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flaneur, p.m. 4:30'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09.06.24 요즘 새롭게 애완동물을 기르기 시작했어요 8
  2. 2009.06.21 시멘트에 향수를 느끼는 세대 5
  3. 2009.05.21 단순노동의 힘.. 1
  4. 2009.05.12 신의 물방울20
  5. 2009.05.12 겨루기 1
  6. 2009.04.23 중독 2 1
  7. 2009.04.21 중독 8
  8. 2009.04.15 5시 10분, 새소리 2
  9. 2009.04.03 살살 달래가며 내 몸 사용하기 6
  10. 2009.03.30 말랑말랑한 것과 딱딱한 것
示衆/flaneur, p.m. 4:30 2009. 6. 24. 00:42
공부에 조금 방해가 되긴 하지만, 취미삼아 요즘 애완동물을 기르기 시작했어요.

근데 애완동물이라고 하기엔 조금 ...
양식업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내다 팔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잡아먹을 수도 없어요..

자그맣고 귀엽긴 합니다. 빨갛고 통통한 배를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앙증맞아 죽겠다니깐요. ^^
주로 발밑에서 놀다가 가끔 허벅지로 올라오기도 합니다.
머, 목이나 귀밑에까지 와서 혀를 낼름거릴 때도 있는데, 그럴 땐 정말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강하게 키우려고 가끔 약을 처방하기도 합니다만,
그래서인지 13층 아파트에 살기 버거울 것 같은데 아주 튼튼합니다.
그게 다 제가 열심히 공양한 결과겠죠?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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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습하지도 않은 맑고 화창한 날이었는데, 모기만 없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ㅡㅡ;;
살생을 피하기 위해 자기 피로 배가 통통한 모기도 날려보내는 고승의 마음으로, 그저 인내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어요.....


1. 혹시 모기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지거나 그런 병도 있나요? 요즘 제 상태가 조금...

2. 띠용님~ 중국에도 "쪼금한 거" 많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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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6. 21. 17:01
시멘트 건물에 향수를 느끼는 세대라는 말을 집사람에게서 들었다.
알고 지내는 다큐 감독 언니의 새로운 시나리오에서 읽은 것이라고 한다.

엇?

"시멘트"와 "향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인데 의외로.. 여운이 남는 조합이다.
시멘트 하면 우선 생각나는 건 "부르꾸"(우리 동네에선 블럭을 다 이렇게 불렀다!)로 쌓아올린 담장이다.
세멘(시멘트)은 적게 들어가고 모래만 잔뜩 넣어, 몇 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만지면 바스라지는 그런.
바깥을 시멘트로 매끄럽게 미장하지도 않아 까맣게 변색되고 군데군데 이끼도 끼어 있는 그런 낡은 부르꾸 담장이 우리 동네에는 즐비했다. 원래 돌과 흙을 이겨 만든 담장들은, 볏짚을 얹은 초가집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문득 그 정겨운 초가집과 흙담장이 전혀 향수의 대상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시절 높디높던 담장이 어깨맡에 오게 된 그 시간의 흔적이 부르꾸 담장에 남겨져 있나 보다.

누나가 새로 쓴 시나리오는 영화 편집용으로 무려 12년간 사용한 매킨토시 요세미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나는 그 기종을 구경한 적이 없어 정확히 어떤 모양을 한 놈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워드용으로 사용할 컴퓨터도 10년을 넘겨 사용하기는 힘들다는 것, 아마추어로 시험삼아 15분짜리 단편을 편집하는 것도 아니고 장편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사람이 12년 전 최신기종을 21세기까지 사용했다는 게 좀 뜨악했다. (사실 그 누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뜨악할 일도 아니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든.) 부팅 버튼을 눌러놓고 한참 책읽다가 편집 가동시켜서 처리가 되기까지 한두 시간 혹은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한다고. 그러다가 중간에 퍼지면 그때까지 편집한 것이 모조리 헛수고가 되어 마음 졸이면서 말이다. 첨단 테크놀로지의 수공업적 제작?

새끈하고 처리속도 빠른 최신기종이 없다면 영화도 못 만들 것 같고, (내 기술 때문이 아니라) 카메라 때문에 사진도 구린 것 같고, (내 귀가 문제가 아니라) 스피커를 탓하고 싶지만, 어쨌든 10년 이상씩 지니고 다니는 것들에는 그 물건만이 가진 기억이 있고 어떤 정서적 교감 같은 게 있나 보다. 십년째 들고 다니는 핸드폰, 십년 된 노트북, 십년 된 전자사전, 십년 된 mp3 플레이어 따위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건 무려 시멘트 건물에 향수를 느끼는 것보다 더욱 머나먼 거리에 있는 어떤 것이다.

