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獨立閱讀/讀, 서재 2009. 8. 8. 01:23
고민하는 힘고민하는 힘 - 10점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사계절출판사

제목 그대로이다. <고민하는 힘>이 세 권이 된 이야기.

강상중의 어느 책보다 잘 팔릴 것같고 많이 팔린 이 책을 내가 사게 된 것은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였다. 나를 이모부라고 부르는 꼬마가 있는데, 그 조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이 책을 선물하기로 했다.

조카는 지금 주재원으로 나와있는 아빠를 따라 상해에서 국제학교를 다니고 있는 초등학생이다.
아빠의 연수 때문에 미국에서 3년간 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에서 또 2-3년, 그리고 또 상해까지.. 이렇게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보니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다. 그런데 적응의 강도가 지나쳤나 보다. 조카가 같은 반 친구를 왕따시킨다고 친구 아버지가 집까지 찾아와 야단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자식이 왕따를 당한다면?
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자식이 왕따를 시킨다면?
이 또한 마찬가지로 골치아플 것 같다.

문제가 되었던 그 친구와는 어떻게 지내는지, 학교 생활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았는지, 그 사건을 계기로 마음의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지 등등 여러 가지를 묻고 싶었지만,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어보기도 애매하고 해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멀찍이서 살펴보기에 조카가 왕따를 당하는 게 아니라
(대견하게도?) 왕따를 시키는 쪽이 되었던 건 주류에의 욕망 같은 게 아닐까 짐작해 봤다. 계속 떠돌아 다녀야 했고, 친구들도 계속 바뀌어왔다. 변하지 않는 친구들이 있는 안정된 상태에서 조금씩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갈 환경이 아니었으니, 제일 잘 나가는 친구들 속에 내가 포함되는 편한 방식을 택한 듯하다. 듣기로 포항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문제가 되었듯이 상해에서도 너무나도 빨리 또래의 주류 속으로 잘 편입되었던 듯하다. 이쁘고 똑똑하고 공부 잘 하니 뭐 하나 빠질 건 없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가 아닐까? 그러니까 를 기준으로 삼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 것 말이다. 어린 조카에게 자기 취향과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라고 충고하는 건 너무 과한 것일까? 이 주류의 범위는 좁게는 잘 나가는 또래 그룹에서 시작하여, 상해에서도 중국인들이 다니는 저렴한 로컬 학교가 아닌 내 박사과정 등록금의 거의 10배에 달하는 국제학교에 다니고 싶어하는 욕망 같은 것을 넘어, 더 멀리 가면 미국을 대표로 하는 서구에의 경도까지를 포함한다. 미국에서 학교를 시작했으니 미국적 시스템과 한국의 학교시스템이 어린 친구 눈에도 너무 확연히 차이가 났을 테다. 그런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국제학교 졸업 후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목표만 가지고는 .. 그것 자체로 조카가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다. (잘 돼 봐야 돈 좀 많이 벌고, 잘난 놈과 결혼하는 것 정도?)

자기만의 상상력을 키우고 자기 생각이란 것이 있고, 자기 세계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미국이든 유럽이든 대학을 선택한다면 나는 조카가 자랑스러울 것 같다. 그냥 중국이든 한국에서 대학을 다녀도 마찬가지고.

정리되지 않은 그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 책을 주문했다.
그런데 귀국하는 날까지 책이 도착하지 않아 공항서점에서 또 한 권을 샀다. 먼저 읽고 선물을 한 다음 뒤늦게 도착한 책은 한국집에 보관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와이프가 또 한 권을 샀다. 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열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와이프가 산 책은 또 다른 친구에게 선물하고, 내가 산 책은 조카에게 선물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5월8일에 사놓고, 언제 줄 거니!? ㅡㅡ;;)

<고민하는 힘>을 다 읽고 나도 고민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고민상담용 책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고민을 할 것을 주문하는 책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우리들의 고민이란 게 소세키나 막스 베버가 살았던 100년 전의 고민과 많이 달라진 것도 아니다. 누군가 먼저 고민하고 내놓은 대답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내가 고민하고, 그 고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서 "확신할 때까지 계속 고민"하는 것, 거기서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살아가는 의미라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결국 자기가 찾아야 하는 것일 테니까.

젊은 사람들은 더 크게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계속해서 결국 뚫고 나가 뻔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새로운 파괴력이 없으면 지금의 일본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미래도 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고민.
초등학생이 읽어도 이해될까? ^^

http://lunatic.textcube.com2009-08-07T16:23:050.31010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講, 구경 2009. 7. 2. 02:30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한번 지껄여봐야겠다. 간단하게.

나는 도통 사람들이 홍상수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뭔가 자학적인 취미들이 있으신 것 아닌가?
누군가 이번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코믹하다는 의미에서) 재미있으며 홍상수의 삶에 대한 태도가 너그러워졌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 그야말로 웃기는 소리! 나는 기분이 졸라 꿀꿀하다. 오히려 밀양처럼 들이미는 영화보다 더 끔찍하고 음란하다, 이 영화는.

일단 남자 주인공들의 대사가 너무 싫다. 다들 국어책 읽는 것 같다. 예술영화(?) 티내나?
고현정의 대사와 표정, 연기는 소름이 돋힌다. 정말. 고현정 너 여신해라!

내 취향과 안목의 문제겠지만,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면 아리송하거나 가슴이 터질 듯이 꿀꿀하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리송하고, 제대로 알지는 못해도 꿀꿀해진다.
잘알못은 후자에 속하며, 전혀 웃기지도 통쾌하지도 않다.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의 속물성과 위선을 폭로한다구? 뭐 굳이 그럴 것까지나. 몰랐던 것도 아니고.
저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스물스물 올라오게 만드는 방식이 내 체질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인간의 은밀한 부분을 건드리는 게 싫다. 잘난 척하지만 너도 똑같이 적절한 기회만 되면 부적절한 관계를 맺을 인간 아니냐. 그래, 나도 그런 놈이었지! 라는 자조 말고 더 이상을 내가 할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조금은 내 것이 아닌 가상의 자조이기도 하다.

