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카테고리 없음 2010. 5. 25. 08:01

두 가지 식물성 기호품이 양대 제국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영국은 중국의 차를 수입하면서 풍요로운 오후와 건강한 제국의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아편은 무기력한 향락의 밤을 중국에 선사하였고 중국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영국의 차를 바다에 던진 보스턴 차 사건은 미국의 독립을 가져왔지만, 영국의 아편을 바다에 던진 중국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해 반식민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게 중국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상해라는 '자그마한' 도시가 있다.


두 장의 지도


남북이 뒤집혀 그려진 이 지도는 왼쪽 하단에 위치한 상해 현성(縣城)을 중심으로 각 현의 관할영역과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육지는 실제 크기에 비해 축소되어 있으며, 그물처럼 이어진 운하는 실제보다 훨씬 큰 것으로 상세히 그려져 있다. 왼쪽으로 흘러내려오는 황포강(黃浦江)이 우리 한강 정도의 넓이라면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운하는 대부분의 경우 실개천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단순한 지형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지도에서 주요도로가 맡고 있는 역할을 이 당시 수로가 맡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평야를 이렇게 잘게 분할해야 할 만큼 땅에 대한 이용도가 낮고 육로를 통한 교역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반면 운하를 중심으로 한 수로는 강남지역 교통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림 1> 19세기 초 상해 현성을 중심으로 운하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의 교통에 물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왼쪽(동쪽)은 황포강이고, 현성의 하단(북쪽)에 비교적 큰 운하가 소주하(蘇州河; 지도에는 옛 지명인 오송강(吳淞江)으로 표기되어 있다)이다. 북경에 있는 황제의 시선으로 그려졌기에 남북이 전치되어 있다.

개항 이전의 상해는 '그저 작은 어촌'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개펄과 진흙으로 뒤덮인 작은 어촌이 개항과 함께 서구적 근대도시로 탈바꿈한 것으로 말이다. 영국의 조계지가 건설된 것이 상해의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편전쟁의 결과 영국이 5개 항구의 개방을 요구했을 때 상해가 선택된 것은 '그저 작은 어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네 도시가 한 성의 성도(광주廣州)이거나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 원래부터 대내외 무역의 거점으로 인정받던 곳(하문厦門, 복주福州, 영파寧波)인 반면, 황해에서 장강을 따라 들어와 그 지류인 황포강으로 진입하고도 18km를 더 가야 하는 상해는 얼핏 보기에 대외무역을 위한 지리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상해는 이미 청대 초기에 해운과 하운, 남과 북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상당히 발달한 상업 항구로 성장해 있었다. 운하와 장강을 통해 내륙의 물산을 밖으로 실어 나르거나 외부의 화물을 내륙 깊숙이 보급시키는 연결고리 역할을 맡고 있었고, 아울러 심해를 항해하는 데 적합한 광주와 복건 등 남해를 운항하는 배들과 수심이 얕은 황해를 항해하는 바닥이 얕은 사선(沙船)이 서로 화물을 교환하는 곳이 상해이기도 했다. 또한 개펄의 증가로 인한 실제 운행구간의 축소, 고가의 운송료 등 운하를 통한 강남내륙의 세금수송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어 해상을 통한 새로운 항로가 검토될 때 시야에 들어온 것 또한 상해였다. 그 중요성은 일찍이 1756년 동인도 회사의 피구(Pigou) 씨가 "무역에 안성맞춤인 도시"로 묘사한 바 있고(이사벨라 비숍, <양자강을 가로질러 중국을 보다>, 52쪽),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애머스트 호가 중국해안을 정찰한 후 상해에 대해 "이렇게 거대한 상업항구가 줄곧 홀시되어 왔다는 점은 실로 이상하기 그지없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동인도회사 직원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가 중국사정에 밝은 선교사 구츨라프(Charles Gutzlaff) 등을 대동하여 6개월간 실시한 이 정찰에서는 군사적 정보수집과 함께 중국의 주요 무역거점들이 상세히 검토되었다. 마카오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연해를 따라 조선, 오키나와를 거쳐 다시 마카오로 돌아간 이 정찰의 항로를 살펴보면 훗날 남경조약에서 영국이 왜 장강 이남의 다섯 항구를 개항지로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중 구츨라프가 남긴 상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상해의 지리적 중요성은 광주에 뒤지지 않는다. 이곳은 상업이 무척이나 활발하다. 만약 유럽 상인들에게 상해에서의 무역을 허락한다면 이곳의 지위는 매우 격상할 것이다. 상해에서 소비되는 외국상품은 엄청나게 많다. 이렇게 거대한 상업항구가 줄곧 홀시되어 왔다는 점은 실로 이상하기 그지없다. 중국법률에서 금하고 있어 이곳에서 무역하려는 시도는 저지되었다. 이런 것들이 어려운 점이긴 하지만 극복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Gu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1832,1833,Part.Ⅱ,1834.(http://military.china.com/zh_cn/history2/06/11027560/20050401/12212129_2.html)에서 재인용; <“阿美士德號” 1832年上海之行記事>, 《上海硏究論叢》 제2집(上海社會科學院出版社, 1989년), 269-287쪽 참고.