요세미티로 마지막 편집한 <앞산展>이란 영화가 인디포럼 관객상을 받고, 요세미티 시나리오도 지원을 받게 되는 등 최근 들어 좋은 일이 많은 것 같다. 축하할 일이다. 지원받은 금액의 절반은 새 카메라(8미리 DV에서 디지털로)에, 나머지 절반은 새 편집용 매킨토시에 사용될 것 같다. 촬영과 편집에 최소한 필요한 장비를 갖추는 데 지원금 전체가 들어가 버리면 영화는 어떻게 찍나?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이며, 에세이로 너무나 훌륭한 그 시나리오의 발상이 과연 영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걸일까? 새로 산다는 장비들이라고 해 봐야 취미로 즐기는 아마추어들도 들고 다니는 그런 것들일 텐데. 이 장비들은 앞으로 또 몇년을 그녀와 같이 할까? 멀리서 바라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그러나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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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5. 21. 23:27
이번 학기에는 한국에 들어갈 계획이 없었지만, 여차여차한 이유들 때문에 5월초에 잠깐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간 김에 어린이날을 번잡한 서울에서 보내기 싫어 아이를 데리고 고향에 다녀왔다. 마침 엄마의 생신도 다가오는데, 그때까지 있을 순 없고 해서 얼굴이나 비추고 일이나 좀 도울 요량이었다.

말라꼬 찍노! 찍지 마라 손사래를 친다. 왜 흐릿할까?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조교로 있던 형은 항상 일을 시키면서 고급인력을 이런 식으로 부려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땐 약간 대접받는 느낌도 있고 해서 그런가부다 했는데, 오랫만에 단순반복노동을 하다가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고급인력"이라는 말. 두뇌노동을 하는 왠만한 학벌(학력일까?)의 사람이란 뜻으로 고급인력이란 말을 사용한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그 말은 그 형의 삶에 대한 태도가 묻어난 말인 것 같다. 딱히 후배를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단 자기 스스로가 고급인력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접받고 싶은 마음. 후배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자기합리화 과정? 나같은 촌놈은 학과에 일이 있으면 (조금 귀찮을 때도 있지만) 후다닥 해치우는 것에, 몸을 쓰는 것에 큰 부담은 없었는데.. 또 지금 생각해 보니 "고급인력"이라는 말이 나를 지금까지 조금은 오염시켰던 것 같다. 그 단어에 전혀 매어 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니 말이다.

4월말 5월 초의 고향은 바쁘다. 4월 초에 비닐하우스에서 오이가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6월 초중순의 모내기가 끝날 때까지가 일년 중 가장 바쁜 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 때는 시험기간임에도(시험은 항상 시골이 바쁠 때와 겹쳐 있었다!!) 일을 시키려는 아버지를 피해서 달아나기 위해 공부했다. (아이의 반항심을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 공부를 못하게 함으로써 공부시키는 방식이 뭐 있을까 고민 중이다. 도시에서는 좀 힘들겠다. 근데 이렇게 해서라도 공부를 시켜야 하는 걸까? 그냥 두자.) 그래서 촌놈임에도 촌에서 하는 중요한, 큰 일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엄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엄마가 시간이 나지 않아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동네 입구 쪽에 우리 논 두 쪼가리에 비닐하우스가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논을 빌려서 마늘을 심어 뒀다.

이번에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일은 마늘꽃을 따는 일이다. 4월 말 밥상에 올라오는 마늘쫑을 우리는 마늘꽃이라고 한다. 아마도 줄기는 마늘쫑이 맞을 듯하다. 줄기가 여물고 끝에 꽃이 피고 씨가 맺히면 마늘 뿌리가 굵어지지 않기 때문에 줄기를 잘라줘야 한다.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마늘꽃이 피면) 지 새끼 먹인다고 지는 아무 거또 안 묵자나!"가 되겠다. 굳이 자식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겠으나,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마늘은 뿌리만으로 번식이 되는데 왜 꽃을 피우고 씨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인간 중에 자기 신체의 일부로 똑같은 개체의 생성이 가능하다면, 그래도 아기를 낳으려는 사람이 있을까?

어릴 때는 온 가족이 몰려가서 마늘꽃을 똑똑 따다가 모아서 반찬을 해먹거나 할매가 내다 팔곤 했다. 지금은 모조리 버린다. 유일한 목적은 마늘 뿌리가 굵어지는 것인데, 마늘꽃을 따도 내다팔 데도 없고, 팔려고 해도 일손이 모자란다.(돈도 안 되고..) 이게 도시의 누구네 집에서는 귀한 반찬이 될 수도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바로 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일손을 도우면서 공짜반찬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시골에 지천이라는 사실을 또 도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알면서 못하거나 인연히 없어서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테고.

마늘꽃을 뽑다가 알이 차지도 않은 마늘을 뿌리채 뽑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아부지는 호통을 치곤 하셨다. 일이 하기 싫어서 그리 되는 거라고 말이다. ㅡㅡ;;

마늘쫑을 이용할 셈이라면 줄기채 뽑아내야 하지만(좀 길어야 반찬이라도 하지..), 바로 버리면 되었기 때문에 꽃이 달리는 부분만 똑 따내면 되었다. 한정된 시간에 혼자서 최대한 빨리 해야 되기 때문에 효율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일로 접근하면 농촌은 전혀 목가적이지 않다.

