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저는 손님들이 오면 이곳에 잠깐 올라갔다 오곤 합니다. 상해에서 야경을 보기에 여기보다 편한 곳은 없으니까요. 푸동의 전망대도 멋지긴 하지만 비싸고 항상 사람들이 많죠. 잠깐 다니러 오신 분들이 "아~ 여기가 상해구나!"라는 느낌을 받고 싶다면 이곳에서 강바람 쐬면서 맥주 한잔 하는 게 제일 적당하죠. 이미 많은 분들에게 알려져 있어 새삼 소개할 필요가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른쪽에  강변과 도로 사이에 삐쭉 튀어나와 있는 기상대 안쪽이 연안동로입니다. 이곳을 기점으로 왼쪽 끝(소주하)에 있는 영국대사관까지 번지가 매겨집니다. 그래서 뉴하이츠가 있는 건물이 "와이탄3호"라고 불리는 거죠. 연안동로는 예전에 "양징방"이란 이름의 운하였고, 중국과 영국 조계의 경계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조계가 생기기 전까지 중국과 서양상인의 교역이 가장 활발해서 "양징방 영어"(피진 잉글리쉬)라는 용어가 생겨난 곳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 고가도로가 있었는데 이제 철거했네요. 교통 유입량도 좀 줄이고 조계 경관도 살리고..

엑스포를 대비하며 와이탄 확장공사를 했는데요, 공사기간 동안은 먼지도 많고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적절한 방향으로 된 것 같아요. 예전 12차선 도로를 4차선만 남기고 모두 지하로 옮겨 버렸죠. 덕분에 지상 공간이 많이 넓어졌네요. 와이탄이 넓어지고 앉아서 쉬엄쉬엄 노닥거릴 공간도 많아졌어요. 언제나 사람이 많지만 남경로 쪽만 피하면 산책할 만합니다.

이곳이 전망이 좋은 이유는 활처럼 휘어 있는 황포강/와이탄의 오른쪽 끝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 건너 푸동이 한눈에 들어오고, 또 왼쪽편에 있는 와이탄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요.

광동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와이탄5호도 전망이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5호에 있는 M on  the bund는 밤에 가면 식사를 해야 입장이 가능한 것 같더군요. 가볍게 술 한잔 하겠다고 하면 위층에 있는 글래머 바로 올려보냅니다. 낮에는 테라스 쪽으로 가서 커피 한잔 먹겠다고 해도 들여보내 줍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밤에는 와이탄 3호의 뉴 하이츠에서 맥주 한잔, 오후에는 와이탄5호의 엠 온더 번드에서 커피 한잔을 추천합니다. 물론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식사를 하셔도 좋을 듯하네요. 뉴하이츠에도 왼쪽 테라스는 식사손님용인 것 같더군요.


에어컨 빵빵한 실내보다 조금 습하긴 해도 테라스 쪽이 더 시원해요. 장대비가 아니면 비가 조금 뿌릴 때도 나와서 먹는 게 더 좋더군요. 어차피 상해에서 축축한 여름밤의 공기를 피할 곳은 없으니까요..

http://www.threeonthebund.com/#

*엑스포 기간이라서 그런지 요즘 11시 30분까지 조명이 켜져 있더군요. 보통은 11시까지.
11시 30분이 되면 와이탄 쪽 건물들이 하나씩 불이 꺼지고, 건너편 푸동의 고층건물들도 조명을 꺼버립니다. 상해도 "불야성"은 아닌가 보네요..
Posted by lunarog
카테고리 없음 2010. 5. 25. 08:01

두 가지 식물성 기호품이 양대 제국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영국은 중국의 차를 수입하면서 풍요로운 오후와 건강한 제국의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아편은 무기력한 향락의 밤을 중국에 선사하였고 중국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영국의 차를 바다에 던진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의 독립을 가져왔지만, 영국의 아편을 바다에 던진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해 반식민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중국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상해라는 '자그마한' 도시가 있다.


두 장의 지도


남북이 뒤집혀 그려진 이 지도는 왼쪽 하단에 위치한 상해 현성(縣城)을 중심으로 각 현의 관할영역과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육지는 실제 크기에 비해 축소되어 있으며, 그물처럼 이어진 운하는 실제보다 훨씬 큰 것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 왼쪽으로 흘러내려오는 황포강(黃浦江)이 우리 한강 정도의 넓이라면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운하는 대부분의 경우 실개천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단순한 지형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지도에서 주요도로가 맡고 있는 역할을 이 당시 수로가 맡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평야를 이렇게 잘게 분할해야 할 만큼 땅에 대한 이용도가 낮고 육로를 통한 교역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반면 운하를 중심으로 한 수로는 강남지역 교통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림 1> 19세기 초 상해 현성을 중심으로 운하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의 교통에 물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왼쪽(동쪽)은 황포강이고, 현성의 하단(북쪽)에 비교적 큰 운하가 소주하(蘇州河; 지도에는 옛 지명인 오송강(吳淞江)으로 표기되어 있다)이다. 북경에 있는 황제의 시선으로 그려졌기에 남북이 전치되어 있다.

