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02
참말하기의 어려움
어릴 때 '*범'이라는 이름의 동네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국민학교 계단 뒤에서 저에게 자기 별명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더군요.
별명이 두 개였는데, 내가 그 중 하나인 "호랑이"를 말했더니 나를 쥐어박았습니다.
(소띠가 대부분인 학년에 들어간 범띠에게 호랑이는 금칙어였으니까요.. ㅡㅡ;;)
정말 때렸는지 시늉만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저는 울었습니다.
아파서가 아니라 억울해서 왈칵 하고 눈물부터 나오더군요.
괜찮다고, 말해보라고 해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 진실은 말하면 안 된다는 걸 그 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이런 상황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반우파투쟁 때였습니다. 공화국 성립 이후 사상검열로 옥죄여 왔던 지식인들에게 마음껏 의견을 말하게 하고 비판을 허락한 것이 쌍백시기(백화제방, 백가쟁명; 1957년)였는데, 그러나 아주 짧은 이 시기에 연이어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들의 의견과 비판이라고 살살 달래놓고는 "네 이놈들! 내 너희의 사상이 이렇게 뒤가 구린 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호통을 치고 채찍을 가했던 거죠. "우파", "반혁명"이란 죄목은 모든 반대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어느 사회의 "좌파", "빨갱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독립적인 사상을 가졌거나 다른 의견을 가진, 그리고 그 생각을 말하는 모든 사람이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죠. 이런 역사에서 사람들은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생존자들은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었을 겁니다.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 (매체에서 말해진 것이 진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그런 거다!) 그럼에도 생존자들의 후손들은 그 교훈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직 철이 없어 말하면 안 되는 진실을 말해 버리거나,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과도하게 요구하곤 합니다. 그것도 겁없이 여럿이 모여서 무단으로 도로와 광장을 점령하면서 말입니다. 사실은 그러한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2009년 5월 10일, "2009 베이징 육사 민주운동 토론회"라는 이름의 비공개 세미나에서 <미완성의 역사적 임무>를 발표한 첸리췬(錢理群) 교수는, 그 겁없는 청년들, 분노한 청년이 바로 한때의 공산당이었음을 지적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1989년의 톈안먼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1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학생, 노동자, 지식인, 국가 공무원 등 광범한 사람들이 참여한", "건국 60여년 이래 언론, 출판, 집회결사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온 중국 인민들의 위대한 투쟁의 역사"임을 역사적 회고를 통해 밝히며, 그것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임을 이야기합니다.
전(前) 베이징대 교수인 첸리췬은 교사의 양심과 학자의 양심 때문에 회의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20 년 전 학생들이 민주사업에 희생될 때 나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학생을 지키는 것은 교수의 직무이며 베이징대의 전통이다. 오사운동 때 채원배 교장이 바로 그러했다. 또한 정치적인 목적이 아닌 학술적 원칙에 따라 톈안먼 사건을 논의하고 역사에 기록해야 마땅하다."
앞줄 우측 세번째가 첸리췬 교수이다.
먼저 중국공산당이 애초에 수행한 혁명의 주요한 요구는 국민당 일당독재의 전횡적 통치를 반대하고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었음을 지적합니다. 그것은 공산당측에 의해 행해진 다음과 같은 비판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국민당 일당통치 구역에서는 일체의 강학, 독서, 출판, 발행의 자유가 잔혹하게 훼손되었다. 복고가 유행이 되었고 사상을 가진 것은 유죄가 되었다. 모든 학교에 비밀 정탐, 사기, 박해, 무장위협, 금전 매수의 스파이 수법이 극도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교육과 학술의 존엄은 깨끗하게 쓸려나갔다." "오랫동안 중국 파시스트들은 죽기살기로 이러한("하나의 지도자, 하나의 당, 하나의 주의"로 대표되는) 죄악을 순수한 청년들에게 교조적으로 세뇌시켜 왔으며, 이러한 파시즘적 사상 유형을 수용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고 죽일 놈으로 받아들여졌다. 총부리를 중국 인민의 머리에 겨누는 것: 이것이 바로 중국 파시즘의 정치 및 이른바 '문화'였다."(중공 중앙기관지 <해방일보>, 1946년 5월4일 사설, "오사를 기념하며 민주자유의 투쟁을 관철하라").
이러한 비판의식이 있었기에 중국공산당은 다음과 같은 "장엄한 약속"을 하게 됩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 거주, 이동의 자유권은 중국공산당의 혁명 근거지에서는 예전부터 보호되어 오던 것으로, 차후에도 계속하여 그 기준을 지키며 전진할 것이다", "인민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질 뿐 아니라 자신을 무장할 권리도 가진다. 우리는 인민의 조직과 활동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이 적극적으로 동원되지 않음을 두려워한다."(<해방일보>, 1941년 5월 26일, "확실하게 인민의 권리를 보장하라").
