 강감찬호도 여러 각도에서 찍고 있는데. 갑자기 "밥을 같이 먹은 인연"을 앞세우며 친구들이 뛰어 들어왔다. 미안~ 광각 밖에 없어서 너희들 인물사진을 갑자기 찍을 수가 없었어용~~

이렇게 하여 사흘에 걸친 와이탄 이외의 황포강 보기, 혹은 항구 보기 프로젝트가 끝났다. 사실은 와이탄 지역만 본 것이나 다름 없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각도에서 푸동과 와이탄을 볼 수 있었다는 점 말고는 건진 게 별로 없는 셈이다. 그래도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의 와이탄을 거닐다가 점심때까지 군함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4기가 메모리를 가득 채우고 카메라 밧데리가 방전될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정작 입항식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별로 담지 못했다. 행사 자체가 너무 관방 느낌이 나는 딱딱한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쨌든 영사관, 한인상회, 해군관계자 등이 아닌 일반인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행사로 기획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해군 군함에 올랐던 것은 나름대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해군 병사들은 오랫만에 육지를 밟는 것이어선지 약간의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상해 어디를 돌아보고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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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이탄에 새로 설치될 광장

 

 앞에서도 말했듯이 와이탄은 상해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1945년 영국에 의한 개항 이전에도 물론 상해라는 지명이 존재했지만, 중국 전체에서 그 존재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광주(광저우)가 있고, 복건의 하문(샤먼)이 있고, 바로 옆에 절강의 영파(닝뽀)처럼 바다에서 바로 들어올 수 있는 항구가 있는데 상해가 왜 필요했겠는가? 영국이 전략적 필요에 의해 이곳을 요구했고, 영국의 조계지가 만들어졌고, 그러다가 중국 근대화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고, 그래서 현재의 상하이도 있는 것이다. 그 상징적인 곳이 바로 와이탄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30년대의 상하이

 

지금 우리가 와이탄이라고 말하는 곳의 상당부분은 영국조계지의 동쪽 경계인 황포강변을 말한다. 항상 강물이 넘쳐 질퍽거리던 곳에 둑을 만들고(그래서 bund이다.) 그 안쪽에 건물을 세웠다. 와이탄은 항구의 역할과 함께 서양인들이 한적한 저녁에 산책을 즐기는 공간으로도 활용이 되었다.(와이탄 산보객(外灘客; bunders)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항구의 역할은 거의 사라졌고(와이탄 남쪽의 "16포"는 여전히 항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예전 닝뽀에서 배를 타고 왔을 때 여기에서 내렸다.), 산책의 공간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다만 거주자의 산책이 아니라 관광객과 호객꾼의 산책만 남아 있다.

 

그래서 관광객과 호객꾼들에게 보다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주요 목적은 2010년 엑스포 대비용이다.) 그에 앞서 10차선이던 와이탄 앞 지상도로(중산동일로)를 4차선만 남기고 지하로 옮기는 공사를 진행한다. 넓어진 지상 공간을 활용하여 주요 거점 4곳에 광장을 설치하게 된다.

 

와이탄 광장공사 전체 평면도. 광장이 추가되었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원래의 황포강 연안 산책로도 구간에 따라 상당히 많이 넓혀지며, 비스듬히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비탈길도 확장했다.


 

1. 왼쪽에서부터 보면, 와이바이두 다리를 건너 소주하를 넘어 오면 황포공원(黄浦公园)이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출입구가 따로 있고 입장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서쪽 입구에 있던 대문과 담장을 헐고 그 앞을 터 황포공원과 광장을 연결시키게 된다. 황포공원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와이탄의 기점 역할을 다시 제대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황포공원(원래 명칭은 "공가화원(public garden)", 혹은 와이탄공원)은 예전의 잘못된 소문이지만 많은 중국인들이 민족적 수치로 생각하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팻말로 유명하던 곳이었다. 상해의 제국주의적 기운을 누르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민족적 자존심을 좀 세우려는 것인지, 지금은 창처럼 뾰족하게 인민영웅기념탑이 설치되어 있다(소주하와 황포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원의 중심부가 탑이다). 이제는 이소룡의 분노한 발치기로 그 팻말을 뽀개지 않아도(정무문), 개와 중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확장된 남경로 입구의 "천이광장". 인민해방군 창건자의 한 사람인 "천이"는 해방 후 상해 초대 시장을 역임했다.

