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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9 동파육의 유래 4
示衆/flaneur, p.m. 4:30 2008. 12. 19. 17:08

오마이뉴스를 통해 가끔 정윤수의 BOOK...ing365 라는 블로그의 글을 보곤 한다. 오늘의 주제는 간짜장 앞에 놓고 '동파육'을 논하다 - 소동파 인데, 동파육의 유래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어 간단하게 몇 가지 사항만 정리해 둔다. 베이징에서 몇 해 사업을 한 친구의 말을 듣고 재미가 있었더라도 글로 옮길 때는 관련사항을 검색해 보고 사실관계를 따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랬다면 "황저우"에 "서호"가 있다는 식의 오류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조금 더 그럴듯한 동파육의 유래를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대 원우 4년, 즉 1089년(1080년 황주, 1089년 항주)에 소동파는 후베이(湖北)성의 벽촌 황저우(黃州)에 유배를 살고 있었다. 44살 때의 일로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 황저우에 서호가 있어 중국 역대 시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소동파도 서호를 산보하며 많은 시를 썼는데, 시 ‘비 개인 호수에서 술을 마시다’에서는 ‘경국지색’의 서시에 비유한 적 있다. 서시가 화장을 했을 때나 안 했을 때나 천하 일색 미인이듯이, 서호 또한 ‘은빛 물결 출렁일 때나 운해에 가려 천지가 몽롱할 때나’ 천하의 절경이라고 읊었다.

바로 그 서호를 치수할 일이 생겼다. 소동파는 항주의 백성들과 함께 서호의 방제 작업을 함께 하여 오랜 고생 끝에 그것을 성공시키게 되었다. 힘겨운 공사를 끝낸 백성들이 집집마다 돼지를 잡으며 잔치를 하게 되었고 이때 소동파가 돼지고기에 소흥 술로 적절히 졸인 고기 요리를 선보이며 백성들과 한 때를 더불어 지냈다는 것이다.

소동파는 이 요리를 위하여 시까지 지었다고 한다. “질 좋은 돼지고기는 아주 싼값이지만 잘 사는 사람은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은 삶지를 못하는구나. 물을 적게 넣고 약한 불로 삶으면, 다 익고 나서 스스로 제 맛이 나누나."


 

물론 동파육의 유래는 다양하다. 요리법 자체는 원래 있었던 것을 소동파가 (자기 요리사에게 시켰거나 자신이 직접) 개량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소동파가 주방에 들어가서 요리를 해야만 그 이름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동파는 이름난 요리를 찾아 다녔고,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용할 수 있는 한국쪽 글은 없으니 참고삼아 바이두 백과의 동파육 유래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동파육이 황주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름난 문인 소식(동파)는 요리 쪽으로도 일가견을 이뤘다. 그가 황주(황저우; 黄州)로 폄적되었을 때(1080), 직접 요리를 하여 친구들과 맛을 보곤 했는데 특히 홍소육(红烧肉)이 최고였다. 그는 요리 비법을 "약한 불로 천천히, 물을 적게 넣고 삶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제맛이 난다."란 시구로 표현하였다. 황주에서 지은 이 시는 다음과 같다.

돼지고기 먹기《食猪肉》

황주의 돼지고기는 질은 좋으면서 가격이 진흙처럼 싸,
부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자는 삶을 줄 모른다.
약한 불로 천천히, 물을 적게 넣고 삶아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제맛이 난다.
매일 아침 한 그릇 뚝딱, 내 배가 부르니 그대 뭐라 하지 마오.

黄州好猪肉,价贱如粪土。
富者不肯吃,贫者不解煮。
慢着火,少着水,火候足时它自美。
每日早来打一碗,饱得自家君莫管

이것에 대한 "돼지고기 송"도 있다.

냄비를 깨끗이 씻어, 물을 적게 넣고, 화염이 일지 않을 정도의 약한 불로 천천히 익히되, 익기 전에 급하게 뚜껑을 열지 마라.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제맛이 날 것이다. 황주의 돼지고기는 질이 좋으면서도 가격은 진흙처럼 싸다. 부자들은 먹으려고 하지를 않는데 가난한 사람은 삶을 줄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한두 그릇 뚝딱 먹는다. 내 배가 부르니 누가 뭐래도 상관 없지.
净洗锅,少著水,柴头罨烟焰不起。待它自熟莫催它,火候足时它自美。黄州好猪肉,价贱如泥土。贵人不肯吃,贫人不解煮。早晨起来打两碗,饱得自家君莫管。(《猪肉颂》)

 

그런데 황저우 시기의 이 요리는 그냥 홍소육이지 "동파육"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소동파가 폄적되어 지방관으로 재직하던 서주(쉬저우; 徐州), 황주, 항주(항저우; 杭州) 세 곳 모두에서 동파육 비슷한 것을 만들어 먹었는데, 서주의 경우 회증육(回赠肉)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가 서주지주(徐州知州)로 재직할 때 홍수용 제방과 성곽의 보수를 하자 백성들이 감사하는 마음에 돼지를 가져다 바쳤는데, 동파가 거절하지 않고 모조리 받은 후 홍소육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 주었다고 한다. 백성들이 먹어보니 돼지비계가 많아도 느끼하지 않고 향기와 맛이 뛰어나 즐거워했다. 즉, 지금의 동파육과 거의 비슷했지만 이 시기의 이름은 "선물로 되돌려준 고기", "답례용 고기"라는 뜻의 "회증육"이었다.

 

지금은 황주 쪽에서야 동파육이란 이름을 찾아오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동파육이 유명해지고 지금까지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된 것은 항주와의 관련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단 하나의 유래만 말한다면 동파가 항주의 지방관으로 부임할 때 있었던 이야기만 하면 된다.

(왼쪽: 동파육은 보통 조그마한 항아리에 담겨 나온다. 오른쪽: 동파육 모양의 수석)

 

동파가 항주에 부임했을 때 서호는 그 옛날 이름난 아름다운 호수가 아니라 옛 흔적만 남은 진흙 시궁창이 되어 가고 있었다. 동파는 백성들을 동원하여 호수 정비 사업을 한다. 이 때 호수의 진흙으로 만든 제방이 아직도 서호십경의 하나로 꼽히는 소제(苏堤)이다. 당시 백성들은 서호가 풍광도 좋아지고 넉넉한 저수량으로 풍년을 이루게 되자 소동파의 서호 정비사업을 칭송하였는데, 마침 동파가 홍소육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설날에 너나 할 것 없이 돼지고기를 선물로 보내게 된다. 어차피 혼자서 먹기에 곤란한 양이었던지라 소동파는 그 고기를 서호 정비사업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돌려줄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요리법을 집안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네모나게 썰어서 약한 불로 익히고 술과 함께 백성들에게 줄 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집안 사람들이 "술과 함께 라"(连酒一起)는 말을 "술과 함께 라"(连酒一起)고 듣고는 술과 고기를 함께 넣고 조리하게 된다. 그런데 그 요리의 맛과 향이 더할 나위 없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동파의 이름을 딴 "동파육"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여러 설이 있지만 역사와 민간의 이야기가 혼합된 이것이 가장 대표성을 띠고 있다고 본다.)

 

지금도 항주의 서호변에 있는 이름난 식당 "루외루"(楼外楼菜馆)의 동파육을 가장 정통으로 친다.

 

(루외루 식당의 "동파육", 아래는 마찬가지로 루외루의 대표요리 "거지닭". 아, 다시 먹고 시포..)

#이미지 출처는 바이두(http://image.baid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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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