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에 한국에 들어가 있는 동안은 블로그를 못해 왔다. 예전 이글루스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그렇다. 나에게 있어 한국과 중국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중국이 훨씬 여유롭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한국이 훨씬 빠르고 바쁘게 돌아가는 것은 분명하니까.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과 혼자 있는 시간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새로운 인연을 많이 만들기는 귀찮지만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걸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게 어쩌면 당연할 듯.
어쩌다 갓 사주를 배운 돌팔이에게 사주를 보게 되었다. 크게 나쁘지 않은 사주란다. 결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을 보완하는 장점이 아주 큰. 말을 많이 하는 게 좋다니 앞으로 블로그에서도 시덥잖은 소리라도 계속 지껄어야겠어.
다만 올해 운이 좋지 않단다. 아프고, 하는 일도 잘 되지 않고.
사주는 음력인가?
설 전날부터 아프기 시작하여 내리 보름을 앓았다. 쉽게 지치긴 해도 잘 아프지 않은 체질이라, 정말 오랜만에 아파본 것 같다.
하는 일도 잘 되지 않는다.
번역 하나를 마쳐 초고를 넘기고 최종교정본을 작업하고 있는데, 아파서 마감을 넘겨버렸다. 마감을 넘기고 끙끙거리며 작업을 하고 있는데, 대륙에서 나온 이 판본의 무삭제판인 홍콩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너무나 뻔한 관행을 깜빡 놓치고 있었다. 눈에 뭐가 씌였는지.. 아~~~~~ 젠장!!
일단 아주 적은 삭제라도 정치적 고려에 의한 삭제가 있다면 무삭제판을 써야 한다. 게다가 한 장을 완전히 들어내어버릴 정도이니 홍콩판은 지금이라도 무조건 입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편집자에게는 어떻게 말하나? 미리 알아보지 않고 이제사 말이다.
세계적인 미술품경매회사인 크리스티가 프랑스로 유출된 위안밍위안(圓明園) 문화재에 대해 경매를 강행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중국 정부가 회수 입장을 공식으로 밝혔다. 또 중국 변호인단이 경매 저지에 나서고 프랑스 유학생들이 항위 시위를 계획하고 있어, 중·프랑스 간 갈등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크리스티사는 12일 제2차 아편전쟁 중 유실돼 프랑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집안에 소장 중인 위안밍위안 청동 쥐머리상과 토끼머리상에 대한 경매를 예정대로 오는 23~25일 파리에서 실시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경매 대신 사적 거래형식으로 매각하겠다는 전날의 외신 보도를 부인한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 장위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전쟁 중 불법약탈당한 문화재를 경매한다는 것은 중국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관련 국제협약에도 위배된다”면서 위안밍위안 문물들은 마땅히 중국에 반환돼야 한다고 밝혔다. 국가문물국도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해 경매와 같은 구매방식은 결코 쓰지 않겠다고 재천명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위안밍위안 문화재의 무상반환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선례가 되면 또 한국의 규장각 의궤와 같은 외국 문화재의 반환 요구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이브 생 로랑 집안은 청동 쥐와 토끼머리상의 판매 수입금을 이브 생 로랑이 세운 에이즈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경매가 임박하면서 위안밍위안 문화재 반환소송을 준비 중인 81명의 중국 변호인단은 본격 경매 저지 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변호인단의 수석대표인 류양은 현재로서 최선의 방법은 경매에 부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서,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경매가 유찰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경매 저지를 위해 프랑스유학생연합회와 중국유학생회가 연대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크리스티 경매에 나올 청동 쥐머리상(높이 30㎝, 길이 40㎝)과 토끼머리상(높이 45㎝, 길이 35㎝)은 1860년 영·불 연합군이 위안밍위안을 불태울 때 유실됐던 12지신상의 일부다. 12지신상 가운데 호랑이, 원숭이, 소, 돼지, 말 등 5개는 중국으로 돌아왔으며 쥐와 토끼 이외의 용, 뱀, 양, 닭, 개 등 나머지 5개는 현재까지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쥐와 토끼머리상의 크리스티 경매 최초가는 2억위안(약 400억원)으로 알려졌다.