난 그냥 조금 더 가볍게 비틀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또 홍상수가 아닌 것이 되겠지.
그래.. 매번 아리송하거나 꿀꿀한 채 욕을 하면서 다시 홍상수를 찾게 될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보고 싶다거나 칭찬하면 그냥 (동의를 살짝 섞은 아리쏭한) 웃음만 지으면 된다.

김연수에 대한 기억이 튀어나왔는데.
그의 이름을 알기 전의 그의 얼굴이 요즘 들어서 갑자기 떠오르곤 한다.
아직 그의 소설을 하나도 읽지 않았는데도 말이다.(김연수의 문체를 만난 건 기다림, 대성당 같은 번역서 뿐이다..)
쭈뼛쭈뼛하며 흥행감독의 권력을 적당히 즐기는 무난한 연기 데뷔였다고 생각된다. 시간이 나면 그의 소설을 읽어봐야겠군.

암튼 간단하게 쓴다는게 내용도 없이 길어졌는데,
역시나 김우재의 블로그에서 슬쩍 튕긴 대로 영화판이 원래 이리 난잡한가? 라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그렇게 쉽나? 내 안의 욕망이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데, 여태껏 나는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30대 전에는 2-3년이 지나야 그때 그 순간이 그런 상황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돌이켜보게 되고 서른이 넘어가니까 한 반년 정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알 것도 같은 그런.. 내가 무딘 건가? 나름 눈치 빠르고 분위기 파악을 잘 한다고 여겨 왔었는데, 그쪽으로만 진화가 덜 되었나?
암튼 여태 물어볼 생각을 못했는데, 나도 영화판에 있는 친구에게 그걸 물어봐야겠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겠지만) "홍상수가 예술하는 사람들을 일관되게 이렇게 그리는 데에는 뭔가 확률적인 근거가 좀 있지 않은가"(김우재)라고 말이다.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閱, 읽기 2009. 6. 12. 03:32

이 릴레이는 시작할 때부터 "아~ 재미난 놀이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관심있게 지켜봤지만, 점점 참여인원이 기하급수적을 늘어나면서 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아마도 수형도의 꼭대기, 이 릴레이의 모든 자식들의 아버지이신 Inuit님이 최종적으로 가계도를 가지치기하듯 그려, 각각의 [대답]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릴레이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지만, 혹시라도 저에게까지 바톤이 전해진다면 그건 띠용님이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역쉬 시나리오대로 띠용님이 저에게 넘기셨습니다. 그런데 시나리오에 없는 게 누구에게 바톤을 넘길 것인가 입니다. 릴레이를 끊어지지 않게 하려면 제 블로그에 자주 들어오는 사람이어야 할텐데. 아시다시피 제가 워낙 변방이라서.. 쉽지 않군요.

 

일단 릴레이 방식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규칙입니다.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 참조


1. 독서란 [수집]이다.

독서는 수집이다. 독서는 세상 모든 것을 수집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전체를 통으로 수집할 수도 있고, 작은 파편만을 모을 수도 있다. 수집으로서의 독서는 예쁘게 포장된 상품보다는 혹시 지나쳐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 이미 잊혀져 버렸을 지도 모르는 오래된 것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낸다. 가끔 쓰레기 더미나 중고시장의 어느 구석에서 헐값에 모셔올 수도 있는데, 이럴 땐 땅을 파다가 우연히 보물을 발견했을 때처럼 기쁨을 가져준다. 세상의 모든 책이 모여진 도서관은 없는 법. 수집하다 보면 자신만의 목록이 만들어진다.


  • 중독에 주의할 것! 골동품 수집가처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용하지 않을 그릇들을 진열해 놓기만 할 수도 있다.
  •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책이 필요없게 된다. 검 없이도 검술을 펼칠 수 있는 고수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읽어야 할 텍스트로 수집될 것이다. (결론은 굳이 책을 읽을 필욘 없다! .. 응?!)


2. 앞선 릴레이 주자

Inuit님 - 독서란 [자가교육] 이다.
buckshot님 - 독서는 [월아] 이다.
고무풍선기린님 - 독서란 [소통] 이다.
mahabanya님 - 독서란 [변화] 다.
어찌할가님 - 독서란 [습관] 이다.
김젼님 - 독서란 심심풀이 [호두] 다.
엘군님 - 독서란 [삶의 기반] 이다.
님 - 독서란 [지식] 이다.
okgosu님 - 독서란 [지식섭식] 이다.
bkzzang님 - 독서란 [Shift + 1] 이다.
리예님 - 독서란 [끝이 없]다.
띠용님 - 독서란 [더하기]이다.


3. 릴레이 다음주자

우선, 기발한 상상력의 주인공이신 착한영에게 바톤을 넘깁니다. (해 주실 거죠? *^^*)

 

아직 잘 모르지만(관블 등록 하루만에!) 왠지 재미난 대답을 들려주실 것 같은 지윤에게도 부탁드려 봅니다. 말 걸기의 한 방식으로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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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의 한 꼭지를 검토해 본다. "13번지"라는 제목의 이 글은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같이 비교하면 왠지 불경할 것 같은, 책과 창녀를 가지고 13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문장은 중국어본에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 구절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나는 그쪽이 이해하기에 편했는데, 기출간된 한국어 번역이 보다 압축적인 경우도 많다. 문장 자체는 별 설명이 필요없이 하나하나 재미있다. 책도, 창녀도 원래는 재미있는 것이었나 보다. (이쪽 방면으로 아는 게 별루 없어서.. ㅡㅡ;;)

벤야민, 『일방통행로』(길), 103쪽.
왕차이융(王才勇) 번역,《单行道》,江苏人民出版社,2006.

