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시멘트에 향수를 느끼는 세대"와 굳이 연결시킬 필요는 없겠다. 횡사도의 버려진 다리에서 내가 느낀 것은 향수가 아니었다. 육지에서 300미터를 넘게 강/바다 쪽으로 이어진, 난간조차 없는 버려진 다리가 내게 주는 느낌은 두려움, 그로테스크, 미래소년 코난에서나 나올 법한 세기말적인 풍경이었다.
쨍한 날이지만 노출을 억제한 이 사진이 거기서 받은 내 인상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횡사도의 버려진 다리에 대한 예고편 포스팅 되겠다. 바쁠수록 해야할 일보다 하고싶은 일들이 더 많이 떠오르는 법!
시멘트 건물에 향수를 느끼는 세대라는 말을 집사람에게서 들었다.
알고 지내는 다큐 감독 언니의 새로운 시나리오에서 읽은 것이라고 한다.
엇?
"시멘트"와 "향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인데 의외로.. 여운이 남는 조합이다.
시멘트 하면 우선 생각나는 건 "부르꾸"(우리 동네에선 블럭을 다 이렇게 불렀다!)로 쌓아올린 담장이다.
세멘(시멘트)은 적게 들어가고 모래만 잔뜩 넣어,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만지면 바스라지는 그런.
바깥을 시멘트로 매끄럽게 미장하지도 않아 까맣게 변색되고 군데군데 이끼도 끼어 있는 그런 낡은 부르꾸 담장이 우리 동네에는 즐비했다. 원래 돌과 흙을 이겨 만든 담장들은, 볏짚을 얹은 초가집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문득 그 정겨운 초가집과 흙담장이 전혀 향수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시절 높디높던 담장이 어깨맡에 오게 된 그 시간의 흔적이 부르꾸 담장에 남겨져 있나 보다.
누나가 새로 쓴 시나리오는 영화 편집용으로 무려 12년간 사용한 매킨토시 요세미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나는 그 기종을 구경한 적이 없어 정확히 어떤 모양을 한 놈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워드용으로 사용할 컴퓨터도 10년을 넘겨 사용하기는 힘들다는 것, 아마추어로 시험삼아 15분짜리 단편을 편집하는 것도 아니고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사람이 12년 전 최신기종을 21세기까지 사용했다는 게 좀 뜨악했다. (사실 그 누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뜨악할 일도 아니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든.) 부팅 버튼을 눌러놓고 한참 책읽다가 편집 가동시켜서 처리가 되기까지 한두 시간 혹은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한다고. 그러다가 중간에 퍼지면 그때까지 편집한 것이 모조리 헛수고가 되어 마음 졸이면서 말이다. 첨단 테크놀로지의 수공업적 제작?
새끈하고 처리속도 빠른 최신기종이 없다면 영화도 못 만들 것 같고, (내 기술 때문이 아니라) 카메라 때문에 사진도 구린 것 같고, (내 귀가 문제가 아니라) 스피커를 탓하고 싶지만, 어쨌든 10년 이상씩 지니고 다니는 것들에는 그 물건만이 가진 기억이 있고 어떤 정서적 교감 같은 게 있나 보다. 십년째 들고 다니는 핸드폰, 십년 된 노트북, 십년 된 전자사전, 십년 된 mp3 플레이어 따위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건 무려 시멘트 건물에 향수를 느끼는 것보다 더욱 머나먼 거리에 있는 어떤 것이다.
요세미티로 마지막 편집한 <앞산展>이란 영화가 인디포럼 관객상을 받고, 요세미티 시나리오도 지원을 받게 되는 등 최근 들어 좋은 일이 많은 것 같다. 축하할 일이다. 지원받은 금액의 절반은 새 카메라(8미리 DV에서 디지털로)에, 나머지 절반은 새 편집용 매킨토시에 사용될 것 같다. 촬영과 편집에 최소한 필요한 장비를 갖추는 데 지원금 전체가 들어가 버리면 영화는 어떻게 찍나?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이며, 에세이로 너무나 훌륭한 그 시나리오의 발상이 과연 영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걸일까? 새로 산다는 장비들이라고 해 봐야 취미로 즐기는 아마추어들도 들고 다니는 그런 것들일 텐데. 이 장비들은 앞으로 또 몇년을 그녀와 같이 할까? 멀리서 바라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그러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녀이다.