전자는 그저 여행기에 그친 반면 후자는 훗날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남경조약(1843년)으로 개항된 다섯 항구 중 상해가 선택된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



<그림 2> 상해 현성 내부의 운하까지 상세히 묘사된 반면, 영국 조계지와 와이탄에 해당하는 지역은 터무니없이 작게 그려져 있다.

다시 지도로 돌아가서 상해 현성을 살펴보면 둥글게 생긴 성곽과 그를 둘러싼 해자/운하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 내부로 관공서와 문묘(文廟), 성황묘(城隍廟) 등 주요 지점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을 연결하는 것은 역시나 운하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방위의 성문 중 3곳은 수문을 포함하고 있어 현성의 출입에도 운하는 상당히 유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동쪽(그림 왼쪽)의 강변을 따라 형성된 부두는 상해를 지탱하는 무역의 거점이며, 그 사이에 세관(江海關)이 자리잡고 있다. 명대에 성곽이 세워진 것(1553년)도 왜구와 해적으로부터 이곳의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성의 동쪽으로 부두에까지 이르는 길들은 각종 잡화들이 권역별, 도로별로 판매되고 있었다(두시가豆市街, 화시가花市街, 채의강彩 衣巷 같은 거리이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개항 이전에는 가장 번성했을 상해 현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육상교통로의 부재이다. 운하 곳곳에 상세히 묘사된 교량의 존재로 알 수 있듯이 도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남 지역의 다른 물고을(水鄕)들과 마찬가지로 육상교통이 상해를 살아가는 데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현성의 북쪽(그림 하단/붉은색으로 표시)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터이다. 이곳은 농경지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풍수가 훌륭하다 하여 곳곳에 묘지만 가득하던 곳이다. 그래서 서양 "귀신"(洋鬼子)들이 들어와 이곳을 차지할 때 끼리끼리 논다고 비아냥대던 곳, 바로 훗날의 영국 조계지이다. 현성과 거의 비슷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게 그려진 이곳이 어떤 방식으로 변화하고 그 변화가 상해 전체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아래와 같이!



<그림 3> 1855년에 제작된 영국 조계지와 와이탄을 모습을 담은 평면도. 앞에서 제시한 상해현성의 지도와 비교해 볼 때 원래의 유선형 공간을 구획하는 바둑판 모양의 직선도로가 인상적이다. 물길이 아닌 육상도로가 부각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변화는 개항 후 10여 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인구 또한 1844년 50명의 외국인 거주자가 1855년 20,243명으로 늘었다.


1855년에 제작된 이 지도(그림3)는 개항 후 고작 10여 년 만에 그 보잘것없던 '작은' 개펄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나갈 것인지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불구불 그물처럼 이어진 운하를 대신하는 것은 정방형으로 곧게 뻗은 직선도로이다. 비록 수로에 의해 조계지 전체의 권역은 구부러져 있을망정 그 내부는 바둑판처럼 잘 정돈시켜 구획하고 있다. 제작자와 사용자에게 기여하는 중요도에 따라 탄력적으로 크기를 달리하던 지형은 이제 정확한 방향표시와 함께 실측에 의한 실제크기와 모양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이 두 지도의 대비를 통해 자연적으로 생성된 물길에 몸을 맡기는 중국 문화와 객관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개척하는 서구 문화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 사태를 단순화시키는 발상일까? 지도에서 두 문화의 세계관을 떠올리는 것이 지나치다면 아래 인용문은 어떠한가?

 

굽은 길은 당나귀의 길이며, 곧은 길은 사람의 길이다.

굽은 길은 흐뭇한 기쁨, 안일함, 느슨함, 느긋함, 동물성의 결과다.

곧은 길은 반작용, 작용, 활동이며 자제력의 결과다. 그 길은 건강하고 고귀하다.

도시는 삶과 집약된 노동의 중심이다.

느슨하고 느긋한 민족과 사회, 무기력한 도시는,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과 사회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지고, 정복되며, 흡수된다.

그렇게 해서 도시는 죽고 주도권은 이양된다. (르 코르뷔지에, <도시계획>, 24-5쪽.)


