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카테고리 없음 2015. 8. 18. 02:03
공순이: 변화하는 중국의 도시로 찾아든 시골 소녀들
Factory Girls: From Village to City in a Changing China

테드 영상- Leslie T. Chang: The voices of China's workers(http://on.ted.com/LTChang)
레슬리 장 웹페이지: http://leslietchang.com/book3.html
리뷰(레슬리 장 웹페이지): http://leslietchang.com/book2.html

1부 도시

1. 도시로 나가다


다른 공장에 다니는 소녀를 만나면 당신은 우선 신상털기부터 들어간다. ‘몇 년차야?’ 마치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에 대해 말하듯 서로 캐묻는다. ‘월급은 얼만데?’, ‘기숙사랑 식대 포함되고?’, ‘잔업수당은?’ 그런 다음엔 아마 어느 지방 출신인지 정도는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상대의 이름은 묻지 않는다.
공장에서 진짜 친구를 사귀기란 쉽지 않다. 소녀들은 12명이 한 방에서 잔다. 그리고 그 좁은 기숙사 방 안에서 당신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어떤 소녀들은 가짜 신분증으로 공장에 들어와서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짜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일부는 고향 사람들하고만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소문은 공장에서 시골로 순식간에 날아가, 당신이 고향에 가 보면 자기가 얼마를 벌었고, 저금을 얼마 했으며, 남자랑 데이트는 했는지 따위를 온 동네 아줌마, 할마시들이 죄다 꿰고 있을 것이다.
친구를 사귀게 되면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준다. 친구가 일을 그만둬 머물 곳이 없으면 당신의 좁은 침대 한켠을 나눠준다. 걸리면 10위안(1800원 가량)의 벌금을 물어야 하더라도 말이다. 만약 그녀가 굉장히 먼 곳에서 일한다면, 간만에 찾아온 휴일에 새벽같이 일어나 몇 시간이 걸려도 버스를 타고 만나러 간다. 그러면 친구는 당신과 하루를 보내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낼 것이다. 이번엔 벌금이 100위안이다. 당신이 싫어하는 공장에서 계속 일하거나 좋아하는 공장을 그만둘 수도 있는데, 그건 친구의 부탁 때문이다. 친구 간에는 매주 편지를 쓴다. 비록 외지에서 오래 떠돈 소녀들은 그게 유치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런 무리들은 휴대폰 메시지를 보낸다.
친구 사이는 종종 틀어진다. 삶이 너무 빨리 바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누군가와 연락이 끊기는 것이다.
한 달 중 최고의 날은 월급날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최악의 날이기도 하다. 고생고생 그렇게 긴 시간을 일한 후 별별 이유로 그 많은 돈을 떼어가는 걸 보면 격분하게 된다. 어느 아침에 몇 분 지각한 거, 아파서 반차 쓴 거, 혹은 근무복을 동복에서 하복으로 바꿀 때 드는 추가비용 따위 말이다. 월급날에는 모두가 우체국에 모여들어 집에 돈을 부친다. 집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녀들은 돈 부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지만, 외지에서 오래 묵은 소녀들은 그들을 비웃었다. 어떤 소녀들은 자기를 위한 예금통장을 개설했다. 특히 남자친구가 있는 소녀들이 더 그랬다. 어떤 소녀가 가장 저금을 잘 하고, 얼마나 저금했는지 모두가 안다. 물론 누가 가장 헤픈지도 모두가 안다. 립스틱이며 은색 휴대폰, 하트 모양 목걸이, 그 많은 하이힐을 보면 모를 수가 없다.
소녀들은 노상 그만두겠다는 말을 달고 산다. 직공들은 6개월 근속을 요구받는데, 반년을 채워도 항상 퇴직 허가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직공의 첫 두 달 치 월급을 공장이 위탁한다. 즉 허가 없이 그만두면 그 돈을 포기하고 다른 곳에서 같은 과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외부인은 알지 못할 공장 생활의 실상이다. 공장에 들어가는 건 쉽지만, 나가는 것은 어렵다.
좋은 일자리를 찾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일자리를 그만두는 것이다. 면접은 업무시간에 이뤄지고, 새로 채용되면 당장 일을 시작해줄 것을 요구받는다. 일을 그만두는 게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밥 먹고 잠잘 곳이 필요하다는 압박은 일자리를 빨리 찾을 동기가 된다. 소녀들은 종종 떼로 공장을 그만둔다. 여럿이 함께하면 용기가 생기니까. 그리고 새로운 공장에도 모두 함께 들어가자고 맹세한다. 보통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누군가와 연락이 끊기는 것이다.