머리는 전혀 쓸 필요 없고, 이파리 사이에 감춰진 마늘쫑을 즉각적으로 발견할 눈과 재빠른 손만 필요하다. 종일 하고 나면 잠자리에 들 때 마늘쫑이 아른거린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한 시각적 정보가 눈에 각인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동안 꿈에도 나온다.

허리를 숙이고 똑딱똑딱 따다 보면 10분만 지나면 싫증이 난다. 그게 지나고 나면 아무 생각도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끊어질 것 같지만, 1시간 안에 몸은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로 변해, 가장 효율적으로 반복되는 작업을 하게 만든다. 산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유의 원천이 되었나? 내 생각에 칸트가 마늘쫑 따기나 김매기 같은 일을 매일 할 수 있고, 그게 어떤 거라는 걸 알았다면 산책을 버리고 하루 2시간씩 일을 했을 것 같다..

사진은 전체적으로 장난질을 좀 많이 쳤다. 이게 마늘밭이다.
쪼그만해 보여도 실제로는 꽤 크다.
첫날 오후 오른쪽 두 골을 겨우 했다..


나는 사흘 동안(이라고 해봐야 점심 때 도착해서 점심 먹고 출발했으니, 시간적으론 이틀?) 요 작은 논 한쪼가리 하고 왔다. 이보다 배 이상 큰 논도 시도했지만, 겨우 두 골밖에 못 했다.

그 다음날 여동생이 돌도 안 지난 갓난아기를 데리고 와서 재워놓고 열흘 넘게 일을 하고 갔다. (독한 것!!) 집안의 큰일은 도맡아 하는(그래서 이렇게 자잘한 일은 하지 않는) 남동생은 주말에 회사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 남은 일을 끝냈다고 한다.

나는 어버이날 겸 생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했는데, 결국 하는 척만 한 셈이다.
단순노동이 얼마나 사유에 도움이 되나 위안삼으면서 실제로는 위와 같이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그나저나 저 마늘을 누가 다 뽑을 것인가?


비만 오면 항상 넘칠 듯 위태로운 작은 둑 너머로 새로운 둑이 들어섰다.만, 이 둑 바깥의 토지는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비옥하지만 낙동강의 홍수피해가 잦은 이곳의 피해보상을 이런 식으로 해 버린 것이다. 구체적인 이용계획없이 농민들의 입을 막기 위한 행정이었기에 버려진 땅이 되었다가, 작년부터 소유권 없이 경작만 가능하게 풀었다. 홍수철을 피해 야채나 심는 정도?


둑에서 동네를 바라보면 대충 이렇다. 앞쪽에 낡은 둑이 보인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암말처럼 생겼다고 동네 이름이 "암마"이다. 지금은 멧돼지와 늑대가 출몰한다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암만 봐도, 내 눈에는 말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뒤쪽은 면소재지에서 동네로 들어서는 산길인데, 귀신이나 여우가 나온다는 소문이 흉흉하던 곳이다. 어릴때 차를 놓쳐 한밤중에 혼자서 걸어와야 할 때면 믿지도 않는 신을 찾곤 했다. 당시 유행가였던 "아베마리아~~"를 소리쳐 외치면서.. 귀신도 아스팔트길을 당할 순 없나 보다.

누구네 집 경운기인지는 모르겠다만.


사진은, 일하는 동안 별 투정없이 집에서 놀고 있던 꼬맹이가 고마워 저녁에 오토바이에 태워 동네 구경을 시켜주며 찍은 것이다. 다섯살이 되니 다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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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5. 12. 01:07
이번 신의 물방울은 우주로 날아갔다.
그 키워드는 짤막한 하이쿠다.

동쪽 들판에 붉은 빛이 비치어
돌아보니 달이 비스듬히 걸쳐 있네

헤어진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이탈리아인은 이 시의 해석을 일본인에게 부탁하고 아래와 같은 답을 받는다.

낮에 아지랑이가 보여 집에 가려고 돌아봤더니,
달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 해석에 의해 이탈리아인은 매일 석양이 지는 언덕에서 달이 떠오르는 걸 지켜보며 추억을 와인을 마신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은 이 시의 해석을 다르게 한다.

동쪽 들판에 서광이 비침에
돌아보니 서쪽 하늘로 달이 기울고 있구나

새벽 어스럼에 같은 장소에 나가 와인을 마시며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아직 지지 않은 달빛에 취한다. 3년 일찍 이 시간대에 나왔다면 그는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 시가, 그리고 이 와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뭔가를 성취했을 때, 그 빛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그러나 우리가 어두운 시기를 보낼 때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을 떠올려 보라는 것이겠다.
밤길을 걸어야 할 때, 자기 스스로 빛을 내지도 못하는 그것에 우리가 얼마나 기대었던가 말이다.