"당나귀의 길, 사람의 길"의 은유는 즉각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운하를 통한 뱃길은 느슨하고 안일한 "당나귀의 길"이며,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에 의해 상해가 순식간에 정복되고 흡수되다시피 한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당나귀와 사람의 대비는 실제로는 자연과 기계의 대비로 볼 수 있다. 인간이성의 순수형식의 구현인 기계를 위한 길은 출발지점과 목적지를 최단시간에 연결하는 직선으로 대표된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거칠 수밖에 없는 사이공간은 더 이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똑바로 걷는다. 그는 가는 곳을 알며, 어디로 갈 것인지를 정한 다음, 그곳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당나귀는 갈짓자를 그리며 걸어가고, 조금 빈둥거리며, 믿음이 가지 않는 멍한 두뇌로 큰 장애물들을 비켜가고, 비탈길을 피해, 그늘을 찾기 위해 갈짓자를 그리며 간다."(르 코르뷔지에, <도시계획>, 19쪽.)

아무튼 상해는 토지에 대한 이용보다는 수운을 중심으로 한 연결고리의 역할에 충실했던 시기에서, 땅이 부동산이 되고 잘 구획된 도로와 그 위를 달리는 선진적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운하를 메워 도로를 만드는 시기로 변화해간다.(양징방을 메워 만든 연안서로(옌안시루) 등) 여전히 강과 바다를 통한 교역은 상해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건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상해라는 땅덩어리 자체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행동하고 자제하는 민족"의 하나로 자임했을 영국에 의해 만들어진 조계와 그 도로가 어떤 방식으로 상해라는 공간 전체를 변화시킬지 위의 지도는 예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말과 마차가 달리는 길인 "마로(馬路)"가 도로의 일반명사가 되고, 그 마로는 경마장으로 곧장 통하고 있으며, 그 사이공간은 보행자가 아닌 마차가 우선시된다. 와이탄을 넘어 한 블록만 들어가도 "영국" 조계지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중국인 혹은 중국과 관계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곳은 그 땅에서 일상생활을 펼치는 중국인들이 아닌 서구인의 것이었으며 서구인의 이익에 부합되는 활동만이 허용된 곳이었다.

 

* 이 글은 <중국 근대의 풍경>(그린비, 2008), "제3장 상해, 근대 중국을 향한 길"의 도입부를 재편집한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지도와 옛날 이미지 자료를 이용하여 상해의 옛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Posted by lunarog
선배 하나와 후배 하나가 상해에 왔다.
여러 번 다녀가기도 했던 분들이라 잠깐 만나서 점심이나 먹는 정도로 헤어졌다. 바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번거럽고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 같은 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먼저 연락도 하지 않는 건 좀 섭섭했다. 귀찮다고 너스레를 떨긴 하지만, 우리도 그런 기회에나 한번씩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에서 관광객이 되어 보는 것 아니겠나.

아무튼. 일행들과 복주로(푸저우로)의 오래된 광동식 식당, 행화루(싱화러우; 杏花樓)에서 딤섬 위주의 점심을 먹고도 왠지 좀 아쉬워 간단히 커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간단히"라고 하길래 근처에서 대충 마시려다, "그래도 분위기 좀 좋은데 없냐?"고 덧붙이길래 이곳이 생각났다.

M on the bund!

저녁 시간에는 식사 위주인데(바로 위층에 칵테일과 맥주 등이 구비된 글래머 바로 술손님을 유도한다.) 밥시간이 아닌 한가한 오후에는 차를 마시며 와이탄과 푸동을 조망할 수 있다.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야외 테라스에서 수다를 떨었다. 날씨는 흐렸지만 몇 주째 내린 비 때문인지 시야는 트여 있었다. 솔직히 상해 있으면서 이렇게 가시거리가 긴 날은 몇번 만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엑스포 전까지 와이탄 앞 도로와 광장 조성을 끝내기 위해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라 온통 헤집어 놓고 있다.
(관련 포스팅: 상하이 와이탄 광장공사 1 - 지하도로 , 상하이 와이탄 광장공사 2 - 넓어지는 와이탄)


예전 포스팅에도 설명했듯이 크레인 아래에서 시작해 지하로 도로를 내고 지상공간은 차도를 축소하고 광장을 넓히는 공사가 진행중이다.


대충 둘러보고 나니 이쁘게 커피가 나왔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시켰는데, 솔직히 커피맛은 별루였다. 어차피 자리세. 옛 건물에서 와이탄을 내려다 보며 수다 떠는 재미로 왔고, 충분히 제 값을 했다.