(일방통행로의 중국어 번역은 대만본이 조금 더 읽기 쉬웠던 것 같은데, 지금 현재 참고할 수 없으므로 위의 판본과 대조한다. 나중에 덧붙일 게 있다면 추가하자.)



13번지


13. 나는 이 13이라는 숫자에서 멈추는 데서 잔인한 희열을 느낀다.
(13 ─ 나는 이 숫자를 주목하는 것에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
― 마르셀 프루스트

책은 아직 굳게 접힌 채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내 옛날 책들의 붉은 절단면을 피로 적실 희생양이 되리라.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기 위해 무기 또는 종이 자르는 칼이 그 책 안에 삽입되기를.
― 스테판 말라르메



1. 책과 창녀는 잠자리에 갖고 들어갈 수 있다.

2. 책과 창녀는 시간을 교차시킨다. 그들은 밤을 낮처럼 지배하고 낮을 밤처럼 지배한다.

   책과 창녀는 시간을 교차시킨다. 그들은 밤을 낮처럼 여기고 낮을 밤처럼 여긴다.

3. 아무도 책과 창녀에게 몇 분을 할애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과 가까워지면 그들이 얼마나 급한지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가 그들에 탐닉하는 동안 그들은 시간을 잰다.

    아무도 일분 일초라는 시간이 책과 창녀에게 얼마나 귀중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과 가까이하면 얼마나 그들이 시간을 아껴가며 우리를 대하는지 알게 된다. 우리가 그들의 육체 속 깊숙이 들어가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일분일초 흘러가는 시간을 잰다.

4. 책과 창녀는 예전부터 서로 불행한 사랑을 나누어왔다.

5. 책과 창녀는 각각 자신에 맞는 타입의 남자들을 갖고 있는데, 이 남자들은 그들 덕택에 살면서 그들을 핍박한다. 책들은 비평가를 갖고 있다.

   책과 창녀는 각자 자신만의 남자를 갖고 있는데, 이 남자들은 그들 때문에 먹고 살면서 그들을 괴롭힌다. 책에게 있어 이러한 남자는 비평가이다.

6. 공공장소에서의 책과 창녀 ― 대학생용.

   책과 창녀는 모두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학생들에 의해 연구된다.

7. 책과 창녀를 소유하는 자 치고 그들이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드물다. 그들은 몰락하기 전에 사라지곤 한다.

  책과 창녀: 그들을 차지한 사람 중 그들의 종말을 목격한 이는 드물다. 그들은 시들기 전에 스스로 사라지려 애쓴다.

8. 책과 창녀는 어떻게 해서 지금의 자신들이 됐는지를 얘기하기 좋아하고, 그것도 거짓으로 꾸며댄다. 실제로 그들 자신조차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온갖 것을 여러 해 동안 따라가다가 어느 날엔가는 그들 자신이 언제나 '연구한다'는 명분으로 어슬렁거렸던 곳에서 비대한 몸이 되어 서 있게 된다.

   책과 창녀는 어쩌다가 자기들이 지금 모습으로 변했는지 꾸며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실제로는 그 자신조차 종종 그게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랑의 발로'로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곳곳에서 그녀를 뒤쫓았지만, 어느 날엔가는, 그녀들이 뒤룩뒤룩 살찐 몸으로 길거리에서 호객할 때 사람들은 '삶을 연구'한다는 명분에서만 그녀들이 있는 곳을 어슬렁거린다.

9. 책과 창녀는 자신을 전시할 때 등을 내보이기를 좋아한다.

10. 책과 창녀는 무척 젊게 만들어준다.

  책과 창녀는 무수한 후손들이 있다.

11. 책과 창녀는 '나이 든 극성신도와 젊은 매춘부'의 관계와 같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배워야 할 수많은 책들이 과거에 비방을 받던 책들이 아닌가! 

  책과 창녀는 '늙은 위군자와 젊은 창부'의 관계와 같다. 과거에는 평판이 지극히 나빴던 책들을 지금은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던져주고 있다.

12. 책과 창녀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싸움질한다.

13. 책과 창녀. 한쪽에서 각주인 것이 다른 쪽에서는 양말 속에 끼워 넣은 지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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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 번역?  (11) 2009.12.17
중역에 대하여  (2) 2009.06.10
Posted by lunarog
"중역의 세계"라는 카테고리를 새로 만든다. 중역(重譯)이면서 동시에 중역(中譯)이다. 원작이 중국어가 아닌 언어권에서 나온 책을 중국어 번역본을 참고하여 읽는 것이 주요 취지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어 번역본으로 충분히 의미가 닿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매끄럽게 읽힌다면 굳이 원저를 뒤질 필요도, 궁여지책으로 중국어 번역본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원본대조가 필요한 한국어 번역은 무수히 많다.

왜 하필이면 원작의 언어가 아닌 중국어 번역본인가? 우선, 내가 중국어를 읽을 수 있고 지금 중국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중국어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사전 뒤져가며 대조하는 건 시간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여기서 구할 수 있는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한국의 대학도서관이 욕을 많이 먹지만 어쨌든 크게 부족하지 않게 갖춰져 있다. 게다가 중국의 도서관들에 비한다면야...) 더하여 영어본이 항상 원본인 것도 아니다. 즉 영어번역도 오역이거나 두루뭉실한 게 없지 않은데, 이조차 벗어나 버리면 내가 사전을 옆에 두고도 읽을 수 있는 언어는 없다.

