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지난 12월 25일, 1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던 류샤오보에 대한 판결이 떨어졌다. 정부 쪽에서는 망명을 종용한 모양인데 당사자가 거부했고, 이 경우 11년이란 형을 판결하기로 미리 잡혀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판결 날짜인데, 아마도 서방언론들의 집중포화를 피하기 위해 크리스마스로 시기를 잡은 듯 하다.

이에 대해 중국에서는 막혀 있어 봉쇄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로 상주하고 있는 트위터에 많은 의견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 중 베이징 영화대학의 추이웨이핑崔卫平 교수의 작업이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여러 지식인들에게 전화나 메일로 이 판결에 대한 의견을 물어 자신의 트위터로 전하고 있다. 미리 공개 여부를 물어본 뒤 올리는 듯하며, 하나의 사안에 대한 새로운 인터뷰 방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물론 지식인들의 대답은 뻔한 면이 많다. 정부에 강한 반대를 하기도 거시기하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기는 얼굴이 안 서는 애매한. 문제를 좀 더 관망하며 실수 없이 그럴 듯한 자기 의견을 정답으로 제시하려는 의지. 왕후이가 대표적이다.(왕후이는 너무 노회한 느낌이다..) 좀 더 노련하게 정부의 언어를 사용하여 정부에 해결을 촉구하기도.

한 가지 부언할 것은. 08헌장을 비롯하여 지식인의 이러한 대응에서 어떤 굉장한 이론적 성찰을 얻을 수도 없고, 행간에 국가 전복이나 강한 혁명의 의지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아주 상식적인 견해, 즉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보장해 달라.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당연한 시민권을 보장해라. 알 권리를 달라. 등에 머물러 있다. 너무 뻔한 주장을 왜 하냐고? 바로 이 상식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혹자에게는 이런 상식적인 발언과 상식적인 행동이 굉장한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발언 이면을 읽을 필요가 있겠다.


판결 하루 전(24일)부터 추이웨이핑의 작업은 시작되었으며, 판결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락처를 동원하여 의견을 물어 50여명 정도의 견해를 트위터에 올렸다.(이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비록 제한된 숫자이고 어느 정도 편향되어 있지만 이들 속에서도 좌우의 스펙트럼은 상존한다.(중국의 좌우가 한국과 다르다는 점 주의. 좌파, 우파보다는 현실정치의 이권에 동조하느냐,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추구하는가에 따라 선을 갈라야 할 듯)

트위터 글을 모으고 있었는데, 중국의 어떤 아해가 구글 독스로 정리해서 공지했다고 함. 구글독스에 실린 추이웨이핑의 변을 앞에 첨부한 뒤, 내가 따로 모은 트위터 글을 그 아래에 번역. 짧은 트위터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한국어로 옮기는 정도의 번역이며, 오역이 있을 가능성 아주 농후. 정확히 찾아볼 여력이 안 되어 대충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정리한 것임을 양해 바람.

#트위터의 RT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는 1. 트위터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2. 중국어의 140자는 영어나 한국어 표현의 두 배 이상을 할 수 있음. 즉 압축적인 번역이 상당히 곤란.

* 앞에 특별한 표시 혹은 다른 아이디가 없는 한, 기본적으로 모두 추이웨이핑 트위터 내용이다.
*류샤오보를 중국어로 구글 등 검색하면 빈 화면 출력, 즉 중국 내륙에서는 막혀 있으므로, 이 블로그의 안전을 위해(^^) 중국어는 생략.

원문까지 보려면 아래 링크로 가시라.



그저 물어봤을 뿐이다.
작자: 추이웨이핑

지식인 동료들에게 류샤오보의 11년형 판결에 대해 물어본 것은 절대로 지식인의 양심을 "고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문"이란 말은 너무 무겁다. 그저 그들의 견해가 궁금했을 따름이며, 사람들이 이 사건을 알게 된 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보통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공개할 통로가 없다. 우리의 공공생활과 사생활 사이에는 거대한 골짜기가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나 자신이 "원죄"를 가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을 원래 궤도에서 끌어내어, 일상생활의 광선에서 벗어나게 하여 이렇게 어려운 문제와 마주하게 하는 것은 본인 또한 큰 결심이 필요했으며 굉장히 미안한 일이었다. 나는 평소 결코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떨 때는 삶의 체인이 끊어져 버릴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류샤오보가 중형을 선고받은 일처럼 이렇게 큰 사건이 우리에게 발생하면 우리는 부득불 이 단절을 짊어질 수 밖에, 자신의 "원죄"를 짊어질 수밖에 없다.

이 방식은 우리의 선현인 공자의 방식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공자가 말하길, 시는 "흥, 관, 군, 원"(興觀群怨)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중 "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시를 통해 사회생활과 정치풍속의 성쇠와 득실을 이해하게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노선생은 삼백편의 시를 한 데 모은 것이었다. 내가 많은 지식인의 관점을 한 곳에 모은 것 또한 "관"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저의 방문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2009년 12월 29일




첸리췬(钱理群) 선생은 전화로, 80년대에 비해 류샤오보는 갈수록 글을 이성적으로 쓰고 있다고 말함. 류샤오보에 대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가지는: 1. 천안문 사건에서 보여준 행동, 2. (망명하지 않고) 국내를 지켰던 점. 첸 선생은 "류샤오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
 
류샤오뽀의 박사 지도교수인 베이징 사범대 교수 통칭빙(童庆炳) 선생: 류샤오뽀의 근황을 들은 후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고. 몸조심하길 바란다. 어쨌든 잠시나마 사제의 정을 나눈 사이이니 몸조심하기를 바란다.
 
전 베이징사범대 교수, 루쉰 전문가 왕푸런王富仁 교수는 지금도 류샤오뽀를 "친구"로 여긴다. 비록 여러 면에서 관점이 다르긴 하지만. 왕 교수는 류샤오뽀의 근황을 들은 후 : "인간은 사상적인 면에서 자유가 필요하다. 행동적인 면에서는 한계가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사상 자유는 간섭할 수 없다. 이 문제에 있어서 중국은 줄곧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류샤오뽀의 80년대 친구이자 시 평론가인 탕샤오두唐晓渡의 회고: 당시 다크호스 류샤오뽀는 분명 류짜이푸를 알고 있었는데, 앞에서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그런데 그는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류샤오뽀의 최근의 사상발전에 갈수록 동의하며, 날로 견실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현재 문맥에서 류샤오뽀는 지식인의 임무와 이성을 잘 드러내 주었다.
 
시인 망커芒克는 자신이 류샤오뽀와 "굉장히 사이좋은 친구이며 같이 있을 때 항상 유쾌했다고.. 지금껏 그가 무슨 잘못된 일을 저질렀을 거라 생각한 적 없다"고 말함. 그의 근황을 들은 뒤 "내일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란다"라고 망커는 말함. / 이에 대해 @yanglicai: 정말 순진하군. 내일 그가 판결받지(아무 일도 없을) 가능성은 제로다. /이에 대해 cuiweiping: 망커는 인터넷을 안 해요.
 
판결 전(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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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후(27일부터)

쉬유위徐友渔: 류샤오뽀 판결 중 08헌장에 대한 죄목이 있다. 헌장은 연합국 인권선언을 재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판결은 인류가 공인하는 문명 규범에 대한 도전이며, 중국의 현행 헌법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헌법에 중국 공민의 언론자유가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cuiweiping 다른 입장에서의 의견개진을 받아들입니다. RT @amoiist: RT @cxzj: 비판자들은 08헌장의 조직적인 이의활동의 일면을 일부러 말하지 않아. 중공이 그걸 싫어한다는 걸 아는 거지. 이건 당국이 자기들을 반역자가 아니라 충간하는 신하로 봐 주길 원하는 태도야. 이런 심리는 굉장히 미묘해. 20년전(천안문사건) 삼군자(천안문광장의 마오쩌둥상을 더럽힌 세 주역)를 파출소로 압송한 시위학생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도 않은 셈.
 
쉬번徐贲: 어느 한 중국 시민이 헌법이 그에게 부여한 권리로, 좋은 뜻에서 국가 정치에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이처럼 가혹한 징벌을 받게 되니 믿을 수가 없다. 중국은 국제 인권공약에 서명한 국가이다. 중국이 국제적으로 굴기하려면, 반드시 언행일치의 신뢰를 세워야 한다. 많은 나라에서 이 일에 대해 보도한 내용을 통해 볼 때, 이 사건은 중국의 신뢰에 손상을 입혔다.
 
위안웨이스袁伟时: 21세기가 되었는데 여전히 말로 죄를 묻는다는 건, 시민의 권리를 침범하고 문명에 대한 모욕이며 또다시 중국의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다. 당국이 죄수로 인정한 류샤오뽀는 모두의 눈에 영웅이 되어 있다. 시각 차이가 이렇게나 나니 집정자들이 어떻게 마주하겠는가?
 
장이허章诒和: 1968년에 나는 현행반혁명의 죄목으로 20년의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09년, 류샤오뽀는 국가와 정권의 전복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11년을 선고받았다. 41년의 격차를 두고 우리 둘은 말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우리의 제도는 도대체 얼마나 개선되었나? 우리 사회가 대체 진보하긴 했을까?
 
러다이윈乐黛云: 1. 08헌장을 보니 그 속에 국가를 전복하려는 생각은 없었고 개선을 바라는 내용이다. 2. 08헌장은 하나의 논의이다. 만약 논의 만으로 죄를 선고한다는 건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라 수긍할 수 없다. 3. 만약 모두에게 감히 말할 수 없(게 한)다면, 국가가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
 
첸리췬(钱理群) : 류샤오뽀의 모든 관점과 방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류샤오뽀는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비판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받아들이기 어렵다.
 
딩둥丁东: 예로부터 글로 인한 옥살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 또 11년을 더하였네. 사상은 언제나 자유를 원했으니, 어찌 08(헌장)만 탓하뇨. -- 성탄 중국. / (대련으로 썼는데 중국애들도 이거 무슨 말이냐, 그의 중국어 실력이 너무 좋아 읽을 수 없다고 비꼼. 깊이 생각않고 의역.)
 
cuiweiping 비공식평론이 아니라 모두 권한을 위임받은 후 발표한 겁니다. RT @xlonely: @cuiweiping 추이 선생님 질문: 머리도 있고 얼굴도 있는 이들 중국 지식인들이 왜 이다지도 나약한가요. 비공식적인 루트(트위터)로만 이야기할 뿐, 왜 공개적으로 일어나 당국을 규탄하지 않는 겁니까? 저는 공개석상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이들의 집단적인 침묵이 수치스러워요.
 
작가 모옌莫言은 자신의 대답을 여기(트위터)에 발표해도 된다고 했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집에 손님이 있어서 그들과 이야기 중이었어요.
 
cuiweiping 내일부터 제 전화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귀신이 왔다"라고 말할 것 같네요. RT @ranyunfei: RT @wenyunchao:  추이웨이핑 선생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어요. 친구들에게 미움받는 일이죠. 그렇지만 어떠한 지식인도 이 문제를 회피할 수 없죠. 침묵이든 좌우를 돌보지 않고 말하는 것이든 대중에 대한 대답입니다. (마지막 말 번역 애매.)  @freeliuxiaobo 
 
왕후이汪晖의 답신: 전화와 메일을 주신 점 감사. 저는 류샤오뽀의 많은 관점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로 죄를 묻는 방식에는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반대합니다. 저는 이 사건의 경과를 관심있게 바라볼 것이며, 상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한 후에 저의 견해를 표명하겠습니다.
 
후제胡杰: 사회가 이미 이렇게나 개방되었고 언론자유가 전사회의 상식이 되어 있는데, 탄쭤런에서 류샤오뽀까지 어떻게 아직도 이런 황당하고 시대를 역행하는 현상이 생긴단 말인가요?
 
