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獨立閱讀/讀, 서재 2008. 7. 15. 11:14

왕사오보의 중편소설 <황금시대>의 초반부 번역이다.
심심풀이로 조금 번역해 보다가 국내에 기출판된 것을 확인하고 김이 샜다.
2000년에 이름없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소리소문 없이 절판된 것.
번역은 특별한 오류는 없는 듯하나 소설을 읽는 맛은 조금 떨어진다.
내 번역이 왕사오보의 문체를 더 잘 살렸다고 확신할 배짱은 없다만,
보다 간결하게 흐름을 살려보려고 했다는 점만은 밝혀둔다.
중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보다 적절한 문체는 어떤 걸까?
"절묘하다!" 라는 느낌을 내 번역에서도, 다른 사람의 번역에서도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직은.

작가 왕사오뽀(1952-1997)는 97년에 이른 죽음을 맞은 후 재평가되어 현재까지 중국에서 꽤 많은 독자층과 비평계의 호응을 얻고 있으며, 많은 청년작가들이 그의 문체를 모방하기도 하였다.
2006년 여름 상하이의 대형 서점마다 왕사오보의 책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인기만 좋은 시덥잖은 베스트셀러 작가이겠거니 했는데 조금씩 소문도 듣고 내가 직접 읽어본 뒤에야 맛을 알게 되었다.

대표작은 <황금시대>, <백은시대>, <청동시대> 연작(시대삼부곡)이며, 그 외 <침묵하는 대다수>, <사유의 즐거움> 등의 산문집이 있다.

그 중 <황금시대>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개인적인 경험을 소재로 '현실'을 다루었고, <백은시대>는 미래를, <청동시대>는 과거를 다루고 있다. 이 "시대삼부곡"은 희극적이고 유희적인 필치로 시대를 넘나들며 권력이 인간의 욕망과 인성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억압하는지를 잘 그려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된다.각각 중편모음집인 이 연작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면서도 내적 논리와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주주간> "20세기 중국소설 100선", 중국당대문단 "최고의 수확"으로 선정된 바 있다.


간단한 작가소개 정도는 해두려고 논문과 소개글 몇 개를 모아 두었는데
물론 언제 정리할 마음이 생길지는 알 수 없다. 뭔가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은 다음에야..



황금시대

왕사오보

王小波, 《黃金時代》, 陜西師範大學出版社, 2003.


1.


