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flaneur, p.m. 4:30 2009. 7. 2. 12:14
그니까 캡콜드님의 규약을 내 방식으로 풀어보면, 전제만 분명하게 밝혀주면 명제가 참이 되므로 "과학적"인데, 그 반대명제까지 싸그리 부정하니까 "부도덕"하다? 저는 주로 현실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상당히 부도덕한 놈이라 할 수 있겠군요. 게다가 좀 비과학적이기까지 합니다. ^^

이번 릴레이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없어 초간단! 말장난 수준으루다가 진행하도록 합죠.


이 릴레이는 sprinter님, capcold님, 아키토, 톨™님, 김젼님에 이어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간단 규칙:
- “A는 좋다, **하기까지는. B(A의 반대)는 좋다, ##하기까지는” 이라는 무척 긍정적(…)이고 역설적인 접근방식으로 내가 아는 세상의 진리를 설파한다. 갯수는 제한 없음.
- 2명 이상의 사람에게 바톤을 넘긴다.
- http://sprinter77.egloos.com/tb/2423191 으로 트랙백을 보낸다. 자기에게 보내준 사람에게도 트랙백 보내면 당근 아름다운 세상.
- 마감은 7월 15일까지. (inspired by 이누이트님의 독서릴레이)

- 자유연애는 좋다. 그/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결혼은 좋다. 딱! 첫째를 낳기 전까지만.

- 역사공부는 재미있다. 그 일이 현실로 반복되기 전까지는.
  현실공부는 재미있다. 그 일이 나에게 반복되기 전까지는.

- 릴레이는 좋다. 바톤이 나에게 넘어오기 전까지는.
  바톤 넘기기도 좋다. 믿었던 이웃이 생까기 전까지만.


김젼님이 무려 9개의 바톤을 흩뿌리는 바람에 릴레이가 난교(?)가 되어 버렸슴다.
이쯤에서 저는 조용히 물러나 앉는 게 마지막 남은 양심을 지키며 그나마 도덕적인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길인 듯. (사실 너무 버거워요. ㅡㅡ;;) 그래서 저는 바톤을 넘기지 않고 꿀꺽! 하겠슴다. 머, 원하는 분이 계시다면 넘길 수도 있어요. 바톤에 집착하는 건 아니니까요. 받으실 분 손드세요~~  ^^

김젼님, 맘에 드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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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講, 구경 2009. 7. 2. 02:30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한번 지껄여봐야겠다. 간단하게.

나는 도통 사람들이 홍상수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뭔가 자학적인 취미들이 있으신 것 아닌가?
누군가 이번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코믹하다는 의미에서) 재미있으며 홍상수의 삶에 대한 태도가 너그러워졌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은데. 그야말로 웃기는 소리! 나는 기분이 졸라 꿀꿀하다. 오히려 밀양처럼 들이미는 영화보다 더 끔찍하고 음란하다, 이 영화는.

일단 남자 주인공들의 대사가 너무 싫다. 다들 국어책 읽는 것 같다. 예술영화(?) 티내나?
고현정의 대사와 표정, 연기는 소름이 돋힌다. 정말. 고현정 너 여신해라!

내 취향과 안목의 문제겠지만,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면 아리송하거나 가슴이 터질 듯이 꿀꿀하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리송하고, 제대로 알지는 못해도 꿀꿀해진다.
잘알못은 후자에 속하며, 전혀 웃기지도 통쾌하지도 않다.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의 속물성과 위선을 폭로한다구? 뭐 굳이 그럴 것까지나. 몰랐던 것도 아니고.
저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스물스물 올라오게 만드는 방식이 내 체질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인간의 은밀한 부분을 건드리는 게 싫다. 잘난 척하지만 너도 똑같이 적절한 기회만 되면 부적절한 관계를 맺을 인간 아니냐. 그래, 나도 그런 놈이었지! 라는 자조 말고 더 이상을 내가 할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조금은 내 것이 아닌 가상의 자조이기도 하다.

난 그냥 조금 더 가볍게 비틀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또 홍상수가 아닌 것이 되겠지.
그래.. 매번 아리송하거나 꿀꿀한 채 욕을 하면서 다시 홍상수를 찾게 될 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보고 싶다거나 칭찬하면 그냥 (동의를 살짝 섞은 아리쏭한) 웃음만 지으면 된다.

김연수에 대한 기억이 튀어나왔는데.
그의 이름을 알기 전의 그의 얼굴이 요즘 들어서 갑자기 떠오르곤 한다.
아직 그의 소설을 하나도 읽지 않았는데도 말이다.(김연수의 문체를 만난 건 기다림, 대성당 같은 번역서 뿐이다..)
쭈뼛쭈뼛하며 흥행감독의 권력을 적당히 즐기는 무난한 연기 데뷔였다고 생각된다. 시간이 나면 그의 소설을 읽어봐야겠군.