위잉스余英时: 류샤오뽀는 앞뒤로 세 차례 수감되었는데, 매번 영광을 더하여 이번이 가장 영광스럽군요. 중국역사상 선례가 있습니다. 송대의 범중엄은 "침묵하고 사느니 할말 하고 죽겠다"는 태도로 평생 세 차례 폄적을 당했죠. 첫번째 송별에 친구들이 "아주 빛난다", 두번째는 모두가 "또한 빛난다", 마지막에 "더욱 빛난다"라고 말했고, 그 또한 웃으며 "나는 앞뒤로 세 차례 빛났구나"라고 대답했죠. 바로 오늘날의 류샤오뽀가 그러합니다.
 
허웨이팡贺卫方: 얼마 전 어떤 해외 미디어에서 전화인터뷰로 Mr. Hsiao-po Liu의 11년 판결에 대해 묻더군요. 제가 떨뜨럼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이렇게 묻더군요. "11년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요?" 제가 반문했습니다. "그럼 3년이면 적당하단 말인가요? 전혀 죄가 없는 사람에게 하루도 지나친 것이고, 하루치 죄도 억울한 겁니다. 게다가 당신은 정말로 그가 감옥에서 11년을 채울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량원다오梁文道: 류샤오뽀를 "이견분자"라고 하는데, "이견분자"가 무슨 말인가요? 정상적인 사회는 원래 여러 상이한 의견들이 있는 법. 저는 홍콩, 대만, 미국 등지에서 지식인이 용감하게 "이견분자"를 자처하고, 차이를 표방해 온 것을 봐왔습니다. 그러나 미얀마, 이란, 중국에선 어찌하여 "이견분자"로 지목되는 게 죄명이 되는 걸까요? 오직 하나의 의견만을 정견으로 허용하는 국가에서만 류사오뽀와 같은 "이견분자"가 나올 수 있는 거죠.
 
궈위화郭于华: 08헌장이 표명한 것은 시민의 가장 기본적인 정단한 권리의 요구이며, 소프트한 개량의 방식으로 사회적 진보를 추진할 것을 제창하였습니다. 상식을 말한 게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요? 설사 완전히 틀린 말이라 하더라도 말로 죄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류샤오뽀의 유죄를 선언한 것이야말로 진정 국가정권(의 합법성)을 전복시키는 죄가 되며, 사회의 양심과 인류문명에 대한 도전입니다.
 
왕샤오위王晓渔: 저는 인터넷 봉쇄를 뚫을 수가 없고, 중국의 매체에서는 관련보도를 볼 수 없습니다. 저는 폭력을 행사할 힘도 없는 서생이 글 몇 편 때문에 감옥에서 11년을 썩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소수의 적대세력이 만들어낸 헛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위대하고 빛나며 올바른 국가에서 어떻게 법치를 위반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요? 여러 선량한 진상을 알지 못하는 군중들은 눈을 크게 뜨고 시비를 명확히 살펴 헛소문에 미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뚜샤오전杜小真: 사상과 문제제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건, 오늘날 사상과 언론자유라는 현대정치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적인 시민권리에 대한 모욕이자 도전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군요. 게다가 08헌장은 거기에 서명하지 않은 제가 보기에도 완전히 선의로 건의한 내용입니다. 만약 이조차도 용인할 수 없다면 정말 비관적이군요. 저는 류샤오뽀의 일부 관점을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견해를 발표할 자유는 절대로 보호받아야 합니다.
 
cuiweiping 리 선생님의 전화를 찾고 있던 중입니다. RT @ananda_tong: @cuiweiping 리쩌허우李厚 선생의 견해를 물어봐 줄 수 있나요?  / (이후 소식이 감감.)
 
리인허李银河: 며칠 있으면 2010년이 되는데, 류샤오뽀의 판결 소식을 들으니 마치 1910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네요.
 
주쉐친朱学勤: "나는 당신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관점을 발표할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겠습니다." 이것은 문명의 상식이며 법치의 기본입니다. 말을 죄로 다스리면 문명이 설 곳이 어디 있을까요? 헌법이 설 곳은 어디 있을까요? 최고법원이 개입하여 이 사건을 기각하고 문명을 보호하며 헌법의 존엄성을 보호할 것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자장커贾樟柯: (류샤오뽀 판결에 대해) 이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무척 상심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요?
 
황지쑤黄纪苏는 메일로 자기 견해를 보충: 류쌰오뽀의 정견에 저는 대부분 동의하지 않았고 지금껏 서로 좋은 말이 오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을 죄로 다스리는 행위는 옳지 않아요. 타당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으며 더 이상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레이이雷颐: 말을 죄로 다스리는 행위에 반대합니다. 이것은 국가 문명의 고하를 가르는 중요한 표준의 하나입니다. 
 
mranti 모莫 부인의 고견 RT @ripleyyu: 추이 선생의 인터뷰를 읽으니, 몰래 손가락질하며 전화를 건 사람(추이웨이핑)을 저주하는 한편 양방 모두에 죄를 짓지 않는 견해를 짜내느라 고심하는 여러 유명한 지식인의 얼굴이 떠오르는군요. 저도 조용히 웃음을 터뜨립니다~~
 
mranti 음, 그의 하느님도 중공을 무서워하는군요. RT @cuiweiping: 류샤오펑刘小枫 선생과의 통화, 그는 류샤오뽀의 판결에 관련된 사항을 몰랐고, 인터넷으로 "살펴본 뒤 이야기하겠다"고 했음. / (류샤오펑은 기독교 연구 등에 힘써왔음)
 
우쓰吴思: 저는 언론자유에 관한 여러 관점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저는 득실을 계산하고 싶습니다. 노자의 "만물은 덜면 더 이익이 되는 듯하고 더 보태면 손해가 되는 듯하다"는 말처럼, 무슨 일이든 과도하면 누가 손해이고 누가 이익을 보는지 뒤집어서 살필 필요가 있죠.
 
장이우张颐武(북경대 중문과 교수) 선생과의 통화, 그는 류샤오뽀 판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다른 쪽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대답. 예를 들어 샤오선양(연예인, 자오번산의 제자). 추이웨이핑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라도 듣고 싶다고 묻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라고 대답.
 
cuiweiping 최고는 언제나 마지막에~ RT @darkma1978: 오늘의 최고 트윗^_^RT @cuiweiping: 장이우(북경대 중문과 교수) 선생과의 통화, 그는 류샤오뽀 판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다른 쪽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대답. 예를 들어 샤오선양(연예인, 자오번산의 제자). 추이웨이핑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라도 듣고 싶다고 묻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라고 대답. 
 
류쥔닝刘军宁: 기대도 없고 절망도 없다.
 
mranti 량원다오가 연예인 장이우를 평론。RT @leungmantao: 장이우가 드뎌 중공의 가장 이상적인 국민 모델을 생생하게 시범 보였군. 연예인 샤오선양만 알고 류샤오뽀를 모르다니. 오늘날 중국은 정말 "어찌 의를 말하는가"(맹자 구절 비틀기)의 포스트모던한(장이우의 이상한 "중국식" 포스트모더니즘도 비꼬면서) 견유의 낙원이롤세.
 
장리판章立凡: 1. 헌정 민주는 장엄한 역사의 약속이며, 사회적으로 집정당의 합법성을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속죄의 통로이다. 올해 크리스마스에 권력의 오만과 편견은 재차 통로를 막아버렸다. 2. 역사적으로 계속 신뢰를 상실했으며, 현재의 경제, 정치적 개혁과 법제 건설이 전면적으로 역행하고 있으며 사회적 충돌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3. 현실 판단력을 상실하여 역사를 후진시켜 자살로 몰아간다. 비록 나는 혁명을 사랑하지 않지만, 이미 뇌가 뭉개져 구할 수 없는 수준임을 확인시켜 줬다.
 
천자치陈家琪: 우리에게 죄의 증거 및 그 헌장과 판결문을 보여주세요. 그것들을 보기 전까지 할 말이 없습니다.
 
쉬지린许纪霖: 중국에서는 인민폐로 수갑을 열 수 있으니(얼마전 절도혐의범의 사망에 대해 경찰은 지폐로 수갑 열어 신발끈으로 자살했다고 발표), 언론이 국가 정권을 전복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말은 아닐 듯. 진상을 알지 못하는 국내외의 구경꾼들이 제대로 확인할 수 있도록 저는 정중히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1. 예전 "571공정개요"(린뱌오의 무장기의 관련문서)를 비판했던 경험을 살려, 모두에게 해로운 "08헌장"을 대중에게 공개하여 반면교사로 인민을 교육시킬 것. 2. 류사오뽀가 감히 간이 부어서 상소한다면, 사인방을 공개심문한 것처럼 2심은 전세계에 생중계를 하고, 여러 군중들이 그의 진면목을 똑똑히 알게 할 것.
 
류칭펑劉青峰: 지금 저는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베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기소입니까! 한 인간이 그러한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불의의 극치입니다. 나는 양심있는 사람들이 그 판결을 읽을 것을 촉구합니다. 드레퓌스가 그러한 죄목으로 악마도에 유배되는 어처구니없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보게 되면 분노와 반감 때문에 그들의 가슴은 떨릴 것입니다."
 
천자치陈家琪의 메일: 기(속임)은 일부러 모른 척, 만(감춤; 합쳐서 기만)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 습관적인 기만 속에서 무엇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예술세계> 11월호 표지는 고르바쵸프와 에리히 호네커가 뜨겁게 포옹하는 장면이었고 당시 베를린의 담장이 무너지기 한달 전이었죠. 고르바쵸프가 호네커를 포옹한 후 이렇게 말했죠. "그는 마치 아무 것도 더 이상 모르겠다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우리가 호네커처럼 어리석고 우둔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장훙张闳: "이 나라에서, 한 정직한 사람의 유일하게 적합한 장소는 감옥 뿐!" 이것은 톨스토이의 말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도대체 누구 더 부자유스러운가? 이다. 정직한 죄수인가 아니면 도둑놈 상판의 옥졸들인가? 류샤오뽀를 유형의 감옥에 가둔 것과 동시에 그들은 자신을 무형의 정신감옥에 가둔 셈이다. 내가 보기에 정말로 고민하고 불안한 쪽은 그들이다.
 
쑨진孙津: 샤오뽀는 총명하고 민감한 사람이다. 친구들에게 의리 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도덕적인 양심의 정확성을 믿고 있는 것 같다. (쑨진 박사는 베이징 사범대학 정치학 연구소 소장, 致公党(화교 위주의 정당) 베이징 부주임, 류샤오뽀와 동문 동창)
 
리다퉁李大同: 이것은 중세기적인 심판이다. 이것이 폭로한 것은 바로 심판자 내면의 공포 -- 사상과 표현에 대한 공포이다.
 
루야오강卢跃刚: 나는 08헌장의 서명자가 아니지만, 그 속의 기본 원칙과 바램에 동의한다. 나는 말로 죄를 묻는 방식에 반대하며 혐오한다. 류샤오뽀에 대한 기소문과 판결문을 읽어 보니, 이미 폐지된 "악공죄"(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을 악독하게 공격하는 죄)와 "반혁명죄"가 연상되었다. 역사가 후퇴하는지 진보하는지 알 수가 없다.
 
cuiweiping RT @wuzhiwo: @cuiweiping 독일 총리 메르켈 : 류샤오뽀의 고소와 판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상소 과정에서 11년의 유기징역 판결이 "수정"되기를 바란다. 또한 중국은 다른 영역에서 많은 진보를 이뤄냈지만 언론자유와 출판자유에서는 엄격한 제한을 유지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예팅팡叶廷芳: 공산당의 주관자들은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아보길 바란다. 그 옛날 사마천, 손빈, 갈릴레이, 조르다노 브루노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모두 우쭐대며 "강산과 국가사직의 보전을 위해; 하느님의 안녕을 위해.."라는 말을 주절댔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침전을 거친 뒤 사마천, 갈릴레이 등의 글은 찬란히 빛을 발하는데, 우쭐대던 그들은 어디 가 있나요? .. 하나같이 역사의 치욕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덩샤오망邓晓芒: 거꾸로 가는 세상 비분이 사라지지 않네! 한 사람이 몇 마디 말을 썼다고 11년 옥살이를 하다니 지금이 어느 시대란 말인가? 마치 "문혁"이 되돌아온 것 같다! 일찍이 '문혁은 지나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문혁 속에 있다'고 말한 적 있는데, 보아하니 불행히도 맞는 말인 듯하다.
 