<베이징 | 조운찬특파원 sidol@kyunghyang.com> 경향일보
분수로 사용된 이 12지상은 고장나서 원명원의 한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2차 아편전쟁 당시 약탈되었다고 한다. 코에서 물이 졸졸 나왔단 말인가?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은 약탈 문물을 경매에서 구입할 것인가, 반환요구를 할 것인가이다.
중국인이 개인적으로 경매에서 구입한 후 국가에 기부하는 방식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성이 가장 높긴 하다.
그런데 원래 자기 소유였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다시 구입해 온다는 게 영 찝찝할 것이다.
게다가 동일한 12지신상의 일부인 돼지머리를 600만 위안에 구입한 적이 있는데, 토끼와 쥐의 경매가는 2억 위안을 호가한다. 중국측 전문가의 의견으로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긴 하지만 물건 자체가 그렇게까지 고가인 것은 아니라는 것. 훔쳐가서는 비싼 가격에 경매를 부친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러나 반환요구 또한 쉽지 않다.
우리가 사들여서 청와대에 기증하는 건 어떨까?
현재 80여명의 변호인단이 법률소송으로 경매를 저지하고 반환요청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 법률 소송으로 갈 경우 증명해낼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 소송에서 질 가능성이 많다.
또한 소송의 원고를 "애신각라"(爱新觉罗; 청 황조의 성씨)의 종친회로 한 점 또한 문제가 된다.
소송에 국가가 나서면 국가 대 국가의 대결국면을 조성하여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개인을 내세운 것인데(따라서 원명원이나 약탈유물 관련 단체가 원고가 되기를 거부했다), 이 경우 소송이 성공하더라도 청 황실의 유물이 애신각라의 후손들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어 버린다. 애신각라씨 후손들이 중국과 대만의 박물관에 소장된 그 많은 보물들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오면 볼 만 하겠다..(그런데 애신각라를 성씨로 쓰고 있는 사람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암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심정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문제를 법률적, 현실적으로는 풀지 못한다는 난점이 있는 것 같다. 깊히 생각하지는 않고 신문을 보다가 대충 찾아본 내용 일부를 정리해 둔다.
그런데, 아래 설문 내용이 인상적이다. 공신력이 얼마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뜻밖이다.
올해는 크리스마스도 연말 기분도 전혀 느끼지 않고 있었는데, 오늘에서야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조금, 아주 조금 울적해지려해 <러브 액츄얼리>를 틀어본다. 크리스마스 시즌엔 한번쯤 다시봐야 하는 영화니까. (작업시간을 '헛되이' 보낼 게 너무나 뻔해 이번 시즌은 그냥 넘어가려고 했던 것. 그냥 틀어놓고 화면은 절대 안 보고 음악만 들을 생각이었다아아... )
공항에서 재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다가, 한 화면에 다양한, 수천의 얼굴'들'이 모자이크로 쪼개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렇게 각양각색의 다양한 삶을 펼쳐보이지만, 그것은 수천의 다름이 아니라 하나의 따뜻한 사랑으로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매력적인 것들은 나를 무력하게 한다. 집중하면 대충 시간당 한편 정도의 작업을 할 수 있는지라, 내일 모임을 위해 평소 두배 정도 되는 작업량을 완수하겠다고 '계획'하고 있었으나, 지금 이 시간까지 한편도 끝내지 못했다능.. 그러면서도 '내일 빈손으로 간다고 뭐, 별일 있겠어?'라는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한다는.. 작업을 위한 최소한의 긴장도 무장해제시켜 버린 채 나는 그 편안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2006년에 시작한 일들, 07년에 끝냈어야 하는 일들, 그리고 올해 안으로 끝내야 하는 일들이 아직 남아 있다. 원래 뭔가를 계획한대로 움직이거나, 정해진 시간에 끝내는 인간은 아닌지라,. 또 그런 것들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 알아버린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장점을 믿어줄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하나씩 고쳐갔어야 했다. 굳은 의지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맑은 정신으로 연말을 보내고 있었는데..