 

2. 남경로(南京路) 입구에 있던 천이광장(陈毅广场)은 지금보다 규모를 더욱 확장하게 된다. 원래 남경로 입구는 예전 영국조계 시절부터 각종 기념행사의 주요한 공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도로를 잘 살펴보면, 고속주행 자동차는 지하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지상에는 버스 등 공공교통 수단 및 이 곳을 방문하는 차량 위주로 운행되며, 4차선 좌우에 여유차선을 만들어 임시주차, 버스 정류장 등으로 이용할 계획이다.(위 그림처럼 아무런 경계가 없다면 차선 없는 일반도로가 되어버릴 위험성이 80% 이상이라고 본다. ^^) 또한 건물 쪽 인도의 폭도 지금보다 넓게 확장하여 와이탄의 이름난 건축물들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할 예정이라고 한다.

 

 

 

3. 복주로(福州路) 입구에는 중간 정도 높이로 경축광장(节庆广场)이 들어선다. 이곳에서는 와이탄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적절한 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고, 각종 기념일, 경축 관련 행사(节庆活动)를 진행하는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지금은 이 지점에 임시로 지어진 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4. 연안로(延安路) 입구에는 기상대(信号台)를 중심으로 하는 광장이 들어서 와이탄의 역사적 변천을 보여준다. 연안 고가도로를 철거한 이유도 이 광장을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연안로는 영국조계지의 남쪽 경계로, 원래 "양징방"이라는 운하였다. 중서의 경계였기 때문에 "양징방"이 조계를 대신하는 말이 되기도 했다. 상업적인 용도의 피진(pidgin; business의 중국적 발음) 영어를 "양징방 영어"라고 했던 것도 한때 이곳이 중서 교역의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양징방이 오물로 더러워지고 보다 넓은 도로가 요구되면서 메워져 현재의 연안동로가 되었다.(상해의 주요도로 중 이렇게 운하였던 곳이 많다.)

 

경계의 역할을 했던 것이 기상대이다. 1884년에 처음 만들어진 후 몇 번의 재공사를 거친 뒤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와이탄이 부두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진입하는 선박들에게 적절한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는데, 현재는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연안고가도로를 철거하기 전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상대 위쪽 전망대를 이용하려 했는데, 레스토랑 쪽에서 레스토랑 최소 소비액을 요구하거나 전망대 관람료를 따로 받아 시정조치를 받기도 했다. 고가가 사라진 후 저 위치, 저 높이에서 와이탄의 전망을 제공하는 곳이 기상대 뿐인 셈이라 한몫 제대로 잡을 수도 있겠다 싶었을 거다. 그것도 연안고가 철거 직전에나 가능했지, 공사가 진행중인 지금은 죽을 맛일 거다. 도대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지 않은가.(들어갈 수나 있는지, 영업은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저 난리법석인 곳이 위의 조감도처럼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와이탄의 옛 사진을 보면 상당히 정겹기도 하고 소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한쪽에 벤치를 놓고 산책 중간에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가 하면, 시대에 따라서는 전차, 자동차와 배, 사람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는 그런 곳이기도 했다. 어쨋든 그 시절과는 다른 기능이 지금은 요구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너무 미끈하고 인공적인 냄새가 풍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사에 전체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지하도로를 건설할 때, 그리고 지하로 자동차가 달릴 때의 진동 같은 게 이 지역의 건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에 대해 조금 더 면밀한 조사가 진행되어 안전하다는 판단 하에 했다면, 지상은 조금 더 여유로운 공간이 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물론 아무리 넓혀 놓아도 이곳은 항상 사람들로 득실거릴 테지만 말이다.

 

 

출처:  http://sh.eastday.com/qtmt/20080528/u1a433541.html

1. 이미지는 모두 위 링크에서 가져왔으며, 기사는 광장에 관련된 몇 부분만 참고하였다.

