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 볼프강 카이저 / 이지혜
비극은 죄와 고뇌, 절도節度, 통찰력, 책임감을 전제로 한다. 백인종의 춤판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우리 세기의 푸줏간에서는 누구나가 무죄이며 누구도 아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모두들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며 일부러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주체 없이 상황은 흘러간다. 사람들은 정처 없이 휩쓸리다가 어딘가에 걸리는 대로 매달려 있다. 우리는 집단적으로 죄인이며 선대가 저지른 죄악에 모두 함께 걸려들어 버렸다. 우리는 그들의 후손의 후손일 뿐이다.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재수가 없었다. 죄악이란 개인의 행동이나 종교적 행위로서만 탄생하는 것이다. (...)
우리에게 남은 것은 희극뿐이다. 우리 세계는 핵무기의 시대를 맞듯 그로테스크의 시대를 맞았다. 요한의 묵시록을 묘사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만큼이나 그로테스크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로테스크는 감각적인 표현방식에 불과하다. 형체가 없는 것의 형상, 얼굴 없는 세계의 얼굴이라는 감각적 모순이라는 소리다. 모순의 개념 없이는 인간의 사고도 없듯이, 모순 없이는 예술도 인간 세계도 생각할 수 없다. 핵무기 덕분에, 정확히 말하면 핵무기의 사용에 대한 두려움 덕분에 유지되는 인간 세계 말이다.
<노부인의 방문 Der Besuch der alten Dame>, 함부르크 독일연극관 정기간행물 제5호, 19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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