야외에서 마시다가 비가 한두 방울 떨어져 실내로 들어왔다. 실내 분위기는 대충 아래와 같다... 금요일 오후여서 한가롭고 조용해서 좋았다.

와이탄 야경을 보면서 식사를 하거나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할 생각이라면 옆 건물인 New Heights와 함께 M on the bund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론리 플래닛 같은 여행책자에 잘 소개되어 있어 저녁시간은 항상 사람들로 붐비긴 한다.  홍콩 M on the Fringe는 20주년, 상해는 10주년, 그리고 올 9월에 북경에 새로운 지점이 생긴다고 한다. 10년 단위로 북진을 해 온 셈이다.

Posted by lunarog
첫날의 항구 찾기, 혹은 황포강변 보기에 실패한 다음 날(4월 16일) 비슷한 시간에 다시 자전거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보았다. 기필코 강을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 비슷한 게 생겼기 때문이다. 설마 강으로 통하는 길이 하나도 없으려고.

그런데, 정말 없었다.

어제와 달리 북쪽으로 가다가 옆(동쪽)으로 빠지는 큰길(쥔공루; 军工路)로 접어들었다. 역시 강이 가깝다는 건 느낄 수 있었고, 제법 큰 길로 화물차만 다니고 있었다.

01

사람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고 자전거 길도 텅텅 비어 있다. 길에는 먼지만 가득하다.


가도가도 이런 길만 반복되길래 무턱대고 경비가 지키고 있는 입구로 들어가 봤다. 경비에게 들어가서 강을 좀 구경해도 되겠냐니까, 자기들 통로는 안 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다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되돌아가서 아까 지나쳐온 통로를 그냥 들어가 버렸다. 자동차 통로는 잠겨 있고 사람과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쪽문이 열려 있었는데 다행히 아무도 나를 잡지 않았던 것이다. 흠, 여기가 바로 통로로구나! 라고 생각하며 여유만만 강쪽으로 이동하며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아래 사진은 색깔의 대비가 예뻐 이리저리 찍어봤는데 건진 건 없고 그냥 전체적인 모양만 기록으로 남겨둔다.

이 화물차 뒤로 강이 보이고 지나다니는 배가 보였다. 와~~ 드디어 한강변 같은, 혹은 와이탄에서 보던 그런 강변의 느낌을 받을 수 있겠구나. 그런 관광지는 아니면서 한적하게 산책을 할 수 있겠구나. 혹시 일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말이라도 건네 봐야지~~ 라는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어이, 거기 뭐해? 어떻게 들어왔어!!? 이쪽으로 와봐!!"

돌아보니 공안이 초소에서 걸어나와 나를 쳐다보며 손짓하고 있었다. 강 바로 앞이었다.
왠 공안? 갑자기 살짝 얼어서 어리버리 오라는 건지 빨리 나가라는 건지 헷갈렸다.

이쪽으로 와바. 누구냐?
어, 그게,.. 전 유학생인데요?
여기서 뭐하는데?
그냥 강 볼려구요.
집이 어디냐
근처에요. 산책 나왔어요.
신분증 꺼내봐. 여권 가져왔어? 학생증은?
산책 나왔다니깐요. 신분증 없어요.

나이도 나보다 어린 것 같던만, 존대어가 따로 없지만 왠지 그쪽은 하대하고 나는 공손하게 높임말을 하는 분위기였다.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얘가 좀 어리버리한 것 같아보여 그냥 철없는 외국인이 어쩌다 왔나보다 하고 보내줬다. 그런데 입구에서 나가려니 이제 또 경비가 잡는 것이었다.

누구냐?
그게.. (우쒸, 아까 들어올 땐 잡지도 않던만!)
어디 갔다 온 거야?
아까 이쪽으로 들어와서 저쪽에 갔다가 저기 공안들이 보내줬어요. 나 가도 된다고 했거든요..?
신분증 보자. 들어온지 얼마나 된 거야?

똑같은 답변을 또 해야되는 난처한 상황에서 공안들이 차를 몰고 와서 설명하고 그냥 보내줬다.
지가 딴짓한다고 들어오는줄도 몰라놓고 말야. (심문 받는 느낌은 너무 싫어~)


즉, 지도로 표시된 강으로 통하는 길은 해운회사나 세관의 허가를 받은 화물차들만 통과가 가능했다. 곳곳에 위와 같은 금지표시, 행인도, 자전거도 승용차도 들어올 수 없다는 표시가 되어 있다.