나는 스물한 살에 윈난의 생산대로 배속되었다. 천칭양(陳淸揚)은 당시 스물여섯이었으며 거기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산 아래 14생산대에 있었고 그녀는 산 위 15생산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이 걸레가 아니라는 사실을 토론하려고 산을 내려왔다. 그때는 그렇게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해서 그냥 대충 알겠다고 이야기하고 말았다. 그녀가 토론하고 싶어 한 것은 이런 거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걸레라고 이야기하지만 자기 생각에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서방질을 해야 걸렌데, 자기는 서방질을 한 적이 없으니까. 남편이 일 년 간 감옥에 가 있긴 하지만 그녀는 서방질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전에도 서방질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자기를 걸레라고 부르는지 그녀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논리적으로 그녀가 걸레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다. 만약 천칭양이 걸레라면, 즉 천칭양이 서방질을 했다면 적어도 하나라도 같이 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그게 누구인지 지목하지 못했으니 천칭양이 서방질했다는 것은 성립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천칭양이 걸레이며, 그 점에 있어 의심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천칭양이 자기가 걸레가 아니라고 증명하려 내려온 것은 내가 침 맞으러 그녀에게 갔기 때문이다. 일의 경과는 이렇다. 농번기가 되자 생산대장이 나에게 밭가는 것을 멈추고 모를 심으라고 시켰다. 그래서 허리를 숙이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은 내 키가 190cm 이상이며 내가 허리 고질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렇게 한 달 넘게 모내기를 했더니 허리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라도 막지 않으면 잠도 잘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 생산대 의무실에 있는 침은 도금이 벗겨지고 끝이 낚시 바늘 같아 내 허리의 살을 발라내기 일쑤였다. 결국 내 허리는 산탄총을 맞은 것처럼 상처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 15생산대의 천칭양이 생각났다. 그녀는 베이징 의학원을 졸업한 의사니까 침과 갈고리는 구분하겠지 하는 생각에 그녀에게 가서 치료를 받았다. 치료가 끝나고 돌아왔는데, 30분도 되기 전에 그녀가 내 방까지 쫓아와 자기가 걸레가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천칭양은 자기가 걸레를 업신여기는 게 절대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의 관찰에 의하면 걸레들은 모두 착했고 다른 사람 돕는 걸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남들을 실망시키는 걸 가장 싫어하였다. 때문에 그녀는 어떤 면에서 걸레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문제는 걸레가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라 자기는 절대 걸레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양이가 강아지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만약 고양이를 사람들이 강아지라고 부른다면 그 고양이도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모든 사람이 그녀를 걸레라고 부르니, 자기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안절부절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천칭양이 내 초가에 와 있을 때 산 위 의무실에서의 옷차림 그대로 어깨와 다리를 벌겋게 드러낸 흰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달라진 건 풀어 헤친 긴 머리를 손수건으로 묶었고 슬리퍼를 신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상상해 보았다. 그녀는 흰 가운 아래에 뭔가를 입었을까, 아니면 아무 것도 안 입었을까 하고. 바로 이 점이 그녀가 예쁘다는 걸 말해 주고 있다. 그녀는 뭘 입든 안 입든 상관없는 것이다. 그건 어릴 때부터 길러진 자신감이다. 나는 그녀가 걸레임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 이유까지 몇 개 들어가면서 말이다. 이른바 걸레라고 함은 하나의 호칭이다. 즉 모두가 당신이 걸레라고 말하면 당신은 걸레인 거지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모두가 당신이 서방질했다고 하면 서방질한 것이지 그것도 무슨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근데 모두들 왜 당신을 걸레라고 말하는지 생각해 보면, 내가 보기엔 이렇다. 모두들 결혼한 여자가 서방질하지 않으면 얼굴이 거무스레하고 가슴은 축 처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근데 당신은 얼굴이 검기는커녕 하얗고, 가슴은 봉긋하다. 그래서 당신이 걸레인 거다. 만약 당신이 걸레가 되기 싫으면 얼굴은 검게, 가슴은 축 처지게 만들어라. 그럼 아무도 당신이 걸레라고 안 할 거다. 물론 그렇게 하는 건 엄청 손해 보는 거다. 근데 만약 당신이 손해 보기 싫으면 서방질을 하는 수밖에. 그러면 당신도 자기가 걸레라고 생각하게 될 것 아니냐.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이 서방질했는지를 먼저 밝힌 후 당신을 걸레라고 불러야 할 의무는 없는 거다. 근데 당신에겐 남들이 당신을 걸레라고 부를 수 없게 만들 의무가 있다. 이 말을 들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천칭양의 두 눈을 부릅뜬 표정은 거의 내 귀싸대기를 한 대 날릴 것만 같았다. 이 여자는 귀싸대기 날리는 걸로는 유명했다. 그녀에게 귀싸대기를 맞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 걸레면 걸레지 뭐. 근데 가슴이 처지네 마네, 얼굴이 검네 마네 하는 건 너랑은 상관없거든요. 그러면서 한 마디 보탰다. 행여 내가 이 일에 지나치게 관여했다가는 귀싸대기를 얻어맞게 될 거라고 말이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내가 천칭양과 걸레 문제를 토론한 장면을 상상해 본다. 그때 나는 얼굴이 누렇고 뜨고 말라 터진 입술에는 종이조각과 담배가루가 묻어 있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반창고로 찢어진 곳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헤진 군벌 하나 입고서 나무침대에 다리를 꼬아 앉아 있는 꼬락서니가 완전히 건달이 따로 없었다. 아마 천칭양이 이런 놈에게 자기 가슴이 처졌니 안 처졌니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손바닥이 얼마나 근질거렸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좀 신경질적인 편이었는데, 그건 모두 아주 건장한 청년들이 아픈 데도 없으면서 진료를 핑계로 그녀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실 의사를 보러 간 게 아니라 걸레를 보러 간 것이다. 나만 예외였다. 내 허리는 저팔계에게 쇠스랑으로 몇 대 맞은 것처럼 아팠으니까. 허리 아픈 게 진짜든 아니든 거기 뻥뻥 뚫린 구멍만으로 의사를 찾을 이유는 충분했다. 그 구멍이 그녀에게 자신이 걸레가 아님을 나에게는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한 사람이라도 그녀가 걸레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렇지만 나는 일부러 그녀를 실망시켰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만약 내가 그녀가 걸레가 아님을 증명하려 했다면 그녀가 걸레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다. 그건 너무 쉬운 일이다. 사실 나는 증명할 필요도 없는 것 말고는 무엇도 증명할 수 없었다. 봄에 생산대장은 내가 자기 집 어미개의 왼쪽 눈을 애꾸로 만들어, 이놈이 무슨 발레라도 하는 것처럼 항상 고개를 돌려서 사람 쪽을 본다고 말했다. 그 후로 그는 언제나 트집을 잡았다. 나는 나의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아래 세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1. 생산대장의 집에는 어미개가 없다.