언어마다 각기 다른 호흡이 있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원작이 제일근거가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원작에 지나치게 구속되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직역을 나는 싫어한다. 조금 과장하여 그건 마치 "유붕이 자원방래하니~"와 마찬가지의 번역이다. 해당언어를 배울 때라면 또 모를까 한국어를 읽으면서 '그 언어'를 계속 상상해야 한다는 것은 진이 빠지는 일일 뿐 아니라 마땅찮기도 하다. 그것은 그 저작을 경전화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말로 그 문체를 맛보게 하지도 그 내용을 이해하게 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뭉치고 넘어가는 의역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어떤 원칙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천의 문제이고, 번역자의 능력과 성의 문제이다. 원저자가 자료와 사고의 뭉치에서 어떤 식으로 글로 풀어 냈을지를, 그 저자의 수준에서 그가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썼을지를 고려해야 하며, 내용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저자의 입장에서 '다시쓰기'로서의 번역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가능성의 한 참고지점으로 (먼저 출판된 게 있다면) 중국어 번역도 이용할 수 있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 선배들이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하며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 냈듯이 말이다.

중국어 번역본의 질이 한국어 번역보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인문학 대학원생만 해도 수만(?)인 나라, 즉 완전날림만 아니라면 초판 몇만부는 소화될 수 있는 토대가 있는 나라다. 총서나 시류에 편승한 책들은 대학원생을 사역시켜 급하게 번역해 내기도 한다. 물론 우리나라 번역보다 훨씬 유려하고 엄정한 번역도 없지는 않다. 하나의 문체가 다른 언어에서는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뿐이니까, 어쨌든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면 크게 상관은 없겠다.

일반적으로 중역이 칭송받는 경우는 없다. 중역에는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담겨 있다. ..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은 정해 두자.


  • 한국어와 중국어 이외의 제3언어 원전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여, 이때 원전의 한중 번역본이 최소한 한 종 이상 출간되어 있어야 한다.
  • 원전의 언어는 참고 대상이 아니다. 어차피 능력 밖이다.
  • 중국어를 옮길 때 한국어 번역본의 영향을 최소화한다. 즉 한국어 번역본과의 차이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번역한다. 나는 이것이 원전의 가능성을 조금 더 확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오역논쟁에 참가하거나, 내가 다루는 텍스트를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출판된 한국어 번역와는 다른 번역을 제시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은 것이다. 즉, 내 공부를 위해, 내가 이해하기 편한 방식으로 문장을 다시 재배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그것이 이 글을 혹시라도 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다. 중국어 번역본에 근거한 내 중역이 심각한 오류가 있다면(자그만한 것이라도!) 알려주면 나에게도 도움이 되겠다.

원칙은 해보면서 조금씩 고치도록 한다.

실제로 얼마나 계속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냥 두면 앞으로도 계속 비공개글로 파묻혀 있을 것 같아 일단 시작은 해보기로 한다. 원전의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 보면 우스워보일 수도 있는데, 내 바램은 다양한 외국어를 하는 사람이 (이런 작업이 필요없을) 좋은 번역을 많이 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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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일방통행로, 13번지  (2) 2009.06.11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講, 구경 2009. 3. 28. 01:46
복단대 문사연구원에서 <도시의 번화함: 1500년 간 동아시아 도시 생활사>(都市繁华:1500年来的东亚城市生活史)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문사연구원과 하바드대학 동아시아학과가 공동으로 주최하며, 기간은 3월26일부터 28일까지이다.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주제이기도 했거니와 한참 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학회라 조금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준비기간이 길었고 미리 공지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국에서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드문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학회를 하더라도 공지가 잘 안 되는 편이다. 홈페이지를 적극 활용하지도 않고 현수막을 내걸지도 않는다. 포스터가 하루 이틀 전에 나붙을 때도 있을 정도니.

그런데 역시 대형학회에서 내실을 기하기란 쉽지 않다. 내가 들어볼까 생각한 발표는 26일(목) 오후와 28일(토) 오후 정도였는데, 일정을 보니 토요일 학회는 항주에 가서 호텔 잡아서 하고 또 그 다음날은 절강성 어디로 여행까지 간다고 한다. 혹시 학회가 목적이 아니라 꽃피는 춘삼월에 강남 호시절을 맛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도 데리고 가 준다면야.. 안 그래도 항주를 가려 했는데 학회 핑계로 확 가 버릴까 잠깐 생각을 했다.. ㅡㅡ;;)

아무래도 문사연구원이 창립된 후(2007) 어느 정도 굴러가니까 이런 식의 대형학회를 만들어 돈을 좀 푸는 게 아닌가 싶다. 그동안 다져온 인맥도 확실히 굳히고. 뭐, 내가 내부자가 아닌 다음에야 확인할 도리는 없겠다.

근데 나는 학자들이 왜 이런 대형학회를 해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자기 문제를 여기 와서 풀 수도 없고,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기도 힘들다. 평소 글로만 알고 지내던 사람을 한번 만나본다는 정도? 그럼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글로 만나는 게 더 강렬한가, 아니면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게 더 강렬한가?


이번 학회의 발표내용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기록 차원에서 찍어둔 첫날 사진만 몇 장 올려둔다.

스티븐 웨스트 교수이다. (난 좀 더 젊을 줄 알았다.)

