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상하이'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09.08.16 깃발 10
  2. 2009.08.16 M on the bund
  3. 2009.08.13 100년 전 상하이의 목욕탕 8
  4. 2009.08.10 비가 오면 잠시.. 7
  5. 2009.07.27 기다려 봐!! 4
  6. 2009.07.01 [횡사도] 게잡이 혹은 자연체험학습 5
  7. 2009.06.27 상하이의 색깔은? 6
  8. 2009.06.26 버려진 다리 - 횡사도 구조부두 2
  9. 2009.06.22 부서진 시멘트 다리 4
  10. 2009.06.20 횡사도를 다녀왔습니다. 4
示衆/明室 2009. 8. 1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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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선배 하나와 후배 하나가 상해에 왔다.
여러 번 다녀가기도 했던 분들이라 잠깐 만나서 점심이나 먹는 정도로 헤어졌다. 바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번거럽고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 같은 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먼저 연락도 하지 않는 건 좀 섭섭했다. 귀찮다고 너스레를 떨긴 하지만, 우리도 그런 기회에나 한번씩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에서 관광객이 되어 보는 것 아니겠나.

아무튼. 일행들과 복주로(푸저우로)의 오래된 광동식 식당, 행화루(싱화러우; 杏花樓)에서 딤섬 위주의 점심을 먹고도 왠지 좀 아쉬워 간단히 커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간단히"라고 하길래 근처에서 대충 마시려다, "그래도 분위기 좀 좋은데 없냐?"고 덧붙이길래 이곳이 생각났다.

M on the bund!

저녁 시간에는 식사 위주인데(바로 위층에 칵테일과 맥주 등이 구비된 글래머 바로 술손님을 유도한다.) 밥시간이 아닌 한가한 오후에는 차를 마시며 와이탄과 푸동을 조망할 수 있다.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야외 테라스에서 수다를 떨었다. 날씨는 흐렸지만 몇 주째 내린 비 때문인지 시야는 트여 있었다. 솔직히 상해 있으면서 이렇게 가시거리가 긴 날은 몇번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엑스포 전까지 와이탄 앞 도로와 광장 조성을 끝내기 위해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라 온통 헤집어 놓고 있다.
(관련 포스팅: 상하이 와이탄 광장공사 1 - 지하도로 , 상하이 와이탄 광장공사 2 - 넓어지는 와이탄)


예전 포스팅에도 설명했듯이 크레인 아래에서 시작해 지하로 도로를 내고 지상공간은 차도를 축소하고 광장을 넓히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대충 둘러보고 나니 이쁘게 커피가 나왔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시켰는데, 솔직히 커피맛은 별루였다. 어차피 자리세. 옛 건물에서 와이탄을 내려다 보며 수다 떠는 재미로 왔고, 충분히 제 값을 했다.

야외에서 마시다가 비가 한두 방울 떨어져 실내로 들어왔다. 실내 분위기는 대충 아래와 같다... 금요일 오후여서 한가롭고 조용해서 좋았다.

와이탄 야경을 보면서 식사를 하거나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할 생각이라면 옆 건물인 New Heights와 함께 M on the bund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론리 플래닛 같은 여행책자에 잘 소개되어 있어 저녁시간은 항상 사람들로 붐비긴 한다.  홍콩 M on the Fringe는 20주년, 상해는 10주년, 그리고 올 9월에 북경에 새로운 지점이 생긴다고 한다. 10년 단위로 북진을 해 온 셈이다.

Posted by lunarog
우리는 “땟놈”이라는 말에서 잘 씻지도 않는 지저분한 중국인을 연상하곤 한다. 물론 “땟놈”의 “때”는 몸에 낀 때와는 상관없는 말이지만,[각주:1] 요즘도 상하이 등 대도시의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중국인들이 외모에 많이 신경쓰지 않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사천 사람들은 태어날 때 한 번, 죽을 때 한 번 목욕한다(蜀人生時一浴, 死時一浴)”라는 속담이 전해졌겠는가.

그런데 중국 전체로 볼 때 내륙 지방에 해당하는 북부와 서부는 목욕을 즐기지 않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지만, 습하고 물이 많은 동남부 지역의 사람들은 제법 목욕을 즐겨 독특한 목욕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13세기 항주에 목욕탕이 3천 개나 있었으며 한꺼번에 100명이 목욕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뻥이 좀 세긴 하지만, 어쨌든 그 시절 중국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대중목욕탕이 존재했다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대중목욕탕은 언제쯤 시작된 것일까?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이나마 당시 목욕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재미난 그림이 있다.