허화이훙何怀宏: "왜 경제총량이 세계 제2를 바라보는 대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설마 중국이 부당하게 이미 아주 작은 범위 안에 갇힌 언론과 사상에 의해 "전복"된다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중국은 여전히 너무 취약한 셈.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면, 강대한 정부가 자신의 문명과 자신감, 그리고 시민의 기본권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길 바란다."
 
라오춘老村: 류샤오뽀 사건이 만약 하나의 개별사안이 아니라면, 그건 우리가 일찍이 거쳐온 "말로 죄를 묻는" 시대가 실질적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건은 모든 각성된 공화국 시민의 경각심을 일깨울 만한 일이다.
 
왕캉王康: 우리의 모세는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샤오뽀는 가장 최근의 한 사람이다. 우리의 모세를 너무 적막하게 하지 않아야 중국에 희망이 있다. 이 신념은 류샤오뽀에 귀속된다.
 
장닝张宁: 화해로운 사회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말을 허용하는 사회여야 한다. 아무리 말이 틀렸고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화이부동"(차이를 동반한 화합)이라지 않는가. 말도 못하게 하고, 11년의 중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말의 댓가를 경고하여 "화이우동"(동일성을 강요하는 화합)을 추구하게 강요한다면, 사회는 더욱 손상받게 될 것이다. 사회적 위기의 뿌리를 깊숙이 파묻는 것이다.
 
저우바오숭周保松: 저는 류샤오뽀 선생 편에 서 있습니다. 저는 모든 중국인, 특히 중국의 지식인이 이쪽 편에 서기를 바랍니다. 모두 함께 다른 한쪽의 허약함을 보여줍시다. (홍콩 중문대학)
 
천이중陳宜中: 경제적으로 우뚝 솟은 대국이 만약 문자옥조차 타파할 수 없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정치 도덕적인 난쟁이라는 조롱을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중국인의 눈높이가 어찌 여기에 머물 수 있겠는가? 문화적 차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정치 문명은 수준차이가 여전히 존재한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저등한 정치 문명"이라는 국치를 제거할 수 있을까? (대만 중앙연구원)
 
아이샤오밍艾晓明: 자유를 막기 위해 설치한 지뢰에 류샤오뽀는 맨몸으로 돌진했다. 11년의 판결은 자유 사고의 정신을 생매장한 것. 침묵은 용인하고 공모하는 것이며, 양심을 버리고 희망을 포기하여 자손만대가 거짓 속에 구차히 살게 하는 짓이다. 중국인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면, 어떻게 <카틴>이나 <타인의 삶> 같이 민족 공존을 말하는 예술작품이 탄생할 수 있겠는가?

2010년 1월 1일 추가


우량吴亮의 이야기: 2006년에 류샤오뽀가 감시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쑤저우에서 보자고 문자를 보냈다가, 그 회의가 아주 번거러워졌던 적이 있었죠. 나중에 호텔 종업원의 말에 따르면, 그날 류샤오뽀를 미행하던 경찰이 일곱이나 되었고, 우리 회의 참가자 명단을 내놓으라고 종업원들을 압박하여 호텔 사장이 엄청 겁먹었다고 하더군요.


리칭시李庆西: 김정일(金二胖)은 미국 시민을 인질로 잡아 미국과 흥정을 하는데, 우리는 자기 국민을 인질로 미국과 교역을 하는군요.


주젠강朱健刚: 당과 정부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강대국으로 굴기하고 있는 이 시점에 이토록 잔인한 수법으로 아무런 무기도 없는 반늙은이를 징벌하는 사건이, 만약 1949년에 일어났다면 그래도 이해할까, 2009년에 일어난다는 건 자신을 모욕하는 행위이며 오히려 상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드러내는 셈이다.석방할 것을 건의하며,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강한 국력과 당의 인자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저우펑周枫: 류샤오뽀 사건을 이처럼 겁없이 처리하는 건 분명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도덕상의 죄악을 경제적인 발전, 강한 국력 등으로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중국인이 정말로 이렇게 천박하게 살았던가? 도덕감의 상실은 중국인에게 가장 서글픈 점이다. 그러나 류샤오뽀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으로 볼 때 그래도 희망은 있어 보인다.


류쑤리刘苏里: 인터뷰는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점도 있습니다. 나쁜 점은 기술적인 측면(메일을 사용한다든지 하는)이나 합리성의 측면, 즉 저는 아직 완전히 생각을 정리하지 못햇습니다. 나머지는 다 좋아요! 가장 좋은 건, 모든 인터뷰이에게 영혼을 씻을 기회를 좋다는 점이죠. 저는 지지합니다.


겅잔춘耿占春: 류샤오뽀의 관점을 받아들이든 말든, 그 때문에 수감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건 아주 보편적인 견해입니다. 어떤 사람이 글 몇 편으로 영웅이 되지는 않아요. 그런데 말 때문에 벌을 받게 한다는 건 역사에 크나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짓입니다. 조국이여, 용감히 말하는 사람을 가두지 말아요, 그렇게 하면 더욱 허약해질 뿐입니다. 저는 관대함으로 강대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디吴迪: 백성의 입 단속하는 것이 물길을 막는 것보다 그 폐해가 심하다. 본보기로 삼을 만한 게 멀리 있지도 않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을 기억하라.(防民之口,胜于防川。殷鉴不远,在柏林墙倒之日。)


런젠타오任剑涛: 국가가 권력이성으로 자기 국민의 권리이성을 대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가가 비이성적인 폭력으로 국민을 대한다면, 국민은 똑같이 폭력으로 국가를 대할 수밖에 없다.


베이다오北岛: 말을 빌미로 형벌을 가하는 것은 다시금 고루한 제국의 그림자를 느끼게 한다. 30년 전의 비슷한 심판이 생각난다. 우리가 이 제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를 감동시킨 것은 류샤오뽀와 (그의 부인) 류샤의 사랑이다. 그들의 사랑은 스스로 타인의 운명을 주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미움을 초월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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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26일 저녁 7시경 트위터를 통해 아이웨이웨이 공작실에서 다큐멘터리를 공개하였다. 전체길이 78분이며 보다 편리한 다운로드를 위해 6개의 파일로 쪼개서 배포하였다. 바로 예전에 포스팅한 바 있는 사천성 원촨대지진 사망학생 조사(개인이 지진 사망학생 조사에 나서다)의 결과물로 내놓은 영상이다. 아이웨이웨이는 이 일과 관련하여 체포된 동료의 무죄를 증언하기 위해 기다리다가 공안들에게 감금되고 구타를 당해 머리를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고 한다. 독일까지 날아가 꽤 큰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9월 즈음에 들었는데, 무사하니 다행이다.

다큐멘터리의 제목인 <花脸巴儿>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일단 구절 자체는 사천성의 민요인 "花脸巴儿,豆腐渣儿,娃娃砸到溅泪花儿,爹娘不见撕心肝儿."에서 따왔다고 밝히고 있다. 바깥에서 놀다 보면 콧물 범벅에 볼이 빨갛게 된 귀여운 아이의 얼굴을 가리키는 말이겠다. 바로 이어지는 "두부짜기"는 부실공사로 인해 지진 사망자가 늘어난 것을 빗댄 말이다. 보통 "두부짜기 공정"이란 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경극의 얼굴분장을 가리키는 "花脸"을 생각해 보면 말이 계속 바뀌는 정부관료들을 빗댄 것일 수도 있겠다. 만약 한국에서 개봉된다면 <화검파아>라고 하기는 애매하고, 의역으로 다른 제목을 달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무쪼록 내년도 다큐멘터리 영화제 등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이 영화를 주목해 주면 좋겠다.

영상을 다운받을 수 있는 링크는 다음과 같다.
곧 봉쇄될 가능성이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미리 다운을 받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이웨이웨이 다큐멘터리 <화검파아 花脸巴儿> 다운로드 링크

http://ow.ly/Q27s (namipan, raysource용)

http://m.jteet.com/i/u6y (당나귀)

만약 디비디로 받아보고 싶은 사람은 지메일(xuesheng512@gmail.com)로 주소와 이름, 전화번호를 보내면 된다. 해외배송이 가능한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배송정보와 간단한 요구사항을 보내도 문제없을 듯하다. 전작인 <老妈蹄花>은 이미 배송이 시작되었고, <花脸巴儿>의 경우 설 즈음에나 발송이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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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80년대 2009. 11. 25. 00:01

중국의 80년대가 가지는 현재적인 의미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을 목표로 작가, 예술가, 학자, 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80년대의 인물들이 모였다. 2006년 5월 출간된 《80년대 중국과의 대화》는 그 해에만 수차례 재판을 찍을 정도로 호응을 얻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주간지 《신주간》新週刊 의해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출간 이후 각종 매체에서 앞 다퉈 관련 인터뷰와 비평을 소개했으며, 80년대를 주제로 한 다양한 토론회가 조직되고 책에 등장하지 않았던 다른 80년대 주요인물에 대한 인터뷰가 기획되거나 비슷한 주제의 텍스트가 쏟아져 나와 일시에 "80년대 회고 붐"이 일어날 정도였다.


80년대 중국과의 대화
10점


베이징을 기점으로 한 이러한 80년대 회고 붐은 그에 앞서 중국을 휩쓸었던 1930년대 상하이 회고 붐과 여러 면에서 대별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경제 중심으로서의 상하이와 정치문화 중심지인 베이징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평가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옛 상하이에 대한 회고는 경제적인 측면, 즉 물질문명을 둘러싼 중국의 근대화가 어떤 기원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90년대적 관심의 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그것의 반대급부로 과도한 소비주의를 낳게 되는데, 이에 대한 반성의 계기로 80년대라는 시좌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태초의 혼돈을 깨고 덩샤오핑이라는 만물의 어머니가 세상을 재구성하던 시기, 아직 대지와 바다는 구분되지 않았고 모든 것의 경계가 흐렸지만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충만했던 시기가 이른바 중국의 80년대였다. 대중문화와 물질만능주의의 만연, 전문화 현상으로 인한 사회 영역 간의 고립과 소외에 직면한 90년대 이후의 중국을 바라보면서 이들은 다양한 가능성이 충돌하며 이상과 열정을 채워가던 신화적 공간으로 "80년대"를 재호명한다. 매체에 의해 부풀려진 면이 없지 않지만, 90년대와는 다른 가능성의 탐색 기제로 80년대를 돌아보고 평가하는 것이 지금의 중국에서 가지는 의미는 작지 않다.


