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저는 손님들이 오면 이곳에 잠깐 올라갔다 오곤 합니다. 상해에서 야경을 보기에 여기보다 편한 곳은 없으니까요. 푸동의 전망대도 멋지긴 하지만 비싸고 항상 사람들이 많죠. 잠깐 다니러 오신 분들이 "아~ 여기가 상해구나!"라는 느낌을 받고 싶다면 이곳에서 강바람 쐬면서 맥주 한잔 하는 게 제일 적당하죠. 이미 많은 분들에게 알려져 있어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른쪽에  강변과 도로 사이에 삐쭉 튀어나와 있는 기상대 안쪽이 연안동로입니다. 이곳을 기점으로 왼쪽 끝(소주하)에 있는 영국대사관까지 번지가 매겨집니다. 그래서 뉴하이츠가 있는 건물이 "와이탄3호"라고 불리는 거죠. 연안동로는 예전에 "양징방"이란 이름의 운하였고, 중국과 영국 조계의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조계가 생기기 전까지 중국과 서양상인의 교역이 가장 활발해서 "양징방 영어"(피진 잉글리쉬)라는 용어가 생겨난 곳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 고가도로가 있었는데 이제 철거했네요. 교통 유입량도 좀 줄이고 조계 경관도 살리고..

엑스포를 대비하며 와이탄 확장공사를 했는데요, 공사기간 동안은 먼지도 많고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적절한 방향으로 된 것 같아요. 예전 12차선 도로를 4차선만 남기고 모두 지하로 옮겨 버렸죠. 덕분에 지상 공간이 많이 넓어졌네요. 와이탄이 넓어지고 앉아서 쉬엄쉬엄 노닥거릴 공간도 많아졌어요. 언제나 사람이 많지만 남경로 쪽만 피하면 산책할 만합니다.

이곳이 전망이 좋은 이유는 활처럼 휘어 있는 황포강/와이탄의 오른쪽 끝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 건너 푸동이 한눈에 들어오고, 또 왼쪽편에 있는 와이탄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요.

광동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와이탄5호도 전망이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5호에 있는 M on  the bund는 밤에 가면 식사를 해야 입장이 가능한 것 같더군요. 가볍게 술 한잔 하겠다고 하면 위층에 있는 글래머 바로 올려보냅니다. 낮에는 테라스 쪽으로 가서 커피 한잔 먹겠다고 해도 들여보내 줍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밤에는 와이탄 3호의 뉴 하이츠에서 맥주 한잔, 오후에는 와이탄5호의 엠 온더 번드에서 커피 한잔을 추천합니다. 물론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식사를 하셔도 좋을 듯하네요. 뉴하이츠에도 왼쪽 테라스는 식사손님용인 것 같더군요.


에어컨 빵빵한 실내보다 조금 습하긴 해도 테라스 쪽이 더 시원해요. 장대비가 아니면 비가 조금 뿌릴 때도 나와서 먹는 게 더 좋더군요. 어차피 상해에서 축축한 여름밤의 공기를 피할 곳은 없으니까요..

http://www.threeonthebund.com/#

*엑스포 기간이라서 그런지 요즘 11시 30분까지 조명이 켜져 있더군요. 보통은 11시까지.
11시 30분이 되면 와이탄 쪽 건물들이 하나씩 불이 꺼지고, 건너편 푸동의 고층건물들도 조명을 꺼버립니다. 상해도 "불야성"은 아닌가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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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는 고층건물은 수없이 많지만 지하로 깊이 파고 들어간 건물은 별로 없습니다.
모래땅이거나 퇴적층이라서 조금만 파 들어가면 물이 나옵니다. (게다가 상해라는 땅 자체가 바다보다 낮습니다.) 지하로 내려갈 공사비로 몇 층 더 올리는 게 유리한 셈이죠. 따라서 옛날부터 옥탑방(亭子間)은 있어도 반지하는 없었나 봅니다. 물론 초고층 빌딩이나 대형상가를 지을 때는 기본적으로 지하로 좀 파고들긴 할 겁니다. 안 그랬다간 얼마전 막 옮겨심은 나무가 쓰러지듯 그대로 반듯하게 넘어간 어느 아파트 꼴 나겠죠?



비오기 직전이어서인지 파란 하늘에 구름이 이쁘게 낀 선선한 날에 자전거를 타고 조금 돌았습니다.

지난번 다녀온 서산(佘山)에서 조금 더 나가 천마산(天馬山)이란 곳까지 갔습니다. 알고보니 상해 근교에 "운간구봉(云间九峰)"이란 이름으로 아홉 개의 산이 있나 봅니다. 상해쪽은 구름이 참으로 낮게 내려오나 봅니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아홉 봉우리라니요! 제일 높다는 천마산이 고작 해발 99.8미터입니다. 실제로 지면에서 보면 어릴 적 소 먹이러 다니던 우리 동네 뒷산보다 낮습니다. 역시나 자전거 때문에 산 위로 올라가 보지는 못했네요. 천마산 위로 기울어진 탑이 보입니다. 이것도 이 근교에서는 나름 유명한 사탑이라고 합니다.

같이 간 중국 친구가 산을 깎아 만든 구덩이 이야기를 합니다. 원래는 산이었는데 채석을 한 끝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고 말하더군요. 별다른 명칭은 없고 그냥 "천마산심갱(天马山深坑)"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지도에도 없고 위성사진도 이쪽 일대는 그다지 정밀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미리 알고 가기 힘듭니다.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적어서, 천마산 일대에서 물어봐도 모르는 사람이 많더군요. 살짝 동네로 더 들어가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대략의 방향은 가리켜 줍니다.

어쨌든 물어물어 횡산(横山)이라는 나트막한 동산 부근에서 어떤 촌로에게 위치를 알게 됩니다.
저는 산을 깎았다고 해서 백록담이나 천지처럼 산의 외형은 남아 있고 그 속에 거대한 분화구가 있는 모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촌로가 가리킨 곳에는 그냥 나트막한 콘크리트 담장이 하나 보일 뿐 허허벌판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그 담장을 뛰어올라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다음과 같은 풍경이 펼쳐지더군요.





깊이는 대략 100미터, 길이가 240미터, 폭이 160미터라고 합니다. 보통은 20미터 정도 깊이의 물이 차 있구요. 요즘은 자전거 탈 때 사진기를 안 들고 다니는데, 정말 후회가 되더군요. 뭐, 들고 갔어도 광각이 없어 제대로 담지 못했겠지만요. 중국친구가 찍은 사진도 직접 눈으로 볼 때의 웅장함을 충분히 담지 못했어요. 담장 위에서 내려다보면 머리가 아찔해졌습니다. 약간 압도된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채석할 때 사용된 듯한 계단이 비스듬이 보이고, 다른 쪽 모서리에선 까마득히 어떤 사람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건데 물이 꽤 많이 차 있습니다. 인터넷에도 적당한 사진이 없군요.
(아마도 우기에 잠깐 물이 불어난 것은 아닌 듯. 비 좀 온다고 불고 줄고 할 규모가 아님. 사진에서 드러난 주변환경을 따져보건데 훨씬 옛날 사진이고, 이 "호수"를 다른 식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이 있는 최근에 물을 퍼낸 게 아닐까 사료됨) 

아래 사진은 예전 사진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조감도일 것 같기도 하네요. 잘 모르겠어요. 주변에 못 보던 건물이 가득한데,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구덩이 주위의 건물은 거의 철거된 듯합니다. 아무튼 구덩이를 위에서 조감하면 대충 이런 모양이 나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조금 뒤져 보니 원래 채석장이었던 이 곳은 몇 십년째 버려져 쓰레기장 비슷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렇게 깊게 파내려 갔는데 사방이 암반이라 빠져나갈 곳이 없으니 당연히 물이 고였을 거고, 온갖 폐수로 썩어갔겠죠. 상해 시내에서 아무리 파내려 가도 돌맹이나 암반층은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상해라고 불리는 땅의 대부분은 원래 바다였으니까요. 나트막한 산이 있던 이 곳은 그래도 대륙의 일부였나 봅니다. 이 곳에 어떤 채석장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명칭도 없습니다. 다만 산 하나가 사라지고 그 곳의 골재는 어느 건물의 일부가 되었겠죠.