(아시겠지만 제 블로그의 모든 이미지는 누르면 제법 커집니다..)
"화재가 발생한 목욕탕", <점석재화보>, 1886년

이 그림신문은 소주의 한 목욕탕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을 다룬 것이다. 주인의 부주의로 발생한 화재인지 옆집 꼬맹이가 불장난한 게 옮겨 붙은 것인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아무튼 한밤중에 느긋이 목욕을 즐기던 손님들이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하고 우르르 뛰쳐나오는 모습이 생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목욕탕 자체에 대한 기사가 아니어서 이 당시 목욕탕 내부가 어떠했는지 이 그림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출입구와 욕실 입구를 조망하는 위치에서 제시되어 당시에도 출입구 바로 왼쪽에 있는 카운터에서 계산을 한 후 탈의실을 통과하여 욕실로 들어가는 구조인 것은 알 수 있다.

문자로 제시된 몇 가지 정보를 확인하자면 우선 이 목욕탕의 상호는 “홍복원(鴻福園)”이다. 오른쪽 상단의 문 위에는 “낙지(樂池)”라는 팻말이 붙은 것으로 봐서 이 목욕탕에는 “지탕(池湯; 즉 공동욕조)”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탈의실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내부에 위치한 욕실로 들어간다. (지탕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중앙에 있는 “난방(暖房)”이라고 쓰여진 공간은 정확하진 않지만, 도구를 챙겨서 뛰어나오는 사환들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봐서 보일러실을 겸한 사환들의 작업장인 것으로 보인다. 수면실이나 찜질방의 기능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이는 관련자료가 보충되어야 알 수 있을 듯하다. 어쨌든 그림으로 봐서 화재의 근원지가 난방 쪽이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가장 특이한 것은 그림 오른쪽 하단부에 위치한 탈의실이다. 화재를 피하려는 사람들과 옷이 널브러져 있지만, 탈의실에는 오늘날 캐비넛의 기능을 하는 상자가 있고 그 앞에 길쭉한 의자가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옷을 챙겨가지 못했는지 왼쪽에서 두 번째 상자에는 신발에 천까지 잘 씌워져 있다. 평소 같았으면 의복은 가지런히 개어 상자 안에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발을 상자 위에 올려 두었을 것이다. 아마도 목욕을 끝낸 후 의관을 정제하면서 이 의자에 앉아 차라도 한잔 하거나 담배를 한 모금 빨았을 수도 있겠다.

다행히 왼쪽 중앙에 보이는 바깥문으로 “태평양룡(太平洋龍)”이라는 깃발을 든 소방수들이 몰려오는 것으로 봐서 이 화재는 곧 진압이 되었을 것이다.


근대 시기 상하이의 목욕탕은 공동욕조가 설치되어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는 “지탕(池湯)”과 개인 욕조가 설치된 일인용 욕실인 “분탕(盆湯)”의 두 종류로 나뉜다. 지탕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기 때문에 병균에 감염될 우려가 많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들은 분탕(盆湯)을 선호하였다. 분탕盆湯에는 양분(洋盆), 관분(官盆), 객분(客盆)의 세 종류가 있고, 어떤 곳에는 거대한 “양분(洋盆)”에 샤워기(蓮篷管)가 설치되어 있어 샤워도 할 수 있었다. 여름에는 선풍기, 겨울에는 화로가 갖춰졌고 인테리어도 훌륭하였다. 한 사람씩 들어가게 되는 특설호화탕(特設雅室)은 양분방(洋盆房間), 여러 사람이 같이 사용하는 것은 통간(統間)이라고 각각 불렀다. 관분, 객분 또한 각각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다.


위 그림이 다소 대중적인 “지탕”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면, 아래 그림은 호화로운 “분탕(盆湯)”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입을 옷이 없네 그려?", <점석재화보>, 1887년

기원분탕(沂園盆湯)이라는 이름의 목욕탕이 구강(九江)에 신장개업 했는데, 깨끗하고 호화로운 시설을 갖추어 모두들 앞다퉈 목욕을 하러 갔다. 그 중 화려한 옷을 입은 두 청년이 옷을 벗어 두고 욕실에 들어갔는데, 무뢰배 몇 명이 와서 옷을 훔쳐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 점잖은 체면에 옷도 입지 않고 뛰쳐나가 멱살을 잡을 수도 없고, 옷을 가져가는 걸 보면서도 한 마디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 사대부 자제의 모습을 연상해 보시라.