2. 이 어미개는 태어날 때부터 왼쪽 눈이 없다.

3. 나는 손이 없어서 총을 들고 사격을 할 수 없다.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었다. 생산대장의 집에는 확실히 갈색 어미개가 한 마리 있고, 이 어미개의 왼쪽 눈은 확실히 나중에 먼 것이며, 나는 총을 들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밀한 사격술을 자랑한다. 그 얼마 전에 나는 뤄샤오쓰(羅小四)의 총을 빌려 녹두 한 그릇을 총알삼아 빈 창고에 있던 쥐를 두 근이나 잡았다. 물론 우리 생산대에서 사격을 잘 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 목록에는 뤄샤오쓰도 포함되어 있다. 총은 그의 것이고, 게다가 그가 생산대장의 어미개의 눈을 쏘았을 때 나는 한쪽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남이 한 일을 까발릴 수는 없었고, 뤄샤오쓰는 나하고 친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생산대장이 만약 뤄샤오쓰를 건드릴 수 있었다면 나라고 단정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침묵은 묵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봄에 나는 모를 심으러 가서 부러진 전봇대마냥 엎드려 있어야 했고, 가을 추수 후에는 또 소를 먹이러 나가 뜨신 밥은 먹지도 못했다.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어느 날 산 위에서 마침 뤄샤오쓰의 총을 빌린 날 생산대장의 어미개가 산으로 올라오는 걸 발견했다. 나는 총알을 날려 그 놈의 오른쪽 눈을 쏘았다. 이 개는 이미 왼쪽 눈을 잃은 데다 오른쪽 눈마저 사라지니 생산대장에게 되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하늘만이 그 놈이 어디로 갔는지 알 것이다.


그렇게 보내는 하루하루, 나는 산에 올라 소를 먹이거나 집에 드리누워 있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다. 그 무엇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천칭양이 또 산에서 내려와 나를 찾았다. 알고 보니 또 다른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녀가 나하고 서방질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우리가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말했다. 우리가 결백하단 걸 증명하려면 다음 두 가지를 증명하는 길 밖에 없다.


1. 천칭양은 처녀다.

2. 나는 고자라서 성교 능력이 없다.


두 가지 모두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결백함을 증명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우리가 결백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다. 천칭양은 이 말을 듣고 새하얗게 질렸다가 얼굴이 뻘게지더니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일어나 가 버렸다.