개항 이전의 상해는 '그저 작은 어촌'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개펄과 진흙으로 뒤덮인 작은 어촌이 개항과 함께 서구적 근대도시로 탈바꿈한 것으로 말이다. 영국의 조계지가 건설된 것이 상해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편전쟁의 결과 영국이 5개 항구의 개방을 요구했을 때 상해가 선택된 것은 '그저 작은 어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네 도시가 한 성의 성도(광주廣州)이거나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원래부터 대내외 무역의 거점으로 인정받던 곳(하문厦門, 복주福州, 영파寧波)인 반면, 황해에서 장강을 따라 들어와 그 지류인 황포강으로 진입하고도 18km를 더 가야 하는 상해는 얼핏 보기에 대외무역을 위한 지리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상해는 이미 청대 초기에 해운과 하운, 남과 북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상당히 발달한 상업 항구로 성장해 있었다. 운하와 장강을 통해 내륙의 물산을 밖으로 실어 나르거나 외부의 화물을 내륙 깊숙이 보급시키는 연결고리 역할을 맡고 있었고, 아울러 심해를 항해하는 데 적합한 광주와 복건 등 남해를 운항하는 배들과 수심이 얕은 황해를 항해하는 바닥이 얕은 사선(沙船)이 서로 화물을 교환하는 곳이 상해이기도 했다. 또한 개펄의 증가로 인한 실제 운행구간의 축소, 고가의 운송료 등 운하를 통한 강남내륙의 세금수송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어 해상을 통한 새로운 항로가 검토될 때 시야에 들어온 것 또한 상해였다. 그 중요성은 일찍이 1756년 동인도 회사의 피구(Pigou) 씨가 "무역에 안성맞춤인 도시"로 묘사한 바 있고(이사벨라 비숍,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 52쪽),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애머스트 호가 중국해안을 정찰한 후 상해에 대해 "이렇게 거대한 상업항구가 줄곧 홀시되어 왔다는 점은 실로 이상하기 그지없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동인도회사 직원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가 중국사정에 밝은 선교사 구츨라프(Charles Gutzlaff) 등을 대동하여 6개월간 실시한 이 정찰에서는 군사적 정보수집과 함께 중국의 주요 무역거점들이 상세히 검토되었다.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연해를 따라 조선, 오키나와를 거쳐 다시 마카오로 돌아간 이 정찰의 항로를 살펴보면 훗날 남경조약에서 영국이 왜 장강 이남의 다섯 항구를 개항지로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중 구츨라프가 남긴 상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상해의 지리적 중요성은 광주에 뒤지지 않는다. 이곳은 상업이 무척이나 활발하다. 만약 유럽 상인들에게 상해에서의 무역을 허락한다면 이곳의 지위는 매우 격상할 것이다. 상해에서 소비되는 외국상품은 엄청나게 많다. 이렇게 거대한 상업항구가 줄곧 홀시되어 왔다는 점은 실로 이상하기 그지없다. 중국법률에서 금하고 있어 이곳에서 무역하려는 시도는 저지되었다. 이런 것들이 어려운 점이긴 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1832,1833,Part.Ⅱ,1834.(http://military.china.com/zh_cn/history2/06/11027560/20050401/12212129_2.html)에서 재인용; <“阿美士德號” 1832年上海之行記事>, 《上海硏究論叢》 제2집(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1989년), 269-287쪽 참고.


전자는 그저 여행기에 그친 반면 후자는 훗날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남경조약(1843년)으로 개항된 다섯 항구 중 상해가 선택된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



<그림 2> 상해 현성 내부의 운하까지 상세히 묘사된 반면, 영국 조계지와 와이탄에 해당하는 지역은 터무니없이 작게 그려져 있다.