세상의 온갖 매력적인 것의 단점은 그것을 거부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어린아이가 눈앞의 아이스크림과 초콜렛을 먹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처럼. 이제 아무도 내 눈앞의 초콜렛을 빼앗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매력을 빨아들이기만 하고 전혀 발산하지 않는다면 그저 까만 점으로만 나는 기억될 것이다. 나는 전혀 치명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치명적인 매력에 너무 취약하다.
요즘 이곳저곳 옮겨다니면서 모임을 하고 있어, 혹시나 하고 상해의 괜찮은 커피숍을 검색해본다. 모임의 구성원이 사는 곳이 제각각인데, 고정된 한곳에서 만나기는 심심하고 해서 까페 순례를 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작업도 검토하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맛있는 커피도 마시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하여, 바이두 해 본 결과,
"올해 최고의 커피숍: 편안한 카페 환경, 맛있는 커피, 음료, 간식을 제공하는 커피숍 뽑기"라는 제목이 검색된다.(귀찮아서 제목에서 뺏다만, 그대로 번역하자면 <"간식"(甜品)이 가장 훌륭한 카페>가 원래 제목이다. 케익, 머핀, 쿠키 같은 걸 통칭하는 말로 간식 말고 뭐 있나? 잘 모르겠네용~ ㅡ_ㅡ;;)
참고삼아 저장해 두고, 하나씩 돌아볼 생각이다. 나중에 찾아보기 쉽게 하기 위해 각각의 제목에 지도를 링크해 두었다.
그 결과는 지금 현재 다음과 같다.(이미 끝난 모양이다. 20일에 본 결과와 지금의 결과가 동일하다.)
이 다섯 곳 모두 나로선 처음 듣는 이름인데, 투표결과에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편견이겠지만 커피맛이나 까페 분위기에 대한 독특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다수가 자기가 가 봤거나 많이 들어본 곳을 투표했을 가능성이 많다. 나도 커피맛은 잘 모르지만, 상해 젊은이들이 커피맛을 그렇게 따질 것 같지도 않다.. 1위로 꼽힌 곳은 상해의 "신천지" 등에 체인이 있는 곳이다. 나머지도 서양인 취향을 고려한다고 만든 상해식 카페가 아닐까 싶다. 그 중 coffee tree와 citizen cafe를 은근히 기대해 보는데.. 더도 말고 "학림"처럼 커피향과 함께 그 집에 배어있는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그런 곳 없을까..?
더하여, 검색하다가 찾은 상해 커피숍에 대한 글(上海咖啡馆的15个瞬间) 중에 인상적인 말을 옮겨 본다.
"상해의 커피숍은 분위기는 있는데 커피가 맛이 없다. 홍콩은 커피가 맛있지만 커피숍 분위기가 별로다. 타이베이는 커피도 맛있고 커피숍 분위기도 뛰어나다."
어쨌든 상해의 커피숍에서는 대부분 죽치고 앉아 이야기하고 사람 구경, 풍경 구경하면서 앞에 놓인 커피가 천천히 식어가도록 내비둔다.
잘 차려입고 와서 데이트하거나 사람들 만나는 공간으로 까페가 활용되지 뭔가 일상적인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겠다. 사실 한국에서도 동네 까페에 갈라쳐도 느슨한 차림으로는 커피 마시며 책보기가 좀 거시기하다.. ^^;;
접어둔 글에 소개된 까페와 바는 그다지. 엄선된 것 같지는 않다. 잡지 같은 데서 좀 전문가 스러운 사람이 추천하는 괜찮은 카페 관련 글은 없는 걸까? ..
암튼, 위에 소개된 곳 중에 내가 그래도 마음에 드는 곳은 한위안 서점이다. 론리 플래닛에도 소개되어 있는 곳인데, 상해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북카페에 속한다. 지하철 역 근처가 아니라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가 보면 독특하면서도 조용하고 편안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주인이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책도 여기서 구할 수 있다. 한위안에 대한 포스팅은 다음 기회에..