첫 번째 그림의 경우 불이 나서 어수선한 점을 감안해야 되겠지만, 지탕과 분탕은 기본적인 외양에서도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도 탈의실이 중심무대이고, 휴게실(?)로 보이는 공간이 왼쪽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탈의실의 풍경은 사뭇 다른데, 덩그러니 상자 하나에 서로가 연결된 긴 의자가 아니라, 차탁이 놓여 있어 앉아서 차도 마시고 발가락 손질(扦脚)이나 발안마 같은 서비스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널찍한 내부와 휘황찬란한 가스등만 봐도 이 목욕탕이 얼마나 호화스러운지 잘 알 수 있다.

목욕탕 안에는 이발사, 때밀이, 발가락 손질(扦脚; 修脚)을 하는 사환(堂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로 진강(鎭江), 양주(揚州), 단양(丹陽) 출신이 많아, 출신에 따라 양주방(揚州幇), 단양방(丹陽幇), 구용방(句容幇)으로 나뉘는데, 인원수는 양주방이 가장 많았고, 단양방, 구용방이 그 뒤를 이었다. 목욕을 끝낸 후 목욕비 외에 이들 사환들에게 팁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위의 두 그림에서와 같은 정식 목욕탕은 아니지만, 매년 여름에는 끓인 물 파는 가게(老虎灶), 다관(茶館) 같은 곳에서도 “청수분탕(淸水盆湯)”이란 이름을 내걸고 목욕업을 겸하였다. 여름 한철 장사인지라 시설도 간단했다. 입구에는 기름종이에 “淸水盆湯”이란 글씨를 쓴 등롱을 내걸고, 나무 욕조 두세 개에 물 받아놓고, 천으로 칸막이를 하면 끝이다. 일종의 노천목욕탕이라 할 수 있는 이곳은 주로 일반 노동자나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 하층민이 이용하였다. 장사가 꽤 잘 되었는지 매년 여름이면 열에 아홉 가게는 이런 임시 목욕탕을 열었다고 한다.

위에 제시된 그림에는 남자 손님만 등장하는데, 이 당시 여자 목욕탕은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자 목욕탕의 경우 1920년대 말 즈음에야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자목욕탕은 상하이 절강로(浙江路)에 위치한 “용천가정여자목욕탕”(龍泉家庭女子浴室)이 대표적이다.

이 목욕탕은 위층은 여탕, 아래층은 남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설이나 배치는 남자 목욕탕과 동일하되 때밀이, 발가락 손질 등의 서비스는 모두 여자 사환들이 하였다. 기녀들이 주요 고객인지라 상하이의 일반 부녀자들은 그 앞으로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당시 제법 큰 여관에는 서양식 욕조가 있었기 때문에 대갓집 마님이나 모던 걸(摩登女郞)들은 대부분 여관을 세내어 목욕을 했지 목욕탕을 찾지는 않았다. 때문에 여자 목욕탕의 경우 장사가 썩 잘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잇속 밝은 상해 상인들이 왜 여기저기에 여자 목욕탕을 열지 않았겠는가.


보너스! 여자 목욕탕이 없다 보니 아래와 같은 일도 가끔 생겼나 보다. ^^
"저도 때를 씻고 싶다구요", <점석재화보>, 1885년

이 그림은 남경의 한 목욕탕에서 벌어진 사건을 담고 있다. 몇몇 젊은이들이 목욕탕에 와서 한참을 떠들고 놀다가 막상 욕탕에 들어가려는 순간 일행 중 하나가 옷을 벗지 않는 것이었다. 종업원이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여인이었던 것!! 당장 매니저를 부르고 난리를 쳐서 밝혀낸 바, 그녀는 남장을 하고 남자목욕탕에 들어온 기녀였다고... 무엇이 궁금했길래? :)


참고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 19세기 말 상해에서 발행된 그림 신문. 인용한 그림은 모두 상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소개한 내용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목욕탕의 시설이나 분위기는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上海風俗古迹考>, 424쪽.
<上海鱗瓜>, 36-8쪽.

  1. “땟놈”은 중국인을 “대국(大國)” 사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지만, 중국인들이 “맞아, 그럼”이란 뜻의 “對(뛔이->떼이)”를 말끝마다 사용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8. 10. 10:51

비가 오면 잠시 쉬었다가 가도 되겠죠?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날 타이캉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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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7. 27. 10:58
상하이 푸동.

진마오 빌딩 88층(421m), 월드파이낸셜 센터 101층(492m).
건설 중인 상하이센터는 127층(632m)...


아~ 글쎄. 기다려 보라니깐~!!