2. 위 링크에 들어가면 보다 큰 사이즈의 그림을 다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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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이탄 지하도로 건설

 

요즘 와이탄을 가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온통 먼지투성이에 뭔가 공사를 한창 하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와이탄 남쪽 끝에 위치한 연안고가도로가 철거되었다는 점, 그리고 북쪽으로는 와이바이두 다리가 해체되었다는 점이다. 와이바이두 다리는 원래도 대부분의 교통량은 우숭루자 다리(吴淞路闸桥)가 담당하고 있었다. 이 다리의 흉물스러움이라니. 교통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상징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와이바이두 다리를 포함한 쑤저우허-황푸강 접경의 경관을 망쳐 놓고 있었다. 지금 진행중인 공사는 이들을 포함한 와이탄 전체를 지하도로로 잇고, 지상은 와이탄을 가로지르는 10차선의 중산동일로를 4차선으로 축소, 나머지 공간을 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즉 교통은 지하로 돌리고, 지상은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이다.


"와이탄"이 상하이의 얼굴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상하이에 여행 와서 와이탄을 보고 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공사가 완공되면 우리 위대한 관광객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할 것이다, 분명.

 

와이탄에 건설중인 자동차 전용 지하도로

 

 위의 그림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이 지하도로는 상하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위층은 남북 방향, 아래층은 북남 방향의 승용차들이 다니게 된다.(지도의 좌측이 남쪽, 우측이 북쪽이다.) 남쪽의 기점은 중산난루(中山南路) 라오타이핑롱(老太平弄), 그리고 옌안둥루(延安东路) 허난중루(河南中路)의 두 지점에서 시작하고, 북쪽은 우숭루(吴淞路) 하이닝루(海宁路), 둥창지루(东长治路) 뤼순루(旅顺路)에서 시작한다.(두 개의 길 이름을 말한 것은 교차로를 표시한 것이다.) 전체 길이는 약 3720미터, 지하도로의 길이는 약3300에 이른다고 한다. 지하도로 내부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둥먼루(东门路)에서 옌안둥루(延安东路)는 쌍방향 4차선에 긴급정차구역이 있고, 옌안둥루(延安东路)에서 톈퉁루(天潼路)까지는 쌍방향 6차선, 톈퉁루(天潼路)에서 위항루(余杭路)는 쌍방향 4차선, 옌안둥루 지하교차로는 쌍방향4차선, 창즈루(长治路) 지하교차로가 쌍방향 4차선이다. 대체로 각 입구는 4차선으로 시작하되, 차량이 증가하는 와이탄의 지하쪽은 6차선으로 설계했다고 보면 되겠다.

 

 (옌안둥루의 고가가 와이탄으로 이어지고 있다. 10년 전 만들어질 때만 해도 "아시아 제1만(亚洲第一弯)"이라 불리며 그 "현대화"된 모습에 많은 상해 사람들이 열광했다 한다.(m.i.3에서도 잠깐 등장)

 

지금까지도 와이탄 앞을 지나는 중산둥일로는 많은 교통량을 담당하는 주요도로였는데, 그 대부분의 차량이 와이탄을 방문할 목적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차량이었다.(70-80%를 점한다.) 그것이 와이탄의 역사적 건축물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 문제는 그 해결방안(?)으로 지하를 뚫는다면 공사 자체가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33개의 우수 역사보호건축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인가 라는 점이다. 더하여 시공구간에 와이바이두 다리, 지하철 2호선, 옌안루 터널 등 이미 여러 시설이 교차하고 있어 시공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상하이는 암반이 없고 모래땅으로 이뤄져 있다(전형적연토지질(软土地质)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일부 해외 전문가들은 이러한 지질 조건에서 터널 등 지하 공사를 하는 건 두부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공사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상하이 와이탄 지역 교통종합개조공정 건설지휘부의 한진화(韩金华)는 역사건축물의 기존 구조 및 침강상황 등에 대해 전면적인 실측이 행해졌고, 위험수치를 체크하여 위험도를 최소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푸저우루(福州路)를 경계로 그 남쪽으로는 지면에서 굴착해 들어가지만, 북쪽은 13.95m의 盾构掘进 방식으로 시공한다고 한다. (이 말이 궁금하여 좀 찾아보니, 盾构는 실드머신(Shield Machines)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기계를 활용하여 터널을 굴착하는 방식을 TBM(Tunnel Boring Machine)공법이라고 한다. 이 공법은 무진동, 무발파의 기계화 굴착이므로, 소음, 진동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한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위 링크를 따라갈 것.)