암튼 간단하게 쓴다는게 내용도 없이 길어졌는데,
역시나 김우재의 블로그에서 슬쩍 튕긴 대로 영화판이 원래 이리 난잡한가? 라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그렇게 쉽나? 내 안의 욕망이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는 것도 아닌데, 여태껏 나는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30대 전에는 2-3년이 지나야 그때 그 순간이 그런 상황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돌이켜보게 되고 서른이 넘어가니까 한 반년 정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알 것도 같은 그런.. 내가 무딘 건가? 나름 눈치 빠르고 분위기 파악을 잘 한다고 여겨 왔었는데, 그쪽으로만 진화가 덜 되었나?
암튼 여태 물어볼 생각을 못했는데, 나도 영화판에 있는 친구에게 그걸 물어봐야겠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겠지만) "홍상수가 예술하는 사람들을 일관되게 이렇게 그리는 데에는 뭔가 확률적인 근거가 좀 있지 않은가"(김우재)라고 말이다.
Posted by lunarog
횡사도는 넓고 평평하고 사람도 없다. 자전거를 타기에 정말 좋았지만, 이렇게 평평하기만 하니 홍수로 수위가 높아지면 섬 전체가 잠겨버리지 않을까?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섬 주변에 제방을 쌓고 강(바다)과 만나는 사이에 습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뚝방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오토바이가 늘어서 있었는데, 아마도 주인들은 모두 배에 타고 있거나 배에서 짐을 내리려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는 뚝방길과 강 사이의 공간은, 혹은 초원처럼 물소가 풀을 뜯기 좋은 정도로 마른 땅이었고 또 어떤 곳은 갈대가 무성한 사이로 진흙땅이었다.

뚝방길 사이로 난 틈으로 아래로 내려오면 강 바로 앞까지 올 수 있다. 약간 울퉁불퉁했지만 자전거를 타기에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강과 바로 인접한 뚝방길 아래로 통발 같은 게 길쭉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뭘까? 바로 이놈들이다.

아주 호전적이고, 재빠르며, 숨기도 잘 하는. 민물게는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진 지 오랜지라 재미있을 것 같아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국민학교 다닐 때 하교길에 도랑에서 손바닥만한 게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신기한 기억으로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을 만큼, 게 자체가 흔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때 그 도랑이 생각나기도 했다. 우르르 흩어졌지만, 경계하는 것인지 호기심 때문인지 무서워하면서도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는 놈도 많았다.

처음에는 사진이나 몇장 찍을 요량이었다. 빌려온 똑딱이의 줌으로는 충분히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고 제대로 담기도 쉽지 않았다. 내친 김에 카메라를 내려놓고 장갑 벗고 게잡이에 나섰다. 정말 맘 먹고 게를 잡을라치면 신발 벗고 뛰어 들어가 진흙탕의 저 구멍들을 헤집어야 할 텐데,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작은 생명체들의 최대의 적, 순진한 꼬마 개구장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잠깐 놀아볼 생각이었는데, 그마저도 아마 한가로운 낮을 보내는 게들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내가 게중 제법 큰놈을 하나 잡았다. (손가락 협찬: 루나)
내가 사용한 방법은 이렇게 바위틈에 있는 제법 큰 놈을 골라, 앞쪽에서 갈대잎으로 살짝 위협을 하면서 대치국면에 있다가 슬금슬금 물러설 때 다른 손으로 뒤쪽을 덮치는 것이었다. 자연에서 살고 있는 놈들의 생명력이란 너무나 거대해서, 손으로 잡을 때의 그 꿈틀거림이 주는 진동은 너무 오랫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놓아주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슬금슬금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다가, 그러니까 자기의 은신처 반대쪽으로 움직이는 척하다가 아주 빠른 속도로 은신처 구멍으로 사라져 갔다. 미안~~

갈대 줄기로 게를 잡겠다고 휘두르던 반군도 어찌어찌 한 마리 잡았다. 조금 더 큰 놈이다. 이놈도 힘이 얼마나 좋은지 반군의 장갑을 살짝 줬더니 놓지를 않는다. 게다가 한쪽 집게는 공격용으로 남겨놓는 여유를 부리기까지 했다. 게는 생김새에서부터 호전적인 탱크 느낌이 난다.
손가락협찬: 반군

반군은 게장 담그게 맘먹고 다시 한번 와서 게를 잡자고 했다. 나는 게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패스~
뭐 어쨌든 내 생업이 걸린 일이 아닌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은 좋지 않다. 머리로만 안다.

게를 보면 두꺼운 갑옷 속에 있을 연약한 피부가 생각난다. 손이 베이고 피부에 상처가 날 때 왜 인간은 게처럼 바깥이 단단하지 않을까 투정부린 어린시절도 기억난다. 껍질이 둘러싸고 있으면 상처도 나지 않을 텐데 말야.. 바깥이 단단한 것과 속이 단단한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진화한 것일까? 진화는 잘 모르겠고. 한번 깨지면 복구가 힘든 갑옷 피부를 바라기보다는 작은 상처에 무력하지만 재생가능하고, 그런 상처 때문에 더 탱글탱글해지는 피부가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매번 상처가 날때마다 갑옷 피부가 그리웠다.

오늘밤은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차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너무 아프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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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丹靑 2009. 6. 27. 18:02
상하이 하면 떠오르는 색깔은 어떤 걸까?


흐리고 습한 상하이의 날씨는 상하이를 무채색의 도시로 떠올리게 한다. 이 도시는 색깔이란 게 없고 그라데이션만 살아 있다. 명암만 살아 있는 도시, 가장 밝은 곳과 가장 어두운 곳이 공존하는 도시, 그렇지만 그 각각이 다른 색깔을 띤다고 하기보다는 같은 색의 농도와 계조가 다를 뿐인 그런 도시. 내가 떠올리는 상하이의 이미지이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 중남미의 원색찬란함, 티벳의 고요하지만 강렬한 색감은 상하이에서 떠올리기 힘든 무엇, 에너지 자체가 다르게 표출된다.

Pudong, 90x120cm.

