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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3.05 중국의 지도교수는 사장님?
示衆/조리돌림 2009. 3. 5. 20:15

언젠가 한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상해에서 유학하고 있는 후배들과 잠깐 다니러 온 선배 교수가 만난 자리였는데,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후배들이 그 선배에게 한수 가르쳐 주듯 중국에서는 어떠어떠하다는 이야기를 신이 나서 떠들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때 한 친구가 "중국에서는 지도교수를 사장님(老板; 라오빤)이라고 부른다"고 말을 꺼냈다.

예전에 그 친구에게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고 해서,

나는 우리 지도학생들은 선생을 "라오빤"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들어본 적 없는데?

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대답은 (전체적인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당신이 당신 지도교수 밑에 있는 다른 중국인 지도학생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 그렇다!" 였다. ^^;;

뭐, 사실과 많이 다른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지만, 후배에게 까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좀 거시기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말 지도학생 모임(졸업생, 현 석박사 과정생이 모두 모이는 자리이다)에서 우연히 한 졸업생이 "라오빤"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물론 그녀와 교수의 관계는 예전 지도교수와 학생의 관계에 더하여 현재는 학과 주임과 사무실 직원의 관계이기도 해서 이 "라오빤"이 아주 어색한 것은 아니다.

어쨋든 그런 경우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만, 나는 아직도 우리 지도학생들은 그 말은 안 쓴다고 우기고 싶은 것이다!! 쳇! ㅡㅡ;;

(나는 우리 지도교수와 학생의 관계를 보면서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중국의 사제지간에 대한 지식을 여럿 수정해야 했다. 그것은 오히려 박노자가 지적하기 이전의 우리나라 사제지간을 닮은 그것인데, 묘하게 다른 면도 있다. 그것이 단순한 교수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인지 다른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여튼, 하나의 경우를 "중국의~" 무엇이라고 일반화하기는 곤란한 면이 있다는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자.)


그러다, 얼마 전 첸리췬의 이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첸리췬은 북경대에서 퇴임 후 문혁 전후에 몸담은 바 있는 귀주로 내려가 향촌 교육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대학은 정신의 성지가 되어야 한다"(大学应该成为“精神圣地”)라는 제목의 이 글 또한 향촌교육, 혹은 지역특성화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귀주대학에서 행한 강연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향한, 즉 크게는 문혁 이전까지 소련식 학제에서 최근의 미국식 학제를 모방하려는 경향에서 작게는 북경대, 청화대만 바라보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그 지역 내부에서 교육의 자원을 찾고 각 지역의 전통과 특성에 맞는 교육을 첸리췬은 강조하고 있다. 그 실례로 귀주 지역의 특성에 맞는 지역적, 전문적 교육과 함께 "서원식 교육"(왕양명이 귀주에서 서원을 열었나 보다..)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 중 "나의 서원교육 몽상"이란 절의 앞부분을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나의 서원교육 몽상


   개인적으로 나는 왕양명의 서원교육에 가장 흥미를 느낀다. 이것은 내가 꿈꾸던 것이다. 서원교육은 사실 중국교육의 좋은 전통의 하나이다. 이쪽으로는 이미 많은 전문가가 좋은 연구를 내어 놓았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실천의 문제이다. 즉 서원교육이 오늘날 우리의 대학교육에, 특히 대학원생 교육에 참고로 삼을 만한 어떤 의미와 가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나아가 "서원식 교육"을 실험할 수는 없을까? 이것은 교육에 대해 내가 가지고 꿈꾸고 있는 몽상이다.