한편 강 건너 와이탄은 여전히 100년 전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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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횡사도는 넓고 평평하고 사람도 없다. 자전거를 타기에 정말 좋았지만, 이렇게 평평하기만 하니 홍수로 수위가 높아지면 섬 전체가 잠겨버리지 않을까?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섬 주변에 제방을 쌓고 강(바다)과 만나는 사이에 습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뚝방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오토바이가 늘어서 있었는데, 아마도 주인들은 모두 배에 타고 있거나 배에서 짐을 내리려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 뚝방길과 강 사이의 공간은, 혹은 초원처럼 물소가 풀을 뜯기 좋은 정도로 마른 땅이었고 또 어떤 곳은 갈대가 무성한 사이로 진흙땅이었다.

뚝방길 사이로 난 틈으로 아래로 내려오면 강 바로 앞까지 올 수 있다. 약간 울퉁불퉁했지만 자전거를 타기에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강과 바로 인접한 뚝방길 아래로 통발 같은 게 길쭉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뭘까? 바로 이놈들이다.

아주 호전적이고, 재빠르며, 숨기도 잘 하는. 민물게는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진 지 오랜지라 재미있을 것 같아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국민학교 다닐 때 하교길에 도랑에서 손바닥만한 게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신기한 기억으로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을 만큼, 게 자체가 흔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때 그 도랑이 생각나기도 했다. 우르르 흩어졌지만, 경계하는 것인지 호기심 때문인지 무서워하면서도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는 놈도 많았다.

처음에는 사진이나 몇장 찍을 요량이었다. 빌려온 똑딱이의 줌으로는 충분히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고 제대로 담기도 쉽지 않았다. 내친 김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장갑 벗고 게잡이에 나섰다. 정말 맘 먹고 게를 잡을라치면 신발 벗고 뛰어 들어가 진흙탕의 저 구멍들을 헤집어야 할 텐데,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작은 생명체들의 최대의 적, 순진한 꼬마 개구장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잠깐 놀아볼 생각이었는데, 그마저도 아마 한가로운 낮을 보내는 게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내가 게중 제법 큰놈을 하나 잡았다. (손가락 협찬: 루나)
내가 사용한 방법은 이렇게 바위틈에 있는 제법 큰 놈을 골라, 앞쪽에서 갈대잎으로 살짝 위협을 하면서 대치국면에 있다가 슬금슬금 물러설 때 다른 손으로 뒤쪽을 덮치는 것이었다. 자연에서 살고 있는 놈들의 생명력이란 너무나 거대해서, 손으로 잡을 때의 그 꿈틀거림이 주는 진동은 너무 오랫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놓아주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슬금슬금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다가, 그러니까 자기의 은신처 반대쪽으로 움직이는 척하다가 아주 빠른 속도로 은신처 구멍으로 사라져 갔다. 미안~~

갈대 줄기로 게를 잡겠다고 휘두르던 반군도 어찌어찌 한 마리 잡았다. 조금 더 큰 놈이다. 이놈도 힘이 얼마나 좋은지 반군의 장갑을 살짝 줬더니 놓지를 않는다. 게다가 한쪽 집게는 공격용으로 남겨놓는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다. 게는 생김새에서부터 호전적인 탱크 느낌이 난다.
손가락협찬: 반군

반군은 게장 담그게 맘먹고 다시 한번 와서 게를 잡자고 했다. 나는 게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패스~
뭐 어쨌든 내 생업이 걸린 일이 아닌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은 좋지 않다. 머리로만 안다.

게를 보면 두꺼운 갑옷 속에 있을 연약한 피부가 생각난다. 손이 베이고 피부에 상처가 날 때 왜 인간은 게처럼 바깥이 단단하지 않을까 투정부린 어린시절도 기억난다. 껍질이 둘러싸고 있으면 상처도 나지 않을 텐데 말야.. 바깥이 단단한 것과 속이 단단한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진화한 것일까? 진화는 잘 모르겠고. 한번 깨지면 복구가 힘든 갑옷 피부를 바라기보다는 작은 상처에 무력하지만 재생가능하고, 그런 상처 때문에 더 탱글탱글해지는 피부가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매번 상처가 날때마다 갑옷 피부가 그리웠다.

오늘밤은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차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너무 아프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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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丹靑 2009. 6. 27. 18:02
상하이 하면 떠오르는 색깔은 어떤 걸까?


흐리고 습한 상하이의 날씨는 상하이를 무채색의 도시로 떠올리게 한다. 이 도시는 색깔이란 게 없고 그라데이션만 살아 있다. 명암만 살아 있는 도시, 가장 밝은 곳과 가장 어두운 곳이 공존하는 도시, 그렇지만 그 각각이 다른 색깔을 띤다고 하기보다는 같은 색의 농도와 계조가 다를 뿐인 그런 도시. 내가 떠올리는 상하이의 이미지이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 중남미의 원색찬란함, 티벳의 고요하지만 강렬한 색감은 상하이에서 떠올리기 힘든 무엇, 에너지 자체가 다르게 표출된다.

