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로쟈의 저공비행은 내가 즐겨찾는 블로그다. 비평고원이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름도 가물가물하고나..)일 때부터 그의 글을 봐 왔고, 특히 번역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 혹은 그러한 상황을 바로잡아 보려는 시도에 마음으로나마 지지를 보내왔다.(지지를 꼭 드러나게 해야하는 건 아니니까.) 그 지지의 한 방식으로 나도 중국쪽 원전이 잘못 번역된 부분이 있으면 조금씩 고쳐 두고는 했다. 천성이 게을러 눈에 띄게 하지는 못했지만. 양만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른데, 나같은 듣보잡에겐 번역계 전반에 대한 비판이란 일은 가당치도 않아 그저 내가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만 고쳐가며 읽는 정도다.

요즘은 로쟈도 워낙 유명해지고 바빠서 그렇겠지만, 자기 글은 별로 올리지 않고 책과 관련된 소식을 블로그로 모으고 짧은 논평만 남겨놓곤 한다. 여러 정보 중에서 "선별"하는 것만도 능력이고, 그의 서재에 가면 그렇게 선별된 글들을 한번에 볼 수 있으니 편하다. 다만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링크만 걸어두는 식으로 바뀌는 게 좋을 듯하다. 알라딘은 블로그가 아니라 "서재"이기 때문에 책을 사서 차곡차곡 꽂아놓듯이 정보들을 서재로 모으는 게 정당화될 수도 있겠다. 자기 서재에 꼽힌 무수한 책 중에 마음에 드는 구절을 읽어주는 듯한 정겨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인용으로 도배된 혹은 남의 글을 전문인용하는 논문 같은 느낌도 든다. 굳이 저작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미 출판되었고 아직 절판되지 않은 글을 다른 사람이 재출간할 필요는 없는 거다.(그런 면에서 서재와 도서관의 차이처럼 대별되는 곳이 cliomedia이다.) 정말 서재라면, 그래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둘 필요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비공개로 본인만 보면 된다. 지금처럼이라면 연예계 기사를 퍼와서 간단한 논평을 붙이는 네이버 블로그와 행위 자체는 별 차이가 없다.

사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로쟈가 저렇게 해 주면 나도 편하고 그의 선별취향도 마음에 들기 때문에 자주 들렀었는데, 갑자기 약간 비아냥조가 되는 이유는 이번에 한국일보의 기사를 옮긴 당신이 읽는 거의 모든 것을 읽다가 감정적으로 살짝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 [책의 풍경, 2009] <8> 번역서, 당신이 읽는 거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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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번역, 탁해지는 출판시장

번역서의 범람이라는 현상에 비해, 번역의 수준을 비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출판계에선 수치로 드러나는 양보다 무분별한 번역이 해치고 있는 출판의 질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서평 활동을 하는 이현우씨는 "번역의 질 자체는 태반이 '날림'"이라고 꼬집으며, 이를 유해 농산물에 빗대 '중국산 번역'이라 표현했다. 이씨는 "먹거리라면 그렇게 무분별하게 수입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며 "대중이 더 안전한 먹거리를 요구하듯, 독자도 품질 높은 번역서를 읽을 권리를 출판사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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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분야의 책이 제때 번역돼 나올 수 있는 환경의 구축도 필요하다. 국내에서 저자를 찾기 힘든 선진 담론을 소개하는 것이 번역 출판의 본래 의미. 그러나 기초학문 도서 등의 출간을 위한 사회적 지원은 거의 없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은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었지만, 쟈넷 브라운 등의 훌륭한 다윈 관련 책들은 정작 번역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번역가 김석희씨는 "전공 분야의 고전을 번역해도 연구 업적으로 쳐주지 않는 등 학계의 닫힌 현실도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유상호기자)

* 배경색 강조는 로쟈, 밑줄과 굵은글씨는 루나.

이 한국일보 기사에 대한 로쟈의 간단한 코멘트는 이러하다.

한국일보의 2009년 출판계 결산 연재 가운데, 번역서에 관한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엊그제 한 인터뷰에서 몇 마디 거든 게 인용돼 있다. '태반이 날림'이라고 한 표현은 과한데, 날림으로 나온 번역도 적지 않다 정도이다. '중국산 번역'이란 표현은 내가 곧잘 쓰는 것이다.