생각보다 별로 재미도 없고 일본어로 관심 없는 내용을 이야기해서 먼저 나왔다. 개막식 장소로 꽤 넓은 곳을 빌렸는데, 사람이 그다지 많이 오지는 않았다. (중국학생들은 아침도 상관없이 일찍 자리를 채우는 편이다.) 따라서 오후에도 그다지 많이 오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오후 일정 중 재미있을 만한 곳으로 찾아갔다. 왕더웨이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3시 30분에 시작하는데 딱 맞춰 갔더니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다. 뒤에서 서서 들을 수밖에.. (보통은 최소 30분은 먼저 가 있어야 한다. 이날은 오후 첫번째 시간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냥 쭈욱 앉게 된 모양이다.)

중국 아해들도 마찬가지로 좀 일찍 오거나 미리 자리를 맡아둔 쪽은 앉고 나머지는 서서 발표를 들었다.


질문은 주진학 선생 한 사람에게로 몰렸다. 옛 상해에 관한 발표였는데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만, 아무래도 다들 상해에 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이라 재미있게 들었나 보다.
왕더웨이 교수다. 똘똘하고 공부 잘 하게 생겼다.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문학자의 하나이다.

개막식은 큰 곳에서 규모 있게 하고, 각 세션은 작은 회의실에서 토론 위주로 할 계획이었나 본데 실제로 이렇게 큰 규모에서는 토론이 잘 이뤄지기 힘들다. 발표자들도 이런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로운 글이나 주제를 꺼내지 않는다. 예전에 써 뒀던 글을 장소만 바꿔서 다시 발표하는 식이다. 이름난 학자일수록 그런데, 이쪽에서도 그의 이름 때문에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궁합이 잘 맞는다. (비슷한 내용을 한국과 중국에서 반복해서 들었던 적도 있고, 대만쪽 대학 웹싸이트에 발표자료와 동영상이 올라와 있는 강연을 다시 듣게 된 경우도 있다..)

내실을 기한다면 수유에서 하고 있는 국제워크샵 같은 형식이 참고할 만하겠다.
미리 발표자와 기획 단계에서 충분한 상의를 하고, 이쪽에서도 발표자와 관련된 논문이나 저작을 세미나 등을 통해서 충분히 읽어둔다. 그냥 그 날 되어서 우르르 몰려와 한번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만날 준비를 양쪽 모두 충분히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강하게 부딪혀야 발표자도 듣는 사람도 자극을 받을 수 있다.

내부 구성원이 회의진행자, 사회자, 통역, 토론자, 청중의 역할을 모두 맡는다.(물론 외부에도 열려 있다.) 특히 통역의 경우 제아무리 동시통역에 능한 사람이라도 학술 쪽은 쉽지 않은 편이다. 한국어로 이야기한대도 해당 분야에 대한 상식이 없다면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하는 게 많을 텐데, 그걸 외국어로 어떻게 옮기겠는가. 통역은 그 언어가 아니라 그 담론에 익숙한 사람이 맡아야 원활한 회의진행이 된다. 그걸 내부구성원이 맡아서 하고, 잘 수행하기 위한 공부를 따로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방식이 좋은 줄 알면서도 대학에서는 실제로 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학회를 하는 목적이 공부에 있는 게 아닐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가 방관자의 입장에서 이름만 알고 있는 학자들 얼굴이나 봐두자는 속셈으로 간 학회이니,
학회 자체보다는 이런 학회 왜 하나?에 대한 생각이 조금 들었던 것. 답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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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閱, 읽기 2009. 3. 22. 19:16
내가 좋아하는 글귀 중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원래 청출어람(청어람)이라는 고사성어를 비튼 말이다.

夫靑生於藍, 絳生於蒨, 雖踰本色, 不能復化.(《문심조룡》, <通變>)

푸른 색은 쪽풀(藍草)에서 나왔고, 붉은 색은 꼭두서니(茜草)에서 나왔다. 비록 그 색깔이 원재료의 빛깔을 뛰어넘는 것이 사실이나, 다시 다른 것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

이 구절은 <문심조룡>이라는 중국 위진시기의 문학비평서에서 나온 말이다.

쪽풀로 염색을 하면 풀색깔보다 훨씬 푸른 색의 천이 만들어진다.(쪽풀 염색하는 과정 보기... 물론 요즘같은 화학염료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그래서 이 "청출어람"이라는 고사성어는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를 가리키는 좋은 말로 사용되어 왔다. 하나를 가르쳤는데 열을 아는 그런 제자겠다.
그런데 이렇게 염색된 푸른색은 다시 다른 색깔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즉 이 훌륭한 제자는 단지 제자에 그칠 뿐 훌륭한 스승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유협이 사용한 원래 맥락은 아마 요즘 나오는 삐까번쩍한 베스트셀러에만 빠지지 말고 고전으로 돌아가 본질적인 읽기를 하라고 독려한 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염색하는 것보다 염색된 천으로 다양한 옷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고 그게 더 좋다, 잘 배워서 다른 데 써먹는 게 뭐가 나쁘냐는 식으로 이 비유를 비틀지 않기를 바란다. ^^)


물론 나는 유협처럼 고전을 더 강조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가 제기한 어떤 입장은 곱씹을 만하다.
자신의 행위가 소비만을 지향한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생산이 가능한 재료를 만들어낼 것인가의 태도 말이다. 나는 소비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산을 도와준다고 항변하면 할말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이다. "나"는 소비만 할 것인가? 내가 도움받은 재료들을 이용해 혹시 뭔가를 만든다면, 내가 만든 그 물건이 누군가에게 다른 재료로 사용되어 또다른 물건을 만들어낼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이 질문을 던져왔고, 잊을 만하면 다시 생각이 나곤 한다. 학생이라는 현실적 조건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변명한다).