반군이 쓴 글에서 읽은 프랑스에 주로 거주한다는 어느 미국인 화가가 그린 상하이를 떠올려 본다. 상하이를 마치 지중해를 그리듯 원색으로 표현했다, 왜 그렇게 그렸나는 물음에, 자기는 상하이에서 젊고 생동하는 에너지를 보았다고 대답했다고. 그 에네르기를 표현하는 방법이 강렬한 색감이겠다. 그가 보는 상하이가 그럴 수는 있다. 그의 상하이는 그런 모습, 그런 색깔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왜 상하이를 그런 색깔로 표현했냐고 묻게 되고,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상하이와 그 색깔은 어긋나 있음을 뜻한다. 그가 해석한 상하이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우리가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상하이와는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지고 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의 이름은 제프리 헤싱(jeffrey hessing)이다. http://www.jeffrey-hessing.com/이라는 개인 홈페이지도 가지고 있고, 거기서 중국에서 그린 그림과 상해를 그린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어떤 색깔로 상하이를 표현했는지 살펴보려고 홈페이지를 열어본다.

The Bridge, 100x80cm.
푸장반점 꼭대기에서 소주하와 와이바이두 다리 너머를 바라본 풍경이다.

The River, 97x130cm

The Bund, 90x120cm

Shanghai Sunset, 100x120cm

The king and queen, 100x80cm.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제프리 헤싱.

그림을 보지 않고 떠올렸을 때만큼 강렬한 색감은 아니다. 나는 더 강렬한, 눈이 부신 원색을 기대했다. 그 강렬함은 어쩌면 색의 대비에서 올 듯한데, 헤싱이 쓰는 색은 원색이긴 하되 강한 대비가 없다. 그림에 대해서도, 색감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게 없지만. 그는 그저 자기가 선호하는 색깔을 상하이에 덧씌운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가 그린 뉴욕, 이스라엘 등도 비슷한 색감이다. 다만 상하이는 그런 도시와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색의 대비가 덜하고 건물과 건물을 구분하는 선을 제외하면 색들이 서로 섞인다는 느낌마저 든다. 곱지만 포스가 없다.

색의 대비, 즉 서로 다른 색깔들이 부딪히고 충돌하는 사이에 내뿜는 긴장을 나는 상하이에서 느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다름이 아니라 조금 더와 덜의 경계에 놓여 있다. 제프리 헤싱의 그림이 상하이의 에너지를 잘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존재의 다른 색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그걸 상하이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까?

상하이의 진정한 얼굴은 밤에 드러난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밤이 없는 도시, "불야성"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야(夜)상해! 1865년에 가스등이, 1882년에는 전기가 상하이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세련된 <상하이 모던>을 노래한 리어우판의 상대편에 루한차오의 <네온불빛 너머>가 있다. 밤이 되면 온갖 색의 네온사인과 광고판이 휘황찬란하지만 번화가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어떤 어둠이 펼쳐지는지를 루한차오는 보여주며, 그곳이 단순한 암흑이 아닌 다양한 계조를 가진 인간군상이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내가 떠올리는 상해 사진은 모두 20세기 초의 흑백사진들이다.
상하이는 아무래도 흑백으로 찍어야겠다. 혹은 색을 날려버리고 계조만 살아있게.

상하이를 어떤 색깔로 떠올리시나요?



보너스: 제프리 헤싱이 그린 만리장성과 운하 풍경.
Water Village, 65x81cm.

The Great Wall, 65x54cm.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6. 26. 21:16
사진은 [창]이다.

1. 사진은 창(窓)이다. 우리는 창 밖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의 빛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창을 활짝 열고 바라보는가 살짝 열려진 틈으로 훔쳐보는가, 혹은 창밖으로 한참 응시하는가 슬쩍 눈길을 주고 마는가에 따라 빛과 색깔은 달라진다. 빛이 달라지면 사물 자체가 달라진다. 저 바깥에 언제나 똑같이 있을 것만 같은 그것은 창을 어떻게 여는가에 따라 나에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빛으로 가득한 천상과 우울한 암흑의 하계는 창문 여는 방식에 따라 결정되는 동일한 풍경이다. 조리개와 셔터속도의 배합은 언제나 어렵다. 노출.

2. 사진은 창이다. 창문 바깥의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지만 내가 그것을 창틀로 가두기 전까지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세상 자체일 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라는 바로 그 의미에서 그렇다. 사진은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떼어내고 단절시키고 축소한다. 그것이 폭력이냐구? 천만에. 그것을 폭력으로 만드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틀에 가두는 자의 특정한 태도이다. 틀에 가두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주고 왜곡시키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사진은 포착이 아니라 창조일 수 있다. 한정된 틀 속에 가득 채우기와 비우기의 적절한 조합이 쉽지는 않지만 재미있다. 구도.

3. 사진은 창(槍)이다. 맥락과는 상관없이. 다른 중요하고 이쁘고 익숙한 풍경 사이에서 그것은 나를 쳐다봐 달라고 찌르고 들어온다. 살짝 아파오지만 그 정도 고통 없이 문신처럼 내 몸에 각인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래서 사실은 내가 그를 자르고 조각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이다. 낯선 여행지를 찍으며,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며, 나의 옛 사진을 보다가, 견고하게 굳어버린 내 감각을 뚫고 들어오는 창을 발견한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옛 추억, 기억, 어떤 느낌들이 흘러나온다.
내 사진이 누군가에게 그러한 창이 될 수 있을까? 푼크툼.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처음 이 광경을 봤을 때 길거리의 화로는 주전자를 태울 듯 더 세게 불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그래서 바로 옆에 놓인 소화전과 함께 내 눈을 찌르고 왔다. 그러나 자전거를 세우거나 다시 돌릴 용기를 내지 못했다. 부엌이 좁아 길거리에 화로를 놓아야 하는 누군가의 생활에 끼어들 용기가 나지 않아서이다. 다음날 같은 길을 같은 자전거로 달리면서 지나치듯 찍고 돌아올 때는 제법 용기를 내어 할아버지와 인사까지 하면서 몇 번 더 찍었다. 그러나 불은 사그라들었고 주위는 어두워졌다. 여백을 잘라내고 "불이아(弗二我)"라는 제목을 달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인사 같은 거였겠지만, "서로 자기 영역을 확보하고, 상대방의 공간을 노리는 야생짐승들 같습니다. 언제 깨어져도 이상할 것 없을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라는 충고같은 평을 반군이 달았다. 실패의 흔적들이지만 그 말에 부합되는 사진을 찍으러 애쓴다.


