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끝났지만 중국은 여전히 올림픽의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글쎄 TV를 틀었다 하면 아직도 주요 경기장면이 나오곤 하니 말이다.
한국도 올림픽, 월드컵 등이 끝나면 많이 우려먹긴 한 것 같은데, 슬슬 지겨워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침 장정일이 에코를 빌어 한 마디 했다.
스포츠 일반을 이야기하는 듯하면서 올림픽에 대한 심기를 슬쩍 내비친 것인데.
"섹스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섹스를 구경하려고 사창가에 가는 사람"이라는 일갈은 스포츠 관람객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일 듯하다.
나 자신, 미친 스포츠는 없지만 또 보다보면 재미가 있든 없든 보게 되는 것이 스포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 말에는 동의가 되지 않는다.
나를 지탱하는 것은 사실 그 관음증이다.
그게 뭐가 나쁠까? 흔적을 남기지 않고 몰래 보는 게 뭐 어때서?
내가 떳떳하게 책을 읽기 위해, 영화를 보기 위해, 웹사이트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책을 써야 하고, 영화를 찍어야 하고, 웹사이트를 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소설을 쓰지 않고도, 영화를 제작하거나 비평에 관여하지 않아도
몰래 나 혼자만 발견한 무엇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기뻐한다.
그런 거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자기가 제작해 쓰는 고대로 돌아갈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면,
그것이 '유리'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비판도 되지 않는다.
다만 그걸 보면서 어떤 경기의 승패에 따라 국력이 신장되었다가 축소되었다가 하는 느낌을 받고
대통령 지지율이 상승하는 것 따위는 문제가 있겠다.
중국이 올림픽 전부터 지금까지 전국민(?)이 그것의 성공 여부에 목을 매는 것도 마찬가지겠다.
한국도 마찬가지였지만 좀 오바다.
어떤 중국애가 이렇게 (농담삼아) 물었다고 한다.
"(한국 니네들) 중국이 올림픽 성공해서 좀 서운해?"
역시 오바다.
올림픽과 ‘스포츠 관음증’ 필
자는 지난주 화요일, 한 지면에 피터 페리클레스 트리포나스의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이제이북스, 2003)에 대한
독후감을 썼다. 그 글을 쓰면서 베이징 올림픽이 무르익고 있는 이때에 이런 독후감을 쓰는 건 “부담”스러우며, “이 글은 본전을
찾기 힘들다”고 서두를 뗐다. 원고를 송고하고 비겁함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올림픽 광풍’을 혐오하고자 나는 에코라는 권위에
매달렸다. 그리고 글쟁이가 크게 손해 보는 글을 쓰면 쓸수록, 사회가 조금, 아주 조금 이득을 본다는 생각도 해 보면 안 되나?
워낙 이름 석 자에 호구가 걸려 있는 터라 나는 그걸 못한다.
기호학자이며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은 사이에 유럽의 축구문화를 조롱하는 여러 편의 에세이를 썼던 모양이다. 이 책은 단번에
외우기가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영국의 문화비평가가 그 글들을 모아 에코의 반(反)스포츠론을 완벽히 다듬어낸 일종의 ‘오마주
북’이다.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다. 하여 에코는 스포츠 자체를 부인하진 않는 대신
이렇게 묻는다. 만약 당신 주위에 섹스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섹스를 구경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번씩
암스테르담(사창가)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정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런 사람을 뭐라 부를지 잘 안다.
마
찬가지로 자기 신체를 사용한 ‘놀이(운동)’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스포츠 관람에만 넋을 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관음증
환자다. 에코의 말로,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상대편에 대한 야유와 욕설은 놀이를 잃어버린 관객들이 생생한 체험을 보상받으려는
욕구에서 비롯하며, 피를 보고야 마는 훌리건의 난동은 경기 시간 동안 자기 신체를 선수들에게 빼앗겼던 청년들의 슬픈
마스터베이션이다. 비약하면, 세계가 놀란 한국인의 응원문화 또한 우리 젊은이들이 그만큼 자기 향락이 무엇인지 모르며, 실제
스포츠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는 증거다.
스포츠가 개인의 건강과 육체를 향상시키려는
것이라면, 관음화된 현대의 스포츠는 그 정의에 맞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육체가 제거된 관음화된 스포츠는 구경꾼을 잡담가로
타락시킨다. 그들은 장관들이 하는 일을 판단하는 대신 축구 감독에 대해 논의하며, 의회 기록을 검토하는 대신 선수의 기록을
복기한다. 또 새로운 정책이나 법령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신 어제 벌어진 승부를 분석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그러면서 마치
중요한 민주적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어떻게
보면 직업화된 스포츠 경기란 사익에 충실한 극히 개인적인 활동임이 분명한데도, 스포츠 잡담가들은 그걸 국력과 연관지으며
공적(公的)인 화제인 양 기만한다. 그러는 사이 현실의 부조리는 암처럼 커간다. 올림픽이 시작되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30%에
육박한 이유다. 사족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면, 사변적이고 나약한 ‘먹물’이라는 기왕의 이미지를 단번에 씻겠다는 듯,
문인들은 참 오지게도 도착적인 스포츠를 예찬하고 스타를 ‘빨아’준다. 유명세를 부풀릴 좋은 기회를 어쩌자고 놓치랴?
장정일 소설가
# by luna | 2008/09/01 00:01 | 조리돌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