Pudong, 90x120cm.

반군이 쓴 글에서 읽은 프랑스에 주로 거주한다는 어느 미국인 화가가 그린 상하이를 떠올려 본다. 상하이를 마치 지중해를 그리듯 원색으로 표현했다, 왜 그렇게 그렸나는 물음에, 자기는 상하이에서 젊고 생동하는 에너지를 보았다고 대답했다고. 그 에네르기를 표현하는 방법이 강렬한 색감이겠다. 그가 보는 상하이가 그럴 수는 있다. 그의 상하이는 그런 모습, 그런 색깔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왜 상하이를 그런 색깔로 표현했냐고 묻게 되고,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상하이와 그 색깔은 어긋나 있음을 뜻한다. 그가 해석한 상하이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우리가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상하이와는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지고 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의 이름은 제프리 헤싱(jeffrey hessing)이다. http://www.jeffrey-hessing.com/이라는 개인 홈페이지도 가지고 있고, 거기서 중국에서 그린 그림과 상해를 그린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어떤 색깔로 상하이를 표현했는지 살펴보려고 홈페이지를 열어본다.

The Bridge, 100x80cm.
푸장반점 꼭대기에서 소주하와 와이바이두 다리 너머를 바라본 풍경이다.

The River, 97x130cm

The Bund, 90x120cm

Shanghai Sunset, 100x120cm

The king and queen, 100x80cm.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제프리 헤싱.

그림을 보지 않고 떠올렸을 때만큼 강렬한 색감은 아니다. 나는 더 강렬한, 눈이 부신 원색을 기대했다. 그 강렬함은 어쩌면 색의 대비에서 올 듯한데, 헤싱이 쓰는 색은 원색이긴 하되 강한 대비가 없다. 그림에 대해서도, 색감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게 없지만. 그는 그저 자기가 선호하는 색깔을 상하이에 덧씌운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가 그린 뉴욕, 이스라엘 등도 비슷한 색감이다. 다만 상하이는 그런 도시와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색의 대비가 덜하고 건물과 건물을 구분하는 선을 제외하면 색들이 서로 섞인다는 느낌마저 든다. 곱지만 포스가 없다.

색의 대비, 즉 서로 다른 색깔들이 부딪히고 충돌하는 사이에 내뿜는 긴장을 나는 상하이에서 느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다름이 아니라 조금 더와 덜의 경계에 놓여 있다. 제프리 헤싱의 그림이 상하이의 에너지를 잘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존재의 다른 색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그걸 상하이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까?

상하이의 진정한 얼굴은 밤에 드러난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밤이 없는 도시, "불야성"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야(夜)상해! 1865년에 가스등이, 1882년에는 전기가 상하이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세련된 <상하이 모던>을 노래한 리어우판의 상대편에 루한차오의 <네온불빛 너머>가 있다. 밤이 되면 온갖 색의 네온사인과 광고판이 휘황찬란하지만 번화가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어떤 어둠이 펼쳐지는지를 루한차오는 보여주며, 그곳이 단순한 암흑이 아닌 다양한 계조를 가진 인간군상이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내가 떠올리는 상해 사진은 모두 20세기 초의 흑백사진들이다.
상하이는 아무래도 흑백으로 찍어야겠다. 혹은 색을 날려버리고 계조만 살아있게.

상하이를 어떤 색깔로 떠올리시나요?



보너스: 제프리 헤싱이 그린 만리장성과 운하 풍경.
Water Village, 65x81cm.

The Great Wall, 65x54cm.

Posted by lunarog
한낮. 자전거는 해변을 따라 섬을 돌다 버려진 다리 앞에 도착했다. 예전에 이 다리에 왔었다며 성큼 다리 위로 올라서는 반군을 따라 들어갔다. 버려지고 아무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다리로 만들어진 이상 어딘가로 데려다 줄 것이다. 저 멀리 뭔가 시설물이 보이는 것도 같다.

입구에 위험하다는 문구가 있었지만 유심히 살펴보지는 않았다. 시작부터 단어인지 전치사인지 끊어 읽히지가 않았고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가벼운 경고문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반군이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어 그저 뒤따라갔을 뿐이다. 예전에 왔었다고 하질 않나. 그것도 밤에 여럿이서 같이. (깜빡 했다며 예전에는 "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군은 다리 끝에서 알려주었다..)