 

중국에서는 이미 TBM 공법이 꽤 많이 사용되고 있다. 2007년 3월 신문에 따르면 베이징 지하철 4호선은 이 공법을 사용하여 1100m를 굴착하여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는 상하이 지하철 11호선 시공 장면이다.

상하이 지하철11호선 盾构掘进

 

암튼 시공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에서 말한 공법을 쓰면 건축물에 대한 피해는 걱정을 좀 줄여도 될 듯하다.

 

이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영국조계에서 길을 건너 와이탄 쪽으로 들어가려면 원래 있던 베이징루와 난징루의 지하도로를 이용하거나, 푸저우루에 임시로 설치된 육교를 이용할 수 있다. (꽤나 흉물스러운 이 육교는 그러나 적당한 높이에서 해관 등 와이탄 북쪽 건물을 찍을 수 있는 좋은 시야를 가져다 준다.)원래 있던 옌안동루의 육교와 사진에 표시된 진링둥루(金陵東路)의 육교는 철거되었다.

 

푸저우루에 새로 설치된 육교에서 내려다 본 해관(시계탑) 근처 도로 모습


이 지하도로는 엑스포 직전인 2010년 3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http://news.sina.com.cn/c/2008-02-06/021514910065.shtml

http://jfdaily.eastday.com/eastday/jfsy/j/20080229/u1a405871.html


 (이 글의 지하도로 관련 정보는 대부분 위의 중국어 기사에서, 공사가 건물에 미칠 영향에 대한 것은 아래 기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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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ㅣ계>는 1940년대 상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기에 그 시절의 상해 모습을 언뜻 살필 수 있다. 와이탄이나 프랑스 조계 등 비교적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들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사는 운하 옆 허름한 집 같은 경우 주변의 소도시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미션 임파서블3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부에서 알려주는 지도로 볼 때 와이탄에서 북쪽으로 홍구로 넘어가는 장면이어야 하는데, 그 장면은 상해가 아닌 시탕(西塘)에서 촬영되었다. 현대화된 상해(푸동, 와이탄) 뿐 아니라 전통적인 가옥이 늘어선 시탕의 이미지가 중국이란 표상을 외국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정도로 이해해야 되겠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톰 크루즈가 달려갔다면, 아래 지도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 다리를 넘어가야 했을 것이다.)

<색ㅣ계>에서 이 장면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여주인공 왕자즈는 이 선생에게 점점 마음이 기우는 한편 빨리 암살기회를 노리라는 독촉을 함께 받는다. 이때 이 선생이 불러 이 다리를 넘어 홍구(虹口)로 건너간다. 이 다리는 즉 영국조계지인 와이탄에서 일본조계지라 할 수 있을 홍구로 넘어가는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리를 지나면서 왕자즈의 마음 또한 어느 한쪽으로 넘어간다.

10월1일 국경절을 맞아 오랫만에 와이탄에 나갔다가 일행과 헤어져 와이탄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와이탄을 따라 나 있는 중산동일로는 공사 중이라 먼지가 자욱했다. 오랫만에 쑤저우허를 따라 올라가면서 골목길을 쏘다닐 셈이었다. 그 전에 와이바이두 다리만 건너면 있는 푸장호텔에 가서 화장실을 쓸 생각이었다. 이 호텔은 상해 최초의 호텔인 리차드 호텔(1846년)을 이전 개축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건물(1907년)도 꽤 보존가치가 있고 내부도 고풍스러운 맛이 남아 있다. 2005년(?)까지는 여행객을 위한 저렴한 방도 제공되었으나, 이후 상해시 보호문물인가가 되고부터 방값이 대폭 올라버렸다. 투숙은 못하지만 급한 볼일은 볼 수 있겠지.

