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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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30 말랑말랑한 것과 딱딱한 것
示衆/flaneur, p.m. 4:30 2009. 3. 30. 01:56
아파트 단지 앞에 얼마 전부터 신강 라면집이 생겼다. 출출할 때 라면 끓이는 것보다 나가서 한 그릇 먹고 오는 게 싸고 빨라 가끔 이용하곤 한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인지라 손님도 아주 많지는 않아, 밀가루를 미리 반죽해 뒀다가 주문량만큼 떼어다가 수타라면을 만든다. 얼마 전에 본 <누들로드>도 생각나고 해서 라면을 뽑을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곤 한다. 미리 반죽이 되어 있다고 하지만, 여러 차례 때리고 뽑고 늘이고 하는 사이에 일정한 두께의 탄력적인 면발이 만들어지고, 바로 뜨거운 탕 속으로 직행이다.


면을 뽑는 장면이 보기보다 쉽지는 않겠지만, 저렇게 면 뽑듯이 뭔가가 제대로, 제때에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말랑말랑한 것 속에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몸도, 생각도, 생활도 말랑해져 경계가 사라진다. 아직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전, 아직 말랑말랑할 그 때,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보려고 이리 주물럭 저리 주물럭 해보다가 다시 짓이기기를 몇 번. 그조차 딱딱하게 굳어버리면 쓸모가 없어지니 계속 일정한 점성을 유지시키면서 다시 주물럭.


이미 초벌은 끝난 번역이지만 다시 보면 고칠 게 또 나오고, 지난번에 놓쳤거나 해결 못한 것은 여전히 헤맨다. 주욱 연결되는 문장을 앞에서 끊어도 말이 되고 뒤로 연결시켜도 말이 되는데, 원문에서는 묘한 긴장감을 유지하던 말들이 이것 아니면 저것에로 무게중심이 이동해 버린다. 그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시킬 수 있을까.. 아무려면 어때도 상관없을 아 다르고 어 다른 차이에 집착하다, 전체적인 맥락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결점이 있더라도 책으로 만들어지고 나면 딱딱한 하나의 물건이 되어 있을 것이나, 아직은 계속 움직이는, 형태를 갖추지 못한 말랑말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뼈 없이 근육? 지금은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가다듬는 상태인데, 근육의 결에 파묻혀 뼈를 잃어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갑자기 길을 헤맨다는 느낌에 아무 책이나 꺼내 읽어 본다. 이 편안함이란~..
가끔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단단한 그 길에 그냥 몸을 맡길 필요도 있겠다. 더듬더듬 길인지 뭔지도 모른 채 가다말다 하는 것보다는, 그냥 표지판을 보고 이 길이 맞다고 확신하고 가 보자. 어쩌면 그게 내 몸의 점성을 일정하게 유지시켜주지 않을까?

다 만들어진 라면을 먹으면서 면발은 두껍니 어쩌니, 너무 질기다느니 물렁하다느니 한 마디 던지기는 얼마나 쉽나. 그런데 내 눈이 만족하는 면발을 내 손으로 뽑기는 또 얼마나 힘든가. 眼高手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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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