내가 그녀를 친근하게 생각하면서도 친해지지 못하는 건 무엇 때문일까? 그녀와 내가 한 여자를 공유하기 때문에? 그런 라이벌은 아니고. ㅡㅡ; 내 생각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면 내가 까발겨지기 때문이다. 어떤 상식 같은 게,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식(공통관념)을 우리가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학술논문에서라면 이 전제에 대해 차근차근 따지고 설명한 뒤 본론으로 들어가겠지만 일상의 대화에서 우리는 대부분 그것을 생략한다. 우리는 상식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그녀는 그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왜 그런지 따져 묻는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느껴질 수 있는 그런 근원적인 질문은 사실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때 대부분 나의 반응은 무시하거나 설명하려고 애쓰다 짜증을 내게 되는데, 그것도 내 뿌리가 약해서 그런 것이다. 기초가 약한 게 들켜서 짜증이 나는 것일 테다. 한참 지나 돌이켜보면 그런 게 고마워서 다음번엔 싹싹하게 굴어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앞산전>이 아직 <이진경>일 때 디비디로 가편집 영상을 볼 기회가 있었다. 집사람에게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인데 나도 마침 귀국해 있었기 때문에 같이 보게 된 것. 그러나 영상이 시작되는 즈음에 설겆이도 끝나고 한가해진 나는 알 수 없는 바이러스 경고가 계속 뜨고 있고 쓸데없는 프로그램도 많이 깔려 느려진 집사람 컴퓨터를 열어보고 있었다. 지울 것 지우는 사이에 영상을 볼 셈이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집중해서 보지는 않았지만 편집의 방향이나 영화 자체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정도로는 계속 보고 있었는데, 전혀 먹히지 않았다. 말을 꺼내보지도 못했다고 해야 할 듯.(가편집본을 두고 자막 글씨체가 구리다는 둥의 말로 시작을 했으니, 당연히...개무시!) 누나는 자기가 애써 만들고 있는, 무수한 가능성의 갈래길에서 어떤 시간순서와 공간적 배치를 만들어야 할 지 막막한, 어쨌든 당시 자기 최대관심사를 흘깃흘깃 곁눈질로 보는 게 기분 나빴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입장 바꾸면 나도 기분 나쁠 것 같다. 단지 나에겐 집사람에 대한 의무가 더 중요했을 뿐이다.
여러 의견들이 오갔고, 그녀 자신도 많은 고민을 한 끝에 <이진경>은 <앞산전>이 되어 있었고 반응도 좋다고 하니 반갑다. 집사람 말로는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어 있다고 한다. 이번에 귀국하면 곁눈질이 아니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앞산전>을 봐야겠다.
상해의 북쪽, 장강 하구에 위치한 횡사도(헝사다오)에 다녀왔습니다. 장강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삼각주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 섬이 있는데 가장 바다 쪽에 가까운, 그리고 가장 작은 섬이 횡사도입니다. 날씨는 쨍하였고, 가끔 흐려서 자전거를 타기에 적당했습니다만, 반바지 아래와 팔뚝은 발갛게 익어 버리더군요..
바쁜 게 조금 지나가면 횡사도 관련 포스팅을 할까 생각 중입니다. 사람도 적고 차도 적어서 자전거 타기엔 아주 그만이더군요. 공기도 좋고 길도 곧습니다. 먼지 많고 위험한 상해에 비할 바가 아니죠..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 이후 4000명이 넘는 교수들이 동참했고, 대학사회를 넘어 각계각층에서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블로거 시국선언도 준비중이며 이미 많은 블로거들이 선언문을 포스팅하거나 트위터로 참여의사를 밝히고 있다.(트위터 시국선언 참여자 명단) 나도 그참에 트위터에 가입하고 슬쩍 이름을 올리긴 했는데. 몇 가지 생각이 머리를 누르고 있다.
우선, 시국선언이라는 말.의 무게가 달라진 느낌이다. 한마디로 말해,
"개나 소나 시국선언 한다고 나서느냐?"
시국선언에 참여한 많은 사람을 개나소나로 만들어 버린 단초는 정부의 첫 반응이 제공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서울대 교수가 몇 명인줄 아느냐? 고작 124명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냐?"