왼쪽으로는 상당히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강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물(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해변이라고 해 두자!)에 닿기 전, 푸른 풀밭에는 물소들이 풀을 뜯고 습지에도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을 것 같다. 마구 뛰어 들어가 게도 잡고 조개도 잡고 그러고 싶은 풍경이다.

입구: 열려진 쇠문을 통과해 들어가는데, 꽤 멀다. 그냥 봐서는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뒤돌아보면 멀리 전망대 같은 게 보이기도 한다. 아직 땅에서 별로 높지도 않아 뛰어내리면 폭신폭신한 땅에 사뿐히 내려앉을 것만 같다. 파란 하늘에 샤방샤방 흰구름 낮게 깔린 뒤쪽에 비해 앞쪽 풍경은 왠지 심상치가 않다.

상당히 멀리 왔지만 아직도 끝은 아득하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어느새 발밑은 습지가 아니라 물이다. 바닥이 땅인 것과 바닥이 물인 것의 차이. 다리 위 난간에 기대어 흐르는 물을 보며 명상에 잠기곤 했다. 난간이 없는 다리에서 그러나 명상은 배부른 소리!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 일렁되는 걸 보면 압도되는 것 말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통로 폭이 2-3미터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바다 쪽으로 갈수록 바람마저 거세져 오금이 저려온다. 사진사 반군은 사진도 찍지 않고 앞으로 그냥 뚜벅뚜벅 걷기만 한다.

배는 통통 떠나니고 저 멀리 중국 군함도 간간히 지나 다닌다. 나중에 지도를 확인해 보니 한가로운 농촌과 어촌 분위기의 횡사도 곳곳에 해군 기지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산업부두 비슷한 게 보인다. 아마도 지금 이 다리가 버려지고 저곳에 다른 시설을 만든 게 아닐까?

이제 거의 다 왔다.. 중간을 넘어서면서 혹시 바람에 날려가지 않을까, 제발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심하며 최대한 무게중심을 낮춰서 조심조심 걸었다. (그렇지만 반군에게는 최대한 대범한 척하면서... ㅠㅠ) 인간이 만든 도시라는 벽 안에서, 인간들끼리 서로 잘난 척하며 으시대지만 그 바깥으로 조금만 벗어나 벌거벗은 채 자연과 만나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내가 아무 장비 없이 저 물 속으로 첨벙! 하면 그걸로 끝이다. 진흙 파도 속에서 내 수영장 자유형 실력이 먹히기나 할까?

나는 물을 겁내고 반군은 자물쇠 없이 두고 온 자전거를 겁낸다. 이제 누군가 훔쳐가도 보이지도 않고, 설령 알아채고 뛰쳐가도 자전거 되찾기는 걸렀다. 느낌으로는 1km는 족히 걸어온 것 같다.

형, 수영 잘 해요?
수영 좀 한다고 소용 있을까? 그나저나 우리 둘이 빠져도 아무도 모르겠다..
쥐박이를 데려와서 살짝 밀어넣으면 참 좋겠네요.
걘 겁이 많아서 요까이 오지도 않을 거야..
하긴요...
반군아, 혹시 내가 빠져도 구하러 뛰어들거나 그러진 마라..
.. ... 하! 그거 굉장히 어려운 문젠데요?


뼈대만 남은, 각각 바닥으로 발을 딛고 서 있지만 서로 연결되지는 못한 시설물들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똑같이 폐허라도 오른쪽은 깜깜하고 왼쪽은 밝다. 한때는 배가 정박하고 뱃사람이 쉬어갔던 곳이겠지. 굉장히 상상력이 자극되는 공간이었는데. 왜 육지가 아닌 물쪽으로 이렇게나 멀리까지 이런 시설물이 필요했을까? 왜 버려졌을까?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반군아, 꼭 미래소년 코난 분위기 나지 않냐? 왠지 오래되고 튼튼한 게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건물 같아. 횡사도 정도 규모에 커다란 상업항구가 필요하지도 않았을 거고, 일본 애들은 자기 나라에서 가까운 이곳에 항구를 만들어 잠깐 정박했다가 상해 쪽으로 치고 들어갈 때 전략적으로 좋잖아. 저기 입구쪽 전망대도 그때 같이 만들어진 거겠지.

왠지 그럴듯한데요? 확실히 일제가 튼튼하긴 하죠!

