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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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24 복사꽃, 꽃무덤, 그리고...
示衆/flaneur, p.m. 4:30 2009. 3. 24. 19:12
해마다 이맘때면 항주에 가 보고 싶어진다. 항주에 반년을 살았지만 여름부터 겨울까지여서 봄의 항주를 모르기 때문이다. 서호변에는 곳곳에 복숭아 나무가 심어져 있어 이맘때 항주는 복사꽃이 참으로 곱다고 한다. 상해에 두어해 살면서도 항상 복사꽃 필 즈음을 기억하기 힘들었다. 지내다보면 꽃이 벌써 졌거나 뭔가 일이 있어 몸을 움직일 수 없곤 한다.

이맘때쯤 복사꽃을 보면 중국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또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바로 <홍루몽>에서 꽃무덤을 만들어주는 장면이다. 대충 줄거리나 되새기고 기분이나 낼 겸 번역을 해 본다. 꽃을 보러 떠날 수는 없으니, 이런 것으로 기분이나 내 보는 것이다. 번역본을 가져온 게 없어 옳게 옮긴 건지 장담할 수는 없다.

<홍루몽> 23회


그날은 마침 삼월 중순이었다. 아침을 먹은 후 가보옥은 <서상기(會眞記)>를 끼고 심방갑(沁芳閘) 다리 근처로 걸어가 복숭아나무 아래 바위 위에 앉아 <서상기>를 펼쳐 처음부터 세세히 완상했다. 막 “붉은 꽃잎 떨어져 무리(陣)을 이루네”라는 구절을 보는데, 한 무리 바람이 불어와 나무 위의 복사꽃이 흩날렸다. 몸에도, 책에도, 땅에도 온통 복사꽃으로 뒤덮였다. 보옥은 그것을 털어내려다, 혹시라도 발로 밟을까봐 꽃잎을 가만히 싸서 연못 쪽으로 가 물속으로 털어냈다. 꽃잎들은 수면 위를 표표히 떠다니다가 마침내 심방갑으로 흘러들어갔다.


되돌아와 보니 땅위에 아직도 한 그득인지라 보옥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 여기서 뭐해?” 보옥이 돌아보니 임대옥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깨에는 꽃 호미를 메고, 호미 위에는 꽃 주머니가 걸려 있었으며 손에는 꽃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보옥이 웃으며 말했다. “마침 잘 왔어. 여기 이 꽃을 쓸어 담아 저기 물에다 버려줘. 나도 방금 잔뜩 던져 줬어.” 임대옥이 말했다. “물에 버리면 안 좋아. 여기 물은 깨끗하지만, 흘러흘러 사람들 사는 곳으로 가면 더럽고 냄새나는 게 섞여들어 마찬가지로 꽃을 모욕하는 게 되어 버리잖아. 저기 모퉁이에 내 꽃무덤이 있어. 꽃을 쓸어 담아 이 주머니에 넣었다가 땅에 묻어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땅속으로 스며들 거야. 그게 더 깨끗하지 않겠어?”


보옥이 이 말을 듣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했다. “책 갖다 놓고 나도 같이 쓸어 담을께, 조금만 기다려.” 대옥이 말했다. “무슨 책이야?” 보옥이 갑자기 당황하며 책을 감췄다. “뭐 <대학>, <중용> 같은 거야.” 대옥이 웃었다. “내 앞에서 꾀 써봐야 소용없어. 빨랑 내놓는 게 좋을 걸?” 보옥이 대답했다. “좋아. 우리 착한 동생한테 주는 거야 무섭지 않지. 근데 보더라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 이거 정말정말 좋은 책이야. 너도 보기 시작하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릴 걸?” 이렇게 말하며 책을 건네 줬다. 임대옥이 꽃 도구들을 잠시 내려놓고 책을 받아 살펴봤다. 볼수록 흥미진진하여 밥 한끼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아 16장까지 모두 읽어 버렸다. 정말로 놀랄만큼 뛰어난 글이라, 남은 향기가 입안 가득한 느낌이었다. 책을 다 보긴 했지만 여전히 그 속에 빠져, 좋은 구절들을 가만히 되새겨보고 있었다.