어쨌든 우리가 너무 환한 상태에 있을 때는 그 빛에 가려 내 길을 안내하는 다른 희미한 것들은 묻혀진다. 다시 우리가 내리막길에 처하기 직전, 혹은 우리 인생의 서광이 비쳐 잊혀지기 직전의 짧은 순간에만 우리는 그 은은한 달빛을 살짝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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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루기  (1) 2009.05.12
중독 2  (1) 2009.04.23
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5. 12. 00:51
낮에 볼일 보러 나갔다가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다.
들고 간 책을 보며 밥을 기다리는데, 눈은 계속 조그만 TV를 향하고 있다.
단막극인지 연속극인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웨딩플레너에 관한 연속극일수도 있겠다.)
너무 허약한 사윗감과의 결혼을 반대하며 특전사 출신의 자기회사 부하직원을 딸의 남편감으로 미는 아빠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요즘도 이렇게 딸의 결혼에 반대하는 뼈대 굵은 집안이 있긴 한가 본데, 거의 전형적인 군인정신, 상명하복의 계급주의에 물든 아빠와 부하직원의 대화가 너무 친숙해서 낫설었다. 어떤 아이디어와 구도만 있고 그것을 채우는 살이 너무, 뭐랄까, 사람의 모습을 흉내낸 인형의 그것이지 사람 얼굴이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집까지 찾아와 무릎꿇고 사정하는 사윗감과 딸의 간청에 못이겨 체력으로 시합해서 삼판이승하면 딸을 주겠다고 대답한다. 시합은 윗몸일으키기, 100m달리기, 턱걸이이다. (뭐, 체력장도 아니고 마랴..)
윗몸일으키기는 간단하게 특전사가 100개를 먼저 하며 끝난다.
100m달리기는 앞서가던 특전사가 중간에 넘어졌는데, 사윗감이 지나쳐 가다가 되돌아와 일으켜 세워준다. 근데 특전사가 사윗감을 밀어제키고 달려나가 우승한다.
턱걸이는 특전사가 간단하게 10개만 하고 내려온다. 우승을 확신한 것이다. 사윗감은 젖먹던 힘 짜내어 11개를 한다.
2승1패. 우승.
그런데, 승자는 사윗감이다.
아버지가 페어플레이 정신을 내세우며 100m도 사윗감에게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대충 어떤 구도를 정했는지 알겠고, 딸과 허약한 애인의 우승으로 가는 방향으로 끌고가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너무 작위적이었다.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질 수도 있다. 자연스럽다. 살짝 넘어졌다고 다치지도 않는데, 사윗감이 다시 와서 일으켜 세워주고 어쩌고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따뜻한 인간미? 윤리적 가치를 내세운다고 작위성이 감춰지는 건 아니다.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100m 달리기를 하다가 중간에 특전사가 넘어지면서 지나쳐가던 사윗감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일어서 달려가는 장면으로 바꾸면 어떨까?
어떤 상황에서만 드러나는 강자의 야비함을 슬쩍 보여주는 것이 윤리로 무장한 약자의 망설임을 보여주는 것보다 효과적이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뭐, 어쨌든 별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을 억지로 만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밥이 나왔길래 책은 안 보고, TV로 눈을 주며 먹으면서 슬쩍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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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2  (1) 2009.04.23
중독  (8) 2009.04.21
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4. 23. 01:19
"중독"에 대한 글로 팬질하는 마눌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중국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줄 알았더니 노다메나 보고 파일 다운이나 받고 있었냐능.. 질책!?
물론 약간의 농담이긴 한 것 같다만 많이 뜨끔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굴의 팬질을 비웃거나 야단친 적 없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는데, 나의 커밍아웃의 대가는 가혹하기만 하다.. *^^*

약간 변명을 보태자면, 나의 중독은 너굴의 중독과 다르다는 점이다.
노다메를 보고 노다메 역을 맡은 이쁘고 귀여운 여배우를 쫓아다니거나, 치아키 역을 맡은 잘생긴 사내의 개인사를 뒤지는 게 아니라 클래식 명반을 모으고, 피아노 애창곡을 두세 배 늘였다는 점. 자랑은 아니지만 그 차이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건 비유하자면, 김연아의 수상을 보고 김연아라는 스타에 열광할 것인가, 아니면 피겨스케이트의 새로운 매력에 관심을 가지는가의 문제다. 만약 후자였다면 지금 한국의 이상한 김연아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을 건데 말야. 그런 의미에서 김연아 뉴스를 챙기는 사람보다 아이스링크로 향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피겨라는 스포츠 자체가 좋아지면 쓸데없이 국가대항전으로 만들지 않고 마사오의 연기를 좋아해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 상황에선 김연아가 인기에 녹아서 몸을 못 만들거나, 마사오가 절치부심하여 금메달을 따 버리면(김연아는 메달권에도 못 들면) 완죤히 잊혀져 버리지 않을까? 물론 김연아는 너무 이쁘고 맑다. 그런데 얼음같은 그 피부와 미소는 너무 따뜻한 곳에서 견디기 힘들 거란 말씀.

