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쇠로 된 방의 비유를 생각해 본다. 사방이 쇠로 막힌 방에 사람들이 자고 있다. 그들은 서서히 질식되어 죽을 것이다. 그들이 깬다고 하더라도 두꺼운 쇠를 뚫고 밖으로 나올 방법은 없다. 아무런 고통 없이 서서히 죽어가게 둘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겠지만 그들을 깨워 마지막 순간까지 그 방을 나올 모든 수를 써보게 할 것인가.
최근 티베트 사태를 잠깐 생각해보다 이 비유를 떠올렸다.
티베트를 어떤 순수하고 신성한 땅, 중국의 식민치하에 억압받는 소수민족의 땅으로 신비화하거나 그런 신비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 시위와 중국의 강경대응으로 인한 사망자 발생은 그걸 재확인시켜 주는 한 사례이다. 중국도 초반에 확
잡아서 올림픽 때 문제가 나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도 들 테고 그러면서도 외국 눈치도 봐야 하는 애매한 상황이다. 다른 나라들도
중국에 한 마디씩 하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할 카드의 하나로 생각하는 듯하고.
박노자는 예전에 티베트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티베트가 신성화되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이고, 중국 견제용으로
미국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카드의 하나이라는 전제에, 더하여 달라이 라마를 수장으로 한 티벳 불교 승려가 신분적으로 최상층을
구성하면서 나머지 인민들을 착취했던 역사를 언급했다. 그 수가 얼마인가, 혹은 그들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그렇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 의해 해방된 사람도 없지는 않은 셈이다. 문제는 그러한 해방에
수반되는 다른 언어, 다른 가치, 다른 이데올로기의 강요가 빈곤이나 익숙한 억압보다 더 억압적일 수도 있다는 점일 테다.
국
가, 민족을 초월한 신분적 해방이 더욱 행복할까, 익숙한 내 언어, 내 풍속 안에 살 수 있는 민족적 해방이 더욱 행복할까?
이분법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만 놓고 보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 것 같다. 물론 이 이분법이 티베트 문제를 아우를 수는 없다.
그들은 그냥 뒀으면 정치+종교적 신념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계급/신분에 만족하면서 살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쇠로 된 방을 다시 떠올려 본 것이다. 쇠로 된 방에 사람들이 자고 있었다면 그들은 쉽게 질식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당연한 듯이 죽어갈 테니까. 루쉰의 반성은 옳았다. 그 반성이 자기를
포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바깥의 초월적 위치에서 방 안의 '그들'을 바라보면서 이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망설이던
순간에 어떤 희망을 발견했고, 쇠로 된 것으로 보였던 방은 너무 쉽게 벽이 허물어졌다.
그런데, 똑같은 비유를 이런 입장에서 해 보자.
지금 너는 쇠로 된 방에 갖혀 있어. 내가 그 쇠로 된 벽을 허물어 줄께.
이런 방식은 너무나 쉽게 폭력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렇다고 쇠로 된 방 안의 현재에 만족하면서 살라고, 외부의 너희는 간섭하지 말라는 방식도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당연하게도.
중국이 만든 벽에도, 달라이 라마가 만든 벽에도 갖히지 않는 방식을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찾아낼 수 있을까..
내 별로 깊지 않은 고민이 바닥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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