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獨立閱讀/飜, 중역의 세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2.17 중국산 번역? 11
  2. 2009.06.11 벤야민, 일방통행로, 13번지 2
  3. 2009.06.10 중역에 대하여 2
로쟈의 저공비행은 내가 즐겨찾는 블로그다. 비평고원이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름도 가물가물하고나..)일 때부터 그의 글을 봐 왔고, 특히 번역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 혹은 그러한 상황을 바로잡아 보려는 시도에 마음으로나마 지지를 보내왔다.(지지를 꼭 드러나게 해야하는 건 아니니까.) 그 지지의 한 방식으로 나도 중국쪽 원전이 잘못 번역된 부분이 있으면 조금씩 고쳐 두고는 했다. 천성이 게을러 눈에 띄게 하지는 못했지만. 양만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도 다른데, 나같은 듣보잡에겐 번역계 전반에 대한 비판이란 일은 가당치도 않아 그저 내가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만 고쳐가며 읽는 정도다.

요즘은 로쟈도 워낙 유명해지고 바빠서 그렇겠지만, 자기 글은 별로 올리지 않고 책과 관련된 소식을 블로그로 모으고 짧은 논평만 남겨놓곤 한다. 여러 정보 중에서 "선별"하는 것만도 능력이고, 그의 서재에 가면 그렇게 선별된 글들을 한번에 볼 수 있으니 편하다. 다만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링크만 걸어두는 식으로 바뀌는 게 좋을 듯하다. 알라딘은 블로그가 아니라 "서재"이기 때문에 책을 사서 차곡차곡 꽂아놓듯이 정보들을 서재로 모으는 게 정당화될 수도 있겠다. 자기 서재에 꼽힌 무수한 책 중에 마음에 드는 구절을 읽어주는 듯한 정겨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인용으로 도배된 혹은 남의 글을 전문인용하는 논문 같은 느낌도 든다. 굳이 저작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미 출판되었고 아직 절판되지 않은 글을 다른 사람이 재출간할 필요는 없는 거다.(그런 면에서 서재와 도서관의 차이처럼 대별되는 곳이 cliomedia이다.) 정말 서재라면, 그래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둘 필요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비공개로 본인만 보면 된다. 지금처럼이라면 연예계 기사를 퍼와서 간단한 논평을 붙이는 네이버 블로그와 행위 자체는 별 차이가 없다.

사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로쟈가 저렇게 해 주면 나도 편하고 그의 선별취향도 마음에 들기 때문에 자주 들렀었는데, 갑자기 약간 비아냥조가 되는 이유는 이번에 한국일보의 기사를 옮긴 당신이 읽는 거의 모든 것을 읽다가 감정적으로 살짝 기분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 [책의 풍경, 2009] <8> 번역서, 당신이 읽는 거의 모든 것


..

오염된 번역, 탁해지는 출판시장

번역서의 범람이라는 현상에 비해, 번역의 수준을 비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출판계에선 수치로 드러나는 양보다 무분별한 번역이 해치고 있는 출판의 질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서평 활동을 하는 이현우씨는 "번역의 질 자체는 태반이 '날림'"이라고 꼬집으며, 이를 유해 농산물에 빗대 '중국산 번역'이라 표현했다. 이씨는 "먹거리라면 그렇게 무분별하게 수입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며 "대중이 더 안전한 먹거리를 요구하듯, 독자도 품질 높은 번역서를 읽을 권리를 출판사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꼭 필요한 분야의 책이 제때 번역돼 나올 수 있는 환경의 구축도 필요하다. 국내에서 저자를 찾기 힘든 선진 담론을 소개하는 것이 번역 출판의 본래 의미. 그러나 기초학문 도서 등의 출간을 위한 사회적 지원은 거의 없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은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었지만, 쟈넷 브라운 등의 훌륭한 다윈 관련 책들은 정작 번역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번역가 김석희씨는 "전공 분야의 고전을 번역해도 연구 업적으로 쳐주지 않는 등 학계의 닫힌 현실도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유상호기자)

* 배경색 강조는 로쟈, 밑줄과 굵은글씨는 루나.

이 한국일보 기사에 대한 로쟈의 간단한 코멘트는 이러하다.

한국일보의 2009년 출판계 결산 연재 가운데, 번역서에 관한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엊그제 한 인터뷰에서 몇 마디 거든 게 인용돼 있다. '태반이 날림'이라고 한 표현은 과한데, 날림으로 나온 번역도 적지 않다 정도이다. '중국산 번역'이란 표현은 내가 곧잘 쓰는 것이다.