다시 지도로 돌아가서 상해 현성을 살펴보면 둥글게 생긴 성곽과 그를 둘러싼 해자/운하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 내부로 관공서와 문묘(文廟), 성황묘(城隍廟) 등 주요 지점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을 연결하는 것은 역시나 운하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방위의 성문 중 3곳은 수문을 포함하고 있어 현성의 출입에도 운하는 상당히 유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동쪽(그림 왼쪽)의 강변을 따라 형성된 부두는 상해를 지탱하는 무역의 거점이며, 그 사이에 세관(江海關)이 자리잡고 있다. 명대에 성곽이 세워진 것(1553년)도 왜구와 해적으로부터 이곳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성의 동쪽으로 부두에까지 이르는 길들은 각종 잡화들이 권역별, 도로별로 판매되고 있었다(두시가豆市街, 화시가花市街, 채의강彩 衣巷 같은 거리이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개항 이전에는 가장 번성했을 상해 현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육상교통로의 부재이다. 운하 곳곳에 상세히 묘사된 교량의 존재로 알 수 있듯이 도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남 지역의 다른 물고을(水鄕)들과 마찬가지로 육상교통이 상해를 살아가는 데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현성의 북쪽(그림 하단/붉은색으로 표시)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터이다. 이곳은 농경지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풍수가 훌륭하다 하여 곳곳에 묘지만 가득하던 곳이다. 그래서 서양 "귀신"(洋鬼子)들이 들어와 이곳을 차지할 때 끼리끼리 논다고 비아냥대던 곳, 바로 훗날의 영국 조계지이다. 현성과 거의 비슷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게 그려진 이곳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그 변화가 상해 전체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아래와 같이!



<그림 3> 1855년에 제작된 영국 조계지와 와이탄을 모습을 담은 평면도. 앞에서 제시한 상해현성의 지도와 비교해 볼 때 원래의 유선형 공간을 구획하는 바둑판 모양의 직선도로가 인상적이다. 물길이 아닌 육상도로가 부각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변화는 개항 후 10여 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인구 또한 1844년 50명의 외국인 거주자가 1855년 20,243명으로 늘었다.


1855년에 제작된 이 지도(그림3)는 개항 후 고작 10여 년 만에 그 보잘것없던 '작은' 개펄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갈 것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불구불 그물처럼 이어진 운하를 대신하는 것은 정방형으로 곧게 뻗은 직선도로이다. 비록 수로에 의해 조계지 전체의 권역은 구부러져 있을망정 그 내부는 바둑판처럼 잘 정돈시켜 구획하고 있다. 제작자와 사용자에게 기여하는 중요도에 따라 탄력적으로 크기를 달리하던 지형은 이제 정확한 방향표시와 함께 실측에 의한 실제크기와 모양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이 두 지도의 대비를 통해 자연적으로 생성된 물길에 몸을 맡기는 중국 문화와 객관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개척하는 서구 문화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 사태를 단순화시키는 발상일까? 지도에서 두 문화의 세계관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치다면 아래 인용문은 어떠한가?

 

굽은 길은 당나귀의 길이며, 곧은 길은 사람의 길이다.

굽은 길은 흐뭇한 기쁨, 안일함, 느슨함, 느긋함, 동물성의 결과다.

곧은 길은 반작용, 작용, 활동이며 자제력의 결과다. 그 길은 건강하고 고귀하다.

도시는 삶과 집약된 노동의 중심이다.

느슨하고 느긋한 민족과 사회, 무기력한 도시는,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과 사회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지고, 정복되며, 흡수된다.

그렇게 해서 도시는 죽고 주도권은 이양된다. (르 코르뷔지에, <도시계획>, 24-5쪽.)


"당나귀의 길, 사람의 길"의 은유는 즉각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운하를 통한 뱃길은 느슨하고 안일한 "당나귀의 길"이며,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에 의해 상해가 순식간에 정복되고 흡수되다시피 한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당나귀와 사람의 대비는 실제로는 자연과 기계의 대비로 볼 수 있다. 인간이성의 순수형식의 구현인 기계를 위한 길은 출발지점과 목적지를 최단시간에 연결하는 직선으로 대표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사이공간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똑바로 걷는다. 그는 가는 곳을 알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한 다음, 그곳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당나귀는 갈짓자를 그리며 걸어가고, 조금 빈둥거리며, 믿음이 가지 않는 멍한 두뇌로 큰 장애물들을 비켜가고, 비탈길을 피해, 그늘을 찾기 위해 갈짓자를 그리며 간다."(르 코르뷔지에, <도시계획>, 19쪽.)

아무튼 상해는 토지에 대한 이용보다는 수운을 중심으로 한 연결고리의 역할에 충실했던 시기에서, 땅이 부동산이 되고 잘 구획된 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선진적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운하를 메워 도로를 만드는 시기로 변화해간다.(양징방을 메워 만든 연안서로(옌안시루) 등) 여전히 강과 바다를 통한 교역은 상해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건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해라는 땅덩어리 자체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의 하나로 자임했을 영국에 의해 만들어진 조계와 그 도로가 어떤 방식으로 상해라는 공간 전체를 변화시킬지 위의 지도는 예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과 마차가 달리는 길인 "마로(馬路)"가 도로의 일반명사가 되고, 그 마로는 경마장으로 곧장 통하고 있으며, 그 사이공간은 보행자가 아닌 마차가 우선시된다. 와이탄을 넘어 한 블록만 들어가도 "영국" 조계지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중국인 혹은 중국과 관계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곳은 그 땅에서 일상생활을 펼치는 중국인들이 아닌 서구인의 것이었으며 서구인의 이익에 부합되는 활동만이 허용된 곳이었다.