천칭양은 내가 언제나 악질이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생 까다가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그녀가 우리 둘의 결백을 증명해 달라고 했을 때 나는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섹스를 한 번 하자고 건의했다. 그래서 그녀는 조만간 내 귀싸대기를 한 대 날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만약 내가 그녀의 결심을 알았다면 뒤에 이야기할 사건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글루스에서 by luna | 2008/07/15 11:14 | 独立阅读 |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08. 1. 15. 21:22

리얼은 15~6년간 거의 매일 소설을 읽어 왔으며 특히 유럽 소설을 섭렵하였다. 최근에는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방면으로 독서의범위를 확장시켰다. 이는 문학서적들이 최소한의 문제의식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갈수록 느슨해진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장좋아하는 작가는 카뮈와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다.


창작 이외에 리얼이 가장즐기는 것은 잡담이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친구들과 잡담을 하는 것은 너무 비용부담이 크다. 그래서 요즘은 시간 날 때마다 축구를즐겨 본다. 그는 특히 중국 축구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중국의 모든 직종 중에 축구가 가장 제대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문화 어느 영역에서 감히 이렇게 외칠 수 있겠는가? 이기든 지든 눈앞에 펼쳐져 모두가 볼수 있고, 욕할 수 있다. 게다가 수만 명이 모여서 같이 욕하고, 수억의 관중이 같이 목이 터져라 욕할 수 있다. 다른 직종에서이게 가능한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통로가 있는가? 그래서 나는 축구를 볼 때마다, 특히 중국 축구를 볼때마다 아무리 무참히 깨지더라도 속으로 잘 찼다를 연발한다. 이게 어디 축구겠는가, 이건 분명 전지구화 시대의 중국현실에 대한너무나도 리얼한 사진이다. 축구나 축구와 관련된 영역은 가장 현실주의적인 소설도 비교할 수 없는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 중국식《아내가 결혼했다》를 기대해도 좋을 대목이다.


앞으로의 창작 계획을 묻는 질문에 리얼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저는 원래 중단편소설 이외에 평생 세 편의 장편만을 쓸 계획이었습니다. 역사, 현실, 미래에 관하여 각각 한 편씩을 구상하고있었습니다. 《노래가락》은 역사에 관한 소설입니다. 《석류나무 위에 열린 앵두》는 두 번째 장편을 준비하던 중 임시로 끼어든것입니다. 지금 집필하고 있는 것은 원래 계획의 두 번째 장편인 현실에 관한 소설입니다. 내용이 비교적 복잡하고 편폭 또한길어서 대략 30만 자 정도 될 것입니다. 몇 마디로 요약하기는 힘들고 언제 완성할지도 미지수입니다. 제 계획에 있어 이 세장편은 사실 하나의 생각을 관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현실임과 동시에 미래입니다. 이 말은 뒤바꾸어도 됩니다. 미래는역사임과 동시에 현실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해도 되겠죠. 현실은 역사임과 동시에 미래입니다.”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08. 1. 13. 01:23

류전윈(劉震雲)

 

 

