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히터? 리흐테르? Richter..
러시아어 발음은 리흐테르인가?
중국어로는 리허터里赫特, 칼 리히터는 리시터李希特. 그러니 리흐테르가 맞나부다.
(중국어 e발음을 따져서 억지로 표기하면 "리흐어터어" 정도.)
스터디 시작을 기다리며, 반군의 집에서 (그도 빌렸다는) <리흐테르>를 들춰보다가 몇 구절 옮겨 본다.
젊은 날의 리히터가 멍때리고 앉아 있는 표지와 전기 부분은 건너뛰고 음악수첩에 적힌 메모를 몇 구절 골라봤다.
음악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건 별로 익숙하지 않은데, 음악을 말로 바꿀 필요가 나에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그런 대화를 나눌 일이 없다. ^^;;
p.260부터..
리히터,슈만, <후모레스케>, op.20. 1970. 24/12
1.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예전에 써 놓았던 것, 자신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우연히 다시 접하면 대견하다는 느낌이 우선 들곤 한다. 당시에는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다가 어쩔 수 없이 봉합한 것인데도, 다시 보면 의외로 신선했던 발상이랄까 그런 게 보이는 것이다. 그만큼 자기 글에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아무런 진전도 없으며 오히려 그 때만도 못한 처지임을 그런 대견함에서 발견하게 된다. 우리 범인들은 계속 과거를 부여잡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게 나의 과거이든 찬란한 역사적 과거이든. 꽃다운 시절이며, 모든 고대는 위대하다! 반면 몽상가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기획한다. 하지만 미래는 장래가 되지 못한다. 창조는 현재 그 순간,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 집중하는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창조적인 순간을 사는 사람들의 어떤 태도를 리히터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지나간 자신의 모습에서 더 이상의 의외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그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넣었기 때문일테다.
그 다음은 거기에 매이지 않고 다음 발걸음을 딛는 거겠다.(너무 흔한 말인가?)
열심히 공부해서 (그것의 결과로) 예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거나 자기 논리를 보강하는 우를 피하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듯. [위의 흔한 말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쉽지.]
..
2. 녹음을 듣는다는 것. 오직 현재 뿐인 음악의 흐름을 무한반복하는 이상한 행위. 그게 완벽하게 똑같은 음악일까? 자신의 녹음에서 실망감을 느끼는 리히터와는 입장이 다른 우리는, 그 순간을 매번 다른 창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현장에서와 같이 거기서 그가 떠나고 나면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절박함은 없겠지만, 우리는 매번 오직 한번 뿐인 흐름에 참여하는 것이다. 듣기 나름이다.
바흐, 영국 모음곡 3번 G단조. S.R. 1971, 24/10
1972. 25/11. 평균율 클라비어
평균율 1권 연주는 마음에 드는데, 2권 중 일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구절도 있었다.
하루키가 1Q84를 평균율의 구성에 따라 썼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의미일까.
수학도 모르고, 음악도 모르고, 소설도 잘 모른다.
다만 1Q84도 2권 도입부터는 좀 늘어졌던 것 같다..
29/12
암튼. 내가 아래 곡을 틀어놓는다면 그것은 단지 정신건강을 위해서이다.
중국에서 처음 샀던 이 네장짜리 씨디는 이제 flac 음원으로 추출해서 들고 다닌다.
한번 틀어놓으면 한참은 뭘 들을까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ㅋㅋ
러시아어 발음은 리흐테르인가?
중국어로는 리허터里赫特, 칼 리히터는 리시터李希特. 그러니 리흐테르가 맞나부다.
(중국어 e발음을 따져서 억지로 표기하면 "리흐어터어" 정도.)
스터디 시작을 기다리며, 반군의 집에서 (그도 빌렸다는) <리흐테르>를 들춰보다가 몇 구절 옮겨 본다.
젊은 날의 리히터가 멍때리고 앉아 있는 표지와 전기 부분은 건너뛰고 음악수첩에 적힌 메모를 몇 구절 골라봤다.