어쨌든 무엇에 중독되는가와 그 욕망을 어떻게 분출시키는가가 중요할 텐데.
생각해 보니, 한국 드라마들은 사랑놀음 말고면 별 게 없어 팬질이 가장 안전할 것 같기는 하다. 미사나 카인과아벨 보고 너굴이 삼각관계에나 빠지면 나는 어떻하겠는가? ㅡㅡ;;

'示衆 > flaneur, p.m. 4:30'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루기  (1) 2009.05.12
중독  (8) 2009.04.21
5시 10분, 새소리  (2) 2009.04.15
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4. 21. 01:19
요즘 우리 너굴은 소지섭에 빠져 늦은 나이에 팬질에 여념없다. 여고생도 아닌 주제에..

시작은 "영화는 영화다"이다. 그 후 한국의 훌륭한 인터넷 환경을 발판삼아 철지난 "미사"까지 밤잠 아껴가며 봐 버리더니, 요즘도 재미없다 아우성치면서 카인과 아벨을 끊지 못하고 있다. 소지섭 팬카페까지 가입해 모든 글을 읽고 동영상 순례까지 다니고 있다고 한다. 자기도 이제 재미없고 지겹고 중복되는 내용도 많아 그만 봐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끊을 수 없다는 것. 나의 조언은 이독제독! 다른 더 재미난 드라마를 봐서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리라고 했는데 쉬 안 되나 보다. 한국드라마들은 나름 재미있지만, 스토리 전개상 틈이 너무 많다. 장비도 좋고 시각적 이미지를 만드는 능력은 탁월하지만(그리고 거기에 많은 제작비를 투여하는 것 같지만) 이야기를 잘 못 만든다. 빤하고 구멍이 많다. 무엇보다 느리고 긴박감이 없다. 어떤 중요한 장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슬쩍 넘겨야 정말 두고두고 생각이 나는 법인데, 우리고 또 우려먹는다. 스토리 작가에게 투자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작가파업으로 드라마 제작이 중단되는 미국이야기는 정말이지 별나라 외계인들 이야기다. 미드 찬양할 입장도 아니고, 본 것도 얼마 안 되지만 미드는 볼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한다. 물론 사람 사는 이야기 뭐 별 게 있겠냐만은, 한편 한편 이야기를 구성하는 그들의 능력을 보고 있으면 정말 촘촘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한다. 드라마는 작은 아이디어나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미드처럼 시리즈로 이어지는 드라마들은 그 속에 작은 세계, 작은 우주를 구성한다. 정말 별나라 이야기인 배틀스타 갤럭티카 같은 SF물도 그렇고, 그레이 아나토미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스타워즈 같은 영화나 시리즈 드라마들, 서유기, 수호전, 홍루몽 같은 중국 장회소설들은 이렇게 끊어지며 이어지는 이야기의 조합을 통해 자기 세계를 만들고 있다.(언제고 이들을 모두 엮은 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야말로 나는 우주여행도 해보고, 의사도 되어보고, 대관원에서 시도 지어보는 것이다..

아, 하려던 이야기는 그게 아니고. 중독이었지.. ^^;;
쓸데없이 버리는 시간이고 재미도 없어져 그만하고 싶은데 그만둘 수 없는 애처러운 상황.
나에겐 그런 게 없었을까? 통화할 때는 별 적당한 게 생각이 안 났는데 생각해 보니 많다.
담배 같은 경우 언제든 끊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가 이제 끊으려면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단계로 넘어왔는데, 그건 지금 재미가 없거나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아니다. 술도 습관적으로 마시는 건 아니고.

사실 가장 중독성이 강한 건 운동인데, 이제 근육도 풀렸고 그 바닥을 떠난지 오랜지라 그건 패스하고..