80년대 중국은 두 가지 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0년 동란으로 불리는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후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태도로 세계를 대면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와 함께 가치관과 사유방식에서도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들은 신체에 각인된 문혁의 이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음영을 털어내고 새로운 사유방식과 문화를 재건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된다. 우리로 치면 386세대라고 할 수 있을 이들이 80년대라는 시기를 어떻게 보내왔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어떠한 변화를 시도하였는지를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 자젠잉은 80년대를 "당대 중국의 낭만시대"로 규정한다. 90년대 이후가 경제적 이익이 유일한 목표인 시대라면 80년대는 이상과 정신적 열정이 들끓던 시대였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시각은 그녀가 책의 뒷표지에서 제시한 80년대와 90년대를 특징짓는 키워드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80년대 : 격정(激情), 빈곤(貧乏), 열성(熱誠), 반항(反叛), 낭만(浪漫), 이상주의(理想主義), 지식(知識), 단절(斷層), 촌스러움(), 멍청함(), 허풍(), 경박함(膚淺), 광기(瘋狂), 역사(歷史), 문화(文化), 순진(), 단순(簡單), 사막(沙漠), 계몽(), 진리(), 팽창(膨脹), 사상(思想), 권력(權力), 상식(常識), 사명감(使命感), 집체(集體), 사회주의(社會主義), 엘리트(精英), 광장(廣場), 인문(人文), 배고픔(饑渴), 화끈함(火辣辣), 우정(友情), 논쟁(爭論), 지식청년(), 뒤늦은 청춘(遲到的)



* 90년대 : 현실(現實), 이익(利益), 돈(金錢), 시장(市場), 평화로운 변화(和平演變), 정보(信息), 새로운 공간(新空間), 솔직(明白), 처세(世故), 유행(), 개인(個人), 권력(權力), 체제(體制), 성형수술(整容), 조정(調整), 총명(精明), 불안(焦慮), 상업(商業), 소란스러움(喧囂), 대중(大衆), 분노한 청년(), 자본주의(資本主義), 신체(身體), 서재(書齋), 학술(學術), 경제(經濟), 주변(邊緣), 상실(失落), 접속(接軌), 국제(國際), 다원(多元), 가능성(可能性)



이런 식의 배치가 노리는 것은 80년대와 90년대를 각각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으로 양분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각 시기에 주로 사용되었던 단어들을 통해 간명하지만 효과적으로 변화된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러한 이분법이 "우리가 청춘기를 보냈던 80년대에 비해 90년대는 너무 변했어!"라는 주관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지금 현재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주류가 되어 있는 80년대의 총아들이 자신의 위치를 특권화한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들은 사상적 속박에 구속되어 있던 문혁 시기와 선을 긋는 한편 물질적 소비주의 시대로 특징되는 90년대와도 차별되는 초월적 공간에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책의 발간 이후 비교적 광범한 사회적 반응을 불러왔던 이유 중 하나로 지금 중국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특정 계층이 이 책을 통해 개인적 기억을 되살리고 자신들의 역사를 긍정하려 했다는 비판이 거론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매체를 움직이는 것 또한 이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바로 그 세대이니 말이다.



모든 사람의 기억이 발언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환기되고 다른 많은 기억들은 억압된다. 따라서 이 책에 쏟아진 많은 비평은 "누구의 80년대인가?", "11인의 대담자는 어떤 기준에 의해 선정된 것이며, 그들이 80년대 중국을 대표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모아지고 있다. 그에 뒤따르는 비판은 "평민의식"이나 "하층민에 대한 관심"이 결핍되어 있는 "엘리트주의적인 담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대담자의 구성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긴 하지만)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고 저자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일군의 문화계 인사로 제한되어 있다. 이들 대부분은 문혁 이후 처음으로 시행된 대입학력고사를 통해 대학교육을 받았고 미국 유학을 통해 친분을 쌓았으며 지금 현재 문화계 각 분야에서 성공한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80년대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려는 기획이 아니라는 저자의 잇단 해명에도 불구하고 특정 영역에 국한된 엘리트들의 목소리만 담은 것이라는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과연 이 책의 대담자들이 중국의 80년대에 대한 기억을 대표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는 왜 베스트셀러 작가인 왕숴王朔 아닌 아청이, 장이머우가 아닌 톈좡좡이, 자장커의 조력자에 불과한 린쉬둥이 대담자로 선택되었는지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80년대의 영광을 정말 제대로 추억할 수 있는 문화계의 성공한 엘리트라면 장이머우가 제격 아닌가? 거침없는 문체로 대중을 사로잡은 왕숴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이런 면에서 질문을 "누가 기억하는가?"에서 "무엇을 기억하는가?"로 옮길 필요가 있다. 평민, 혹은 대중이라는 신분이 정치적 올바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담자의 사회적 신분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반성적 거리를 가지고 자기 세대를 구성하는 인자들을 분석하며 물려받은 유산을 활용하는지를 세심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은 객관적이고 형해화된 형태로 깔끔하게 정리된 담론에서는 파악하기 힘든 그 시절 중국인들의 개인적이고 평범한 일화를 통해 중국의 감춰진 속살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대담은 원경에서 자신들이 포함된 풍경조차 완전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구성한 것도, 클로즈업으로 다가가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경험을 구술하는 것도 아니다. 20년이라는 시간 간격은 카메라 렌즈에 비유하자면 시야를 횡적으로 확장시키는 광각렌즈도 아니고 주변 풍경을 싹둑 잘라내고 대상만을 강조하는 망원렌즈도 아닌 50mm 표준렌즈의 시각을 가져다준다. 그러면서도 그 렌즈를 활용하는 각각의 개성에 따라 보다 멀찍이 떨어져 폭넓은 풍경을 보여주거나 지극히 세부적인 문제에 들이대기도 한다. 바로 지금 시점이 80년대를 돌아보기에 적절한 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보다 포괄적인 시야가 확보되겠지만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판별하기는 힘들게 된다. 보다 이른 시기에 이런 시도가 기획되었다면 특정사건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이 가능했겠지만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지닌 의미를 드러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저자 또한 "왜 지금이 80년대를 회고하기에 적절한 시기인가"를 설명하며 현재와 80년대의 거리를 영화의 미디엄 쇼트로 비유한 바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대담자가 저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 우리에게 딱히 단점으로 작용할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80년대 전체에 대한 거대서사를 그리려는 시도가 아니라, 상이한 활동영역과 기질을 지닌 개인의 제한된 목소리와 기억을 들려주고자 한 것이다. 공식화된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적이고 은밀한 기억들은 그러한 친밀한 관계 속에서 보다 자연스럽게 발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경험을 공유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이러한 글을 통해 그들이 술자리에서 편하게 나누는 대화를 엿듣거나 밤새 논쟁하던 그 시절을 추체험할 수 있다. 문혁을 막 벗어난 후, 혁명의 열정을 그대로 가지고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내려는 의욕과 에너지가 분출되던 시기가 80년대였다. 90년대는 그러한 열정의 질적 변화를 특징으로 하지만 한편으로는 80년대가 축적한 지식과 경험이 성숙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국의 80년대가 우리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킬지언정 지금의 한국적인 상황에 딱 들어맞는 뭔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하기 위한 경로의 하나로 80년대식 뜨거운 피를 구성하는 기본인자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둘 필요는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80년대"는 1978년의 개혁개방에서 1989년 톈안먼 사건까지의 역사적 시간을 지칭한다. 그러나 대륙에서 출간된 원저에서는 중국 정부에 의해 금칙어가 된 "톈안먼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어 대부분 "89년" 혹은 "80년대 말" 등의 에두른 말로 마감하곤 했다. 그 외에도 주로 공산당이나 마오쩌둥을 직접 거론하여 비판한 내용은 대륙판에서 삭제되었고, 문제의 소지가 있는 미묘한 단어들은 다른 용어로 대체되어 있었다.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홍콩판(홍콩 옥스포드 출판사, 2006)을 참고하여 대륙판에서 삭제된 본문내용을 최대한 되살렸다. 재미있는 것은 삭제에 대한 감각이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인데, 이런 비판도 가능할까 싶은 문장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가 하면 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단어나 문장은 경우에 따라서는 서너 페이지씩 통째로 잘려나가곤 했다. 이러한 대륙판 원문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삭제된 부분을 표시하는 방식을 강구하였으나 편집과정에서 반영되지 못해 아쉽다. 또한 삭제된 분량이 너무 많아 대륙판에서는 출간을 포기한 "류펀더우" 장은 저작권 문제 등으로 인해 한국어 번역본에 실리지 못했다. 적절한 시기에 출판사 홈페이지를 통해 해당 장의 번역을 공개하도록 하겠다.


이 책의 번역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말투와 목소리를 표정 없는 글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개념과 논리의 좌표만 잘 잡으면 일관된 논지로 흘러가는 이론 저작과는 달리 곳곳에서 동문서답, 옆길로 새기, 토속어와 그 시기의 유행어, 속어, 관용어 등이 튀어 나와 번번이 애를 먹었다. 능력이 닿는 한 원문이 전하는 분위기와 그들의 개성이 한국어로 잘 표현될 수 있도록 고심했다. 번역어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를 감수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말로 풀기도 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쓰는가, 어떤 맥락에 쓰는가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게 대화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어와 한국어의 무게 차이도 고려했는데, 잘못 가늠한 무게에 대해서는 많은 조언을 부탁드린다.) 각주는 최소화했으며 앞뒤 문장의 조응에 의해 맥락이 드러날 수 있도록 처리했다. 여러 장벽에 막혀 번역을 끌었지만 그것의 결과로 독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실제 '현장분위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바랄 나위 없을 것 같다. 그래야 예정된 일정이 한참 지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준 주승일 차장과 그린비 편집부에게 덜 미안할 것 같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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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는 2008년 금융위기에 끝났다!

중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인 왕후이의 신작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别求新声)』가 출간된 이후 <신경보(新京报)>(2009년09월05일자)에 서 기획한 인터뷰를 소개한다.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는 『독서』잡지의 주간을 맡은 10여 년 간의 인터뷰를 모은 것으로 근대성 비판, 전지구화, 사상사 및 중국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전해들을 수 있다. 『뉴레프트리뷰』와의 문답(신비판정신), 페리 앤더슨(신좌익, 자유주의, 사회주의), 가라타니 고진(동아시아 공동체의 가능성), 코모리 요이치(탈정치화된 일본정치와 수사학), 레오 어우판 리(문화연구와 지역연구), 미조구치 유조(중국 없는 중국학이란 무엇인가), 벤저민 앨먼(“누구”의 사상사인가) 등 다양한 학자들과의 이 대담을 모은 이 책은 곧 한국어로도 만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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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이,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别求新声)』, 북경대출판사, 2009년 3월


『탈정치화의 정치: 단기 20세기의 종결과 90년대』에서 밝혔듯이, 그는 "90년대"라는 말과 "1990년대"를 조금 다르게 쓰고 있다. "1990년대"가 단순한 시간개념이라면, "90년대"는 시장경제의 형성과 그로 인해 일어난 복잡한 변화를 그 특징으로 하는 가치개념을 함축한 용어이다. 그는 '"90년대"가 1989-1991년의 세계적인 거대한 변화를 거치면서 탄생했다."고 판단한다. 밖으로는 공산권의 몰락, 안으로는 천안문사건 등을 염두에 두고 이전 시기와는 다른 맥락에서 90년대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90년대”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시장 시대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새로운 특징이 국가와 사회의 면모를 바꿔 놓았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이 낯선 시대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007~2008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90년대”가 멀어져 가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는 한 시대의 끝일 뿐 아니라 한 사조의 종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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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이와의 인터뷰
_ 왕후이는 학술계에서 풍향계의 역할을 맡아온 인물이다. 특히 1996년 『독서』잡지의 주간을 맡은 이후 매번 논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그의 학술 : 학술의 변화는 우연적이면서 필연적인 것이었다

Q: 당신의 글은 제공되는 정보량이 굉장히 많고 제시되는 문제 또한 아주 복잡합니다. 일전의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도 그렇고 새로 출간하신 인터뷰집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글을 읽고 쓰시는지요?
A: 연구하는 방식이야 다들 비슷비슷하겠죠. 먼저 기본적인 자료와 관련 연구성과를 읽은 후 문제의식이 심화됨에 따라 발견되는 새로운 자료들을 읽어 갑니다.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는 집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죠. 언급되는 문제나 관련된 분야가 다양하여 끝없이 수정해야 했습니다. (특별한 점은 없고) 그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계속하여 독서와 사유를 계속하도록 자신을 독려하고 여러 대화상대를 찾으려 합니다.