이 릴레이는 mooo님, 꼬미님, 엘군님, 연님을 거쳐 저에게 왔습니다. 이건 이런 거야! 라는 식의 정의내릴 깜냥이 되지 않지만, 제 의견은 릴레이에 참여하시는 많은 분들이 만드신 별자리 중에서도 가장 작은 별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조금은 겉멋 같고 재미 없는 내용이지만 마음대로 지껄여 보았습니다.. ^^;; 문득 떠오른 생각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제가 원래 사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없으면 만들어내야지, 이리저리 찾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릴레이 규칙입니다.

1. 사진이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글을 적으시고 thruBlog에 여러분의 글을 트랙백해주세요.
5. 이 릴레이는 7월 6일까지 지속됩니다.

기타 세칙은 릴레이의 오상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바톤을 이어받을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이미 바톤 전달에 실패한 전적이 있습니다만. ㅡㅡ;; 그때 "릴레이의 오상"을 꼼꼼히 다시 봤는데 정말로 주옥같은 내용이더군요. 하하.)

저에게 독서론 릴레이를 전달하신 띠용님께 이 영광을 돌리겠습니당.. 저는 받은대로 돌려주는 사람이어요. ^^
또 한분은 색깔 리스트 시리즈와 함께  독특한 감성의 글과 사진을 보여주시는 폴.님께 바톤을 넘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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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한낮. 자전거는 해변을 따라 섬을 돌다 버려진 다리 앞에 도착했다. 예전에 이 다리에 왔었다며 성큼 다리 위로 올라서는 반군을 따라 들어갔다. 버려지고 아무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다리로 만들어진 이상 어딘가로 데려다 줄 것이다. 저 멀리 뭔가 시설물이 보이는 것도 같다.

입구에 위험하다는 문구가 있었지만 유심히 살펴보지는 않았다. 시작부터 단어인지 전치사인지 끊어 읽히지가 않았고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가벼운 경고문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반군이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어 그저 뒤따라갔을 뿐이다. 예전에 왔었다고 하질 않나. 그것도 밤에 여럿이서 같이. (깜빡 했다며 예전에는 "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군은 다리 끝에서 알려주었다..)

왼쪽으로는 상당히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강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물(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해변이라고 해 두자!)에 닿기 전, 푸른 풀밭에는 물소들이 풀을 뜯고 습지에도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을 것 같다. 마구 뛰어 들어가 게도 잡고 조개도 잡고 그러고 싶은 풍경이다.

입구: 열려진 쇠문을 통과해 들어가는데, 꽤 멀다. 그냥 봐서는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뒤돌아보면 멀리 전망대 같은 게 보이기도 한다. 아직 땅에서 별로 높지도 않아 뛰어내리면 폭신폭신한 땅에 사뿐히 내려앉을 것만 같다. 파란 하늘에 샤방샤방 흰구름 낮게 깔린 뒤쪽에 비해 앞쪽 풍경은 왠지 심상치가 않다.

상당히 멀리 왔지만 아직도 끝은 아득하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어느새 발밑은 습지가 아니라 물이다. 바닥이 땅인 것과 바닥이 물인 것의 차이. 다리 위 난간에 기대어 흐르는 물을 보며 명상에 잠기곤 했다. 난간이 없는 다리에서 그러나 명상은 배부른 소리!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 일렁되는 걸 보면 압도되는 것 말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통로 폭이 2-3미터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바다 쪽으로 갈수록 바람마저 거세져 오금이 저려온다. 사진사 반군은 사진도 찍지 않고 앞으로 그냥 뚜벅뚜벅 걷기만 한다.

배는 통통 떠나니고 저 멀리 중국 군함도 간간히 지나 다닌다. 나중에 지도를 확인해 보니 한가로운 농촌과 어촌 분위기의 횡사도 곳곳에 해군 기지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산업부두 비슷한 게 보인다. 아마도 지금 이 다리가 버려지고 저곳에 다른 시설을 만든 게 아닐까?

이제 거의 다 왔다.. 중간을 넘어서면서 혹시 바람에 날려가지 않을까, 제발에 걸려 넘어지지는 않을까 조심하며 최대한 무게중심을 낮춰서 조심조심 걸었다. (그렇지만 반군에게는 최대한 대범한 척하면서... ㅠㅠ) 인간이 만든 도시라는 벽 안에서, 인간들끼리 서로 잘난 척하며 으시대지만 그 바깥으로 조금만 벗어나 벌거벗은 채 자연과 만나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 내가 아무 장비 없이 저 물 속으로 첨벙! 하면 그걸로 끝이다. 진흙 파도 속에서 내 수영장 자유형 실력이 먹히기나 할까?

나는 물을 겁내고 반군은 자물쇠 없이 두고 온 자전거를 겁낸다. 이제 누군가 훔쳐가도 보이지도 않고, 설령 알아채고 뛰쳐가도 자전거 되찾기는 걸렀다. 느낌으로는 1km는 족히 걸어온 것 같다.