1958년 5월 하남성(河南省) 옌진현(延津县)에서 출생했다. 1973년 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습작을 시작했으며, 1978년에제대하였다. 이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초기작 「신병훈련(新兵连)」(1987)은 신병연대에서 궁벽한 농촌청년들이 겪게 되는새옹지마의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제대 이후 잠깐 동안 고향에서 중학교 교사 생활을 했으며, 문혁 동안 중단되었던대학입시가 부활하자 1978년 가을 북경대 중문과에 입학한다. 처녀작 「탑마을(塔铺)」(1987)에서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시기고향에서의 경험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88년에서 1991년까지 위화(余華), 모옌(莫言) 등과 함께 북경사범대학루쉰문학원(鲁迅文学院) 창작연구생반에서 수학하여 문예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82년 대학 졸업 후 《농민일보(农民日报)》에입사하였으며, 지금은 문화부 주임으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중국작가협회 전국위원회 위원, 북경시 청년연합회(靑聯) 위원,일급작가(一級作家)이며, ‘루쉰문학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2년부터 창작을 시작했으며, 1987년 《인민문학》에 단편소설 「탑마을」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 소설로 그는1987-88년 전국우수단편소설상, 1987년 《소설선간(小说选刊)》우수단편소설상, 1987년《인민문학(人民文学)》우수단편소설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드라마로 제작되어 전국 드라마 “비천상(飞天奖)”을 수상한다. 같은 해발표한 「신병훈련」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아, 제3회 《소설월보(小说月报)》 우수중편소설 “백화상(百花奖)”과 제2회 청년문학창작성취상을 수상한다. 이후 「우두머리(斗人)」(1988), 「직장(单位)」(1988), 「관직(官场)」(1989), 「닭털같은 나날(一地鸡毛)」(1990), 「관리들 만세(官人)」(1991), 「1942년을 돌아보다(温故一九四二)」(1993),「뉴스(新闻)」(1994) 등 우수한 중편을 잇달아 발표하여 “중편에 강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의 소설에는형이상학적인 거대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현실의 자질구레한 일상이 여실하게 그려지고 있어 80년대 후반 대두한 신사실주의소설의 대표로 손꼽히고 있다. 현실의 담담한 묘사에서 드러나는 것은 그러나 그 옛날 루쉰을 떠올리게 하는 절망과 음울함, 그리고중국인의 노예성이다. 도시를 살아가는 소시민의 닭털 같이 가볍고 보잘 것 없는 일상이 잘 그려진 「닭털 같은 나날」 또한 그의소설 특유의 블랙 유머와 실존주의적 모색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 또한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20세기 100대세계명작”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작가가 가장 중시하는 작품의 하나인 「1942년을 돌아보다(温故一九四二)」는 르포르타주의형식적 외피 아래에 권력의 속성을 멀찍이서 그려내고 있다.

 

여러 중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일상, 권력, 역사 등의 키워드는 ‘고향’을 주요무대로 그려낸 일련의 장편에서 더욱 다양하게 변주된다. ‘신역사소설’의 대표작품으로 평가되는 《고향의 국화(故乡天下黄花)》(1991)는 한 촌락의 권력투쟁사를 통해 주류 이데올로기적 혁명의 역사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있다. 《고향의 국화》는 “20년간 중국 영향력 100위 도서”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닭털 같은 나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전략적 시도인 《고향의 옛 이야기(故乡相处流传)》(1993)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을 적극 활용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고향 하남성을 근거지로 활약한) 조조의 삼국시대와 현재를 오가며 “허구세계의 진실”과 “진실세계의 허구”를 교차시키고 있다. 농촌에서 그려낸 《악의 꽃》이라는 평가를 받는 《고향의 꽃송이(故乡面和花朵)》(1998)는 8년이라는 창작기간과 ‘4권 220만 자’라는 규모로 인해, 그리고 기존관습에서 벗어난 형식적인 실험으로 인해 여전히 의론이분분한 상태이다. 그러나 과잉일지는 몰라도 시대의 획을 긋는 새로운 작품임은 분명하다. 그의 언어적 실험은《온통 헛소리(一腔废话)》(2002)에서 더욱 자유롭고 안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최근작 《핸드폰(手机)》(2003)은 초창기의 모습으로 돌아가, 핸드폰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닭털 같은 나날」, 「1942년을 돌아보다」, 《핸드폰》 등 다수의 작품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거나 제작 예정이다. 또한 중국 최초의 “작가영화”라고 평가되는 《내 이름은 류약진(我叫刘跃进)》(감독: 마리원马俪文)에서는 직접 제작, 시나리오, 연기(카메오) 등에 참여하였으며, 2008년 1월 16일 상영예정이다. 이러한 최근 행보에도 불구하고 그의 새로운 문학적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 류진운은 지금까지 다음과 같은 국역본이 소개되어 있다. 또한 최근작 <류약진>이 곧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영화도 국내에 개봉할까? 영화는 모르겠으나 소설<류약진>은 너무 시끌벅쩍하고 수다스러워서 내 취향은 좀 아니었다. 영화도 아마 짐작에는 <크레이지스톤>에 가까운 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녀의 전작 <워먼랴; 우리 두 사람>은 좋았지만 말이다.