아마도 made in china의 이미지를 원용한 듯한데. 별 고민 없이 저런 멘트를 자주 써도 될지 의아스럽다. 문화적으로나마 대국인 러시아 문학을 전공하고, 주위에 중국친구도 없을 테니 '우리끼리 하는 우스개소리' 정도에서야 곧잘 써도 누가 뭐라겠냐.만은. 솔직히 중국 쪽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듣기 유쾌한 말은 아니다.

딱 들었을 때 한국인이 반응을 보일 만할 만한 비유를 찾다보니 그랬을 수는 있겠다. "비유"에 정색하고 문제점을 따지는 게 더 문제가 되는 이상한 짓인 것 같긴 하다만, 저 문구를 보자마자 내가 불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정당화해야겠다.


번역을 둘러싼 문제가 한두 해도 아니고, 별로 새로운 문제제기도 없이, 딱히 대안이랄 것도 없는 그저 연말 정리기사에 로쟈를 인용한 것은 그가 지금까지 번역을 둘러싸고 해 왔던 일들에 링크를 걸어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이미 번역에 대한 로쟈의 발언을 인정하고 있는 셈. 날림을 나온 번역도 적지 않다는 정도의 발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런데 날림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게 원산지였나?
(번역서 비중이 높아지는 현상을 학문의 식민상황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물론 나는 번역으로 인한 식민상황을 전혀 걱정하지 않으며, 번역이 더 많아지는 게 오히려 식민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선 별 상관없는 문제이므로 패스~~)

중국산 먹거리가 문제가 되었던 게 원래부터 안 좋은 걸 무분별하게 들여와서인가, 아니면 원래는 하자가 없는 건데 한국에 와서 잘못 가공해서 문제가 되는 건가. 즉 "먹거리라면 그렇게 무분별하게 수입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저 말을 사용하려면 원래부터 하자가 있는 원전을 들여오는 경우에나 합당할 거다. 예를 들어 짜집기한 책인 줄 모르고 번역 소개한다거나, 들뢰즈가 쓰지도 않은 짝퉁 철학서를 표지의 서명만 믿고 번역한다거나 뭐 그런 거. 그게 로쟈를 위시한 우리 한국인이 연상하는 중국산 이미지이지 않나?

그런데 보통 번역의 대상이 되는 원전, 특히 로쟈가 추천하는 책들은 멀쩡할 뿐 아니라 그쪽 분야에서는 최상품으로 평가받는 것들이다. 그게 한국에 와서 쓰레기가 되곤 한다. 너무나도 어이 없는 쓰레기가 많아 로쟈를 위시한 많은 이들이 광분한 것이고, 역량있는 저자의 의미 있는 저작을 제목만 보고 집어들었다가 좌절한 이땅의 많은 후배들이 로쟈를 지지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딴 사람은 모르겠고 나는 그렇다.

같은 말인데, 저 비유로 어떠한 자기반성을 끌어낼 수 있나?

날림 번역이 많은 한국 번역계의 문제를 지적하려면 싸구려 중국산을 탓할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대한 자기반성을 더 고려한 비유여야 하지 않을까? 출판환경이나 제도, 번역자의 역량과 함께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문화적 교양수준 등이 어우러져 반복되고 있는 저 문제에 관해 그렇게 올바른 목소리를 내왔던 분이 왜 저런 비유를 쓰는지 모르겠다.

여튼 중국산을 저 따위로 사용한다고 해서 내가 화를 낼 이유는 사실 없다. (나도 쓰다 보니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정도다. 일 방문자 100명 정도의 조용한 내 블로그가 시끄러워지지나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제발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나 또한 중국의 많은 부분을 싫어하고, 실제로 비판적으로 볼 구석이 많은 동네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현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기존에 형성된 부정적 이미지를 별로 적절하지 않은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는 태도는 좀 아니다. 그건 자체로 기분이 나쁘다. 굳이 하고 싶다면 "미국산 쇠고기 번역"이라고 하실 것을 추천한다. 정치적 올바름 측면에서도 유리하고, 자기반성보다는 원산지를 탓하는 논리에서도 그게 더 적합한 비유 아니겠나.