아무튼 원래 산이었던 곳을 파서 평평하게 한 것에 그친 게 아니라, 원래의 산보다 더 깊게 파내려 간 대륙의 기상에 놀랄 따름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놀랄 게 남아 있습니다.

원래 유명한 지역도 아니었고 볼 것도 별로 없었으니 십여 년째 잊혀져 있다가 얼마 전 우연히 누군가의 눈에 띄었나 봅니다. 우리가 들어간 입구 쪽에 관리 사무소 비슷한 게 있어서 보니, 이 곳에 2010 말 준공 예정으로 지상2층, 지하17층, 수면 아래로 2층 규모의 5성급 호텔이 들어선다는 포스터가 눈에 뜨입니다.

지상2층에는 대충 프론터, 식당, 회의실 등의 역할만 하고, 400여 개의 객실을 수면 위 17층에, 수면 아래 1층(18층)은 물밑을 보면서 쉴 수 있는 식당과 커피숍 등이, 가장 낮은 19층에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总统套房)까지 갖춘다고 합니다. 인공폭포도 빠질 수 없지요. 넓게 펼쳐진 호수(?)에서는 수상 스포츠도 즐길 수 있게 하구요. 아무튼 물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하겠습니다.

(전후맥락에 약간 찜찜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런 걸 생략하고 보면) 발상 자체는 상당히 기발합니다. 완공되면 아마도 굉장히 독특한 호텔로 소개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주위에 오락시설과 쇼핑몰이 들어서, 천마산 서비스 단지(天马山现代服务业集聚区)의 한 중심을 이룬다고 하네요. 상해가 크고 넓어질수록 그 주변의 한적한 시골들이 모두 관광지로 변해갈 것 같습니다. 아마도 상해에서 소주까지 비는 곳 없이 가득 차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호텔이 완공되면 해발 -6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혹은 깊은) 호텔이 된다고 합니다. 이로써 중국은 세계 최고를 하나 더하게 되겠군요.

참고링크:
http://www.ehomeday.com/news/2007-10/2007101684817.htm
http://www.xcar.com.cn/bbs/viewthread.php?tid=5734337
http://blog.sina.com.cn/s/blog_4cd02152010097eq.html

혹시나 해서 위치확인 삼아 구글어쓰를 함 돌려봅니다. (예전에 구글어쓰 초창기에 시험삼아 써보고 처음 돌려보네요. ^^)
위치를 알고 봐야 정확하게 짚을 수 있지만 나오긴 하는군요. 검색창에 "天马山深坑"(유사검색어: 天马深坑, 天马山采石坑, 天马采石坑, 横山坑)을 치면 바로 뜨지만, "구덩이"가 아니라 호수처럼 나옵니다. 위에 검색해 둔 옛날 사진보다 물이 더 많았나 봅니다. 저는 4.2 버전을 사용했는데, 아마 최근 버전에서는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화면을 살짝 눕혀도 구덩이가 깊이로 표시되지 않고 호수처럼 표시됩니다. 광활한 평야 저 멀리 야트막한 천마산이 보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동한 경로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대략 54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제법 크게 보입니다.)

혹시나 해서 버스노선을 써 둡니다.

坐车路线如下:万体沪淞线直达松江乐都路车站,然后站内转松天线横山下。逛完大坑后再坐松天线去天马山,山上可露营。天马山沪佘昆线约1个半小时后可返回。
Posted by lunarog
선배 하나와 후배 하나가 상해에 왔다.
여러 번 다녀가기도 했던 분들이라 잠깐 만나서 점심이나 먹는 정도로 헤어졌다. 바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번거럽고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 같은 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먼저 연락도 하지 않는 건 좀 섭섭했다. 귀찮다고 너스레를 떨긴 하지만, 우리도 그런 기회에나 한번씩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에서 관광객이 되어 보는 것 아니겠나.

아무튼. 일행들과 복주로(푸저우로)의 오래된 광동식 식당, 행화루(싱화러우; 杏花樓)에서 딤섬 위주의 점심을 먹고도 왠지 좀 아쉬워 간단히 커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간단히"라고 하길래 근처에서 대충 마시려다, "그래도 분위기 좀 좋은데 없냐?"고 덧붙이길래 이곳이 생각났다.

M on the bund!

저녁 시간에는 식사 위주인데(바로 위층에 칵테일과 맥주 등이 구비된 글래머 바로 술손님을 유도한다.) 밥시간이 아닌 한가한 오후에는 차를 마시며 와이탄과 푸동을 조망할 수 있다.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야외 테라스에서 수다를 떨었다. 날씨는 흐렸지만 몇 주째 내린 비 때문인지 시야는 트여 있었다. 솔직히 상해 있으면서 이렇게 가시거리가 긴 날은 몇번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엑스포 전까지 와이탄 앞 도로와 광장 조성을 끝내기 위해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라 온통 헤집어 놓고 있다.
(관련 포스팅: 상하이 와이탄 광장공사 1 - 지하도로 , 상하이 와이탄 광장공사 2 - 넓어지는 와이탄)


예전 포스팅에도 설명했듯이 크레인 아래에서 시작해 지하로 도로를 내고 지상공간은 차도를 축소하고 광장을 넓히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대충 둘러보고 나니 이쁘게 커피가 나왔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시켰는데, 솔직히 커피맛은 별루였다. 어차피 자리세. 옛 건물에서 와이탄을 내려다 보며 수다 떠는 재미로 왔고, 충분히 제 값을 했다.

야외에서 마시다가 비가 한두 방울 떨어져 실내로 들어왔다. 실내 분위기는 대충 아래와 같다... 금요일 오후여서 한가롭고 조용해서 좋았다.

와이탄 야경을 보면서 식사를 하거나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할 생각이라면 옆 건물인 New Heights와 함께 M on the bund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론리 플래닛 같은 여행책자에 잘 소개되어 있어 저녁시간은 항상 사람들로 붐비긴 한다.  홍콩 M on the Fringe는 20주년, 상해는 10주년, 그리고 올 9월에 북경에 새로운 지점이 생긴다고 한다. 10년 단위로 북진을 해 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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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땟놈”이라는 말에서 잘 씻지도 않는 지저분한 중국인을 연상하곤 한다. 물론 “땟놈”의 “때”는 몸에 낀 때와는 상관없는 말이지만,[각주:1] 요즘도 상하이 등 대도시의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중국인들이 외모에 많이 신경쓰지 않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사천 사람들은 태어날 때 한 번, 죽을 때 한 번 목욕한다(蜀人生時一浴, 死時一浴)”라는 속담이 전해졌겠는가.

