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중역의 세계"라는 카테고리를 새로 만든다. 중역(重譯)이면서 동시에 중역(中譯)이다. 원작이 중국어가 아닌 언어권에서 나온 책을 중국어 번역본을 참고하여 읽는 것이 주요 취지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국어 번역본으로 충분히 의미가 닿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어로 매끄럽게 읽힌다면 굳이 원저를 뒤질 필요도, 궁여지책으로 중국어 번역본을 찾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원본대조가 필요한 한국어 번역은 무수히 많다.

왜 하필이면 원작의 언어가 아닌 중국어 번역본인가? 우선, 내가 중국어를 읽을 수 있고 지금 중국에 체류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중국어이기 때문이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사전 뒤져가며 대조하는 건 시간도 많이 들고, 무엇보다 여기서 구할 수 있는 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한국의 대학도서관이 욕을 많이 먹지만 어쨌든 크게 부족하지 않게 갖춰져 있다. 게다가 중국의 도서관들에 비한다면야...) 더하여 영어본이 항상 원본인 것도 아니다. 즉 영어번역도 오역이거나 두루뭉실한 게 없지 않은데, 이조차 벗어나 버리면 내가 사전을 옆에 두고도 읽을 수 있는 언어는 없다.

언어마다 각기 다른 호흡이 있고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원작이 제일근거가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원작에 지나치게 구속되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직역을 나는 싫어한다. 조금 과장하여 그건 마치 "유붕이 자원방래하니~"와 마찬가지의 번역이다. 해당언어를 배울 때라면 또 모를까 한국어를 읽으면서 '그 언어'를 계속 상상해야 한다는 것은 진이 빠지는 일일 뿐 아니라 마땅찮기도 하다. 그것은 그 저작을 경전화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말로 그 문체를 맛보게 하지도 그 내용을 이해하게 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뭉치고 넘어가는 의역에 찬성하는 것도 아니다. 이건 어떤 원칙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천의 문제이고, 번역자의 능력과 성의 문제이다. 원저자가 자료와 사고의 뭉치에서 어떤 식으로 글로 풀어 냈을지를, 그 저자의 수준에서 그가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썼을지를 고려해야 하며, 내용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저자의 입장에서 '다시쓰기'로서의 번역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가능성의 한 참고지점으로 (먼저 출판된 게 있다면) 중국어 번역도 이용할 수 있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 선배들이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하며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 냈듯이 말이다.

중국어 번역본의 질이 한국어 번역보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인문학 대학원생만 해도 수만(?)인 나라, 즉 완전날림만 아니라면 초판 몇만부는 소화될 수 있는 토대가 있는 나라다. 총서나 시류에 편승한 책들은 대학원생을 사역시켜 급하게 번역해 내기도 한다. 물론 우리나라 번역보다 훨씬 유려하고 엄정한 번역도 없지는 않다. 하나의 문체가 다른 언어에서는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를 확인하려는 것 뿐이니까, 어쨌든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면 크게 상관은 없겠다.

일반적으로 중역이 칭송받는 경우는 없다. 중역에는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담겨 있다. ..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은 정해 두자.


  • 한국어와 중국어 이외의 제3언어 원전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여, 이때 원전의 한중 번역본이 최소한 한 종 이상 출간되어 있어야 한다.
  • 원전의 언어는 참고 대상이 아니다. 어차피 능력 밖이다.
  • 중국어를 옮길 때 한국어 번역본의 영향을 최소화한다. 즉 한국어 번역본과의 차이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번역한다. 나는 이것이 원전의 가능성을 조금 더 확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오역논쟁에 참가하거나, 내가 다루는 텍스트를 오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출판된 한국어 번역와는 다른 번역을 제시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은 것이다. 즉, 내 공부를 위해, 내가 이해하기 편한 방식으로 문장을 다시 재배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그것이 이 글을 혹시라도 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다. 중국어 번역본에 근거한 내 중역이 심각한 오류가 있다면(자그만한 것이라도!) 알려주면 나에게도 도움이 되겠다.

원칙은 해보면서 조금씩 고치도록 한다.

실제로 얼마나 계속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냥 두면 앞으로도 계속 비공개글로 파묻혀 있을 것 같아 일단 시작은 해보기로 한다. 원전의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 보면 우스워보일 수도 있는데, 내 바램은 다양한 외국어를 하는 사람이 (이런 작업이 필요없을) 좋은 번역을 많이 해 주는 것이다.


'獨立閱讀 > 飜, 중역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산 번역?  (11) 2009.12.17
벤야민, 일방통행로, 13번지  (2) 2009.06.11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