오마이뉴스를 통해 가끔 정윤수의 BOOK...ing365 라는 블로그의 글을 보곤 한다. 오늘의 주제는 간짜장 앞에 놓고 '동파육'을 논하다 - 소동파 인데, 동파육의 유래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어 간단하게 몇 가지 사항만 정리해 둔다. 베이징에서 몇 해 사업을 한 친구의 말을 듣고 재미가 있었더라도 글로 옮길 때는 관련사항을 검색해 보고 사실관계를 따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랬다면 "황저우"에 "서호"가 있다는 식의 오류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조금 더 그럴듯한 동파육의 유래를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대 원우 4년, 즉 1089년(1080년 황주, 1089년 항주)에 소동파는 후베이(湖北)성의 벽촌 황저우(黃州)에 유배를 살고 있었다. 44살 때의 일로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 황저우에 서호가 있어 중국 역대 시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소동파도 서호를 산보하며 많은 시를 썼는데, 시 ‘비 개인 호수에서 술을 마시다’에서는 ‘경국지색’의 서시에 비유한 적 있다. 서시가 화장을 했을 때나 안 했을 때나 천하 일색 미인이듯이, 서호 또한 ‘은빛 물결 출렁일 때나 운해에 가려 천지가 몽롱할 때나’ 천하의 절경이라고 읊었다.
바로 그 서호를 치수할 일이 생겼다. 소동파는 항주의 백성들과 함께 서호의 방제 작업을 함께 하여 오랜 고생 끝에 그것을 성공시키게 되었다. 힘겨운 공사를 끝낸 백성들이 집집마다 돼지를 잡으며 잔치를 하게 되었고 이때 소동파가 돼지고기에 소흥 술로 적절히 졸인 고기 요리를 선보이며 백성들과 한 때를 더불어 지냈다는 것이다.
소동파는 이 요리를 위하여 시까지 지었다고 한다. “질 좋은 돼지고기는 아주 싼값이지만 잘 사는 사람은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삶지를 못하는구나. 물을 적게 넣고 약한 불로 삶으면, 다 익고 나서 스스로 제 맛이 나누나."
물론 동파육의 유래는 다양하다. 요리법 자체는 원래 있었던 것을 소동파가 (자기 요리사에게 시켰거나 자신이 직접) 개량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소동파가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를 해야만 그 이름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동파는 이름난 요리를 찾아 다녔고,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용할 수 있는 한국쪽 글은 없으니 참고삼아 바이두 백과의 동파육 유래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동파육이 황주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름난 문인 소식(동파)는 요리 쪽으로도 일가견을 이뤘다. 그가 황주(황저우; 黄州)로 폄적되었을 때(1080), 직접 요리를 하여 친구들과 맛을 보곤 했는데 특히 홍소육(红烧肉)이 최고였다. 그는 요리 비법을 "약한 불로 천천히, 물을 적게 넣고 삶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제맛이 난다."란 시구로 표현하였다. 황주에서 지은 이 시는 다음과 같다.
돼지고기 먹기《食猪肉》
황주의 돼지고기는 질은 좋으면서 가격이 진흙처럼 싸, 부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자는 삶을 줄 모른다. 약한 불로 천천히, 물을 적게 넣고 삶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제맛이 난다. 매일 아침 한 그릇 뚝딱, 내 배가 부르니 그대 뭐라 하지 마오.