아마도 made in china의 이미지를 원용한 듯한데. 별 고민 없이 저런 멘트를 자주 써도 될지 의아스럽다. 문화적으로나마 대국인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주위에 중국친구도 없을 테니 '우리끼리 하는 우스개소리' 정도에서야 곧잘 써도 누가 뭐라겠냐.만은. 솔직히 중국 쪽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듣기 유쾌한 말은 아니다.

딱 들었을 때 한국인이 반응을 보일 만할 만한 비유를 찾다보니 그랬을 수는 있겠다. "비유"에 정색하고 문제점을 따지는 게 더 문제가 되는 이상한 짓인 것 같긴 하다만, 저 문구를 보자마자 내가 불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정당화해야겠다.


번역을 둘러싼 문제가 한두 해도 아니고, 별로 새로운 문제제기도 없이, 딱히 대안이랄 것도 없는 그저 연말 정리기사에 로쟈를 인용한 것은 그가 지금까지 번역을 둘러싸고 해 왔던 일들에 링크를 걸어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이미 번역에 대한 로쟈의 발언을 인정하고 있는 셈. 날림을 나온 번역도 적지 않다는 정도의 발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날림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게 원산지였나?
(번역서 비중이 높아지는 현상을 학문의 식민상황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물론 나는 번역으로 인한 식민상황을 전혀 걱정하지 않으며, 번역이 더 많아지는 게 오히려 식민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선 별 상관없는 문제이므로 패스~~)

중국산 먹거리가 문제가 되었던 게 원래부터 안 좋은 걸 무분별하게 들여와서인가, 아니면 원래는 하자가 없는 건데 한국에 와서 잘못 가공해서 문제가 되는 건가. 즉 "먹거리라면 그렇게 무분별하게 수입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저 말을 사용하려면 원래부터 하자가 있는 원전을 들여오는 경우에나 합당할 거다. 예를 들어 짜집기한 책인 줄 모르고 번역 소개한다거나, 들뢰즈가 쓰지도 않은 짝퉁 철학서를 표지의 서명만 믿고 번역한다거나 뭐 그런 거. 그게 로쟈를 위시한 우리 한국인이 연상하는 중국산 이미지이지 않나?

그런데 보통 번역의 대상이 되는 원전, 특히 로쟈가 추천하는 책들은 멀쩡할 뿐 아니라 그쪽 분야에서는 최상품으로 평가받는 것들이다. 그게 한국에 와서 쓰레기가 되곤 한다. 너무나도 어이 없는 쓰레기가 많아 로쟈를 위시한 많은 이들이 광분한 것이고, 역량있는 저자의 의미 있는 저작을 제목만 보고 집어들었다가 좌절한 이땅의 많은 후배들이 로쟈를 지지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딴 사람은 모르겠고 나는 그렇다.

같은 말인데, 저 비유로 어떠한 자기반성을 끌어낼 수 있나?

날림 번역이 많은 한국 번역계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싸구려 중국산을 탓할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대한 자기반성을 더 고려한 비유여야 하지 않을까? 출판환경이나 제도, 번역자의 역량과 함께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문화적 교양수준 등이 어우러져 반복되고 있는 저 문제에 관해 그렇게 올바른 목소리를 내왔던 분이 왜 저런 비유를 쓰는지 모르겠다.

여튼 중국산을 저 따위로 사용한다고 해서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사실 없다. (나도 쓰다 보니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정도다. 일 방문자 100명 정도의 조용한 내 블로그가 시끄러워지지나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제발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중국의 많은 부분을 싫어하고, 실제로 비판적으로 볼 구석이 많은 동네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현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기존에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를 별로 적절하지 않은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는 태도는 좀 아니다. 그건 자체로 기분이 나쁘다. 굳이 하고 싶다면 "미국산 쇠고기 번역"이라고 하실 것을 추천한다. 정치적 올바름 측면에서도 유리하고, 자기반성보다는 원산지를 탓하는 논리에서도 그게 더 적합한 비유 아니겠나.


# 비아냥을 좀 덜어내 보려는데 잘 안 되네요. 제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로쟈님의 작업을 부정하는 건 아니랍니다. 갑자기 대법원 판결식 댓글이 달릴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다만 문제있는 번역에 대한 교정 요구를 출판사에 해야 한다는 주장을 독자의 입장에서 로쟈의 서재에 돌려주는 것으로 이해해 주세요. 변명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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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