Q: 문학평론으로 학문을 시작하셨습니다. 박사논문인 <절망에 대한 반항>은 루쉰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쳐 지금까지도 전범적인 작품으로 읽힙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 사회 정치 경제 비판과 역사연구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이번에 출간하신 『다른 목소리를 찾아서』의 인터뷰 또한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요, 원래의 학술적 배경과는 상당히 멀어진 것 같습니다.
A: 그렇습니다. 박사과정을 졸업한 뒤 루쉰 연구는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루쉰으로 박사논문을 쓰면서 그 시대의 사상과 사회적 변천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캉유웨이, 옌푸, 량치차오, 장타이옌 등은 모두 루쉰을 연구할 때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요, 지나고 보니 이제는 이들이 제 연구대상이 되어 있더군요. 중국 사상 뿐 아니라 루쉰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서구와 러시아의 사상가, 문학가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일의 니체와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대표적이죠. 제가 중국사회과학원 박사과정에 있을 때, 철학, 종교, 문학, 역사, 사회학 등 전공이 제각각인 박사반 20명 정도가 한 건물에서 살았어요. 그 중 절반 정도는 경제학과 관련된 전공이었죠. 동학들끼리 틈만 나면 서로 토론하고 배우면서 지냈어요. 당대 중국에 대한 저의 관심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격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사조 : 중국을 사유하려면 이론적 정합성도 필요하지만 실천적인 논쟁도 필요하다

Q: 선생님의 연구 중 상당 부분이 20세기 중국사상사에 대한 것입니다. 각종 이론들 간의 긴장관계를 파고들며 20세기에 대한 사유를 진행하고 계신데요, 그간 어떠한 소득이 있으셨는지요?
A:  시대마다 그 시대의 사회 사조가 있습니다. 단, 이론과 실천이 맺고 있는 관계는 해당 시대 자체에 가장 풍부하고 깊이 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사” 시기의 백화문 토론이나 동서문명 논쟁, 사회주의 논쟁 등에서 30년대의 중국사회사 논쟁 및 뒤따라 전개된 역사연구와 이론 논쟁 등 거의 모든 이론과 논쟁이 사회적 실천의 와중에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한 반향이 새로운 이론적 토론으로 발전해 갔구요. 이런 식의 흐름이 칠팔 십년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Q: 80년대 이후 어떠한 변화가 있었나요?
A: 80년대 중반부터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론적인 논쟁이 갈수록 약화되었죠.  80년대 중후반 이후에 사회주의 역사에 중대한 변화가 나타나면서 사회범주 내부의 이론 논쟁과 정치 사회의 변화가 맺고 있던 관계가 변경되었던 듯 합니다. 이론적 논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80년대 중반 이후 대규모로 이루어진 서양이론의 번역과 그로 인해 수입된 관련 사조는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 시기의 이론 논쟁과 비교해 볼 때 이론성이 상당히 약화되었고 사상이 변화하는 방식도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Q: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A: 20세기의 이론 논쟁은 특정한 정치 과정 속에서 전개되어 왔는데, 많은 부분에서 전환이 일어난 오늘날은 사상 논쟁이 정당과 국가의 테두리에 더 이상 구속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상 논쟁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사회형태의 전환 과정에서 이미 발생한 정치적 전환을 홀시할 수 없습니다. 90년대의 사상 논쟁은 이런 의미에서 앞서 언급한 그런 논쟁과는 완전히 양상을 달리합니다. 그렇다고 이데올로기의 강도가 약해진 것도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은폐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데올로기가 “허구적 의식”이라는 걸 누구나 안다면 진정한 이데올로기가 아닐 테니까요.

사조의 종결 : 두 차례의 위기가 사조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Q: 당신 또한 90년대 이후 이데올로기 논쟁에 개입했습니다. 1997년  <오늘날 중국의 사상 동향과 근대성 문제>가 발표된 후 많은 토론과 논쟁을 일으킨 바 있는데요, 지금 되돌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A: 그 글에서 저는 계몽주의, 민족주의, 신유가, 포스트모더니즘 등 중국 사상계의 모든 유파를 분석했습니다. 주된 논지는 외면상 굉장히 다르고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각각의 사상이 공유하고 있는 전제, 특히 그들이 근대화 이데올로기와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관련 때문에 당대 중국사상이 당대 문제를 사고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생각합니다. 당대 중국은 이미 전지구화의 과정 내부에 들어와 있습니다. 따라서 시각을 새롭게 조정해야만 현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논문이 전지구화와 근대성 이데올로기에 대해 견지한 비판적 태도는 당대 문제를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돌파구를 열어 주었습니다. 반발은 예상했지만 그토록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Q: <오늘날 중국의 사상 동향과 근대성 문제>는 많은 논란과 비판을 받았는데, 1997년 동남아 금융위기와 관련이 있습니까?
A: 90년대 중반, 전지구화가 중국 지식계의 화두로 막 떠오를 때 금융위기가 닥쳤습니다. 당시 저는 황핑(黄平)과 함께 『독서』잡지를 편찬하면서 관련된 논의를 발굴하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국내 학술계에서는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듯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외국과 홍콩의 몇몇 학자들에게 글을 부탁하여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최소한 당시에는 중국 지식계에서 제대로 된 분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 글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면 아마도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금 융위기가 지나자 마자 1999년 코소보 사태가 일어나고, 2001년 “9•11”사건과 그에 뒤따른 아프간 전쟁 및 이라크 전쟁이 발발합니다. 2008년의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90년대의 사조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2008년이 90년대 사조가 끝난 해라고 생각합니다.

Q: 십여 년간 지속된 그 논쟁에서 매체가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A: 기본적으로 매체는 주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문에서 벌어진 사상 논쟁은 특정 논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그들의 틀 안으로 구겨 넣어 논의를 진행하곤 하는데, 이 또한 신문에서 벌어진 “사상”논쟁이 “사건”과 어긋나는 원인의 하나입니다.

사상 논쟁 : 논쟁이 공공정책의 재조정을 촉진시키다

Q: 그 사상 논쟁이 십여 년 간 지속되면서 지식계에 어떠한 공헌을 하였습니까?
A: 90년대 중국 지식계에 논쟁이 지속되면서 일련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정말로 제대로 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비판적인 지식인들입니다. 제가 “비판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주류의 위치에서가 아닌 “다른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전지구화에서 제국주의 전쟁까지, 삼농위기(농촌, 농업, 농민), 의료체제 개혁의 위기에서 생태위기 및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이 일련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중심적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지식인들이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까요? 과거 십여 년의 사상 논쟁을 돌아볼 때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Q: 그렇다면 어떤 논쟁이 아쉽다고 생각됩니까?
A: 두 가지 정도를 들어 보겠습니다. 국영기업 개혁 문제는 2005년 전후에 화두로 떠오른 문제인데, 그 즈음에 큰 틀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일찍이 90년대 중반에 추이즈위안이 러시아의 자발적 사유화를 예로 들어 사유화 과정이 러시아에서 이미 조성되었고 중국에도 곧 닥칠 문제임을 분석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식계에서 주로 떠받들던 방식이 러시아 모델(얼마 후 체코나 폴란드 같은 동구 모델로 변했습니다만)이 어서 그런 식의 분석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태위기의 중시와 발전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입니다. 당시 제가 존경하던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독서』에서 그런 글을 발표할 필요가 없다.그런 건 선진국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 년도 지나기 전에 생태위기의 심각성은 누구나 동의하는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Q: 지식계의 일방향적인 여론이 개혁의 복잡성을 가중시켰다고 보십니까?
A: 과거 십여 년간 삼농문제, 의료체제, 생태위기, 국영기업 개혁 등을 둘러싼 일련의 논쟁은 공공여론의 화제를 변화시켰습니다. 시간단위를 조금 확장시켜서 살펴 보면 이러한 논쟁은 공공정책의 재조정을 촉진시켰습니다. 공공 여론과 정책의 재조정 사이에서 나타난 이런 상호적 관계는 중국 사회에 잠재하고 있는 민주적 가능성과 함께 어떤 불안정한 메커니즘이 존속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2년 전 제가 『독서』잡지를 떠날 때, 삼련서점의 전임 고위간부가 그러더군요. 『독서』가 유발한 논쟁이 너무 많아, 그건 좋은 일이 아냐! 라고 말입니다. 그건 아마도 대부분의 간부들이 품고 있는 생각일 겁니다. 논쟁을 걱정하죠. 그런데 만약 논쟁이 없었다면 공공정책의 제정은 일부 이익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을 겁니다.

Q: 전지구화, 시장화에 대한 90년대 지식인의 낙관적 견해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여러 방면에 관련된 문제이겠지만, 두 가지 점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첫째, 그렇게 맹목적인 낙관이 중국이 마주하고 있는 도전과 위기를 감춰 줍니다. 둘째, 모든 문제, 특히 초창기 30년에 벌어졌던 일들을 “과거”로 귀결시킵니다. 이는 중국이 20세기에 펼쳤던 실험을 전혀 사고할 수 없게 만들며, 또한 중국이 개혁개방의 와중에서 얻게 된 성취를 해석할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20 세기의 역사에서 벌어진 각종 비극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사유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의 역사과정을 간단히 부정해 버린다면 기본적인 역사적 평가에 혼란만 가중될 것입니다. 지식계의 논쟁 중 식민주의에 대한 변호, 제국주의 전쟁을 부추기는 듯한 논조가 생겨난 것도 거의 모두 이런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금융위기 : 위기가 제공한 새로운 사고와 선택

Q: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A: 전세계 사람들이 금융위기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쪽 방면으로는 제 친구들이 저보다 더 깊이 있고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하고 있을 겁니다. 금융위기는 금융의 위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주로 시장 구제, 성장, 수출, 외화 보유고, 증시, 부동산 문제 등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번 위기가 다른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을까요? 새로운 정치적 사유와 방향성을 선택하게 할 수 있을까요?
위기를 수치와 시장 문제로 단순화시키고 위기의 구조적 특징을 간과한다면 그것은 시장의 논리를 철저하게 합리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너지 문제, 생태 위기, 토지 문제, 노동권의 침해, 교육의 불평등,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에 의해 야기된 민족 모순 및 글로벌 경제 관계의 변화 등등, 이 모든 문제는 경제 위기가 단순히 경제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합니다. 위기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일부 경제전문가들의 대책성 해법에 국한되지 않고 금융위기를 둘러싼 더 다양한 논의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위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문제 : 중국의 성취와 어려움을 동태적으로 이해하자