그런데 중국 전체로 볼 때 내륙 지방에 해당하는 북부와 서부는 목욕을 즐기지 않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지만, 습하고 물이 많은 동남부 지역의 사람들은 제법 목욕을 즐겨 독특한 목욕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13세기 항주에 목욕탕이 3천 개나 있었으며 한꺼번에 100명이 목욕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뻥이 좀 세긴 하지만, 어쨌든 그 시절 중국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대중목욕탕이 존재했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목욕탕은 언제쯤 시작된 것일까?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이나마 당시 목욕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재미난 그림이 있다.

(아시겠지만 제 블로그의 모든 이미지는 누르면 제법 커집니다..)
"화재가 발생한 목욕탕", <점석재화보>, 1886년

이 그림신문은 소주의 한 목욕탕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을 다룬 것이다. 주인의 부주의로 발생한 화재인지 옆집 꼬맹이가 불장난한 게 옮겨 붙은 것인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아무튼 한밤중에 느긋이 목욕을 즐기던 손님들이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우르르 뛰쳐나오는 모습이 생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목욕탕 자체에 대한 기사가 아니어서 이 당시 목욕탕 내부가 어떠했는지 이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출입구와 욕실 입구를 조망하는 위치에서 제시되어 당시에도 출입구 바로 왼쪽에 있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 후 탈의실을 통과하여 욕실로 들어가는 구조인 것은 알 수 있다.

문자로 제시된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하자면 우선 이 목욕탕의 상호는 “홍복원(鴻福園)”이다. 오른쪽 상단의 문 위에는 “낙지(樂池)”라는 팻말이 붙은 것으로 봐서 이 목욕탕에는 “지탕(池湯; 즉 공동욕조)”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탈의실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내부에 위치한 욕실로 들어간다. (지탕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중앙에 있는 “난방(暖房)”이라고 쓰여진 공간은 정확하진 않지만, 도구를 챙겨서 뛰어나오는 사환들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봐서 보일러실을 겸한 사환들의 작업장인 것으로 보인다. 수면실이나 찜질방의 기능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관련자료가 보충되어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어쨌든 그림으로 봐서 화재의 근원지가 난방 쪽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림 오른쪽 하단부에 위치한 탈의실이다. 화재를 피하려는 사람들과 옷이 널브러져 있지만, 탈의실에는 오늘날 캐비넛의 기능을 하는 상자가 있고 그 앞에 길쭉한 의자가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옷을 챙겨가지 못했는지 왼쪽에서 두 번째 상자에는 신발에 천까지 잘 씌워져 있다. 평소 같았으면 의복은 가지런히 개어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발을 상자 위에 올려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목욕을 끝낸 후 의관을 정제하면서 이 의자에 앉아 차라도 한잔 하거나 담배를 한 모금 빨았을 수도 있겠다.

다행히 왼쪽 중앙에 보이는 바깥문으로 “태평양룡(太平洋龍)”이라는 깃발을 든 소방수들이 몰려오는 것으로 봐서 이 화재는 곧 진압이 되었을 것이다.


근대 시기 상하이의 목욕탕은 공동욕조가 설치되어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지탕(池湯)”과 개인 욕조가 설치된 일인용 욕실인 “분탕(盆湯)”의 두 종류로 나뉜다. 지탕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기 때문에 병균에 감염될 우려가 많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은 분탕(盆湯)을 선호하였다. 분탕盆湯에는 양분(洋盆), 관분(官盆), 객분(客盆)의 세 종류가 있고, 어떤 곳에는 거대한 “양분(洋盆)”에 샤워기(蓮篷管)가 설치되어 있어 샤워도 할 수 있었다. 여름에는 선풍기, 겨울에는 화로가 갖춰졌고 인테리어도 훌륭하였다. 한 사람씩 들어가게 되는 특설호화탕(特設雅室)은 양분방(洋盆房間), 여러 사람이 같이 사용하는 것은 통간(統間)이라고 각각 불렀다. 관분, 객분 또한 각각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다.


위 그림이 다소 대중적인 “지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면, 아래 그림은 호화로운 “분탕(盆湯)”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입을 옷이 없네 그려?", <점석재화보>, 1887년

기원분탕(沂園盆湯)이라는 이름의 목욕탕이 구강(九江)에 신장개업 했는데, 깨끗하고 호화로운 시설을 갖추어 모두들 앞다퉈 목욕을 하러 갔다. 그 중 화려한 옷을 입은 두 청년이 옷을 벗어 두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무뢰배 몇 명이 와서 옷을 훔쳐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점잖은 체면에 옷도 입지 않고 뛰쳐나가 멱살을 잡을 수도 없고, 옷을 가져가는 걸 보면서도 한 마디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사대부 자제의 모습을 연상해 보시라.

첫 번째 그림의 경우 불이 나서 어수선한 점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지탕과 분탕은 기본적인 외양에서도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도 탈의실이 중심무대이고,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이 왼쪽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탈의실의 풍경은 사뭇 다른데, 덩그러니 상자 하나에 서로가 연결된 긴 의자가 아니라, 차탁이 놓여 있어 앉아서 차도 마시고 발가락 손질(扦脚)이나 발안마 같은 서비스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널찍한 내부와 휘황찬란한 가스등만 봐도 이 목욕탕이 얼마나 호화스러운지 잘 알 수 있다.

목욕탕 안에는 이발사, 때밀이, 발가락 손질(扦脚; 修脚)을 하는 사환(堂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로 진강(鎭江), 양주(揚州), 단양(丹陽) 출신이 많아, 출신에 따라 양주방(揚州幇), 단양방(丹陽幇), 구용방(句容幇)으로 나뉘는데, 인원수는 양주방이 가장 많았고, 단양방, 구용방이 그 뒤를 이었다. 목욕을 끝낸 후 목욕비 외에 이들 사환들에게 팁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의 두 그림에서와 같은 정식 목욕탕은 아니지만, 매년 여름에는 끓인 물 파는 가게(老虎灶), 다관(茶館) 같은 곳에서도 “청수분탕(淸水盆湯)”이란 이름을 내걸고 목욕업을 겸하였다. 여름 한철 장사인지라 시설도 간단했다. 입구에는 기름종이에 “淸水盆湯”이란 글씨를 쓴 등롱을 내걸고, 나무 욕조 두세 개에 물 받아놓고, 천으로 칸막이를 하면 끝이다. 일종의 노천목욕탕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주로 일반 노동자나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 하층민이 이용하였다. 장사가 꽤 잘 되었는지 매년 여름이면 열에 아홉 가게는 이런 임시 목욕탕을 열었다고 한다.

위에 제시된 그림에는 남자 손님만 등장하는데, 이 당시 여자 목욕탕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자 목욕탕의 경우 1920년대 말 즈음에야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자목욕탕은 상하이 절강로(浙江路)에 위치한 “용천가정여자목욕탕”(龍泉家庭女子浴室)이 대표적이다.