다리 양쪽에 커다란 수송관은, 그게 구리든 쇠든 대약진운동 때 뜯어가서 녹혔을 거야. 그때 그런 짓 많이 했잖아. 여기를 기지로 쓰려면 물이나 가스, 기름 같은 보급품이 필요했을 건데 아주 튼튼한 쇠파이프가 놓여있지 않았을까? (그거라도 있었으면 난간 역할을 했을 건데...ㅠㅠ)
미래소년 코난의 시대배경이 자그마치 2008년이니만큼, 1940년대 일본이 만들어놓은 과거의 유물에 지나간 미래의 폐허를 떠올리는 것도 영 말이 안 되는 거는 아니겠다.. (어차피 소설이니깐! ^^)

물과 육지를 만나는 곳에서도 비슷한 폐허 이미지가 있었다. 다리 위에서 나는, 물에 식겁하고 부서진 콘크리트 덩어리에 압도되었다. 그런 느낌은 사진으로도, 글로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끝까지 오면 비교적 넓은 공터가 있다. 그곳에 주저앉아 잠시 쉬어갔다. 반군은 노래를 흥얼거렸고 나는 (바다 위라서) 눅눅한 공기에 아랑곳 않고 담배를 피웠다. 16미터.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반군은 이 높이를 가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적어도 몸이 바로 부서지지는 않겠다. 그러나 여전히 쉴새없이 파도가 덮쳐와 편하지도 않겠다.

 태호 강변에는 영산이라는 산이 있고, 산 중턱에는 팔 십 팔 미터 불상이 서서 세상을 내려보고 있다. 석가모니불이다. 십 육 미터라고 들었다. 계단 어디쯤에서 십 육 미터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어림할 수 없었다. 아슬아슬한 높이였겠다. 어떤 각오.같은 것이 필요했겠다.

반드시 죽어야 한다.
요행이라도 살아나서는 안 된다.

 십 육 미터의 높이는 그런 각오의 높이처럼 보였다. 반드시 죽기 위해, 마지막 남은 몸뚱아리로 최후의 응원을 보내기 위해 그 분은 두 주먹 꼭 쥐고 수직으로 내리꽃혔을 것이다. 팔 십 팔 미터는 사람의 높이가 아닌 것이고, 십 육 미터는 살아서 닿을 수 없는 높이 같았다.

by 반군, for gogh

 
몸에 물기가 많아 짜 버리지 않으면 힘들 것 같던 5월 24일, 처음으로 반군과 자전거를 타고 바다까지 달렸다. 짭짜름한 땀이 흘러 몸은 가벼워졌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나는 아래쪽으로 뛰어내릴 생각은 없기에 각오 같은 건 하지 않았고, 그저 폐허를 보며 미래소년 코난만 생각했다. 내 발가락 힘으로는 저쪽까지 뛰기가 힘들겠는 걸?

되돌아오는 길도 반군이 앞장섰다. 발걸음은 훨씬 가볍지만 물기 많고 거센 바람에 여전히 조심스럽다. 돌아오며 이 다리의 일제기원설에 대해 계속 떠들어댔다. 그래야 자연의 목소리에 압도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입구로 돌아와 편안해진 마음에 아래쪽으로 내려가 본다. 버려진 낡은 배가 있었다. 발이 땅을 딛고 있을 때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 없다.

들어갈 때 해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문구를 다시 살펴 본다. 도대체 이렇게 위험한 다리를 왜 출입통제하지 않냐는 말이다. 버럭!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문구가 해석되지 않은 것은 내가 "引橋"라는 단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진입교"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경고: 진입교가 끊어져 위험하니, 출입을 엄금함!"

횡사도의 어느 절에 들어간 김에 나이 지긋하신 관리인에게 버려진 다리에 대한 걸 물었다. 나중에 검색해서 찾아보려면 이름이라도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청꿍"을 "성공"이라고 발음하시는 할아버지의 사투리에서 딱 한 마디,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만 겨우 알아 들었다. 어찌어찌하다 "인교"가 단어라는 걸 알게 되었고, "횡사도"와 "인교"를 검색어로 하여 겨우 다음 사실을 알아냈다.

횡사도 구조부두(横沙救助码头)


횡사도는 장강의 끝자락, 오송강(황포강) 입구 사이에 있다. 예전부터 횡사도 인근에서 대형선박의 조난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1975년 상해구호국(上海救捞局)의 제의로 횡사도에 구조부두를 건설, 구조선박의 대기 및 일정량의 구호물자 비축하여 장강하구에서 조난사고가 발생했을 시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게 함. 1976년 12월 착공에 들어가 1977년 11월에 부분완성된 상태에서 사용을 시작하였고 1979년12월에 완공. 이 부두는 횡사도 서쪽 강변에 위치, 해군부두에 인접해 있으며 서북쪽으로 상해항도국 장강구 판사처 부두와도 가깝다.


