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flaneur, p.m. 4:30 2009. 8. 3. 01:13
고등학교 때 젊은 영어선생님이 새로 오셨습니다. 시골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을 별로 반기지 않는 경향이 더러 있는데, 능력 있는 놈들은 더 좋은 곳으로 비상하곤 하니까요. (대학도 마찬가지죠? *^^*) 이 영어선생님도 능력 있는 분이셨나 봅니다. 얼마 오래 있지도 않았고 첫 부임지였던지라 떠날 때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 아마 가서는 금방 잊고 그곳에서 잘 적응하셨을 겁니다.

오래 있지 않았지만 저는 그 선생님이 가끔 생각나고 얼굴까지 또렷이 기억나는데요.. (울 아부지와 성함이 같은, 저와 13촌 정도 되는 고참 영어선생이야 동네에서 가끔 보니까 잊을 수 없지만, 그 젊은 영어선생님 후임으로 누가 왔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선생님과 공부한 내용을 기억하는 건 아니고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예를 들면, 신혼살림을 차린 후 우리 몇몇을 불러 집들이를 하셨는데, 우린 사모님의 책꽂이에서 처음으로 <다락방에 핀 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 한 놈이 빌려가기까지 했는데, 차 떼고 포 떼고 근친상간적인 내용만 머리 속에 남겨 두었죠. 그걸 빌려준 사모님은 또 무슨 생각이었던 겐지. 책을 안 읽었거나 우리를 어른 대접했거나.. 뭐 어쨌든.

독해를 하다가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와이프가 외출하려고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뒤로 돌아서며 남편에게 보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남편은 방을 나서며 슬쩍 그녀의 하얀 등을 보게 됩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ㅡㅡ;;)
선생님은 그 때 부부 사이에도 이런 매너는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약간의 선망 비슷한 눈빛도 비치셨구요.

솔직히 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지켜야 할 예의야 있겠지만, 매일 살을 부비고 사는 부부가 옷 갈아입을 때조차 그래야 할까요?
암튼 그 선망의 눈빛이 왠지 불편했는데, 뭐랄까,.. 동양인이 서양인에게, 노예가 귀족에게 보내는 눈빛 같았습니다. 영어선생 사모님도 그렇게 할까?
암튼 싫었지만 저에게 그게 규범 비슷한 게 되었던 것 같아요. 부부 사이에도 옷 갈아입을 때는 눈을 피해줘야 하는 거야 라고 말이죠. 어릴 때 각인된 건 잘 안 바뀌니까요.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도 선명하지 않구요. 물론 결혼하고 여지없이 깨어졌지만요. 그게 옷을 갈아입을 때의 규범이 아니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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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