 

그런데, 길은 다른 곳으로만 뚫려 있고 와이바이두 쪽은 공사장 철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이 때만 해도 사태파악을 못하고 건너편에 있는 브로드웨이 빌딩(上海大厦, 현재broadway mansions hotel)과 푸장 호텔(浦江饭店; Astor House Hotel), 러시아 영사관 등을 찍기 위해 살짝 열린 철문 사이로 들어갔다. 뭔가 이상한데 하면서도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상해는 워낙 공사중인 곳이 많아 뭐 또 새로운 건물 하나가 들어서나 보다 생각했을 뿐. 뒤돌아서 나온 후 우회도로를 따라 다른 다리로 가서야 이 다리가 사라진 것을 눈치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와이바이두 교 옆에 있는 고가도로(吴淞路闸桥)를 철거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아래 사진처럼 고가도로만 남아 있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정보를 확인해 본다.

 

확인 결과 설계 당시 50년 수명이었던 이 다리는 100년을 잘 견딘 후 2008년 3월 1일부터 통행금지, 4월 7일 해체한 후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와이탄 등지의 건물에 적용하고 있는 "옛 것을 옛 모습 그대로 고친다(修旧如旧)" 라는 원칙에 따라 와이바이두 다리도 다시 50년의 수명을 얻게 될 것이다. 아마도 내년(2009년) 1월 15일 수위가 올라갈 때 원래 위치를 되찾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와 동시에 진행되는 공사가 와이탄 앞의 도로(중산동1로)를 정비하여 와이탄에 보행도로를 넓히고 광장을 신축하는 계획이다. 와이탄 앞 도로가 지금 먼지를 날리는 이유가 바로 이 공사 때문이다. 와이탄 남쪽의 연안고가를 철거했고, 북쪽의 와이바이두 다리도 철거했다. 와이탄이 현재 처리하는 교통량이 엄청난데, 그것을 모두 지하로 옮기고 지상은 최소한의 도로만 남겨둔 채 공원화하는 계획인 것이다. 일단 지하를 달려야 하는 차량들은 조금 괴롭겠지만, 상해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와이탄은 자동차의 방해를 덜 받고 훨씬 넓고 쾌적하게 둘러볼 수 있을 것이다.(와이탄의 광장 조성 계획은 추후에 포스팅 예정)

 

 

아래는 내가 놓친 다리의 해체작업에 관한 사진을 찾아 옮겨 놓는다.

 

저수위일 때 운반선이 다리 밑으로 들어간다. 운하 위쪽에서 물을 방류하여 수위를 높이고, 운반선에서는 내부의 물을 배출하여 운반선이 다리에 닿게 한다. 그 다음은 그림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각 그림에 대한 중국어 설명을 번역한 게 아니라, 다른 신문 등의 내용을 뭉뜽그려 간단히 설명한 것임). 다리는 현재 민성루 부두(民生路码头)로 옮겨져 수리 중이다.

 

 

다리가 사라지기 전 모습은 아래와 같다. 와이탄(황포공원)에서 홍구쪽을 바라보는 모습과, 그 대각선 위치에서 푸동쪽을 바라볼 때 와이바이두 다리 모습이다.

 

사실 이렇게 흉물스러운 쇳덩어리 다리가 하나의 상징이 될 수 있는 것도 상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중국" 하면 떠오르는 아치형의 자그마한 다리의 운치도 없고, 건너편 푸동의 동방명주와 어울릴 법한 현대적인 맴시도 없다. 우리나라였다면 6.25로 폭파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70년대 정도에 철거되어 이상하게 촌스러운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을 것이란 상상도 해본다. 허허벌판이던 푸동은 완전히 최첨단으로, 황포강 서쪽 포서는 될 수 있으면 옛 모습 그대로, 이것이 상해 도시관리의 기본정책이다. 어쨌든 상해 토박이에게 이 다리는 아주 각별한 것이라, 철거 직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된다 하더라도 자기 기억에 있는 그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뜻일 것이다.

 

다음에 시간이 되면 와이바이두 다리의 옛 이야기를 올려볼까 한다..

 

쑤저우허의 33개 다리: http://www.news365.com.cn/wxpd/sh/mjsh/200804/t20080421_1841590.htm
모형: http://www.modtoy.com/index.php?gOo=article_details.dwt&articleid=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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