글을 쓰는 것은, 그것이 블로그가 되었던 인쇄매체이든 다른 무엇이든,
행위 자체로는 하나의 생산이다.
그러나 같은 블로그가 아니고 같은 글이 아니다.
자신이 받은 느낌과 정보를 발산하고 소비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받아들인 느낌과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사유의 자양분을 제공하는 글도 있다.
이런 글은 원저자의 글에 대한 하나의 주석이나 해석에 머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원저자에게 새로운 재료가 되기도 한다.

"소비되기 좋은 소비재"와 "소비재의 생산에 좋은 것"이라는 구분에서 사진기의 '장치'적 특성을 설명하는 글을 읽다가(물론 사진이 한낱 소비재이거나 사진기가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며 뒷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잊고 있던 문구를 떠올려본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되는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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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閱, 읽기 2009. 3. 21. 06:12
   춘분 지나 내린 눈

예로부터 춘분 지나 눈 내리는 일 드물거늘
불 금하는 한식 맞기도 전에 추위 더한다네.
매화 속여 꽃피우니 향기 돌아오라 시샘하는 듯,
버들에 붙어 벌써부터 어지러이 버들개지 날리우듯.
하늘의 절기 뒤틀려 꽤나 늦어졌음을 이미 알았으니
사람의 일 또한 그에 따라 어지러지겠구나.
어찌하면 꽃을 재촉하는 비로 변하여
사이좋게 봄님과 함께 활짝 피어나게 할꼬.


<春分後雪>, 權擊

雪入春分自古稀   禁煙時節助寒威
설입춘분자고희   금연시절조한위

欺梅似妬香魂返   着柳先成亂絮飛
기매사투향혼반   착류선성난서비

已覺天時差較晩   從敎人事轉相違
이각천시차교만   종교인사전상위

何當變作催花雨   好與東君共發揮
하당변작최화우   호여동군공발휘




가끔 드나드는 게시판에서 이 시를 보다. "매화 속여 꽃피우니 향기 돌아오라 시샘하는 듯, 버들에 붙어 벌써부터 어지러이 버들개지 날리우듯."(欺梅似妬香魂返 / 着柳先成亂絮飛)라는 구절에 꽂히다.

절기로는 춘분과 한식(청명) 사이이다. 춘분에 더 가까운 시기로 보인다.

매화는 이미 졌고, 수양버들에 버들개지는 아직 날리지 않을 무렵이다.
그러고보니 딱 지금 쯤이겠다.(찾아보니 3월 20일, 즉 어제가 춘분이었다.)

눈이 이리저리 휘날리다가,

매화가지에 붙으니 꽃은 다시 폈으되 향기는 나지 않고
버들가지에 붙었다가 아직 피지도 않은 버들개지처럼 어지러이 흩날린다.
봄을 예감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내려 겨울로 되돌아간 듯한 풍경을
매화와 버들을 빌어 눈에 보이듯 잘 묘사한 듯하다.
눈꽃이 매화가지에 붙어 향기를 탐내고, 버들가지에 붙어 버들개지처럼 하얗게 날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


사진출처: http://blog.jnilbo.com/blog.php?Blog=sajin21&query=post&menu=216
흩날리는 진짜 버들개지는 아래 사진과 같다.
이게 날아다니면 아래 같이 된다. 亂絮飛!
아~~! 시의 정취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으나, 현실이 그렇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한시는 독음을 잘못 적은 부분이 있어 표시해 둔다.
한시는 잘 모르지만 아래 번역문을 기준으로 내 마음대로 바꿔서 풀어봤다.
꼼꼼하게 번역하려면 사전 뒤지고 문장구조 분석하고 해야 하는데, 굳이 그럴 것까진 없겠다.
한시의 문법구조 그대로 한글로 살릴 수도 없고, 어차피 내 기분 따라 하는 거니까~~

아래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시 원문과 번역이다.
번역문은 역자의 것이겠지만, 한글 독음은 인터넷에 올린 사람의 실수가 아닌가 싶다.

=================================================

<춘분 뒤에 내린 눈 春分後雪>

 권 격 (權擊)

 

눈 속에 춘분 맞는 일 옛부터 드문데
불 안 때는 한식 무렵 추위를 돕는구나.
질투하듯 매화 속여 향기로운 혼 돌아오고
벼들에 붙어 먼저 꽃으로 피니 어지러운 솜털 날린다.
천시가 비교적 늦어진 걸 깨달았으니
인사 더욱 어긋나리라는 것 이어서 알겠다.
어찌 하면 꽃을 재촉하는 비로 바꾸어
동군과 잘 해서 함께 피어나게 할꼬.

 

雪入春分自古稀   禁煙時節助寒威
설입춘분자고희   금연시절조한위

欺梅似妬香魂返   着柳先成亂絮飛
기매사투향혼반   착류선성난서비

已覺天時差較晩   從敎人事轉相違
이각천시차만   종교인사전상위

何當變作催花雨   好與東君共發揮
변작최화우   호여동군공발휘

- <삼라만상을 열치다>, 김풍기 글, 푸르메, 55~56쪽 중에서.

Posted by lunarog
최건(추이젠)의 "진창운동(眞唱運動)"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검색해 보다가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일단 립싱크로 노래하는 가수들에 대한 반대로 하는 운동인 것은 확실해 보여 그냥 "라이브 공연 운동"이라고 옮겨 뒀는데, 오늘 보니 최건의 홈페이지가 영어와 중국어로 운영되고 있다.

崔健发起真唱运动홈페이지에서는 "진창운동"에 관한 카테고리가 별도로 만들어져 있고, 영어로는 "Live Vocals"라고 소개해 두고 있다. 그럼 "라이브 보컬 운동"이라고 옮겨야 하나?

"립싱크-라이브"의 대응은 알겠는데, 그게 우리말로 적절한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들 요즘 우리말이나 한자어 조합은 잘 안 쓰잖아?

