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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14 견자단의 <엽문> 3
한동안 영화를 못 보다가 어제 후배들과 술을 한잔 한 김에 견자단이 주연한 <엽문>을 보았다.
그래. 나는 엽문이 이소룡의 스승이라서 본 것이 아니라 견자단이 주연을 했기 때문에 봤다.
견자단에게는 이소룡의 아우라도 없고, 성룡의 익숙한 재미도, 이연걸의 화려함도 없다.
그렇지만 견자단에게는 위 세 사람에 뒤지지 않는 무엇이 있다. 그것이 견자단을 계속 찾게 하는 것이다.


사실 무술 좀 합네, 혹은 무술영화 좀 봤네 하는 사람 중 견자단을 챙기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황비홍2나 철마류 등에서도 괜찮았지만 드라마 <정무문>에서 아마 증폭되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실전 최고수 철구 형님께서도 한때 드라마 정무문에 뻑 가 있을 정도였으니..
이소룡 같은 카리스마나 이연걸의 화려함이 아니라 무술의 스킬을 보고 배운다는 입장에서 보면 견자단의 동작은 꽤 매력적인 게 분명하다.

우리나라에 견자단 같이 한 길만 걷다가 대가의 경지에 이르는 액션배우가 없다는 게 아쉽다.
한국은 막싸움을 리얼액션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영화의 과장된 액션에 대한 반대급부이겠지만, 막싸움도 정말 리얼한 액션은 아니지. "영화는 영화다"!? "한국형 액션"이란 건 액션에 한국형, 일본형, 중국형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본과 중국처럼 할 능력과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선택한 소극적인 길일 뿐이다. 물론 한국도 정두홍이나 류승완처럼 재미난 액션영화를 꾸준히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그 "액션"에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대가의 몸짓은 없다. 좀 거칠다고 할까.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교한 맛은 확실히 떨어지는 게 사실이니까.

영춘권을 그다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엽문>의 액션은 정말 군더더기가 없는 대가의 그것이다.
이소룡의 그 발산하는 매력은 잘 아는 바이나, 사실 그렇게 오버할 필요는 없다. 오버 잘못 하면 제대로 깨진다..


< 엽문>의 이야기 구성은 익숙하기 그지없다. 예전 무술영화가 고난-수련-복수(혹은 성취)의 성장영화 스타일이 주요 스토리라인이었다면 요즘은 고수의 수련기는 생략한 채 활약만 보여준다. 그 속에 민족주의적인 감성도 슬쩍 섞여 들어가고. <엽문>도 일본군과 중국 민중의 대비를 통해 편하게 민족주의적인 대립구도에 기대고 있기는 한데. 세심하게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구도는 실전에서 영춘권이 얼마나 유효하고 강력한 무술인지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느낌이다. 중국 무도가들과 싸울 때는 얌전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다가, 일본 애들 족칠 때 제자 이소룡을 예비하는 몸짓을 보여준 것이겠다.
영화가 민족주의적인 것이 되지 않게 나갈 장치를 더 강조할 수도 있었을 건데, 아마 익숙한 장치에 기대기 위해 간략하게 처리하고 넘어간 것 같다. 중국인이 나쁜 중국인을 혼내 주는 것보다 "일본"이라는 국가장치에 맞서는 게 더 명분이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견자단과 계속 작업을 이어가는 감독 엽위신의 카메라도 나쁘지 않고 여러 가지 잔재미도 많으며, 감정을 너무 쥐어 짜지 않으면서도 순간적으로 증폭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잘 구성된 영화인 것 같다.

설마 감독 엽위신이 엽문의 후손은 아니겠지?
어쨌거나 저쨌거나,
성으로 읽을 때는 엽위신, 엽문이 아니라 섭위신, 섭문 아닌가?
물론 중국어 발음에선 구분이 없고 어감은 엽문이 좋다만은.


생각나는 대사 몇 개만 간단히 정리해 두자.
금산조(金山找)가 결투에서 진 후 엽문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북방무술이 남방무술에게 졌다!"
"북방무술이 진 게 아니라 니가 문제야 임마!"

수련이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어떤 문파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자기와의 싸움이다. 어떤 무술을 익혔는가가 아니라 자기가 어떻게 수련했느냐에 따라 결투의 결과는 달라진다. 이 대사에서 개인이 두드러졌다면, 일본군과의 10:1 대련 후에는 그 또한 "나는 그저 중국인일 뿐이오"라는 대사를 날리며 중국인 전체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아내를 무서워하는 남자는 없고 존경하는 남자만 있다."

 이 말은 다음에 꼭 써먹어야겠다. 아주 멋진 자기합리화잖아?  ^^;;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