오랫동안 뤼칭민(Lu Qingmin; 吕清敏)은 혼자였다. 버스로 한 시간 걸리는 공업도시 선전(深圳)의 공장에서 언니가 일하고 있고, 고향친구들도 중국 연안도시의 여러 공장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민이(친구들이 부르는 호칭)는 그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일하는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누구에게도 자기공장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야말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일한 공장의 이름은 캐린 전자(Carrin Electronics; 佳荣电子制品厂)였다. 이 홍콩 기업은 알람시계, 계산기, 세계 각 도시의 시간이 표시되는 전자 달력을 만들었다. 2003년 3월 민이가 면접을 보러 왔을 때 이 공장은 훌륭해 보였다. 건물외장은 타일로 덮여 있었고 시멘트 마당 너머 입구는 철제 아코디언 도어로 굳게 닫혀 있었다. 고용된 뒤에야 그녀는 공장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12명의 직공이 이층침대가 따닥따닥 붙어 있는 화장실 바로 옆방에서 복작대며 잤다. 방은 더러웠고 나쁜 냄새로 가득했다. 구내식당의 음식 또한 열악했다. 급식은 밥에 고기 혹은 야채 반찬 하나, 국이 전부였는데, 국은 맹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조립 라인에서의 하루는 아침 8시부터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식사 시간으로 허용된 두 차례 휴식을 제하고 하루 13시간 근무였다. 직공들은 몇 주씩이나 연속으로 매일 일하곤 했다. 간혹 토요일 오후 잔업이 없으면 그날이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이었다. 월급은 400위안(7만원 가량)인데 잔업수당을 포함하면 2배 가까이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월급이 제때 나오는 달이 별로 없다. 이 공장은 천 단위 인원을 고용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여성으로, 고향에서 갓 나온 10대가 아니면 이미 서른을 넘긴 기혼여성이다. 공장에 없는 연령대를 체크하면 그 공장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20대의 젊은 여성은 공장 세계의 엘리트이다. 앞으로 10년 동안 조립 라인에 매일 앉아 있는 장면을 상상한 순간 민이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고작 16세였다.
공장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녀는 때려치우고 싶었다. 그러나 6개월은 버티기로 맹세했다. 고생을 좀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당시로선 딱히 다른 옵션이 없기도 했다. 합법적인 취업연령은 18세였다. 16, 17세도 짧은 시간 제한된 업종에서 일할 수는 있었다. 일반적으로 노동법을 아무렇게나 위반하는 고용주—민이의 표현에 따르면 "가장 시커먼 공장들"—만이 그녀처럼 어린 아이를 채용했다.
일을 시작한 첫 주에 민이는 17세가 되었다. 그녀는 반차를 내고 홀로 거리를 거닐었다. 사탕 몇 개 사서 혼자서 먹으면서. 그녀는 사람들이 뭐하며 노는지 몰랐다. 도시에 오기 전에는 공장이 뭐하는 데인지도 모호한 상태였다. 막연히 활발한 사교모임 같은 게 아닐까 상상했다. "저는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게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훗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여러 사람이 함께니까 바빠도 수다도 떨면서 재미있게 일한다고 생각했어요. 상당히 자유로울 거라 착각한 거죠. 근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요."
업무 중 잡담은 금지사항이며, 위반시 벌금 5위안이 부과된다. 화장실 사용은 10분으로 제한되며 근무일지에 서명해야 한다. 민이는 품질 관리 라인에서 일했다. 전자제품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이동해 오면 버튼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플라스틱 부품이 잘 결합되었는지, 배터리 접속은 정상인지 체크한다. 그녀는 모범 직공은 아니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재잘댔고 조립라인의 다른 여공들과 노래를 불렀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새장 속의 새처럼 갑갑해 그녀는 틈만 나면 화장실로 달려갔다. 단지 창밖으로 고향 생각나는 푸른 산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둥관(东莞)은 푸른 숲이 무성한 아열대에 위치한 공업도시이다. 어떨 땐 민이 말고는 아무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그녀 때문에 공장에 규정이 하나 추가되었다. 직공은 네 시간에 한 번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으며, 위반시 벌금은 5위안이다.
6개월 민이는 사장을 찾아갔다. 그는 20대의 남성이다. 그녀는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거절했다.