# 비아냥을 좀 덜어내 보려는데 잘 안 되네요. 제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로쟈님의 작업을 부정하는 건 아니랍니다. 갑자기 대법원 판결식 댓글이 달릴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다만 문제있는 번역에 대한 교정 요구를 출판사에 해야 한다는 주장을 독자의 입장에서 로쟈의 서재에 돌려주는 것으로 이해해 주세요. 변명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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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일방통행로, 13번지  (2) 2009.06.11
중역에 대하여  (2) 2009.06.10
Posted by lunarog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의 한 꼭지를 검토해 본다. "13번지"라는 제목의 이 글은 전혀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 같이 비교하면 왠지 불경할 것 같은, 책과 창녀를 가지고 13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문장은 중국어본에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 구절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나는 그쪽이 이해하기에 편했는데, 기출간된 한국어 번역이 보다 압축적인 경우도 많다. 문장 자체는 별 설명이 필요없이 하나하나 재미있다. 책도, 창녀도 원래는 재미있는 것이었나 보다. (이쪽 방면으로 아는 게 별루 없어서.. ㅡㅡ;;)

벤야민, 『일방통행로』(길), 103쪽.
왕차이융(王才勇) 번역,《单行道》,江苏人民出版社,2006.

(일방통행로의 중국어 번역은 대만본이 조금 더 읽기 쉬웠던 것 같은데, 지금 현재 참고할 수 없으므로 위의 판본과 대조한다. 나중에 덧붙일 게 있다면 추가하자.)



13번지


13. 나는 이 13이라는 숫자에서 멈추는 데서 잔인한 희열을 느낀다.
(13 ─ 나는 이 숫자를 주목하는 것에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
― 마르셀 프루스트

책은 아직 굳게 접힌 채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내 옛날 책들의 붉은 절단면을 피로 적실 희생양이 되리라.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기 위해 무기 또는 종이 자르는 칼이 그 책 안에 삽입되기를.
― 스테판 말라르메



1. 책과 창녀는 잠자리에 갖고 들어갈 수 있다.

2. 책과 창녀는 시간을 교차시킨다. 그들은 밤을 낮처럼 지배하고 낮을 밤처럼 지배한다.

   책과 창녀는 시간을 교차시킨다. 그들은 밤을 낮처럼 여기고 낮을 밤처럼 여긴다.

3. 아무도 책과 창녀에게 몇 분을 할애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과 가까워지면 그들이 얼마나 급한지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가 그들에 탐닉하는 동안 그들은 시간을 잰다.

    아무도 일분 일초라는 시간이 책과 창녀에게 얼마나 귀중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과 가까이하면 얼마나 그들이 시간을 아껴가며 우리를 대하는지 알게 된다. 우리가 그들의 육체 속 깊숙이 들어가 있을 때, 그들은 몰래 일분일초 흘러가는 시간을 잰다.

4. 책과 창녀는 예전부터 서로 불행한 사랑을 나누어왔다.

5. 책과 창녀는 각각 자신에 맞는 타입의 남자들을 갖고 있는데, 이 남자들은 그들 덕택에 살면서 그들을 핍박한다. 책들은 비평가를 갖고 있다.

   책과 창녀는 각자 자신만의 남자를 갖고 있는데, 이 남자들은 그들 때문에 먹고 살면서 그들을 괴롭힌다. 책에게 있어 이러한 남자는 비평가이다.

6. 공공장소에서의 책과 창녀 ― 대학생용.

   책과 창녀는 모두 대중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학생들에 의해 연구된다.

7. 책과 창녀를 소유하는 자 치고 그들이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드물다. 그들은 몰락하기 전에 사라지곤 한다.

  책과 창녀: 그들을 차지한 사람 중 그들의 종말을 목격한 이는 드물다. 그들은 시들기 전에 스스로 사라지려 애쓴다.

8. 책과 창녀는 어떻게 해서 지금의 자신들이 됐는지를 얘기하기 좋아하고, 그것도 거짓으로 꾸며댄다. 실제로 그들 자신조차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온갖 것을 여러 해 동안 따라가다가 어느 날엔가는 그들 자신이 언제나 '연구한다'는 명분으로 어슬렁거렸던 곳에서 비대한 몸이 되어 서 있게 된다.

   책과 창녀는 어쩌다가 자기들이 지금 모습으로 변했는지 꾸며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실제로는 그 자신조차 종종 그게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랑의 발로'로 사람들은 여러 해 동안 곳곳에서 그녀를 뒤쫓았지만, 어느 날엔가는, 그녀들이 뒤룩뒤룩 살찐 몸으로 길거리에서 호객할 때 사람들은 '삶을 연구'한다는 명분에서만 그녀들이 있는 곳을 어슬렁거린다.

9. 책과 창녀는 자신을 전시할 때 등을 내보이기를 좋아한다.

10. 책과 창녀는 무척 젊게 만들어준다.

  책과 창녀는 무수한 후손들이 있다.

11. 책과 창녀는 '나이 든 극성신도와 젊은 매춘부'의 관계와 같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배워야 할 수많은 책들이 과거에 비방을 받던 책들이 아닌가! 