 

* 이 글은 <중국 근대의 풍경>(그린비, 2008), "제3장 상해, 근대 중국을 향한 길"의 도입부를 재편집한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지도와 옛날 이미지 자료를 이용하여 상해의 옛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Posted by lunarog
카테고리 없음 2010. 5. 23. 07:56

오랫만에 시내 쪽에 나가보니, 상해가 아주 깨끗해졌다. 항상 공사 때문에 먼지나고 비좁던 곳이 완전히 바뀌어져 이른바 "걷고 싶은 거리"가 되어 있다. (실제로 한참을 걸었다. 평소였으면 택시 탈 거리를 걸어, 1시간 반이 걸렸다.. ㅡㅡ;;) 지하철도 제법 도시 전체를 커버할 정도의 노선이 생겨 앞으로 완전히 개통되면 꽤 편리해질 것 같다. 엑스포의 장점이다. 학교 근처에만 있다 보면 지금 상해에서 엑스포를 하고 있는지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전시할 게 있는 사람과 온갖 지식을 갈구하며 박람하고 싶은 사람들은 엑스포를 재미나게 즐길 듯하다.

집 근처에서도 엑스포를 실감할 수 있는 변화가 있다. 단지를 꾸미는 청소부들, 경비원들이 죄다 완장을 차고 있다. 이른바 규율반장?

같이 사는 동료는 완장에 대해 굉장히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다. 식당을 가든 어디를 가든 완장이 돌아다닌다고. 아무런 권한도 없으면서, 그 "완장" 하나로 그는 자기 맘에 안 드는 아무개를 불신검문할 수 있게 된다. 완장을 차는 순간 그도 권력을 발휘하고 싶어지고 다른 사람들도 그 권력에 굴복한다. 혹자는 자본주의의 첨병인 엑스포를 상해에서 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인 부담 때문이라고 과도한 해석을 하기도 한다. 모든 외국인에게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자본주의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는 걸 보여주고 시포요.. 이런 의도라면 외국인에게보다는 북경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면피를 하고 싶어서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 빨간 완장이 굉장히 눈에 거슬리는데, 우리에게(그리고 중국인에게)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경험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걸 명심하라는 의도가 전혀 없지 않겠다. 오늘도 청소부 아저씨는 완장을 차고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계신다. 사진을 찍기가 거시기하다. (오늘 아침엔 왠일로 완장을 안 찼다 싶어 자세히 보니, 다른 아줌마가 빗자루로 쓸고 계신다..)

학교에 가면 완장 뿐 아니라 또다른 희한한 풍경이 펼쳐진다.

파릇파릇한 대학생들이 모두 비슷한 녹색 계통의 체육복을 입고 돌아다닌다. 요새 교련복이 바뀌었나, 아니면 복단대 공식 체육복인가? 자세히(는 못 보고 지나가는 애 슬쩍) 보니, 엑스포 마크가 선명하다. 이른바 엑스포 자원봉사자 유니폼 되시겠다. 자랑스러운 거다, 상해에서 엑스포를 한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겠다, 엑스포에 자원봉사를 한다는 것이. 내가 대학생이었어도 엑스포에 자원봉사를 하며 경력도 좀 쌓고 그러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하다. 대전 엑스포를 내가 사는 도시에서 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자원봉사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올 것까진 없지 않겠니? 바쁘다, 자원봉사도 하고 수업도 들어야 하고. 하이바오는 왜 안 돌아다닐까? ^^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10. 1. 22. 00:14

또다시. 요금고지서도 보내주지 않고 전화요금을 내지 않는다고 독촉전화가 왔다. 전화는 상관없지만 어그적거리다간 또 인터넷이 끊어질 지도 모르기 때문에 오후에 전신국에 요금을 내러 갔다. 서두른다고 했지만 뭉기적거리다가 전신국 문이 닫혀 요금은 내지 못했다. 오후 4시30분에 문을 닫다니.

나온 김에 자전거로 시내 외곽으로 나가 본다. 지우팅(九亭)은 시내라고 해봐야 읍내 수준이기 때문에 번화가에서 살짝만 나가도 별장촌, 공장지대, 옛 강남의 집들, 뒷골목, 시골의 풍경 등등을 모두 볼 수 있다. 진작에 곳곳을 다니면서 사진을 좀 찍어두고 싶었는데, 한동안은 사진기를 챙기지 않고 자전거로 운동삼아 이곳저곳 다녀보기만 했다.