암튼 "진짜 노래 운동 선언"도 홈페이지에는 소개가 되어 있다.
만, 그저 중국도 여지간히 립싱크가 심하구나. 그다지 힘들게 부르지 않아도 되는 노래 같던데..  위대한 "중국 락의 대부"께서 친히 나서셔서 운동을 주창하고 서명을 받을 것까지 있나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갈 뿐이다.

그보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선언의 아래쪽에 덧붙어져 있는 문구였다.
뭔가 무시무시해 보이는 법령이었다..
(간단하게 소개된 영어 홈페이지에는 관련내용이 없다.)
 

2008년 11월 문화부 문화시장 부서(文化部文化市场司)는 국무원에서 반포한 <"영업성 공연 관리 조례"의 수정에 대한 결정>(关于修改<营业性演出管理条例>的决定)에 근거하여 <영업성 공연 관리조례 실시 세칙(营业性演出管理条例实施细则; 의견모집 안)>(이하 <조례>로 간칭)을 기초하였으며 공개적으로 의견을 모집하고 있다. <조례>는 영업성 공연에서 립싱크, 가짜 공연 등의 수단으로 관중을 기만하는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위반시 처벌이 가해질 것이다. <조례>제53조는 처벌 규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가짜 연주 등의 수단으로 관중을 기만할 시 처벌한다. 위법 행위의 혐의가 있는 연출 단체, 예술공연 단체와 연예인에 대해서는 관련 문화행정부문에서 사회에 폭로한다. 연출 단체, 예술공연 단체에서 2년 내에 재차 공표되면 원 증명서 발급기관에서 영업성 공연 허가증을 취소한다. 개별 연예인이 2년 내에 재차 공표되면 공상행정관리 부문에서 영업 면허증을 취소한다.

2008年11月文化部文化市场司根据国务院所发布的 《关于修改<营业性演出管理条例>的决定》,起草了《营业性演出管理条例实施细则(征求意见稿)》(简称《条例》),并公开征求意见。《条例》明确规定营业性演出不得以假唱、假演奏等手段欺骗观众。否则将予以处罚。 《条例》第五十三条做出了处罚规定:以假演奏等手段欺骗观众的,将给予处罚。对于具有违规行为的演出举办单位、文艺表演团体、演员,相关文化行政部门将向 社会曝光。演出举办单位、文艺表演团体在两年内再次被公布的,由原发证机关吊销营业性演出许可证;个体演员在两年内再次被公布的,由工商行政管理部门吊销 营业执照。


이 법령이 지금 벌써 시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이 법령대로라면 갑자기 생각나는 게 올림픽 개막식에서 했던 립싱크는 어떻게 처벌되는 걸까? (사실 나는 그래픽 폭죽도, 립싱크도 뭐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만..) 아무튼 의견을 구하고 있다니 앞으로 중국의 공연계가 어떻게 바뀔지 지켜볼 일이다. 혹시 MB도 이런 거 따라하지 않을까? ㅡㅡ;; (아, 다시 생각해 보니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초토하시킬 그런 정책을 가카께서 할 리가 없다. 법을 만든다면 오히려 립싱크를 더욱 장려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

또 하나. 갑자기 최건에게서 장예모가 연상되는 건 왜일까?
실제로 어떠한가와는 상관없이 반체제, 혹은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던 이가 어느날 보니까 체제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당혹감.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운동 한 몇 년 하고 나니까 법규가 바뀔 정도라면 대단한 것 아닌가? 물론 최건의 중국 내 위상은 한국의 신중현 이상이니 만큼 그런 운동을 할 수 있고 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는데, 그게 자발적인 캠페인의 차원을 넘어 법조례를 바꿀 정도라면 .. 역시 80년대 사람들, 대단하다니깐!!


원래도 최건의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필요 때문에 요즘 다시 들어봐도 그다지 좋아지게 되지 않는다. "일무소유" 정도가 귀에 조금 아른거릴 뿐. 이렇게 역사적인 건 원래 그 시대로 돌아가 그 정서에 비춰서 생각해야 되는 듯 하다. 음악 자체만으로 따진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별로 좋은 음악은 아닌 것이다.


(디비디 가게에 가서 "최건" 씨디 있나요? 그랬더니 "최근" 건 이 앞에 있는데? 그러더군요. 잠깐 내 갱상도 발음이 샜나 했다가, 아니 중국어 표준말로 했는데... 추이젠, 쭈이진!!  별로 안 비슷한데..비슷한가? 내 훌륭한 표준 중국어가 갑자기?? )

최건의 홈페이지에 있는 "라이브 공연 운동 선언"은 번역하지 않고 옮겨두기만 한다. 내용은 상상할 수 있는 정도라고 보시면 되겠다. "진창운동"이란 말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짐작가능할 듯.