"넌 작업성과가 좋지 않아," 사장은 말했다. "너, 눈이 삐었냐?"
"내 눈이 삐었다 해도," 민이는 받아쳤다. "난 당신같이 더러운 인간 밑에선 일 못해요."
다음날 그녀는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고 그 일로 100위안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그 다음날, 그녀는 사장에게 가서 다시 퇴직을 요구했다. 사장의 대답은 의외였다. 설 명절까지만, 그러니까 6개월만 더 있어주면 공장이 지불하지 않은 두 달 치 체불 임금을 주고 그만두게 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사장은 그녀가 공장에 남을 수밖에 없게 꾀를 낸 것이다. 둥관 같은 공업 도시는 설이 지나면 직공들이 몰려들고, 그때가 되면 일자리 경쟁이 가장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푸닥거리를 거친 뒤부터 사장은 전보다 부드럽게 그녀를 대했다. 그는 계속 일하는 걸 고려해 보라고 몇 번이나 권했으며, 심지어는 현장 사무원으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비록 승진해봐야 월급이 오르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민이는 복지부동이었다. “당신네 공장은 내 청춘을 모조리 바칠 가치가 없어요.” 그녀가 사장에게 한 말이다. 그녀는 근처 상업학원의 컴퓨터 반에 등록했다. 야근이 없는 날 저녁식사를 건너뛰고 가서 컴퓨터로 키보드 타이핑이나 문서 만드는 법 등을 몇 시간 배웠다. 대부분의 여공들은 자기들이 배운 게 너무 부족해서 수업 몇 개 들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이는 달랐다. “배우면 안 배우는 것보다야 낫죠.” 그녀는 생각이 똑 부러졌다.
그녀는 집에 전화해서 일을 그만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시골에서 땅 몇 떼기 부쳐 먹으며 아직 학교에 다니는 어린 세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그녀의 부모는 반대했다. “너는 항상 이리 튀고 저리 튈 생각만 하는구나.” 아버지는 말씀을 이으셨다. 여자아이는 너무 경박해서는 안 돼. 한 곳에 지긋이 있으면서 돈이나 좀 모아라.
민이는 그게 최상의 조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걱정 마세요. 알아서 잘 할 수 있으니까.”
그녀는 이제 공장에서 두 명의 진짜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량룽(梁容)과 황자오어(黄娇娥)인데, 둘 다 민이보다 한 살 많다. 그들은 민이가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 밤에는 옷을 대신 빨아줬다. 빨래는 끝이 안 나는 일이다. 직공들에게 갈아입을 옷이 몇 벌 없기 때문이다. 근무가 끝난 푹푹 찌는 컴컴한 밤에 여공들은 줄지어 기숙사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나르느라 분주했다.
친구를 사귀고 나면 공장 생활이 즐거워진다. 어쩌다 야근이 없는 저녁에 세 아가씨는 저녁도 거르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그런 다음 공장으로 돌아와 심야 영화를 봤다. 겨울이 되자 난방이 되지 않는 기숙사의 추위 때문에 직공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민이는 친구들을 마당으로 끌고 가 배드민턴을 쳤다. 그들은 몸을 충분히 덥힌 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2004년은 설이 1월 말이었다. 연휴가 4일 밖에 되지 않아 직공들이 고향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민이는 기숙사에 처박혀 이틀 동안 집에 네 번 전화했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다시 사장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가게 해 주었다. 이 소식을 전하자 량룽과 황자오어는 울었다. 이 낯선 도시에서 그들은 민이가 떠나는 걸 아는 유일한 친구였다. 그들은 가지 말라고 매달렸다. 다른 공장 상황도 나을 게 없고, 가든 남든 결국엔 똑같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민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면 그들을 보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민이는 옷 몇 벌 넣은 가방과 공장이 지불하지 않은 두 달 치 월급을 챙겨 그날 바로 떠났다. 그녀는 수건과 이불은 챙겨가지 않았다. 돈 들여서 산 물건들이라 해도 다시는 꼴도 보기 싫었던 것이다.
조립라인에서 10달 일하면서 민이는 고향에 3천 위안(55만원 가량)을 부쳤고, 두 명의 진짜 친구를 사귀었다.
그녀가 두려움을 느꼈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머리 속에 가득한 생각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뤼칭민이 태어난 곳은 거의 모두가 같은 성씨인 집성촌이었다. 90호가 거주하는 마을의 넓지 않은 경작지에는 벼, 유채, 면화가 재배되었다. 민이네 가족은 세 마지기를 일궜지만, 수확한 대부분을 먹어 치웠다.