형, 수영 잘 해요?
수영 좀 한다고 소용 있을까? 그나저나 우리 둘이 빠져도 아무도 모르겠다..
쥐박이를 데려와서 살짝 밀어넣으면 참 좋겠네요.
걘 겁이 많아서 요까이 오지도 않을 거야..
하긴요...
반군아, 혹시 내가 빠져도 구하러 뛰어들거나 그러진 마라..
.. ... 하! 그거 굉장히 어려운 문젠데요?


뼈대만 남은, 각각 바닥으로 발을 딛고 서 있지만 서로 연결되지는 못한 시설물들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똑같이 폐허라도 오른쪽은 깜깜하고 왼쪽은 밝다. 한때는 배가 정박하고 뱃사람이 쉬어갔던 곳이겠지. 굉장히 상상력이 자극되는 공간이었는데. 왜 육지가 아닌 물쪽으로 이렇게나 멀리까지 이런 시설물이 필요했을까? 왜 버려졌을까?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반군아, 꼭 미래소년 코난 분위기 나지 않냐? 왠지 오래되고 튼튼한 게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건물 같아. 횡사도 정도 규모에 커다란 상업항구가 필요하지도 않았을 거고, 일본 애들은 자기 나라에서 가까운 이곳에 항구를 만들어 잠깐 정박했다가 상해 쪽으로 치고 들어갈 때 전략적으로 좋잖아. 저기 입구쪽 전망대도 그때 같이 만들어진 거겠지.

왠지 그럴듯한데요? 확실히 일제가 튼튼하긴 하죠!

다리 양쪽에 커다란 수송관은, 그게 구리든 쇠든 대약진운동 때 뜯어가서 녹혔을 거야. 그때 그런 짓 많이 했잖아. 여기를 기지로 쓰려면 물이나 가스, 기름 같은 보급품이 필요했을 건데 아주 튼튼한 쇠파이프가 놓여있지 않았을까? (그거라도 있었으면 난간 역할을 했을 건데...ㅠㅠ)
미래소년 코난의 시대배경이 자그마치 2008년이니만큼, 1940년대 일본이 만들어놓은 과거의 유물에 지나간 미래의 폐허를 떠올리는 것도 영 말이 안 되는 거는 아니겠다.. (어차피 소설이니깐! ^^)

물과 육지를 만나는 곳에서도 비슷한 폐허 이미지가 있었다. 다리 위에서 나는, 물에 식겁하고 부서진 콘크리트 덩어리에 압도되었다. 그런 느낌은 사진으로도, 글로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끝까지 오면 비교적 넓은 공터가 있다. 그곳에 주저앉아 잠시 쉬어갔다. 반군은 노래를 흥얼거렸고 나는 (바다 위라서) 눅눅한 공기에 아랑곳 않고 담배를 피웠다. 16미터.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반군은 이 높이를 가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적어도 몸이 바로 부서지지는 않겠다. 그러나 여전히 쉴새없이 파도가 덮쳐와 편하지도 않겠다.

 태호 강변에는 영산이라는 산이 있고, 산 중턱에는 팔 십 팔 미터 불상이 서서 세상을 내려보고 있다. 석가모니불이다. 십 육 미터라고 들었다. 계단 어디쯤에서 십 육 미터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어림할 수 없었다. 아슬아슬한 높이였겠다. 어떤 각오.같은 것이 필요했겠다.

반드시 죽어야 한다.
요행이라도 살아나서는 안 된다.

 십 육 미터의 높이는 그런 각오의 높이처럼 보였다. 반드시 죽기 위해, 마지막 남은 몸뚱아리로 최후의 응원을 보내기 위해 그 분은 두 주먹 꼭 쥐고 수직으로 내리꽃혔을 것이다. 팔 십 팔 미터는 사람의 높이가 아닌 것이고, 십 육 미터는 살아서 닿을 수 없는 높이 같았다.

by 반군, for gogh

 
몸에 물기가 많아 짜 버리지 않으면 힘들 것 같던 5월 24일, 처음으로 반군과 자전거를 타고 바다까지 달렸다. 짭짜름한 땀이 흘러 몸은 가벼워졌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나는 아래쪽으로 뛰어내릴 생각은 없기에 각오 같은 건 하지 않았고, 그저 폐허를 보며 미래소년 코난만 생각했다. 내 발가락 힘으로는 저쪽까지 뛰기가 힘들겠는 걸?

되돌아오는 길도 반군이 앞장섰다. 발걸음은 훨씬 가볍지만 물기 많고 거센 바람에 여전히 조심스럽다. 돌아오며 이 다리의 일제기원설에 대해 계속 떠들어댔다. 그래야 자연의 목소리에 압도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입구로 돌아와 편안해진 마음에 아래쪽으로 내려가 본다. 버려진 낡은 배가 있었다. 발이 땅을 딛고 있을 때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 없다.

들어갈 때 해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문구를 다시 살펴 본다. 도대체 이렇게 위험한 다리를 왜 출입통제하지 않냐는 말이다. 버럭! 화가 날 지경이었다. 이 문구가 해석되지 않은 것은 내가 "引橋"라는 단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진입교"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경고: 진입교가 끊어져 위험하니, 출입을 엄금함!"

횡사도의 어느 절에 들어간 김에 나이 지긋하신 관리인에게 버려진 다리에 대한 걸 물었다. 나중에 검색해서 찾아보려면 이름이라도 알고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청꿍"을 "성공"이라고 발음하시는 할아버지의 사투리에서 딱 한 마디,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만 겨우 알아 들었다. 어찌어찌하다 "인교"가 단어라는 걸 알게 되었고, "횡사도"와 "인교"를 검색어로 하여 겨우 다음 사실을 알아냈다.