비교적 최근의 예를 생각해 보면, <신의 물방울>을 보고 와인에 빠졌던 경우다.
그 전에도 와인 홀짝이길 싫어한 건 아니지만 마실 기회도 많지 않았고 뭘 알고 마신 건 아니었다. <신의 물방울>도 이야기 구조는 간단하다. 그런데 내가 독특하게 생각한 점은 주인공이 와인을 마시는 순간 펼쳐지는 풍경이었다. 어릴 때부터 미각과 후각 훈련을 와인평론가 아버지로부터 받아왔지만 와인은 한방울도 마셔보지 못한 주인공과 그 아버지에게 아무런 사랑도 받지 못했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세상의 모든 와인을 섭렵한 와인평론가 이복형제의 대결구도인데. 이들이 와인을 마시면 갑자기 호수도 나타나고, 그 호수 한켠에 여인도 나타나고, 중세의 성에도 다녀오고, 눈 덮힌 산위에도 올라가 있다. 어떤 감각의 절정? 그런데 와인 찾기는 기억 찾기와 연결된다. 끊어진 아버지와의 기억, 그리고 각자의 어머니와의 기억들. 그것은 그냥 억지로 떠올리려고 해서 생각나거나, 돌머리라서 기억 못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와인이라는 매개를 통해야만 찾아지는, 와인이라는 물질성을 통과해야만 상기되는 기억들이다. 신의 물방울 12사제는 그래서 최고의 와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태어나기 전 아버지 어머니에서부터 그들의 성장,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보지 못한 이해받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하다. 최근 편은 못봤으니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부분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져온 것이리라. 축축한 추운 날 외출하고 돌아왔더니 따뜻한 홍차에 마들렌을 내어온다. 별로 땡기지는 않았지만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한입 먹어본다. 아, 뭐지? 마르셀은 홍차와 마들렌의 조합에서 봉인된 무엇을 느끼지만 그게 무엇인지 떠올릴 수 없다. 다시 한잎 베어물고 그게 무엇인지 찾기 위해 그 느낌에 집중해 본다. 그 맛의 뿌리를 더듬어가자 기억의 봉인이 풀리며, 어릴 적 고모네 집에서의 장면이 "상기"된다. 그 기억은 머리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었겠지만 억지로 떠올리려 한다고 해서 떠올려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기억은 머리속이 아니라 그 물건에 들어있다고 할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물건을 만졌다고 갑자기 딱 상기되는 것도 아니다. 그 물질에 새겨진 기억을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찾아가야만 되찾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이렇게 프루스트의 <시간>은 특정한 물질, 장소에서 되찾아낸 지나간 기억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신의 물방울>에서 그 매개는 와인인 셈이다.

와인? 그냥 맛있기만 한걸? 아무리 마셔봐도 내 눈앞에는 꽃밭도 펼쳐지지 않고, 호숫가에서 다소곳이 목욕하는 그녀도 나타나지 않아. 아무래도 난 감각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퍽!!)

불행인지 다행인지, 와인에 미치기 위해서는 돈이 조금 많이 필요하다. 아직도 나는 2-3만원대 와인이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그 가격대에서 살 수 있는 맛있는 와인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조차 종류별로, 원산지별로 다 마셔보려면 꽤 많은 돈이 들어간다. 맥주 한잔 하고 속 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때 와인에 미칠 뻔 했지만, 애달픈 속을 추스르며, <신의 물방울>만 꼭꼭 챙겨보며 그냥 잊기로 했다. 그래도 아직도 가끔 코스트코 와인 진열대에서 기웃거리다가 너굴에게 쥐어박히는 일이 다반사다. 보는 것 가지고 너무 뭐라 그러지 말라구...

조금 다르지만, 음악 쪽 만화로는 <피아노의 숲>이 비슷하다. 카이의 연주는 사람들에게 피아노의 숲을 시각적으로 연상시키고, 숲의 바람을 촉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아직 연주하는 곡이 매개가 되어 각각의 곡마다 다른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못 본 것 같다. 카이는 사람들을 자신의 숲으로 인도할 뿐이다.  (음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로 나는 아무런 이미지나 감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듣기에 즐거울 뿐이다.. ㅡㅡ;;)

그렇담 이제 <노다메 칸타빌레>로 넘어갈 차례다.
일본 드라마는 거의 본 게 없다. 그 유명한 <하얀 거탑>의 바람이 몰아칠 때도 그닥 땡기지 않아 한국, 대만, 일본의 거탑 전부를 안 봤다. 노다메도 별로 볼 마음이 없었는데, 밥먹다가 룸메가 틀길래 슬쩍 봤는데 . . 화~ 바로 뻑 가 버렸다. 다행히 일드는 짧다. 미드처럼 시리즈 10까지 가고 그런 일도 없다. 노다메가 시즌 3,4로 가지 않는 게 다행이고 불행이다.