이 목욕탕은 위층은 여탕, 아래층은 남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설이나 배치는 남자 목욕탕과 동일하되 때밀이, 발가락 손질 등의 서비스는 모두 여자 사환들이 하였다. 기녀들이 주요 고객인지라 상하이의 일반 부녀자들은 그 앞으로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당시 제법 큰 여관에는 서양식 욕조가 있었기 때문에 대갓집 마님이나 모던 걸(摩登女郞)들은 대부분 여관을 세내어 목욕을 했지 목욕탕을 찾지는 않았다. 때문에 여자 목욕탕의 경우 장사가 썩 잘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잇속 밝은 상해 상인들이 왜 여기저기에 여자 목욕탕을 열지 않았겠는가.


보너스! 여자 목욕탕이 없다 보니 아래와 같은 일도 가끔 생겼나 보다. ^^
"저도 때를 씻고 싶다구요", <점석재화보>, 1885년

이 그림은 남경의 한 목욕탕에서 벌어진 사건을 담고 있다. 몇몇 젊은이들이 목욕탕에 와서 한참을 떠들고 놀다가 막상 욕탕에 들어가려는 순간 일행 중 하나가 옷을 벗지 않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여인이었던 것!! 당장 매니저를 부르고 난리를 쳐서 밝혀낸 바, 그녀는 남장을 하고 남자목욕탕에 들어온 기녀였다고... 무엇이 궁금했길래? :)


참고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 19세기 말 상해에서 발행된 그림 신문. 인용한 그림은 모두 상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소개한 내용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목욕탕의 시설이나 분위기는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上海風俗古迹考>, 424쪽.
<上海鱗瓜>, 36-8쪽.

  1. “땟놈”은 중국인을 “대국(大國)” 사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지만, 중국인들이 “맞아, 그럼”이란 뜻의 “對(뛔이->떼이)”를 말끝마다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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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사도는 넓고 평평하고 사람도 없다. 자전거를 타기에 정말 좋았지만, 이렇게 평평하기만 하니 홍수로 수위가 높아지면 섬 전체가 잠겨버리지 않을까?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섬 주변에 제방을 쌓고 강(바다)과 만나는 사이에 습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뚝방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오토바이가 늘어서 있었는데, 아마도 주인들은 모두 배에 타고 있거나 배에서 짐을 내리려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 뚝방길과 강 사이의 공간은, 혹은 초원처럼 물소가 풀을 뜯기 좋은 정도로 마른 땅이었고 또 어떤 곳은 갈대가 무성한 사이로 진흙땅이었다.

뚝방길 사이로 난 틈으로 아래로 내려오면 강 바로 앞까지 올 수 있다. 약간 울퉁불퉁했지만 자전거를 타기에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강과 바로 인접한 뚝방길 아래로 통발 같은 게 길쭉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뭘까? 바로 이놈들이다.

아주 호전적이고, 재빠르며, 숨기도 잘 하는. 민물게는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진 지 오랜지라 재미있을 것 같아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국민학교 다닐 때 하교길에 도랑에서 손바닥만한 게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신기한 기억으로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을 만큼, 게 자체가 흔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때 그 도랑이 생각나기도 했다. 우르르 흩어졌지만, 경계하는 것인지 호기심 때문인지 무서워하면서도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는 놈도 많았다.

처음에는 사진이나 몇장 찍을 요량이었다. 빌려온 똑딱이의 줌으로는 충분히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고 제대로 담기도 쉽지 않았다. 내친 김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장갑 벗고 게잡이에 나섰다. 정말 맘 먹고 게를 잡을라치면 신발 벗고 뛰어 들어가 진흙탕의 저 구멍들을 헤집어야 할 텐데,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작은 생명체들의 최대의 적, 순진한 꼬마 개구장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잠깐 놀아볼 생각이었는데, 그마저도 아마 한가로운 낮을 보내는 게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내가 게중 제법 큰놈을 하나 잡았다. (손가락 협찬: 루나)
내가 사용한 방법은 이렇게 바위틈에 있는 제법 큰 놈을 골라, 앞쪽에서 갈대잎으로 살짝 위협을 하면서 대치국면에 있다가 슬금슬금 물러설 때 다른 손으로 뒤쪽을 덮치는 것이었다. 자연에서 살고 있는 놈들의 생명력이란 너무나 거대해서, 손으로 잡을 때의 그 꿈틀거림이 주는 진동은 너무 오랫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놓아주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슬금슬금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다가, 그러니까 자기의 은신처 반대쪽으로 움직이는 척하다가 아주 빠른 속도로 은신처 구멍으로 사라져 갔다. 미안~~

갈대 줄기로 게를 잡겠다고 휘두르던 반군도 어찌어찌 한 마리 잡았다. 조금 더 큰 놈이다. 이놈도 힘이 얼마나 좋은지 반군의 장갑을 살짝 줬더니 놓지를 않는다. 게다가 한쪽 집게는 공격용으로 남겨놓는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다. 게는 생김새에서부터 호전적인 탱크 느낌이 난다.
손가락협찬: 반군

반군은 게장 담그게 맘먹고 다시 한번 와서 게를 잡자고 했다. 나는 게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패스~
뭐 어쨌든 내 생업이 걸린 일이 아닌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은 좋지 않다. 머리로만 안다.

게를 보면 두꺼운 갑옷 속에 있을 연약한 피부가 생각난다. 손이 베이고 피부에 상처가 날 때 왜 인간은 게처럼 바깥이 단단하지 않을까 투정부린 어린시절도 기억난다. 껍질이 둘러싸고 있으면 상처도 나지 않을 텐데 말야.. 바깥이 단단한 것과 속이 단단한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진화한 것일까? 진화는 잘 모르겠고. 한번 깨지면 복구가 힘든 갑옷 피부를 바라기보다는 작은 상처에 무력하지만 재생가능하고, 그런 상처 때문에 더 탱글탱글해지는 피부가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매번 상처가 날때마다 갑옷 피부가 그리웠다.

오늘밤은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차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너무 아프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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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한낮. 자전거는 해변을 따라 섬을 돌다 버려진 다리 앞에 도착했다. 예전에 이 다리에 왔었다며 성큼 다리 위로 올라서는 반군을 따라 들어갔다. 버려지고 아무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다리로 만들어진 이상 어딘가로 데려다 줄 것이다. 저 멀리 뭔가 시설물이 보이는 것도 같다.

입구에 위험하다는 문구가 있었지만 유심히 살펴보지는 않았다. 시작부터 단어인지 전치사인지 끊어 읽히지가 않았고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가벼운 경고문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반군이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어 그저 뒤따라갔을 뿐이다. 예전에 왔었다고 하질 않나. 그것도 밤에 여럿이서 같이. (깜빡 했다며 예전에는 "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군은 다리 끝에서 알려주었다..)

왼쪽으로는 상당히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강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물(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해변이라고 해 두자!)에 닿기 전, 푸른 풀밭에는 물소들이 풀을 뜯고 습지에도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을 것 같다. 마구 뛰어 들어가 게도 잡고 조개도 잡고 그러고 싶은 풍경이다.