왜 그럴까? 왜 한강처럼 강을 열어놓고 일반인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지 않는 걸까?
물이 더러워서? 그렇담 와이탄도 막아야지. 와이탄을 흐르는 물이 이쪽으로 빠져나가는 거니까.
가만히 강과 지형의 구조를 생각해 보니, 황해에서 장강을 거쳐 오송구 입구에서 황포강으로 접어들면 곧장 내륙으로 들어갈 수 있다. 황포강은 화물선과 여객선이 드나들 수 있는 큰 강이고, 와이탄 아래쪽에 여전히 큰 항구가 남아 있다. 즉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밀항과 밀무역이 가능한 것이다. 강변을 따라서는 허가받은 해운업체와 세관이 줄지어 있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하겠다.

확인차 인터넷으로 입체지도를 열어보니 역시 예상대로이다. 조깅코스 한강변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각 이미지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내가 공안에게 잡혀 심문받은 곳이다.)



기필코 허가받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곳을 들어가 볼 생각으로 그 다음날에는 임시정부90주년 기념 한국해군 입항식에 참여한다. 3일 연속 강변보기 프로젝트 되겠다. 위치는 소주하와 황포강이 만나는 곳, 위 지도에서 빨간색이 시작하는 와이탄 북쪽의 군항이다.

'FIN-DE-SIECLE SHANGHAI > 弄堂을 거닐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하이 템즈타운  (4) 2009.06.02
외백도교 다리 너머..  (8) 2009.04.18
오송구(항구) 가는 길 (1)  (1) 2009.04.16
Posted by lunarog
지도를 보면 내가 사는 곳에서 황포강이 장강과 만나는 오송구가 멀지 않다.
가끔 밤이면 뱃고동 소리가 들려올 때도 있고 해서 언제고 한번 다녀와야지 하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기회를 만들지 않으면 집밖에 나갈 일도 별로 없고 해서 동호회 가입 후 엠티를 갔다가,
족구 몇 판 하고 다리가 맛이 가 버렸다.
다리에 활력이나 더할 겸 자전거를 타고 오송구 쪽으로 향해 본다.
지도로 예상한 지점까지는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강이 아주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강을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가면 모두 막혀 있거나 해운업체로 통하는 길이라 강쪽으로 갈 수 있다고 해도 출입을 막고 있었던 것.

혹시나 하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녀 봐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 지도로 확대해 보니, 우리 집에서 북쪽으로 그냥 쭈욱 가서는 강으로 통하는 길은 없다.(컨테이너 화물트럭은 물론 갈 수 있겠지만..) 중간에 빠지는 큰 길을 가 보거나, 시작부터 돌아서 가는 길로 다음에 다시 가볼 수밖에 없겠다.

하여튼 이렇게 헤매느라고 편도 30분 길을 두 시간 가까이 허비.

막힌 길에서 친구를 배웅하고 다시 들어가는 아주머니에게 항구쪽으로 가는 길이 있는지 물어봤다. 어디어디로 가라는데, 아마도 자기들이야 그쪽으로 다니는지 몰라도 나는 갈 수 없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그래도 기계와 건축자재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강으로 흘러드는 운하 옆까지 드디어 왔다만. 이미 어두워져서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어차피 운하를 보려는 게 아니라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보는 게 목적이었는데.. 지게차와 컨테이너만 가득 쌓여 있다.


돌아오는 길은 컴컴하고 먼지가 많이 날리지만, 다리에 과부하를 좀 주겠다는 원래의 목적이야 이룬 셈이다.

광고판을 지나치다 지붕 처마 같은 느낌이 들어 찍어봤는데, 네모에 삼각형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몰라 한참을 요리조리 돌려 봤다만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다.(사실 어떤 게 좋은 건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고 해야겠지?) 뭐든 제대로 하려면 힘들다.

"眼疾手快"라는 (광고업체의) 광고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눈도 빠르고 손도 빨라야 한다"는 정도의 뜻이다. 그 앞에 쓰여진 말은 "좋은 위치를 잡으려면...(好位置就要...)"이다.
눈도 느리고 손도 느리니, 빛도 잡히지 않고 형체도 포착하기 힘들다.

별 모양은 없지만 튼튼하게 아무 불평 없이 3년을 잘 버텨준 자전거다. 가끔 기름칠도 하고, 상으로 장바구니와 자물쇠도 바꿔 줬다. 3년 타고도 삐거덕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자전거, 중국에서 보기 힘들 거다!!

이것도 운동이라고 밥맛이 좋아졌다. ^^;;

2009. 06.03.
나중에 다시 확인해 본 결과, 원래 지도에서 봤던 것처럼 길을 타고 올라가면 오송 항구가 나왔다.
황포강으로 들어가는 조그만 운하를 건너는 고가도로를 자전거로는 못 간다고 착각했던 것.
다시 가 보니 인도와 자전거 도로가 고가도로 옆으로 나 있었다.
오송항구에서는 창사도, 충밍도 등 장강하구의 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고, 그냥 황포강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통근배도 있었다. 와이탄과 푸동을 오가는 배와 마찬가지였다..

