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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2 청출어람이 좋은 걸까?
獨立閱讀/閱, 읽기 2009. 3. 22. 19:16
내가 좋아하는 글귀 중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원래 청출어람(청어람)이라는 고사성어를 비튼 말이다.

夫靑生於藍, 絳生於蒨, 雖踰本色, 不能復化.(《문심조룡》, <通變>)

푸른 색은 쪽풀(藍草)에서 나왔고, 붉은 색은 꼭두서니(茜草)에서 나왔다. 비록 그 색깔이 원재료의 빛깔을 뛰어넘는 것이 사실이나, 다시 다른 것을 만들어낼 능력은 없다.

이 구절은 <문심조룡>이라는 중국 위진시기의 문학비평서에서 나온 말이다.

쪽풀로 염색을 하면 풀색깔보다 훨씬 푸른 색의 천이 만들어진다.(쪽풀 염색하는 과정 보기... 물론 요즘같은 화학염료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그래서 이 "청출어람"이라는 고사성어는 스승보다 뛰어난 제자를 가리키는 좋은 말로 사용되어 왔다. 하나를 가르쳤는데 열을 아는 그런 제자겠다.
그런데 이렇게 염색된 푸른색은 다시 다른 색깔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즉 이 훌륭한 제자는 단지 제자에 그칠 뿐 훌륭한 스승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를 유협이 사용한 원래 맥락은 아마 요즘 나오는 삐까번쩍한 베스트셀러에만 빠지지 말고 고전으로 돌아가 본질적인 읽기를 하라고 독려한 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염색하는 것보다 염색된 천으로 다양한 옷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고 그게 더 좋다, 잘 배워서 다른 데 써먹는 게 뭐가 나쁘냐는 식으로 이 비유를 비틀지 않기를 바란다. ^^)


물론 나는 유협처럼 고전을 더 강조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가 제기한 어떤 입장은 곱씹을 만하다.
자신의 행위가 소비만을 지향한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생산이 가능한 재료를 만들어낼 것인가의 태도 말이다. 나는 소비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생산을 도와준다고 항변하면 할말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이다. "나"는 소비만 할 것인가? 내가 도움받은 재료들을 이용해 혹시 뭔가를 만든다면, 내가 만든 그 물건이 누군가에게 다른 재료로 사용되어 또다른 물건을 만들어낼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가 이 질문을 던져왔고, 잊을 만하면 다시 생각이 나곤 한다. 학생이라는 현실적 조건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변명한다).


글을 쓰는 것은, 그것이 블로그가 되었던 인쇄매체이든 다른 무엇이든,
행위 자체로는 하나의 생산이다.
그러나 같은 블로그가 아니고 같은 글이 아니다.
자신이 받은 느낌과 정보를 발산하고 소비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받아들인 느낌과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사유의 자양분을 제공하는 글도 있다.
이런 글은 원저자의 글에 대한 하나의 주석이나 해석에 머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원저자에게 새로운 재료가 되기도 한다.

"소비되기 좋은 소비재"와 "소비재의 생산에 좋은 것"이라는 구분에서 사진기의 '장치'적 특성을 설명하는 글을 읽다가(물론 사진이 한낱 소비재이거나 사진기가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며 뒷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잊고 있던 문구를 떠올려본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되는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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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