입구: 열려진 쇠문을 통과해 들어가는데, 꽤 멀다. 그냥 봐서는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뒤돌아보면 멀리 전망대 같은 게 보이기도 한다. 아직 땅에서 별로 높지도 않아 뛰어내리면 폭신폭신한 땅에 사뿐히 내려앉을 것만 같다. 파란 하늘에 샤방샤방 흰구름 낮게 깔린 뒤쪽에 비해 앞쪽 풍경은 왠지 심상치가 않다.

상당히 멀리 왔지만 아직도 끝은 아득하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어느새 발밑은 습지가 아니라 물이다. 바닥이 땅인 것과 바닥이 물인 것의 차이. 다리 위 난간에 기대어 흐르는 물을 보며 명상에 잠기곤 했다. 난간이 없는 다리에서 그러나 명상은 배부른 소리!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 일렁되는 걸 보면 압도되는 것 말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통로 폭이 2-3미터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바다 쪽으로 갈수록 바람마저 거세져 오금이 저려온다. 사진사 반군은 사진도 찍지 않고 앞으로 그냥 뚜벅뚜벅 걷기만 한다.

배는 통통 떠나니고 저 멀리 중국 군함도 간간히 지나 다닌다. 나중에 지도를 확인해 보니 한가로운 농촌과 어촌 분위기의 횡사도 곳곳에 해군 기지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산업부두 비슷한 게 보인다. 아마도 지금 이 다리가 버려지고 저곳에 다른 시설을 만든 게 아닐까?

이제 거의 다 왔다.. 중간을 넘어서면서 혹시 바람에 날려가지 않을까, 제발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심하며 최대한 무게중심을 낮춰서 조심조심 걸었다. (그렇지만 반군에게는 최대한 대범한 척하면서... ㅠㅠ) 인간이 만든 도시라는 벽 안에서, 인간들끼리 서로 잘난 척하며 으시대지만 그 바깥으로 조금만 벗어나 벌거벗은 채 자연과 만나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내가 아무 장비 없이 저 물 속으로 첨벙! 하면 그걸로 끝이다. 진흙 파도 속에서 내 수영장 자유형 실력이 먹히기나 할까?

나는 물을 겁내고 반군은 자물쇠 없이 두고 온 자전거를 겁낸다. 이제 누군가 훔쳐가도 보이지도 않고, 설령 알아채고 뛰쳐가도 자전거 되찾기는 걸렀다. 느낌으로는 1km는 족히 걸어온 것 같다.

형, 수영 잘 해요?
수영 좀 한다고 소용 있을까? 그나저나 우리 둘이 빠져도 아무도 모르겠다..
쥐박이를 데려와서 살짝 밀어넣으면 참 좋겠네요.
걘 겁이 많아서 요까이 오지도 않을 거야..
하긴요...
반군아, 혹시 내가 빠져도 구하러 뛰어들거나 그러진 마라..
.. ... 하! 그거 굉장히 어려운 문젠데요?


뼈대만 남은, 각각 바닥으로 발을 딛고 서 있지만 서로 연결되지는 못한 시설물들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똑같이 폐허라도 오른쪽은 깜깜하고 왼쪽은 밝다. 한때는 배가 정박하고 뱃사람이 쉬어갔던 곳이겠지. 굉장히 상상력이 자극되는 공간이었는데. 왜 육지가 아닌 물쪽으로 이렇게나 멀리까지 이런 시설물이 필요했을까? 왜 버려졌을까?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반군아, 꼭 미래소년 코난 분위기 나지 않냐? 왠지 오래되고 튼튼한 게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건물 같아. 횡사도 정도 규모에 커다란 상업항구가 필요하지도 않았을 거고, 일본 애들은 자기 나라에서 가까운 이곳에 항구를 만들어 잠깐 정박했다가 상해 쪽으로 치고 들어갈 때 전략적으로 좋잖아. 저기 입구쪽 전망대도 그때 같이 만들어진 거겠지.

왠지 그럴듯한데요? 확실히 일제가 튼튼하긴 하죠!

다리 양쪽에 커다란 수송관은, 그게 구리든 쇠든 대약진운동 때 뜯어가서 녹혔을 거야. 그때 그런 짓 많이 했잖아. 여기를 기지로 쓰려면 물이나 가스, 기름 같은 보급품이 필요했을 건데 아주 튼튼한 쇠파이프가 놓여있지 않았을까? (그거라도 있었으면 난간 역할을 했을 건데...ㅠㅠ)
미래소년 코난의 시대배경이 자그마치 2008년이니만큼, 1940년대 일본이 만들어놓은 과거의 유물에 지나간 미래의 폐허를 떠올리는 것도 영 말이 안 되는 거는 아니겠다.. (어차피 소설이니깐! ^^)

물과 육지를 만나는 곳에서도 비슷한 폐허 이미지가 있었다. 다리 위에서 나는, 물에 식겁하고 부서진 콘크리트 덩어리에 압도되었다. 그런 느낌은 사진으로도, 글로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끝까지 오면 비교적 넓은 공터가 있다. 그곳에 주저앉아 잠시 쉬어갔다. 반군은 노래를 흥얼거렸고 나는 (바다 위라서) 눅눅한 공기에 아랑곳 않고 담배를 피웠다. 16미터.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반군은 이 높이를 가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적어도 몸이 바로 부서지지는 않겠다. 그러나 여전히 쉴새없이 파도가 덮쳐와 편하지도 않겠다.

 태호 강변에는 영산이라는 산이 있고, 산 중턱에는 팔 십 팔 미터 불상이 서서 세상을 내려보고 있다. 석가모니불이다. 십 육 미터라고 들었다. 계단 어디쯤에서 십 육 미터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어림할 수 없었다. 아슬아슬한 높이였겠다. 어떤 각오.같은 것이 필요했겠다.

반드시 죽어야 한다.
요행이라도 살아나서는 안 된다.

 십 육 미터의 높이는 그런 각오의 높이처럼 보였다. 반드시 죽기 위해, 마지막 남은 몸뚱아리로 최후의 응원을 보내기 위해 그 분은 두 주먹 꼭 쥐고 수직으로 내리꽃혔을 것이다. 팔 십 팔 미터는 사람의 높이가 아닌 것이고, 십 육 미터는 살아서 닿을 수 없는 높이 같았다.

by 반군, for gogh

 
몸에 물기가 많아 짜 버리지 않으면 힘들 것 같던 5월 24일, 처음으로 반군과 자전거를 타고 바다까지 달렸다. 짭짜름한 땀이 흘러 몸은 가벼워졌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나는 아래쪽으로 뛰어내릴 생각은 없기에 각오 같은 건 하지 않았고, 그저 폐허를 보며 미래소년 코난만 생각했다. 내 발가락 힘으로는 저쪽까지 뛰기가 힘들겠는 걸?

되돌아오는 길도 반군이 앞장섰다. 발걸음은 훨씬 가볍지만 물기 많고 거센 바람에 여전히 조심스럽다. 돌아오며 이 다리의 일제기원설에 대해 계속 떠들어댔다. 그래야 자연의 목소리에 압도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입구로 돌아와 편안해진 마음에 아래쪽으로 내려가 본다. 버려진 낡은 배가 있었다. 발이 땅을 딛고 있을 때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 없다.