Posted by lunarog

2.  와이탄에 새로 설치될 광장

 

 앞에서도 말했듯이 와이탄은 상해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1945년 영국에 의한 개항 이전에도 물론 상해라는 지명이 존재했지만, 중국 전체에서 그 존재감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광주(광저우)가 있고, 복건의 하문(샤먼)이 있고, 바로 옆에 절강의 영파(닝뽀)처럼 바다에서 바로 들어올 수 있는 항구가 있는데 상해가 왜 필요했겠는가? 영국이 전략적 필요에 의해 이곳을 요구했고, 영국의 조계지가 만들어졌고, 그러다가 중국 근대화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고, 그래서 현재의 상하이도 있는 것이다. 그 상징적인 곳이 바로 와이탄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30년대의 상하이

 

지금 우리가 와이탄이라고 말하는 곳의 상당부분은 영국조계지의 동쪽 경계인 황포강변을 말한다. 항상 강물이 넘쳐 질퍽거리던 곳에 둑을 만들고(그래서 bund이다.) 그 안쪽에 건물을 세웠다. 와이탄은 항구의 역할과 함께 서양인들이 한적한 저녁에 산책을 즐기는 공간으로도 활용이 되었다.(와이탄 산보객(外灘客; bunders)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항구의 역할은 거의 사라졌고(와이탄 남쪽의 "16포"는 여전히 항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예전 닝뽀에서 배를 타고 왔을 때 여기에서 내렸다.), 산책의 공간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다만 거주자의 산책이 아니라 관광객과 호객꾼의 산책만 남아 있다.

 

그래서 관광객과 호객꾼들에게 보다 쾌적하고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주요 목적은 2010년 엑스포 대비용이다.) 그에 앞서 10차선이던 와이탄 앞 지상도로(중산동일로)를 4차선만 남기고 지하로 옮기는 공사를 진행한다. 넓어진 지상 공간을 활용하여 주요 거점 4곳에 광장을 설치하게 된다.

 

와이탄 광장공사 전체 평면도. 광장이 추가되었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넓어졌다.

원래의 황포강 연안 산책로도 구간에 따라 상당히 많이 넓혀지며, 비스듬히 올라갈 수 있는 완만한 비탈길도 확장했다.


 

1. 왼쪽에서부터 보면, 와이바이두 다리를 건너 소주하를 넘어 오면 황포공원(黄浦公园)이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출입구가 따로 있고 입장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서쪽 입구에 있던 대문과 담장을 헐고 그 앞을 터 황포공원과 광장을 연결시키게 된다. 황포공원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와이탄의 기점 역할을 다시 제대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황포공원(원래 명칭은 "공가화원(public garden)", 혹은 와이탄공원)은 예전의 잘못된 소문이지만 많은 중국인들이 민족적 수치로 생각하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팻말로 유명하던 곳이었다. 상해의 제국주의적 기운을 누르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민족적 자존심을 좀 세우려는 것인지, 지금은 창처럼 뾰족하게 인민영웅기념탑이 설치되어 있다(소주하와 황포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원의 중심부가 탑이다). 이제는 이소룡의 분노한 발치기로 그 팻말을 뽀개지 않아도(정무문), 개와 중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언제든지 출입이 가능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확장된 남경로 입구의 "천이광장". 인민해방군 창건자의 한 사람인 "천이"는 해방 후 상해 초대 시장을 역임했다.

 

2. 남경로(南京路) 입구에 있던 천이광장(陈毅广场)은 지금보다 규모를 더욱 확장하게 된다. 원래 남경로 입구는 예전 영국조계 시절부터 각종 기념행사의 주요한 공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도로를 잘 살펴보면, 고속주행 자동차는 지하도로를 이용하기 때문에 지상에는 버스 등 공공교통 수단 및 이 곳을 방문하는 차량 위주로 운행되며, 4차선 좌우에 여유차선을 만들어 임시주차, 버스 정류장 등으로 이용할 계획이다.(위 그림처럼 아무런 경계가 없다면 차선 없는 일반도로가 되어버릴 위험성이 80% 이상이라고 본다. ^^) 또한 건물 쪽 인도의 폭도 지금보다 넓게 확장하여 와이탄의 이름난 건축물들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할 예정이라고 한다.