  책과 창녀는 '늙은 위군자와 젊은 창부'의 관계와 같다. 과거에는 평판이 지극히 나빴던 책들을 지금은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던져주고 있다.

12. 책과 창녀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싸움질한다.

13. 책과 창녀. 한쪽에서 각주인 것이 다른 쪽에서는 양말 속에 끼워 넣은 지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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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산 번역?  (11) 2009.12.17
중역에 대하여  (2) 2009.06.10
Posted by lunarog
"중역의 세계"라는 카테고리를 새로 만든다. 중역(重譯)이면서 동시에 중역(中譯)이다. 원작이 중국어가 아닌 언어권에서 나온 책을 중국어 번역본을 참고하여 읽는 것이 주요 취지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어 번역본으로 충분히 의미가 닿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매끄럽게 읽힌다면 굳이 원저를 뒤질 필요도, 궁여지책으로 중국어 번역본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원본대조가 필요한 한국어 번역은 무수히 많다.

왜 하필이면 원작의 언어가 아닌 중국어 번역본인가? 우선, 내가 중국어를 읽을 수 있고 지금 중국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중국어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사전 뒤져가며 대조하는 건 시간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여기서 구할 수 있는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한국의 대학도서관이 욕을 많이 먹지만 어쨌든 크게 부족하지 않게 갖춰져 있다. 게다가 중국의 도서관들에 비한다면야...) 더하여 영어본이 항상 원본인 것도 아니다. 즉 영어번역도 오역이거나 두루뭉실한 게 없지 않은데, 이조차 벗어나 버리면 내가 사전을 옆에 두고도 읽을 수 있는 언어는 없다.

언어마다 각기 다른 호흡이 있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원작이 제일근거가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원작에 지나치게 구속되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직역을 나는 싫어한다. 조금 과장하여 그건 마치 "유붕이 자원방래하니~"와 마찬가지의 번역이다. 해당언어를 배울 때라면 또 모를까 한국어를 읽으면서 '그 언어'를 계속 상상해야 한다는 것은 진이 빠지는 일일 뿐 아니라 마땅찮기도 하다. 그것은 그 저작을 경전화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말로 그 문체를 맛보게 하지도 그 내용을 이해하게 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뭉치고 넘어가는 의역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어떤 원칙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천의 문제이고, 번역자의 능력과 성의 문제이다. 원저자가 자료와 사고의 뭉치에서 어떤 식으로 글로 풀어 냈을지를, 그 저자의 수준에서 그가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썼을지를 고려해야 하며, 내용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저자의 입장에서 '다시쓰기'로서의 번역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가능성의 한 참고지점으로 (먼저 출판된 게 있다면) 중국어 번역도 이용할 수 있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 선배들이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하며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 냈듯이 말이다.

중국어 번역본의 질이 한국어 번역보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인문학 대학원생만 해도 수만(?)인 나라, 즉 완전날림만 아니라면 초판 몇만부는 소화될 수 있는 토대가 있는 나라다. 총서나 시류에 편승한 책들은 대학원생을 사역시켜 급하게 번역해 내기도 한다. 물론 우리나라 번역보다 훨씬 유려하고 엄정한 번역도 없지는 않다. 하나의 문체가 다른 언어에서는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뿐이니까, 어쨌든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면 크게 상관은 없겠다.

일반적으로 중역이 칭송받는 경우는 없다. 중역에는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담겨 있다. ..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은 정해 두자.


  • 한국어와 중국어 이외의 제3언어 원전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여, 이때 원전의 한중 번역본이 최소한 한 종 이상 출간되어 있어야 한다.
  • 원전의 언어는 참고 대상이 아니다. 어차피 능력 밖이다.
  • 중국어를 옮길 때 한국어 번역본의 영향을 최소화한다. 즉 한국어 번역본과의 차이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번역한다. 나는 이것이 원전의 가능성을 조금 더 확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오역논쟁에 참가하거나, 내가 다루는 텍스트를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출판된 한국어 번역와는 다른 번역을 제시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은 것이다. 즉, 내 공부를 위해, 내가 이해하기 편한 방식으로 문장을 다시 재배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그것이 이 글을 혹시라도 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다. 중국어 번역본에 근거한 내 중역이 심각한 오류가 있다면(자그만한 것이라도!) 알려주면 나에게도 도움이 되겠다.

원칙은 해보면서 조금씩 고치도록 한다.

실제로 얼마나 계속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냥 두면 앞으로도 계속 비공개글로 파묻혀 있을 것 같아 일단 시작은 해보기로 한다. 원전의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 보면 우스워보일 수도 있는데, 내 바램은 다양한 외국어를 하는 사람이 (이런 작업이 필요없을) 좋은 번역을 많이 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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