真唱运动宣言 


  在我们置身的这个时代,音乐精神的沉沦和贫乏是有目共睹的。假唱已经成为一个毒瘤,导致大中华地区、亚洲其他地区同世界流行音乐现场演出的距离越来越大。
  音乐的视觉化强调对歌手外形的包装,使真正意义上的音乐被败坏。假唱包括对口型、假伴奏、请他人代唱。假唱给艺术的中庸化、媚俗化提供了繁殖的温床。 让公众在不知情的状态下,获得低质量的精神消费,这是不道德,也是不公平的,属于欺诈行为。
  假唱的最大危害在于破坏歌坛真正的游戏规则,设置了一种潜规则,让音乐依附于强势传媒。假唱是歌坛版的皇帝的新衣,人人都知道,但都保持沉默。沉默本身就是一种耻辱。
  “真唱运动”需要用信心和爱去鼓舞,用自己的行动促进时代的进步。如果我们对假唱熟视无睹,那么一切热爱音乐、尊重艺术劳动的表白都可以看成是虚伪的。
  真唱是一种权力。“真唱运动”是我们的第一步,这个行动不是公益活动,不是宣战,而是一次纯粹的自卫行动。它已超越对公民经济权利的保护范畴,隐含着公民人身权利意识的觉醒 。我们呼吁最终以立法的形式,给有良知、有能力的艺术家更多的公平和机会。
  从某种意义上来说,“真唱运动”应该是全人类的运动。因为嗓子是人类第一件共同的乐器,而现代科技正与商业合谋,试图扼杀或替代这一人类最为珍贵的东 西。我们希望假唱成为全世界所有音乐家都感到可耻的行为,只有真实的音乐才是真正动人的、感人的音乐。
  你在此签名不是为了我们,而是为了你自己。如果你真正热爱音乐,并认同我们的理念,请公开写下你的姓名、职业和国籍,表达你的立场。凡是签了名的经理 人、制作人、导演、歌手,希望自己不假唱也不给假唱者提供机会,并为自己的行为负全部的道义上的责任。
  我们希望媒体和公众的监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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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한동안 영화를 못 보다가 어제 후배들과 술을 한잔 한 김에 견자단이 주연한 <엽문>을 보았다.
그래. 나는 엽문이 이소룡의 스승이라서 본 것이 아니라 견자단이 주연을 했기 때문에 봤다.
견자단에게는 이소룡의 아우라도 없고, 성룡의 익숙한 재미도, 이연걸의 화려함도 없다.
그렇지만 견자단에게는 위 세 사람에 뒤지지 않는 무엇이 있다. 그것이 견자단을 계속 찾게 하는 것이다.


사실 무술 좀 합네, 혹은 무술영화 좀 봤네 하는 사람 중 견자단을 챙기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황비홍2나 철마류 등에서도 괜찮았지만 드라마 <정무문>에서 아마 증폭되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실전 최고수 철구 형님께서도 한때 드라마 정무문에 뻑 가 있을 정도였으니..
이소룡 같은 카리스마나 이연걸의 화려함이 아니라 무술의 스킬을 보고 배운다는 입장에서 보면 견자단의 동작은 꽤 매력적인 게 분명하다.

우리나라에 견자단 같이 한 길만 걷다가 대가의 경지에 이르는 액션배우가 없다는 게 아쉽다.
한국은 막싸움을 리얼액션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영화의 과장된 액션에 대한 반대급부이겠지만, 막싸움도 정말 리얼한 액션은 아니지. "영화는 영화다"!? "한국형 액션"이란 건 액션에 한국형, 일본형, 중국형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본과 중국처럼 할 능력과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선택한 소극적인 길일 뿐이다. 물론 한국도 정두홍이나 류승완처럼 재미난 액션영화를 꾸준히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그 "액션"에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대가의 몸짓은 없다. 좀 거칠다고 할까.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교한 맛은 확실히 떨어지는 게 사실이니까.

영춘권을 그다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엽문>의 액션은 정말 군더더기가 없는 대가의 그것이다.
이소룡의 그 발산하는 매력은 잘 아는 바이나, 사실 그렇게 오버할 필요는 없다. 오버 잘못 하면 제대로 깨진다..


< 엽문>의 이야기 구성은 익숙하기 그지없다. 예전 무술영화가 고난-수련-복수(혹은 성취)의 성장영화 스타일이 주요 스토리라인이었다면 요즘은 고수의 수련기는 생략한 채 활약만 보여준다. 그 속에 민족주의적인 감성도 슬쩍 섞여 들어가고. <엽문>도 일본군과 중국 민중의 대비를 통해 편하게 민족주의적인 대립구도에 기대고 있기는 한데. 세심하게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구도는 실전에서 영춘권이 얼마나 유효하고 강력한 무술인지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느낌이다. 중국 무도가들과 싸울 때는 얌전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다가, 일본 애들 족칠 때 제자 이소룡을 예비하는 몸짓을 보여준 것이겠다.
영화가 민족주의적인 것이 되지 않게 나갈 장치를 더 강조할 수도 있었을 건데, 아마 익숙한 장치에 기대기 위해 간략하게 처리하고 넘어간 것 같다. 중국인이 나쁜 중국인을 혼내 주는 것보다 "일본"이라는 국가장치에 맞서는 게 더 명분이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견자단과 계속 작업을 이어가는 감독 엽위신의 카메라도 나쁘지 않고 여러 가지 잔재미도 많으며, 감정을 너무 쥐어 짜지 않으면서도 순간적으로 증폭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잘 구성된 영화인 것 같다.

설마 감독 엽위신이 엽문의 후손은 아니겠지?
어쨌거나 저쨌거나,
성으로 읽을 때는 엽위신, 엽문이 아니라 섭위신, 섭문 아닌가?
물론 중국어 발음에선 구분이 없고 어감은 엽문이 좋다만은.


생각나는 대사 몇 개만 간단히 정리해 두자.
금산조(金山找)가 결투에서 진 후 엽문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북방무술이 남방무술에게 졌다!"
"북방무술이 진 게 아니라 니가 문제야 임마!"

수련이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어떤 문파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이다. 어떤 무술을 익혔는가가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수련했느냐에 따라 결투의 결과는 달라진다. 이 대사에서 개인이 두드러졌다면, 일본군과의 10:1 대련 후에는 그 또한 "나는 그저 중국인일 뿐이오"라는 대사를 날리며 중국인 전체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아내를 무서워하는 남자는 없고 존경하는 남자만 있다."

 이 말은 다음에 꼭 써먹어야겠다. 아주 멋진 자기합리화잖아?  ^^;;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