횡사도 구조부두(横沙救助码头)


횡사도는 장강의 끝자락, 오송강(황포강) 입구 사이에 있다. 예전부터 횡사도 인근에서 대형선박의 조난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1975년 상해구호국(上海救捞局)의 제의로 횡사도에 구조부두를 건설, 구조선박의 대기 및 일정량의 구호물자 비축하여 장강하구에서 조난사고가 발생했을 시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게 함. 1976년 12월 착공에 들어가 1977년 11월에 부분완성된 상태에서 사용을 시작하였고 1979년12월에 완공. 이 부두는 횡사도 서쪽 강변에 위치, 해군부두에 인접해 있으며 서북쪽으로 상해항도국 장강구 판사처 부두와도 가깝다.


전체 길이는 370미터. 130미터의 강질 부잔교[각주:1](1.7만톤급 낡은 선박을 개조하여 만듦) 구조로 되어 있고,. (그외 다른 구조물에 대한 잡다한 설명이 부가되어 있지만 생략! 항구관련 용어는 너무 생소해요..)  横沙救助码头,位于宝山县横沙岛西滩,紧靠海军码头,西北与上海航道局长江口办事处码头相邻。岸线全长370米,占地16亩。结构形式为钢质浮码头(由1.7万吨级旧船底改建而成),长130米。钢过桥(长18米、宽4.5米)、桥吊桥、砼引桥(长225米、宽6米)、桥头堡引堤(长82米、宽6.5米)坡岸。


이 부두가 건설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변화와 농지조성을 위한 간척사업 등으로 인해 매년 50-60cm 침적되면서, 80년대 초부터 사용이 정지되었다.

설명이 애매한 부분은, 우리가 걸어서 끝까지 간 그 다리의 길이가 370미터인지 아닌지이다. 내 느낌으로는 훨씬 길었는데.. (혹시 중국어로 노출된 부분을 설명해줄 수 있는 분이 계시면 후사함![각주:2]) 다리 끝부분에 듬성듬성 남은 구조물은 원래 부잔교로 서로 연결되었다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일제가 만들고 대약진운동 때 고철을 뜯어내기는커녕(현실에서 내 추리는 맞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문혁이 끝나던 무렵 착공에 들어가 완공되자마자 얼마 사용하지도 못하고 버려진 듯하다.


횡사도라는 섬 자체가 너무 조용한 곳이어서 관광지로 크게 뜰 가능성은 적을 것 같다. 장강 하류의 세 섬(숭명도, 장흥도, 횡사도) 중 가장 규모가 작기 때문인데, 유일한 특징이라면 가장 바다쪽에 있는 섬이라는 정도. 그렇더래도 저 다리를 그냥 폐쇄할 것이 아니라, 난간을 설치하여 안전설비만 갖춘다면 꽤 괜찮은 폐허 관광지가 될 것 같다. 너무 많은 사람이 찾으면 분위기 자체가 바뀌겠지만. 그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버려진 다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폐허에서만 가지고 올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 거니까.



  1. 부잔교 [, floating pier]: 부두에서 폰툰(pontoon:물에 뜨도록 만든 상자형의 부체)을 물에 띄우고 그 위에 철근콘크리트 ·강판 ·목재로 바닥을 깔아 여객의 승하선 ·화물의 적양() 에 편하도록 만든 구조물이다. 폰툰을 해저에 체인이나 와이어 로프로 고정시키고 그 위에 설치한 간이부두로서, 조석 간만의 차이가 큰 곳에서 많이 이용된다. [본문으로]
  2. 후사.라고 할 것까진 없고 8월10일 이후 책 한권 선물해 드릴께요.. [본문으로]
Posted by lunarog
示衆/明室 2009. 6. 25. 21:23

숨이 막힐 것 같은 주말을 보낸 뒤, 벌써 며칠째 상하이 최고 날씨를 보여주고 있다.

정말이지 이렇게 쾌적한 날씨는 상해에서 보기 드물다고 생각될 정도.

 

마음이 한갓지지 못해 바깥에 나가지는 못했는데, 창밖으로 컴컴해지기 직전의 하늘 색깔이 너무 곱다.

진하지는 않지만 고운 저녁놀이 지고 있어 사진기를 가지러 간 사이, 빛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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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6. 24. 23:04
스터디를 마치고 지하철에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잠깐 사이 많은 일(?)이 있었네요.

제가 있는 지하철역 근처에는 오토바이, 삼륜차 등이 떼로 모여 있습니다.
버스는 구석구석 다니지 않고 걷자니 좀 멀고, 그렇다고 택시를 타자니 좀 비싼 근처를 가려고 할 때
가장 싸게 갈 수 있는 게 삼륜차입니다.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건 오토바이일 테구요.

문제는.
이 두 가지 가장 편하면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불법"이라는 사실입니다.
삼륜차(인력거)는 대부분의 큰 도시에서 불법으로 처리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승객을 태우고 달리다가 경찰을 만나면 이상한 골목으로 질주하기도 합니다. (당근, 승객은 엄청 겁에 질리겠죠. 납치당하는 기분일 겁니다.. 인력거꾼도 죽을 맛을 텐데 말입니다..)

역에서 집이 멀지 않아 걸었습니다..
갑자기. 삼륜차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지나가더군요. 좁은 곳을 통과하느라 나란히 줄을 서서 달렸지만 삼륜차가 그렇게 빨리 달리는 모습, 처음 봤습니다. 엇? 가만 보니 모두 승객이 없군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 길을 걷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습니다.
뒤를 이어 오토바이 행렬들이 오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하얀 경찰 오토바이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속을 피해 달아나는 삼륜차의 무리였던 겁니다.
오토바이도 불법이지만, 튀기가 쉬워서인지 꾸물대고 있다가 경찰이 다가오니까 그제서야 전속력으로 흩어지더군요.

