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示衆/flaneur, p.m. 4:30 2009. 5. 12. 01:07
이번 신의 물방울은 우주로 날아갔다.
그 키워드는 짤막한 하이쿠다.

동쪽 들판에 붉은 빛이 비치어
돌아보니 달이 비스듬히 걸쳐 있네

헤어진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이탈리아인은 이 시의 해석을 일본인에게 부탁하고 아래와 같은 답을 받는다.

낮에 아지랑이가 보여 집에 가려고 돌아봤더니,
달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이 해석에 의해 이탈리아인은 매일 석양이 지는 언덕에서 달이 떠오르는 걸 지켜보며 추억을 와인을 마신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은 이 시의 해석을 다르게 한다.

동쪽 들판에 서광이 비침에
돌아보니 서쪽 하늘로 달이 기울고 있구나

새벽 어스럼에 같은 장소에 나가 와인을 마시며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아직 지지 않은 달빛에 취한다. 3년 일찍 이 시간대에 나왔다면 그는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 시가, 그리고 이 와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뭔가를 성취했을 때, 그 빛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그러나 우리가 어두운 시기를 보낼 때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을 떠올려 보라는 것이겠다.
밤길을 걸어야 할 때, 자기 스스로 빛을 내지도 못하는 그것에 우리가 얼마나 기대었던가 말이다.

어쨌든 우리가 너무 환한 상태에 있을 때는 그 빛에 가려 내 길을 안내하는 다른 희미한 것들은 묻혀진다. 다시 우리가 내리막길에 처하기 직전, 혹은 우리 인생의 서광이 비쳐 잊혀지기 직전의 짧은 순간에만 우리는 그 은은한 달빛을 살짝 떠올린다.

'示衆 > flaneur, p.m. 4:3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순노동의 힘..  (1) 2009.05.21
겨루기  (1) 2009.05.12
중독 2  (1) 2009.04.23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