냄비를 깨끗이 씻어, 물을 적게 넣고, 화염이 일지 않을 정도의 약한 불로 천천히 익히되, 익기 전에 급하게 뚜껑을 열지 마라.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제맛이 날 것이다. 황주의 돼지고기는 질이 좋으면서도 가격은 진흙처럼 싸다. 부자들은 먹으려고 하지를 않는데 가난한 사람은 삶을 줄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한두 그릇 뚝딱 먹는다. 내 배가 부르니 누가 뭐래도 상관 없지. 净洗锅,少著水,柴头罨烟焰不起。待它自熟莫催它,火候足时它自美。黄州好猪肉,价贱如泥土。贵人不肯吃,贫人不解煮。早晨起来打两碗,饱得自家君莫管。(《猪肉颂》)
그런데 황저우 시기의 이 요리는 그냥 홍소육이지 "동파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소동파가 폄적되어 지방관으로 재직하던 서주(쉬저우; 徐州), 황주, 항주(항저우; 杭州) 세 곳 모두에서 동파육 비슷한 것을 만들어 먹었는데, 서주의 경우 회증육(回赠肉)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가 서주지주(徐州知州)로 재직할 때 홍수용 제방과 성곽의 보수를 하자 백성들이 감사하는 마음에 돼지를 가져다 바쳤는데, 동파가 거절하지 않고 모조리 받은 후 홍소육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 주었다고 한다. 백성들이 먹어보니 돼지비계가 많아도 느끼하지 않고 향기와 맛이 뛰어나 즐거워했다. 즉, 지금의 동파육과 거의 비슷했지만 이 시기의 이름은 "선물로 되돌려준 고기", "답례용 고기"라는 뜻의 "회증육"이었다.
지금은 황주 쪽에서야 동파육이란 이름을 찾아오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동파육이 유명해지고 지금까지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된 것은 항주와의 관련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단 하나의 유래만 말한다면 동파가 항주의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 있었던 이야기만 하면 된다.
(왼쪽: 동파육은 보통 조그마한 항아리에 담겨 나온다. 오른쪽: 동파육 모양의 수석)
동파가 항주에 부임했을 때 서호는 그 옛날 이름난 아름다운 호수가 아니라 옛 흔적만 남은 진흙 시궁창이 되어 가고 있었다. 동파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호수 정비 사업을 한다. 이 때 호수의 진흙으로 만든 제방이 아직도 서호십경의 하나로 꼽히는 소제(苏堤)이다. 당시 백성들은 서호가 풍광도 좋아지고 넉넉한 저수량으로 풍년을 이루게 되자 소동파의 서호 정비사업을 칭송하였는데, 마침 동파가 홍소육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설날에 너나 할 것 없이 돼지고기를 선물로 보내게 된다. 어차피 혼자서 먹기에 곤란한 양이었던지라 소동파는 그 고기를 서호 정비사업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돌려줄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요리법을 집안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네모나게 썰어서 약한 불로 익히고 술과 함께 백성들에게 줄 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집안 사람들이 "술과 함께 줘라"(连酒一起送)는 말을 "술과 함께 쭤라"(连酒一起烧)고 듣고는 술과 고기를 함께 넣고 조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요리의 맛과 향이 더할 나위 없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동파의 이름을 딴 "동파육"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여러 설이 있지만 역사와 민간의 이야기가 혼합된 이것이 가장 대표성을 띠고 있다고 본다.)
지금도 항주의 서호변에 있는 이름난 식당 "루외루"(楼外楼菜馆)의 동파육을 가장 정통으로 친다.
(루외루 식당의 "동파육", 아래는 마찬가지로 루외루의 대표요리 "거지닭". 아, 다시 먹고 시포..)
후밍(呼鸣)이라는 중국계 여성작가의 작품이다. 보기에는 문혁을 정점으로 한 혁명적 리얼리즘을 고취시키는 평범한 선전화인 것 같지만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이 있다. 바로 여군의 신체 중 가슴과 엉덩이, 눈 부위이다. 획일화되고 무표정한 남자 군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여군은 마찬가지로 비장한 자세로 절도 있게 움직이지만, 우리는 투명한 군복 속으로 비쳐나는 탱글탱글한 엉덩이와 오똑 솟은 가슴, 그리고 유두를 확인할 수 있다. 절도있는 자세와는 달리 눈빛은 색기로 넘쳐 흐른다.
이에 대한 중국 인터넷의 반응은 건강하고 풍만한 여성미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소수의 긍정적인 시선보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이다. "그녀는 부대에서의 교육과 해방군의 영광스러운 사명을 잊은 저속한 취미의 사람이다. 그녀의 몸에 표현된 것은 육욕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무 사상이 없다고 생각된다."