길을 건너 집쪽으로 향하면서도 삼륜차 무리들이 잘 피했을까 궁금해서 계속 그쪽을 쳐다보면서 걸었습니다. 제가 걷고 있던 길쪽에서는 신강의 젊은 친구들이 몰려오고 있더군요. 소문이 아주 안 좋은 친구들입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슬람 계통의 이 친구들이 몰려다니면서 슬쩍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죠.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 뒤쪽으로 가서 가방을 열어서 지갑을 꺼내가기도 하고 겨울에 여자애들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기도 합니다.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가면 뒤에서 뛰어와서 가방 지퍼를 열기도 한다더군요.
다행히 저는 근처에서 한번도 비슷한 일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 중 잘 생겼는데 행색이 약간 초라한 친구와 눈이 마주쳤죠. (신강 이슬람 계통 젊은이들, 꽤 잘 생겼습니다..남자가 봐도 반하겠더군요.) 그러다 저는 맞은편의 삼륜차가 궁금해서 그쪽을 계속 쳐다보며 걷다 서기를 반복했습니다.

갑자기. 슬쩍 뒤를 돌아봤는데 그 친구가 내게 다가오다가 바로 뒤를 돌아 가 버리더군요.
제가 백팩을 매고 있었거든요. 든 건 없습니다만. 조금. 등골이 오싹해지더군요.
아~ 바로 이런 경우겠군놔.
그 친구가 만약 내 가방을 건드렸다가 시비가 붙으면 주위에 갑자기 그의 동료들이 몰려와 저를 에워쌓을 겁니다. 쓰리 당하는 여학생을 도와주려다, 한놈인 줄 알았는데 떼거리로 몰려와 분을 삭혀야 했던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럴 땐, 무조건 분을 삭히고 물러나야 합니다!!! 젊은 혈기, 아무 소용 없어요. 저 사람들은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빌미를 주지 않게 적절한 타이밍에 돌아봐서 다행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한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익히 들어왔던) 두 가지 광경을 보게 되네요.
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6. 24. 00:42
공부에 조금 방해가 되긴 하지만, 취미삼아 요즘 애완동물을 기르기 시작했어요.

근데 애완동물이라고 하기엔 조금 ...
양식업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내다 팔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잡아먹을 수도 없어요..

자그맣고 귀엽긴 합니다. 빨갛고 통통한 배를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앙증맞아 죽겠다니깐요. ^^
주로 발밑에서 놀다가 가끔 허벅지로 올라오기도 합니다.
머, 목이나 귀밑에까지 와서 혀를 낼름거릴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정말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강하게 키우려고 가끔 약을 처방하기도 합니다만,
그래서인지 13층 아파트에 살기 버거울 것 같은데 아주 튼튼합니다.
그게 다 제가 열심히 공양한 결과겠죠?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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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습하지도 않은 맑고 화창한 날이었는데, 모기만 없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ㅡㅡ;;
살생을 피하기 위해 자기 피로 배가 통통한 모기도 날려보내는 고승의 마음으로, 그저 인내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어요.....


1. 혹시 모기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지거나 그런 병도 있나요? 요즘 제 상태가 조금...

2. 띠용님~ 중국에도 "쪼금한 거" 많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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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탱크맨, 고양이를 막아선 남자

by luna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경험한 중국은 추모해야 할 굵직굵직한 십주년만 거론해도 해마다 반복된다. 2009년에 돌아봐야할 역사적 순간은 단연 오사운동 90주년(1919.05.0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1949.10.01), 그리고 톈안먼 사건 20주년(1989.06.04)라고 할 수 있다. 오사운동에 대한 새로운 책과 관련 학술대회는 풍성했으며(물론 오사운동의 정신을 본받아 비판정신을 분출하는 것은 최대한 억제시키고 학술제도 내에서의 회고만 가능하게 했다.), 가을이 되면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사 톈안먼 사건"은 중국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홍콩에서 매년 열리는 추모 촛불집회에는 사상 최대인원인 15만명이 운집했으며, 언제나처럼 미국 등 서방국가는 재평가를 요구하는 성명을 내고 중국 외교부는 그에 대한 강한 불만의 목소리로 응수하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통과의례화 되어가고 있다. (톈안먼 광장의 검문 강화 및 유투브, 트위터, 플리커 등의 차단이 있었지만) 육사 20주년은 너무나 조용히 지나갔다.

 

한국의 여러 매체에서도 6월 4일을 전후하여 톈안먼 사건을 다루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단편적인 뉴스에 그쳤고, 20년이 경과한 사건 자체의 의미에 대한 특집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해외의 경우 BBC, RFI 등의 중국어 사이트에서 팡리즈, 왕단 등 핵심 관계자, 사건 당시 취재 기자, 관련 학자 등의 인터뷰와 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20주년을 조명하고 있으며, 해외 중화권 뉴스 사이트인 dwnews(多维新闻网), "縱覽中國; China in Perspective" 등에서도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러나 이러한 재검토나 회고조차 필요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들출 필요도 없이 그저 개설서에서 나오는 사건 개요를 그대로 옮겨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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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야오방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학생들은 민주의 기치를 내걸고 천안문으로 모여들었다. "민주-우리 공동의 이상"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신임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 중앙정치국에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89년 4월 15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가 (격론을 벌이던 중)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정치적으로 기민한 학생들은 민주적 성향의 후야오방에 대한 자신들의 진심어린 존경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마침내 정치적 기회가 왔음을 인식했다. 고위 공직자가 죽었을 때 정부가 잠시 정치적 반대의견을 용인한다는 사실,살아 있는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죽은 자를 애도하는전통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 행진과 시위의 규모는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으며 … 집회와 언론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서를 발표하고, 관료들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비난했다.