큰길 너머에는 제법 큰 운하가 있는데, 장식용 비슷하게 된 다른 운하와는 다르게 여전히 배들이 제법 다닌다. 마침 퇴근시간이라 여기도 교통정리가 필요할 정도였다. 자동차 운행이 금지된 낡은 콘크리트 다리 위에서 한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예전에 상하이에 대해 쓰면서, 운하를 메우고 그 위에 생겨난 잘 구획된 도로를 이 도시의 근대적 변환의 한 상징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강남 지역의 옛 지도를 보면 육상도로 표시는 거의 없고 구불구불 운하만 커다랗게 그려 놓았다.(실제로 도로가 없었던 게 아니다. 지도는 이용자들의 필요에 따라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만 표시할 뿐.) 성곽 안으로도 운하가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상으로 나 있는 성문 옆에는 선박운행을 통제하는 갑문이 따로 있었다. 구불구불 당나귀의 길은 사라졌고, 곧게 뻗은 인간(=기계)의 길로의 구획은 성공하여 우리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최단거리를 질주해야 한다. (그것을 아주 잘했다고 어스대던 어떤 인간이 운하를 다시 인간의 길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빛이 사라져가는 5시 어름이었다. 적당히 가려질 건 가려지는 시간이다. 이곳의 배들은 왜 항상 모래를 주로 실어 나르는지 모르겠다. 강아지 한 마리가 모래밭에서 뛰어놀고 있다. 제 몸에 비해 넓은 놀이터지만 어떤 당혹감 같은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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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10. 1. 7. 02:08


"상하이, 7년의 여행"
                  지난 7년을 갈무리하며 새로운 발걸음을 딛기 위한 fshanghai의 첫 전시회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진동호회 fshanghai는 지난 7년간 숨가쁘게 변화하고 있는 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담아 왔습니다. 와이탄의 상하이는 역사의 무게를 짊어지고 웅장하게 서 있고, 푸동의 현대화된 상하이는 이 도시의 미래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과 현실적 필요 사이에는 변화의 속도를 거부하거나, 상하이의 미래적 이미지를 위해 지워져야 할 공간도 곳곳에 상존합니다. 언제고 사라질 지도 모를 룽탕(弄堂)의 뒷골목들, 이미 철거된 건물과 거리 사이에서 여일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우리가 경유하는 단 한번의 찰나의 경험에서 겹쳐진 시간의 흔적들을 담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스쳐 지나가며 구경거리를 찾는 여행객일까요? 아니면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일상을 살아가는 이 도시의 거주민일까요? 여행객은 아니면서 완전히 내부인도 될 수 없는 우리의 자리, 그 경계가 주는 긴장을 의식하면서 우리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풍경을 새롭고 낯설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아직 fshanghai만의 색깔은 이것이다 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공간을 살아가는 우리의 애정만은 분명하게 드러나길 바라며 지금도 우리는 상하이를 향해 f값을 맞추고 있습니다.

* 이 전시의 수익금은 빈곤지역 학생들을 돕는 중국희망공정에 사용됩니다.


上海,七年之旅

       fshanghai首届摄影展——在沪韩人业余摄影社团看上海

 

  fshanghai是以上海为主要活动基地的摄影俱乐部,在过去7年之间,我们将日新月异的上海融入了照片之中。外滩代表着具有悠久历史的上海,浦东展现着现代上海,如此,我们便可以感受和想象上海过去与未来的伟大面貌。然而,我们也从中发现拒绝时代变化的空间,或者为了未来的城市形象而被删除的场域。我们不难遇到即将消失的弄堂和小街背巷、在已拆除的建筑物街上生活的人们……。透过镜头,我们想在刹那间的经验中捕捉重叠的时间痕迹。


  身为长住上海的外国人,不时提问:我们是寻找热闹的游客还是已在上海安家落户的居民?意识到此种边界身份以及该身份赋予给我们的边缘立场后,渐渐地、自然而然地,我们在已经熟悉了的日常生活景象中寻找着一种自己的观看方式。迄今为止,我们尚未呈现出fshanghai特有的色彩,而我们但愿能够彰显我们对上海的热爱,今天仍然把自己的光圈对准上海。

 

*此摄影展的收益将捐献于中国希望工程。




상하이에서 활동 중인 사진 동호회 fshanghai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기간은 1월 16일에서 29일까지.
장소는 상해 한국문화원.

1년 넘게 유령회원으로 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작년 한해는 얼굴을 내밀고 직접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면서 참 많이 배우고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으며 혼자서는 쉽게 갈 생각을 못하는 상해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런 고마움을 생각한다면 전시회 준비에 힘을 더 많이 보탰어야 했는데, 내가 해야 하는 일에도 허덕거리는 상황인지라 시간이 허락하지 않더군요. 쉽게 약속하고 지키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간다는 자책감이.. 물론 나뿐 아니라 회원 대부분이 각자 바쁜 사람들인지라, 애초의 계획대로 움직이기 쉽지 않은 면이 있었죠.