후밍은 이미 시드니에 거주하는 중국계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여류화가로 통한다. 이들의 의견도 반반이다. "후밍의 유화작품은 풍유비둔(丰乳肥臀 ; 풍만한 가슴과 통통한 엉덩이. 모옌의 소설 이름이기도 하다.)의 인물형상만 가득하지 다른 의미는 찾을 수 없다"는 입장과 함께, "신세대 중국여성, 특히 중국 여군의 다른 측면을 잘 구현하였다. 부드러움과 함께 용감하고 건강한 미를 보여준다."라는 입장이 공존한다. 후밍의 작품은 현재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그 가치를 높이 사는 이들도 많아 798예술단지를 비롯한 중국내 여러 지역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경매에서도 작품당 20만 인민폐(4천만원 정도) 내외에서 팔려 나간다고 한다.
작가 후밍은 1955년 북경 태생으로, 1970년에서 1989년까지 20년 간 중국인민해방군에 복무하였으며, 군인 신분을 유지한 상태에서 79년 천진미술학원 중국화과 수학, 93년부터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90년에 뉴질랜드로 출국하여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1999년부터 호주 시드니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누군가 내 스타일과 비슷한 작풍을 보인다면 그 즉시 내가 바꾸겠다!"라고 공언한다. 아카데미 화풍에서 기피하는 금기를 건드려온 그녀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말이겠다. "나는 내 자신의 원시적인 감각을 존중하며, 자신의 창작 양심을 존중한다. 나는 정말 진지하게 근육 하나하나를, 젖가슴을, 엉덩이를 그린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리고, 가장 편안게 생각되는 자세를 배치한다. 섹시함은 내 그림에서 영원히 추구하는 목표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살아 있으며, 나를 좋아하고 내 그림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싶다. 나는 시장의 조작에 코 끌려 가는 것을 언제나 경계한다."
서양 아가씨와 금붕어 그림을 그리면 잘 팔리지 않겠느냐는 호주 쪽 화랑 관계자의 청을 거절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들이 중국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도 서양 아가씨를 잘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금붕어는 전통회화에서 "정부, 첩"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래 그림의 제목은 "네 미녀Four Beauties"이다.)
중국을 지시하면서 중국의 금기를 깨는 그의 화풍 때문인지, 아직 그녀의 영향력은 중국 내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전시 목록을 봐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로 화교가 많은 시드니가 아니면 중국이 활동 무대이다.
아무래도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작품자체의 성향보다는 인민해방군에 대한 우상파괴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건 마치 옌롄커의 <인민을 위해 해방하라>가 전작 <물처럼 단단하게>에 비해 더 위험해서가 아니라 모택동 석상을 파괴하고 인민해방군 사병과 사단장 부인의 사랑을 다뤘기 때문에 금서가 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신성하게 국가를 지켜야 할 인민군 여성 사병에 성적 시선을 부여한 것이 아무래도 불편한 것이다. 옷을 입고 있음에도 옷 속 여성의 성적인 신체를 바라보는 은밀한 시선을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뜨끔하지 않을 남성이 있을까? 투시카메라로 그녀들을 바라보고 싶다는 욕망?!
일이 있어 잠깐 집에 다녀오다 김포공항 3층에 있는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울적한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는 가벼운 느낌과 사진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뿐이었다면 이 책은 기대에 부응했다고 할 수 있다. 왠지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와 버린, 누구나 사진을 찍지만 아무나 특별하게 찍지는 못하는 게 사진이라는 걸 알기에, 멋대로 찍더라도 대부분 멋대로 공개하지는 못한다. 나 또한 내가 찍은 사진을 쉽게 노출시키기를 꺼려한다. 아직 그 사진에는 내 시각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뭐, 그렇게까지 갈 것도 없이 노출이니 구도니 하는 가장 기본적인(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조차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초보일 뿐이니까.