1700여 명 vs 124명 이라는 숫자로 계량화하는 순간 시국선언의 취지나 의미, 구체적인 선언문의 내용, 선언에 참여한 교수들의 고민 같은 것은 사라진다. 자연히 건국이후 최대라는 시국선언 참여교수 4000명 돌파 또한 무의미하다. 전국의 교수는 또 얼마란 말인가. 무게가 달라진 것은 교수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지식인, 혹은 최소한 어른 취급 받던 대학생들이 지식인은커녕 미성숙한 어린애 취급받는 분위기에 비례하여 교수들에 대한 인식 또한 예전만하지 못하다. 그들 또한 그냥 직업인이며, 자기 세계에 파묻혀 뭔지 모를 것들을 하는데 돈도 별로 못 버는 것 같고, 알게모르게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것 같더라는. 이미 교수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회의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을 기대하던 시대는 지났다.(배부르게 "잠수함의 토끼"를 교수들에게 요구할 것까지도 없다.) 그것까지도 MB는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교수에게 그런 권위가 사라진 것처럼, 경찰과 검찰에도, 정치인에게도, 대통령에게도 그런 권위는 이미 사라져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총통에게 돌려줄 수 있다. 국민이 몇 명인줄 아느냐? 고작 유권자의 30%의 찬성으로 그 자리에 올라가 있는 게 말이 되느냐? 유권자에 더하여 투표권이 없는 시민들까지의 의견도 존중되어야 할 것 아니냐? 자기 편한 숫자만 취하지 말고 공평한 잣대를 들이밀자면, 그냥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비록 07년에는 지지했지만 지금은 돌아선 사람들까지 포함한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위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말이다. 90%의 권력을 가진 상위 1%를 위한 일만 하는 주제에, '다 잘 되자고 하는 짓이다. 비록 지금은 나를 비난하지만 결국엔 나를 칭송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 하나만으로 버티기에 좀 버겁지 않니?
또 하나는 블로거 시국선언문.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는 대학들을 중심으로 몇 개 읽어봤는데, 우선 참여교수의 스펙트럼이 꽤 넓어 보인다. 즉, 왠지 이런 자리에 낄 것 같지 않은 의외의 교수들이 여럿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당연히 있어야 할텐데 빠진 사람도 없지 않다. 선언문의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모두들 방점은 조금씩 다르지만 꼭 짚어야 할 사안들을 거론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엠비에게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꼽자면, "사회적 합의와 민주적 절차"를 강조한 인하대학교 시국선언이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반적 실정보다 더 큰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정권의 통치행태 자체가 민주정치의 기본을 원천적으로 거스르고 있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작년의 촛불정국에 대한 대처에서 보았듯이 현정권은 민주사회에서 국가정책과 국민여론의 갈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설득과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국민적 저항과 반대를 묵살하거나 물리적으로 침묵시키거나 아니면 요령껏 회피해야 할 방해물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스스로 선거에 의해 탄생한 합법적 정권이면서도 마치 쿠데타에 의해 수립된 비합법정권인 것처럼 정당한 절차 대신 공권력의 폭력과 기회주의적 기만책을 동원하는 음모적 방식의 통치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구글독스에 정리된 블로그 시국선언문에도 필요한 내용은 다 들어 있지만, 왠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교수들 흉내내지 말고 블로거로서의 특징을 좀 더 낼 방법이 없을까? 블로거다운 글로 블로거들의 요구를. 물론 시국선언이니만큼 블로그나 인터넷에 한정되지 않은 현 시국에 대한 진단과 요구가 들어가야겠지만, 그걸 적절하게 표현하는 블로거다운 방식은 뭘까? 캡콜드님의 140자 선언문의 모음?
사회적 삶의 질이 개판이고, 그게 상당 부분 너네 때문. 용케 대통령과 국회 과반 먹은 건 알겠는데, 여기까지 엉망이면 난감.
1.남의 말도 좀 듣고, 말 좀 막지마.
1.너네편이라고 쭉정이들만 자꾸 기용하지마.
1.같이 잘살아보게 궁리 좀 하자 좀.
작가들이 가장 작가다운 방식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블로거다운 방식이 더 많은 공명을 얻어내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정말로. 작가들의 선언을.. 엠비 공무원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선언문 작성에 참여하고 있는 블로거들도 이런저런 고려 때문에 쉽게 완성하지 못한 것 같다.
사실 가장 간단한 건, 어쩌면 선언문 따위 제쳐두고. 바로 저들의 논리, 즉 "블로거가 몇 명인 줄 아느냐?"라는 말이 쑥 들어가게 엄청난 인원, 최소한 500만 정도가 블로거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게 어차피 읽지도 않을, 혹은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선언문을 만드는 것보다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고작 500명을 넘어서고 있다..)