지난 7년간 축적된 좋은 사진을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회원이 찍었거나 원판이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또 사진전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해 하반기에 바이러스 때문에 사이트가 잠시 먹통이 되었다는 점도 준비에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시회 준비를 하며 신참회원들의 사진이 대폭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점은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전시회가 결과적으로 보여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이죠.

상하이에 머무시는 분들, 1월 중순에 상하이에 들릴 예정이신 분들께서는 전시회 구경 오세요~
그게 아니더라도 fshanghai 사이트에 들러서 좋은 사진 많이 구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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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10) 2009.11.26
등불  (8) 2009.11.18
Posted by lunarog
상해에는 고층건물은 수없이 많지만 지하로 깊이 파고 들어간 건물은 별로 없습니다.
모래땅이거나 퇴적층이라서 조금만 파 들어가면 물이 나옵니다. (게다가 상해라는 땅 자체가 바다보다 낮습니다.) 지하로 내려갈 공사비로 몇 층 더 올리는 게 유리한 셈이죠. 따라서 옛날부터 옥탑방(亭子間)은 있어도 반지하는 없었나 봅니다. 물론 초고층 빌딩이나 대형상가를 지을 때는 기본적으로 지하로 좀 파고들긴 할 겁니다. 안 그랬다간 얼마전 막 옮겨심은 나무가 쓰러지듯 그대로 반듯하게 넘어간 어느 아파트 꼴 나겠죠?



비오기 직전이어서인지 파란 하늘에 구름이 이쁘게 낀 선선한 날에 자전거를 타고 조금 돌았습니다.

지난번 다녀온 서산(佘山)에서 조금 더 나가 천마산(天馬山)이란 곳까지 갔습니다. 알고보니 상해 근교에 "운간구봉(云间九峰)"이란 이름으로 아홉 개의 산이 있나 봅니다. 상해쪽은 구름이 참으로 낮게 내려오나 봅니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아홉 봉우리라니요! 제일 높다는 천마산이 고작 해발 99.8미터입니다. 실제로 지면에서 보면 어릴 적 소 먹이러 다니던 우리 동네 뒷산보다 낮습니다. 역시나 자전거 때문에 산 위로 올라가 보지는 못했네요. 천마산 위로 기울어진 탑이 보입니다. 이것도 이 근교에서는 나름 유명한 사탑이라고 합니다.

같이 간 중국 친구가 산을 깎아 만든 구덩이 이야기를 합니다. 원래는 산이었는데 채석을 한 끝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겼다고 말하더군요. 별다른 명칭은 없고 그냥 "천마산심갱(天马山深坑)"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지도에도 없고 위성사진도 이쪽 일대는 그다지 정밀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미리 알고 가기 힘듭니다.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적어서, 천마산 일대에서 물어봐도 모르는 사람이 많더군요. 살짝 동네로 더 들어가 주민들에게 물어보니 대략의 방향은 가리켜 줍니다.

어쨌든 물어물어 횡산(横山)이라는 나트막한 동산 부근에서 어떤 촌로에게 위치를 알게 됩니다.
저는 산을 깎았다고 해서 백록담이나 천지처럼 산의 외형은 남아 있고 그 속에 거대한 분화구가 있는 모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촌로가 가리킨 곳에는 그냥 나트막한 콘크리트 담장이 하나 보일 뿐 허허벌판이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그 담장을 뛰어올라 꼭대기에서 바라보니 다음과 같은 풍경이 펼쳐지더군요.





깊이는 대략 100미터, 길이가 240미터, 폭이 160미터라고 합니다. 보통은 20미터 정도 깊이의 물이 차 있구요. 요즘은 자전거 탈 때 사진기를 안 들고 다니는데, 정말 후회가 되더군요. 뭐, 들고 갔어도 광각이 없어 제대로 담지 못했겠지만요. 중국친구가 찍은 사진도 직접 눈으로 볼 때의 웅장함을 충분히 담지 못했어요. 담장 위에서 내려다보면 머리가 아찔해졌습니다. 약간 압도된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채석할 때 사용된 듯한 계단이 비스듬이 보이고, 다른 쪽 모서리에선 까마득히 어떤 사람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서 찾은 건데 물이 꽤 많이 차 있습니다. 인터넷에도 적당한 사진이 없군요.
(아마도 우기에 잠깐 물이 불어난 것은 아닌 듯. 비 좀 온다고 불고 줄고 할 규모가 아님. 사진에서 드러난 주변환경을 따져보건데 훨씬 옛날 사진이고, 이 "호수"를 다른 식으로 활용하려는 계획이 있는 최근에 물을 퍼낸 게 아닐까 사료됨) 