  • (덧붙임) : 영화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기대작이어서 더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소개를 작성한 후 출판된 소설 <내 이름은 류약진> 또한 나로서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글루스에 올리기 전인 07년 9월~10월 사이 작가 소개가 작성되었고 책은 2007년11월에 출판되었다.) 일단 <닭털 같은 나날>의 류진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핸드폰>이나 <내 이름은 유약진>을 좋아하기는 힘들 수도 있겠다. 대체적인 평가는 초기의 단편이 뛰어나고, <고향의 국화; 고향 하늘의 노란 꽃> 정도까지를 쳐주는 편이다. 그 이후의 소설은 나로서는 너무 수다스럽다.

<중국 현대 신사실주의 대표작가 소설선>, 김영철 역, 2001년 7월, 책이있는마을 /단편 "단위" 수록

<닭털 같은 나날>, 김영철 역, 2004년 2월, 소나무

<핸드폰>, 김태성 역, 2007년 11월, 황매

<고향 하늘 아래 노란꽃>, 김재영 역, 2007년 12월, 황매



핸드폰고향 하늘 아래 노란꽃닭털 같은 나날중국 현대 신사실주의 대표작가 소설선


  • 고향 하늘 아래 노란꽃은 아무래도 그냥 "국화"로 옮기는 게 좋지 않았을까? 소개말에 보면 "황화"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바로 국화 아닐까 하는 것이다.
  • 물론 나는 위의 약력을 쓸 때 위에 소개된 저자의 말은 모르고 있었고, 고향 삼부작의 제목 번역은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
  • 그 중 압권은 "고향의 꽃송이"로 두리뭉실하게 옮긴 <故乡面和花朵>이다. 중국인들도 제목을 어떻게 끊어 읽어야 될 지 모르겠다고 한다. 추후에 지도교수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었는데도 제대로 이해가 안 되어 원래의 "두루뭉술"로 둘 수밖에.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07. 11. 18. 03:39

옌롄커(阎连科)


옌롄커는 현재 중국에서 평단의 반응과 대중의 호응을 동시에 장악한 중국 당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제1회, 제2회 루쉰 문학상, 제3회 라오서(老舍) 문학상(2005년)을 포함한 국내외 문학상을 20여 차례 이상 수상하였으며, 상당수 작품이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등 10여 종의 외국어로 번역 소개되었다. 11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수필, 산문, 8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2007년 9월 12책 분량의 <옌롄커문집(阎连科文集)>을 인민일보출판사에서 출간하였다. 1985년 하남대학 정법과를 졸업했으며, 1991년 해방군예술대학(解放军艺术学院) 문학과(文学系)를 졸업했다. 2004년 군인신분에서 벗어났으며, 현재 중국작가협회 전국위원회 위원, 북경시 청년연합회(青联) 위원, 일급작가, 북경시 작가협회 전업작가로 있다.

 