말의 힘. 말 속에 숨어있는 의미의 힘.이 점점 작아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를 뱉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의 시간이 외면되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보고 무슨 장면이 떠오르시는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운하를 가로질러 설치된 그물을 평소에는 바닥까지 가라앉게 뒀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기중기로 그물을 끌어올려 데굴데굴 그물 중간으로 모인 고기를 싸그리 주워담는 방식으로 물고기를 포획하는 장면을 만났다. 하도 어이가 없어 이것은 또 무슨 대륙 시리즈인가 싶은 느낌만.
말이 필요없으니 몇 장면 더 보는 게 좋겠다.
잠깐 든 생각. 저 그물 밑에 깔리면 어떡하나?
하루 일을 마치고 귀환하는 어부(?) 결코 평화롭지만은 않은 풍경이다. 물론 이 또한 그들만의 삶의 방식이다. 외부인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이번 학기에는 한국에 들어갈 계획이 없었지만, 여차여차한 이유들 때문에 5월초에 잠깐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간 김에 어린이날을 번잡한 서울에서 보내기 싫어 아이를 데리고 고향에 다녀왔다. 마침 엄마의 생신도 다가오는데, 그때까지 있을 순 없고 해서 얼굴이나 비추고 일이나 좀 도울 요량이었다.
말라꼬 찍노! 찍지 마라 손사래를 친다. 왜 흐릿할까?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조교로 있던 형은 항상 일을 시키면서 고급인력을 이런 식으로 부려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땐 약간 대접받는 느낌도 있고 해서 그런가부다 했는데, 오랫만에 단순반복노동을 하다가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고급인력"이라는 말. 두뇌노동을 하는 왠만한 학벌(학력일까?)의 사람이란 뜻으로 고급인력이란 말을 사용한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그 말은 그 형의 삶에 대한 태도가 묻어난 말인 것 같다. 딱히 후배를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단 자기 스스로가 고급인력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접받고 싶은 마음. 후배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자기합리화 과정? 나같은 촌놈은 학과에 일이 있으면 (조금 귀찮을 때도 있지만) 후다닥 해치우는 것에, 몸을 쓰는 것에 큰 부담은 없었는데.. 또 지금 생각해 보니 "고급인력"이라는 말이 나를 지금까지 조금은 오염시켰던 것 같다. 그 단어에 전혀 매어 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니 말이다.
4월말 5월 초의 고향은 바쁘다. 4월 초에 비닐하우스에서 오이가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6월 초중순의 모내기가 끝날 때까지가 일년 중 가장 바쁜 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 때는 시험기간임에도(시험은 항상 시골이 바쁠 때와 겹쳐 있었다!!) 일을 시키려는 아버지를 피해서 달아나기 위해 공부했다. (아이의 반항심을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 공부를 못하게 함으로써 공부시키는 방식이 뭐 있을까 고민 중이다. 도시에서는 좀 힘들겠다. 근데 이렇게 해서라도 공부를 시켜야 하는 걸까? 그냥 두자.) 그래서 촌놈임에도 촌에서 하는 중요한, 큰 일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엄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엄마가 시간이 나지 않아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동네 입구 쪽에 우리 논 두 쪼가리에 비닐하우스가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논을 빌려서 마늘을 심어 뒀다.
이번에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일은 마늘꽃을 따는 일이다. 4월 말 밥상에 올라오는 마늘쫑을 우리는 마늘꽃이라고 한다. 아마도 줄기는 마늘쫑이 맞을 듯하다. 줄기가 여물고 끝에 꽃이 피고 씨가 맺히면 마늘 뿌리가 굵어지지 않기 때문에 줄기를 잘라줘야 한다.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마늘꽃이 피면) 지 새끼 먹인다고 지는 아무 거또 안 묵자나!"가 되겠다. 굳이 자식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겠으나,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마늘은 뿌리만으로 번식이 되는데 왜 꽃을 피우고 씨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인간 중에 자기 신체의 일부로 똑같은 개체의 생성이 가능하다면, 그래도 아기를 낳으려는 사람이 있을까?
어릴 때는 온 가족이 몰려가서 마늘꽃을 똑똑 따다가 모아서 반찬을 해먹거나 할매가 내다 팔곤 했다. 지금은 모조리 버린다. 유일한 목적은 마늘 뿌리가 굵어지는 것인데, 마늘꽃을 따도 내다팔 데도 없고, 팔려고 해도 일손이 모자란다.(돈도 안 되고..) 이게 도시의 누구네 집에서는 귀한 반찬이 될 수도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바로 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일손을 도우면서 공짜반찬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시골에 지천이라는 사실을 또 도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알면서 못하거나 인연히 없어서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테고.