들어갈 때 해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문구를 다시 살펴 본다. 도대체 이렇게 위험한 다리를 왜 출입통제하지 않냐는 말이다. 버럭!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문구가 해석되지 않은 것은 내가 "引橋"라는 단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진입교"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경고: 진입교가 끊어져 위험하니, 출입을 엄금함!"

횡사도의 어느 절에 들어간 김에 나이 지긋하신 관리인에게 버려진 다리에 대한 걸 물었다. 나중에 검색해서 찾아보려면 이름이라도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청꿍"을 "성공"이라고 발음하시는 할아버지의 사투리에서 딱 한 마디,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만 겨우 알아 들었다. 어찌어찌하다 "인교"가 단어라는 걸 알게 되었고, "횡사도"와 "인교"를 검색어로 하여 겨우 다음 사실을 알아냈다.

횡사도 구조부두(横沙救助码头)


횡사도는 장강의 끝자락, 오송강(황포강) 입구 사이에 있다. 예전부터 횡사도 인근에서 대형선박의 조난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1975년 상해구호국(上海救捞局)의 제의로 횡사도에 구조부두를 건설, 구조선박의 대기 및 일정량의 구호물자 비축하여 장강하구에서 조난사고가 발생했을 시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게 함. 1976년 12월 착공에 들어가 1977년 11월에 부분완성된 상태에서 사용을 시작하였고 1979년12월에 완공. 이 부두는 횡사도 서쪽 강변에 위치, 해군부두에 인접해 있으며 서북쪽으로 상해항도국 장강구 판사처 부두와도 가깝다.


전체 길이는 370미터. 130미터의 강질 부잔교[각주:1](1.7만톤급 낡은 선박을 개조하여 만듦) 구조로 되어 있고,. (그외 다른 구조물에 대한 잡다한 설명이 부가되어 있지만 생략! 항구관련 용어는 너무 생소해요..)  横沙救助码头,位于宝山县横沙岛西滩,紧靠海军码头,西北与上海航道局长江口办事处码头相邻。岸线全长370米,占地16亩。结构形式为钢质浮码头(由1.7万吨级旧船底改建而成),长130米。钢过桥(长18米、宽4.5米)、桥吊桥、砼引桥(长225米、宽6米)、桥头堡引堤(长82米、宽6.5米)坡岸。


이 부두가 건설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변화와 농지조성을 위한 간척사업 등으로 인해 매년 50-60cm 침적되면서, 80년대 초부터 사용이 정지되었다.

설명이 애매한 부분은, 우리가 걸어서 끝까지 간 그 다리의 길이가 370미터인지 아닌지이다. 내 느낌으로는 훨씬 길었는데.. (혹시 중국어로 노출된 부분을 설명해줄 수 있는 분이 계시면 후사함![각주:2]) 다리 끝부분에 듬성듬성 남은 구조물은 원래 부잔교로 서로 연결되었다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일제가 만들고 대약진운동 때 고철을 뜯어내기는커녕(현실에서 내 추리는 맞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문혁이 끝나던 무렵 착공에 들어가 완공되자마자 얼마 사용하지도 못하고 버려진 듯하다.


횡사도라는 섬 자체가 너무 조용한 곳이어서 관광지로 크게 뜰 가능성은 적을 것 같다. 장강 하류의 세 섬(숭명도, 장흥도, 횡사도) 중 가장 규모가 작기 때문인데, 유일한 특징이라면 가장 바다쪽에 있는 섬이라는 정도. 그렇더래도 저 다리를 그냥 폐쇄할 것이 아니라, 난간을 설치하여 안전설비만 갖춘다면 꽤 괜찮은 폐허 관광지가 될 것 같다. 너무 많은 사람이 찾으면 분위기 자체가 바뀌겠지만. 그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버려진 다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폐허에서만 가지고 올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 거니까.



  1. 부잔교 [, floating pier]: 부두에서 폰툰(pontoon:물에 뜨도록 만든 상자형의 부체)을 물에 띄우고 그 위에 철근콘크리트 ·강판 ·목재로 바닥을 깔아 여객의 승하선 ·화물의 적양() 에 편하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폰툰을 해저에 체인이나 와이어 로프로 고정시키고 그 위에 설치한 간이부두로서, 조석 간만의 차이가 큰 곳에서 많이 이용된다. [본문으로]
  2. 후사.라고 할 것까진 없고 8월10일 이후 책 한권 선물해 드릴께요.. [본문으로]
Posted by lunarog
공짜표가 생겨 상하이 콘서트홀(上海音乐厅, Shanghai Concert Hall)에서 연주를 듣게 되었다.

클래식 듣는 건 좋아하지만 실제로 공연장을 찾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실제 연주는 좋은 스피커로도 전해주지 못하는 에너지의 흐름, 감정의 교류 같은 걸 느낄 수 있게 해 주겠지만, 내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그 비용을 투자할 생각은 솔직히 없기 때문이다. 연애할 때야 이벤트 삼아 한두번 가 볼 수 있지. :-) 이벤트라는 불순한 목적으로 가도 실제 악기의 울림이 주는 떨림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난한 자는 그림이든 음악이든 진본이 주는 아우라를 애타게 찾기보다는 막 다뤄도 되는 복제품을 가지고 노는 게 더 즐겁고 편안하다(고 자위한다).

아무튼 공연장을 찾지 않는 대표적인 이유가 시간과 돈일 건데, 마침 공짜표가 생겼고 저녁 시간에 잠깐 나갔다고 오는 게 무리는 아니어서(공연정보를 찾고, 꼭 들을 공연을 정하고, 표를 예매하고 등등의 번잡스러움 없이) 기꺼이 인민공원 근처에 있는 상하이 콘서트홀로 나섰다.

지휘는 (나는 처음 들어보는) 블라드미르 페도세예프(VLADIMIR FEDOSEYEV; 弗拉基米尔·费多谢耶夫)라는 러시아 지휘자가 맡았다. 아래는 지휘자 사진이다.(출처 및 공연안내: http://www.culture.sh.cn/product.asp?id=5907)
乐生活系列音乐会之Ⅸ - 俄罗斯传奇――费多谢耶夫与上海交响乐团音乐会
연주곡:
Hayden: Symphony No. 49 in f , La Passion
Shostakovich: Symphony no. 10

인민공원 지하철역에 내리니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오랫만에 정말로 파란 하늘을 이틀 보여주신 상하이씨. 아니나 다를까, 휘날리는 구름이 예감하듯 그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지하철역에서 연안동로를 넘어가면 상하이 콘서트홀이 나온다. 왼쪽으로 길을 건너면 와이탄,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건물은 상하이 박물관이다.