Q: 당신은 논쟁 중에 맹목적으로 외국의 경험을 복제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세계가 연계된 측면에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거듭 강조해 왔습니다. 간단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A: 중국사회는 다양한 사회적 힘과 역사적 전통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변화를 관찰하려면 이렇게 상이한 사회적 힘과 역사적 전통이 주고받는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개혁개방 초기에는 국가가 개별적인 이권들을 초월하여 효과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이른바 중성화된 국가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요? 그것은 사회주의 역사, 조금도 중성화되지 않은 역사에서 탄생한 겁니다. 그러한 역사적 토대 없이 생겨난 국가와 독립적 국민경제 체제는 개혁의 전제가 없습니다. 금융위기를 맞아 중국은 많은 도전과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정은 다른 나라에 비해 양호한 편입니다. 제때에 대처를 잘 했고 또 위기 전에 이미 몇몇 부분에서 조정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삼농문제, 의료체제 문제, 금융체제 부분의 개혁은 모두 위기가 폭발하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조정은 현실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논쟁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혹은 상이한 힘, 상이한 역사적 전통이 힘을 겨룬 결과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성취와 실패는 불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태적인 관계에서 중국의 성취와 어려움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Q: 『현대중국사상의 흥기』는 당나라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대에 걸쳐 있는데요, 이 또한 역사에서 중국문제를 해결할 자원을 찾으려는 노력인 건가요?
A: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이드는 서양에 의한 동양의 재구성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지식 영역에서 서양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사이드도 지적한 것처럼, 만약 비서방세계가 새로운 지식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항상 식민주의 지식의 틀 안에서 세계와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밖에 없고 진보도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역사연구, 문화연구 및 다른 지식 영역에서도 기존의 틀 안에서 중국의 역사와 사회를 정리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연구와 대화를 통해 중국과 관련된 지식이 세계와 중국을 관찰하는 살아 있는 방법,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 없이는 낡은 지식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른바 중국과 관련된 지식이 고립적인 것은 아니며, 중국/세계의 틀에 한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국은 지금껏 역사의 변동 과정에서 상이한 장력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작업은 아주 제한적인 것이겠지만 탐색하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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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약간 때늦은 감이 있지만 애초의 약속대로 톈안먼 사건에 관한 세 번째 포스팅을 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지나간 사건이며 점점 잊혀지고 있지만 바로 그 잊혀짐에 관한 글이 바로 페리 링크의 “육사: 기억과 윤리”June Fourth: Memory and Ethics(China Perspectives, 2009.2.)이 다. 이 글에서 페리 링크는 기억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와 그 기억에서 어떻게 사건이 재구성되는지에 대해 고찰하려 한다. 그는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각각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혹은 기억에 실패하고, 혹은 다른 기억으로 대체하려 시도하는지를 자신의 경험에서 시작하여 살펴보고 있다. 그와 관련된 질문들은 모두 도덕적인 함의를 띠고 있기 때문에 “기억과 윤리”를 제목으로 택한 것이다. 분량상의 제한으로 전체를 번역할 수는 없었으며, 내용을 풀어서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이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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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 링크 (Perry Link). 프리스턴 대학 교수.
_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건 당시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이후 『톈안먼 페이퍼』(The Tiananmen Papers: The Chinese Leadership's Decision to Use Force Against Their Own People, 2002)를 앤드류 나단과 함께 편집했다.

페 리 링크는 자신의 경험에서 기억의 어떤 요소를 환기시키고 있다. 89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그는 베이징에 체류하고 있었다. 학살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새벽의 길거리를 둘러보며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 피범벅이 되어 실려 가는 청년들, "피는 피로 갚겠다"는 팻말, 군용 지프를 둘러싼 성난 군중들, 불 태워진 군용차, 곳곳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와 자신이 경험한 학살에 대해 외치는 목소리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싶었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제공하려는 마음에 여러 중국 친구들을 탐문하기도 하였다. 6월 9일 베이징을 떠났으며,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6월 4일에 대한 많은 질문들에 맞서 처음 몇 번은 저장된 기억의 이미지들을 어떤 식으로 조합해야 할지 몰라 몇 개의 날기억들을 던지는 데 그쳤다. 그 날기억들의 뒤섞임과 충돌은 그 사건의 진실을 포착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질문과 대답이 반복되면서 "어디에 가서" 기억을 찾아야 하는지 분명해졌다. 그런데 사건이 매끄러운 이야기의 외양을 갖춘 순간은 그 사건의 단순화 과정이기도 했다. 점점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야 청중의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더 따지게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나자 원래의 기억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았다. 반복되는 질문을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가 찾고 있던 것은 원래의 기억이 아니라 '앞서 어떻게 이 이야기를 잘 풀어냈는지'에 대한 기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동일한 문제가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게도 상존한다. 직접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사건을 우리 눈앞에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제한된 몇 개의 단어를 끌어 모아 그것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시작부터 단순화를 피할 수 없으며 진술이 반복되는 사이 상투적인 틀이 만들어진다. 자기 경험에서 이끌어낸 기억에 대한 반성에서 페리 링크는 톈안먼 사건의 기억이 어떻게 조직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변경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해자

먼 저 누가 가해자일까? 실제학살을 집행한 것은 인민해방군 27군과 38군이었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학살의 최대주범은 계엄을 선포하고 발포를 허락한 덩샤오핑과 사실상 분위기를 무력진압 쪽으로 몰고 간 리펑 및 톈안먼 광장에 모여든 일반시민 모두를 "반혁명폭도"로 규정한 공산당 간부 모두를 가해자로 볼 수 있다.(오히려 학살의 집행자였던 군인들 대부분은 베이징 외곽의 비밀농장에 감금당한 채 20년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 육사"의 가해자들이 그날의 학살을 모두가 잊어주길 바랄까? 일반적인 관측과는 달리 가해자들은 중국의 인민들과 공산당의 반대세력들이 학살을 똑똑히 기억해 주기를 원한다. 위협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 만약 모두가 잊어버린다면 진압이 보낸 경고 시그널은 무위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경찰봉, 최루탄, 물대포만으로 해결되었을 6월 4일의 톈안먼 광장에 탱크와 기관총을 사용한 중요한 이유이다. 통치당국은 이 사건이 단순히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사회 불만이 폭발한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권에 대한 도전을 종식시키고, 정치적인 자유가 아니라 경제적인 자유만 윤허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기억시키고자 한 공산당의 의도는 지금까지 유효하게 먹혀들고 있다. 가해자들은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며, 언제 사람들이 잊어주기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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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rine Bauknight <Tiananmen>

피해자

물 론 “육사”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말을 할 수도, 기억을 전할 수도 없는 사망자들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다. 이 두려움은 살육에 대한 충격뿐 아니라 그 이후 중국정부에 의해 공인된 관방의 견해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누구도 그 속에 내포된 잔혹한 암시를 오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월 4일 새벽에 벌어진 사건의 범인은 발포한 군인이 아니라 반혁명분자와 적대적 외국 세력의 지원을 받은 ‘폭도’들이다. 친애하는 시민, 당신이 만약 이 패거리의 일원이었다면 끽소리도 하지 말고 있어라. 고통스럽더라도 소리를 지르지 마라. 안 그러면 더한 고통이 따를 것이다. 우리가 네 아들을 죽였다면 그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사과를 해야 할 일이다.”

20년이 지나며 두려움은 옅어져 갔지만, 길을 걷다 신호등을 지키듯이 금기와 자기검열은 내면화되어 공고하게 지켜지고 있다.

방관자

사 실 피해자와 방관자의 선을 가르는 것은 쉽지 않다.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여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어야만 희생자인 것은 아니다. 페리 링크는 그 둘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한다. 피해자는 직접적으로 고통을 받는 데 반해 방관자는 목격한 사건에 감정이입을 한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상처가 ‘자료’로 진열되거나 다른 정치적 투쟁의 근거로 이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침묵하기를 선택했다면 그 선택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영웅이나 희생당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이 영웅처럼 떨치고 일어날 것을 방관자들이 요구할 수도 없다.

“육사”의 주도자의 한 사람인 팡리즈가 베이징의 미국대사관의 창 없는 작은 방에서 숨어 살 때 쓴 <공산당의 망각술>이라는 글이 있다. 그 기본적인 착상은 중국공산당이 지금껏 자유로운 사고를 한 여러 세대의 중국인을 계속 진압해 왔다는 점이다. 매번 진압은 아주 쉽게 이뤄졌는데, 후세대 사람들이 앞세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톈안먼 광장의 학생들은 10년 전 “민주의 벽” 활동가들과 그들의 운명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민주의 벽의 주도자들은 1957년의 우파들이 어떠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이렇게 반복되는 망각은 중국인의 대뇌구조에 문제가 있어서도, 중국문화의 특징도 아닌 통치 당국이 펼쳐온 계획적인 통제수단에 의한 결과였다고 팡리즈는 강조하고 있다.

그 글을 읽으면서 페리 링크는 옳은 말이지만 당시처럼 전세계가 지켜봤고 관심을 받고 있는 이 사건에 “망각”이 왜 문제인지 의아해했다. 89년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벌어진 사건은 수많은 베이징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목격했으며, 전세계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톈안먼 사건은 역사상 그 어느 학살보다 많은 방관자를 보유한 사건일 것이다. 그런데 팡리즈가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20년이 지나자 세상사람 대부분에게 사건은 잊혀졌다. 그보다 더 안 좋은 것은 그 체제의 폭력적인 본질에 대한 기억이 점점 옅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육사”나 “톈안먼 사건”은 여전히 매체나 출판물의 금기어이다. 관련 홈페이지는 봉쇄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사건에 대해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더라도 크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만약 자신이 통치권력의 목표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 때 어떤 처분이 가해질지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 윤리리적인 부분에 대한 분석은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기억과 망각에 관한 내용에 집중하여 소개하였다. 20년 전 중국에서 일어난 일은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분명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또한 두려움에 기반하여 자기검열을 내면화할 것을 강요하는 정권과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기억을 안고 다음 걸음을 내디딜 것인가.

* 자 신의 경험에서 시작한 페리 링크의 글은 울림이 크고 분석은 정확하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의 안쪽과 바깥에 있는 두 노교수 첸리췬과 페리 링크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톈안먼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등식화하는 것은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첸리췬은 일관되게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둘러싼 민주화 운동에 주목한다. 톈안먼 사건의 기본 동력이 공산당을 탄생시킨 바로 그 힘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여 진압이라는 방식을 택한 공산당을 내파시키는 것이 첸리췬의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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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하기의 어려움

 

어릴 때 '*범'이라는 이름의 동네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국민학교 계단 뒤에서 저에게 자기 별명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더군요.
별명이 두 개였는데, 내가 그 중 하나인 "호랑이"를 말했더니 나를 쥐어박았습니다.

(소띠가 대부분인 학년에 들어간 범띠에게 호랑이는 금칙어였으니까요.. ㅡㅡ;;)
정말 때렸는지 시늉만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저는 울었습니다.
아파서가 아니라 억울해서 왈칵 하고 눈물부터 나오더군요.
괜찮다고, 말해보라고 해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 진실은 말하면 안 된다는 걸 그 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이런 상황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반우파투쟁 때였습니다. 공화국 성립 이후 사상검열로 옥죄여 왔던 지식인들에게 마음껏 의견을 말하게 하고 비판을 허락한 것이 쌍백시기(백화제방, 백가쟁명; 1957년)였는데, 그러나 아주 짧은 이 시기에 연이어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들의 의견과 비판이라고 살살 달래놓고는 "네 이놈들! 내 너희의 사상이 이렇게 뒤가 구린 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호통을 치고 채찍을 가했던 거죠. "우파", "반혁명"이란 죄목은 모든 반대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어느 사회의 "좌파", "빨갱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독립적인 사상을 가졌거나 다른 의견을 가진, 그리고 그 생각을 말하는 모든 사람이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죠. 이런 역사에서 사람들은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생존자들은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었을 겁니다.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 (매체에서 말해진 것이 진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그런 거다!) 그럼에도 생존자들의 후손들은 그 교훈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 철이 없어 말하면 안 되는 진실을 말해 버리거나,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과도하게 요구하곤 합니다. 그것도 겁없이 여럿이 모여서 무단으로 도로와 광장을 점령하면서 말입니다. 사실은 그러한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2009년 5월 10일, "2009 베이징 육사 민주운동 토론회"라는 이름의 비공개 세미나에서 <미완성의 역사적 임무>를 발표한 첸리췬(錢理群) 교수는, 그 겁없는 청년들, 분노한 청년이 바로 한때의 공산당이었음을 지적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1989년의 톈안먼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1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학생, 노동자, 지식인, 국가 공무원 등 광범한 사람들이 참여한", "건국 60여년 이래 언론, 출판, 집회결사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온 중국 인민들의 위대한 투쟁의 역사"임을 역사적 회고를 통해 밝히며, 그것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임을 이야기합니다.

 

전(前) 베이징대 교수인 첸리췬은 교사의 양심과 학자의 양심 때문에 회의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20 년 전 학생들이 민주사업에 희생될 때 나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학생을 지키는 것은 교수의 직무이며 베이징대의 전통이다. 오사운동 때 채원배 교장이 바로 그러했다. 또한 정치적인 목적이 아닌 학술적 원칙에 따라 톈안먼 사건을 논의하고 역사에 기록해야 마땅하다."