옌롄커는 1958년 허난성(河南) 쑹현(嵩县)의 작은 마을 톈후진(田湖镇)에서 태어났다. 그 옛날 중원으로 불리며 중국 고대문명의 발원지로 이름을 날렸지만, 대륙의 문명이 몰락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중국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지역이 되어버린 곳이다. 생년월일이 필요 없을 정도로 빈곤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입대할 때 서류작성을 위해 회계관이 임의로 작성한 출생일이 1958년 8월 24일이다. 어머니는 생년월일이 아니라 수확을 못할 정도로 고구마가 풍작이었고 찌는 듯이 무더운 해에 태어났다고만 들려줬던 것이다. 대략적인 추측에 의해 뒤늦게 부여받은 날짜이긴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유희와 장엄이 함께하는 무엇이었다. 옌롄커는 자신의 감수성은 확실히 쑤통, 위화 등 60년대 작가와는 다르며, 50년대 작가의 그것임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중국에서 50년대 작가와 60년대 작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문학사적 개념이다. 유년기를 어떤 방식으로 거쳤는가가 한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을 감안할 때 이들을 가르는 차이는 문화대혁명(1966-76년)이란 역사적 사건이다. 대약진 운동, 반우파투쟁, 문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급투쟁의 역사가 그들의 신체에 각인한 것이 무엇이든, 그 또한 50년대 작가인 모옌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을 회상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년기의 배고픔이었다. 혁명이 아니라 생존 자체가 그와 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토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한다.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소설 창작으로 한 작가의 환경 자체가 달라진 것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1975년 동북 지역의 궁벽한 농장에 하향되어 있던 여류작가 장캉캉(张抗抗)은 소설 <경계선(分界線)>의 후반작업을 위해 대도시인 하얼빈으로 옮겨오게 되며, 소설이 출판된 후에도 하얼빈에 남아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즉, 소설가가 되면 농촌을 떠나 도시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고등학생이던 1975년부터 습작을 시작하여 「산고을의 혈화(山鄕血花)」라는 계급투쟁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 물론 언제 불쏘시개가 되었는지도 모를 소년의 백일몽이었다.

 

실제로 토지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다른 농촌청년들과 마찬가지로 1978년 입대를 하면서이다. 입대 후 부대에 있는 문학창작 학습반에 들어가면서 정식으로 문학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1979년 우한의 《전투보》에 처녀작 「천마 이야기(天麻的故事)」를 발표한다. 이 소설은 한 병사가 공산당 입당을 위해 간부의 방에 몰래 천마(天麻) 한 근을 뇌물로 가져다 두는데, 간부가 이를 물리치며 병사에게 편지로 혁명적인 교훈을 전하는 내용이다. 소설이 발표되자 전 사단이 들썩였으며, 옌롄커는 원고료 8원의 반을 잘라 부대원들에게 사탕과 담배를 대접하며 자기 문학의 시작을 자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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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07. 10. 27. 03:11

리얼(李洱)


중국에서 신생대 작가(新生代作家)로 일컬어지는 리얼은 현대 중국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개성화된 담론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탐색과정을 보여주는 작가로 문단에 자리매김 되고 있다.

그는 소설의 기교를 중시하는 선봉적인 의미의 작가임과 동시에 항상 스스로를 발견의 과정에 두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생활과 세계에 대해 의혹과 경계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나는 경험에서 출발하고자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 혼자만의 경험과 거리를 확보하여 우리 담론생활의 진상을 고찰하고 싶다. 형식과 이야기의 금기 깨기에서 나의 창작은 시작된다.”


80년대 말 창작을 시작한 후, 지도교수가 죽었다(导师死了), 오후의 시학(午后的诗学), 현장(现场), 거울을 깨고 나오다(破镜而出), 망각(遗忘)(“대가문학상(大家文学奖)” 수상작), 밤의 도서관(夜游图书馆), 수다스러운 벙어리(饶舌的哑巴)30여 편의 중단편과 5권의 소설집을 발표하였다.


대표적인 장편으로는 <노래가락(花腔)>(2002),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石榴树上结樱桃)>(2004)가 있으며, 현재 허난성 문학원 전업작가 및 문예지 <망원(莽原)>의 부주편으로 있다. 아직 그는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지만, 중국의 지적인 독자층과 문단의 평가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 : 허난성 출신인데 상하이에서 대학을 다니고 처녀작을 썼다. 당시 상황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 : 소설을 쓰고 싶어 중문과를 지원했고, 화둥사범대학의 문학동아리에 가입하여 아방가르드적인 분위기에서 습작을 했다. 선봉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처녀작 복음을 졸업 직전에 발표했다. 비교적 만족스러운 작품은 지식인의 생활을 묘사한 중편 지도교수가 죽었다이다. 작품을 발표한 수확(收获)은 초고를 돌려주는 좋은 전통이 있었다. 몇 구절을 수정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게 이후 창작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400원이라는 거액의 원고료로 냉장고를 샀다.