공산당과 국민당의 지식인 쟁탈 투쟁에서 일부 중간파 지식인까지를 포함한 절대다수의 지식인이 결국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는데, 그렇게 되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바로 공산당이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핵심으로 한 민주의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이 결국 인민과 지식인에게 버림받은 이유 또한 그들이 인민과 지식인의 말하고 생각할 자유를 박탈했기 때문이었던 거죠.
대륙을 장악한 뒤 공산당은 자신의 존재기반이기도 했던 그 약속을 잘 이행하는 듯 보였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1954년 제정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속한다"는 원칙을 확인했고, 공민에게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행진, 시위, 거주 및 이동 등의 광범위한 자유를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반드시 인민의 민주를 더욱 발양하여 우리 나라의 민주제도의 규모를 확장시킬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발전은 이러한 법적권리를 한낱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언론 자유라는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정적인 전환이 있었습니다.
- 1955년 5월(헌법 공포 이후 일년도 되지 않아) 발동시킨 이른바 "후펑 반혁명집단" 진압 운동 및 곧이어 전개된 "반혁명 숙청 운동"의 두 운동은 지식인과 일반시민의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한 선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률적인 여론"이란 원칙이 제시되면서, "반혁명"이란 죄명을 마음대로 덮어씌워 공민의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는 헌법에 위배되는 행위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 1956년에는 이른바 "사영 공상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빌미로 사영출판사, 서점, 언론사 등의 전면적인 국영을 단행하여, 뉴스와 출판에 대한 국가의 전방위적이고 엄격한 통제가 시행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언론, 출판의 자유의 경제적 기초를 남김없이 쓸어없앤 조치였다.
1979, 80년의 민주의 벽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에서도 제기된 언론 자유의 요구와 민영출판의 움직임은 덩샤오핑에 의해 불법으로 간주되고 봉쇄되었습니다. 이런 결정을 내릴 때 공산당 내부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민간의 자발적인 조직에 대해 토의할 때 일부에서는 그러한 조직에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후야오방 측에서는 <결사법>과 <출판법>을 제정하여 법률에 따른 관리를 주장했죠.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국민당과 투쟁할 때, 바로 국민당 정부의 출판법을 이용하여 등기하고, 그 출판법의 틈을 파고 들어 합법적으로 투쟁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 틈을 비집고 들어와,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고 합법적인 투쟁의 형식으로 우리와 싸우게 해서는 안 된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체제의 개혁과 민영기업의 발전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민영 출판사와 민간언론은 여전히 허가되지 않고 있습니다. 법치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출판법>, <결사법>, <시위 집회법>의 제정은 도외시하고 있구요. 인터넷의 발전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많아지지 않을까요? 아시다시피 통제수단도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89년의 주된 구호였던 언론의 자유와 반부패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죠.
1957년의 쌍백 시기, 1980년의 민주의 벽, 1989년 천안문 사건.. 외면적으로 별 연관성도 없고 운동의 성격이나 참여자의 분포도, 심지어 진압방식도 다른 세 사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문혁의 고초를 지나온 후 중국의 노작가 바진이 5권에 달하는 <수상록>에서 행했던 반성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참말하기(說眞話; 진실을 말하기)"입니다. 일견 유치원생도 할 수 있는 주장이고, 그래서 똑똑한 비평가들로부터 "초등학교 2,3학년 수준"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죠. 이론이나 개념의 층위에서 보자면 그런 비판이 가능할 겁니다. 그런데 바진은 자신을 시대로부터 분리시켜 객관적으로 그 시대와 체제를 분석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또한 피해자이기 이전에 공모자이고 잘못된 그 시대를 만들어간 사람의 하나임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점점 다른 사람을 따라서 말하게 되고, 결국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이건 아마 거짓말일 거야, 저건 와전된 걸 거야, 그렇게 말하는 건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 같아 라고 의심했지만, 하나 하나 연이어 계속되자 나는 결국 '독립적인 사고'라는 부담을 벗어버려야 가볍게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개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의구심을 가지다가 믿게 되고 참여하고 공모하게 되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느 순간 강을 건너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말하기"의 전제는 잃어버린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논의를 좀 더 진행시키면,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과의 연관 하에서 문혁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기저에 있는 인간의 어두운 면, 2009년 대한민국에서도 현재진행형인 비극을 되돌아보는 반성의 계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첸리췬이 89년 톈안먼 사건에 대한 글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에 관한 역사적 회고를 추궁해 가는 것, 그것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바진의 "참말하기"와 연결되는 것이 아닐까요? 쥐어박힐지도 모르지만 불편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권리, 소수의 용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참말하는 게 가능한 사회, 아직은 요원하죠?
- 이 글은 2009년 5월 10일, "2009 베이징 육사 민주운동 토론회"라는 이름의 비공개 세미나에서 발표된 전 베이징대 교수 첸리췬(錢理群)의<미완성의 역사적 임무>를 근거로 작성되었습니다. 발표 원문은 제목 링크를 따라가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