상하이 콘서트홀은 1930년에 만들어진 역사유물이다. 연안동로 확장공사를 위해 원래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들고 60미터 정도 남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2003년) 원래는 남경희극원(南京大戏院)이었는데, 1949년에는 베이징 영화관(北京电影院)으로 바뀌었다가 1959년 상하이 콘서트홀(전국 최초)로 다시 바꾼 뒤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즉 원래는 영화를 상영하던 곳인데 구조상 음향 효과가 괜찮은 곳이어서 콘서트홀로 용도변경을 했다고 한다. 영화상영을 목적으로 하면 잔향이 0.8초를 초과하면 안 되는데 이 곳의 잔향은 1.5초 정도이기 때문에 콘서트홀로 더 적절하고 음질도 좋다는 것. 바이두 백과사전에서 인용한 한 지휘자의 말에 따르면, "세계 최고 수준의 비엔나 골든 콘서트홀, 암스테르담 Concertgebouw, 보스턴 심포니홀 등을 제외하면, 음질 면에서 상하이 콘서트홀은 그 어떤 콘서트홀에도 뒤지지 않는다"라고 호언했다. (좀 과장 아닐까? ^^;;)

외부도 그렇지만 대리석으로 꾸며진 내부도 고전적 풍격이 느껴진다. 요즘 이런 식으로 지었다면 상당히 촌스러웠을 건데, 아무래도 세월의 흔적이 더해지니까 그런대로 볼만했다. 와이탄과 프랑스 조계의 중간 경계라는 지리적 위치를 생각하면서 건물을 감상해도 좋을 듯하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내부를 몇 장 찍어 뒀다. 빌려간 똑딱이가 나름 성능이 괜찮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어두운 곳에서는 조금 약한 듯.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무대가 상당히 좁아서 대규모 공연에 적합하지는 않을 듯하다. 실제로 굵직굵직한 공연은 여기가 아니라 상하이대극원이나 푸동의 동방예술중심에서 주로 열린다.(졸라 비싸다.)

상하이 콘서트홀은 자그마한 공원 한가운데 있는데, 언제나처럼 암표상(黄牛)들이 제일 먼저 반긴다. 공연 중간 가끔 핸드폰이 울리기도 하고, 한 악장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치는 것도 정겨운데(그마저도 2부에서는 다들 조는지..) 아무튼 듣고 있기에 굉장히 피곤한 공연이었다.

처음 음이 울릴 때, '아, 역시 이 맛은 스피커가 따라갈 수 없다니깐!'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곧바로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음을 알면 얼마나 알겠나 싶은데, 그래도 솔직한 느낌을 말하라면 소리가 뭉개지거나 저음은 둔탁하고 고음은 귀가 아팠다. 그게 건물 구조의 문제인지, 연주를 한 상하이 교향악단의 문제인지, 내가 앉은 자리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듣다가 지겹거나 오늘 기분과 맞지 않으면 씨디를 바꾸거나 다른 파일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간의 의무감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았는데 2부에서는 그냥 잤다.(그렇다고 코를 골거나 침을 흘리거나 그러진 않았다구요!) 문화적 취향 자랑할 일도 없고, 즐겁지 않으면 공연은 필요없지 않나?

"브라보"와 박수는 의례가 된 듯하다. 왠지 공연이 끝난 후 지휘자가 몇 번의 퇴장과 재등장을 반복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라는 듯이. 그게 더욱 우스운 의례로 보이는 공연이었다. 노래 못한 친구에게 예의상 박수를 쳐줄 순 있어도 앵콜까지 외치는 건 악취미다.

같이 간 사진사 친구는 상하이 교향악단의 요청으로 사진을 찍을 예정이다. 흐르는 음악의 어느 순간을 사진으로 남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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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어제는 중국현대문학 관련 학회가 있어 상해대를 갔다.

올해는 굵직한 몇십 주년이 여러 개 있는데, 건국60주년(아마 10월에 큰 행사가 있지 않을까?), 오사운동 90주년, 천안문사건 20주년 등이 그것이다. 건국60주년은 중국당대문학 60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사운동 에서 인민공화국 건국까지를 현대문학으로 끊는 바람에 이미 60년이나 쌓여온 시간을 당대로 구분하고 있어 논란이 많이 되는 분기이다. 뭐, 그 당대문학을 돌아보는 학회 되겠다.

왕효명(왕샤오밍) 교수의 상해대와 장욱동(장쉬둥)의 뉴욕대가 연합한 것인데 이와 비슷한 연합은 왕덕위(데이비드 더웨이 왕)의 하버드와 진사화(천쓰허)의 복단대가 작년 말 꾸린 학회이다.

학회에서 발표되는 글이야 어차피 굉장히 지루했고, 평소 글로 보던 사람들 얼굴이나 확인하는 자리라고 보면 되겠다.

저녁에는 상해대에 있는 후배들과 함께 왕효명 교수 등의 중국인 학생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라기보다는 바로 술로 들어갔다. 상해에서의 술자리는, 지금까지 내 느낌은, 술을 강요하는 분위기라기보다 술을 홀짝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우리 지도학생들의 모임에서 술을 양껏 먹어본 적은 없었다. 매번 한 사람이 미친 척하고 분위기를 띄워 보지만, 매번 그 사람만 미치고 끝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주 교양있는 몸짓으로 이야기만 나누다가 못 이기는 척 슬쩍 분위기만 맞추는 식.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거나 등등. 주로 각종 방언으로 노래를 한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 그래서 나도 한국어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상해대에서 현대문학하는 친구들은 상해 출신이 거의 없고 사천, 안휘, 곤명 등 지역 학생들이 많아서 그런지 지금껏 상해에서 먹어본 술자리 중 가장 거하게 폭음한 날이 되어 버렸다. 시작은 서로 탐색하듯 조용하더니(나 혼자 복단대/한국인이었다. 즉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은 나 하나였다.), 자기소개하고 한잔씩 깐베이가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속도가 빨라졌다. 빈속에 맥주로 배를 채우고 나니 밥도 별로 못 먹었고, 먹을 시간도 별로 없이 계속 술잔을 비워야 했다.

급기야 그 중 한 친구와 의형제를 맺기까지... ㅡㅡ;;
7번 깐베이를 하고 나서, 한 번만 더 마시면 팔배가 되는데, 팔배(八杯; 여덟 잔)나 팔배(八拜; 여덟번 절하기)나 그게 그거니 한잔만 더 먹고 의형제를 맺자고 하더라. 내가 형이 되는 거니까 손해볼 건 없다 싶어 그러자고 했다. 그 친구 이름은 장석과(張碩果; 장숴궈)이다. 나머지 이름들은.. .. 기억이 안 난다. 동생만 챙기면 되지 머. :-)

상해대 서문쪽에 제법 큰 상가가 조성되어 있던데, 한국식당들도 여럿 있고 2층에는 주로 다양한 식당들이, 1층에는 주로 가재처럼 생긴 샤오롱샤(小龙虾)를 파는 식당들이었다. 광장에 노천카페처럼 식탁과 의자를 놓고 야외에서 이 가재에 술을 곁들여 먹는데. 광장 전체가 안개에 잠긴 듯 연기가 자욱했다.


술 마시느라 사진은 한장도 찍지 않았다. 지저분하지만 정감있는 그 광장을 찍어놨어야 하는데.. 플리커에서는 대충 이런 이미지가 검색된다.(어? 플리커 되네?? 이건 또 언제 풀린 거야?) 기름으로 조리한 거라서 저렇게 비닐 장갑을 끼고 먹는데, 머리를 떼고 나면 먹을 수 있는 살은 손가락 한마디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비닐도 계속 찢어져서 정말이지 손 버리고 입도 버리기 쉽상이다. 싼맛에 배도 부르지 않고 손도 계속 움직여야 해서 술안주로는 딱이겠다.