 

 

 

3. 복주로(福州路) 입구에는 중간 정도 높이로 경축광장(节庆广场)이 들어선다. 이곳에서는 와이탄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적절한 높이에서 감상할 수 있고, 각종 기념일, 경축 관련 행사(节庆活动)를 진행하는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지금은 이 지점에 임시로 지어진 육교가 설치되어 있다.

 

 

 

4. 연안로(延安路) 입구에는 기상대(信号台)를 중심으로 하는 광장이 들어서 와이탄의 역사적 변천을 보여준다. 연안 고가도로를 철거한 이유도 이 광장을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연안로는 영국조계지의 남쪽 경계로, 원래 "양징방"이라는 운하였다. 중서의 경계였기 때문에 "양징방"이 조계를 대신하는 말이 되기도 했다. 상업적인 용도의 피진(pidgin; business의 중국적 발음) 영어를 "양징방 영어"라고 했던 것도 한때 이곳이 중서 교역의 중요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양징방이 오물로 더러워지고 보다 넓은 도로가 요구되면서 메워져 현재의 연안동로가 되었다.(상해의 주요도로 중 이렇게 운하였던 곳이 많다.)

 

경계의 역할을 했던 것이 기상대이다. 1884년에 처음 만들어진 후 몇 번의 재공사를 거친 뒤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와이탄이 부두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진입하는 선박들에게 적절한 기상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는데, 현재는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연안고가도로를 철거하기 전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상대 위쪽 전망대를 이용하려 했는데, 레스토랑 쪽에서 레스토랑 최소 소비액을 요구하거나 전망대 관람료를 따로 받아 시정조치를 받기도 했다. 고가가 사라진 후 저 위치, 저 높이에서 와이탄의 전망을 제공하는 곳이 기상대 뿐인 셈이라 한몫 제대로 잡을 수도 있겠다 싶었을 거다. 그것도 연안고가 철거 직전에나 가능했지, 공사가 진행중인 지금은 죽을 맛일 거다. 도대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지 않은가.(들어갈 수나 있는지, 영업은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저 난리법석인 곳이 위의 조감도처럼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와이탄의 옛 사진을 보면 상당히 정겹기도 하고 소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한쪽에 벤치를 놓고 산책 중간에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가 하면, 시대에 따라서는 전차, 자동차와 배, 사람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있는 그런 곳이기도 했다. 어쨋든 그 시절과는 다른 기능이 지금은 요구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너무 미끈하고 인공적인 냄새가 풍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공사에 전체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지하도로를 건설할 때, 그리고 지하로 자동차가 달릴 때의 진동 같은 게 이 지역의 건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에 대해 조금 더 면밀한 조사가 진행되어 안전하다는 판단 하에 했다면, 지상은 조금 더 여유로운 공간이 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물론 아무리 넓혀 놓아도 이곳은 항상 사람들로 득실거릴 테지만 말이다.

 

 

출처:  http://sh.eastday.com/qtmt/20080528/u1a433541.html

1. 이미지는 모두 위 링크에서 가져왔으며, 기사는 광장에 관련된 몇 부분만 참고하였다.

2. 위 링크에 들어가면 보다 큰 사이즈의 그림을 다운받을 수 있다.

Posted by lunarog

1. 와이탄 지하도로 건설

 

요즘 와이탄을 가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온통 먼지투성이에 뭔가 공사를 한창 하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와이탄 남쪽 끝에 위치한 연안고가도로가 철거되었다는 점, 그리고 북쪽으로는 와이바이두 다리가 해체되었다는 점이다. 와이바이두 다리는 원래도 대부분의 교통량은 우숭루자 다리(吴淞路闸桥)가 담당하고 있었다. 이 다리의 흉물스러움이라니. 교통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상징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와이바이두 다리를 포함한 쑤저우허-황푸강 접경의 경관을 망쳐 놓고 있었다. 지금 진행중인 공사는 이들을 포함한 와이탄 전체를 지하도로로 잇고, 지상은 와이탄을 가로지르는 10차선의 중산동일로를 4차선으로 축소, 나머지 공간을 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즉 교통은 지하로 돌리고, 지상은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이다.


"와이탄"이 상하이의 얼굴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상하이에 여행 와서 와이탄을 보고 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공사가 완공되면 우리 위대한 관광객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할 것이다, 분명.