아래 사진은 예전 사진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조감도일 것 같기도 하네요. 잘 모르겠어요. 주변에 못 보던 건물이 가득한데, 지금은 재개발 때문에 구덩이 주위의 건물은 거의 철거된 듯합니다. 아무튼 구덩이를 위에서 조감하면 대충 이런 모양이 나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조금 뒤져 보니 원래 채석장이었던 이 곳은 몇 십년째 버려져 쓰레기장 비슷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렇게 깊게 파내려 갔는데 사방이 암반이라 빠져나갈 곳이 없으니 당연히 물이 고였을 거고, 온갖 폐수로 썩어갔겠죠. 상해 시내에서 아무리 파내려 가도 돌맹이나 암반층은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상해라고 불리는 땅의 대부분은 원래 바다였으니까요. 나트막한 산이 있던 이 곳은 그래도 대륙의 일부였나 봅니다. 이 곳에 어떤 채석장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명칭도 없습니다. 다만 산 하나가 사라지고 그 곳의 골재는 어느 건물의 일부가 되었겠죠.

아무튼 원래 산이었던 곳을 파서 평평하게 한 것에 그친 게 아니라, 원래의 산보다 더 깊게 파내려 간 대륙의 기상에 놀랄 따름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놀랄 게 남아 있습니다.

원래 유명한 지역도 아니었고 볼 것도 별로 없었으니 십여 년째 잊혀져 있다가 얼마 전 우연히 누군가의 눈에 띄었나 봅니다. 우리가 들어간 입구 쪽에 관리 사무소 비슷한 게 있어서 보니, 이 곳에 2010 말 준공 예정으로 지상2층, 지하17층, 수면 아래로 2층 규모의 5성급 호텔이 들어선다는 포스터가 눈에 뜨입니다.

지상2층에는 대충 프론터, 식당, 회의실 등의 역할만 하고, 400여 개의 객실을 수면 위 17층에, 수면 아래 1층(18층)은 물밑을 보면서 쉴 수 있는 식당과 커피숍 등이, 가장 낮은 19층에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总统套房)까지 갖춘다고 합니다. 인공폭포도 빠질 수 없지요. 넓게 펼쳐진 호수(?)에서는 수상 스포츠도 즐길 수 있게 하구요. 아무튼 물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하겠습니다.

(전후맥락에 약간 찜찜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런 걸 생략하고 보면) 발상 자체는 상당히 기발합니다. 완공되면 아마도 굉장히 독특한 호텔로 소개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주위에 오락시설과 쇼핑몰이 들어서, 천마산 서비스 단지(天马山现代服务业集聚区)의 한 중심을 이룬다고 하네요. 상해가 크고 넓어질수록 그 주변의 한적한 시골들이 모두 관광지로 변해갈 것 같습니다. 아마도 상해에서 소주까지 비는 곳 없이 가득 차게 될 날이 멀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호텔이 완공되면 해발 -65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혹은 깊은) 호텔이 된다고 합니다. 이로써 중국은 세계 최고를 하나 더하게 되겠군요.

참고링크:
http://www.ehomeday.com/news/2007-10/2007101684817.htm
http://www.xcar.com.cn/bbs/viewthread.php?tid=5734337
http://blog.sina.com.cn/s/blog_4cd02152010097eq.html

혹시나 해서 위치확인 삼아 구글어쓰를 함 돌려봅니다. (예전에 구글어쓰 초창기에 시험삼아 써보고 처음 돌려보네요. ^^)
위치를 알고 봐야 정확하게 짚을 수 있지만 나오긴 하는군요. 검색창에 "天马山深坑"(유사검색어: 天马深坑, 天马山采石坑, 天马采石坑, 横山坑)을 치면 바로 뜨지만, "구덩이"가 아니라 호수처럼 나옵니다. 위에 검색해 둔 옛날 사진보다 물이 더 많았나 봅니다. 저는 4.2 버전을 사용했는데, 아마 최근 버전에서는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화면을 살짝 눕혀도 구덩이가 깊이로 표시되지 않고 호수처럼 표시됩니다. 광활한 평야 저 멀리 야트막한 천마산이 보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동한 경로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대략 54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모든 사진은 클릭하면 제법 크게 보입니다.)

혹시나 해서 버스노선을 써 둡니다.

坐车路线如下:万体沪淞线直达松江乐都路车站,然后站内转松天线横山下。逛完大坑后再坐松天线去天马山,山上可露营。天马山沪佘昆线约1个半小时后可返回。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9. 21. 01:30


상해기차역 부근에는 재개발을 위해 철거가 진행중인 곳이 여럿 있다.