    내가 이러한 꿈을 꾸는 것은 지금의 대학원생 교육이 문제이며, 다른 교육자원을 찾아 참고하고 보충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것은 요즘은 사제관계(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변해 버렸다는 점이다. 갈수록 "사장"과 "알바생"의 관계로 변하고 있다. 요즘 많은 지도교수들이 "사장"이라고 불린다. 게다가 듣자하니 명실상부하게도 요즘은 지도교수가 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고 한다. 즉 반드시 국가나 성급 학술 프로그램을 따야 하며, 그 프로그램의 경비를 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학생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거야 이공계열에서는 일찌감치 그래왔던 건데, 최근에는 문과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사제관계 변화의 배후에는 교육의 변질이 도사리고 있다. 즉 지식을 사고파는 관계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까지 노골적인 매매는 아니더라도 순수하게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으로 변해 버렸다. 거기에는 마음의 교류, 사상의 충돌, 인격의 영향, 성정(性情)의 훈도, 정신의 흡인과 전달 같은 게 없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교육의 본질적인 것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면에서 중국의 전통적인 서원교육은 분명 장점을 갖추고 있다. 내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바에 따르면, 서원교육은 사제와 동학 간의 밀접한 교류, 즉 아무런 조건없는 접촉을 중시할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감응에도 또한 주목한다. 인간집단 내에서의 화해 및 인간과 자연의 화해라는 분위기 아래서 인간의 생명은 차분히 가라앉은 침잠된 상태로 진입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만 정말로 마음껏 독서의 즐거움, 학문하기의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다. 또한 생명, 우주, 인생, 인성, 중국, 세계, 인류 등 거대한 문제에 대한 사고를 즐길 수 있으며, 사상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다. 그런 후에야 진정한 교육과 학술의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현대 교육, 특히 오늘날의 중국 대학교육, 대학원생 교육에서는 전혀 꿈꾸지 못한다. 우리의 교육은 갈수록 가시적인 이익 추구에 급급하며,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갈수록 조급하다. 그것은 우리가 교육과 학술에서 갈수록 멀어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분적으로라도 학원식(아마도 "서원식"??) 교육방식을 도입하여 짧게나마 실천의 기회를 줘서 젊은 학생들이 교육과 학술의 참맛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도 좋을 것이다. --- 지금의 교육은 정말로 증오심이 일 정도로 밥맛이다. 나의 몽상은 이렇게 가련한 소망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천애>, 2008년 5기. (《天涯》 2008年第05期)


첸리췬이라는 인물에 대한 소개를 여기서 길게 하지는 않겠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실 것이고, 글로 정리하려면 쉽지 않으니까..

그러나 자기 영역에서 이제껏 해온 연구를 정리하기만 해도 편안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을 퇴임한 대학교수가 귀주까지 내려가서 중학교에서 노신 강의를 하기도 했고, "중학생들도 머리가 너무 굳었어~!"라면서 소학교에도 기웃거려 보는 인물이다.

이 글만 읽어도 그가 보여주는 어떤 입장은 충분히 전해지지 않을까 한다. 생긴 게 꼭 항주 영은사의 미륵불처럼 생겼는데, 역시나 (조상의) 본적이 항주이다.

단순히 "지도교수"와 "사장님"이라는 호칭에 대한 문제가 생각나서 이 글을 옮겨 번역해 보기는 했는데,

처음 읽을 때도 그렇고, 이렇게 한글로 정리를 해 봐도 마찬가지인데 여러 면에서 한국의 상황에도 충분히 새길 만한 부분이 많은 글이다. 저 높은 SKY만 바라보고 지방에 남은 절대다수는 실패자가 되어 버리는 현실 말이다. "돈"이 유일한 가치평가의 기준인 상황에서는 누구도 그 울타리를 깨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지방대 출신이 삼성 들어간 거나, 지방대 대학원생이 미국 대학교수로 취임한 것에 우쭐하는 것으로 그칠 테니까. 동일한 기준에서 움직이는 것. 첸리췬 스스로 이상주의라고 한 것처럼, 그것을 대체할 어떤 기준이 필요하겠지만, 누가 "이상"의 이름으로라도 아직 오지 않은 그것을 제시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


하여튼 결론은 앞으로 누구도 함부로 지도교수를 "라오빤"이라고 부르지는 말지어다!!!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