 

와이탄에 건설중인 자동차 전용 지하도로

 

 위의 그림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이 지하도로는 상하 2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위층은 남북 방향, 아래층은 북남 방향의 승용차들이 다니게 된다.(지도의 좌측이 남쪽, 우측이 북쪽이다.) 남쪽의 기점은 중산난루(中山南路) 라오타이핑롱(老太平弄), 그리고 옌안둥루(延安东路) 허난중루(河南中路)의 두 지점에서 시작하고, 북쪽은 우숭루(吴淞路) 하이닝루(海宁路), 둥창지루(东长治路) 뤼순루(旅顺路)에서 시작한다.(두 개의 길 이름을 말한 것은 교차로를 표시한 것이다.) 전체 길이는 약 3720미터, 지하도로의 길이는 약3300에 이른다고 한다. 지하도로 내부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둥먼루(东门路)에서 옌안둥루(延安东路)는 쌍방향 4차선에 긴급정차구역이 있고, 옌안둥루(延安东路)에서 톈퉁루(天潼路)까지는 쌍방향 6차선, 톈퉁루(天潼路)에서 위항루(余杭路)는 쌍방향 4차선, 옌안둥루 지하교차로는 쌍방향4차선, 창즈루(长治路) 지하교차로가 쌍방향 4차선이다. 대체로 각 입구는 4차선으로 시작하되, 차량이 증가하는 와이탄의 지하쪽은 6차선으로 설계했다고 보면 되겠다.

 

 (옌안둥루의 고가가 와이탄으로 이어지고 있다. 10년 전 만들어질 때만 해도 "아시아 제1만(亚洲第一弯)"이라 불리며 그 "현대화"된 모습에 많은 상해 사람들이 열광했다 한다.(m.i.3에서도 잠깐 등장)

 

지금까지도 와이탄 앞을 지나는 중산둥일로는 많은 교통량을 담당하는 주요도로였는데, 그 대부분의 차량이 와이탄을 방문할 목적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는 차량이었다.(70-80%를 점한다.) 그것이 와이탄의 역사적 건축물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 문제는 그 해결방안(?)으로 지하를 뚫는다면 공사 자체가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33개의 우수 역사보호건축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인가 라는 점이다. 더하여 시공구간에 와이바이두 다리, 지하철 2호선, 옌안루 터널 등 이미 여러 시설이 교차하고 있어 시공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상하이는 암반이 없고 모래땅으로 이뤄져 있다(전형적연토지질(软土地质)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일부 해외 전문가들은 이러한 지질 조건에서 터널 등 지하 공사를 하는 건 두부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공사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상하이 와이탄 지역 교통종합개조공정 건설지휘부의 한진화(韩金华)는 역사건축물의 기존 구조 및 침강상황 등에 대해 전면적인 실측이 행해졌고, 위험수치를 체크하여 위험도를 최소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푸저우루(福州路)를 경계로 그 남쪽으로는 지면에서 굴착해 들어가지만, 북쪽은 13.95m의 盾构掘进 방식으로 시공한다고 한다. (이 말이 궁금하여 좀 찾아보니, 盾构는 실드머신(Shield Machines)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기계를 활용하여 터널을 굴착하는 방식을 TBM(Tunnel Boring Machine)공법이라고 한다. 이 공법은 무진동, 무발파의 기계화 굴착이므로, 소음, 진동에 의한 피해를 최소화한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위 링크를 따라갈 것.)

 

중국에서는 이미 TBM 공법이 꽤 많이 사용되고 있다. 2007년 3월 신문에 따르면 베이징 지하철 4호선은 이 공법을 사용하여 1100m를 굴착하여 세계신기록을 달성했다고 한다. 아래 사진는 상하이 지하철 11호선 시공 장면이다.

상하이 지하철11호선 盾构掘进

 

암튼 시공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위에서 말한 공법을 쓰면 건축물에 대한 피해는 걱정을 좀 줄여도 될 듯하다.

 

이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영국조계에서 길을 건너 와이탄 쪽으로 들어가려면 원래 있던 베이징루와 난징루의 지하도로를 이용하거나, 푸저우루에 임시로 설치된 육교를 이용할 수 있다. (꽤나 흉물스러운 이 육교는 그러나 적당한 높이에서 해관 등 와이탄 북쪽 건물을 찍을 수 있는 좋은 시야를 가져다 준다.)원래 있던 옌안동루의 육교와 사진에 표시된 진링둥루(金陵東路)의 육교는 철거되었다.

 

푸저우루에 새로 설치된 육교에서 내려다 본 해관(시계탑) 근처 도로 모습


이 지하도로는 엑스포 직전인 2010년 3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http://news.sina.com.cn/c/2008-02-06/021514910065.shtml

http://jfdaily.eastday.com/eastday/jfsy/j/20080229/u1a405871.html


 (이 글의 지하도로 관련 정보는 대부분 위의 중국어 기사에서, 공사가 건물에 미칠 영향에 대한 것은 아래 기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