클래식은 이전까지 기껏 들어봐야 리히터의 피아노곡 몇 개, 애너 빌스마의 첼로곡 몇 개 등등만 옆에 두고 가끔 들을 뿐이었다. 그런데 노다메의 유쾌함에 빠져, 거기에 등장하는 곡들을 시작으로 온갖 클래식 음반을 뒤지고 다녔다.
다행히 중국 e-mule에는 온갖 명반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불행히도 인터넷 속도는 너무나도 느렸다. ape나 flac 같은 무손실 음반을 받는 데 며칠, 몇 주가 걸렸고, 고클래식 같은 곳에서 돈 내고 다운받아도 속이 터진다. (한국에서는 몇 분에 끝날 일이다.) 그렇다고 그 정도를 못 참겠는가? ^^;;
노다메는 떠났지만 명반은 내 하드에 남았다. 재즈까지 합치면 100기가 가까운 음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고, 따로 이동하드에 보관중인 압축도 안 풀린 놈들까지 합치면, 글쎄 아직 듣지 못한 놈들이 너무 많은 셈. 물론 이조차 정말 몇년에 걸쳐 수집하고 들어온 사람(모씨는 테라 단위라고 한다)에 비하면 새발의 피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차고도 넘친다. 음반 수집의 단계를 넘어 클래식에 대한 모든 것으로 넘어갔다면 나의 중독은 꽤 심각해졌을 것이다. 내가 듣는 음악을 그냥 느낌이 아닌 분명한 느낌, 지식으로 알고 싶어 책을 뒤지기도 했는데 적당한 책이 발견되지 않았다. 딱 100기가 수집에서 멈췄기에 망정이지. 나는 아직도 내가 듣는 음반을 부르는 법을 모른다. 그냥 리히터의 바흐 무슨 곡, 그 정도다. (소나타 몇번 몇단조 이런 거 몰라!) 그리고 여기서 만족한다. 다행히도 다른 사람과 누구의 무슨 곡이 좋네, 뭐가 명반이네 하는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다.

중독되고 빠질수록, 높이 올라갈수록 아주 작은 차이에 민감해진다. 그 작은 차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와 비용을 감수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작은 차이에 연연할 정도로 지금 나에게 그것이 필요한가? 중독되었을 때 가장 필요한 질문이 이것인 것 같다.(그런데 문제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중독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디오, 자전거, 카메라 등등에 빠진 사람들은 아주 미세한 음의 차이, 페달을 밟을 때의 작은 느낌, 빛을 잡아내고 색깔을 고정시키는 특정 장비의 힘에 연연해 한다. 높이 올라갈수록 그 차이는 굉장히 중요해진다. 그런데 장비만 갖춘다고 높이 올라가지는 건 또 아니라는 게 함정이다. 비싼 와인이 우아함을 보증할 수 없듯이, 고급장비가 감각을 끌어올려 주는 건 아니다. 아, 물론 원액을 희석한 3000원짜리 마주앙(요즘도 있나?) 먹으면서 와인을 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만. 격식있는 자리에서 기백만원짜리 와인을 마시는 불편함을 감수하느니, 편한 친구들과 할인마트 와인을 마시면서 그 맛과 분위기를 음미할 줄 아는 정신. 헝그리와는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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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4. 15. 18:10
5시 10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맑고도 경쾌하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하늘은 검푸른 玄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시골에서 났지만 닭 홰 치는 소리와 아침을 맞은 적은 없다.
닭의 울음소리는 아침을 깨운다고들 한다.
새의 울음소리는 내가 생각하는 아침이 되기도 전에 시작된다.
아직도 잠들지 않았냐는 모닝콜이겠다.

5시 10분이 되면 어김없이 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맑고도 경쾌하다.
공원도, 산도 없는 도시의 한복판, 나무라고는 아파트 단지의 조경수 뿐인데,
한낮, 어디서 무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어김없다.
시끄럽지 않지만 또렷한 소리는 남들은 하루를 끝낸 지금 무얼 시작하려고 아둥바둥이냐고 묻는다.

마음 한구석에 떨쳐내지 못한 생각들을 글로 털어버리려고 써 보지만
쉽게 정리되지도 털어지지도 않는다.
이 글은 미완성 비공개글로 그냥 남을 것인가,
아니면 지나온 한 흔적으로 이 블로그에 남겨져 있을 것인가.
다만 내 머리속에서 조금 지워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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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4. 3. 00:22
별로 과학적인 근거는 없겠지만 나는 정신이 몸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신력으로 버텨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사람이 없지는 않으나, 내가 보기에 그건 정신력이 아니라 욕심, 혹은 욕망 때문에 몸에게 너무 가혹한 짓을 하는 거다. 링겔 맞아가면서 공부하는 것을 택한 건 그 사람의 입장인 것이고, 나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몸은 최대한 살살 달래가면서 사용해 줘야 한다. 앞으로 한참을 같이 지내야 하지 않는가.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기분이 울적할 때 웃는 표정을 지어보라고 한다. 양미간을  펴고 입도 옆으로 길게, 얼굴에 근육도 느슨하게 만들어서.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이다. (물론 정말 슬퍼야 할 때 웃는 표정을 짓다가는 조커 취급 당한다. why so serious, son?)
자세는 우선 어깨를 낮춰야 한다. 긴장되어 있을 때 잘 보면 어깨가 들려 있다. 컴퓨터를 오래 쓰다 보면 자연히 어깨가 위로 들리기 쉽다. 팔과 어깨선이 만나는 그곳에 긴장을 풀고 어깨를 낮춰라. 그리고 허리는 꼿꼿하게 세우고. 그렇다. 참선하는 자세다. 앉아 있을 때든 서 있을 때든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어깨를 낮추고 팔을 늘어뜨려 보자. 별 효과는 없을 수 있다만. (이건 태극권 하는 애들, 혹은 이연걸 어깨를 잘 보면 연상이 될까?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애들과는 달리 무술하는 사람들 어깨는 각이 없이 둥글둥글하다. 태권도는 제외다.)