아무리 초보일 뿐이라도, 자랑할 만한 자기만의 시각이 없더라도, 누구나 다른 시각을 가지게 마련이니 자신있게 마음대로 찍고 그 사진을 사랑할 것을 이 책을 주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손쉬운 충고가 아닐까? 사진은 생각보다 어려운 수련을 거쳐야 되는 높은 단계의 예술이 아니라 누구나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매체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구나 셔터를 누를 수 있지만 누구나 조선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피사체를 프레임 안에 가둘 수는 있지만, 누구나 그 피사체에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하지는 못한다. 물론 그것은 무협지 식으로 말하면, 하루이틀의 수련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말로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십년을 면벽수련한 내공절정의 고수도 이제 갓 무예계에 입문한 기재에게 깨지기도 한다. 시즈쿠와 잇세, 모짜르트와 아마데우스? 예는 차고도 넘친다. 기재도 아니고 사진기만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사람에게 이 책이 위안인 것은 분명하나, 위안만으로 자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어딘가에서 본 듯 친숙하지만 곰곰히 바라보게 하는 이미지는 있으되, 두고두고 곱씹을 문장은 별로 없다. 즉 저자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장인일지 몰라도 사진에 대한 자기사유의 측면에서는 그냥 자신감 넘치는 초보에 불과하다. 물론 이것을 꼭 평가절하의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저 나에게 그 책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을 뿐이다. 한 마디는 건졌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절반을, 그 다음날 저녁에 나머지 절반과 눈에 띄는 사진들을 다시 봤다.
나에게 이 책의 가치는 거의 잊고 지냈던 조르바를 되살려 냈다는 것에 있다.
아마도 "사소한 것에서 발견하는 특별함"일 것으로 생각되는 챕터를 읽다가 문득 조르바를 떠올렸다. 여행할 때는 그렇게 신기하게 보이던 것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직접 생활하면서 좀 더 자세히 알기 전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 익숙함은 양면의 칼인데, 일주일을 여행와서 받아들이듯이 매일의 정보를 받아들인다면 나의 머리는 터져나갈 것이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일상과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것으로 처리하며, 단단한 그것에 발을 딛고 서서야 그에 벗어나는 예외적인 현상과 새로운 사건에 주의력을 집중하고 그 의미를 캐내곤 한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상당히 이상할 수 있는 일들이 나에겐 전혀 어색하지가 않게 되어 버렸다.(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 적응했네!"라는 찬사가 따라붙는다..) 따라서 그 사건들, 그 풍경들, 그 피사체들은 나에게 그다지 신기하지 않은 일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조르바의 능력은 이런 것이다(라고 기억된다..ㅡㅡ;;)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보이는 태양과 길가에 흩어진 돌맹이들, 이름모를 풀잎의 이슬까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그는 받아들인다. 그는 항상 생명으로 충만해 있다. 그건 마치 잠이 들면 죽었다가 매일 아침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다. 그는 항상 아이의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과거에 연연해 하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순전히 지금 이 순간, 한 점으로 소멸되는 현재에 살고 있다. 그것은 카잔차키스의 사유와 인위적인 수련으로 가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도가에서 수련을 통해 이루려는 경지를 그는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그를 동경하는 한편 겁이 난다. 안 그래도 읽는 족족 머리에서 사라져 버리는데, 매일매일 내 머리가 리셋팅된다면? 그건 절망이다. ^^;; 우리는 (이미 나의 것인) 익숙함을 버리고 그것에 오체투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그냥 동경할 뿐이다. 너무 익숙해져 버린 일상과 상식에서 새로운 태도를 가지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사진기를 마구 갖다 대다 보면 자기도 몰랐던 새로운 것을 뒤늦게 발견할 수도 있으나, 사실 그건 내가 바라본 것이 아니라 사진기가 바라본 것이다.
아끼던 그리스인 조르바는 20세기 그믐년에 중국으로 일 떠나는 친구에게 줬다. 나에게 그는 특히 생김새 면에서 조르바였다. 그의 삶이 얼마나 조르바다운지는 모른다. 비교적.이라고 해 두자.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남은 조르바? ^^;; 나는 헌책방에서 새로 샀으나 그 후로 다시 읽지는 않았다. 그를 대하기가 겁도 나고.머.그런 거다.
조선희의 <네 멋대로 찍어라>는 서가의 한켠에 두는 것보다 읽을 만한 이에게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대상을 잘못 골랐다.