전체 길이는 370미터. 130미터의 강질 부잔교[각주:1](1.7만톤급 낡은 선박을 개조하여 만듦) 구조로 되어 있고,. (그외 다른 구조물에 대한 잡다한 설명이 부가되어 있지만 생략! 항구관련 용어는 너무 생소해요..)  横沙救助码头,位于宝山县横沙岛西滩,紧靠海军码头,西北与上海航道局长江口办事处码头相邻。岸线全长370米,占地16亩。结构形式为钢质浮码头(由1.7万吨级旧船底改建而成),长130米。钢过桥(长18米、宽4.5米)、桥吊桥、砼引桥(长225米、宽6米)、桥头堡引堤(长82米、宽6.5米)坡岸。


이 부두가 건설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변화와 농지조성을 위한 간척사업 등으로 인해 매년 50-60cm 침적되면서, 80년대 초부터 사용이 정지되었다.

설명이 애매한 부분은, 우리가 걸어서 끝까지 간 그 다리의 길이가 370미터인지 아닌지이다. 내 느낌으로는 훨씬 길었는데.. (혹시 중국어로 노출된 부분을 설명해줄 수 있는 분이 계시면 후사함![각주:2]) 다리 끝부분에 듬성듬성 남은 구조물은 원래 부잔교로 서로 연결되었다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일제가 만들고 대약진운동 때 고철을 뜯어내기는커녕(현실에서 내 추리는 맞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문혁이 끝나던 무렵 착공에 들어가 완공되자마자 얼마 사용하지도 못하고 버려진 듯하다.


횡사도라는 섬 자체가 너무 조용한 곳이어서 관광지로 크게 뜰 가능성은 적을 것 같다. 장강 하류의 세 섬(숭명도, 장흥도, 횡사도) 중 가장 규모가 작기 때문인데, 유일한 특징이라면 가장 바다쪽에 있는 섬이라는 정도. 그렇더래도 저 다리를 그냥 폐쇄할 것이 아니라, 난간을 설치하여 안전설비만 갖춘다면 꽤 괜찮은 폐허 관광지가 될 것 같다. 너무 많은 사람이 찾으면 분위기 자체가 바뀌겠지만. 그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버려진 다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폐허에서만 가지고 올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 거니까.



  1. 부잔교 [, floating pier]: 부두에서 폰툰(pontoon:물에 뜨도록 만든 상자형의 부체)을 물에 띄우고 그 위에 철근콘크리트 ·강판 ·목재로 바닥을 깔아 여객의 승하선 ·화물의 적양() 에 편하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폰툰을 해저에 체인이나 와이어 로프로 고정시키고 그 위에 설치한 간이부두로서, 조석 간만의 차이가 큰 곳에서 많이 이용된다. [본문으로]
  2. 후사.라고 할 것까진 없고 8월10일 이후 책 한권 선물해 드릴께요.. [본문으로]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6. 22. 20:55
아래 "시멘트에 향수를 느끼는 세대"와 굳이 연결시킬 필요는 없겠다.
횡사도의 버려진 다리에서 내가 느낀 것은 향수가 아니었다.
육지에서 300미터를 넘게 강/바다 쪽으로 이어진, 난간조차 없는 버려진 다리가 내게 주는 느낌은 두려움, 그로테스크, 미래소년 코난에서나 나올 법한 세기말적인 풍경이었다.

쨍한 날이지만 노출을 억제한 이 사진이 거기서 받은 내 인상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횡사도의 버려진 다리에 대한 예고편 포스팅 되겠다.
바쁠수록 해야할 일보다 하고싶은 일들이 더 많이 떠오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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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6. 20. 02:08
상해의 북쪽, 장강 하구에 위치한 횡사도(헝사다오)에 다녀왔습니다.
장강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삼각주라고 보시면 됩니다. 세 섬이 있는데 가장 바다 쪽에 가까운, 그리고 가장 작은 섬이 횡사도입니다. 날씨는 쨍하였고, 가끔 흐려서 자전거를 타기에 적당했습니다만, 반바지 아래와 팔뚝은 발갛게 익어 버리더군요..

바쁜 게 조금 지나가면 횡사도 관련 포스팅을 할까 생각 중입니다.
사람도 적고 차도 적어서 자전거 타기엔 아주 그만이더군요.
공기도 좋고 길도 곧습니다. 먼지 많고 위험한 상해에 비할 바가 아니죠..


앞에 펼쳐진 건 바다가 아니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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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