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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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1 단순노동의 힘.. 1
示衆/flaneur, p.m. 4:30 2009. 5. 21. 23:27
이번 학기에는 한국에 들어갈 계획이 없었지만, 여차여차한 이유들 때문에 5월초에 잠깐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간 김에 어린이날을 번잡한 서울에서 보내기 싫어 아이를 데리고 고향에 다녀왔다. 마침 엄마의 생신도 다가오는데, 그때까지 있을 순 없고 해서 얼굴이나 비추고 일이나 좀 도울 요량이었다.

말라꼬 찍노! 찍지 마라 손사래를 친다. 왜 흐릿할까?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조교로 있던 형은 항상 일을 시키면서 고급인력을 이런 식으로 부려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땐 약간 대접받는 느낌도 있고 해서 그런가부다 했는데, 오랫만에 단순반복노동을 하다가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고급인력"이라는 말. 두뇌노동을 하는 왠만한 학벌(학력일까?)의 사람이란 뜻으로 고급인력이란 말을 사용한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그 말은 그 형의 삶에 대한 태도가 묻어난 말인 것 같다. 딱히 후배를 높이기 위해서라기보단 자기 스스로가 고급인력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대접받고 싶은 마음. 후배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자기합리화 과정? 나같은 촌놈은 학과에 일이 있으면 (조금 귀찮을 때도 있지만) 후다닥 해치우는 것에, 몸을 쓰는 것에 큰 부담은 없었는데.. 또 지금 생각해 보니 "고급인력"이라는 말이 나를 지금까지 조금은 오염시켰던 것 같다. 그 단어에 전혀 매어 있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니 말이다.

4월말 5월 초의 고향은 바쁘다. 4월 초에 비닐하우스에서 오이가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6월 초중순의 모내기가 끝날 때까지가 일년 중 가장 바쁜 철이라고 할 수 있다. 중고등학교 때는 시험기간임에도(시험은 항상 시골이 바쁠 때와 겹쳐 있었다!!) 일을 시키려는 아버지를 피해서 달아나기 위해 공부했다. (아이의 반항심을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 공부를 못하게 함으로써 공부시키는 방식이 뭐 있을까 고민 중이다. 도시에서는 좀 힘들겠다. 근데 이렇게 해서라도 공부를 시켜야 하는 걸까? 그냥 두자.) 그래서 촌놈임에도 촌에서 하는 중요한, 큰 일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엄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엄마가 시간이 나지 않아 할 수 없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동네 입구 쪽에 우리 논 두 쪼가리에 비닐하우스가 있고,
그 사이에 있는 논을 빌려서 마늘을 심어 뒀다.

이번에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일은 마늘꽃을 따는 일이다. 4월 말 밥상에 올라오는 마늘쫑을 우리는 마늘꽃이라고 한다. 아마도 줄기는 마늘쫑이 맞을 듯하다. 줄기가 여물고 끝에 꽃이 피고 씨가 맺히면 마늘 뿌리가 굵어지지 않기 때문에 줄기를 잘라줘야 한다. 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마늘꽃이 피면) 지 새끼 먹인다고 지는 아무 거또 안 묵자나!"가 되겠다. 굳이 자식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겠으나,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마늘은 뿌리만으로 번식이 되는데 왜 꽃을 피우고 씨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인간 중에 자기 신체의 일부로 똑같은 개체의 생성이 가능하다면, 그래도 아기를 낳으려는 사람이 있을까?

어릴 때는 온 가족이 몰려가서 마늘꽃을 똑똑 따다가 모아서 반찬을 해먹거나 할매가 내다 팔곤 했다. 지금은 모조리 버린다. 유일한 목적은 마늘 뿌리가 굵어지는 것인데, 마늘꽃을 따도 내다팔 데도 없고, 팔려고 해도 일손이 모자란다.(돈도 안 되고..) 이게 도시의 누구네 집에서는 귀한 반찬이 될 수도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바로 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일손을 도우면서 공짜반찬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시골에 지천이라는 사실을 또 도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알면서 못하거나 인연히 없어서 시도조차 못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테고.