그녀의 미래는 그녀가 아이였을 때 이미 정해져 있었던 듯하다. 그 중심에는 집안에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시골 살림의 철칙 같은 게 끼어 있었다. 민이의 엄마는 어렵사리 아들을 보기 전에 네 딸을 낳았다.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 초기에 대부분의 시골에서는 규제가 느슨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이 다섯은 경제적으로 너무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80년대 개혁개방으로 생활비도 올랐다. 둘째 딸인 민이는 이 짐의 상당부분을 나눠 져야 했다.
그녀는 학교를 싫어했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다. 그녀는 말썽을 일으켜 꾸중들은 기억 밖에 없다. 이웃집 나무에 올라 자두를 훔쳐 먹었는데, 들킨 날엔 얻어맞았다. 한번은 엄마가 집안일을 시켰는데 듣지 않았다. “집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나보고 하라는데?” 엄마는 몽둥이를 들고 수백 미터를 따라와 그녀를 두들겨 팼다.
그녀는 잘 놀았다. 헤엄치는 법도 배우고 트럭 운전도 배웠다. 롤러스케이트 타기를 유난히 좋아했고, 까진 상처를 엄마 몰래 숨겼다. “나는 넘어질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넘어져 봤어요.” 민이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넘어질 걸 생각하면 안 돼요.” 그녀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아이이다. 어느 해 여름, 아버지는 트럭을 빌려와 그녀와 함께 시골을 돌며 직접 키운 수박을 팔았다. 그들은 낮에는 차를 몰고 밤에는 트럭에서 잠을 잤다. 그것은 민이의 정겨운 기억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농민공들은 자신의 출신지를 빈곤하고 낙후한 곳으로 연상하며, 심지어는 마을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꺼려한다. 그러나 민이는 도시에 올라온 뒤 한참 뒤에도 자기 고향이 아름다운 무엇인 양 이야기하곤 했다.
1990년대 말, 민이네 부모 둘 다 아이들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러 나갔다. 아버지는 연안 도시의 신발 공장에서 일했는데 건강이 안 좋아 돌아와야 했다. 나중에 엄마도 일 년간 일하러 나갔다. 민이는 근교의 중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주말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밥이며 빨래를 했다.
마을의 거의 모든 젊은 사람들은 일하러 나갔다. 민이가 아직 중학생일 때 언니인 구이민(桂敏)이 둥관의 공장에 일하러 갔다. 얼마 후 민이는 고교 입학 학력고사에 떨어졌고, 부모는 그녀도 일하러 나가게 하는 걸 고려했다. 구이민은 집에 전화해서 민이가 진학하도록 부모를 설득했다. 구이민의 공장 월급으로 학비를 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모는 그 말에 동의했고, 민이는 2년제 직업고등학교에 등록했다. 이로써 그녀는 마을에서 가장 학력이 높은 사람이 되었다. 자기 학업을 희생해서 가족을 도운 구이민보다 높았다.
구이민은 2003년 설 연휴에 귀향하여 다시 돌아갈 때 민이를 데리고 갔다. 학교가 한 학기 남았지만, 민이는 학비를 아끼고 곧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기를 원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는 게 설레었다. 여태 기차를 타 본 적도, 공장을 본 적도 없었다. "저는 일찍 나가서 뭔가를 배우고 세상을 보고 싶었어요." 민이는 말했다.
둥관에서 구이민은 싸구려 여관방을 하나 잡아주고, LCD를 만드는 일본 공장에 일자리를 구해 주었다. 민이는 거기서 한 달을 일한 후 나왔다. 그녀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외로웠다. 그녀는 여관방으로 돌아와 다른 공장의 일자리를 구했지만 출근하지 않았다. 언니는 여관비를 계속 내주겠다고 했지만 민이는 자신이 언니에게 짐이 된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민이는 한 전자공장의 조립라인 품질관리 업무 구인 전단지에 꽂혔다. 민이는 광고(상당수는 농민공의 돈을 노린 가짜 광고이다)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고, 전화를 받은 사람은 민이에게 공장에 오는 법을 알려줬다. 버스를 세 시간이나 타고 둥관의 남동쪽 끝에 도착했다. 그곳이 민이가 혼자서 힘든 1년을 보낸 곳, 캐린 전자였다.
공장에 들어서는 순간 민이는 거기가 바로 직전에 그만둔 일본 공장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돌아가기엔 늦었고, 언니에게 다시 도와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일처리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그쪽이 더 좋았다.

농민공들은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이동을 "出去", 즉 "나가다"라는 간단한 말로 표현한다. '고향에서는 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갔다.' 농민공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도시는 그들에게 편한 삶을 제공하지 않았다.


Posted by lunaro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