암튼. 아주 늦게까지 마시지는 않았지만 너무 급하게 마셔서 그런지 오늘은 하루 종일 죽을 맛이었다.
마시다 보니, 한국인 교수님도 가시고 상해대 한국후배들도 가 버리고.. 우리 의형제는 자기 기숙사에서 자고 가라는데. 술 취해서 험한 꼴 보이기는 싫어 그냥 집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택시를 탔다.

나름대로 아주 재미난 경험을 한 셈인데. 하여튼 분위기에 휩쓸려 과음하면 안 될 노릇이다...
술을 깨려고 지난번 후배가 놓고 간 "여명"을 마셨는데. 참 나. 난 왜 여명만 마시면 오바이트를 하는 거야? 아직 두 캔이 남았는데 저걸 어떻게 한다?

저녁엔 불낙전골을 시켜 먹었는데, 국물이 굉장히 맑고 들깻잎이 들어 있어 시원했다.
불낙전골을 먹고 겨우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집 전골을 자주 시켜먹게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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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전화로 딸이 어떤 과일의 이름을 물어온다. 빨간 껍질을 까면 하얀 알맹이가 있는데 그 속에 있는 까만 씨는 톡 뱉어내면 되는 그 과일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나 보다. 가끔 가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중국집에서 얼려서 내놓곤 하던 건데, 부페식인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다른 건 본 채 만 채 이것만 냅따 먹곤 했다. 거의 돌 지나면서부터 맛을 들였던 것 같다. 양귀비도 아닌 주제에 말야.

"아~ 리츠 말야?"
"웅, 그거.. 아빠, 리츠가 먹고싶다.."

한국에선 제철과일도 아닌 걸 왜 갑자기 떠올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보니 여지가 나올 철이다. 얼마전에 길가에서 여지를 팔고 있는 걸 본 기억이 얼핏 떠오른다.

작년 환율 폭탄을 맞은 이후 완전히 끊다시피 한 게 두 가지다.
한국과 비교해서 그런대로 싸 중국생활의 활력소였던, 그렇지만 환율의 압박 때문에 전혀 싸지 않게 된, 그러면서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게 나에게는 과일과 마사지였다.
과일을 먹지 않고 마사지를 받지 않게 되자 돈을 쓸 일이 별로 없게 되었다.
밥을 안 먹을 수도 없고, 책은 왠만큼 필요한 게 구비된 데다 필요한 책을 사지 않을 수도 없으니. 아, 디비디도 거의 사 모으지 않게 되었고..

환율이 "어느 정도"(물론 충분히 만족스럽진 않지만..) 안정되었지만,
한번 들인 버릇은 쉬 고쳐지지 않는다.

제철과일 찾기보다 비타민 한알로 버티고, 마사지보다 요가로 간간히 굳어진 어깨를 풀다보니
뭐, 별로 부족하지 않다. 특히 마사지에서 운동으로 대체한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암튼, 예전같으면 지금쯤 무슨 과일이 나오지 않을까 고대하고 있었을 건데, 여지의 계절이 돌아와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설이 좀 길었다. 딸이 먹고 싶다는 걸 한국까지 던져줄 수도 없고, 그냥 나라도 맛을 봐야겠다. *^^*

이왕 사먹을 거 좀 좋은 걸루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지보다 품종개량된 뻥튀기 "여지왕"을 작년에 이어 올해도 먹어볼테야.
작년 환율이 오르기 시작할 즈음 거의 마지막으로 사 먹어보고 감동한 기억이 남아 있다.(이글루스에 썼다가 결국 여기로 옮겨졌다: http://lunatic.textcube.com/124)

크기 비교를 위해 마침 눈에 띄는 계란과 함께 몇 장 남겨본다.

계란이 클까 여지가 클까?

계란은 크기가 다양하니, 보다 객관적인 비교를 위해 담배갑을 옆에 둔다.

과일은 적당한 크기가 맛있는 법이다. 큰 놈이 상품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맛은 자잘한 게 나은 경우가 많다. 여지왕도 크기만 하고 맛이 여지보다 못할까? 직접 먹어 보시라. 내가 왜 지금 환율임에도 다시 사먹었겠는가? ^^


일반적인 여지를 검색해 보니, 크기를 대조할 만한 이미지가 잘 없다. 아래 사진 우측하단에서 제일 작은 놈이 일반적인 "여지"라고 보면 되겠다. 그 아래 사진은 "여지"와 비슷한 모양(?)과 맛을 가진 "용안"이다.

이미지출처: http://hi.baidu.com/suplayer/album/item/4468fffe7c848a125d600806.html#IMG=4468fffe7c848a125d600806

중국작물정보 웹페이지에 다양한 "여지" 종류를 구경할 수 있다: http://icgr.caas.net.cn/photobase/cropphoshop/%E6%9E%9C%E6%A0%91/%E8%8D%94%E6%9E%9D/page_0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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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상해에서 지하철 9호선을 타고 종점까지 가면 쑹장(松江)에 닿을 수 있다.

아마도 상해라는 도시가 커질수록 점점 더 그 주변의 자그만 향진들은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에서 테마파크로 변해갈 것이다. 운하 옆으로 늘어선 강남 지역의 옛 풍광을 팔아먹고 있는 저우좡, 시탕, 주가각 등이 한편에 있다면, 놀이공원이나 이국적인 미니어처가 다른 한편에 있다.

쑹장의 템즈타운은 후자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대도시에서는 즐길 수 없는 여유를 누리려 나와보지만,어디에도 세월의 흔적, 진품의 아우라는 찾을 수 없다.

곳곳에 이런 제복 입은 아저씨들이 졸거나 어슬렁거리고 있다.

입장료도 없는 이 공간이 어떻게 유지될까 궁금했는데, 사실은 놀이공원이 아니라 일반 주거지역이었다. (이런 곳에 살고 싶을까? ^^)

관련글 :  한국일보 : 中 신흥부자 “유럽에 살어리랏다”

그냥 구경하면서 사진찍는 것은 제한이 없지만, 모델 촬영을 할 경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한다.

대부분은 야외촬영하는 예비 신랑신부들로 가득했다.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드레스에 비슷한 포즈로.

우리 부부는 비용과 번거러움을 핑계로 야외촬영을 포함한 웨딩촬영을 생략했는데,
다시 한번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이쁘고 행복한 모습이지만, 웬지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게 장소가 주는 느낌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만..

꽤 노련해 보이는 사진사가 포즈를 잡게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나도 따라서 몇 장 찍었다.
이날 신부들을 꽤 많이 찍었는데 이 팀이 가장 자연스럽고 이뻐 보였다.
내 맘대로 이날의 퀸으로 선정!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감으로는 (한국과는 달리) 옆에서 자기를 찍어도 별로 신경쓰지 않거나 오히려 찍히는 걸 의식하고 표정을 잡아줄 때도 있었다.
너무 이쁘게만 만들려고 그런건지 화장실 찾기가 너무나도 힘들어 헤매고 헤매다가 경비아저씨에게 두번이나 물어보고 또 헤맸다. 알고보니 처음 근처까지 갔다가 입구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

상해 외곽이라 도로가 넓고 먼지도 별로 없었다.
시내에서 60km 정도 떨어져 있다는데, 다음에는 자전거로 한번 달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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