마늘꽃을 뽑다가 알이 차지도 않은 마늘을 뿌리채 뽑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아부지는 호통을 치곤 하셨다. 일이 하기 싫어서 그리 되는 거라고 말이다. ㅡㅡ;;

마늘쫑을 이용할 셈이라면 줄기채 뽑아내야 하지만(좀 길어야 반찬이라도 하지..), 바로 버리면 되었기 때문에 꽃이 달리는 부분만 똑 따내면 되었다. 한정된 시간에 혼자서 최대한 빨리 해야 되기 때문에 효율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일로 접근하면 농촌은 전혀 목가적이지 않다.

머리는 전혀 쓸 필요 없고, 이파리 사이에 감춰진 마늘쫑을 즉각적으로 발견할 눈과 재빠른 손만 필요하다. 종일 하고 나면 잠자리에 들 때 마늘쫑이 아른거린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한 시각적 정보가 눈에 각인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동안 꿈에도 나온다.

허리를 숙이고 똑딱똑딱 따다 보면 10분만 지나면 싫증이 난다. 그게 지나고 나면 아무 생각도 없는 "무념무상"의 상태가 된다.(*^^*)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끊어질 것 같지만, 1시간 안에 몸은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한 최적의 상태로 변해, 가장 효율적으로 반복되는 작업을 하게 만든다. 산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유의 원천이 되었나? 내 생각에 칸트가 마늘쫑 따기나 김매기 같은 일을 매일 할 수 있고, 그게 어떤 거라는 걸 알았다면 산책을 버리고 하루 2시간씩 일을 했을 것 같다..

사진은 전체적으로 장난질을 좀 많이 쳤다. 이게 마늘밭이다.
쪼그만해 보여도 실제로는 꽤 크다.
첫날 오후 오른쪽 두 골을 겨우 했다..


나는 사흘 동안(이라고 해봐야 점심 때 도착해서 점심 먹고 출발했으니, 시간적으론 이틀?) 요 작은 논 한쪼가리 하고 왔다. 이보다 배 이상 큰 논도 시도했지만, 겨우 두 골밖에 못 했다.

그 다음날 여동생이 돌도 안 지난 갓난아기를 데리고 와서 재워놓고 열흘 넘게 일을 하고 갔다. (독한 것!!) 집안의 큰일은 도맡아 하는(그래서 이렇게 자잘한 일은 하지 않는) 남동생은 주말에 회사 동료들을 데리고 와서 남은 일을 끝냈다고 한다.

나는 어버이날 겸 생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했는데, 결국 하는 척만 한 셈이다.
단순노동이 얼마나 사유에 도움이 되나 위안삼으면서 실제로는 위와 같이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그나저나 저 마늘을 누가 다 뽑을 것인가?


비만 오면 항상 넘칠 듯 위태로운 작은 둑 너머로 새로운 둑이 들어섰다.만, 이 둑 바깥의 토지는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비옥하지만 낙동강의 홍수피해가 잦은 이곳의 피해보상을 이런 식으로 해 버린 것이다. 구체적인 이용계획없이 농민들의 입을 막기 위한 행정이었기에 버려진 땅이 되었다가, 작년부터 소유권 없이 경작만 가능하게 풀었다. 홍수철을 피해 야채나 심는 정도?


둑에서 동네를 바라보면 대충 이렇다. 앞쪽에 낡은 둑이 보인다.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암말처럼 생겼다고 동네 이름이 "암마"이다. 지금은 멧돼지와 늑대가 출몰한다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암만 봐도, 내 눈에는 말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뒤쪽은 면소재지에서 동네로 들어서는 산길인데, 귀신이나 여우가 나온다는 소문이 흉흉하던 곳이다. 어릴때 차를 놓쳐 한밤중에 혼자서 걸어와야 할 때면 믿지도 않는 신을 찾곤 했다. 당시 유행가였던 "아베마리아~~"를 소리쳐 외치면서.. 귀신도 아스팔트길을 당할 순 없나 보다.

누구네 집 경운기인지는 모르겠다만.


사진은, 일하는 동안 별 투정없이 집에서 놀고 있던 꼬맹이가 고마워 저녁에 오토바이에 태워 동네 구경을 시켜주며 찍은 것이다. 다섯살이 되니 다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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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