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flaneur, p.m. 4:30 2008. 1. 9. 03:40

아침 8시 30분에 시험을 보는데 봐야할 분량의 1/3도 못 봤다.
낮에는 중국친구들이 드디어 영어시험이 끝났다고, 그네들 말로 "해방되었다"면서 종강파티를 한데서
같이 가서 점심을 먹었다.
낮술도 한잔..
지들은 해방되었지만 나는 그 다음날 시험이 있는데 말이다.
사실 어학시험은 . 글쎄.
학교에서 요구하는 필수과정이라서 듣는 어학과정은 영양가도 없고, 하기도 싫은 법.
영양가는 없되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이것도 시험인지라 쓰기가 힘들 거라는 것,
그것이 내 실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핑계까지.
뒤섞여 머리에서 맴돌며 시험공부에 빠져드는 걸 피하게 해준다.
나에겐 해야할, 하고 싶은, 더 중요한, 할 만한 일이 많단 말야.. ㅡㅡ;;

로얄제리를 조금씩 챙겨먹고 있다.
중국에서는 비싸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호주산 머시기가 좋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벌이 만들어 주는 것 아닌가?
관리를 어떻게 잘 한다고 해도 오십보백보일 것이다(라면서 위안을 삼는다).

태어날 때 일벌과 여왕벌은 아무런 구별이 없어.
먹는 것에 따라 누구는 일벌이 되어 일주일 만에 죽고, 누구는 여왕벌이 되어 몇년을 살며 엄청난 생산력을 보여주지.
애야.
먹는 게 벌의 일생을 좌우하는 것처럼,
어떤 책을 읽느냐가 사람을 달라지게 한단다.
여왕처럼은, 더 부유하게와 반드시 연결되는 건 아닐거야.
그래도 더 고귀하게 살 수는 있겠지.
꿀같은 책도 있고, 로얄제리같은 책도 있단다.
먹을 땐 달콤하지만, 물론 이것도 몸에 좋은 거긴 하지만, 일주일도 못 가 사라져 버릴 책도 있고,
먹을 때는 시큼하고, 떨뜨럼하고, 톡 쏘고, 역겨워서 못 삼킬 수도 있지만
너를 여왕처럼 고귀하게 만들어줄 책도 있지요.

로얄제리를 먹으며,
아이가 커서 말을 이해할 때가 되면 이런 말을 들려줘야지 하는 몽상을 해본다.
그러나, 사실은,
그건 나에게 필요한 말일 터다.
그게 자기 아이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교훈이 아니라, 자신에게 되묻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꿀같은 책을 읽고 있나, 로얄제리같은 책을 읽고 있나.
이미 굳어진 내 신체와 머리를 뒤흔들어 놓을,
로얄제리와 같은 책을 상대할 자신은 있는가.
시큼떨떠름한 세상이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외면하고 달콤한 몇 가지 말귀에 내 인생을 소진하는 것은 아닌가.

며칠째 계속 묻고 있지만,, 글쎄다.
내가 이 말을 자신있게 내 아이에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은 쓰디쓴 어학책을 팽겨치고 달콤한 텍스트들에 빠지고 싶은 생각 뿐.
좀 자 둬야 그나마라도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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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