대학원생이 된 후, 그리고 중국에 혼자 와 있으면서 몸을 많이 잊고 지낸다.
억지로 몸을 가지런히 하려고 해도 어느새 내 허리는 구부정해져 있고 어깨는 들려 있으며, 양 미간은 내천자를 그리고 있다. 입술은 꽉 다문 채, 혹은 앞으로 삐죽 내민 채. 자세가 굳어져서 어떨 때는 턱이 아플 지경이다. 입 꽉 깨물고 무슨 비장한 일을 하는 걸까?

편안하게. 몸을 살살 달래가면서.. 앞으로 이 친구와 같이 지낼 날이 적지 않기에, 애 보듯이, 강아지 훈련시키듯이 살살 비위 맞춰가며 칭찬도 해줘가며 잘 데리고 살아야 한다. 막 부려도 따라올 놈이긴 하나, 이놈 욱 하는 성질이 있어 언제 배신 때릴 지 모른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루에 많은 시간을 앉아 있지만 사실은 비능률적이다. 시간 정해놓고 몰아서 6시간을 투자하는 게 훨씬 능률도 좋고, 몸에도 좋고, 내 정신상태에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이미 늦었기에, 지금 당장 실행하지 못하고, 이게 끝나고 나면, 다음부터는...이라는 단서를 다는 것이다.

정신이 원하는 대로 몸을 부리고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습관으로 몸이 그것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하루하루가 쌓여서 내 정신도 만들어질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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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
示衆/flaneur, p.m. 4:30 2009. 3. 30. 01:56
아파트 단지 앞에 얼마 전부터 신강 라면집이 생겼다. 출출할 때 라면 끓이는 것보다 나가서 한 그릇 먹고 오는 게 싸고 빨라 가끔 이용하곤 한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인지라 손님도 아주 많지는 않아, 밀가루를 미리 반죽해 뒀다가 주문량만큼 떼어다가 수타라면을 만든다. 얼마 전에 본 <누들로드>도 생각나고 해서 라면을 뽑을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곤 한다. 미리 반죽이 되어 있다고 하지만, 여러 차례 때리고 뽑고 늘이고 하는 사이에 일정한 두께의 탄력적인 면발이 만들어지고, 바로 뜨거운 탕 속으로 직행이다.


면을 뽑는 장면이 보기보다 쉽지는 않겠지만, 저렇게 면 뽑듯이 뭔가가 제대로, 제때에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말랑말랑한 것 속에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몸도, 생각도, 생활도 말랑해져 경계가 사라진다.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전, 아직 말랑말랑할 그 때,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보려고 이리 주물럭 저리 주물럭 해보다가 다시 짓이기기를 몇 번. 그조차 딱딱하게 굳어버리면 쓸모가 없어지니 계속 일정한 점성을 유지시키면서 다시 주물럭.


이미 초벌은 끝난 번역이지만 다시 보면 고칠 게 또 나오고, 지난번에 놓쳤거나 해결 못한 것은 여전히 헤맨다. 주욱 연결되는 문장을 앞에서 끊어도 말이 되고 뒤로 연결시켜도 말이 되는데, 원문에서는 묘한 긴장감을 유지하던 말들이 이것 아니면 저것에로 무게중심이 이동해 버린다. 그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시킬 수 있을까.. 아무려면 어때도 상관없을 아 다르고 어 다른 차이에 집착하다, 전체적인 맥락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결점이 있더라도 책으로 만들어지고 나면 딱딱한 하나의 물건이 되어 있을 것이나, 아직은 계속 움직이는, 형태를 갖추지 못한 말랑말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뼈 없이 근육? 지금은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가다듬는 상태인데, 근육의 결에 파묻혀 뼈를 잃어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갑자기 길을 헤맨다는 느낌에 아무 책이나 꺼내 읽어 본다. 이 편안함이란~..
가끔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단단한 그 길에 그냥 몸을 맡길 필요도 있겠다. 더듬더듬 길인지 뭔지도 모른 채 가다말다 하는 것보다는, 그냥 표지판을 보고 이 길이 맞다고 확신하고 가 보자. 어쩌면 그게 내 몸의 점성을 일정하게 유지시켜주지 않을까?

다 만들어진 라면을 먹으면서 면발은 두껍니 어쩌니, 너무 질기다느니 물렁하다느니 한 마디 던지기는 얼마나 쉽나. 그런데 내 눈이 만족하는 면발을 내 손으로 뽑기는 또 얼마나 힘든가. 眼高手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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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