앞줄 우측 세번째가 첸리췬 교수이다.

 먼저 중국공산당이 애초에 수행한 혁명의 주요한 요구는 국민당 일당독재의 전횡적 통치를 반대하고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었음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공산당측에 의해 행해진 다음과 같은 비판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국민당 일당통치 구역에서는 일체의 강학, 독서, 출판, 발행의 자유가 잔혹하게 훼손되었다. 복고가 유행이 되었고 사상을 가진 것은 유죄가 되었다. 모든 학교에 비밀 정탐, 사기, 박해, 무장위협, 금전 매수의 스파이 수법이 극도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교육과 학술의 존엄은 깨끗하게 쓸려나갔다." "오랫동안 중국 파시스트들은 죽기살기로 이러한("하나의 지도자, 하나의 당, 하나의 주의"로 대표되는) 죄악을 순수한 청년들에게 교조적으로 세뇌시켜 왔으며, 이러한 파시즘적 사상 유형을 수용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고 죽일 놈으로 받아들여졌다. 총부리를 중국 인민의 머리에 겨누는 것: 이것이 바로 중국 파시즘의 정치 및 이른바 '문화'였다."(중공 중앙기관지 <해방일보>, 1946년 5월4일 사설, "오사를 기념하며 민주자유의 투쟁을 관철하라").

 

이러한 비판의식이 있었기에 중국공산당은 다음과 같은 "장엄한 약속"을 하게 됩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 거주, 이동의 자유권은 중국공산당의 혁명 근거지에서는 예전부터 보호되어 오던 것으로, 차후에도 계속하여 그 기준을 지키며 전진할 것이다", "인민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질 뿐 아니라 자신을 무장할 권리도 가진다. 우리는 인민의 조직과 활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적극적으로 동원되지 않음을 두려워한다."(<해방일보>, 1941년 5월 26일, "확실하게 인민의 권리를 보장하라").

 

공산당과 국민당의 지식인 쟁탈 투쟁에서 일부 중간파 지식인까지를 포함한 절대다수의 지식인이 결국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는데, 그렇게 되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공산당이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핵심으로 한 민주의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이 결국 인민과 지식인에게 버림받은 이유 또한 그들이 인민과 지식인의 말하고 생각할 자유를 박탈했기 때문이었던 거죠.

 

대륙을 장악한 뒤 공산당은 자신의 존재기반이기도 했던 그 약속을 잘 이행하는 듯 보였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1954년 제정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속한다"는 원칙을 확인했고, 공민에게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행진, 시위, 거주 및 이동 등의 광범위한 자유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반드시 인민의 민주를 더욱 발양하여 우리 나라의 민주제도의 규모를 확장시킬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발전은 이러한 법적권리를 한낱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언론 자유라는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정적인 전환이 있었습니다.

 

  1. 1955년 5월(헌법 공포 이후 일년도 되지 않아) 발동시킨 이른바 "후펑 반혁명집단" 진압 운동 및 곧이어 전개된 "반혁명 숙청 운동"의 두 운동은 지식인과 일반시민의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한 선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률적인 여론"이란 원칙이 제시되면서, "반혁명"이란 죄명을 마음대로 덮어씌워 공민의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는 헌법에 위배되는 행위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2. 1956년에는 이른바 "사영 공상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빌미로 사영출판사, 서점, 언론사 등의 전면적인 국영을 단행하여, 뉴스와 출판에 대한 국가의 전방위적이고 엄격한 통제가 시행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언론, 출판의 자유의 경제적 기초를 남김없이 쓸어없앤 조치였다.

 

1979, 80년의 민주의 벽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에서도 제기된 언론 자유의 요구와 민영출판의 움직임은 덩샤오핑에 의해 불법으로 간주되고 봉쇄되었습니다. 이런 결정을 내릴 때 공산당 내부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민간의 자발적인 조직에 대해 토의할 때 일부에서는 그러한 조직에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후야오방 측에서는 <결사법>과 <출판법>을 제정하여 법률에 따른 관리를 주장했죠.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국민당과 투쟁할 때, 바로 국민당 정부의 출판법을 이용하여 등기하고, 그 출판법의 틈을 파고 들어 합법적으로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 틈을 비집고 들어와,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고 합법적인 투쟁의 형식으로 우리와 싸우게 해서는 안 된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체제의 개혁과 민영기업의 발전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민영 출판사와 민간언론은 여전히 허가되지 않고 있습니다. 법치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출판법>, <결사법>, <시위 집회법>의 제정은 도외시하고 있구요. 인터넷의 발전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많아지지 않을까요? 아시다시피 통제수단도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89년의 주된 구호였던 언론의 자유와 반부패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죠.

 

1957년의 쌍백 시기, 1980년의 민주의 벽, 1989년 천안문 사건.. 외면적으로 별 연관성도 없고 운동의 성격이나 참여자의 분포도, 심지어 진압방식도 다른 세 사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문혁의 고초를 지나온 후 중국의 노작가 바진이 5권에 달하는 <수상록>에서 행했던 반성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참말하기(說眞話; 진실을 말하기)"입니다. 일견 유치원생도 할 수 있는 주장이고, 그래서 똑똑한 비평가들로부터 "초등학교 2,3학년 수준"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죠. 이론이나 개념의 층위에서 보자면 그런 비판이 가능할 겁니다. 그런데 바진은 자신을 시대로부터 분리시켜 객관적으로 그 시대와 체제를 분석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또한 피해자이기 이전에 공모자이고 잘못된 그 시대를 만들어간 사람의 하나임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 말을 듣다가, 점점 다른 사람을 따라서 말하게 되고, 결국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이건 아마 거짓말일 거야, 저건 와전된 걸 거야, 그렇게 말하는 건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 같아 라고 의심했지만, 하나 하나 연이어 계속되자 나는 결국 '독립적인 사고'라는 부담을 벗어버려야 가볍게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개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의구심을 가지다가 믿게 되고 참여하고 공모하게 되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느 순간 강을 건너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말하기"의 전제는 잃어버린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논의를 좀 더 진행시키면,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과의 연관 하에서 문혁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기저에 있는 인간의 어두운 면, 2009년 대한민국에서도 현재진행형인 비극을 되돌아보는 반성의 계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첸리췬이 89년 톈안먼 사건에 대한 글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에 관한 역사적 회고를 추궁해 가는 것, 그것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바진의 "참말하기"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쥐어박힐지도 모르지만 불편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권리, 소수의 용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참말하는 게 가능한 사회, 아직은 요원하죠?

 

 

  • 이 글은 2009년 5월 10일, "2009 베이징 육사 민주운동 토론회"라는 이름의 비공개 세미나에서 발표된 전 베이징대 교수 첸리췬(錢理群)의<미완성의 역사적 임무>를 근거로 작성되었습니다. 발표 원문은 제목 링크를 따라가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lunarog
문화혁명/80년대 2009. 7. 9. 14:58
외국어는 언제나 스트레스이다.
나의 뭉개지는 발음 때문에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까?
이런 것도 모른다고 물어보면 무식하단 소릴 듣지나 않을까?
이렇게 말하는 게 문법에 맞는 표현일까?
등등.. 목록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예전에 누군가의 인터뷰에서 독일인가 프랑스에서 현지어를 모르는 장모님이 현지 할머니와 한참 수다를 떠는 걸 보고 신기해서, 어머님 무슨 말씀하셨어요? 물어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고 대답했다는 게 생각이 난다.(정확한 출처는 찾아보지 않았다..) 한국어로 말하고 독일어로 대답해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경우가 있다. 반대로 한국어로만 대화를 나눠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지금 국회나 파란기와지붕 아래 있는 사람들과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이 통할까? 무슨 외계어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그냥 그들과 오래 지내다보면 말이 통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소통은 수사가 아니라 의지이기 때문일 테다.


아래는 천카이거에 의해 영화화된 바 있는 소설 <아이들의 왕>의 작가 아청의 인터뷰 중 일부이다.

양쯔: 오랫동안 미국에 계셨는데, 영어가 문제가 되지는 않았나요?

아청: 영어가 스트레스였던 적은 없습니다. 중국에서도 저는 중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잖습니까. 그런 동네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문제가 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습니다. 장족(티벳) 지역에서든 타이족(태족:傣族) 지역에서든 마찬가지죠.
    중고등학교에서 저는 영어를 배웠습니다. 당시에는 출신성분이 안 좋으면 영어반, 출신성분이 좋으면 러시아어번에 들어갔습니다. 커리큘럼이야 똑같이 <류샤오치의 모포> 같은 거였죠.
    의사소통은 언제나 문제가 됩니다. 그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렇지만 신체언어, 눈빛, 직감만으로도 바로 이해되는 경우도 많아요. 바로 그 분위기 안에 같이 있기 때문이죠. 영국에 가면 정통영어를 하겠지만, 미국에서는 각종 유형의 영어가 사용됩니다. 라틴아메리카식 영어, 흑인식 영어 이탈리아식 영어, 중국식 영어 등등, 언젠가 차를 고치다가 아르메니아식 영어를 들었던 적도 있어요.

양쯔: 영어로 책을 읽는 것은 어떤가요?

아청: 영문서적을 읽는 게 많이 힘들지는 않습니다. 제 독서량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니까요.

-- 양쯔杨子, <예술 인터뷰(艺术访谈录)> 중에서

비슷한 구절을 아청의 다른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청: ... 제가 가진 특수한 경험은 열 몇 살에 삽대를 떠났는데, 그 지역 말을 거의 못 알아듣거나 전혀 못 알아듣곤 했습니다. 내몽고, 윈난 모두 제대로 알아듣기 힘듭니다. 그래서 미국에 갔을 때 영어를 못 알아들어도 별로 스트레스를 안 받았어요. 십여 년을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못 알아듣는 환경에서 살아왔으니 말입니다.

 

자젠잉: 항상 소수민족들과 함께 있었습니까? 그럼 어떻게 말을 하나요?

 

아청: 간단한 말만 하다가 조금씩 복잡한 말을 배우기 시작했죠. 욕부터 먼저 배우고, 정식 표현도 조금씩 배워갔죠. 그들도 중국어 표준말을 하긴 하는데, 그렇게 힘들게 중국어를 하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배우는 게 낫겠더라구요.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야 얼마 되나요 머. 미국에 가서도 비슷했죠.

 

자젠잉: 당신의 경우 어떤 면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었겠군요. 다른 사람에게 그건 중심에서 주변으로 내몰리는 경험이었습니다. 80년대 출국한 대부분이 받았던 느낌이 그랬습니다.


-- 자젠잉查建英, <80년대 중국과의 대화>(八十年代:访谈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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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유명한 사진입니다. 천안문 사건 당시 베이징으로 진입하는 탱크를 막아선 남자입니다.
탱크가 이 남자를 피해 옆으로 빠지면 남자도 따라서 옆으로 이동합니다. 탱크는 오도가도 못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탱크가 아니었군요. 귀여운 키티가 탄 자동차를 저 아자씨가 막아선 거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자세한 글은 아래 링크로:

1989년 천안문사건의 중국과 2009년 한국은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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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丹靑 2009. 6. 27. 18:02
상하이 하면 떠오르는 색깔은 어떤 걸까?


흐리고 습한 상하이의 날씨는 상하이를 무채색의 도시로 떠올리게 한다. 이 도시는 색깔이란 게 없고 그라데이션만 살아 있다. 명암만 살아 있는 도시, 가장 밝은 곳과 가장 어두운 곳이 공존하는 도시, 그렇지만 그 각각이 다른 색깔을 띤다고 하기보다는 같은 색의 농도와 계조가 다를 뿐인 그런 도시. 내가 떠올리는 상하이의 이미지이다.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 중남미의 원색찬란함, 티벳의 고요하지만 강렬한 색감은 상하이에서 떠올리기 힘든 무엇, 에너지 자체가 다르게 표출된다.