 

…… 그러나 덩샤오핑은 1989년의 학생활동가들을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란자들과 비교하면서 둘 다 천하동란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426일자 인민일보 사설에서 그는) 학생시위가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된 음모이며 이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사회주의 체제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불법적인 집회와 허가받지 않은 시위는 엄금해야 하며 학생들이 노동자, 농민 그리고 타교 학생들과 연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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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뿐 아니라 노동자, 교사, 의사, 급기야는 당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인민일보 기자들까지 합세하였다.

 

(이에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으며) 일부 시민은 학생들의 행진대열에 가담했고 어떤 사람들은 음식과 돈을 주는 등 자발적이고 인정 넘치는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 그것은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시위였으며, 목격자들은 시위 참가자들의 비상한 자제력과 학생들의 조직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이들은 익명의 시위집단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는 신원이 확실한 집단들이었다.” (이 운동의 규율 잡힌 행동과 흥겨운 모습, 반전통적인 카니발 같은 환경은 중국의 우드스탁이라 불릴 정도로 대항문화의 축제인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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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춤을 추고 가요를 불렀으며 인기 있는 통기타 가수와 롤 스타들이 여기에 합류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에도 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고 시위군중과 금방 친해졌다. 그러자 노련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부대로 변경된다.) 69일 덩샤오핑은 텔레비전에 나와 그가 반혁명 폭란이라고 부른 것을 섬멸한 군대와 경찰의 노고를 치하하고 시위대와의 싸움과정에서 사망한 수십 명의 병사들의 가족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사회의 쓰레기라고 비난하면서 어떤 유감도 표시하지 않았다. …… 이들은 젊은 시위자들을 처벌하고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겁을 주기로 결정한 이후 이 위기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무력진압에 이어 곧바로 체포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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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시민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최루탄과 물대포만으로 진압이 가능했을 그 곳에서,

어느 누구도 정말로 "진짜" 총알을 사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 길게 인용한 위 글은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1989년의 민주화운동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떤가? 중국공산당, 덩샤오핑, 인민해방군 등이 1989년의 중국 베이징에서 일으킨 일로만 보이는가? 노골적으로 딴나라당, 박쥐, 전투경찰로 치환시켜서 읽어보라고 알려줄 필요도 없이 최근 2년 사이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과 겹쳐져 그저 망연자실해질 따름이다. 의도적으로 6월 3일 밤에서 4일 새벽에 걸친 학살 부분에 대한 인용은 생략했는데, 문제는 학살 이후이기 때문이다.

 

톈안먼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운명은 다했으며, 중국의 개혁개방은 끝났다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90년대 이후 더욱 열정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거듭하여, 사건의 강력한 진압이 경제발전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시간적인 선후관계는 너무 쉽게 원인과 결과의 서사로 변해 버린다. 중국 정부는 모든 사람이 이 사건을 잊어주기를 바랄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이다. 사건 자체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그러나 정부에 반대하는 순간 개인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기를 바라며, 그 기억을 통해 두려워하기를 바란다. 잔인한 진압과 뒤따른 체포, 언론 출판 등 사상검열을 통해 그들은 인민들의 두려움이 내면화되고 일상적인 자기검열을 지속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학제간 구별 없이 토론을 즐기던 비판적 지식인들은 자기 세계에 갇힌 전문 학자로 바뀌었다. 학생들의 관심은 취업준비를 위한 스펙 쌓기에 집중되고 있다. 사회는 너무나도 빨리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오직 "돈"이면 최고인 시대로 변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안정"과 "질서"를 염원한 덩샤오핑의 발포 명령에 뒤따른 것이었다.

 

베이징 시내로 진입하는 탱크를 막아서는 한 시민을 모습을 찍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 사진은 가볍게 비틀어진다.

앗! 그런데 고양이가?

 

경제의 발전으로 최소한 밥 굶는 사람은 없어지지 않았느냐? 대답은 대부분이 평등하게 적게 먹는 사회에서 누구는 배터지게 먹다 남기고 누구는 매 끼니 걱정하는 사회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각종 통계지표와 대도시의 고층빌딩이 제시하는 상징은 그러나 발전과 진보이다. 예전보다는 낫지 않느냐. 효율성 떨어지게 어느 세월에 합의와 조정이나 하고 있냐. 그러다가 치고받고 싸움이나 하고 시간 다 보내지 않느냐. 그것보다는 강력한 정부를 믿어라. 지금은 일부가 '쬐끔' 힘들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는 대로 믿고 따라오면 다수가 행복해진다니깐. 아이 참, 하여튼 기다려 보라니깐, 말들이 많네.. 퍽!!


어디서 많이 보는 풍경이다. 쥐 한마리를 탓할 수 없는 우리의 욕망이 사실은 그 속에 끼어 있다. 흔히 한국과 중국의 격차는 20년 정도라고 말해져 왔다. 격차는 한꺼번에 뒤집힌다. 어떤 면에서 이미 중국의 현재는 한국의 미래이다. 탱크가 동원되지 않은 천안문사건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 능력이 허락된다면 "톈안먼사건 20주년 비공개 세미나"에서 발표된 첸리췬의 <미완성의 임무>와 China Perspectives 2월호에 발표된 페리 링크의 <6월 4일: 기억과 윤리>를 다음에 간단하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지출처:

<사진 1~8> China: a Century of Revolution, Part3, "Born under the Red Flag 1976-1997 (DVD 자료에서 캡션 이미지)

<사진9> 플리커(http://www.flickr.com/photos/22949366@N07/3591541517)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