음악에 관한 책을 읽는다는 건 별로 익숙하지 않은데, 음악을 말로 바꿀 필요가 나에겐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그런 대화를 나눌 일이 없다. ^^;;
리흐테르 - 브뤼노 몽생종 지음, 이세욱 옮김/정원출판사 |
p.260부터..
리히터,슈만, <후모레스케>, op.20. 1970. 24/12
내 녹음을 들을 때마다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언제나 내가 예상하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신선함도 의외성도 발견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실망감...
1.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예전에 써 놓았던 것, 자신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우연히 다시 접하면 대견하다는 느낌이 우선 들곤 한다. 당시에는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다가 어쩔 수 없이 봉합한 것인데도, 다시 보면 의외로 신선했던 발상이랄까 그런 게 보이는 것이다. 그만큼 자기 글에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아무런 진전도 없으며 오히려 그 때만도 못한 처지임을 그런 대견함에서 발견하게 된다. 우리 범인들은 계속 과거를 부여잡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게 나의 과거이든 찬란한 역사적 과거이든. 꽃다운 시절이며, 모든 고대는 위대하다! 반면 몽상가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기획한다. 하지만 미래는 장래가 되지 못한다. 창조는 현재 그 순간,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 집중하는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창조적인 순간을 사는 사람들의 어떤 태도를 리히터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지나간 자신의 모습에서 더 이상의 의외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그가 그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넣었기 때문일테다.
그 다음은 거기에 매이지 않고 다음 발걸음을 딛는 거겠다.(너무 흔한 말인가?)
열심히 공부해서 (그것의 결과로) 예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거나 자기 논리를 보강하는 우를 피하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듯. [위의 흔한 말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쉽지.]
..
2. 녹음을 듣는다는 것. 오직 현재 뿐인 음악의 흐름을 무한반복하는 이상한 행위. 그게 완벽하게 똑같은 음악일까? 자신의 녹음에서 실망감을 느끼는 리히터와는 입장이 다른 우리는, 그 순간을 매번 다른 창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현장에서와 같이 거기서 그가 떠나고 나면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절박함은 없겠지만, 우리는 매번 오직 한번 뿐인 흐름에 참여하는 것이다. 듣기 나름이다.
바흐, 영국 모음곡 3번 G단조. S.R. 1971, 24/10
어떤 작품이 정확히 연주되기만 한다면 녹음기술이 어떠하든 그것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녹음기술의 질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그들이 녹음기술의 문제를 잘 알고 있고 음악보다 기술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연주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런 현상은 기계와 기술이 지배하는 이 시대의 반영이다. 사람들은 자연과 참다운 인간적 정서로부터 더욱 멀어져 그들 스스로 차츰차츰 기계가 되어간다.
...
바흐를 다시 연습하는 게 좋을 듯하다. 결국 그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다. <영국 모음곡 G단조>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
바흐를 다시 연습하는 게 좋을 듯하다. 결국 그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다. <영국 모음곡 G단조>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조화와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다.
1972. 25/11. 평균율 클라비어
.. 때때로 바흐를 듣는 것은 단지 정신 건강의 관점에서도 나쁘지 않다.
평균율 1권 연주는 마음에 드는데, 2권 중 일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구절도 있었다.
하루키가 1Q84를 평균율의 구성에 따라 썼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의미일까.
수학도 모르고, 음악도 모르고, 소설도 잘 모른다.
다만 1Q84도 2권 도입부터는 좀 늘어졌던 것 같다..
29/12
글렌 굴드의 장점은 음색.. 그러나 더 깊은 통찰과 엄격함 요구...
암튼. 내가 아래 곡을 틀어놓는다면 그것은 단지 정신건강을 위해서이다.
중국에서 처음 샀던 이 네장짜리 씨디는 이제 flac 음원으로 추출해서 들고 다닌다.
한번 틀어놓으면 한참은 뭘 들을까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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