Pudong, 90x120cm.

반군이 쓴 글에서 읽은 프랑스에 주로 거주한다는 어느 미국인 화가가 그린 상하이를 떠올려 본다. 상하이를 마치 지중해를 그리듯 원색으로 표현했다, 왜 그렇게 그렸나는 물음에, 자기는 상하이에서 젊고 생동하는 에너지를 보았다고 대답했다고. 그 에네르기를 표현하는 방법이 강렬한 색감이겠다. 그가 보는 상하이가 그럴 수는 있다. 그의 상하이는 그런 모습, 그런 색깔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왜 상하이를 그런 색깔로 표현했냐고 묻게 되고,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상하이와 그 색깔은 어긋나 있음을 뜻한다. 그가 해석한 상하이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우리가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상하이와는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지고 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의 이름은 제프리 헤싱(jeffrey hessing)이다. http://www.jeffrey-hessing.com/이라는 개인 홈페이지도 가지고 있고, 거기서 중국에서 그린 그림과 상해를 그린 그림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어떤 색깔로 상하이를 표현했는지 살펴보려고 홈페이지를 열어본다.

The Bridge, 100x80cm.
푸장반점 꼭대기에서 소주하와 와이바이두 다리 너머를 바라본 풍경이다.

The River, 97x130cm

The Bund, 90x120cm

Shanghai Sunset, 100x120cm

The king and queen, 100x80cm.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는 제프리 헤싱.

그림을 보지 않고 떠올렸을 때만큼 강렬한 색감은 아니다. 나는 더 강렬한, 눈이 부신 원색을 기대했다. 그 강렬함은 어쩌면 색의 대비에서 올 듯한데, 헤싱이 쓰는 색은 원색이긴 하되 강한 대비가 없다. 그림에 대해서도, 색감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게 없지만. 그는 그저 자기가 선호하는 색깔을 상하이에 덧씌운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가 그린 뉴욕, 이스라엘 등도 비슷한 색감이다. 다만 상하이는 그런 도시와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색의 대비가 덜하고 건물과 건물을 구분하는 선을 제외하면 색들이 서로 섞인다는 느낌마저 든다. 곱지만 포스가 없다.

색의 대비, 즉 서로 다른 색깔들이 부딪히고 충돌하는 사이에 내뿜는 긴장을 나는 상하이에서 느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다름이 아니라 조금 더와 덜의 경계에 놓여 있다. 제프리 헤싱의 그림이 상하이의 에너지를 잘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다른 존재의 다른 색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그걸 상하이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까?

상하이의 진정한 얼굴은 밤에 드러난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밤이 없는 도시, "불야성"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야(夜)상해! 1865년에 가스등이, 1882년에는 전기가 상하이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세련된 <상하이 모던>을 노래한 리어우판의 상대편에 루한차오의 <네온불빛 너머>가 있다. 밤이 되면 온갖 색의 네온사인과 광고판이 휘황찬란하지만 번화가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어떤 어둠이 펼쳐지는지를 루한차오는 보여주며, 그곳이 단순한 암흑이 아닌 다양한 계조를 가진 인간군상이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내가 떠올리는 상해 사진은 모두 20세기 초의 흑백사진들이다.
상하이는 아무래도 흑백으로 찍어야겠다. 혹은 색을 날려버리고 계조만 살아있게.

상하이를 어떤 색깔로 떠올리시나요?



보너스: 제프리 헤싱이 그린 만리장성과 운하 풍경.
Water Village, 65x81cm.

The Great Wall, 65x54cm.

Posted by lunarog

탱크맨, 고양이를 막아선 남자

by luna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경험한 중국은 추모해야 할 굵직굵직한 십주년만 거론해도 해마다 반복된다. 2009년에 돌아봐야할 역사적 순간은 단연 오사운동 90주년(1919.05.0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1949.10.01), 그리고 톈안먼 사건 20주년(1989.06.04)라고 할 수 있다. 오사운동에 대한 새로운 책과 관련 학술대회는 풍성했으며(물론 오사운동의 정신을 본받아 비판정신을 분출하는 것은 최대한 억제시키고 학술제도 내에서의 회고만 가능하게 했다.), 가을이 되면 건국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사 톈안먼 사건"은 중국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홍콩에서 매년 열리는 추모 촛불집회에는 사상 최대인원인 15만명이 운집했으며, 언제나처럼 미국 등 서방국가는 재평가를 요구하는 성명을 내고 중국 외교부는 그에 대한 강한 불만의 목소리로 응수하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통과의례화 되어가고 있다. (톈안먼 광장의 검문 강화 및 유투브, 트위터, 플리커 등의 차단이 있었지만) 육사 20주년은 너무나 조용히 지나갔다.

 

한국의 여러 매체에서도 6월 4일을 전후하여 톈안먼 사건을 다루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단편적인 뉴스에 그쳤고, 20년이 경과한 사건 자체의 의미에 대한 특집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해외의 경우 BBC, RFI 등의 중국어 사이트에서 팡리즈, 왕단 등 핵심 관계자, 사건 당시 취재 기자, 관련 학자 등의 인터뷰와 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20주년을 조명하고 있으며, 해외 중화권 뉴스 사이트인 dwnews(多维新闻网), "縱覽中國; China in Perspective" 등에서도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2009년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러나 이러한 재검토나 회고조차 필요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들출 필요도 없이 그저 개설서에서 나오는 사건 개요를 그대로 옮겨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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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야오방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학생들은 민주의 기치를 내걸고 천안문으로 모여들었다. "민주-우리 공동의 이상"

 

후야오방은 덩샤오핑의 신임을 잃은 뒤에도 여전히 중앙정치국에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89년 4월 15 중앙정치국 회의에 참석했다가 (격론을 벌이던 중) 치명적인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정치적으로 기민한 학생들은 민주적 성향의 후야오방에 대한 자신들의 진심어린 존경을 표시하고 싶은 마음을 넘어서 마침내 정치적 기회가 왔음을 인식했다. 고위 공직자가 죽었을 때 정부가 잠시 정치적 반대의견을 용인한다는 사실,살아 있는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죽은 자를 애도하는전통을 되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 행진과 시위의 규모는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으며 … 집회와 언론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서를 발표하고, 관료들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비난했다.

 

…… 그러나 덩샤오핑은 1989년의 학생활동가들을 문화대혁명 시기의 반란자들과 비교하면서 둘 다 천하동란을 일으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426일자 인민일보 사설에서 그는) 학생시위가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된 음모이며 이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사회주의 체제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불법적인 집회와 허가받지 않은 시위는 엄금해야 하며 학생들이 노동자, 농민 그리고 타교 학생들과 연대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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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뿐 아니라 노동자, 교사, 의사, 급기야는 당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인민일보 기자들까지 합세하였다.

 

(이에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졌으며) 일부 시민은 학생들의 행진대열에 가담했고 어떤 사람들은 음식과 돈을 주는 등 자발적이고 인정 넘치는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 그것은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시위였으며, 목격자들은 시위 참가자들의 비상한 자제력과 학생들의 조직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이들은 익명의 시위집단이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행동하는 신원이 확실한 집단들이었다.” (이 운동의 규율 잡힌 행동과 흥겨운 모습, 반전통적인 카니발 같은 환경은 중국의 우드스탁이라 불릴 정도로 대항문화의 축제인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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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춤을 추고 가요를 불렀으며 인기 있는 통기타 가수와 롤 스타들이 여기에 합류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에도 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발포를 거부하고 시위군중과 금방 친해졌다. 그러자 노련한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부대로 변경된다.) 69일 덩샤오핑은 텔레비전에 나와 그가 반혁명 폭란이라고 부른 것을 섬멸한 군대와 경찰의 노고를 치하하고 시위대와의 싸움과정에서 사망한 수십 명의 병사들의 가족에게 위로를 전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민간인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사회의 쓰레기라고 비난하면서 어떤 유감도 표시하지 않았다. …… 이들은 젊은 시위자들을 처벌하고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겁을 주기로 결정한 이후 이 위기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무력진압에 이어 곧바로 체포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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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시민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최루탄과 물대포만으로 진압이 가능했을 그 곳에서,

어느 누구도 정말로 "진짜" 총알을 사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 길게 인용한 위 글은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1989년의 민주화운동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떤가? 중국공산당, 덩샤오핑, 인민해방군 등이 1989년의 중국 베이징에서 일으킨 일로만 보이는가? 노골적으로 딴나라당, 박쥐, 전투경찰로 치환시켜서 읽어보라고 알려줄 필요도 없이 최근 2년 사이 한국에서 벌어진 일들과 겹쳐져 그저 망연자실해질 따름이다. 의도적으로 6월 3일 밤에서 4일 새벽에 걸친 학살 부분에 대한 인용은 생략했는데, 문제는 학살 이후이기 때문이다.

 

톈안먼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운명은 다했으며, 중국의 개혁개방은 끝났다고 예측하였다.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90년대 이후 더욱 열정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거듭하여, 사건의 강력한 진압이 경제발전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시간적인 선후관계는 너무 쉽게 원인과 결과의 서사로 변해 버린다. 중국 정부는 모든 사람이 이 사건을 잊어주기를 바랄까? 대답은 아니올시다 이다. 사건 자체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그러나 정부에 반대하는 순간 개인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기를 바라며, 그 기억을 통해 두려워하기를 바란다. 잔인한 진압과 뒤따른 체포, 언론 출판 등 사상검열을 통해 그들은 인민들의 두려움이 내면화되고 일상적인 자기검열을 지속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학제간 구별 없이 토론을 즐기던 비판적 지식인들은 자기 세계에 갇힌 전문 학자로 바뀌었다. 학생들의 관심은 취업준비를 위한 스펙 쌓기에 집중되고 있다. 사회는 너무나도 빨리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오직 "돈"이면 최고인 시대로 변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안정"과 "질서"를 염원한 덩샤오핑의 발포 명령에 뒤따른 것이었다.

 

베이징 시내로 진입하는 탱크를 막아서는 한 시민을 모습을 찍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 사진은 가볍게 비틀어진다.

앗! 그런데 고양이가?

 

경제의 발전으로 최소한 밥 굶는 사람은 없어지지 않았느냐? 대답은 대부분이 평등하게 적게 먹는 사회에서 누구는 배터지게 먹다 남기고 누구는 매 끼니 걱정하는 사회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각종 통계지표와 대도시의 고층빌딩이 제시하는 상징은 그러나 발전과 진보이다. 예전보다는 낫지 않느냐. 효율성 떨어지게 어느 세월에 합의와 조정이나 하고 있냐. 그러다가 치고받고 싸움이나 하고 시간 다 보내지 않느냐. 그것보다는 강력한 정부를 믿어라. 지금은 일부가 '쬐끔' 힘들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하는 대로 믿고 따라오면 다수가 행복해진다니깐. 아이 참, 하여튼 기다려 보라니깐, 말들이 많네.. 퍽!!


어디서 많이 보는 풍경이다. 쥐 한마리를 탓할 수 없는 우리의 욕망이 사실은 그 속에 끼어 있다. 흔히 한국과 중국의 격차는 20년 정도라고 말해져 왔다. 격차는 한꺼번에 뒤집힌다. 어떤 면에서 이미 중국의 현재는 한국의 미래이다. 탱크가 동원되지 않은 천안문사건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 능력이 허락된다면 "톈안먼사건 20주년 비공개 세미나"에서 발표된 첸리췬의 <미완성의 임무>와 China Perspectives 2월호에 발표된 페리 링크의 <6월 4일: 기억과 윤리>를 다음에 간단하게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지출처:

<사진 1~8> China: a Century of Revolution, Part3, "Born under the Red Flag 1976-1997 (DVD 자료에서 캡션 이미지)

<사진9> 플리커(http://www.flickr.com/photos/22949366@N07/3591541517)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