상해에 처음으로 와서 이제 막 생활을 시작한 처조카에게 핸드폰을 선물할 생각이었다. 중국어를 모르는 꼬맹이에게는 꼭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이다. 유학생 카페 벼룩시장에서 비교적 적절한, 애들도 좋아할 만한 한국어가 되는 기종을 골라 연락을 취하고 만나서 협상을 시작했다. 내 협상카드는 이 책을 선물하고 가격을 '많이' 깍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을 가져온 이는 자기 물건이 아니라서 많이 깎을 수 없고, 사진(책)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마음이 떠난 책을 다시 가져오기도 그렇고 해서, 안겨 주고 50원만 깎았다.
핸드폰은 비교적 깨끗했으나 뒤늦게 충전기(아답터 딸린 충전기 말이다)가 없는 것을 발견, 전화하고 문자를 보냈으나 무응답이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기다리다, 열흘이 지난 오늘 다시 연락을 취해 보니 전화번호를 죽여 놓았다. 이래저래 인연이 없었던 책이었나 본데. 책이 조금 많이 아깝다. 그 주인에게서도 사랑받지는 못할 것 같다.
카페에 아이디와 전화번호를 공개하고 쪽을 줄까도 잠깐 생각해 봤지만, 카페가 전임 운영진의 광고비 착복 문제로 어수선하기도 하거니와 충전기 정도로 그럴 것도 없겠다. 충전기야 아무데서나 하나 사면 그만이지만(15원 하더라!), 책까지 선물한 내 정성을 생각해서 그의 미래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비겁함은 다음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비겁했던 경험을 곰씹고 직시하지 못하면 그는 앞으로의 삶에서도 계속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회피해야 할 것이다. 나의 저주이다. 좀 약하나?
아주 오래전 테레비에서 본 만화가 생각난다. 아니 항상 품고 있다가 가끔씩 꺼내보는 사진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만, 제목도, 누가 썼는지도 모른다. 난 그냥 테레비에서 보고 이야기만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왕국에 왕이 아끼는 항아리가 깨졌다. 왕은 왕국 제일의 도예가 할아버지에게 그 항아리를 전혀 깨진 흔적 없이 붙일 것을 명한다. 할아버지는 그 항아리 조각들을 가져가서는 붙일 생각도 하지 않고 들여다 보고만 있다.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고, 그는 왕에게 깨진 흔적 없이 완벽한 항아리를 바친다.
도제가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항아리를 붙였냐고 물어보자, 할아버지는 보자기를 풀어 왕의 깨어진 항아리 조각들을 보여준다.
그는 항아리를 붙인 게 아니라 깨어진 조각들을 보고 그와 똑같은 새로운 항아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단순하게 읽자면 이 깨어진 항아리를 "전통"으로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사라지고 조각난 좋은 전통을 아쉬워하며, 그것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미 조각으로 남은 그 전통은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며, 원래의 전통이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추억 속에서 이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전통의 복원 또한 사람의
손에 의해 재창조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잊혀진다.
도처에 깨어진
조각들이 있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원래의 형체를 깨뜨려 하나하나 조립해 봐야만 깨닫는 진리도 있으니까.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것일수록 원래의 형체는 알아보기 힘들다. 우리에게는 그것의 깨어진 부분들이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이 그 남겨진
부분에 연연하며 어떻게든 매끈하게 붙이려고 애쓴다.
가장 창조적이고 위대한 작업은
이렇다. 국보급 고려청자가 눈앞에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루만지고 감상하는 골동품 애호가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을 아낄수록 단번에
깨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 깨어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핀다. 커다란 조각의 무늬와 빛깔 뿐 아니라 먼지처럼 작은 알갱이를 어루만지며
그것의 재질과 구워질 때의 온도까지 가늠해 본다. 그리고 새로운 항아리를 굽는다.
그 결과는 원래의 항아리를 복원하는
비슷하게 닮은 항아리일 수도 있고,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똑같거나 그것을 뛰어넘는다는 생각도 우스운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 자기만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이다. 그 파편들은 새로운 작품에 생생하게 인용되고 있지만 이미 그의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국보급 문화유산도 깨뜨릴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전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