 

* : 지도교수가 죽었다, 오후의 시학, 현장등 초기작은 주로 지식인의 생활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지식인의 처지에서 무엇을 발견하려 한 것인가?

* : “초기가 아니라 줄곧 지식인의 생활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지식인이 역사와 현실에서 겪는 곤경과 개인의 존재 의의를 소설의 형식으로 탐색하고자 한 것이다. 다른 이야기를 써도 바로 되돌아와 버린다. 게다가 기껏 써냈다고 해도 그 배후에 지식인의 시각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복잡함을 몇 마디로 압축하기는 힘들다. 죽을 때까지 써야 할 것이다.


* : 대표작 노래가락(2002)을 시작으로 크게 달라진 점이 사회의 공공영역에 대한 깊은 관심인 것 같다. 이전까지는 개인적인 영역에 보다 집중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생긴 것인가?

* : 이전에도 개인적인 영역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변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점점 문제의 복잡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때문에 경험의 복잡성을 표현하는 데 보다 주의했다. 역사 또한 현실이며, 다른 주제를 주면 다른 제품을 생산하는 역사서술의 작업장 분위기도 알게 되었다. 개인의 소멸, 민족주의의 복잡성 따위에 대해서도 의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노래가락을 쓰게 된 것이다.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또한 변화하였다. 여기서는 중국고전소설의 표현수법을 현대소설의 서사에 시도해 봤으며, 농촌에 관한 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 : 2004년에 발표한 석류나무에 열린 앵두는 농촌의 정치에 관한 소설이다. 지식인 소재에서 농촌으로 바뀐 이유는 무엇이며, 다른 향촌소설과의 차이는 어디에 두고 있는가?

* : 향토 중국에 관한 소설을 쓰는 건 계속 꿈꿔오던 것이었다. 다른 향촌소설과 차이가 있다면, 나는 기이한 사건을 서술하거나, 일상적 사건을 배경으로 현재의 모든 난제를 묘사하고 싶지 않았으며, 현대화의 과정에서 발생한 향토 중국의 변화를 표현하고 싶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작가들의 관심은 고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곤란함에 더 주목하고자 하였다.

 
* : 동시대의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들의 장점, 혹은 단점은 어디에 있는가?

* : 사실상 글쓰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이후 모두들 대면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전지구화의 상황에서 중국적 현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그 복잡성을 표현할 것인가? 또한 그 표현은 독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소설가의 도덕적 대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글쓰기가 개인적인 것임을 강조한다면 90년대 초반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좀 큰 문제인 듯 보이지만 사실 모두와 관계된 것이고 모두에게 도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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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獨立閱讀/讀, 서재 2007. 9. 16. 22:55
류전윈은 글쓰기를 운동에 비유하기를 즐긴다.

 

운동에는 승리를 추구하는 운동과 실패를 알아가는 운동이 있다.
구기종목은 대부분 승리를 위한 운동이다.
그러나 높이뛰기는 실패를 알아가는 운동이다. 막대기가 떨어지면 경기가 끝난다.
글쓰기는 류전윈에게 있어 실패를 알아가는 운동인 것이다.


 

“만약 어떤 작품을 쓰고 나서 스스로 그게 굉장히 좋다고 생각된다면 그 작가는 그걸로 끝장이다.
작가가 어떤 걸 진심으로 써냈다면 항상 너무 부끄러워져 남에게 보이기 민망해지기 마련이다.
쓰기 전에는 자신이 있어 이 작품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쓰고 나면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된다.
그래서 또 다른 걸 써 보지만 여전히 아니다.
자기가 표현하려는 게 하늘에 있는 것 같아 하늘에 가서 찾아보지만 아니고, 골짜기도 여전히 아니다.
어렵사리 발견했다 싶은데 자세히 보면 또 아니다.
글쓰기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어렴풋이 알아가는 과정이며, 계속하여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닭털 같은 나날>의 작가 류진운의 인터뷰 중에서..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