여행객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배제시킬 수 있을까? 카메라를 들이대어도 될까? 사는 곳을 침범받았다고 느끼시지나 않을까? 평소부터 자주 가 보고 싶으면서도 이런저런 생각들 때문에 조심스러웠는데, 오히려 먼저 말을 걸어오는 그곳 주민들의 스스럼없음에 환대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느 정도 예외적인 환대였을 듯한데,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또 하나. 카메라는 이런 곳을 너무 아름다운 이미지로 바꿔 버린다. 모든 사진이 사회고발 리얼 다큐여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일단은 예쁜 빛을 찾아 적절한 구도로 현실을 잘라내려는 욕망을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너무 쉽다. 어디나 똑같은 도시와 그 속의 자질구레한 일상을 의미있는 것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 익숙함에서 순간 떠오르는 불균형이나 균열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고, 머뭇하는 사이에 지나쳐 버리곤 한다.

낡은, 오래된, 곧 사라질 곳은 공간 자체가 가진 시간의 힘이 꽤나 무겁다. 그 공간을 아주 조금만 보기 좋게 떼어내어도 그 이미지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고, 그 시간 속에 발을 담근다는 것만으로 자기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착각.

막말로 폐허 더미에서 예쁜 색깔만 찾을 수도 있다. 수십년 동안 칠하고 벗겨지고 다시 칠하고 또 벗겨지기를 반복해온 대문의 색깔은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된 듯 흉내낼 수 없다.
 
혹은 어떤 형체들만 잘라낼 수도 있다.


아이가 앉아 있는 벽돌 잔해들은 어느 시냇가 자갈돌처럼 반짝인다. 한참을 어슬렁거리며 꼬마의 주위를 서성였다. 우리끼리 놀기도 하고 그곳 어르신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 사이 아이에게서 경계하는 눈빛이 사라져갔다. 어쨌든 이곳은 그녀의 놀이터였다. 또래인 딸의 얼굴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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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8. 30. 23:57
지난 주 수요일에 이사를 왔습니다. 아직 집안 정리가 끝나지 않아서 블로그도 뜸했네요.
8월 초부터 이사를 염두에 두고 집을 알아보았지만 적당한 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방이 작거나 가격이 비싸거나 주변환경이 별로거나 교통상황이 안 좋은 곳 뿐이었죠. 적절한 가격에 좋은 집이 저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혹시 한국학생들 밀집지역이 이상과열이지 않을까 해서 한국인이 잘 안 가는 지역도 슬쩍 알아봤지만 교통이 편하면서 쾌적한 곳은 대부분 그 가격이더군요. 많은 고민 끝에..

학교에서 지하철로 1시간 10분 정도 걸리는 지우팅(九亭)에 집을 구했습니다. 별로 싸지는 않지만 어차피 수업이 없어 학교를 매일 나가지 않아도 되니 이쪽도 나쁘지 않겠다고 판단했던 거죠. 예전으로 치면 이곳은 상해도 아닌 곳입니다. 상해 시중심에서 보면 상당히 변두리구요. 도로확장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라 먼지도 꽤 많이 날립니다.

실제로 먼지 때문에 하루 이틀은 고생했습니다. 반복층 구조인데, 들어와서 살려고 보니 침실 용도인 복층은 통풍이 잘 되지 않더군요. 아래쪽은 대충 치우고 닦고 했는데 위층은 공기순환이 거의 안 되어 먼지 속에서 하루를 잤습니다. 이사가 힘들기도 했겠지만, 이 먼지 때문에 바로 감기 몸살에 편도선까지 붓기 시작하더군요. 집안 정리도 하는둥 마는둥 헤롱헤롱 거리면서 며칠을 보냈죠.

뭐, 그렇지만 집에 없을 때도 선풍기를 돌려놓고 매일 닦으니까 조금은 지낼 만합니다.
책꽂이도 새로 짜서 책을 집어넣고 나니 이제야 조금 작업실 분위기도 납니다.
작업실로 사용할 1층은 천장도 높고 바람도 시원하니 잘 들어오네요.

참. 한국에 있는 집도 이사를 해야 하는데요,.
때마침 전세대란에 미칠 지경입니다. 기본 3천 이상은 오른 것 같아요.
서울에선 절대 집을 사지 않겠다!(그럴 능력도 안 됩니다만..)는 결정이 요즘 후회가 되네요.
그때 집을 샀다면 최소 2억 이상 오른 집값을 떠올리며 마음이 두리둥실 즐거웠을까요?
매달 대출이자 갚으려고 머리 싸매는 게 한 순간 날아갈 정도로?
결과적으로, 어쨌든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몰려 버리네요.
뭐, 아무른 논리적 연관성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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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8. 23. 17:39

때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깨끗하게 세탁해 버려야 합니다.


그래도 지워지지 않는 때는 태워야지요.


곳곳에 살아가는 흔적이 배어 있지만


청소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2010년이 다가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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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8. 23.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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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