마늘꽃을 뽑다가 알이 차지도 않은 마늘을 뿌리채 뽑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아부지는 호통을 치곤 하셨다. 일이 하기 싫어서 그리 되는 거라고 말이다. ㅡㅡ;;
마늘쫑을 이용할 셈이라면 줄기채 뽑아내야 하지만(좀 길어야 반찬이라도 하지..), 바로 버리면 되었기 때문에 꽃이 달리는 부분만 똑 따내면 되었다. 한정된 시간에 혼자서 최대한 빨리 해야 되기 때문에 효율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일로 접근하면 농촌은 전혀 목가적이지 않다.
머리는 전혀 쓸 필요 없고, 이파리 사이에 감춰진 마늘쫑을 즉각적으로 발견할 눈과 재빠른 손만 필요하다. 종일 하고 나면 잠자리에 들 때 마늘쫑이 아른거린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한 시각적 정보가 눈에 각인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동안 꿈에도 나온다.
허리를 숙이고 똑딱똑딱 따다 보면 10분만 지나면 싫증이 난다. 그게 지나고 나면 아무 생각도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끊어질 것 같지만, 1시간 안에 몸은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로 변해, 가장 효율적으로 반복되는 작업을 하게 만든다. 산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유의 원천이 되었나? 내 생각에 칸트가 마늘쫑 따기나 김매기 같은 일을 매일 할 수 있고, 그게 어떤 거라는 걸 알았다면 산책을 버리고 하루 2시간씩 일을 했을 것 같다..
사진은 전체적으로 장난질을 좀 많이 쳤다. 이게 마늘밭이다. 쪼그만해 보여도 실제로는 꽤 크다. 첫날 오후 오른쪽 두 골을 겨우 했다..
나는 사흘 동안(이라고 해봐야 점심 때 도착해서 점심 먹고 출발했으니, 시간적으론 이틀?) 요 작은 논 한쪼가리 하고 왔다. 이보다 배 이상 큰 논도 시도했지만, 겨우 두 골밖에 못 했다.
그 다음날 여동생이 돌도 안 지난 갓난아기를 데리고 와서 재워놓고 열흘 넘게 일을 하고 갔다. (독한 것!!) 집안의 큰일은 도맡아 하는(그래서 이렇게 자잘한 일은 하지 않는) 남동생은 주말에 회사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 남은 일을 끝냈다고 한다.
나는 어버이날 겸 생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했는데, 결국 하는 척만 한 셈이다. 단순노동이 얼마나 사유에 도움이 되나 위안삼으면서 실제로는 위와 같이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그나저나 저 마늘을 누가 다 뽑을 것인가?
비만 오면 항상 넘칠 듯 위태로운 작은 둑 너머로 새로운 둑이 들어섰다.만, 이 둑 바깥의 토지는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비옥하지만 낙동강의 홍수피해가 잦은 이곳의 피해보상을 이런 식으로 해 버린 것이다. 구체적인 이용계획없이 농민들의 입을 막기 위한 행정이었기에 버려진 땅이 되었다가, 작년부터 소유권 없이 경작만 가능하게 풀었다. 홍수철을 피해 야채나 심는 정도?
둑에서 동네를 바라보면 대충 이렇다. 앞쪽에 낡은 둑이 보인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암말처럼 생겼다고 동네 이름이 "암마"이다. 지금은 멧돼지와 늑대가 출몰한다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암만 봐도, 내 눈에는 말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뒤쪽은 면소재지에서 동네로 들어서는 산길인데, 귀신이나 여우가 나온다는 소문이 흉흉하던 곳이다. 어릴때 차를 놓쳐 한밤중에 혼자서 걸어와야 할 때면 믿지도 않는 신을 찾곤 했다. 당시 유행가였던 "아베마리아~~"를 소리쳐 외치면서.. 귀신도 아스팔트길을 당할 순 없나 보다.
누구네 집 경운기인지는 모르겠다만.
사진은, 일하는 동안 별 투정없이 집에서 놀고 있던 꼬맹이가 고마워 저녁에 오토바이에 태워 동네 구경을 시켜주며 찍은 것이다. 다섯살이 되니 다 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