보옥이 웃으며 말했다. “동생, 좋아 안 좋아?” 임대옥도 웃으며 대답했다. “과연 재미난 책이네요.” 보옥이 웃었다. “나는 ‘근심 많고 병 많은 사람’이고, 너는 ‘경국지색’ 그녀야.” 대옥은 이 말을 듣고 뺨에서 귀밑까지 빨개졌다. 곧바로 찌푸린 듯 만 듯 하던 눈썹이 치켜세워지고 뜬 듯 만 듯한 가냘픈 눈을 부릅뜬 채, 노기 가득한 뺨에 성난 얼굴로 보옥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헛소리 하는 거야! 이렇게 음란한 책을 들고 와서는, 그따위 잡소리로 나를 업수이 여기다니. 내 당장 외삼촌 외숙모에게 이를 테야.” ‘업수이’라는 말을 할 때 이미 눈자위가 붉어져 몸을 돌려 가려하고 있었다. 보옥이 다급하게 그녀를 쫓아와 붙잡았다. “착한 동생, 제발 용서해 주라. 내가 말을 잘못했어. 만약 정말로 널 모욕할 생각이 있었다면, 내일 저 연못에 몸을 던져 자라에게 먹혀 왕빠딴(자라/욕)으로 변했다가, 나중에 네가 ‘일품부인’으로 천수를 누리고 귀천할 때 네 무덤가의 비석이 되어 영원히 엎드려 있을께.” 이 말을 듣고 대옥은 치! 하며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어떻게 으르는 말도 헛소리만 하냐? ‘툇, 원래 싹수가 노랗군! 은인 줄 알았더니 납으로 만든 창일세!’라는 구절하고 똑같군!” 가보옥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너 이거? 나도 이르러 가야겠다.” 임대옥이 웃었다. “자기는 슬쩍 보기만 해도 외운다고 자랑하더니, 나라고 한눈에 열 줄도 못 외울까봐?”


보옥은 책을 치우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빨리 꽃이나 묻으러 가자, 그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고.” 두 사람은 떨어진 꽃잎을 주워 같이 잘 묻어주고 있는데, 습인이 다가와서 말했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계셨군요. 큰어르신이 몸이 안 좋아 아가씨들이 모두 문안드리러 갔어요. 마님이 도련님도 가 보라고 하셨으니 빨리 돌아가서 옷 갈아입읍시다.” 보옥은 그 말을 듣고 책을 챙겨 보옥과 작별한 뒤 습인과 함께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번역은 나중에 시간이 나고 기분이 나면 사전 찾아가며 꼼꼼하게 다듬을 생각이다. 줄거리야 대충 옮겨도 되지만 묘사가 힘들다. 대옥이 내 눈앞에 앉아 있어도 묘사하긴 힘들 것 같다./ 27회에는 또 "장화사(葬花詞)"라는 대옥의 시가 있는데, 시는 더 번역하기 힘드니 오늘은 이만 참도록 하자. 홍루몽 관련 블로그를 참고하고 싶다면: 홍루에서 꿈을 꾸다 .)


올해는 혹시 항주를 다녀올 수 있을까? 지금쯤은 피어 있지 않을까? 라고 가늠할 수 있는 건, 이제는 복사꽃 피는 시기를 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꽃도 아마 음력이 더 정확한 것 같은데, 음력을 농력이라고도 하는 것처럼 농사짓는 절기와 맞물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음력으로 작년 오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시골에서 평생 농사 짓다가 몸관리 잘 못하시고 일찍 가신 건데, 밤늦게 전화받고 잠 한숨 못자고 첫 비행기로 급하게 들어갔었다. 뒷산에 아버지가 심어놓은 복숭아 나무 이랑 사이에 묻어드렸다. 복사꽃이 너무 활짝 피어 있었다. 음력으로 이맘때면 복사꽃이 예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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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